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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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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서 - 그렇다고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많지는 않지만 - 지나온 삶을 생각해보면 어딘가 터닝포인트처럼 느껴지는 때가 몇 군데 있다. 예를 들어서 그 어릴 때, 내가 훨씬 당당하게 대처했다면 지금의 나는 아마 전혀 다른 삶으로 방향이 틀어졌을테고, 좀 더 지나서 만난 첫 번째 여자친구와 좀 더 관계가 지속되었다면, 그래서 그녀와 결혼을 할 수 있었다면 - 물론 그녀는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 아마도 또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며, 이건 가장 최근의 일인데, 몬티 홀 문제 (다들 알겠지만 이 문제는 이런 것이다 : 무대 앞에 진행자가 서 있고, 당신은 그 진행자를 마주하고 있다. 진행자는 앞에 세 개의 문을 보여주며, 세 개의 문 중 하나는 다이아몬드에게, 다른 문들은 닭이라던가 기타 등등 당신을 허무하게 만들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좋은 물건들에게 다다르게 해주리라는 것을 알린다. 그러고는 당신에게 선택을 하게 만든다. 당신이 하나를 선택한 순간 그는 남은 두 개의 문 중 하나를 열어 다이아몬드가 그 문에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진행자는 당신에게 묻는다 : 당신은 이제 남은 두 문 앞에서 당신이 고른 문을 믿을 것인지, 아니면 바꿀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앞에 마주치게 된 나는 결국 문을 바꾸는 선택을 했고, 논리적으로는 문을 바꾸는게 옳은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후회와 상처가 깊이 남아 버렸다.

 

뭐, 여담이지만 저 문제를 마주치게 된 사람은 문을 바꾸는게 맞다. 확률적으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률이라는 것은 참 묘해서 당신이 뒤통수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당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버린다. 그녀는 - 그래, 저 문제도 연애때문에 마주친 문제였었다 - 상처를 줄만큼 준 뒤에 나에게 기다리라고 말했고, 나는 그녀가 정말로 내가 싫다면 헤어지자고 이야기하라고 말했다. 도저히 나는 내 입으로는 헤어지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날 저녁의 전화를 기억한다. 몇 번의 한숨, 그리고 몇 분의 침묵. 한숨은 하얗게 방을 물들였고 침묵은 까맣게 내 맘을 물들였다. 무슨 말을 들어도 나는 참으리라. 우리가 정말 여기까지라면 웃으며 안녕, 더이상 그녀에게 매달리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녀는 입을 떼었다.

 

"오빠랑, 헤어진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어요."

 

난 순간 울컥했고 - 나만큼이나 그녀도 우리 관계가 헤어지지 않을 그 무엇이라는 것을 인지한다는 점에 너무 행복했었고, 못내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그 무엇인가는 입에서 울음으로 터져나왔다. 울음이 계속되는 순간, 그녀는 바로 말을 이었다. 오빠, 울지말아요. 오빠가 울면 나,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나도 오빠를.. 음, 좋아하니까, 오빠가 울면 오빠를 달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울음을 멈추고 내 이야기를 들어줘요.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상황이 너무나 안좋아서 그저 나보고 기다려달라고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만 정말 오래 기다리게 할 수 밖에 없으니, 그 사이에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어도 뭐라고 하지는 않을 거라고. 나는 반쯤 우는 얼굴과 반쯤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은 없을거라고, 너를 기다리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약속해놓고 기다리지 않았다면 나는 나쁜 놈이 되었겠지만, 나는 끝끝내 그 기간을 채워서 기다렸고, 근근히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거라는 기대만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정말 그 소망만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서 생겼다. 원래 나는 한달에 한 번씩 기약없는 - 답장도 거의 없는 - 연락을 마치 유리병을 멀리 띄우듯 보냈었는데, 그 유리병이 닿은듯 그녀가 갑자기 나에게 연락을 취해오더니 너무 힘들다고, 자기가 생각했던것 보다 더 일이 안풀린다고 이야기해왔다. 나는 그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감정이 너무 격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순간 나는, 무작정 차를 몰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밤길을 뚫고 있었다. 그때서야 그녀는 항상 이렇게 무작정 찾아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리고, 이런, 지금 가봤자 그녀가 나를 환대하지도 않을텐데, 그냥 모른척 돌아가는게 좋을까, 생각했었다.

 

바로 이 부분이 터닝 포인트인데, 만약에 이때 내가 돌아갔다면, 나는 어쩌면 결국에는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때의 나는 마치 하데스의 영역을 탈출하는 오르페우스같았고, 기어코 그녀를 향해 뒤를 돌아보고야 말았다. 오르페우스이야기에서는 오르페우스의 아내가 명계로 다시 끌려갔으나, 이번에는 내가 깊은 심연으로 굴러 떨어지고야 말았다. 그녀를 만나고, 그녀와 다투고 결국 다시는 만날 일 없을 거라고, 서로 감정이 상한채 끝나고야 말았다. 헤어지게 된 뒤 나는 문을 바꾸기를 잘했노라고, 더 빨리했다면 시간도 날리지 않고 감정도 서로 상하지 않았을텐데, 라고 몇 번이고 입 밖에 내어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 그녀는 나를 정말로 싫어하는 것 처럼 흘겨보고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편으로는 차라리 내가 더 져줄걸, 더 기다릴 걸,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녀는 나에게 정말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녀의 말대로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상처는 전혀 아물지 않고 더 넓어지기만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녀만이 내 상처를 치료해줄 존재였고, 아직도 상처는 뼈에 붙은 살점처럼 덜렁거리며 핏방울을 주변에 뿌리고 있기에 이렇게 그녀를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말이다, 여기서부터가 재미있는 부분인데, 만약에 백번 양보해서 그녀와 다시 사귀게 되었다고 하자. 그럼 그녀는 과연 내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을까? 아마 이 부분때문에 수많은 커플들이 다시 사귀고 다시 이별하게 되리라. 그래서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지평, 에서는 끝끝내 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회귀하는 부분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기대가 반, 걱정이 반이다.

 

지평, 의 주인공 보스망스는 나중에야 소설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되지만, 스무살에는 뭐하나 확실한 것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그가 소설가가 될지도 모른다, 라는 그런 맹아는 물론 그의 삶속에 있었지만, 누구나 그렇듯 맹아만 보고는 그 식물이 자라서 무엇이 될지는 모른다. 어쩌면 그도 수많은 갈림길 중에서 한 군데만 길을 다르게 들었다면, 그가 원했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여주인공인 마르가레트라고 해서 다를 바 없었는데, 그녀는 부아야발, 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를 무작정 피하며 달아나고만 있었고, 결국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흘러흘러 파리로 떠밀려 오게 되었다. 

 

그들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도시에서 서로에게 갑자기 끌렸다고 해서, 그 만남을 운명이라는 이름을 써서 포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 누구나 외로울때는 옆에 사람을 찾게 되니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만남은 마치 도망자처럼 흘러들어온 두 사람에게는 빛과 같았을 것이다. 그들이 서로를 만나지 않았다고 해서 도시에서 버텨서 살지 못했으리라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또다른 인간관계를 찾았을 것이고 - 만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 결국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도시의 이면에 숨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만남이 그들에게 가져다 준 것은 지평이다. 삶에 대한 지평. 남자는 여자를 만나서 이 도시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여자의 두려움을 해소시킨다. 그러니까, 서로의 만남이 그들에게는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하지만 그 만남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나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이런 지점을 만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택한 선택은 결국 나와 다를 바 없게 끝났고,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마르게르트가 보모로 들어간 집에서 소동이 벌어졌고, 그 소동에 휘말리게 된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는 편을 선택한다. 여기서 그녀는 마치 보스망스가 자신을 뒤돌아보았던 것 처럼 그의 눈 앞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녀는 다시 심연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소설가가 된 그는 떠밀려 만나는 게 아닌, 자신의 의지로 그녀를 만나기로 결심한다. 그 옛날 마르가레트를 두고 오르페우스가 된 심정으로 뒤돌아섰던 그는 다시 오르페우스가 되어 마르가레트를 만나러 심연 속으로 뛰어든다. 도시를 깊고 깊은 어둠으로 본다면, 성공한 소설가가 되어 도시에 적응한 보스망스는 그 어둠을 휘감게 된 인물이리라. 그가 심연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이제 그에게 자연스럽다. 그래서 이제 내 머릿속의 주인공과 여주인공은 다시 만나서 결혼하게 되고, 남은 인생이나마 둘이서 함께 살아가게 된다. 어쩌면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결국 죽음을 맞이한 오르페우스는 낙원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 낙원에서 자신의 아내인 에우리디케를 다시 만나게 된다. 이때의 일을 오비디우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어설프지만 잠깐 번역해보겠다.

 

그들은 낙원에서 함께 걷는다, 이제 에우리디케가 앞서서 걸어가고 그가 따라걷는다. 이번엔 오르페우스가 앞서서 걸어가면서 그녀를 향하여 몇 번이고 뒤돌아본다. 이제는 뒤돌아보더라도 사라지지 않고 그의 곁에 있으니까.

 

Ovid, The metamorphoses XI, The death of Orphe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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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2-02 16:39   좋아요 0 | URL
지평, 을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가연님.
지평 만큼 좋은 리뷰에요. 몰입해서 읽었어요.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가면서 읽었습니다.

희선 2015-02-03 01:58   좋아요 0 | URL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다른 세계를 만나는 것과 같기도 할 테죠 그건 이성이 아닐지라도 그렇겠죠 헤어졌다 해도 그 만남이 안 좋았던 것은 아닐 거예요 이런 교과서 같은 말을... 자신이 그런 일을 겪는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 없겠지만, 소설을 보고는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죠


희선
 
생각의 지도 - 진중권의 철학 에세이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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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시간 전에 이 책을 다 읽었다. 따라서 이 리뷰는 갓 읽은 책에 대한 따끈따끈한 리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오븐에서 갓 구어낸 빵을 설명하는 것 처럼 말이다. 이 책의 경우에는 다 읽는데 두 시간 정도 걸렸다. 4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책이긴 한데,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분량이 짧은 것도 있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읽는데 짧게 걸린 편이다. 요즘 붙들고 있는 책들이 워낙 진도가 안나가서 나는 내가 읽는 속도가 많이 느려진 줄 알았다. 그런데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다.

 

몇 가지 지적하자면,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대해서 해석이 이상한 부분이 있다. 이 책에서 들뢰즈와 라캉이 워낙 많이 나오기에, 그 두 축 중 하나를 이루는 라캉에 대한 엄밀성이 부족하다면 책 전체의 신뢰성이 많이 떨어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것은 라캉의 거울단계에 대한 저자의 해석인데, 이 거울단계는 아기가 파편화된 자신의 육체를 거울로 비춰보면서 일종의 통일성을 찾아나가는 단계이다. 그런데 저자는 외모에 대한 글에서 아기는 거울의 완전한 상과 동일시하여 상상계 속으로 들어간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외부에서 본 아기의 모습이 아기 자신이 느끼는 것 처럼 파편화되어있는가, 그러니까 아기의 팔이 다른 곳에 떨어져있고 다리가 구부러져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아니다, 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부연하자면 아기는 거울단계를 통하여 불완전한 아기가 완전한 상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단계를 통하여 이미 상징적(사회적)으로는 완전하지만 본인은 그렇다는 것을 모르는 아기가 상상계의 단계로 접어들면서 완전한 상을 획득한다고 보아야 한다. 단순히 저자가 말하는 것 처럼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접어들고, 그 사이에 간극이 있는 그런 상태라 보기 어렵다. 

 

실재에 대한 해석도 의아하다. 실재는 불안으로 가득찬 곳이지 저자의 말대로 touch를 불러일이키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상징체계로도 편입되지 않는 장 뤽 낭시의 감각의 터치, 라고 말할때의 저 '상징'은 라캉에서의 '상징'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상징체계에 균열을 내는 장 뤽 낭시의 파편, 또한 라캉에서의 실재의 파편이 아니다. 우리가 만약에 실재의 파편을 보게 된다면 감동touch가 아니라 두려움 - 어쩌면 이 또한 일종의 감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 그리고 불안감을 느낄 것이다.

 

다만 제목은 참 마음에 드는데, 서문에 저자는 몽타주로서 자신의 짤막한 사유가 적혀진다면 그것이 바로 약도, 지도에 가깝다고 적는다. 그리하여 생각의 지도, 라는 제목이 나왔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이 책을 완벽히 규정해주는 말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또 마음에 드는 부분은 진보에 대하여 이야기한 부분과 종교에 대하여 이야기한 부분이다.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저자는 이성적인 사고의 화신이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다. 저자는 소수에 속하는 것을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가 좋든 나쁘든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의 이름에 오르내리는데, 그리하여 군중속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한 지식인이라고 본다면, 모순적이지만 소수에 속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런 용기가 그에게 군중속 지식인으로서의 명성을 가져다 주지 않았을까.

 

지나치게 많은 사상가들의 이름이 나오는 것만 빼면 - 하나의 글에 적어도 서넛은 있는데, 예를 들자면 첫번째 글인 델포이의 신탁의 경우 글이 막바지에 이르면 각 문단마다 사상가가 하나씩 튀어나오는 (첫 문단부터 마지막문단까지 각각 데카르트, 하이데거, 푸코) 위엄을 자랑한다 - 이 책은 나무랄데없는 타임-킬링용 책이다. 저자가 이 책 안에서 자기 책을 빌려서 읽는 독자들을 (거기에 더하여 자기 책을 빌려보면서 비난? 혹은 비판하는 독자들을) 디스했으니 왠만하면 책을 사서 읽어주도록하자. 아, 물론 나는 반값할인이라 구입해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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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한글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19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허승진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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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의 괴테를 떠올리면서 과학자를 떠올리는 사람은 지금은 거의 없으리라. 하지만 실제로는 어설픈 과학자였던 그는 자신 나름대로 색채론과 광학에 대하여 무언가 이론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고,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론을 조직해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자신이 맞는 이론을 세운것인지, 혹은 그른 이론을 세운 것인지조차 알아낼 수가 없었고, 결국 그는 아마추어 과학자로도 당대에 이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과학의 세계에서는 사실은 당신이 부정하는 동안에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사라진 스푼' 이라는 주기율표에 관한 멋진 저작을 쓴 샘 킨은 괴테에 대하여 이렇게 일침한다 : 결국 그가 과학에 어떤 이바지를 했다면 적어도 사람보는 눈은 있어서 과학 교수자리에 제대로 된 사람을 추천했다는 것이 될 것이리라. 결국 그는 데카르트나 - 좌표 체계의 고안 - 라이프니츠 - 미분법 - 같은 부류의 사람은 영영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괴테는 라이프니츠가 수학과 철학에서 이룬 만큼의 성취를 문학에서 이루어내었다. 파우스트,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등등, 당시의 시대상을 집약하고 그 자신의 사상을 제대로 녹인 대작들을 몇 편이나 연달아 써내려갔었던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은 그런 그의 초기작인데, 이 작품으로 괴테는 상당한 명성을 얻고, 또한 그만큼이나 상당한 비난을 받았다. 젊은이들의 사랑이라는 격정적인 감정을 서간문 형식의 소설에 잘 녹여냄으로써 그는 젊은이들에게 명성을 얻었고 - 저 나폴레옹도 그렇게 이 작품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 그만큼이나 다른 의무를 방기하고 사랑에 빠진 모습을 보인 '추태'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개탄을 금치 못했으니 당시의 문제작이라고 할만하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 작품은 불멸의 생명을 얻었고, 그렇게 불멸을 얻게 된 까닭이 그 '추태' 때문이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아니, 아이러니한게 아니다. 세대를 초월하는 인간 본연의 감정인 사랑때문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것일수도 있겠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은 친구 빌헬름에게 베르테르가 편지를 쓰면서 시작한다. 전체적인 형식은 외부에 우리 독자가 있고, 작품의 가장 바깥쪽 껍질에 소설속의 소설의 편집자가 존재하고, 그 안쪽 껍질에 빌헬름 등에게 보낸 편지가 존재하며, 가장 내부에 베르테르가 존재한다. 정리하자면 이 소설 자체는 마치 가상소설로, 실제 베르테르라는 사람이 존재했던것 처럼 그의 서간집을 모아서 펴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현실의 괴테에게는 베르테르의 모티프가 된 인물들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일수도 있을 것이고, 자살한 그의 친구 예루살렘의 이야기일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베르테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고, 이 점을 유념해야만 우리가 베르테르의 감정에 지나치게 이입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리라.

 

아니, 소설의 목적이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여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아닌가? 라고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인물들, 당대의 나폴레옹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일종의 연애소설로만 읽었고, 그래서 실제로 괴테를 만났을때 이런 저런 말들을 했다고 한다. 주인공의 연애사에 관련없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닌가, 라고. 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베르테르의 슬픔, 에 대한 다른 독법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몇 가지 독법이 섞여 있고 - 정신분석학적인 요소, 마르크스적인 요소, 여성주의적 요소 - 그로 인하여 단순히 연애이야기로만 보일법한 소설이 어떻게 탈바꿈되는지 흥미롭게 주시할 수 있으리라.

 

이 이야기의 기본 얼개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이 어느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알고보니 그 여자는 약혼자가 있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그녀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포기할 수 없어서 그녀의 곁을 맴돌다가 결국에는 비극적인 최후로 달려가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먼저 던질 수 있다. 주인공은 그녀, 로테를 사랑했는가? 이를 위하여 우리는 사랑, 이라는 것의 정의를 먼저 내려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헤겔사전', 의 정의를 빌려오자. 도서출판 b에서 나온 헤겔사전에서는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타자 안에서의 자기 내 삶" 이는 무슨 말인가, 하니 "인격성을 포기하고도 자립적이라는 변증법적 모순의 감정" 이라고 한다. 참으로 헤겔다운 사랑의 정의이다. 그러나 변증법적인 모순의 감정, 이라는 말은 놓아두고서라도 앞의 문장은 되새길만한 가치가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상대방 안에서 내가 살아간다는 말이니 말이다. 그런 상황을 위하여 자신은 자신이라는 인격을 포기해야만 하고, 동시에 살아가기 위하여 자립성을 지녀야만 한다.

 

그런데 관념론자인 헤겔의 성향으로 볼때, 이 사랑은 적어도 육체관계보다는 정신적인 부분을 지향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서 위의 사랑의 정의는 플라토닉한 사랑에 더 가깝다는 이야기이다. 적어도 헤겔에게는 절대 정신의 물화인 이 세계에서 육체에 중점을 둔다면 헤겔은 '사랑을 통한 운명의 도야', 와 같은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헤겔사전, '사랑') 더 설명하자면 헤겔에게 있어서 운명의 도야, 는 무수한 과정을 거쳐 변증법적인 길을 걸어온 절대정신으로의 합일이기에 말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주인공인 베르테르는 로테와 과연 그런 관계를 맺고 있을까? 그런데 적어도 로테를 향한 베르테르의 마음이 플라토닉 러브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알 수 있다.

 

태양 아래 가장 사랑스러운 그녀를 내 품에 안을 수 있었더라면! 알베르트가 그녀의 갸냘픈 몸을 끌어안는 걸 생각하면 내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네.

베르테르가 원하는 것은 그녀의 정신과의 합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몸에 대한 소유이기도 하다. 단순히 저 문장뿐만이 아니다. 베르테르는 어느 하인의 고백을 듣는데, 그 하인이 자신이 흠모한 여주인을 겁탈하려 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하인은 베르테르에게 고백하기를 '그녀는 어느 정도 그가 보내는 정감의 표시를 받아주었으며..' 그래서 자신이 강제로 여주인의 몸을 취하려고 하더라도 당연히 받아들일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뒤에 언급할 여성주의적 해석을 시도할 경우 착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연히 여주인은 거절했으며 결국에는 그 하인은 여주인의 오빠에 의하여 쫓겨나기에 이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 대한 베르테르의 반응은 긍정적이며 동정심을 느끼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헤겔적인 의미의 사랑 - 소유관계는 일절 배제해야만 하는 - 과는 가장 거리가 있으리라. 즉, 우리는 베르테르의 로테에 대한 사랑을 에로스적인 의미의 사랑으로 판단하여야 하며, 여기서 우리는 정신분석학적인 개념 - 성욕에 대한 개념을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성욕은 정신분석학에서 매우 핵심적인 주제다. 성욕은 정신분석학에서 초자아와 이드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양자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베르테르의 경우에는 사회적 규범과 자신의 교육으로 형성된 초자아로 인하여 간신히 로테를 '안고' 싶어하는 욕구를 억누르지만 동시에 자신에게는 어려운 그 일을 시도한 하인에 대하여 동정심을 표하고, 그 하인이 나중에 살인사건을 저질렀을때 변호하기까지한다. 이는 무의식중에 베르테르의 이드가 그 하인과 여주인의 관계를 자신과 로테의 관계로 투사하여 충족을 이루려고 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잘 살펴보면 매우 기묘한 한 쌍의 삼각형을 확인할 수 있다. 베르테르-로테-알베르트, 와 하인-여주인-여주인의 오빠. 알베르트와 여주인의 오빠는 베르테르와 하인의 사랑을 방해하는 존재이고, 베르테르와 그 하인 입장에서는 로테와 여주인은 당연히 자신에게 와야만 하는 존재들이지만 방해하는 존재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는 그런 대상이다. 작품전반적으로 이 삼각형은 반복되고, 베르테르는 그때마다 자신의 욕망을 또다른 자신인 그 하인에게 투사한다.

 

베르테르의 투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베르테르는 자신의 사랑에 못이겨 결국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로테와 알베르트 커플을 떠나기로 마음먹고는 작품 중간에 그들에게 안녕을 고하고 잠깐 멀리 여행을 떠나버린다. 그 여행에서 베르테르는 궁정에서의 하급관리로 일을 하게 되는데, 그 여행에서 'B양'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 B양을 두고 베르테르가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한번 살펴보자.

 

B라는 아가씨는 내가 이곳에서 만난 유일한 여자입니다. 사랑하는 로테, 당신을 닮은 누군가가 존재하는게 가능하다면 바로 그녀가 그 사람입니다.

로테에게 보내는 편지에 B라는 아가씨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이 B라는 아가씨는 베르테르의 눈에는 로테와 닮아보인다. 그런 베르테르에게는 B양은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이를 정리하자면 1. B양은 로테와 닮았다. 2. 그래서 B양을 통해서 로테를 보기 때문에 좋아한다. 가 될 것이다. 이 도식 자체도 이미 불안한 요소를 품고 있지만 - 한 사람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바라본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단적인 예로 당신의 아내나 남편이 당신을 두고 예전 여자친구를 떠올린다면 당신은 그것을 허용하겠는가? - 저 도식을 뒤집어 읽으면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1. 외로운 상태에서 B양을 만난 베르테르는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2. 자신의 호감을 로테에 대한 사랑으로 착각한 베르테르는 B양을 통해서 (예전에 사랑에 빠졌던) 로테를 보게 된다.

3. B양은 로테와 닮았다.

 

위의 도식보다는 사실 현실적으로 아래의 도식이 더 베르테르의 상황을 잘 설명해준다고 여겨진다. 저 여행을 떠날때의 베르테르는 실연한 상태다. 결국 그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다니다가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그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게 되고, 베르테르는 이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베르테르의 초자아가 이 상황을 용납하지 못한 것이다. 베르테르의 초자아는 자신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연민을 베풀어야 하고, 한 사람에게만 자신의 모든 신실한 마음을 다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어떻게 알수 있는가? 그것은 본문에서의 묘사를 보면 알 수 있다.

 

... 자네들 잘못이야. 자네들은 듣기좋은 소리로 나에게 멍에를..

이 모두는 자네들의 책임일세.

자네들이라고 그 이상의 존재라 말할 수 있는가?

인용한 부분은 모두 친구 빌헬름 - 귀족으로 보이는 - 에게 툴툴거린 편지의 대목이다. 빌헬름의 도움으로 하급관리가 되어 궁정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귀족들에 대하여 비판을 하고 있다. 정작 그 본인도 귀족과 같은 삶에 동참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너희들과 다르다, 라는 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하지만 베르테르가 베푸는 자선들 -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베푸는 것 - 은 사실 돈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반복하자면, 베르테르는 적어도 있는 사람들, 에 속한다는 이야기이다. 초반에 베르테르가 지방에 내려간 이유는 어머니가 그에게 맡긴 수금때문이다. 그 자신의 아주머니가 유산을 붙잡고 내놓지 않기에 베르테르를 보내 그 유산을 받아오도록 시킨 것이리라.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 베르테르가 지방에서 만난 사람들은 베르테르 본인도 인정하듯이 계급의 차이가 있고, 돈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고, 앞서 말한 초자아 이야기로 돌아가자. 베르테르는 강박관념 - 나는 귀족들과는 다르다 - 에서 사람들을 도우고, 결국에는 그렇게 본인은 선하고 단 한명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순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로테와의 대화에 따르면 그에게 있어서 귀족들은 순진한 '처녀를 유혹해서 그 열매를 따고는 뒤돌아서는' 그런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르테르는 한 명만을 사랑하여야 된다는 제약을 본인에게 무의식중으로 걸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베르테르 본인 또한 저런 귀족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본인이 그렇게 맘에 들어하지 않는 귀족의 행위들을 그대로 답습한다. 가장 처음으로 돌아가서, 베르테르가 하는 말을 들어보자.

 

불쌍한 레오노레, 하지만 그것이 내 잘못은 아니라네 ...(중략)... 그 불쌍한 레오노레의 가슴속에 애욕이 싹트게 된 것을 어쩌나 ...(중략)... 난 현재의 순간을 그대로 즐기고 과거는 그냥 흘려보낼거야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전형적인 바람둥이의 대사로 읽힌다. 한마디로 네가 나에게 빠진건 네 잘못이지 내 잘못은 아니다. 라는 말이다. 그 말은 현재의 순간을 그대로 즐기겠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바꿔말하자면 지금 이 여자도 만나보고, 저 여자도 만나보면서 많이 만나보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다가 사랑에 빠지면 사랑 좀 하다가, 여자가 아니다 싶으면 이별통보하고 시골로 도망가버리면 그만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아아, 어린시절 나의 여자친구가 떠나가버렸다니! ...(중략)... 나는 그녀를 가졌었고 그녀의 심장을 느꼈네... (중략)... 그때 내가 사용하지 않은 영혼의 힘이 정녕 조금이라도 있었나이까? 그녀 앞에서 나의 신비한 감정이...(후략)    

알던 여자의 부고를 받은 베르테르의 반응이다. 몇 가지 포인트를 찾을 수 있다. 베르테르는 그녀를 '가졌'고 '신비한 감정'을 가졌다고 한다. 그녀를 가졌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녀와 육체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의미하리라. 그리고 신비한 감정을 가졌다는 이야기는 그녀에게 끌렸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를 언급하는 베르테르의 첫마디에 주목하라. 이 모든 것은 '어린시절'에 일어난 일이다. 정리하자면 어느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육체관계까지 맺었지만 결국에는 깨어졌고 훗날 회상하기를 그 모든 것은 어린시절의 치기였었지,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런 베르테르가 로테에게 정열적으로 끌린 것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한 해답은 본문에 이미 나와있다. 로테의 말에 의하면 영영 이루지 못할 사랑때문에 끌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렇게 대한 것은 네가 처음이야, 라는 마음이고, 이 여자, 저 여자 모두 나에게 넘어왔는데 너는 왜 안넘어오는거냐, 라는 자만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이후에 로테에게 매달린 것은 그저 자신이 자신에게 부과한 제한 - 나는 한 여자만 사랑하는 순수한 남자이며 귀족과는 다르다 - 때문일뿐 실제로 로테를 사랑하는것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다시 읽어보면 B양과 관계가 깨진 뒤에 다시 로테에 대한 과격한 편지들이 많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속된말로 현재 썸타는 여자와 깨지고 난 뒤에 전 여친이 떠오르는 것과 비슷한 상황인 것이다. B양과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을때에는 로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가장 끈적끈적한 언어는 이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랑스럽고 친근감 넘치는 작은방 안에서 당신의 발치에...

그리고 로테의 결혼에 대하여 축하하는 편지를 쓴다. 말미에는 자신을 잊는다면 미쳐날뛸거라는 말을 덧붙이지만 이는 자신의 행동 - 그동안 로테에게 격정적으로 다가갔던 - 을 설명하기 위해서 의례상 덧붙이는 말로 해석할수가 있다. 이번에는 B양과 깨지고 난 뒤에 빌헬름에게 보내는 편지의 언어를 보자.

 

로테가 그가 아닌 나와 결혼했더라면.. 

심지어 이런 상상마저도 한다.

 

만약 알베르트가 죽는다면...

B양과의 관계가 잘 되었다면 다시 로테에게 돌아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B양에게 일종의 틀, 순수한 여자다, 사려깊은 여자다, 등의 선입관을 씌워놓고 정작 그 선입관이 파괴되자 - 무도회에서 자신을 아는 척을 안했다 등 - 실망감을 느끼고는 다시 예전의 로테, 자신의 마음에 이미 이상화되어 존재하는, 에게로 마음이 돌아가버리고 만다. 그런 생각이 지나치게 깊어지자 알베르트를 방해자로 여기게 된 것이리라. 결국 정리하자면 베르테르는 자신의 감정에 빠져사는 인물이며, 육체적으로 로테를 원하고, 정확히 말해서 로테를 '사랑'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볼때 베르테르의 격정적인 모습은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이고, 그렇기 때문에 영영 이루지 못할 유부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왜? 유부녀는 아무리 사랑해도 절대 가까워질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베르테르는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 그런데 베르테르의 자살은 사실 예견되어있다. 사람은 왜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가? 그것은 친해지면 잃게 되기 때문이다. 잃을게 없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지만 잃을게 많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공포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베르테르는 기본적으로 당연히 상실을 두려워하며, 상실을 두려워한다는 점에서 볼때 궁극적인 상실 - 아무것도 잃을 게 없는 상황 - 을 애타게 기다릴수 밖에 없다. 그런데 궁극적인 상실이자 궁극적인 잃지 않을 상황은 죽음뿐이다. 따라서 베르테르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 ->적극적 삶에 대한 의지상실 ->궁극의 상실인 죽음에 대한 매혹, 이라는 과정을 밟아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로테는 어떠한가? 로테는 과연 베르테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베르테르를 사랑하고 있기는 있을까? 아니면 자신의 남편을 사랑하고 있을까? 그런데 로테는 단순히 정신분석학적인 도구를 활용하는 것보다 여성주의적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이 좀 더 적절할 것이다. 그 이유는 작중에서 표현되는 묘사때문인데, 여기서 로테에 대한 묘사는 한결같이 사랑스러운 여인의 모습이며, 또한 순종적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 ... (중략)... 싱그러운 입술과 상기된 볼에...

나 대신 저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다오! ...(중략)... 어머니처럼 잘 돌봐 주고 아내와 같은 정성과 순종으로 네 아버지를 대하고...

한 착실한 여자가...

첫 번째 부분은 처음 베르테르가 로테를 만났을때 묘사한 부분이다. 전형적은 젊은 처녀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당시의 여성관에서 이상적으로 표현할만한 그런 모습이다. 두 번째 부분은 조금 설명이 필요한데, 로테의 어머니는 일찍 떠나면서 로테에게 유지를 남긴다. 그것은 동생들에게 그리고 아버지에게 잘하라, 라는 말들이었고, 인용한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을 유의깊게 읽어보아야한다. 로테의 어머니가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는 바로 정성과 순종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머니로부터의 유지를 받은 베르테르는 자신의 남편에게 정성과 순종을 다할 것을 다짐할 수 밖에 없었고, 이렇게 가부장제 안의 여성의 성gender역할이 그대로 대물림되게 된다. 여성은 그저 남자에게 사랑을 베풀고 또한 남자를 잘 따르기를 시대가 강제하는 것이며, 로테 또한 이 시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세 번째 부분은 거의 끝부분에서 두 남자, 베르테르와 알베르트 그리고 자신의 관계를 생각해보는 상황에서 나오는 묘사다. 로테를 두고 착실한 여자로 묘사를 하고 있는데 위의 두 번째 부분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이 착실한 여자는 곧 남편에게 의지하고 생을 맡기며 (실제로 뒷부분에서 남편, 그러니까 알베르트의 토대위에서 인생의 행복을 쌓는다는와 같은 문장이 나온다.) 정성과 순중으로 남편을 대하는 여자다. 이런 여자는 바람을 피거나, 혹은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거나 하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 왜? 반복하지만 착실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거나 하는 일이 생긴다면 착실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리며, 그렇게 된다면 어머니로부터 받은 유지를 어기게 되는 것이고 사회적으로도 놀림감이 될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서 징벌을 받으리라.

 

로테는 작중에서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혹은 편집자의 시선을 빌려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로테는 알베르트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영원히 맺어져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앞서 세 가지 상황을 살펴보았으니 우리는 다른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로테의 저 '사랑'이라는 말은 반복적으로 사회가,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가 주입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실제로는 자신의 감정을 모르는데도 자신은 남편을 사랑'해야만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무슨 말인지 짐작가는가? 그녀의 사랑 마저도 가부장적 주입의 결과 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면 차라리 이 베르테르의 슬픔, 에 대해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는 '시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정도의 평으로 마무리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테르의 슬픔, 은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여성들에게 가부장제를 강요하고 내면화시키는 것까지 이르게 된다. 바로 로테에게 내려진 징벌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리둥절할수도 있을 것이다. 징벌이라고? 작중에서 로테가 가부장제를 위반한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 행위로 인하여 징벌을 받은 적이 있는가? 그건 바로 이 문장이다.

 

베르테르는 두팔로 로테를 꼭 껴안은 채, 떨리는 그녀의 입술에 격렬한 키스를 퍼부었습니다.

알베르트는 로테의 생명이 위태로웠기 때문에...

결국 베르테르는 격정에 못이겨 자살을 하고 만다. 그런데 그렇게 자살을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로테의 권고인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찾아오지 말라, 를 어기고 찾아왔고, 그리고는 로테와 마주앉아 책을 낭송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로테의 마음의 빗장이 문학의 효과때문인지 좀 느슨하게 풀리고 만다. 그 결과가 바로 위의 첫번째 문장이다. 결국에는 이들은 서로 키스를 했다. 가부장제에 철저히 종속된 착실한 여자라면 절대 해서는 안되는 행위, 외간남자와의 통정, 를 하고 만 것이다. 처음부터 로테는 베르테르를 집에 들여서도 안되었고 문학을 읽어달라는 말도 하지 말았어야 했으며, 어떤 식으로든 남편이 없는 집에서 외간남자랑 둘이서 있는 행위는 피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로테는 그것을 어겼고, 결국 베르테르의 자살 소식을 듣자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만다. 그리고 아래 문장이 보듯, 그 결과는 자신의 생명의 불이 꺼지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아직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지만 만약에 작가가 글을 더 썼다면, 작가 자신은 사랑의 열병과 심적 괴로움이 죽음의 원인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분명 로테의 죽음으로 마무리하였을 것이다.

 

이 부분은 투르게네프가 쓴 뛰어난 단편 파우스트, 에서 그대로 변주된다. 여기서도 아는 사람의 아내를 사랑하게 된 주인공은 함께 파우스트를 읽어나가면서 서로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돌변한 상대의 반응에 놀라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그 아내는 야위어가면서 심적 고통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아마 이 부분 또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가부장제의 굴레, 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남편 알베르트를 사랑하는 것이 가부장제 때문에 그렇게 '착각'하고 '형성'된 것이라면, 쉽게 말해서 '사랑한다고 믿게 된' 것이라면 로테의 베르테르에 대한 마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 부분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로테의 심리, 엄밀히 말하면 편집자의 시선으로 보는 로테의 심리, 를 가지고 파악해보도록 하자.

 

직접적인 심리가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처음 서로를 알게 된 순간부터 그들의 마음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일치했으며...(중략)...만일 그와 헤어지게 된다면 그녀 존재 자체에 다시는 채울 수 없을 구멍이 생길 것만...

로테는 자기 친구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지만 그때마다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만...

편집자는 로테의 착실함, 을 강조하기 위하여 기어코 로테는 베르테르를 자신의 '오빠'로 삼고 싶다, 혹은 '자신의 여자친구들 중 하나랑 결혼'시키고 싶다. 정도로 격하시키지만, 위의 묘사는 사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묘사다. 자신의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기 친구들은 당연히 베르테르에게 부족하다. 왜? 베르테르에게 어울리는 존재는 내심 자신밖에 없다고 이미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석해보면 겉으로 보이는 베르테르 -> 로테의 흐름은 실제로는 정반대로 로테 -> 베르테르,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저렇게 로테가 베르테르를 좋아하더라도, 당시의 가부장제의 굴레에 묶인 로테로서는 자신의 감정을 속이는 것 외에는 달리 할 방법이 없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의 감정에 대하여 합리화를 하는 방법만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주인공들에게는 절망스러울 것이다. 만약에 현대 소설의 주인공이었다면 아마 남편을 버리고 사랑의 도피라도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만에 하나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저 둘이 사랑의 도피를 하게 되었을지라도 결론은 베르테르가 로테에 대한 사랑의 열정이 식는 것으로 마무리될것이다. 베르테르는 위에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로테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왜 이런 식으로 구성이 되었을까? 그것은 작가 자신의 개인적 상황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실제 인물인 샤를로테를 사랑했지만, 샤를로테는 그 사랑을 거절하고, 단호하게 그의 마음을 막았다. 얼핏 보면 위의 베르테르와 로테, 의 관계와 비슷해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르다. 위에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로테가 베르테르에게 마음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제 현실에서의 샤를로테는 자신의 남편인 케스트너와 괴테 중에서 케스트너를 택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모른다. 샤를로테가 자신의 심정을 남긴 편지는 전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심정을 남긴 편지가 없다고 해서 과연 현실에서 샤를로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안 로테처럼 행동하였을까? 만약에 샤를로테와 자신의 쌍을 그대로 소설에 반영했다면 뒤의 편집자의 시선으로 본 로테의 속마음 부분은 삭제되어야 하였으리라. 그런데 그러지 않았고,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오기 때문이었으리라 : 이런 일을 겪었으니 작가로서는 소설에서라도 샤를로테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어야겠다, 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품었던 것이다.

 

두 주인공의 비극적인 상황을 살펴보았으니 이제 마지막으로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으로 살펴보면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계급제 이데올로기를 옹호한다. 어째서 이렇게 볼 수 있는가? 이제 이 소설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계급제 이데올로기를 옹호하게 만드는지 그 과정을 찬찬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소설의 형식은 앞서도 설명했지만, 편집자가 외부에 있고, 그 안에 사료, 가장 안쪽에 두 주인공의 이야기가 있다. 가장 안쪽을 살펴보았으니 이제 나머지를 파악할 차례다. 일단 사료, 부분은 베르테르가 친구 빌헬름에게 보낸 편지로 구성되어있다. 군데군데 로테에게 보낸 편지도 섞여있지만 사실 그 편지들보다는 빌헬름에게 보낸 편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앞서도 설명했지만 이 소설은 편집자가, 가상의 인물인 베르테르의 생애를 보고 너무 불쌍하게 여겨져 그 베르테르의 사료를 모아 하나로 펴낸 소설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편집자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갈 수 밖에 없다. 편집자의 입김에 따라서 편지를 빼고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편집자는 가상의 인물이 아니냐고 반론할 수 있다. 그렇다. 편집자는 가상의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가상의 인물이든 혹은 가상의 인물이 아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결과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런 검열을 거쳤고, 그 검열이 끝난 뒤에 남은 편지들은 그 편집자의 성향을 드러내어 준다는 것이다. 이제 편지를 다시 꼼꼼히 읽어보자. 직접적으로 신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이 있다.

 

다소 신분이 있는 사람들은 서민들과 늘 냉랭한 거리를 두려 한다...

나도 우리 모두가 평등하지 않고 그리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존경받기 위해 서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비난받아 마땅...

얼핏 읽으면 베르테르의 따스한 마음씨처럼 여겨지는 구절들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베르테르는 신분이 높은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행동한다 ; 서민과 왜 멀리 있으려 하는가, 나는 다르다, 서민에게 다가가겠다, 라고 한다. 그런데 직관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공이 보이고, 내가 그 공을 주으러 다가간다면 이 문장은 필연적으로 그 내부에 나는 저 공과 멀리 떨어져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공이 내 손에 있다면 내가 공을 구태여 주으러 갈 필요가 없지 않는가? 마찬가지다. 베르테르 본인이 이미 서민이라면 왜 서민에게 다가가려고 하는가? 서민이 아니고 그들과 신분차이를 명백하게 느끼기 때문에 다가가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말하자면 자신은 높은 신분에 있고, 그 신분에서 아래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그런 모양새다. 결국 몸을 굽힐 수 있는 사람은 무언가 더 가진 사람이고 더 높은 사람이다. 나에게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몸을 굽히지 못할 것이다. 왜? 내가 몸을 굽히는 순간은 나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순간이 될터이니 말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에서 보인다. 여주인공 중 하나인 미도리는 주인공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자신이 다니던 곳은 그 근방에서 손꼽히는 부자동네에 있었는데, 거기서 다른 아가씨들은 아, 오늘 난 돈이 없어서, 라고 이야기하지만 자신에게 물어오면 그걸 부정할수밖에 없었노라고. 다른 사람들은 돈이 없다는 것이 정말로 돈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지만 자신이 말하는 것은 실제로 돈이 없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니까, 라고.

 

서민들은 그렇기 때문에 쉽게 몸을 굽히지 못하고, 늘 고개를 빳빳히 들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더 빳빳하게 고개를 세우게 만드는 부자들의 태도가 있다. 바로 '이 신분제는, 이 계급은 절대 바뀌지 않을 거야' 와 같은 태도다. 위의 베르테르의 말이 바로 그 태도에 정확히 일치한다. 베르테르는 말한다. 나도 우리가 평등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이다. 바꿔서 다시 써보겠다. '귀족들은 서민들과 자신이 평등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차별적인 발언이 아닐 수가 없다. 귀족들은 금으로 된 음식을 먹는가? 그들의 오줌과 변은 희귀금속으로 구성되는가? 그들이 서민들에 비하여 지적으로 더 뛰어난가? 그렇지 않다면 왜 귀족들은 서민과 평등하지 않는가? 결국에는 그들이 가진 재산때문이며 사회적 배경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문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지만 실제로 꼼꼼히 읽어보면 은근히 계급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문장이 한 두개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베르테르는 본인이 양심적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속한 계급과 다르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서민들에게 돈을 나눠주는 행위를 계속하지만, 뒤집어 말하자면 베르테르가 서민들과 관계를 맺는 양상은 오직 돈을 나눠주는 것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요일마다는 그들에게 1크로이처를 주는 것을 빼먹지 않았는데, 어쩌다 예배 후에 내가 그곳에 가지 못할 때에는 여관 여주인에게 대신 주라고... 

맏이 녀석에게 약간의 돈을...

매주 몇 몇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얼마씩 나눠주던 돈은...


결국 진정한 인격적 관계는 서민들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베르테르는 서민을 절대 이해하려고도 하지도 않았고 자신과 이들은 이미 다른 존재라 라는 것을 마음 속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근본적인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왜 베르테르는 서민들에게 다가가려고 할까? 아마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부분을 살펴보면 자명해질 것이다.

 

당신이 여기 있는 것을 여기 모인 사람들은 탐탁치 않게 여기는 듯합니다...

상류 계급의 신사 숙녀들이 모임을 가지는 날, 베르테르는 그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스스로는 몰랐다고 하지만, 어쨌든 그는 참여하게 되었고, 그 결과는 뻔했다.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B양도 그를 모임에서 모른척 하였고, 결국 백작에 의하여 파티에서 쫓겨나게 된다. 백작은 베르테르를 아끼던 터라 좋은 말로 타일러 내보냈지만 결론적으로는 파티에 참석 못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마을에서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

 

백작이 당신을 파티장에서 쫓아냈다고 하던데.

물론 여기에 대하여 베르테르는 쿨하게 반응한다.

 

파티 따위는 악마나 가져가라지요!

하지만 이 사건이 이 젊은 청년의 감수성에 과연 아무런 상처를 남기지 않았을까? 내가 볼때는 매우 큰 상처를 남겼으리라고 여겨진다. 이런 일은 아마 처음이 아니었으리라. 당장 베르테르가 편지를 보내고 있는 사람도 빌헬름이고, 이 빌헬름은 편지 내용으로 판단하건데 귀족으로 여겨진다. 귀족 친구를 두고 있는 한 어떻게든 신분 차이를 느낄 것이다. 이 신분은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벽으로 작용하고, 결국에는 절망에 빠지게 만들 것이다. 같은 친구인데 무도회장에 들어가면 저 사람은 귀족, 나는 하급이라니. 얼마나 절망스럽겠는가? 이런 계급에 대한 인식이 베르테르에게 서민들에게 다가가는 제스쳐를 취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서민에도, 귀족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계급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베르테르는 귀족이 되고 싶었으나 귀족은 태생적으로 될 수가 없었고, 서민은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되고 싶지는 않았기에 영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이 신분차는 B양과의 대화에서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저는 어젯밤은 물론이고 오늘아침까지도 당신과 사귀는 문제를 두고 설교를... ...당신을 경멸하고 모욕하는 소리를...

하지만 베르테르는 끝끝내 B양과 자신을 파티에서 내보낸 백작에 대하여 비난하지 않는다. 끝끝내 귀족 계급의 일부를 긍정하는 것이다. 완전히 부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자신도 귀족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쫓아내게 만든 귀족들에 대한 그런 분노는 감출 수 없었고 결국 그것은 귀족들의 특질, 서민을 멀리한다, 을 비난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며, 그런 특질을 비난하면서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 라는 생각을 강박적으로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는 사실 시대의 한계 상 어쩔 수 없다고 여길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가장 큰 문제가 남아있다. 무엇보다도 아이러니의 정점은 정말 슬프게도 이 소설 자체에 있다. 소설의 형식상 편집자가 가장 바깥에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이 소설은 베르테르라는 인물의 생애 자체를 그 편집자가 교환가치를 가진 상품으로 본 것이나 다름없다. 베르테르가 누구를 사랑하였는가, 라는 것이 상품이 되버린 것이다. 이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교환가치를 가져서는 안될 물품이 돈으로 교환될 수 있는 책으로 펴내졌다. 세상의 어느 누구의 인생이 감히 교환가치를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런 인생에 억지로 교환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이 이야기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으로 보았을때 계급주의에, 더 나아가 자본주의에 헌신하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자발적인 것이 아닌 편집자의 손에 의하여 말이다. 편집자의 변은 아마 이렇게 될 것이다. 우리의 친구 베르테르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상품화가 되었다는 것은 그도 부정하지 못하리라.

 

결국 베르테르는 기만으로 점철된 사랑을 하고 있고, 그렇다고 다른 서민들과 인격적 연대를 가지지도 못했고, 그의 인생은 결국 상품화가 되어버린 최악의 삶을 보내고 말았다. 혹자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 실제 존재했던 사람도 아닐텐데, 그리고 작가가 이 책을 썼을때는 저런 정신분석학이나 마르크스주의가 있지도 않았는데 훨씬 뒤의 이론을 적용시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말이다. 옳다. 실제 존재했지도 않은 사람을 두고 열을 올릴 필요도 없고, 슬퍼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소설보다도 더 소설스러운 법. 이런 일이 현실을 살아가면서 생기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에 대해서는 나도 사실 물음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정신분석학자들의 반론을 가져오자면 '프로이트는 원래 있던 정신분석학적인 원리를 발견한 것' 이며 발명한 것이 아니며, 이는 마르크스주의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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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내 머릿속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데니스 카스 지음, 임지원 옮김 / 알마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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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 한가할때 저렴한 책들을 잔뜩 구입하는데, 이 책도 그런 책들 중 하나다. 그래서 거의 기대 안하고 책을 넘겨봤는데, 이게 왠걸, 이 책 장난아니게 재미있잖아? 그래서 혹시나 해서 상품 페이지에 들어가봤더니 리뷰도 거의 없고 그래서 내가 잡글을 하나 더 보태야겠다고 느꼈다. 왜 이 책에 이렇게 리뷰가 적은 걸까? 리뷰가 많았다면 굳이 이런 잡글을 쓰지 않았으리라.

 

이 책의 전반적 구성은 저자와 저자의 양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아들, 이라는 축을 바탕으로 진행된다. 괜히 무게잡고 썼지만 이런 말이다. 저자의 양아버지에게 저자는 심적으로 고통을 겪은 적이 많았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에게는 그러지 않아야겠다, 라고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양아버지와 비슷해져만 가는 자신을 보면서 절망에 빠져가는데..

 

저 축에 뇌과학적인 지식이 잘 스며들어가있다. 뇌과학을 살펴보게 된 이유에서부터 그 뇌과학으로 인하여 사람을 일종의 생물학적 화학적 집합체로 보게 되었다던가, 하는 소소한 경험, 그리고 뇌과학을 한다는 합리화로 처방 약물을 복용하고 담배를 피우는 것을 열망하게 되는 등, (굳이 설명하자면 보상회로에 대한 실험의 자원자로 나서서 담배를 피우게 되었다) 인간적이다. 그리고 이 인간적 부분이야말로 딱딱한 과학서적에서 이 책을 구별하게 하는 힘이다.

 

사실 사람들마다 이 책에서 얻어가는 것이 다르겠지만, 나에겐 소득이 원하다, 와 좋아하다, 의 차이점을 이 책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하다, 라는 것은 여러 대상 중 하나를 원하는 것이고, 좋아하다, 는 한 대상에서의 정도의 차이라는 것이랄까, 하지만 아마 이 책의 가장 큰 소득은 등장인물의 말을 빌려서 말하는 것이 좋겠다.

 

자신의 강점을 파악하고 그것으로부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갑자기 도약해서 어디론가 뛰어오르기를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위의 책, 66p. 

 

저 말은 글쓴이가 뇌연구 실험에 자원하여 스페인어를 외우는 실험에 참가하였을때 과학자가 한 이야기이다. 아는 스페인어는 잘 활용하였지만, 전혀 듣도보도 못한 스페인어 앞에서는 좌절을 겪었는데, 거기에 대하여 아는 부분에서부터 준비하라는 것을 말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이다. 전문적인 각주도 하나도 없는 책이지만 만약에 당신이 뇌에 대하여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이 당신의 강점이 되어줄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HPA라던가 PFC에 대하여 하나도 모르고 있어도 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어느 정도 익숙해질테고, 그것은 여러분이 다른 저서를 접할때 자산이 되고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줄 것이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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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정복자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감수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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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정복자.

  

  

 

   라 만차의 ‘슬픈 얼굴의 기사’ 돈 키호테는 거인과 싸우고, 두 군대 사이에 끼어들어 놀라운 무훈을 발휘하여 상대편의 왕을 사로잡고, 다른 기사와 부딪혀 그를 쓰러뜨린다. 그 뿐만이 아니다. 쇠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김없이 손을 내밀어 그 쇠사슬을 부수고, 주인으로부터 학대받는 사람을 보면 그의 창칼로 그 핍박을 풀어주려고 노력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선배 기사들의 고행을 본받아 그 또한 산 속에 들어가 깊은 고뇌에 잠긴 묵상을 몸에 익히기도 하며, 정말 필요할 때에는 성스러운 약물을 제조하여 몸을 치료한다. 성주가 어려움에 빠졌더라도 기사의 품격에 어긋나는 일이면 섣불리 뛰어들지 않는 자제심도 가졌으며, 자신의 종자인 산초에게 편력이 끝나면 백작 작위를 보장해주는 섬세함마저 가졌다.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힘은 그의 공주 둘시네아를 향한 타오르는 열정이다. 그러나 그의 공주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다른 공주를 외면하지는 않는다.

 

물론 거인이 풍차로 둔갑한다거나, 혹은 포도주 자루로 변해버린다거나 하는 일도 있고, 군대인줄 알았던 것들이 뛰어들고 보니 양떼들에 불과했다는 것은 사실 사소한 일이다. 그러다가 양치기에게 집단으로 린치를 당하여 치아가 다 빠지고 갈비뼈가 심하게 부러져버리는 것 또한 기사에게는 사소한 일이다. 그런 상황에 처하여 성스러운 약물을 복용하였으나 다만 그 약물이 몸에 맞지 않아서 사소한 구토를 할 때도 있다. 성이 갑자기 마법에 걸려 평범한 주막으로 변할 때도 있고 공주인줄 알았던 존재가 평범한 여자로 변했다거나 하는 일도 있지만, 그러다가 다시 성으로도 바뀌고 공주로 바뀌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자신의 종자에게 약속한 영지와 작위는 언제 획득할 수 있을지조차 가물거리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편력 중에 겪는 일이다. 사실 무엇보다도 그의 공주인 둘시네아는 남정네들을 두들겨 눕힐 수 있을 정도의 용맹을 보유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오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자신을 신실한 편력행에서 탈선시키려는 악마의 소행일 것이다.

 

실상은 이렇다. 라 만차의 돈 키호테는 사실 편력기사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 정신이 돌아버린 것이다. 그가 살던 시기에는 더 이상의 기사도, 그리고 공주도 없었고, 다만 남은 것은 소설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전설의 시대를 살고 싶었던 그는 그런 현실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은 망상으로 빠져나가고 만다. 웃긴 것은 기사도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매우 뛰어난 지혜와 이성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사와 그의 전설에 관련된 일이라면 그저 한 눈을 가리고 앞 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게 된다. 오늘날 돈 키호테는 많이 알려져 있듯 망상에 빠진 사람을 지칭하거나, 더 나아가 이상주의자로 해석을 하게 된다.

 

사실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의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새로운 돈 키호테를 만난 듯했다. 나는 통섭, 으로 윌슨의 책을 처음 접했는데, 지금이야 흔한 단어이지만 내가 읽을 당시에는 단어 자체가 상당히 생소했었다. 물론 학제간의 간격을 극복하고 공통분모를 찾아 가로지르는 일, 이라는 개념 자체는 누구나 떠올릴 수 있지만, 어떤 개념이든지 그 이름이 붙을 때 제대로 연구 대상으로 잡을 수 있다. 이 통섭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인데, 통섭을 윌슨의 의도로 다시 정리하자면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그 사실들에 기반한 이론을 통합’ 하는 것이다. 보통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화해, 정도로 쉽게 이해되는 경향이 있고, 윌슨 본인도 거기에 대해서 크게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조금 다르다. 저 정리를 뜯어보면 통섭, 이라는 것의 개념만 정의한 것이 아니라 그 방법론까지 정의해놓았다. 가장 먼저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을 찾는다. 그리고 그 사실들에 기반한 다양한 이론들을 수집한다. 그러면 이론들 사이에는 사실이라는 공통집합이 생긴다. 이런 이론들의 통합을 통하여 우리는 사실이라는 것에 대하여 완전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이런 통섭과 윌슨과 돈 키호테가 무슨 관계인가 하니, 이렇게 방법론까지 정의해두었기에 그렇게까지 허황되어보이지는 않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힘든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론적으로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과 악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애로사항이 많다. 통섭도 마찬가지이다. 쉽게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통합한다, 정도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진정한 통섭의 걸림돌이 될 수 있을 것이고 - 이런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냥 사회학자가 물리학 책이나 생물학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 (혹은 그 반대가) 통섭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 그렇지는 않더라도 특히나 윌슨의 경우에는 진화론 만능주의가 아니냐, 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진화론을 중심으로 통섭을 시행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사실을 택할 것인가’도 문제가 된다. 거칠게 말해서 원자가 양성자, 중성자, 전자로 이루어져있다, 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에 해당할만한 인문학적인 이론이 있는가? 결국 인문학적인 이론과 함께 나아가려면 인간과 그 문화에 관련된 사실을 채택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통섭 자체는 필연적으로 인간중심적이라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이론을 택할 것인가’ 또한 문제가 된다. 한 사실을 설명하는 두 이론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두 이론의 발전 단계가 너무나 다르면, 쉽게 말해서 그 사실을 한 이론이 다른 이론에 비하여 너무나 잘 설명한다면 우리가 굳이 두 이론을 통합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런 연유로 나는 통섭에 대하여 부정적 예측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부정적 예측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통섭 자체에 대하여 부정적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도덕, 자유 의지, 선과 악, 등의 문제에 있어서 그런 윤리학적으로 어려운 문제의 생물학적 기반을 찾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통합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눈을 뜨게 되고, 우리 자신과 타인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에 획기적 변화가 올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은 아직은 쉽게 도달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꿈을 꾼다고 해서 누가 비난할 것인가? 모두가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더라도 누군가는 별을 바라보고 그 별을 손아귀에 쥘 꿈을 꿀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나는 윌슨에게서 돈 키호테를 떠올린 것이다.

 

그리고 앞서 인간 중심적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는 결국 ‘통섭’ 자체의 성격을 규정한다. 결국 통섭이라는 것은 윌슨에게 있어서 인간 존재의 특성에 대한 이해를 의미한다. 윌슨이 그동안 천착해온 연구 분야와 저술한 책들 (바이오필리아, 인간 본성에 관하여 등) 을 살펴보면, 결국 그의 관심사 자체가 인간을 향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관심사를 넘어 윌슨 본인은 인간 존재에 대하여 애정을 가지고 완전한 이해에 이를 수 있다는 돈 키호테적인 낙관주의를 가지고 있다. 정말 인간 존재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우리가 도달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이번에 그가 쓴 지구의 정복자,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여야만 할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책 이기적 유전자, 에서 개체 선택론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우리 인류는 일종의 운반자로, 자기 복제자인 유전자가 어떻게든 자신을 퍼뜨리기 위하여 잠깐 머무는 로봇과 같은 존재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유전자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존재는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거친 말로 도킨스가 표현했듯이, 우리가 피임만 하더라도 우리는 유전자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이기적 유전자’ 라고 해서 꼭 그 유전자대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이야기는 버리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이렇게 유전자 결정론으로 여기는 것은 도킨스의 저서에 대한 가장 큰 오해다.) 하지만 이렇게 도킨스가 인간의 특이한 위치를 인정하고, 유일하게 학습을 통하여 본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라고 용기를 북돋아주더라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는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

 

왜냐하면 이런 개체선택론에서는 개체와 다른 개체 사이의 상호작용을 유전자 입장에서 해석하기에, 정작 ‘개체’ 본인의 생각으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결론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런 결론을 가져오는 것은 이타주의에 관한 것이다. 주변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이 유전자가 자신을 퍼뜨리려고 표현형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거라고? 그리고 그런 모습들 중 이타적인 모습이 가끔 보이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확산에 ‘도움’ 이 되기 때문에 보이는 거라고? 그리고 호혜적인 관계가 아니라면 이타주의가 발달하기란 쉽지 않을 거라고?

 

이타주의가 드러나는 모습에는 크게 가지가 있다고 개체선택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이야기한다. 그 중 첫 번째는 혈연선택이다. 말 그대로 자신의 친족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 도움을 준다는 이야기이다.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는 말이다. 친족이라면 자신의 유전자를 일부라도 공유할 것이다. 이를 두고 보통 포괄적응도라는 이야기를 한다. 이 지구의 정복자, 에서는 혈연 선택과 포괄적응도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실제로는 약간 미묘한 차이가 있다.) 두 번째 전략은 서로 같은 목표를 추구하고 있을 때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원시인이 되어 사냥감을 추적한다고 하자. 공동의 목표가 있을 때에는 서로 협력하여야만 유전자 입장에서도 좋다. 괜히 따로 떨어졌다가 사냥감에게 도리어 각개격파 당할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세 번째가 바로 호혜적 이타주이다. 트리버스가 정립한 이론인데, 쉽게 말해서 서로 오래 볼 사람이면 일단 도움을 주는 게 좋다는 이야기이다. 도와준 사람이 나를 다시 도와줄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이를 조금 수학적으로 풀어나가면 팃포탯 전략이 나오게 된다.

 

앞서 말한 문단에서 나온 용어를 조금 설명하겠다. 포괄적응도는 혈연 선택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고 이야기했다. 어떤 의미에서 다른가? 보통 진화론에서 적응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자손을 많이 남긴다, 라는 이야기로 받아들여도 좋다. 그렇다면 포괄적응도는 포괄해서 자손을 많이 남긴다는 이야기이다. 내가 굳이 자손을 낳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내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자손을 낳아준다면, 그 자손을 통하여 나는 유전자를 전한 것이다. 이런 배경 하에 좀 더 엄밀하게 살펴보면, 다음을 생각하여야만 한다.

 

먼저 포괄적응도는 개체 간의 상호작용을 고려한다. 포괄적응도에 관한 등식은 다음과 같다. 개체 A의 포괄적응도 = 상호 작용이 없을 때 A 개체의 적응도 + (유전자 형질 a가 A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도와 형질 a가 A와 근연관계에 놓인 개체 B에 영향을 주는 정도의 합) 여기서 볼 때 실질적으로 혈연 선택이 작용하는 곳은 괄호 안이기 때문에 혈연선택은 엄밀히 말하자면 포괄적응도에 포함되는 그리하여 그 적응도를 구성하는 요소라고 볼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포괄적응도와 혈연선택을 동일하게 두는 것은 미묘한 문제다. 윌슨은 이를 무시하고 (사실 이타적이나 이기적 행동을 고려하기 위해서는 상호작용이 없을 때의 A개체의 적응도를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에 ‘무시’ 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둘을 동일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무시한 경우 우리는 부등식을 하나만 고려하면 된다. 바로 rb-c>0 라는 것이다. r은 근친도, 얼마나 두 개체가 가까운가 (보통 유전적으로 가까운가, 라는 말을 사용한다.)를 의미하는 수치이며, b는 어떤 행위를 했을 때의 이득, c는 그 행위를 했을 때의 불이익이다. 그야말로 명료한 수식이다.

 

팃포탯 전략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쉽게 이야기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죄수의 딜레마, 라는 이야기를 안다. 이를 돌파하는 전략이 바로 팃포탯 전략이다. 처음에는 협력한다. 만약에 상대방이 나를 배신한다면 그 다음에 똑같이 배신한다. 이런 단순한 전략이 죄수의 딜레마를 헤쳐나가는 전략이 된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걸까? 수학적인 증명은 여기서 하기가 곤란할테지만 경험적인 사실은 알려줄 수 있다. 액설로드라는 학자가 이 죄수의 딜레마를 돌파할 전략을 찾기 위하여 대회를 열었다. 그런데 이 그 대회에서 우승한 전략이 바로 팃포탯이다. 결국 계속 관계가 유지된다면 협력하는 것이 서로에 이득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호 호혜적 이타주의가 성립할 수 있다.

 

하지만 애초에 개체적인 입장이 아니라 집단적인 입장이라면? 집단 선택을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사실 저렇게 세 가지로 개체의 행동을 분석할 필요가 없다. 그냥 이타적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 이기적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집단을 막아낼 수 있다, 라고 해석하면 이타주의에 대한 해석이 완료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입장에 지구의 정복자, 가 있다.

 

사실 지구의 정복자, 의 저자인 윌슨은 개체선택설을 지지하던 사람이었다. 물론 받아들이는 데에는 심리적으로 저항이 컸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지금와서 이렇게 개종을 한 것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가진다. 잘 살펴보면 포괄적합도, 라는 말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다, rb-c>0이어야 남을 도울 수 있다면, r은 어떻게 결정하는가? 윌슨은 바로 이 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실질적인 생물 종들의 관찰에서는 이 근연도 개념이 얼마나 허구인지 드러난다고 윌슨은 역설한다. 또한 적용이 되는 경우더라도 근연도 r이 r의 의미를 가지지 못할 정도로 크게 확장되어야만 하는 경우가 많으니 도대체 r을 설정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결국 r이라는 것의 모호한 정의에 윌슨은 통렬한 비판을 날리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윌슨의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윌슨은 개체 선택을 버리고 집단 선택 쪽으로 넘어가서 새로운 수학적 모델을 만든다. 그것이 바로 다수준 선택이다. 개체 선택과 집단 선택이 각각 다른 수준에서 일어난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두 이론을 종합한 이론인데,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 보면 탄탄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먼저 인류가 어떻게 진사회성 (분업을 하고 세대를 거쳐 번식을 하는)을 획득하게 되었는지를 윌슨은 추적한다. 그리고 그 추적의 결과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정리된다 : 개체 선택을 통하여 여러 선적응들을 거쳐서 인류가 진사회성의 문턱에 도달하게 되었고, 그 선적응들을 통하여 발생한 집단에서 다시 자연 선택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윌슨의 주장에서도 문제가 있다. 책 말미의 해설에서 최재천 교수가 해설하듯이 윌슨 본인은 개미를 연구하던 사람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개체선택을 개미와 같은 초유기체적인 의미에서 이해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도 이야기했듯 포괄적응도와 혈연선택을 거의 비슷한 의미로 계속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 오해라면 오해라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포괄적응도를 어디까지 해석할 것인가? 사실 윌슨이 제기한 문제는 근친도 r을 단순히 혈연을 넘어 관계를 맺는 전부로 본다면 사라질 수 있는 문제다. 물론 이렇게 해석할 경우 윌슨의 말대로 r의 정의가 그때그때 달라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고 모호함이라는 측면은 해소되지가 않지만 이론의 통일성이라는 측면은 유지가 된다.

 

또한 사회 자체의 근원적인 억압성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윌슨의 이론은 해석에 논쟁의 불씨를 남겼다. 윌슨의 이론을 다시 살펴보자. 여러 선적응들을 거쳐서 진사회성의 문턱에 이르러 집단을 이루고 사회성을 발달시켰다. 이 과정을 조금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인간의 조상은 육지에 살고, 손이 있으며, 어느 순간 고기를 먹고 불을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에 인간은 불에 타죽은 고기를 먹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죽은 생고기를 먹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고기의 맛을 알게 된 인간의 조상은,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고기를 먹기 위하여 사냥을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한 명보다는 두 명이 낫다는 것을 깨달았으리라. 초기의 집단은 혈연으로 매개되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혈연이 집단을 만들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아이를 놓기만 하면 집단이 될 수 있다.) 여기에는 자손이 집을 떠나지 않는다는 행동에 관한 개체 수준의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혈연 수준의 집단은 다른 혈연 수준의 집단과 함께 더 큰 집단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모닥불을 피워서 둥글게 둘러앉아있는 큰 집단을 생각해보라.

 

여기에 도달할 때 이 큰 집단은 굳이 혈연만으로 형성된 집단은 아닐 것이다. 이 커다란 집단이 계속 살아남으려면 결국에는 이타주의적인 심성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윌슨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이타주의적 유전자가 이기주의적 유전자 풀을 막아설 수 있게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라. 이렇게 큰 사회는 결국 이타주의적인 심성을 가진 사람들로 유지가 될 수 밖에 없다. 좀 더 명료하게 이야기하자면 희생을 먹고 자란다는 이야기이다. 큰 집단을 유지하려면 개인의 희생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상태가 된다. 결국 집단 자체가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집단이 그대로 지금까지 전해졌다면, 이런 집단을 계승한 우리 사회는 어쩔 수 없이 억압적인 모습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개인을 사회를 위하여 희생으로 내모는 그런 모습 말이다. 이런 해석을 내릴 수 있다면 개체 자신이 이기적 유전자의 운반자에 불과하다는 관점보다 더 끔찍하다면 더 끔찍했지 덜 끔찍하게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이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윌슨은 앞서 통섭에 대하여 말해왔듯이 인간 전체에 대한 애정과 완전한 이해를 추구한다. 도킨스든 윌슨이든 인간은 특별한 존재다, 라는 이야기를 몇 번이고 강조하지만, 윌슨의 경우에는 도킨스보다 좀 더 인간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그런 특별한 존재를 해석하기 위하여 집단선택론을 다시 가져오게 된 것은 아닐까? 쉽게 말해서 진정한 이타주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 존재가 생각보다 특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무의식적인 소망을 위해서 집단선택론을 짜맞춘 것은 아닌가? 당장 오컴의 면도날을 통과시켜보라. (물론 오컴의 면도날이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왕이면 더 단순한 설명을 선호하는 경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두 번의 선택을 거치는 것과 한 번의 선택을 거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간단하게 설명이 가능할 것인가. 아마 후자인 개체 선택이 아닐까? 하지만 개체 선택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 문제점들이 있기에 다수준 선택을 버릴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윌슨의 다수준 선택과 개체 선택을 두고 어떤 관점에서 이타적 행동의 진화를 바라보아야 할 것일까? 사실 여기서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약간 다른 관점이며 나 스스로의 가설 수준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바라볼 수가 있다. 윌슨은 근연도 r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버린 것이라고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인간의 유전자는 같은 종인 이상 일부를 공유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인간으로 있으려면 적어도 일부의 변이는 있되 큰 수준에서는 비슷한 표현형을 보이는 유전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런 부분을 편의상 r<0.5로 두고, r>0.5가 될 때 혈연관계를 드러낸다고 보면, 결국 r값은 0.5이상과 이하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0.5란 수치는 임의로 잡은 것이다.) r<0.5인 부분인 비혈연부분을 집단선택으로 바꾸게 되면 전체 r값에서는 다수준 선택이 된다.

 

이런 식으로 해석할 때 어떤 장점이 있는가? 일단 호혜적 이타주의에 기대지 않더라도 한 사람이 전혀 혈연 관계도 없으며 집단에 속해있지도 않는 다른 사람을 구하러 뛰어드는 이타주의적 행동들을 설명할 수 있다. 또한 더 나아가 한 종이 아예 다른 종을 구하는 행위를 설명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왜 사람이 원숭이를 위해서 물에 뛰어들고 고양이를 위해서 도로에 뛰어들 수 있을까? 어느 정도는 비슷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단점도 있다. 단적인 예로 침팬지가 사람과 98퍼센트 정도 비슷하다는 말은 매우 허술한 말이다. 보통 두 종이 유전적으로 비슷하다, 라는 이야기는 생물학적인 연구방법 중 BLAST법을 사용하여 정렬하고는 확인해낸다. 그런데 이 확인한다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 유연관계가 높을 것이다, 라는 것만 보장할 뿐이다. 그렇게 기반 자체가 허술한데 어떻게 종 내부의 이타주의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종 내부의 이타주의를 설명할 수 없는데 하물며 종 간의 이타주의는 오죽하겠는가.

 

이런 가설들이나 논쟁은 접어두고 이렇게 글 말미에 고백하자면 나 또한 불가능해보이는 꿈을 꾼다. 나 또한 돈키호테와 다를 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윌슨의 이론에 호의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앞서 길게 말한 것처럼 다수준 선택과 통섭 이론에 대하여 조금 부정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런 다수준 선택을 통하여 인류의 문화가 유전자들과 공진화해왔다는 것이 제대로 밝혀진다면 통섭에 큰 획을 그을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통섭을 바라고 있고, 인문학적인 견지에서의 빅히스토리big history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방법이든지 하나의 묶음으로 이루어지는 그런 꿈을 꾸고 있다. 물론 이런 불가능해보이는 꿈을 꾸는 사람들 앞에는 풍차가 거인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주변 모두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단적으로 이번 책에 대하여 도킨스가 내린 평가를 보라.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다’ 라고 말하지 않는가? 하지만 윌슨은 계속 자신의 작업에 대하여 거대한 그림을 그려왔고 일관성을 가지고 계속 학문을 연구해나가고 있다. 그 집대성이 바로 이 책이며, 그가 내린 결론과 연구의 결과는 인간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 쓰일 것이다. 다수준 선택이 옳든 그렇지 않든 적어도 이 자세 - 현실에 굴하지 않고 돈 키호테처럼 이상을 쫓는 자세는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꼭 배워야 하지 않을까.

 

   

 

 

 

p. s. 아주 흥미로운 가설이 떠올라 논문을 써볼까 생각중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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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1-23 02:02   좋아요 0 | URL
다 알고서 봤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이 책을 쓴 사람이 하려고 하는 게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구나 하는 것은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렵다고 해도 그런 것은 마음 쓰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하는 것도 좋다고 봅니다 그런 사람이 있었기에 여러가지가 나왔을 테죠 돈키호테가 없었다면, 지금은 이런 사람을 뭐라고 했을까요^^

사람이 자신과는 다른 종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목숨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윌슨은 근연도 r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고 생각하는 거 맞을 것 같아요

논문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희선

가연 2014-01-26 22:04   좋아요 0 | URL
ㅎㅎㅎ 사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일단 좀 더 지켜봐야될 것 같아요. 뭐랄까 저자의 태도는 본받을 만 하지만 집단선택론은 좀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분이랄까.

yamoo 2014-01-23 12:58   좋아요 0 | URL
오,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이 책 한 번 훑어보고 구입해야 겠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가연 2014-01-26 22:09   좋아요 0 | URL
ㅎㅎㅎ저자의 모든 책들을 모두 총집결한 느낌을 주는 책이라.. 제가 볼때는 읽어야 할 책 같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 저자의 주장 자체를 받아들이기는... 리뷰에서는 직접적으로 이런 저런 부분을 지적하지는 않았지만요. ㅎㅎㅎ 평가가 갈릴 수 있으니 한 번 직접 훑어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