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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아이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9
나지브 마흐푸즈 지음, 배혜경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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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신론을 통하여 대중적으로 가장 알려진 - 무신론 운동의 전위에 선 - 사람은 전투적 무신론militant atheism을 주창한 리처드 도킨스이리라. 그러나 개인적으로 무신론자들 중에 가장 높게 평가하는 사람은 대니얼 데넷이다. 도킨스의 경우에는 상대방의 진영에 들어가서 전투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면, 대니얼 데넷의  논증을 보면 상대방을 어떻게든 자신의 진영에 끌여들여서 공격한다. 아무래도 상대방의 진영에서 싸우게 되면 그야말로 '학부 1년생이 어설프게 배운 종교 지식으로' 공격한다는 소리를 들을 확률이 높아지지만, (어느 신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자네는 무신론자가 될만큼 종교에 대해서 깊이 알지 못하네' 라는 말을 듣게 된다는 말이다.) 자신의 진영에 - 데넷의 경우에는 분석철학의 전통을 이었다고 보는게 옳겠다. 그의 지향성 개념은 유물론적 제거주의의 연장선에 위치하니 말이다. - 끌여들여 공격한다면 이쪽에서 도리어 '공부 좀 하시지?' 라고 말할 수 있을터이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그만큼 종교에 대해 깊이 알면서 아직도 무신론자가 아니냐? 라고 받아칠 수 있다.)

 

앞서 지향성, 이라고 이야기했다. 이 개념은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개념인데, 더욱 이해하기 쉽게 진화론과 연관지어 논의를 진행한다면, 진화적으로 보았을때, 상대방이 의도나 어떤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앞에 사자가 버티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사자가 당신을 언제라도 잡아먹기를 바란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사자가 당신을 잡아먹기를 바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사자가 눈치채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사자가 당신을 잡아먹기를 바란다는 것을 당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사자가 눈치채기를 바라기를 생각할 수 있다. 이 지향성 개념은 언어적 지향성과도 연계되어, 인간의 고유한 특질 - 동물실험에서는 이런 지향성이 3차 이상은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를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이런 지향성으로 인하여 우리는 종교를 발달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지향성의 관점에서 이 책을 읽으면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먼저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 자발라위에서부터 아라파에 이르기까지, 책 소개에도 나와있는 부분이니 내용 누설을 신경쓰지 않고 말하자면, 자발라위는 신(아브라함 종교의 야훼), 장남은 루시퍼, 막내 아드함은 아담, 자발은 모세, 리파아는 예수, 까심은 무함마드, 그리고 아라파는 과학의 발전, 과 대응된다. 이게 괜히 이렇게 해석하는게 아니라, 너무 모티프를 노골적으로 가져왔기에(읽어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고개를 끄덕거릴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라고 작가가 아예 공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자발에서 아라파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누구도 소설 내에서 '자발라위를 직접 만나는 묘사' 를 가지지는 않는다. 아드함은 자발라위의 아들이니 - 야훼가 아담을 창조했듯 - 어쩔 수 없이 자발라위와 만나는 부분을 소설로 그려내었지만 말이다.

 

자발라위를 직접 만나는 묘사를 그리지 않았다, 부연하자면 자발은 사람들 앞에서 사막에서 자발라위를 만났다고 이야기하고, 리파아 또한 벽에 기대어 있다가 자발라위의 음성을 들었다고 사람들에게 주장하며, 까심 역시 마찬가지다. 왜 이렇게 소설을 썼을까? 작가는 사실 자신이 원하면 자발라위가 자발이라던가, 리파아를 직접 만나는 모습을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안했고, 바로 이 부분이 이 소설이 그저 그런 신앙고백같은 소설이 아닌 정말 위대한 소설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그들이 사실 자발라위, 그러니까 야훼에 대응되는 존재를 만났든 만나지 않았든 사실 그건 별로 중요한게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모두 이야기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기를 자발라위가 바란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 바로 지향성이다. 자발라위는 그들 모두의 지향계이고, 그들은 그 지향계를 그들의 행동의 중심에 놓고 자신들의 삶을 바친다. 그 대가는 자발에게는 결국에는 부귀영화였고, 리파아에게는 죽음이었으며, 까심의 경우에도 부귀영화였다. 그런데 왜 자발라위를 지향계로 놓는 것이 이 소설을 위대한 소설로 만들까?

 

자발라위라는 존재, 에 대해서 작가는 사실 어떤 입장인지 종잡을 수가 없지만, 적어도 위의 입장을 따를때에는 내 눈에는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듯 하다. 왜 자발라위는 자신의 힘으로 이 세상의 불의를 없애지 않는가? 왜 사람들이 '자발라위' 라고 외칠때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는가? 물론 소설가 나름의 답은 있다.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바꿔 말하자면 스스로를 속이고 나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힘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신이 할 일은 아니며 물론 작중의 자발라위는 신이라고 직접적으로 표상되지는 않기에 신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잘봐줘도 귀찮다, 라는 태도 이상을 벗어나기 어렵다. 더 나아가 자발라위 자체를 지향계로 (본의아니게) 설정함으로써, 작가는 종교철학에 대한 논의를 선취한다. 직접적으로 말해서 신을 신으로 보지 않고 하늘 위의 자리에서 지상으로 끌어내렸단 말이다.

 

자발라위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이 있는 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있다치고 내 말을 들어보라

 

지상에 떨어진 신은 더이상 신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이윽고 마지막 장에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사실 그가 죽기 전에도 이미 사람들은 마지막의 아라파, 의 장에서 아라파가 개발한 마법 - 이라고 보기에도 사실 조악한 폭탄 - 에 의지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 폭탄은 잘못된 자에게 넘어가서 도리어 압제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게 되지만 사람들은 또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한다. 이 마법으로 다시 압제를 몰아낼 수 있을테니까. 이제 신화의 시대는 갔고 마법의 시대, 아니 과학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발라위가 자신의 종을 시켜 긍정하였듯' (아라파는 자발라위의 죽음에 자신이 책임이 있다고 여겼지만, 자발라위는 나중에 하녀를 보내 자신의 죽음은 그와는 관련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신이 인정한 합법적인 만인의 압제에 대항하는 수단이다.

 

얼핏보면 신이 죽는다는 서사는 니체와 연관있어보이지만, 니체의 신은 춤추다가 눈물에 빠져죽어버렸다면, 여기의 신은 담담하게 자신의 종말을 맞이한다. 작가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신이 허용한 부분이라는 주장을 내보이고 있는 부분이 있으니 니체의 철학의 경향과는 매우 다른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으리라.

 

A rose is a rose is a rose a rose.

 

거트루드 스테인의 시의 한 구절로 기억한다. 지향계로 신을 해석한다고 해서, 신이라는 용어가 어떤 믿음의 대상이 되지 말아야할 이유는 - 물론 나는 여기서 다른 무신론 철학자들과 다른 입장에 선다. - 없다. 여전히 저런 식의 문장을 보고 우리는 무엇인가를 느낀다. 어딘가 깊숙한 곳에 언어 너머의 무엇인가를 발견하며 웃음을 짓는다. 과학기술도 마찬가지다. 이런 관점에서는 과학을 대표하는 아라파에게 자발라위가 웃음을 짓는다고 해서 전혀 문제될 것 없다.

 

우리는 영겁의 시간이 흘러 겨우 인간으로 바로 섰다. 우리는 한 때 수풀이었고, 새였으며, 바다에 사는 말없는 물고기에 지나지 않던 존재였으나, 무수한 진화와 자연선택에 힘입어 계통수의 한끝을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가 말없는 물고기들이었다면 도리어 고독을 쉽게 이겨낼 수 있을 능력이 있었을테니 맹목적인 믿음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인간이 된 우리는 도리어 인간이고, 말이 생겼고, 의식이 발달했기에 종교적인 신앙이 생겼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오귀스트 콩트, 가 삼단계 법칙을 주장했듯, 종교와 형이상학의 세계를 벗어나 과학의 세계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래, 물론 콩트의 주장이 옳았던 것은 아니다. 바로 전단계에서 제기한 모든 물음을 그 다음 단계가 포괄할 수는 없었기도 하거니와, 과학기술이 많이 발달했다고 일컫는 오늘날까지도 해결조차도 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걸 포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말하듯, 어떠한 방식의 압제라도 우리 손으로 뒤엎는 무기가 될 것이기에.

 

 

 

나는 일찍이 소년이고 소녀였다.

수풀이고 새였다.

바다에 사는 말없는 물고기였다.

 

- 엠페도클레스, 정화.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p.s.1. 개인적으로 엠페도클레스를 상당히 좋아한다. 논증의 엄밀함이나 아이디어의 참신함을 따지자면 파르메니데스를 더 높게 평가할 수 밖에 없겠지만.. 결국 엠페도클레스가 한 것은 그냥 종합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시작한 사원소설이 바슐라르에게 영감을 줬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 아니겠는가.

 

 

 

p.s. 2. 과학에 대하여 사실 과학도 문제점이 있지 않느냐, 등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텐데, 과학철학 및 구성주의에 관련된 논쟁에 대해서는 나도 그럭저럭 알고 있는 편이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여기에 대해서 글을 써보고 싶지만.. 사실 막상 쓰려니 귀찮기도 하다. 우울하지만 이런게 무슨 소용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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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4-11 00:54   좋아요 0 | URL
동물이나 식물은 자기 할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사람은 그러지 못하죠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남과 세계를 보고 자신과 견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하지만, 이게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좋지만 안 좋은 쪽으로 생각할 때도 많기 때문에... 그래서 누군가는 신에 의지하기도 하죠 가짜 신을 만들어내는 사람도 있군요 아니 지금 생각하니 신이 진짠지 가짠지 이것도 알 수 없군요 어떤 큰힘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게 신일지 그저 우주 법칙일지...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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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틀비가 들어있으니 추천.

 

 

 

 

 

 

 

 

 

 

 

 

 

아이작 아시모프 추천.

 

 

 

 

 

 

 

 

 

 

 

 

 

 

피츠제럴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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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노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리모노프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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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불한당의 일기이다. 이 책은 말하자면 일종의 증명인데, 그 전부터 있었고, 이후로도 있을 수많은 불한당과 악당들의 일기이며, 또한 세상에는 그들보다 더 악당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는 부재증명이다. 빛은 어둠을 통해서 더 드러난다고 흔하게 이야기하고, 신은 악을 통하여 자신의 선함을 내세운다고 하던가? 그렇다면 어둠은? 그림자는 더 짙은 어둠에 의하여 가려질따름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인공은 누구인가? 그는 러시아의 정치인인 리모노프 - 물론 필명이지만, 이다. 무엇보다도 실존인물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전기적인 형식을 가진다. 여기서 잠깐 여담인데, 저 책의 표지의 레몬수류탄을 보고 의아하게 여긴 사람들이 많으리라. 저 레몬수류탄은 바로 리모노프에서 따온 것이다. 레몬수류탄이라는 단어가 리모노프가 아니고, 레몬, 수류탄 각각의 러시아어가 리모노프와 비슷한 어감을 지닌다.

 

그런데 그와는 별개로 저 레몬수류탄은 정말 리모노프 본인의 삶을 잘 드러내주는 일종의 상징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레몬은 시고 수류탄은 폭발한다. 누구나 달콤한 것을 먹고 싶고, 쓴 맛을 가진것을 피하고 싶어하는데, 이는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항상 인생이라는 녀석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주지는 않으며, 이윽고 우리는 때때로 달콤한 인생을 맛보기도 하지만,  때때로 쓴 맛으로 토악질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신 맛은 어떤가? 신 맛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이 항상 신 맛을 찾아서 계속 먹지는 않는다. 신 맛은 달콤한 맛과 쓴 맛의 사이에 있어서, 달콤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쓰지도 않기에 그야말로 중용의 맛이고, 이윽고 인생의 맛이 된다. 이렇게라면 그냥 중용으로 살아갔기에 불한당이라고 붙이기 애매하겠지만, (톡톡 튀는 신맛만으로는 불한당일수가 없다.) 문제는 수류탄에 있다. 빵빵, 하고 터지는 수류탄에 말이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하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와 정치인생을 시작한 리모노프는 그의 인생 전반에서 수류탄처럼 터지며 살아왔다. 어렸을때는 부모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살아왔고, 겨우 참여하게 된 문학클럽에서는 자신 외의 다른 사람들의 재능과 작품을 내심 무시하면서 살아왔으며 두 번째 아내가 될 사람을 얻기 위해 자살 소동을 벌였고, 항상 자신과 자신보다 더 유명한 명사들의 삶을 대비시켜 그들에게서부터 열등감을 가지며 살아왔다. 그러다가 자신의 작품이 아웃사이더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기에 그때부터 그의 인생이 반등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평범한 성공스토리처럼 들리지만 저 맥락 사이사이에는 리모노프의 과격한 언사와 행동이 숨어있다. 이제 저 리모노프의 삶에서 빠진 것들을 채워보자. 장애를 앓고 있는 소년에게는 차라리 죽어버리지, 라는 말을 자신의 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쓰며, (밑에 저자는 눈물겨운 변명을 하고 있지만, 이건 저자가 변명한다고 해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의 성질이 아니다. 이후에 이 태도에 대하여 몇 마디 적을 것이다.) 파시스트들과 어울리고, 전쟁에 참여하고 등등. 그야말로 불한당 같은 삶을 살아온 것이다. 이는 그의 필명 리모노프와 유사하게 발음되는 수류탄에 정확히 부합한다.

 

하지만 앞서 나는 부재증명이라는 단어를 썼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리모노프는 그림자인데, 이 그림자를 덮는 더 짙은 어둠들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리모노프는 불한당에 지나지 않지만, 더 큰 악당은 저런 개인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닌, 엄청난 돈이나, 혹은 권력으로 사람들의 목숨을 사소한 것으로 앗아가는 사람들이며, 리모노프는 그 사람들에 대한 증오를 언제나 여실히 드러낸다. 내전에 참여한 것도 유사한데, 사실 진정한 악당은 저 내전을 일으키고 거기서 어부지리를 얻는 사람들이다.

 

고작 리모노프 혼자가 참전을 하였든 안하였든 차이가 있었겠는가,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악, 혹은 거대한 세력에 마주하게 된다면 어떤 사람은 자신이 깨지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열심히 비판을 하거나 할 수도 있겠지만, 리모노프처럼 이제부터 나도 삐뚤어질거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법이다. 따라서 리모노프의 삶은 거대한 악, 그러나 지금은 여기 없는 것 처럼 보이는 그런 악, 을 예감하게 만드는, 그런 예언자적인 부재증명이리라.

 

이 책의 구성상 특이점이라면 현실과 주인공의 삶을 적당히 버무려놓았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현실에서 시작하여 리모노프를 저자가 언제 만났더라, 에서부터 시작하여 리모노프의 일생을 한바퀴 돌아보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저자와 리모노프의 현실에서의 만남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런데 이런 구성은 상당한 장점을 지니는데, 이 책은 비록 소설이지만 현실에서 시작하고 현실에서 마무리한 결과 소설 구성 전체에서 일종의 현실감이 부여된다. 그러니까 지금, 2015년 3월 8일 7시 48분에(이 문장을 쓸 때의 시간이다) 저자와 리모노프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말이다. 실제 이 책은 3년 전에 출간되었을텐데도.

 

그러나 단점도 있다. 무엇보다도 한마디 안할 수 없는 것은 이 책의 주인공에 대한 저자의 태도인데, 중간 중간 잊을만하면 저자는 주인공의 삶 근처에 자신의 삶을 풀어놓는다. 그 두 개의 삶은 거의 겹치지 않으나, 완전히 평행선은 아니라서 이윽고 종국에 가서 겹쳐지게 된다. 그야말로 개떡같은 인생 - 주인공의 말이다 - 을 저자가 취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하더라도 주인공에 대한 호의가 담긴 시각은 매우 보기 불편하다. 나의 리모노프씨가 이럴리 없어, 설령 리모노프씨가 그런 말을 했더라도 정말로 위기에 빠지면 가장 먼저 달려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 사람은 리모노프씨야, 이런 문장이 줄을 잇는다.

 

이에 대한 태도는 저자의 아들의 비평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책의 말미에 아들과 리모노프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아들은 아버지, 그러니까 저자에 대하여 한마디 툭 던진다. 아버지는 그 사람을 루저로 그리기가 싫은 거에요, 라고. 맞다. 매우 적확한 비평이다. 리모노프를 작중 전체에서 루저들의 왕, 킹오브 루저, 루저들의 제왕으로 그려놓고는 마무리에 가서는 그래도 제왕이다, 라는 식으로 일관하려니 적절한 마무리가 안될수밖에. 아니 루저들의 왕은 루저가 아닌가? 킹오브 루저는 루저가 아닌가? 본인이 그렇게 그려놓았다면 그렇게 일관되게 갔어야 옳다. 꼭 무슨 뱀꼬리보다 닭머리가 낫다, 라는 식으로 사감을 개입시키지 말고.

 

그럼에도 이 책에 나오는 객관적 사실들은 어느 정도 정확한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리모노프가 두번째 아내 엘레나와 찍은 19금 사진도 검색해보니 있기도 있고 그의 자서전 등이 실제로 있는 책들이라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적당하게 객관적 근거를 잘 투여하고 있으니, 리모노프와 더 나아가 그가 속한 러시아 정치의 복잡한 양태를 그려보는데 일부 도움이 되리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여담인데, 사실 정신분석비평을 시도해볼까, 조금 뒤적거려봤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걸릴것같아서 그냥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을때, 이중의 정신분석을 행해보는 것도 상당히 흥미로운 작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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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5-03-09 11:34   좋아요 0 | URL
카레르의 신작인가 보군요. 전 카레르의 작품들을 보기 전 너무 기대치가 높았기에 읽고 나서는 매번 실망했습니다. 재미없다기 보다는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느끼는 그런 아쉬움 있지 않습니까. 이 작품은 어떨지...리뷰만 봐서는 감을 잡기 힘드네요~^^

희선 2015-03-10 01:49   좋아요 0 | URL
세상에는 리모노프 같은 사람이 있을 것 같네요 많다고 하려다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잘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한 일이 별로 좋지 않았을 테죠 그래도 이것저것 잘했다는 말이 있기도 하더군요 뭐든 잘하지만 뛰어나게 잘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생각나기도 하네요 저는 그것만 해도 어딘데 하는 생각을 할 텐데...

이 사람 이야기는 왜 썼을까요 그렇게 괜찮은 사람은 아니지만 알아둘 만한 사람이기에 쓴 걸까요 좋아한 건 아니겠죠

이것도 잘 모르는데 이런 말을 했네요


희선
 
[선셋 리미티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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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가 시작될무렵, 유럽 신학계와 철학계는 고대로부터의 유산을 받았다. 그 유산은 고대의 두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비롯된 것인데, 두 가지 흐름으로 나뉘게 되었다. 하나는  신플라톤주의, 라는 이름이 붙어, 유대전통과 결합하여 플로티누스에 이르러 찬란하게 빛이 나기 시작하였고, 다른 하나는 이슬람에서 역수입되어 이븐시나와 아하수에로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석, 이라는 형태로 흐르기 시작하였으니 이에 우리가 흔히 생각했던 것과 달리 - 중세를 흔히들 암흑시대라고 하니깐 - 그 내부의 빛은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 빛을 수용하든, 혹은 배척하든.

 

그런데 이에 대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중세 신학의 첫 번째 줄기를 만든 교부철학의 아버지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호교론자들이 특히 이런 경향을 싫어했는데, 이들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일단 사람들이, 그것도 교양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리스 철학을 소위 쿨-하다고 생각해서 열라게 공부하는데, 그런 사람들한테도 전도를 하고 싶은데, 어설프게 이야기했다가는 씨알도 안먹히네? 그러니 열라 멋지게 말을 화려한 수식법을 써서 이야기는 하는데, 이게 영 맘에 안든단 말이지.

 

생각해보라, 사실 플라톤도 그렇고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렇고, 그들은 교회입장에서는 사실 이교도들아닌가? 그런데 이교도들이 그렇게 잠식하면서 생난리를 피우고 있는데, 우리는 그게 바로 교양이라고 마구 받아들인다니. 이런 아이러니한 일이 어디있는가 - 결국 이 간극은 둔스 스코투스에 이르러 극명하게 재조명되게 되고 이윽고 서로 갈길을 가게 되지만 그것은 이때보다는 훗날의 이야기이고.

 

그 중에서도 테르툴리아누스, 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이 한 말이 있는데, 바로 이 글의 제목인  Credo quia absurdum(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이다. 사실 라틴어가 제대로 맞는지 모르겠지만 - 기억에 의존해서 쓰는 거니 양해바란다 - 여튼 이런 말을 하면서 전도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왠지 무언가 있어보이지 않는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이것이 전형적인 호교론자의 어법이었다. 무언가 있어보이면서도 그렇다고 뭐라 콕 집어서 설명하기도 어려운.

 

그리고 이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라는 명제는 뒤에 스콜라 학파에 이르러 -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 믿기 위하여 이해한다, 로 바뀌기도 하다가 (내 기억에는 안셀무스가 이런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키에르케고르에 이르러 실존철학의 뿌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솔까말 백더하기 백은 이백이라는 거,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거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있누? 누구한테나 똑같은 그런 진리, 대륙의 합리론자들이었다면 무덤에서 벌컥 박차고 튀어나와 신발을 던질지도 모르겠지만 - 엠페도클레스는 자신의 죽음을 완벽하게 은폐하고자 몸을 화산에 던졌지만 끝내 신발 한 짝이 밖으로 나와버렸다 -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런게 아니다.

 

라고 키에르케고르는 생각한거다. 누구한테나 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다. 삶, 죽음, 그리고 무엇을 믿는가. 바로 여기서 믿음의 문제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단숨에 격상되게 된다. 그리하여 저 모순된 언명이 제대로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믿어라! 일단 믿고 보라! 그러면 너의 삶에 닥친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그런데 이 상황을 잘 살펴보면, 절대 논쟁에서는 이길 수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보통 우리가 논쟁에서 이기려면 논리적이어야 하고, 근거가 확실한 출처를 가지고 많이 확보되어있어야만 되는데, 1. 불합리하다 -> 논리적이지 않다, 2. 불합리하다 -> 근거가 확실한지도 모르겠다. 로 끝나게 되니 신과 관련된 논쟁에서 논리적인 결론이 날 수가 없는 거다. 그렇다면 저 언명을 포기하여야 하는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게 아니라면, 저 이교도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런데 이교도들의 철학을 교회의 중심에 놓다니? 그러면 다시 합리화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이교도고 예수도 모르지만, 그래도 계시비스무리하게 받은거라고. 그렇게 합리화를 하더라도 찜찜한 것은 사실이다. 왜? 저들을 중심에 놓는다는 것은 시한폭탄을 받아들이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는 삼위일체에 대하여 싸웠고, 결국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아타나시우스지만, 그 아타나시우스가 지금껏 통용되는 삼위일체에 대한 기본 해석을 내렸다고 해서 박해를 안받은 것은 아니다. 저 삼위일체에 대한 해석이 - 양태론이든, 아니면 예수가 피조물이든, 아니면 오늘날 받아들이는 것 처럼 신에 대한 위격이든지 - 이렇게 다양하게 되어버린 것은 바로 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스승의 이론을 중심에 놓았기 때문이기에 시한폭탄을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 결과로 아타나시우스는 박해도 받았다. 오늘날 니케아 공의회에서 내린 삼위일체에 대한 표준 해석을 내놓았는데도 말이다.

 

이상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이라면, 다음과 같은데, 우리는 논쟁은 역시 인간의 것이고 믿음은 신에게 다다르는 것이니, 영원히 신자들은 논쟁에서 무신론자를 이길 수 없을 것이고 - 애초에 논리로 믿음을 설명하고 논쟁한다는게 말이 안되지 않는가 - 무신론자는 영영 신에 다다를 생각이 없을 것이다. 다다를 수도 없을지도 모르지만 난 여기에 약간 비정통적인 사례를 하나 끼워놓고자 한다. 나니아 연대기에 그 사례가 나오는데, 거기서 아슬란은 바른 방법으로 삶을 살아간 것이라면 설령 적대자를 섬겨도 누구든 자신을 섬긴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니 말이다. 궁금한 사람은 최후의 전쟁을 읽어보시라.

 

여튼 바로 이지점에서 코맥 매카시의 선셋 리미티드가 시작한다. 그러니까 위의 서설은 말하자면 준비작업이다.난 코맥 매카시가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전작이 뭔지도 모르겠으며, 왜 이게 인류의 운명을 결정지을만큼 (광고에 그렇게 적혀있어서 솔깃했다) 대단한 책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난 물음표다. 하지만 특색있게 대비를 해놓은 것에 대해서는 점수를 좀 주고 싶긴하다. 작가를 모르면 참 편하다. 이렇게 마구 평가하는 양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선셋 리미티드, 가 시작하는 지점은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위의 저 서설이고, 여기서부터 흑과 백은 대립을 시작한다. 흑은 흑인 목사이고, 백은 백인 교수인데, 흑인 목사는 이야기한다. 불합리하지만 믿으라고. 그러면 너 좋아짐. 오케이? 하지만 백인 교수는 고개를 젓는다. 내 기반은 모조리 망가졌는데, 뭘 더 믿을게 있음?

 

그리고 시작하는 지점을 짚어낸 만큼 끝나는 지점도 짚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 끝나는 점은 말하자면 불교철학의 용어로 진속이제설, 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는 나가르주나, 가 불교철학을 정립하면서 나온 이야기이다. 일종의 부정변증법이라고 보면 되는데 - 그렇다고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을 떠올리면 곤란하고 - 쉽게 말해서 소위 말하는 변증법인 정반합에서, 정과 반이 서로 부딪히다가 둘다 지양되는 형식이다. 별로 어려운 말 아니다. 난 천재다. 라는 명제가 있고, 난 바보다, 라는 명제가 있다고 하자. 그럼 이 진속이제설에 따르면 니가 천재든 바보든 니 삶에는 아무 지장 없음ㅋㅋ 이 되는 거다. 아마 우리가 익숙하게 느낄 정반합공식에 따르면 넌 그냥 인간임ㅋ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흑인 목사의 말도 지양되어야 되고, 백인 교수의 말도 지양되어야 한다는 거다. 이들의 말은 둘 다 진리가 아니며, 둘 다 옳지 않다. 그리고 나가르주나에 따르면 어떠한 것이든 진리는 둘 다 아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둘 다 나와 상관이 없다, 에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저 팽팽하게 대립하는 두 개의 명제는 더 높은 차원에 다다르게 되며, 그 차원에서 바라보면 저 두개는 비진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내부에서는 팽팽하게 대립하는 대결이겠지만, 이 두 사람이 있는 공간을 초월한 곳에 있는 존재가 보게 될 경우, 그러니까 독자가 책을 읽을때, 그 의미를 가지고 다시금 비진리로 지양되는 과정을 거쳐 새로운 진리가 되리라. 그리고 그 진리는 읽어나가는 독자 모두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읽어나가는 독자에게는 영영 저 책 내부의 등장인물들이 다다를 수 없고, 오직 그들의 말들만이 와닿을 뿐이다. 불교적 부정변증법이 이보다 더 잘 해당될 수 있는 곳이 있겠는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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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3-10 01:46   좋아요 0 | URL
두 사람만 나와서 뭔가 이야기를 하는가보네요 책 소개에 있는 글을 보니 그런 말이 있더군요 그 두 사람은 왜 거기에서 만나고 이야기를 할까 싶습니다 어쩐지 답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네요 두 사람 말이 다 진리는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 말이 나름대로 진리일 수도 있죠 잘 모르는데 이런 말을 했네요 진리는 하나가 아니고 시간이 가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한 건 얼마 안 됐어요

대립해서 흑과 백... 이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거군요
두 사람을 보면서 다른 것을 볼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여기에서 뭔가를 찾으려고 하는군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렇구나 할 뿐입니다


희선

테레사 2015-03-16 10:33   좋아요 0 | URL
이거 ..괜찮을까요? 코맥 매카시의 작품은 어쩐지 두려워서 읽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깊게 상처받을 것 같아서요...이상하게 두렵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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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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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그건 아주 어릴때 일이었다. 초등학교 갓 1학년에 입학한 나는 미생물을 볼 수 있는 재주를 타고났고, 육안으로 말이다, 그래서 그 재주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느라 바빴다. 야, 난 미생물을 볼 수 있어. 뭐라고? 미생물? 그래. 난 눈으로 미생물 볼 수 있다구. 어떻게 보는데? 그건 쉬워. 이리 가까이 와봐, 그리고 저쪽 형광등 쳐다보고는 눈을 찡그려봐 -

 

그리고 그, 혹은 그녀들은 내가 찡그리고 있는 곳으로 다가와서 옆에서 찡그리면서 빛을 보았다. 사람이 어떻게 육안으로 미생물을 보겠는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형광등을 향해서 눈을 찡그려보라. 그러면 분명 무언가가 부유하고 있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무정형의 생물처럼 보이는 그녀석은 갑자기 공기 중에 톡톡하고 뛰어다니면서 멀리서 허공을 기어다닐 것이다. 굳이 티오마가리타 나미비엔시스가 아니더라도 (이 세균은 1mm크기다. 육안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모든 세균이 다 눈에 안보이는 것은 아닌 것이지) 당신 눈에 무엇인가가 보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아니다. 초등학교때의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올바른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결국 내가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미생물이 아닌 그 무엇인가가 보인다, 정도였다. 미생물이라니. 허공에 실제로 그렇게 미생물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쉽게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훗날 알게 된 사실로는 그것은 눈의 부유물이었고 - 눈의 유리체라던가, 동공에 떠다니는 그런 것들 말이다 - 외부의 물질이 아니었다.

 

이는 마치 칸트의 철학과 같아서, 정말 거칠게 거칠게 이야기하면 우리는 일종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본다, 라고 여겨지게 되는 꼴이다. 내 눈의 부유물이 미생물인줄 알았다니. 그야말로 웃긴일이 아닌가. 하지만 또 그게 그렇게 그럴듯하였다니.

 

플래너리 오코너의 이 단편집도 마찬가지인데, 이 단편집의 소설은 플래너리 오코너가 쓴 안경을 통하여 바라본 세계를 그대로 투영한다. 남부, 루푸스, 가톨릭. 책 날개에 플래너리 오코너에 대하여 설명해놓은 - 난 사실 이 책을 읽기전에는 작가를 전혀 몰랐다 - 부분을 보면 결국 그녀를 규정지었던 것은 위의 세 부분임에 틀림없었으리라. 여성주의적인 부분도 별로 없고, 경제적 계급에 대하여 이야기한 부분도 별로 없다. 그녀의 소설에 나오는 계급은 흑인과 백인, 이라는 인종적 차별에 기반한 것이고, 그 계급을 두고 옳음과 옳지않음조차 없이 뒤섞여 (단편 이발사) 남부 사람들의 편집증적인 흑인에 대한 혐오와 함께 (대부분의 단편) 가톨릭적인 신앙을 변주로 죽음이라는 결과를 맞이한다. (대부분의 단편)

 

남부는 인종에 대한 모티프를 제공하고, 가톨릭은 그대로 쓰인다. 그녀가 가톨릭적인 신앙에 대하여 맹목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는 것이 잘 드러난 단편 중 깊은 오한, 을 읽어보면 주인공은 허위에 가득찬 인물인데 가톨릭 신부를 보고 처음에는 감화받았지만, 나중에 찾아온 가톨릭 신부를 보고는 이 사람은 내가 찾던 사람이 아니야, 라고 부정하게 된다. 결국 주인공은 자신 멋대로 상대를 규정하고 - 플래너리 오코너가 저 세개의 돌로 이뤄진 안경을 썼듯 - 그 또한 자신만의 안경을 낀 셈이다.

 

그렇다면 루푸스는? 죽음의 모티프를 제공한다. 죽음은 모든 것을 마무리 짓는 파괴적인 힘이다. 여기 주인공들은 거의 대부분이 허위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허위를 박살내주는 사람들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니까 헤겔식의 변증법은 여기에 통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첨예한 대립을 이룰 수 밖에 없고, 결국에는 죽음으로 해결될 수 밖에 없는 문제인 것이다. 예를 들어 글들 중 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 에서의 셰퍼드는  흑인 소년 루퍼스 존슨의 아이큐가 140이라는 점때문에 그를 돌보기로 마음먹는다. 마치 자신이 그를 올바른 길로 이끈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저 루퍼스가 제대로 된 사람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마치 Lupus처럼 Lupus는 셰퍼드의 온몸에 퍼지고 결국 그의 아들을 앗아가버린다.

 

대부분의 단편의 끝이 죽음이라는 점은 한편으로는 소설 전반적으로 활력을 앗아가고, 평론가들이 말하는 '남부 고딕' 이라는 그로테스크한 장르로 형성시키는데 일조한다. 하지만 저렇게 포장하는 것은 평론가들이나 하는 일이고 독자들 입장에서는 아, 이 사람 곧 죽겠네, 다치겠네, 와 같이 결말이 뻔히 예측가능해진다는 문제점을 낳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정도는 흥미롭지만 그 흥미로움이 지속된다면 결국 지루함으로 바뀌게 된다. 이 단편소설집이 단편이었다면 정말 강렬했겠지만, 혹은 하루에 한편씩 읽었다면 정말 당황스러웠겠지만, 하루에 다 읽기에는 좋지 않는듯 하다. 그야말로 기승전죽음, 기승전다침, 이니까.

 

하지만 저런 단조로움이 장점을 지울 수는 없다. 저 세 개의 돌이 섞인 안경만으로도 플래너리 오코너는 모든 세계를 펼쳐내었다. 여기서 다시 칸트 이야기를 적지 않을 수가 없는데, 칸트는 계속 자유의지와  정언명령, 실천 이성 등을 두고 고민했었다. 그런 그가 내린 결론은 결과적으로 또 거칠게 말해서 나한테 적용되는 규칙은 내가 만든다, 였다. 당신이 황금률에 기반한 - 거칠게 말한거다 - 어떤 준칙을 세우고 따른다면 당신은 자유로운거라고 말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내 눈에 안경을 낄 수 밖에 없다면 내 안경은 내가 고른다는 거다. 내가 고른만큼 나는 내 세계를 볼 수 있다.

 

이는 오코너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물론 루푸스도, 남부도, 가톨릭도 - 어쩌면 가족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 사실 그녀 스스로 고를 수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녀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다시금 그것은 그녀에게 자유를 안겨주게 된다. (아까도 말했지만 내 준칙을 내가 만든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 준칙을 따르는데 부담이 없다.) 아마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그녀가 나름의 규제와 병에 맞서싸우는 하나의 방식이었으리라. 그리고 이 소설집은 그녀의 싸움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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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5-02-02 10:24   좋아요 0 | URL
전 그 부유물들을 인어공주의 거품, 공기의 요정이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지금도 하늘을 보며 공기의 요정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요.

yamoo 2015-02-02 16:01   좋아요 0 | URL
너무 오랜만이십니다~^^

희선 2015-02-03 02:16   좋아요 0 | URL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떠오르는군요 사람은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고 거기에만 빠져 잘못하면 안 되겠죠 이렇게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때가 없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런 것과 상관없을지도...

세상에는 밝은 곳도 있지만 어두운 곳도 있죠 어두운 곳은 거의 피하려고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야기도 어두운 게 있어야겠죠 그런데 그런 것을 잘 안 볼 때가 많군요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