전출처 : 홍수맘 > 오늘, 단호박 갈치조림은 어떨까요?

오늘은 "단호박 갈치조림"을 올려볼께요.

주재료: 홍수네 갈치(2~3토막), 단호박(1/6),  무(작은것 1토막),양파(1/2), 풋고추,대파(1/4)

양념재료: 고추장(1숟가락),고춧가루(2),간장(1),다진마늘(1),설탕(0.7),다진생강(조금),후춧가루(약간), 소금은(맘대로)


   1.재료들을 씻고, 단호박도 큼직하게 썰고, 양파도 큼직하게 썰고, 대파와 고추도 어슷하게 써세요.

 

 

 

 



  2. 냄비에 무를 깔고, 갈치를 올리고, 단호박,양파,고추,대파 다 올리고 --- 저희는 아이들 먹이려고 당근도 넣었어요.

 

 

 

 



  3. 만들어 놓은 양념장을 골고루 올리고, 물을(2컵정도) 붓고 ---- 원래, 멸치다시마 육수를 넣으면 더 좋은데 제가 좀 귀찮아서 ^ ^;;;;;

 

  4. 자작자작 이 상태에서 처음에는 센 불로놓고 팔팔 끓이다가(5분정도), 불의 세기를 중불이나 약불로 줄여서 뭉근하게 국물이 있게 조려 주세요.

 


 5. 완성된 모습.

 --- 약간 매콤하고 달달해서 저한테는 너무 좋았어요.  단호박도 너무 맛있었구요. 저희, 옆지기는 이런 요리에 소주가 빠질 수 없다고 후다닥 동네 슈퍼에 달려가 한라산 소주를 한병 들고 왔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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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프레이야 > [퍼온글] 빛의 화가 - 모네展


[빛의 화가 : 모네]

전시일정 : 2007년 06월 06일 ~ 2007년 09월 26일
전시장소 : 서울시립미술관 본관2, 3층

 
 

전시회설명 :
오늘날 모네의 명성은 세계적이다. 인상주의 탄생의 주역이었으며 최후의 인상주의자로서 그 누구보다도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인상주의의 신념에 충실했던 그였기에, 미술사에 남긴 그의 족적은 모든 시대를 넘어서 지대하다.

본 전시는 인상주의 미술의 선구자 클로드 모네의 작품세계를 초기부터 말기에 이르는 시기별 대표작품을 통해 선보이는 국내 첫 회고전이다. 빛의 시대를 연 모네의 다양한 풍경 작품과 인상주의의 성서라고 불리는 모네 예술의 진수 <수련>을 통해 근대 미술사의 흐름을 살펴보고 그 주역인 모네 예술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전시이다.

이번 전시는 20여 점에 달하는 <수련> 연작과 지베르니 정원의 풍경을 그린 작품들이 전시의 중심 축을 이룬다. 이들 작품 가운데 길이 3미터의 초대형 작품 두 점과 2미터 크기의 수련 작품들이 집중 전시된다.

이 전시는 연대기적 서술을 탈피하고 모네 예술의 단면을 손쉽게 이해토록 하기 위해 5개의 테마로 구성되었다.
모네 예술의 결정판이라 여겨지는 물위의 풍경: <수련>을 필두로 모네 작품의 주된 소재를 구성하는 초기부터 지베르니에 이르는 다양한 풍경을 그린 센느강과 바다, 모네의 삶의 반을 차지하면서 정원에 서식하는 다양한 수상식물과 풍경을 집요하게 그려낸 지베르니의 정원, 그의 가족을 그린 인물화로 구성된 가족의 초상, 그리고 모네의 눈에 비친 유럽의 풍경을 담은 유럽의 빛이 주된 구성이다



    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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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프레이야 > [퍼온글] * [김훈을 읽는 열가지 코드] (1) 숭고와 비장: "손만 대면 - 황금이 되는 자의 괴로움"

 

* 담론비평(2007. 5. 10)  / "손만 대면 황금이 되는 자의 괴로움"

 

[기획연재: 김훈을 읽는 열가지 코드] (1) 숭고와 비장

 

강성민 학술평론 ksm@dambee.net

 

 

   
 
 
김훈을 읽을 때마다 받는 느낌이 있다. 다들 그랬겠지만 처음은 강렬했다. 하지만 자꾸 읽다보니 형식이 보였고 사유의 문법이 보였다. 그러자 점점 질리게 되었다. 그런데도 스타일에 기대는 자의 한계로 가볍게 치부할 건 아니다 싶었다. 그건 김훈의 개성이기보다는 우리의 감각적 깊이가 닿지 못한 보편적인 것에 대한, 김훈이기 때문에 가능한 말걸기로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숭고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미학용어 숭고(崇高, sublime)와는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고, 대충 말하자면 김훈이 거대한 것에 압도당할 때가 많다는 것, 접근의 한계, 견딤의 한계, 관계맺음의 한계 등 한계가 많다는 것, 사물을 공들여 분석해놓고 그 결과물로부터 시적인 초월을 해버린다는 것, 사람들이 허무주의라고 말하는 그런 태도를 보면서 갖게 된 생각이다.


이렇게 말하니 갑자기 양념간장이 떠오른다. 우리가 깔끔하게 시 한편을 읽거나 대금 연주 같은 걸 듣는다면 조선간장의 깊고 그윽한 맛을 느낄 수 있으리라. 헌데 김훈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상처가 있고 그 상처를 너무 처연하게 바라봐서 진하디 진하지만 끝 맛에서 조미료를 쳤다는 의혹이 묻어난다. 하지만 그 조미료는 모두 천연재료로 즉석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맛도 좋고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그런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김훈의 숭고는 몰아의 경지는 아니다. 그는 이미 예전에 『풍경과 상처』(문학동네, 1994)에서 “나는 자연을 해독하거나 자연을 자아의 일부로 편입시키지 못한다. 나는 거기에 가담하지 못하고, 늘 그 바깥을 서성거린다”라고 말한 바 있다. 김훈은 솔직한 편이다. 앞에서 한 말은 “아득한 염전벌판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다시 아득한 갯벌이 펼쳐지고, 바다는 그 갯벌이 끝나는 곳까지 물러가 있다”라고 말할 때 사실임이 증명된다. 풍경을 내부로 끌어들여 연못처럼 가두지 못하고, 저 멀리 수평선까지 밀어낸다. 그 밀어낸 아득한 거리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말이다. 풍경은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그를 매혹시킨다. 그래서 전군가도(全群街道)의 벚꽃을 보며 그는 “여자 생각”에 쩔쩔 맸던 것이리라. 애초에 여자는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가짜로 가진다고 한들 뭐가 변하겠는가 하는 자의식일 뿐이다.

 

 

 


김훈이 몰입을 못하거나 기피한다면 차라리 비장함을 떠올려야 옳을까. 비장함과 숭고는 둘 다 숨이 턱턱 막히는 감정이란 점에선 똑같지만, 메카니즘이 다르다. 세상과 자아의 불일치나 대립이 자아의 꺾어짐으로 귀결될 때 비장미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김훈은 꺾어지는가. 비장하게 전사해서 연민을 일으키는가. 그렇진 않다. 오히려 날렵하고 현란하게 말(言)에 올라타고 자아와 세계 사이의 그 넓은 공간을 달린다. 그 팽팽한 긴장이 풀어질 때 아마 문필가 김훈도 죽는 것이리라. 하지만 아직까지는 아니다.


김훈 고유의 숭고를 나는 김훈이 누군가를 위해 써준 추천글에서 확인한 적이 있다. 바로 곽의진이라는 소설가인데, 출판저널 기자시절 이 분이 펴낸 『향 따라 여백 찾아가는 길』의 인터뷰를 하러 진도에 내려간 일이 있다. 말이 인터뷰이지 사실은 진도에 한 이틀 가보고 싶어 일부러 그 책을 골랐다는 게 맞다. 진도가 고향인 작가가 서울로 상경해 소설가로 성공해서 애도 낳고 살다가, 소설과 가정을 통째로 버리고 홀로 귀향해서 살다가 고향의 언어와 눈으로 고향을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한땀 두땀 지어낸 책이다. 그는 인터뷰를 대충 마치고 먼 데 까지 온 손님들을 위해 진도 곳곳을 구경시켜 주고, 자기가 친하게 지내는 카페에 가서 커피도 사주고, 옆동네 잔칫집에 데려가 홍어회와 함께 술도 질펀하게 먹여주었다. 그러더니 차를 몰고 산속 깊숙이 지어놓은 자신의 거처로 우리를 데려간다. 산비탈이 간신히 평지를 이루고 있는 곳에 아슬아슬하게 지어놓은 나무집이었다. 마당 바로 앞이 낭떠러지였다. 그래도 바다는 고요하고 잔잔했으며, 달빛에 교교히 물결지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싶었다. 곽 선생의 말이 김훈은 자기와 친구처럼 지낸다고 한다. 그가 진도에 올 때마다 이곳에서 하룻밤은 머문다고 얘기를 전해준다. 김훈과 사진작가 허용무는 진도 돌김을 간장에 찍어 먹으며 홍주를 많이 마셨다고 했다.

 

 


 

김훈은 추천글에서 “이 글의 저자 곽의진이 고향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고향으로 유배당한 자의 삶과 같다. 곽의진은 고향을 유배지로 만들고 그 유배지에서 다시 고향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런 후 그 집 마당을 온통 붉게 칠하는 일몰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나는 이 곳의 풍경을 견딜 수 없다. 그런 장엄한 소멸을 견디어낼 힘이 나에겐 없었다”라고 말이다. 매일매일 세상이 허물어지는 것 같은 전면적인 일몰 앞에서 김훈은 무너졌다. 그러고 보니 그는 너무 자주 장렬하게 전사하는 듯하다. 그러니 비장하기는 비장하다.


최근 펴낸 『남한산성』(학고재, 2007)을 보면 김훈의 숭고성이 전쟁이라는 공간, 그것도 성안에 갇힌 약소국의 예정된 죽음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한 구절을 보자.


“신하는 임금의 몸을 막아서서 죽고, 임금은 종묘의 위패를 끌어안고 죽어도, 들에 살아남은 백성들이 농장기를 들고 일어서서 아비는 아들을 죽인 적을 베고, 아들은 누이를 간음한 적을 찢어서 마침내 사직을 회복하리라는 말은 크고 높았다. 하지만 적들은 이미 임진강을 건넜으므로 그 말의 크기와 높이는 보이지 않았다.”


   
 
 
적은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적을 표상하는 무수한 말도 보이지 않는다. 칸트가 보편적 이성을 정초하기 위해 일부러 물자체를 고안했듯이, 김훈 또한 실존의 명료함을 표현하기 위해 그것을 넘어서는 압도적인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듯하다. 남한산성은 어떤 곳인가. 그 산성은 병자호란 때 대피한 조선왕실이 10만 적군에 둘러싸여 있던 돌로 된 수갑이었다. 조선은 이미 체포된 상태였다. 밖으로 나가 투항할 수도, 구원을 기다리고 앉아있을 수도 없는 상황, 그러나 칸에게 무릎 꿇는 일이 오로지 살 길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들의 내면을 그려놓은 소설이다. 투항은 곧 사는 길이었지만, 투항의 논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그 마음고통을 다시 겪어내는 것에 김훈의 작가정신이 깃들어 있다.


“청병에 대항하여 싸우자”, “아니다 항복함이 최선이다”라고 예조판서 김상헌과 이조판서 최명길이 치열하게 대립하다가 결국 “사흘 뒤에 성을 나가”는 것으로 모든 것이 결판이 난 뒤 최명길은 말한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짓이 없고,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하여 못할 짓이 없는 것이옵니다.” 청나라 측이 저항을 고집한 신하 2명의 목을 베어 올리라고 하자 2명의 젊은 당하관이 자청하고 나섰고, 그 이유를 캐묻다가 왕은 쓰러져 운다. 그 때 최명길은 다시 말한다. “군신이 함께 삼전도로 가더라도 전하의 길이 있고, 저 두 사람의 길이 따로 있는 것이옵니다. 그리고 전하, 먼 후일에 그 두 길이 합쳐질 것이옵니다.”


김훈은 최명길이 사직을 보호하기 위해 총대를 멨다는 것을 분명히 묘사하고자 한다. 최명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홀로 적진을 뚫고 최초로 교섭하러 갈 수 있었다. 항복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했지만 아무도 그 주장을 하지 않았기에 최명길이 입을 열었다고 보는 것이다.


김훈은 한국일보 기자시절 군사정권의 용비어천가를 썼다. “니가 글을 잘 쓰니 니가 써라”고 위에서 요구했고, “그래 내가 쓴다”라고 김훈은 썼다. 그가 쓴 정권찬양 기사는 데스크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활자화되었다. 그들의 책임까지 몽땅 김훈이 떠안았다. 하지만 총대를 메었다고 그게 무슨 영웅의 행위는 아닌 것. 언론인으로서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고, 김훈은 그것이 치욕스럽다고 수시로 말해왔다. 하지만 그런 행위에 대해 사죄하기보다는 그냥 치욕을 끌어안고 살겠다고 또한 말해왔다.


그렇다면 남한산성의 최명길은 누구인가. 백관이 입을 모아 장렬히 싸우자고 머리를 땅에 박으며 합창을 할 때 오직 최명길 혼자 항복을 주장했다. 그렇다고 최명길이 강경일변도였던 예판 김상헌을 덜떨어진 인간으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최명길은 예판과 끈질긴 논리대결을 벌인 뒤에도 “일 리가 있는 말씀이다”라고 혼잣말을 했다. 다만 인간으로서, 왕을 모신 신하로서 그 상황에서 취할 최선의 행동원칙을 정하고 밀어붙였을 따름이다. 김훈은 자기 또한 그런 심정으로 곡필을 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소설 『남한산성』은 이러한 김훈의 자전적 에피소드 위에 특유의 비단결처럼 유장한 문체로 내려앉으면서 더욱 굳게 입을 다무는 듯하다.


이렇게 써놓고 나니 ‘남성적 숭고’라는 느낌도 살짝 든다. 루카치가 소설은 성숙한 남성의 문학양식이라 말했던 것은 소설가가 비극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김훈은 천상병 시인의 정치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추방된 자리에서, 자신을 쫓아내버린 세계와 대칭되는 존재의 삶을 영롱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 천상병의 정치의식이다.” 이 대목을 김훈은 혹시 자신의 글쓰기가 생에 대한 과장된 제스처인지, 아니면 필연적인 정치의식의 소산인지를 떠올렸을까, 떠올리지 않았을까.


가령 『칼의 노래』는 자신을 겨누고 있는 왕의 칼과 왜구의 칼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한 외로운 장군의 얘기다. 이순신은 교활한 선조의 칼을 받을 수는 없었다. 이순신은 “적의 적으로서 살거나 죽어야지 왕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함을 참을 수 없었”으며 “왕의 칼이 닿을 수 없는 곳에 나의 충이 세워지길 바란다”고 했다. 김훈은 ‘쾌도난담’ 사태로 자질 여론이 일자 시사저널에 사표를 던지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 내 30년 기자생활을 오욕으로 마무리하자.”자폐적인 태도로 비치기도 하지만, 그에겐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그는 이순신을 복원하면서 “내면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나와 이순신을 동일시했다.” 이미 10년 전부터 김훈은 “벗이여, 나는 3인칭으로 글을 쓸 수가 없네. 앞으로도 한동안 그럴 것이네”라고 해왔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가 되는 발언이다. 그렇다면 왕의 칼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김훈을 몰아세웠던 그 여론이 아니었을까. 그는 노회하고도 교활한 여론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칼을 꽂았고, 아무도 해내지 못한 그 일에 대한 나름의 만족감을 흘려왔다.


 

 

 

하지만 나는 김훈이 역사를 호출해서 자신을 변호한 정치인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개인의 실존적 고뇌와 고통스러운 결단을 역사에 기대서 표현했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러니 『칼의 노래』는 역사소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우의소설(寓意小說)이다. 이것은 『현의 노래』의 우륵에게로 거의 유사하게 이어졌는데 연대기적으로 정리하자면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으로 이어지는 사극들은 김훈 내면의 알레고리인 셈이다.


이런 그의 세계관이 늙은 여성으로 확장된 것이 「언니의 폐경」이고 사랑이라는 인간의 감정으로 형상화된 것이 「火葬」이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남한산성』을 통해 김훈은 다시 자기 이야기로 돌아온 셈이 됐지만, 그 이전에 이미 그는 타인들의 삶을 글로서 많이 어루만진 바 있다. 그래서 김훈을 미워할 수가 없다. 저 멀리 『내가 읽은 책과 세상』에 나오는 마성역장 박창하 씨, 토박이농부 정진호 씨, 금속장인 김인태 씨, 간이음식점 주인 심동순 씨 등과 같은 보통사람들, 『원형의 섬 진도』(이레, 2001)에 나오는 사라져가는 농꾼, 춤꾼, 소리꾼, 무인(巫人)들의 삶은 김훈에 의해 하나의 작품으로 빚어진다.


 

 

 

이처럼 그는 자기에게만큼 타인에게도 애정을 베푸는데 거기서 발생하는 장점이자 단점 중의 하나는 손만 대면 작품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데에 있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독특하고 깊이 있는 북 리뷰로 필명을 떨치고 있는 ‘로쟈’라는 분은 김훈의 문체가 기본적으로 에세이스트의 것이고 소설가의 문체는 아니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그 이유는 아름다워도 적당히 아름다워야지 너무 아름다우면 소설이 안 된다는 데 있었다. 평범한 것도 김훈이 묘사하면 평범함의 극단이 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공감이 가는 지적이라 해두고 싶다.

이 글은 월간 '인물과사상' 6월호에 실릴 예정인 '탈아카데미 저자열전-김훈편' 총 6개 챕터 중 첫번째 챕터를 떼어 내어 확장한 것입니다. 담비에서는 앞으로 김훈을 10가지 코드로 읽어내는 글을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 편집자주

* '숭고'(sublime)이라는 개념을 접하면서 단번에 떠오른 책은 몇 권이 된다. 그런데 '비장'이라는 개념을 적절히 풀고 있는 책들은 그렇지가 못해서 조금 아쉽다. 덧붙여 '로쟈' 님은 알라딘의 스타를 넘어 오프라인에서도 스타로서 공인받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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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프레이야 > 2007년 4월 아이들과 함께 읽은 책

1.

  초등 1.2 권장.

  하얀 토끼가 되고 싶은 까만 토끼 / 강원희 글 / 문공사

  편견에 대한 생각, 입양에 대한 생각을 나누어 볼 수 있는 재미있는 동화

 

2.

 초등 1.2 권장

 마티유의 까만색 세상 / 질 티보 / 어린이작가정신 / 외국창작

 시각장애우 어린이가 온몸으로 느끼는 세상. 편견과 차별에 대한 생각 나누기

 

3.

 초등 2, 3 권장

 사라, 버스를 타다 / 윌리엄 밀러 / 사계절 / 외국창작

 미국 흑인차별법(짐 크로우 법)을 없앤 용기있는 소녀의 이야기가 잔잔한 감동

                             

 

4.

 초등 3 권장

 고추 떨어지면 어떡해 / 양지숙 / 삼성당 / 국내창작

 성역할에 대한 생각 나누기

 

5.

 초등 3, 4 권장

 양파의 왕따 일기 / 문선이 / 파랑새어린이 / 국내창작

 누구나 왕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용기있게 대처하고 주체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자신감을 줌.

 

6.

 초등 4 권장

 수학 첫발 / 이영민 / 문공사 / 수리

 수학의 기본 개념을 이야기로 쉽게 풀어줌

 

7.

 초등 5 권장

 팽이꽃

 한혜영 / 교학사 / 국내창작

 

 

8.

 초등 5 권장

 수학파티

 조윤동 / 휘슬러 / 수리

 

 

9.

 초등 6 권장

 내 친구에게 생긴 일

 미라 로베 / 크레용하우스 / 외국창작

 

 

10.

 초등 6 권장

 어린이를 위한 우리 겨레 수학 이야기

 안소정 / 산하 / 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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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프레이야 > [퍼온글] 김훈은 '난 아무 편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김훈 世說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김훈,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생각의 나무*2003)

오랫동안 기자생활을 했던 김훈이 소설을 쓴다고 했을 때 한 비평가는 '그의 문체가 소설에 적합하겠느냐'라는 의문을 제기했다고 한다. 기자로서의 글쓰기와 소설가로서의 글쓰기는 엄연히 다른 영역이라는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글쎄. 솔직히 난 김훈의 '기사'를 본 적이 없다. 내가 처음 접한 김훈의 글은 <강산무진>이었다. 김훈의 몇몇 소설을 뒤적이고 또 이 책을 본 후에, 난 위의 비평가와는 전혀 반대의 의문을 가졌다. '이런 식의 사고와 문체로 과연 김훈이 기자적 글쓰기를 할 수 있었겠느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컨대 뒤늦게 읽은 김훈의 글에는 뭐랄까, 기자로서 요구되는 '벼린 이성'보다는 '축축한 감정'이 묻어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는 편집자와의 상의 끝에 원래 제목이었던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를 수정한 제목이라고 한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곱씹을수록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제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걸 두고 제목에 '낚였다'라는 표현을 쓰는가 보다, 했다.   

 

<기자로 산다는 것·호미출판사>에서 스치듯 김훈의 과거사를 전해 듣고, 난 그가 궁금해졌다. 부끄러운 과거 덮기에 급급한 한국 지식인 지형에서 자신의 치부를 손수 밝히고자 했던 사람이 하는 얘기가 듣고 싶어졌다. 게다가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라는 도발적 표제를 건, 김훈이 말하는 세설(世說)이라니. 알라딘으로부터 택배가 도착하기 전부터 난 조바심이 났다.  

그에게 붙은, 그를 가장 단선적으로 보여주는 수식어는 바로 ‘문장가’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간결한 문체와 그 사이에 드문드문 배치하는 만연체는 글의 전체 맥락 속에 적절히 혼용돼 읽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책머리에>라는 책의 첫 장부터 그의 칼날 같은 문장이 나를 압도한다. “세상은 읽혀지거나 설명되는 곳이 아니고, 다만 살아낼 수밖에 없을 터이다. 나는 미리 설정한 사유의 틀 속으로 세상을 편입시킬 수는 없었다. 나는 내 글의 계통 없음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여러 사람들이 흘린 액즙과 고름이 서로 섞이고 스미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것은 어찌 그리 어려운 일이었던지. 몸이 가장 부대끼는 날에, 가장 곤고한 글을 나는 썼다.” 이 책에 실린 많은 세설 중 가장 압권으로 문화일보가 소개한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의 일부를 보자. “내가 아들인 너의 눈치를 보면서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 너는 결국 너의 그 별것도 아닌 평발 증세를 너의 어머니께 강조하면서 재심받을 방법을 찾아달라고 말했다. 나와 너의 어머니는 다만 무력하게 한숨을 쉴 뿐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가 없었다. 너를 낳아서 청년이 되도록 길렀으며, 남자로 태어나 함께 병역의 의무를 진 내가 너에게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며, 이 나라의 어느 아버지가 징집을 앞둔 아들에게 이 사태를 납득시킬 수 있겠는가. 병역은 남자로 태어난 국민의 가장 신성하고 가장 도덕적인 의무라고 말한들 이미 더럽혀지고 허물어진 신성 앞에서 그 말이 무슨 씨가 먹힐 것인가. (중략) 너의 어머니에게 다시는 너의 평발을 내밀지 말아라. 아프고 괴롭겠지만, 나라의 더 큰 운명을 긍정하는 사내가 되거라. 네가 긍정해야 할 나라의 운명은 너와 동년배인 동족 청년과 대치하는 전선으로 가야 하는 일이다. 가서, 대통령보다도 국회의원보다도, 그리고 애국을 말하기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보다도 더 진실한 병장이 되어라.”(pp.18-20) 

그러나 김훈의 미사여구에 갖혀 그의 문체에만 주목하는 것은 오랜 기간 기자로 재직하며 쌓았던 그의 내공을 폄훼하는 일이 될 것이다. 사실 글 쓰는 재주야 하늘이 내려주신 선험적 재능이라 볼 수도 있어 그의 필력에만 평가가 집중하는 건 ‘주례사비평’스러운 경향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에 실린 글은 세상살이에 대한 김훈의 사색을 훔쳐볼 수 있어 그의 내면을 보다 깊이 들여다 볼 기회를 제공한다. 

 

김훈식 글쓰기를 말할 때 빼놓지 않고 나오는 게 바로 '아날로그적 글쓰기'다.

그는 여지껏 컴퓨터 자판에 익숙치 않아, 400자 원고지에 연필로 꾸역꾸역 문장을 만들어 나간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의 집필 공간엔 잔뜩 구겨진 원고지와 지우개 가루가 어지러히 널려 있다고 한다.

사실 글쓰기를 업으로 자임한 자가 만드는 문장 하나하나는 몇번을 고쳐쓰고 지워쓰는, 산고의 고통을 거치는 게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글이란 본디 '볼펜'보다는 '연필'로, 좀 더 투쟁적으로는 '몽당연필'로 써야 맞다.


 

‘너는 어느 쪽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김훈의 대답은 자못 분명하다. ‘난 아무편도 아니다’가 그가 유일하게 밟고 있는 사유의 방향성이다. 앞서 소개한대로 그는 그의 ‘계통없음’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거니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도 그의 ‘아무편도 아님’은 쉽게 읽힌다. “나는 개별적 삶의 구체성을 배반하거나 천대하거나 또는 그것을 추상화해 버리는 모든 이론과 정책은 모두 사기극이라고 믿는다. 도덕은 인간의 개별성과 개별적 존재의 구체성 위에서 논의될 수 있을 뿐이다.”(p.78) "정의로운 언설이 모자라서 세상이 이 지경인 것은 아니다. 지금 정의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약육강식의 질서를 완성해 가는 이 합리주의의 정글 속에서 정의로운 언어는 쓰레기처럼 넘쳐난다.“(p.76) "나는 보편과 객관을 걷어치우고 집단의 정의를 조롱해 가면서 나 자신의 편애와 편견을 향하여 만신창이로 나아갈 것이다.”(p.76)  

그가 잣대로 삼는 유일한 사유의 기초는 바로 ‘삶의 구체성’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먹고 사는 일’을 고려하는 것부터 그의 사유가 전개된다. 예컨대 <돈과 밥으로 삶은 정당해야 한다>에서 아들에게 하는 다음과 같은 충고들, “아들아, 사내의 삶은 쉽지 않다.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돈과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주접을 떨지 말라. 사내의 삶이란, 어처구니없게도 간단한 것이다. 어려운 말 하지 않겠다. 쉬운 말을 비틀어서 어렵게 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그걸로 밥을 다 먹는 자들도 있는데, 그 또한 밥에 관한 일인지라 하는 수 없다. 다만 연민스러울 뿐이다.”(p.13)를 보고 있노라면 그가 ‘밥을 먹고 돈을 버는’ 인간의 기초 행위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내가 일자리를 잃고 내 처자식의 밥 세 끼를 포기해야 하는 것, 이것이 도대체 ‘개혁’이란 말인가."(p.31) 그리고 그의 이러한 기본적 삶에 대한 집착은 곤궁하게 살아온 지난 세월의 대한민국의 기억으로부터 비롯된 듯 보인다. “(한국전쟁 당시) 열차 지붕 위에 실려서 부산까지 내려갔던 세 살 먹은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이 글을 쓴다. 피난지에서 자라난 유년은 하루 종일 배가 고팠고 1년 내내 배가 고팠다.”(p.21) 혹은 오랜기간 기자 생활을 하며 부딪힌 사건들, 사람들의 양면성과 이면성을 몸으로 체득하며 얻은 심성일 수도 있겠다. “미리 설정된 사유의 틀이나 논리의 질서 속에 이 복잡하고 중층적인 세계를 강제로 편입시켜서 일사불란한 논리를 전개하는 언론행위는 별 가치가 없어 보인다.”(p.92) 

난 김훈의 계통없음이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대단히 용기 있는 커밍아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말처럼 이 세상은 너무도 ‘복잡하고 중층적’이어서, 한 가지 틀로 명쾌히 설명하는 언설은 이제 흰소리로 느껴진다. 다만 이 책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잣대의 무의미함’이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삶의 모든 부분을 인정하는 ‘절대적 상대주의’의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언급해 둔다. 또한 지나친 허무주의로 인해 극단적 부정의 냉소주의를 보여주기도 한다. “젊은 날의 말을 되돌아보는 두려움이 98년의 저물녘에 되살아난다. 말들은 허상 만들기로 싸우고 허상 위에서만 타협이 가능하다. 결국 당대의 현실은 당대에서 말하여지지 않는다. 들끓고 날뛰고 날아오르는 말들이 당대의 결핍이며 빈곤이다. 신기루는 점점 두꺼워진다.”(p.66) "어느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고위관리가 ‘그것(IMF)은 나의 책임이고, 내가 책임지겠다’라고 책임을 자인하고 나섰다 한들 그 말이 그 말이다. ‘책임이 없다’는 말이나 ‘책임을 지겠다’는 말이나 그 말이 그 말인 것이고 하나마나한 소리이고 들으나마나한 소리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무의미하고 무내용하다. 왜냐하면 그가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책임을 질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p.35)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가득 차 있다’ 나 ‘천국으로 가는 길은 악의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의 ‘계통없음’을 삶의 구체성에 천착하는 방식으로 이해해야지, 삶의 갖가지 핑계거리를 용인하는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초로(初老)라 부르지만, 이제 이순(耳順)에 가까워져 오는 그가 보여주는 ‘글’에 대한 집념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글이란 ‘왜 쓰는가’에 대답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글을 쓰는 일은 이 생기발랄한 몸의 살아 있음을 입증하는 과정이다. 이 몸이 언어를 통해서 이미지에 가닿을 때 그의 글을 가장 빛나는 문장을 이룬다. 문체는 몸의 일이다. 몸이 이미지에 맞는 가장 정확한 문체를 포착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몸이 술과 담배에 절어 있어서는 끝장이다. 이 몸에 포즈가 배어 있어서는 다 끝난 것이다.”(p.203) 매일 이 핑계, 저 핑계에 절주, 금연 선언을 번복만 하기에 바쁜 나로썬 얼굴 홧홧 거리게 만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난 몸을 부릴 대로 부려야 사유가 번뜩이는, 젓 비린내 여지껏 가시지 않은 20대가 아니던가. 이런 내가 ‘술과 담배에 절어 있어서는 끝장이다.’ 지금부터 다시 금연이다.   

문체는 몸의 일이다.

몸이 이미지에 맞는 가장 정확한 문체를 포착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몸이 술과 담배에 절어 있어서는 끝장이다.

이 몸에 포즈가 배어 있어서는 다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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