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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책들만... 이것 저것 놀다보니까 이렇게...

 

 

 

플라톤의 향연 입문.

향연의 설명서. 서광사의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책을 본 적이 있는데, 참고가 되었다. 이번 책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기술과 문명.

루이스 멈퍼드의 책이다. 흥미로운 주제가 될 것이다.

 

 

 

 

 

 

 

 

 

 

 

 

 

문명 이야기.

배교자 율리아누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반도 분할의 역사

사실 내가 요즘 들여다보는 분야가 근대사쪽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이렇게 놓아두련다.

 

 

 

 

 

 

 

 

 

 

 

 

불멸의 이론.

 베이즈 정리에 관한 책인데, 이 베이즈 정리는 객관적 관점에서, 혹은 주관적 관점에서 기술될 수 있다. 이 책은 주관적 관점을 기초로 서술하고 있는 듯 하다.

 

 

 

 

 

 

 

 

 

 

 

 

 

아.. 다음부터는 예전처럼 책도 좀 들여다보면서 추천을 해야겠다. 예전엔 서점에 가서 직접 책을 들여다보면서 추천을 했는데, 지금은 서점을 가기가 너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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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9-09 17:36   좋아요 0 | URL
올리신 책들 중에서는 마지막 두 권이 가장 땡기는군요. 저 마지막 책은 혹 서평단 책이 안되어도 나중에 가연님의 고견을 듣고 싶군요.

가연 2013-09-10 17:29   좋아요 0 | URL
ㅠㅠㅠ고견이라뇨,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아마 두 권다 안 될 가능성이 높을 것 같네요.

희선 2013-09-11 03:34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듣는 빗소리도 좋더군요 그렇게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와서... 비가 내려서 아주 가을이 되는 것은 아닐 것 같지만, 다음주 낮에 좀 더울거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가을비군요

공부는 끝이 없는 것이라고 하는데, 가연 님은 정말 그렇게 살아가고 있군요 읽는 책이나 읽고 싶어하는 책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지요 본받아야겠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읽는 책은... 저도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재미있기 때문이죠 어떤 책에서든 무엇인가를 찾아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조금 신기한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라디오 방송에서 하우스라는 것에 대한 말을 잠깐 하더군요 가연 님이 쓴 글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때 뭔지 몰랐는데 이제 알았습니다 이게 신기한 일은 아니고, 그 말이 나왔을 때 제가 보고 있던 책에도 하우스라는 말이 나오더군요 책에 나온 것은 말 그대로 하우스지만...^^

이 하우스도 의사 이름뿐 아니라 집을 나타내기도 하겠네요 의사가 환자 집까지 가서 그 사람이 어떤 병인지 알아낸다고 했으니까요(이 말은 들었는데 뒤에 한 말은 잘 못 들었습니다) 이 드라마 재미있을 것 같네요


희선

가연 2013-09-23 17:38   좋아요 0 | URL
아하하.. 제가 얼굴이 다 빨개지네요. 아니에요, 저는 그냥 놀고 있답니다. 공부해야지 생각은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는.. 가을비는 며칠 전에도 내렸습니다.

하우스House는 셜록 홈Home스에서 따온 거래요, 그래서 추리능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희선 2013-09-17 00:30   좋아요 0 | URL
책이 다른 게 보이는군요 '빅 히스토리 - 한 권으로 읽는 모든 것의 역사' 정말 한 권으로 다 알 수 있을까요 '스티븐 호킹 자서전'도 보이고, '찰스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 이 책에는 그림도 있는 것 같더군요 그때 그린 것인가요 책 소개에 조금 쓰여 있는 글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오늘만 지나면 추석연휴로 올해는 긴 편이네요 가연 님도 쉬는 거 맞죠 달이 잘 보일지 모르겠는데 달도 보고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시간 없어서 못했던 것을 할 수 있다면 좋겠군요 며칠 안에 다 할 수는 없을 테지만...^^


희선

가연 2013-09-23 17:39   좋아요 0 | URL
ㅎㅎㅎ 빅 히스토리는 요즘 관심주제라 저렇게 올려두었어요. 다 제 관심주제에요, 풋. 근데 언제나 들여다볼런지는 모르겠어요.

정말 긴 추석연휴였습니다만, 지나고 난 지금 시점에서는 정말 짧은 추석연휴였습니다. 조금만더 연휴가 길었었다면 좋았을텐데 잘보내셨습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묵시록의 네 기사를 죽음, 전쟁, 기근, 역병이라고 둔다면, 무신론에도 네 기수가 있다. 리처드 도킨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샘 해리스, 데니얼 대닛이 바로 그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저 네 명이 무신론에 관하여 찍은 대담의 이름도 바로 묵시록의 4기사이다.) 이들 넷이 지나간 자리는 그야말로 위의 묵시록의 네 기사가 지나간 것처럼 비논리적인 관념은 황폐화되버리고 만다. 유일신과 인격신을 믿는 자들에게 무자비한 영국식 발음으로 악센트를 혀로 굴려가면서 상대방의 입을 다물게 만들고, 종교를 옹호하는 자라면 그 상대가 고등학생이나 중학생이라도 상관없이 Absolutely wrong!을 외치며 어떻게든 굴복시키는 죽음의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 당신은 신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라는 말을 하는 어느 신자에게 아니 도대체 없는 것에 어떻게 화를 낼 수 있는가? 라며 종교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전쟁을 하고 있었던 악마의 변호인 (마더 테레사의 시성에 참여하여반대의견을 매우 많이 피력하였다) 크리스토퍼 히친스, 도대체 신이 왜 필요한 것인지, 신앙이라는 것은 전혀 쓸모없는 존재라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아 종교를 모조리 말려버리려 마음을 먹은 기근의 마법사 샘 해리스, 인지과학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지적설계에 대하여 강인한 공격을 퍼붓고 마치 역병처럼 무신론을 전파해나가는 무신론계의 신성 데니얼 대닛.

 

바로 위에서 볼 수 있는 동영상은 그런 네 기수 중 수좌인 리처드 도킨스에게 (왜 리처드 도킨스를 수좌로 놓았는가? 그것은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하기 때문이다.) 날아온 한 묶음의 증오의 편지Hate mail다. 사실 컴퓨터로 날아왔으니 한 묶음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어떤 내용인지는 지금쯤 다 들어보았으리라. 굳이 간략하게 기억에 남는 한 구절만 끄적여보자면, GO BURNING HELL. 그야말로 뭐라 할 말이 없는 구절들이다. 도킨스가 종교를 믿는 자들에 대하여 많은 반감을 사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마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신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관념을 조금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절대로 객관적일 수 없으며, 그렇기에 글에도 반드시 내가 더 가치를 두고 있는 부분이 담길 것이리라. 나는 굳이 어떤 카테고리로 분리하자면 이신론Deism에 가까운 생각을 가지고 있다. 신의 속성을 정의하자면, 나는 세 가지를 들 것이다. 전지, 전능, 편재. 신은 무엇이든 알고,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하며, 어디에든 존재한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존재가 있을까? 나는 솔직히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다. 굳이 저런 세 가지 속성을 가지는 것이 있다면 법칙 - 인간이 지금까지 밝혀낸 불완전한 법칙들이 아닌 - 그 모든 법칙들의 원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모사된 불완전한 환영들과의 관계와 같아서 우리는 끝없이 그런 법칙에 다가가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법칙은 마치 기계와 같다고 본다.  특히나 그 존재가 인격을 가진다거나, 사람의 외모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더더욱 부정적이다.

 

그러니깐,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칼 세이건의 이 말을 들 수 있겠다.'만약에 신이라는 말이 어떤 우주적 법칙을 의미한다면 분명 존재한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뒤의 말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중력의 법칙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런 신은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기계장치의 신Deus ex machina인 것이다.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관념이다. 그렇다고 내가 적극적 무신론자들인 위의 네 명, 특히 리처드 도킨스, 에 대하여 많은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앞선 글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너무 강한 주장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애초에 나는 법칙을 신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물리학적인 지식을 통하여 그 신이 '실재' 한다는 것을 깨닫을 수 있다. 물론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절대 인격을 가진 신은 아니다. 가끔은 이런 상상을 해본다. 뭐,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희박하지만, 정말 초 희박한 확률을 뚫고 신이라는 존재가 정말 눈 앞에 나타나, 나 사실 신이다, 라고 말한다면 과연 리처드 도킨스는 어떤 이야기를 할까? (예상되는 반응 1. 그런 신은 초월적인 신이 아니다. 과연 초월적 신이 자신을 반대했다고 앞에 나타나는 그런 찌질한 짓을 할까? 반응 2. 신이라고 불릴 만한 근거가 부족하다. 스스로 신이라고 주장하는게 신의 기본 요건이라면 나도 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반응 3. 신이라는 존재라 주장한다면 검증을 거쳐야 한다. 등등등)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무신론 설파 커리어를 그의 초기작인 이기적 유전자 서문에서부터 시작한다. 서문을 보면 이러한 이야기를 꺼낸다. '침팬지와 인간은 그들의 진화 역사 중 대략 99.5%를 공유하지만 대부분의 사상가들을 자신을 전지전능자로 가는 디딤돌로 여기는 반면, 침팬지는 엉성한 짐승으로 여긴다' 고 말이다. 이 문장은 단순한 비교를 늘어놓은 문장으로도 볼 수 있지만 이후 리처드 도킨스의 행적을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저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 인간은 결코 침팬지와 다를 바 없다. 신이 과연 인간을 침팬지와 다른 존재로 만들었을까? '설령 화석이 발견되지 않더라도 수많은 분자생물학적, 유전학적인 증거가 우리를 원숭이로부터 진화한 존재라는 것을 뒷받침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이기적 유전자에서는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유전자에 대한 연구를 집대성한다.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 사람들은 이 책을 보고 유전자라는 것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야, 라는 편견을 가지기 쉽지만, 그것은 유전자라는 것을 인간과 동일선상에 놓음으로써 생기는 오류다. 인간은 유전자가 아니다. 이 말을 바탕으로 비유를 들자면, 유전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실제로 유전자에게는 이런 지능이 존재할 리가 없겠지만) 아, 내가 죽어도 나와 비슷한, 혹은 동일한 유전자들이 더 많이 번성한다면 그것으로 좋다. 그러니 지금 내가 희생을 하여야 겠다. 이 이기적 유전자, 에 대한 몇 몇 반박론들이 동물의 이타적 행위를 기록하는데 그치고 있다는 점은 참 아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실제로 유전자는 마치 이타적인 것 처럼 행동을 하기 때문이며,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동물은 유전자와 동치관계에 놓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무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이 책의 제목은 이타적 유전자, 가 아니라 이기적 유전자인가? 쉽게 말하여 유전자 A의 입장에서는 이타적일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유전자들을 A, B 등등 세밀히 구분할 수 없다. 모두 같은 유전자인 것이다. (A, B 이런 식으로 유전자를 나누는 것 자체가 각자의 개성을 중시하는 일종의 인간중심주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유전자 전체로 볼때, 자신의 일부를 희생하여 자신이 번성한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결국 자신을 위한 일이라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이기적 유전자, 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가 공전절후의 베스트셀러에 오르자, 리처드 도킨스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무신론을 설파하기 시작한다. 왼쪽의 만들어진 신은 원제가 the God delusion인데, the God delusion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 신 = 망상. 왼쪽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와 함께 무신론자들의 필독서가 되버린 이 책은 그렇게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다. 어쨌든 신이란 세상에 거의 없는 것 같다. 거의 없다니? '거의'가 의미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리처드 도킨스는 과학자이다. 과학자는 증거가 말을 하도록 놓아두어야 한다. 아직까지는 신의 부재를 완전히 과학적으로 설명할 증거는 없다. 도킨스가 이 책에서 공격하는 것은 신에 대한 논증들은 모두 논파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증거가 꼭 필요한 과학을 해온 도킨스로는 신에 대한 논증들이야말로 이상하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증거가 없으면 없을 수록 더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니, 그야말로 이상하지 않은가?

 

여기서 방향을 조금 틀자면 무신론자들의 생각으로는 종교는 미신에 가깝다고 본다. 이는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한 실험을 가져올 수 있겠다. 스티븐 핑커(로 기억한다)가 진행한 한 실험에서 이 연구진들은 상자 안에 비둘기 한 마리를 가둬두고 먹이를 주는 실험을 했다. 먹이를 줄 때 그 비둘기는 여러 방향으로 움직이는데, 이를 조절하여서 특정한 방식으로 움직일 경우에 먹이를 주도록 하였다. 단순화하여 비둘기가 위로 움직일때마다 먹이를 주었다고 하자, 이렇게 실험을 반복하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비둘기는 이렇게 믿게 된다. '아, 내가 위로 움직이면 먹이가 생기는구나' 그래서 비둘기는 그 이후 배가 고플때마다 위로 움직이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사실 음식을 주고 안주고는 실험자들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종교도 마찬가지라서 우리가 일정한 형식의 의식을 올린 뒤에 복이 떨어진다고 믿지만 (기복신앙의 경우) 실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건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고, 미신에 지나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무신론이 위의 실험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실제 현실에서는 저 실험에서 실험자 역할을 맡은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은 실험자가 존재하더라도 그 실험자는 우리를 신경쓰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리처드 도킨스도 마찬가지이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이라는 동명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처음부터 바넘 효과Barnum effect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사람들에게 점성술에 관련된 쪽지를 나누어주고, 당신과 이 말이 얼마나 맞는지를 조사해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웃긴 것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내용은 사수자리의 성격에 관한 것이며, 모두 동일한 자료였었다는 점이다. 그 동일한 자료를 보고 각기 다른 별자리를 가진 그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을 한다. '와우, 이거 제 성격이랑 똑같은데요?' 이런 것을 두고 우리는 바넘 효과라고 부른다. 종교 = 미신, 이라고 규정을 하는 리처드 도킨스에게는 종교적 의식은 바넘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진화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요약하자면 기적이 행해졌다고 알려진 곳에 가면 몸이 치료가 되는가? 도킨스는 이야기한다. 그럴 리가 있겠냐?

 

다만 말해둘 것은 이 책에서는 불교에 대한 비판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는 점이다. 불교를 두고 도킨스는 일종의 철학 체계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실제로 이 말은 맞는 말이기는 하다. 불교는 분명 종교라기보다는 철학 체계에 가까울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교가 다른 종교에 대하여 더 우월하다고는 볼 수 없다. 도킨스의 비판을 불교가 벗어난 것은 단지 일신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불교서 굳이 신이라 들 수 있는 존재는 비로자나불이리라. 진리 그 자체를 형상화한 부처말이다. 하지만 이 비로자나불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불교 자체도 사실 숭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이는 사실 종교로서는 약점이라고 볼 수 있는데, 포교가 되지 않는다 - 숭배보다는 스스로의 불성을 깨닫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라는 점에서는 이 불교 또한 종교의 해악을 비켜나가기 어렵다.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저서인 신은 위대하지 않다, 에서는 몇 장을 할애하여 불교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다. 특히 일본 불교를 가져와서 불교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제 2차세계대전때 불교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선에 투입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바로 이 점에서 불교는 분명 비판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이런 맥락의 비판은 우리나라에서의 성철 스님의 일화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철 스님을 두고 사람들은 고승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고승으로서 성철 스님은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 크리스토퍼 히친스같은 이가 냉철하게 본다면 현실 도피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겠지만 히친스는 우리나라의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 시절 귀국했을때 동행한 지식인 중 한 명이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불교 비판은 잘못된 부분이 있다. 히친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불교를 마치 허무주의의 종교, 인 것 처럼 해석을 가하며 사례를 가져와서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불교는 결코 생이 허무하니 기꺼이 버려라, 라고 말하는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일본 불교를 가져온 것도 문제가 있는데 일본의 불교를 과연 얼마만큼 불교라 볼 수 있는가, 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일본은 일종의 만신전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힌두교에 받아들여진 석가모니를 불교의 석가모니와 동일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제노사이드, 의 작가인 다카노 가즈아키는 자신의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30&contents_id=10889) 일본인들은 태어나면 신사에서 절을 하고, 결혼할 때는 교회에서 하고, 죽을 때는 절에 간다, 고 말이다.

 

이런 불교에 대한 비판은 우리에게 종교와 이성 사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준다. 다시 성철 스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고승으로서의 성철 스님은 과연 깨달은 자, 일까? 깨닫지 못한 사람은 깨달은 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가 침묵을 지킨 것이 일종의 견성의 일환이었다면? 우리가 불교에 대하여, 그리고 다른 종교에 대하여 충분히 깨닫지 못하였기에 종교를 비판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바로 이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비판한 사람들 중에는 마더 테레사 - 그렇다, 테레사 수녀다 - 가 있는데, 그는 테레사에 대하여 여러가지 가열찬 비판을 하고, 마무리로 그녀의 편지를 꺼낸다. 그녀의 편지는 다 줄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유튜브에서 히친스의 토론 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4n05IxYaFS0  ) '나는 더이상 그(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의 해석을 히친스는 '마더 테레사도 결국엔 무신론으로 돌아섰구나', 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 해석을 우리는 옳다고 볼 수 있을까? 문자 그대로의 해석은 분명 히친스가 옳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종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종교에 어느 순간 회의를 가질 때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런 회의감 속에서 글을 썼다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지 않을까? 동시에 이런 부정을 통하여 더 종교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가지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옛날 나가르주나가 불교의 논리를 정립하면서 부정의 부정을 가져온 것 처럼 말이다. '정말로 깊은 진리는 부정의 부정을 통해서 찾아온다.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무엇으로도 전할 수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히친스의 비판은 피상적인 비판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인간을 어디까지 중요시할 수 있는가, 라는 주제로 넘어가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다. '이 세상에 4만명의 오빠가 있고, 그 오빠의 사랑을 모두 합치더라도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오필리어가 죽고 레어티스가 오필리어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뿌리자 햄릿이 나서며 하는 이야기이다. 신에 대한 관념도 마찬가지인데, 신을 오빠, 그러니까 레어티스라고 두고, 인간을 햄릿, 또 다른 인간을 오필리어라고 두면 왜 갑자기 저런 주제로 넘어가게 되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이 세상에 4만명의 신이 있고, 그 신의 사랑을 모두 합치더라도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것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이야말로 히친스와 도킨스가 왜 그렇게 집요하게 무신론을 고집하는지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도덕을 지키는 것에는 굳이 신이나 종교와 같은 매개체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도 여기에 공감한다.) 인간이 인간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완전히 사랑할 수도 없을지도 모른다. 신이란 존재를 떠올린다면, 그 이상적 존재는 우리 인간에 대하여 한없는 사랑을 베풀 것이다. 그렇기에 충분히 정서적 만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신과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과 같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전할 수 없는 진리가 어떻게 진리라 부를 수 있겠는가? 히친스의 저런 해석의 배경에는 이런 부분이 숨어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과학자이기 때문에 도킨스의 종교에 대한 비판은 필연적으로 종교와 과학의 긴장관계를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종교와 과학은 정녕 어느 하나가 사라져야만 하는 관계에 놓여있을까? 그 둘은 양립할 수 없을까? 스티븐 제이 굴드의 NOMA라는 개념을 가져오면 두 축은 서로 양립할 수가 있다. NOMA는 Non Overlapping MAgisteria의 약자로 서로 겹치지 않는 영역, 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magisterium의 사전적 의미는 교학권 정도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긴 설명은 모두 치우고, 이 개념은 종교와 과학은 둘 다 중요하며 서로 겹치지 않는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얼핏 보면 매우 합리적인 개념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창조론자들의 지적설계론은 이 개념으로는 대응하기가 어렵다.

 

지적설계론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지적설계자가 설계를 하였다, 라는 의미와 동일하다. 그러니까 창조론에서 신이 창조했다는 구절을 지적설계자가 창조했다, 라고 바꾼 것과 다를 바 없다. 여기까지만이라면 차라리 상관없지만 각종 과학적 영역을 지적설계론으로 포섭하려는 시도가 종종 일어나고 있다.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이 그 대표적 논거다. (물론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을 가진 생물은 하나도 발견되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 지적설계론은 저 명제에서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지적설계자라면 외계인? 외계인이 창조하였다는 말과 뭐가 다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본질적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설계자는 누가 만들어내었나? 얼핏 보아도 헛점이 보이겠지만, 만약에 이를 종교라 주장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앞선 NOMA개념으로는 과학과 종교는 서로 겹치지 않는 영역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지적설계론은 아무리 보아도 과학으로는 양립할 수 없는 이론이다. 과학적 영역을 침식하려고 드니 말이다. 하지만 지적설계론자들이 자신의 이론을 종교로 끝까지 주장한다면? 과학자들로서는 팔짱을 끼고 구경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NOMA개념은 정확하지가 못하다.

 

그런데 진실로 세상을 모조리 규명가능한 법칙이 있는가? 과연 과학이라는 툴Tool로 우리는 세상을 모조리 규명할 수 있을까? 먼저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자면, 그런 법칙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끝없이 노력을 하여야 한다, 즉, 과학의 진보를 믿는다, 가 나의 관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막연히 그럴 것이라는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가 정말 의문인데, 과학의 객관성은 우리가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을까? 이에 1970년대의 일단의 학자들은 과학 지식 또한 사회학적인 분석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하며 다음 두 가지 테제를 내세운다. 첫 번째, 관찰의 데이터들에 의하여 과학 이론은 과소결정된다. 두 번째, 관찰은 이론에 의존한다. 이 두 가지 테제는 비록 과학 외부에서 제기된 테제이지만 어느 정도는 생각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저 테제에 대하여 논하기 전에 몇 가지 이야기들을 하자. 과학철학사에 큰 영향을 미친 칼 포퍼의 이야기에 따르면, 과학과 유사과학은 반증가능성으로 구분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칼 포퍼의 이야기는 조금 무리가 있다. 이는 듀엠 콰인 테제 - 과학적 가설을 고립적으로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다는 - 로 반박이 가능하다. (물론 물리학에 한하여 듀엠은 약간 입장이 다르지만) 듀엠 콰인 테제를 조금 더 이야기해보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과학적인 가설 설정 방법은 가설-연역법이다. 즉 다음과 같은 논리 구조를 따른다.

 

1. 가설이 옳다면 이러이러하다

2. 이러이러하다

3. 가설은 옳다.

 

그런데 1번, 가설이 옳다면 이러이러하다, 는 이 명제 자체에 이미 몇 가지 가정을 품고 있다. 애초에 가설을 설정한 것 자체가 추측이라고 할 수 있고, 옳다면, 이라는 말 또한 추측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가설을 어떻게 설정하는가? 기존 과학 지식에 의거할 것이다. 여기서 확실해진다. 우리는 고립적으로 과학적 가설의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으며, 그러한 가설을 토대로 세워진 과학적 지식 또한 고립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그렇다면 새로운 과학 지식이란 기존 과학 지식의 재반복Rephrase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과학적 인식은 중세의 인식과 거의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와 중세의 인식은 너무나 다르다. 그건 왜 그런 것일까?

 

이 비밀 또한 가설-연역법에 숨어있다. 위의 논리 구조는 논리학적으로 따졌을 때 전형적인 후건긍정의 오류에 해당한다. 후건 긍정의 오류는 예시로 든 논리 구조에서 설령 1번과 2번이 옳다고 하더라도 3번이 옳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저 가설-연역구조를 (논리학적으로 따지면) 폐기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과학에서는 이런 경우 귀납법으로 해석하여 얼마만큼 논증이 강한가, 약한가를 따져서, 최대한 강한 쪽으로 우리의 지식을 굳힌다. (귀납 추론의 경우 타당하다, 라는 말 대신 강하다, 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또한 설명할 것이다.) 예시를 들어보자.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을 검증할 때 이런 논리구조틀이 사용되었다.

 

1.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 옳다면 개기일식시 태양 주변의 빛들이 휠 것이다.

2. 개기일식시 태양 주변의 빛들이 휘었다.

3.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옳다.

 

지금이야 저런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이 매우 정밀한 시계를 만들어 조금만 들어올리기만 하여도 검증이 되지만, 그 당시에는 그 정도로 기술이 발달하지는 않았다. 자, 어쨌든 위의 논리구조는 사실상 오류다. 전형적인 후건 긍정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귀납법으로 파악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귀납 추론의 옳고 그름은 강하다, 약하다, 라는 용어를 쓰는데, 범주화의 옳음이라는 개념을 이용하여서 파악이 된다. 추론의 참 거짓을 따지기 위하여 다른 정보를 가져온다는 이야기이다. 예시를 들면 1번인 모든 병아리는 노란색이다, 라는 명제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이걸 참으로 두고 (지금 내가 보이고자 하는 것은 이 명제 자체의 참 거짓이 아니다) 이와 비슷하지만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는 명제인 2번 모든 병아리는 분홍색이다 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1번 명제가 2번 명제에 대하여 더 옳다고 알 수가 있다. 왜 그런가?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게 된다. (시간 t에 따른 과거와 미래의 성공적 투사가 노란색이라는 개념에서는 분홍에 비하여 더 많이 일어났기에 더 잘 고착entrenched되었다, 따라서 더 강한 명제다, 굳이 유식한 말로 하자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포퍼라면 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테지만 말이다.

 

위의 상대성 이론에 대한 논리구조도 마찬가지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이 다른 경쟁 이론에 비하여 더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옳다, 귀납적으로는 강하다, 라고 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귀납적으로 우리는 과학적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귀납적으로만 획득할 수 있는가? 연역적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가? 당연히 연역적으로도 획득할 수 있다. 어떻게? 다시 저 논리구조를 가져와보자, 이번엔 조금 바꿔서 말이다.

 

1. 가설이 옳으면 이러이러하다

2. 이러이러하지 않다

3. 가설은 옳지 않다.

 

이는 논리학적으로 후건부정식이다. 타당하다는 이야기이다. (보통 전건부정과 후건긍정에서 오류가 많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설이 옳지가 않다는 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 물론 과학적으로는 한 번의 반증만으로 바로 가설을 폐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이런 방식을 통하여 새로운 정보를 쌓아나갈수 있다.

 

이제 다시 위의 두 테제인 과학 이론의 과소결정성과 관찰의 이론의존성으로 넘어가자. 과학 이론의 과소결정성은 이런 의미이다. (원래 과소결정과 과잉결정은 알튀세르의 용어로 알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어떤 과학 이론이 있는데, 그 이론에 의하면 어떤 실험 결과는 반드시 어쩌고 라고 나와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어쩌고 라고 나오지 않았다. 이럴 때 과학자들은 그 이론의 하위에 있는 가설들을 잘 조절하여서 이론전체를 짜맞춘다, 라는 이야기라고 (다소 과장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실험이 이론과 다르더라도 이론 전체를 부정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이론의 일부가 잘못되었던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앞서 내가 말한 후건부정식에서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가설이 옳지 않은 게 아니라, 그 가설을 뒷받침 하는 다른 보조 가설들이 조금 잘못된 것 같다, 라고. 관찰의 이론의존성은 비유하기가 훨씬 쉽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라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물론 이것도 좀 과장된 설명이겠다) 이미 어떤 결과를 해석하는 것은 이론 내부에 담겨져 있다는 이야기이며 이를 통하여 과학적 지식은 객관적이지 않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도 주장을 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의 입장에서 볼때 저 두 테제는 시사하는 바는 있지만,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먼저 첫 번째 과학 이론의 과소결정성에 대해서는 이렇게 반론을 펼 수 있다. 물론 몇 번은 보조 가설을 조절해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오류를 지우지 못한다면 저 후건부정식처럼 가설을 폐기할 것이다. 왜 과학자들이 가설을 폐기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가? 그리고 관찰의 이론의존성에는 이는 선후관계를 잘못파악한 주장이라는 반론을 펼 수 있을 것이다. 관찰이 있기 때문에 가설을 설정하고 이론을 세운다.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관찰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론물리학자들은? 그들의 이론을 검증하려면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기에 관찰이 힘들다. 그렇다면 더더욱 보고 싶은 것들만 보려고 관찰하지는 않겠나? 이는 반대로 생각할 수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관찰하다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몇 번이고 보았다면, 이론 물리학자들은 자신의 가설을 폐기할 것이다. 그리고 보고 싶은 것을 결국에는 발견하였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또 한 번 보라고 권할 것이다. 정말 내가 발견한 이 것이 나의 이론에 실제로 합치를 하는 것인지. (CERN의 뉴트리노의 속도에 대하여 수많은 다른 연구소들에게 검증을 권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길게 과학지식의 객관성에 대하여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과학지식은 적어도 종교의 탈을 쓴 이론을 부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객관적이다. 세상을 규명하는 법칙에 대한 믿음은 그야말로 믿음이다. 그 믿음을 부정할만한 근거가 충분하다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그런 믿음이다. 하지만 그 믿음이 제대로 서기 위해서는 객관성이라는 것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일단 객관성은 어찌어찌 확보할 수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종교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의 차이가 나타난다. 종교적 지식은 저런 가설-연역법을 통과할 수 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뿐이다. 그리고 증거가 없으면 없을 수록 더 신성해진다. 바로 이 점을 리처드 도킨스를 위시한 무신론자그룹이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리처드 도킨스의 기독교 비판은 차라리 이 책에 비하면 간지러운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새롭게 복간된 (오른쪽 표지) 이 책은 그야말로 기독교에 대한 광범위 공격을 퍼붓는다. 이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경의 내용과 디오니소스, 오시리스 신화의 내용은 그다지 차이가 없다. 기독교에서 주된 상징으로 삼는 물고기는 사실 두 원을 그려서 생기는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수비학적인 기원을 가진다. 여러 가지 고대 종교의 비의에 기독교는 빚지고 있다. 등을 주된 주장으로 삼고 있다. 결국 이 책에 따르면 기독교는 잘 만들어진 신화다. 사실 그런데 이런 기독교의 기원 자체는, 이만큼 과격하지는 않더라도 종교학자라면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는 부분이 있다. 당장 유명한 종교학자인 카렌 암스트롱의 저서인 축의 시대를 보아도, 기독교의 기원에 대하여 민족 종교였었다, 라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민족 종교였다면 주위의 다른 신화를 융합하는데 도대체 무슨 거리낌이 있었겠는가?

 

 

이런 책들에 대한 반론은 왼쪽의 도킨스의 망상, 그리고 옆의 신을 위한 변론, 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실 나는 도킨스의 망상, 은 읽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오른쪽의 신을 위한 변론을 지은 카렌 암스트롱은 축의 시대, 신의 역사, 등의 책으로 잘 알려진 종교학자인데 무신론자인지 유신론자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어느 곳에서는 유신론자라고 말하고 어느 곳에서는 무신론자라고 말한다. 내가 볼때에는 무신론자였지만 유신론으로 넘어가는 그런 중간적 위치에 입장이 있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바로 이 '신을 위한 변론' 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결과적으로 은유를 강조한다. 신이 뭔지 나는 모른다. 그런데 신을 느끼고 싶다. 그러다보니 종교적 의례를 행하게 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베풀게 된다, 라는 것이다. 여하튼 신은 이해할 수 없지만 신을 알아가려는 그 과정속에서 충만함 등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 그게 바로 신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를 아포파시스, 부정의적 신학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신에게 꿇어엎드려야만 한다. 신은 인간의 이성과 지혜 그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그저 은유적 방식으로 그 편린을 살짝 드러낼 뿐이다. 대략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는 도킨스의 주장은 그저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신화를 깔아뭉개는 것에 다름아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주제만 더 이야기를 하겠다. 정신과 육체는 어느 정도로 이어지는가? 과학의 세계에서는 정신과 육체를 엄격히 분리한다. 예를 들어서 내가 아무리 마음속으로 번개여 라고 염원하더라도 결코 현실에서는 번개가 치지 않는다. 우연히 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 (양자역학을 이런 명제에 대한 반례로 들지 말기를 바란다. 양자역학을 의식과 연관지으려는 시도는 많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성공적인 예는 아직은 없다. 양자역학에서는 그저 관찰자, 가 중요할 뿐이다. 내가 바라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생겼다, 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만약에 정신과 육체가 이어져있다면? 그리고 내 정신이 마치 촉수처럼 세계 어디에서든 뻗어있다면? 예전의 어느 TED강연에서는 육체에 의식이 머무는 곳, 이라는 주제로 대략 연수부위에 의식이 존재할 것 같다, 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대중들에게 알려질정도로 눈에 들어올 결과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듯 하다. 또한 초상과학에 대한 연구도 은근히 진행중이지만 여전히 유의한 결과를 낳지는 않았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도 이 정신과 육체의 관계의 닮은꼴일지 모르는 일이다. 적어도 과학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만약 정신이 없다고 한다면 좀 쓸쓸할 것 같다. 마찬가지로 종교가 완전히 와르르 무너져버린다면 좀 쓸쓸할 것 같다, 풋.

 

이제 이 길고 긴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루쉰은 자신의 단편소설인 '고향' 을 이런 말로 마무리한다. '원래 희망이라는 것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땅은 본디 길이 없지만, 사람들이 다님으로써 길이 생겼고, 희망도 필시 이와 같을 것이다.' 나는 감히 말하건데, 종교도 이와 비슷하다고 본다. 신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사람들이 믿음으로써 신이 등장한 것이다. 나는 그 믿음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이미 하나의 '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을 걷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하지만 그 길이 어느 순간 잘못된 방향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이끈다면 나는 주저없이 그 길에서 돌아설 것이다.

 

 

 

 

 

 

 

 

 

p.s.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강조를 하자면, 나는 굳이 따지면 이신론적인 관념과 불가지론적인 관념의 중간을 걷는 중이다. 굳이 비슷한 예를 들자면 불교의 비로자나불과 같은 존재를 신이라고 나는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 기계장치의 신Deus ex machina는 인간의 일에 절대로 개입할 수도, 개입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 인간이 생겨난 것은 그야말로 그냥 생겨난 것이다. 존재에 별다른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꼭 있어야 우리 인간이 신성해지고 멋있어지는가? 그 수많은 확률을 뚫고 세상에 출현한 우리들 자체를 기적이라고 보는게 훨씬 옳은 일이 아닐까? 이런 관념이 내가 가진 관념이다. (동시에 불교에서 비로자나불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밀교에서의 대일여래 - 비로자나불과 동일한 격으로 여겨지는 - 는 숭배의 대상일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나 등등 수많은 종교들 - 천지의 창조를 설명하고 우리의 존재를 설명하려고 하는 - 을 일거에 부정해버릴 생각은 없다. 이 글 전체가 무신론에 치우쳐져 있다고 하여 내가 무신론을 완전히 옹호한다고 여기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나를 두고 유신론의 공세에 겁을 먹었나, 라고 묻는다면 솔직히 겁을 먹을 때도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유신론의 공세에 겁을 먹은 것은 둘째치고라도, 나 또한 이신론이라는 막연히 그러리라는 '증거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무신론자라면 이런 비판에 자유롭겠지만 나는 그만큼 자유롭지는 않다. 물론 나는 내 관념이 잘못되었다는 증거가 나온다면 주저없이 내 입장을 포기할 것이다.) 

 

이런 나의 타협(?)도 여전히 유신론자들에게는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가지론이 종교에 대한 호의를 보이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되어지지만 버트런드 러셀의 예 (감옥에 갇혔을때 간수가 버트런드 러셀에게 물었다. 당신은 종교가 무엇인가요? 러셀은 이렇게 대답한다. 난 불가지론자요 I'm agnonostics. 그리고 간수는 한숨을 내쉬며 우리 모두는 어쨌든 같은 신을 섬기고 있다, 라고 이야기한다. 간수는 오해를 한 것이다. 나는 영지주의자요I'm a gnostics)를 보면 불가지론은 사실 유신론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신이 무조건 존재한다, 라고 보는 유신론자들에게는 신이 있을 지도 모르지만 없을 수도 있다, 라는 말들은 기분이 썩 좋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신에 대하여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존재할 수도 있는데, 설령 그렇다고 하여도 그 신은 기독교의 신은, 더 나아가 어느 종교의 신도 아닐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사실 여기만은 타협을 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너의 신은 자꾸 기계장치의 신, 이라고 하는데 법칙과 과학의 신인가? 라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질문이 잘못되었다. 법칙이나 과학은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과학과 과학으로 생겨난 세계에 무슨 정서적 만족이 필요하겠는가? 그야말로 도덕경에서 이르듯 천지불인天地不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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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8-28 02:38   좋아요 0 | URL
처음 드는 생각, 무엇 때문에 이런 글이 쓰고 싶어졌을까 입니다
종교가 사라지지는 않겠죠 오랫동안 이어져온 것인데...
언젠가 그런 말 들은 적 있어요 그게 불교만을 말한 것인지 모든 종교를 말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철학으로 공부하면 좋은 것이다(불교만을 말했던 것이었는지도... 불교만 그렇지는 않을 것도 같군요)고

사람들은 무엇인가 의지할 것이 필요하죠 그러고 보니 이런 말도 들은 적 있는 것 같습니다 '너는 내 종교다' 어디에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조금 쓸데없는 말이었습니다

종교가 순수함이 있으면 좋은데, 그런 쪽에서 멀어지고 있기도 하죠


희선

가연 2013-08-28 03:28   좋아요 0 | URL
ㅎㅎㅎ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구.. 다른 글들과 마찬가지로 책을 읽다보니까 든 생각을 모아본 거겠죠.. 풋.

사실 의지할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는 생각에 대하여 많이 고민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 자체가 어쩌면 스스로의 가능성을 너무 얕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게 논증을 하면서도 스스로가 참 나약하다는 느낌을 지우지는 못하지만요) 철학으로 불교라던가 다른 종교를 익히면 그 종교에 깊이 빠지긴 어렵게 될 것 같아요.

희선 2013-08-29 00:22   좋아요 0 | URL
그런 것이 아닐까 했습니다(그러면 왜 물어봤을까 하겠군요 확인일지도...) 그리고 여러 책을 읽고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게 부럽기도 했습니다 이 글뿐 아니라 다른 글도...

증명할 수는 없지만 신은 있을 것 같아요(확실하지 않은 말이군요) 신이 있으면 귀신도 있다고 하던데...^^
신은 보이지 않아도 어디에든 있고, 모습은 늘 같지 않다는 말이 있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신이 뭐든 해줄 수는 없을 겁니다(전능을 믿지 않는...) 자신이 해야죠 제가 생각하는 신은 사람과 다르지 않은 것 같군요 그러면 신이라 할 수 없을까요


희선

가연 2013-09-10 17:49   좋아요 0 | URL
ㅎㅎ 답이 많이 늦었습니다. 저야 책들을 읽고 이렇게 잡글을 끄적거리는 거죠.. 요즘은 진짜 시간이 좀... 어허허...

신의 기본 요소가 전능이 아니려나요, 아하하. 희선님께서 생각하는 신은 제가 떠올리는 그런 신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듯 하네요.

군자란 2013-08-28 09:21   좋아요 0 | URL
종교야말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줄수 있는 장치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쫒아 다니며 핍박했던 사도 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개안했다고 믿듯이 인간은 어떤것도 자기가 믿고 싶은것을 믿을 수 밖에 없는 제한된 존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신의 조건에 갖힌 존재....그게 바로 종교 혹 이신론아닐까 싶습니다.

가연 2013-08-28 11:2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에.. 약간 저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먼저 종교와 이신론을 동일 선상에 둘 수는 없습니다. 이신론에서의 신은 숭배대상이 아니니깐요. 신이 이 세상의 법칙을(혹은 이 세상을) 만들고 더이상 관여를 하지 않는다, 가 이신론의 기본 명제라고 볼 수 있는데 앞의 법칙을 만들다, 라는 부분에 강조를 두느냐, 관여를 하지 않는다, 에 강조를 두느냐에 따라서 입장차이가 생길 수 있기는 합니다만 기본적으로는 숭배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신론에서의 신의 위치는 조금 미묘합니다. 그렇기에 신의 존재증명에 대한 논증이 필요할 듯 합니다만 여기서 다루기에는 너무 여백이..(페르마의 정리도 아니고, 하하하)

그리고 사실 믿고 싶은 것을 믿을 수 밖에 없다, 라는 말씀에 대해서도 약간 생각이 다른데, 이 짧은 댓글만으로는 군자란님께서 불가지론자이신지, 무신론자이신지 등등을 구분하기가 사실 어렵습니다. 혹은 유신론자이실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무신론적인 관념에 더 가깝다고 보고 말씀을 드리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싶은 것을 믿을 수 밖에 없다면, 반대로 그들은 무신론자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들 또한 우리 종교에 대하여 믿고 싶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무신론자들이 어떤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하더라도 유신론에서는 저렇게 말을 계속 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이 부분을 강조한 것이 글에서 언급하였던 카렌의 입장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그대들은 피상적 이해에 그치고 있다, 라는. 그래서 종교에 대하여 어떤 논증을 할 때 이렇게 접근하는 것은 조금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글의 중간에 이에 대하여 조금 끄적여놓았습니다만.. 사실 저 또한 아직 뭐라고 말해야 할 지 애매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댓글주셔서 감사합니다

군자란 2013-08-28 16:34   좋아요 0 | URL
사실 여기에 댓글를 달게된것은 내가 좋아하는 데넷, 도킨스가 언급되서 호기심이 동하여 몇자 적었읍니다. 님이 말한 이신론이나 종교를 가지고 토론할 정도는 제 능력이 안되는 것 같고 현재 제가 내린 결론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동물원의 철망에 갖힌 동물처럼 그 안에 갖힌 존재라는 것외에는 제가 확신할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가연 2013-08-28 20:01   좋아요 0 | URL
편하게 댓글 달아주셔도 괜찮습니다. 저 또한 이런 과정을 통해서 배우는거니깐.. 인간이라는 존재는 갇힌 존재다, 라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마립간 2013-08-28 10:38   좋아요 1 | URL
가연님, 잘 지내시죠.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default값이 개신교에 맞춰져 있지만, 새로 추가되는 지식과 경험에 의해 계속 수정해 나가면서 가나안(거꾸로 읽은) 개신교입니다. 종교는 이성적인 대화가 잘 안 되어 저는 인간의 정신 세계 (인식, 사고, 믿음, 도덕 등)으로 치환해서 생각합니다.

종교적 신과 인간을 제외시키고,
칼 세이건의 이 말 '만약에 신이라는 말이 어떤 우주적 법칙을 의미한다면 분명 존재한다.'
우주적 법칙이 모든 것을 설명하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 ; 후자라면 법칙 없는 부분을 신으로 귀속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로 설명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의견에 따라 중력의 법칙에 대한 기도를 해야겠죠. (짧은 글로 요약하려니, 잘 설명이 안되는 글이 되었네요.)

가연 2013-08-28 11:33   좋아요 0 | URL
마립간님 잘 지내시나요,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긴 글이라 지루하시지 않으셨으려나 생각하였습니다만..

그런데 이 댓글만으로 파악하건데 마립간님께서는 인간의 정신 세계를 법칙 없는 부분으로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면 말씀해주십시오) 여기서 저는 의견이 조금 다른데, 예를 들어 도덕 또한 충분히 진화의 산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칙 없는 부분이라는 것은 없다, 고 여길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만약에 어떤 법칙이라던가 진화의 산물이라고 해서 우리의 정신 세계가 더 저속해지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더 탄탄한 근거를 바탕으로 설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런 정신 세계를 도그마로 여길 여지를 주지 않기에 도리어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모든 것을 관통하는 우주적 법칙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글 중간에서도 밝혔던 것 같지만 이 또한 믿음이겠지요. 사실 제가 온전한 이신론자라면 자연 법칙에 대한 관찰을 통하여 신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신의 존재를 근거로 우주적 법칙의 존재를 확신하겠지만 글에서 보시다시피 이신론과 불가지론을 왔다갔다 하는 중이라.. 뭐.. 없다는 증거가 나타난다면 당장 버릴 그런... 하하하하하. 믿음보다는 차라리 가설이 더 적절하겠네요

마립간 2013-08-28 12:01   좋아요 0 | URL
정신 세계에도 법칙이 있죠. 그리고 정신세계에도 진화론이 작용합니다. 그래서 진화심리학도 있고요. 하지만 제가 제시한 문제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으냐, 아니냐입니다. 그러니까, 저의 가치관은 불가지론과 (default 값인) 유신론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왔다 갔다보다 양다리)

밝혀진 부분 내에는 신이 없는데, 밝혀지지 않은 부분(창발성)이나 증명할 수 없는 부분에 신이 존재할 가능성(예를 들어 플랑크 상수 아래 존재하는 신)에 대한 판단은 개인 취향에 따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주의 모든 것을 관통하는 법칙이 있고 (창발성이 더 이상 없는 상황 ; 저는 상상이 잘 안 됩니다.) 그것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면 (이 또한 현재로는 믿음에 영역에 남아 있지만), 신의 유무의 논란이 어떤 것을 신으로 할 것이냐의 논란으로 전환되겠지요.

가연 2013-08-28 20:14   좋아요 0 | URL
온전한 무신론자라면 아무래도 개인 취향에 따른 선택, 이라는 말씀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저의 입장이 애매한 입장이다보니...ㅎㅎㅎ 하지만 이 부분, 관통하는 어떤 법칙이 있다는 것이 창발성이 더 이상 없는 상황이다, 라는 말씀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아마 이 부분은 법칙, 이라는 것을 어떤 식으로 보느냐, 에 대한 차이일 듯 한데.. 제가 생각하는 그런 관통하는 법칙은 정말 기초적 법칙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초적 법칙들이 서로 얽혀가면서 무한한 가능성들을 만들어내기에 창발성은 계속되리라고 봅니다. 그런 기초적 법칙이 굳이 하나여야할 이유는 없을 것 같고 설령 하나일지라도 거기서 파생된 다른 법칙과 서로 상호작용하여 가능성을 펼쳐나갈테니.. 거칠게나마 이야기하면 중력의 법칙은 다른 물리학적인 법칙과 상호작용을 하여서 더 많은 가능성을 펼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너무 예가 거친 것 같지만.. 여기서 굳이 신이라는 이름을 쓴다면 이 기초적 법칙 체계 전체를 일컫겠지요.

여담이지만 이런 점에서 운명이라고 불릴 만한 삶의 궤적은 존재하지 못하리라고 봅니다. 가능성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지요. 결국 각자의 선택으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마립간 2013-08-29 08:56   좋아요 0 | URL
제가 창발성이 없는 상황이 있다는 가설을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지론과 유신론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이죠.

인생의 궤적은 카오스와 끌개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특정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확정적), 유사한 모양을 갖는 다는 점(직관의 적용), 그럼에도 정확한 궤도를 계산할 수 없다는 점(불확실성, 무한한 가능성)에서요.

저는 기초 법칙 전체가 밝혀진다면 그것을 신(의 섭리)이라고 칭하겠습니다.

가연 2013-09-10 17:46   좋아요 0 | URL
나중에 댓글을 달아야지, 했는데 이렇게 늦게 다네요. 마립간님의 마지막 문장은 옳은 말씀인 듯 합니다

테레사 2013-08-29 11:03   좋아요 0 | URL
생활인으로서 저는,인간이 그저 우연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지만, 어느 한 구석에 누대로 쌓인 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두가지 사이를 ㅎ왔다 갔다 하지요. 말씀하신 것처럼 신이 없다고 하면 좀 쓸쓸할 것 같아요...이 표현이 제일 마음에 듭니다.

가연 2013-09-10 17:46   좋아요 0 | URL
저 표현 괜찮죠? 저도 써놓고 괜찮은 것 같다고 여겼었습니다, 하하하. 사실 저 구절만큼이나 제 심정을 이 글을 쓸 때 대변하였던건 없었던 것 같네요.

2013-08-30 0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10 1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작나무 2013-09-12 17:39   좋아요 0 | URL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가연 2013-09-23 17:42   좋아요 0 | URL
너무 늦었습니다ㅠ 감사합니다

2013-09-12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3 1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은 쌓여있는데 잘 읽지를 않고 있다.

솔직히 지금은 바쁜 건 아닌데 그냥 머리가 지끈거려서 잘 들춰보지를 못한다.

열심히 놀고만 있다.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제법 재밌는 책이었달까. 책에서 강신주는 말한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긴가민가한 사람들을 자기쪽으로 끌여들여야 되지 않겠나, 비슷한 말을 말이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불호쪽인데 - 강신주에 대한 감정이 불호인 것을 설명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 그런 내가 읽어도 정말 읽는 재미가 있는 책이었달까. 강신주 본인의 저작을 소개하는 것에서부터 사회의 여러 이슈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소 과격한(?) 사랑론 등등.. 여러 이야기를 하던데, 결과적으로 강신주에 대한 불호감[...]은 더 커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밌는 시간이었다. 왜 강신주에 대한 감정이 불호냐고? 나는 너무 강한 주장을 펴는 사람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사람이 독단적이어야 할 때도 필요하지만 그런 독단성은 충분한 근거와 증거 그리고 신비한 마술에 이를 정도로 착착 갖추어진 합리적 확신이 바탕이 되었을 때 정당화 되는 것이다. 굳이 이 예를 들자면 폴 디랙이 자신이 개발한 방정식이 너무 아름다워서 도저히 틀릴 수 없다고 여겼던 것 처럼 말이다 - 결국 양전자가 발견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N포털의 캐스트를 참조하라) 나는 이 책의 저자가 자신의 이론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확신이 저만큼이나 아름다운 확신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일단 여러 입장을 동시에 나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라고 생각을 가진다. (물론 더 '마음에 드는' 혹은 속된 말로 '촉' 이 오는 이론이 있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의 이론이 정말로 합리적이라면 결과적으로는 어느 누구든 호로 바뀔 것이다. 나는 차라리 그가 말하는 주류의 입장 - 그가 말하는 주장도 옳을 수 있다 - 가 더 마음에 든다. 더 유연하다, 랄까나. 과학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유연함이다. 그런데 철학은 잘 모르겠다. 이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철학에서는 꼭 유연함이 가장 중요하다고는 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달까. 강신주가 아무리 양자역학책을 들여다본다고 주장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철학자이고 인문학자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철학자로 살 것이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이 책도 생각 외로 정말 재미있는 책이다. 아직 그렇게 많이 읽지는 않으나 별 기대없이 읽고 있는데 술술 읽히는 재미가 있었다, 랄까나.

그런데 이 경우 로쟈가 글을 잘써서 재미있는 것인지, 아니면 로쟈가 읽으려고 하는 대상인 지젝의 사상이 흥미로운것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다만 하나 말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 아인슈타인의 이론과 프로이트의 이론을 실재의 해석에 가져다 붙인 부분이 앞에 나오는데,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일반상대성이론으로의 전환에 대한 부분에 대하여 좀 이상한 해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지젝의 해석은 어느 쪽이든 억지로 가져다 붙인 느낌이 난달까. 아니, 가져다 붙인 것은 둘째치고 오류가 있는 것 같다. 지젝은 특수상대성이론이 물체 - 휜 공간, 이며, 일반상대성이론은 이것이 전환되어서 휜 공간 - 물체, 의 쌍을 이루게 된다고 이야기하는데, 일반상대성이론이야 기하로 힘을 설명하는 이론이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특수상대성이론은 저런 내용이라고 보기 어렵다. 특수상대성이론에서부터 공간과 물체의 관계가 이야기되지는 않는다. 공간과 물체가 설명되는 것은 중력과 가속력을 구분할 수 없다, 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철학자들이 많이들 아인슈타인의 휜 공간에 감명을 얻어 많이들 쓰는 것 같은데.. (철학 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사전, 이라는 책에도 범주를 설명하면서 아인슈타인의 이야기들이 적혀져 있다.) 사실 상대성이론에서의 휜 공간은 생각의 확장의 부수적 산물이다. 이게 근본은 아니다. 정말 중심이 되는 것을 꼽자면 관성계, 이리라. 물론 휜 공간, 에 대한 이야기도 틀리지는 않지만, 그건 결과물이다. 나는 철학자들이 인식의 전환, 이라는 것에 너무 초점을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의 이론을 보면 결국 보면 알겠지만 논리적 정합성을 따른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둘 중 하나가 움직여야만 되는데 네가 움직이지 않으니 내가 움직이겠다, 라는 느낌이랄까. 너무 인식의 전환, 에 초점을 둔다면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 사건, 이 다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것이다.

 

 

 

꼴 세트, 신의 가면.

 꼴 세트는 요즘 반값할인중이다. 한 번 구입해놓으면 좋을 것이다. 관상에 대해서 궁금한 사람은 구입하여서 읽어볼 만 하다. 그런데 사실 이 허영만의 꼴, 에서는 뭐랄까, 허영만 본인의 생각과 이 만화를 감수한 관상가 생각의 부딪힘들이 너무 자주 보이는 것 같다. 관상가는 꼴대로 살게 될 것이다, 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데 허영만은 배우는 입장이라서 대놓고 그렇지 않다, 라고 말할 수 없으니 소심하게(?) 만화의 컷마다 조그만 반항을 그리는 것 같다. '정말 ~~~라면, ~~~들은 다 ~~~하겠네?' 라는 식으로. 아마 인터넷 연재 당시에도 많은 반향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떻게 꼴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이 되겠나, 라고. 허영만 본인의 입장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 꼴 만화로 유명한 것은 오른쪽 신의 가면, 도 마찬가지이다. 만화, 라는 것에 입각해서 둘 중 어떤 책이 더 잘넘어가는가, 라고 한다면 이 신의 가면, 이 더 재밌다. 특별한 스토리가 없는 허영만의 만화에 비하여, 이 책은 회사와 관련지어서 스토리들이 짜여있기에 말이다. 다만 끝이 좀 미진한 것이 아쉽다. 두 만화를 동시에 놓고 같은 상에 대하여 어떻게 해석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하지만 관상불여심상이다. 관상은 마음상보다 못하다. 그리고 이 뒤에 한 문장이 더 있다. 심상불여용심이라, 마음상은 그 마음씀씀이보다 못하다. 결국 마음을 어떻게 쓰는가, 그리고 그 이쁜 마음을 실제로 쓰고 있는가, 가 당신의 운명에 가장 중요하다, 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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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8-12 02:30   좋아요 0 | URL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책은 재미있게 읽고 있군요 철학도 유연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이것은 무엇이든 다 그렇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자신이 가진 신념을 굽히지 않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주장하고는 좀 다르려나

글을 잘 써서인가 그 대상이 가진 사상이 재미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재미있네요 먼저 대상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쓸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글을 쓸 수는 없겠죠(억지로 쓸 때도 있겠군요^^)

사람은 무엇인가 정해져 있는 것을 싫어하죠 만약 그게 좋다면 그렇구나 할 수도 있겠지만, 나쁘면 꼭 그게 맞지는 않을 거다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지... 관상도 살아가면서 바뀌지 않나요 그러니 이것도 정해져 있지는 않죠 마음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바뀌겠군요 잘 써야 할 텐데...^^

노는 것도 열심히...


희선

가연 2013-08-12 18:10   좋아요 0 | URL
ㅎㅎ 좋아하는 것과 재미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겠지요. 좋아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 책의 저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재미있다는 것은 그 책 자체만 보면 되는 것이니, 풋. 확실히 대상을 좋아하니까 재미가 있는 글을 쓸 듯 합니다.

비로그인 2013-08-12 11:19   좋아요 0 | URL
가연님 잘 지내시죠? 전 요즘 비트겐슈타인 평전을 읽고 있어요 너무 재밌어서 아껴가며 천천히 읽고 있답니다 : ) 평소 읽는 속도대로 읽지 않고 어떨 땐 한 쪽을 한 시간에 걸쳐 읽고 또 읽고 하네요.

가연 2013-08-12 18:10   좋아요 0 | URL
오오오오오오오 비트겐슈타인 평전을 읽고 계시는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정말 재미있지요???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으아, 오랜만입니다, 신간평가단.

책읽기, 에 대한 회의가 많이들었는데, 그래도 여전히 책을 읽게 되긴 하네요.

논리만 앞세워 남에게 뭐라고 하는 그런 괴물이 안되야 될텐데

옳은 것만이 유일한 장점인 그런 사람이 되지를 않기를 바라며

벌써 반성을 좀 하고 있는데, 얼굴이 화끈거리네요.

 

 

 

깃털.

아무래도 7월에 출간된 신간 중 가장 기대가 되는 책은 이 책이 될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 종종 보게 되는 새들, 그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이런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 나도 저 새들처럼 하늘을 날아가고 싶다' 그런데 우리가 새처럼 날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날개입니다. 새는 날개가 있어 날아가지요. 그렇다면 우리도 날개가 있다면? 어쩌면 우리도 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일련의 추론 과정을 거쳐 우리는 행글라이더도 만들고 비행기도 만들어 결국 하늘에 날고, 이윽고 하늘을 정복했다고 믿지만, 여전히 한편으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내가, 아니 우리가 정말 하늘을 정복한걸까? 무언가 2퍼센트 부족한 것 같지요. 네,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 몸 밖의 물체를 이용해 하늘을 날기에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날개가 달려있다면, 전혀 부족한 느낌을 받지는 않겠지요. 이 깃털, 이라는 책은 그 조류의 날개를 구성하는 깃털에 대한 책입니다. 하늘에 대한 열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날개에 대한 이야기와 그 날개를 이루는 깃털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들을 그냥 흘려보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깃털은 날때만 사용되지는 않겠죠. 만약에 우리가 날개를 가지게 된다면, 그만큼 다른 부분에서든, 다른 장기에서든 사라져야 할 부분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깃털이 가지고 있는 보온기능이라던가, 심지어 장식기능들 때문에. 바로 그 부분도 이 깃털, 이라는 책은 잘 짚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자신을.

제목 그대로 이 책은 자기기만에 대한 책입니다. 보통 기만, 은 사회관계에서, 아니 더 나아가 자연세계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행위입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예를 들자면 세균, 기생충 등등도 모두 기만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갑니다. 그런데 기만의 방향이 상대가 아닌 자신을 향한다면? 그런 양식을 취하는 존재가 살아남을수 있을까요? 바로 이 의문에서 시작하는 이 책은 결국 결론을 '자기기만은 진화의 산물이다' 로 마무리짓는듯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진화가 되었다고 해서 꼭 이게 최적이야,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진화를 주관하는 신은 눈먼 시계공과 같아서 그저 고칠 뿐이며, 그것이 최선의 답이다, 라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자기기만이 진화의 산물이라고 해서 우리가 이를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죠. 자기기만연구를 하였던 저자는 결국 마지막 장의 제목을 이렇게 짓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 자기기만과 싸우기'

 

 

 

꼭 읽어야 할 예술이론.

이 책은 미술사에 대한 책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목처럼 딱히 예술이론에 대한 책도 아닙니다. 굳이 이 책과 비슷한 부분이 있는 책을 골라보자면 솔 크립키가 지은 '논리철학론' 에 대한 해석이겠지요. 말하자면 오독과 정독 그리고 이해가 교차하면서 그려내는 팽팽한 긴장의 책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비교하자면 이 책은 사실 논문들로만 구성되어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 한데, 예술이라는 큰 틀에서 각각 다루고 있는 주제들, 미학, 형식, 내용, 양식, 인류학, 미술사, 의미 등 관련된 논문을 모으고 그 글들의 연관방식을 보는 구성을 취하고 있기에 더욱 각별합니다. 물론 논문이 쉽게 읽히지는 않겠지요. 여러번 느리게 정독하면서 읽어야 할 책으로 여겨집니다.

 

 

 

 

자연과 인간.

일전에 나온 세계사의 구조, 로 날카로웠던 관점을 개진했었던 고진이 이번에 추가로 책을 내어 보충합니다. 바로 이 책, 자연과 인간, 이라는 책입니다. 그런데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보충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좀 더 지평을 넓혔다, 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세계사의 구조, 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보다도 조금 더 넓은 범위를 다루고 있으니 말입니다. 고진이 이 책들을 통하여 천착하고 있는 부분은 교환, 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환이 있기 위해서는 주는 존재와 받는 존재가 필요하겠지요. 이들은 서로가 서로가 될 수 있으며 언제든 전복될 수 있는 긴장에 사로잡혀있습니다. 이를 두고 관계, 라고 일컫습니다. 정리하자면, 교환에서 관계, 그리고 그 관계를 이루는 주체들, 이 고진이 이 책들을 통하여 탐구하고자 하는 것들이 될 듯 합니다. 그러면 전작인 세계사의 구조도 이 책과 함께 읽어보아야 될 듯 합니다, 만 한편으로는 이 책은 우로보로스의 뱀처럼 세계사의 구조, 의 꼬리를 덥썩 물기에 이 책 부터 손에 잡아도 좋을 듯 합니다.  

 

 

 

헤겔 레스토랑, 라캉 카페.

아무래도 이 책을 7월에 나온 신간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물론 신간평가단으로 뽑힐 가능성은 한없이 낮으며, 설령 뽑혔다, 라고 하여도 기간 내에 이 책들에 대한 리뷰를 쓰기란 한없이 쉽지 않은 일이겠지요. 사실 저는 그다지 지젝을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는다, 혹은 좋아한다, 라는 감정때문에 그 작가의 책은 모두가 별로다, 라고 말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진실로 '시차적 관점' 은 - 번역에 대한 말들이 많기는 하지만 - 뛰어난 책이고 (지젝 본인이 대작으로 꼽았었다지요) 그 책에서 보여준 날카로움이 여전하다면, 이 책 또한 충분히 기대해볼만한 하겠습니다. 이름하여, Less than nothing시리즈를요.

 

 

 

 

 

 

요즘 시간이 좀.. 사랑니때문에 입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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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8-06 01:57   좋아요 0 | URL
<깃털>에 대한 책이라... 저는 가연 님이 쓰지 않았다면 이런 책이 있다는 것도 몰랐겠군요 두번째 책을 보니 제가 본 책에 나온 게 있어서 밑에 썼습니다


“슬플 때는 슬프다, 슬프다, 하고 바보처럼 말하게. 기쁠 때는 기쁘다, 기쁘다, 하고 말하게. 입 밖에 내지 않아도 돼. 스스로 자신을 속이게. 그것밖에 없어.”

“속인다.”

이야기하는 거야, 하고 지헤이는 말했다.
.
.
.

“믿는다는 것은 속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일세. 서로 믿는다는 것은 서로 속인다. 서로 속는다는 뜻이야. 이 세상은 모두 거짓일세. 거짓에서 진실이 나오지는 않지. 진실이란 모두 속은 놈이 보는 환상일세. 그러니──.” (247쪽)


“진정한 자신이니 진실한 나니, 그런 것에 집착하는 놈은 무엇보다 바보일세. 그런 것은 없어. 자신을 바란다면 자기가 자기를 속여야 해. 속이는 게 서툴다면 서툰 대로──.” (248쪽)

《엿보는 고헤이지》(교고쿠 나쓰히코) 에서


이거 나중에 쓰게 될 테지만... '지헤이가 말했다' 다음에는 자기 부모에 대해 말한답니다 부모는 이말저말 나오는 대로 좋은 말을 하는 사람으로, 그 말을 사람들은 좋아한다고... 거짓말일지라도 그게 좋은 말이면 좋은 거다, 그리고 진짜가 되기도 하죠 그게 말이 가진 힘인 거죠 생각해보니 “믿는다는 것은... 속은 놈이 보는 환상일세.” 이 부분 소설을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군요

그런데 제가 쓴 것을 보니 이 말하고는 거의 상관없이 썼군요 읽을 때는 그런가, 했는데... 쓸데없는 말을 조금 늘어놓았죠 고헤이지 씨한테, 하고 싶은 말은 아주 적었는데... 언젠가 올려두겠죠

하지만 자기를 속이는 것과 싸우기라고도 하는군요 좋은 것은 괜찮지만 나쁜 것은 안 좋겠죠

사랑니가 아프다니, 혹시 사랑이라도(이것은 날 때인가)...^^
저도 잘 모르지만 치과에 가봐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희선

가연 2013-08-11 20:39   좋아요 0 | URL
교고쿠 나쓰히코, 라는 작가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직접 책들은 거의 못본 것 같네요, 그런데 정말 두번째 인용문에는 동감합니다. 진정한 자신 등에는 집착을 하여선 안될 것 같아요. 사랑니는 또 괜찮네요, 풋.

희선 2013-08-12 03:05   좋아요 0 | URL
저는 우연히 알게 돼서 책을 읽었는데, 교고쿠도 시리즈가 재미있어요 음양사, 작가, 탐정, 형사가 나옵니다 읽을 때는 이런 생각 못했는데... 네 사람이 다 친구였는지 잘 모르겠는데 지금 생각하니 부럽군요 친구가 있다는 것이... 요괴에 얽힌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것은 진짜 요괴라기보다 사람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죠(이런 것은 미야베 미유키도 비슷하군요) 사람 마음일 수도 있고, 요괴나 괴담을 사람들이 이용합니다

탐정이 나오지만 실제 탐정 노릇을 하는 사람은 교고쿠도입니다 본래 하는 일은 고서점인데 음양사이기도 합니다 아는 것이 참 많더군요 자꾸 생각나서 더하게 되는군요 교고쿠도라고 하지만, 이름은 추젠지 아키히코군요 교고쿠도는 책방 이름입니다

사랑니는 그냥 잠깐 아팠던 건가 보네요 다행이네요


희선

가연 2013-08-12 18:12   좋아요 0 | URL
희선님의 서재에 들러보니까 일본 소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더군요. 그런 희선님께서 말씀하시는 부분은 정확하겠지요. 교고쿠도 시리즈는 저도 언제 기회가 되어 읽어보았으면 합니다.

테레사 2013-08-09 09:54   좋아요 0 | URL
가연님, 시간이 없다고 하시면서도..늘 많은 정보와 평가를 해 주시잖아요?ㅎㅎ 글이 늘 깔끔하고 정직해요.

가연 2013-08-11 20:37   좋아요 0 | URL
어허허... 테레사님 너무 오랜만입니다.. 제가 요즘 알라딘 생활을 잘 안해서.. 이렇게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역사를 보면 유난히 반복하여 등장하는 나라이름이 있다. 바로 진나라이다. 그러고보면 춘추전국시대에도 진나라가 있었고,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삼국 - 위, 촉, 오 - 시대 이후에도 진나라가 다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실제로 이 진나라들은 모두 다른 나라들이다. 이는 어쩌면 우리나라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찾아오는 어쩔 수 없는 난관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한자로 쓰면 모두 다른 국명이 된다. 진陳, 진晉, 진秦 이렇게 말이다. (춘추시대에 사실 매우 작은 나라인 진軫나라도 존재하였다고는 하지만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가 않다.) 실제 중국어로 읽는 방법도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이후 사마염의 진나라 및 오호십육국 시대에 무수한 진나라들이 등장하지만, 그 진나라들의 한자 자체는 위의 세 한자가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예를 들자면 사마염의 진나라는 서진이라고 부르며, 한자로는 이렇게 쓴다 ; 西晉.

 

이 글에서는 위의 세 진나라, 진陳, 진晉, 진秦 에 초점을 맞추어 간단하게 서술해보고자 한다. 오호십육국 시대의 전진, 후진, 등의 나라들 또한 동일한 한자를 쓰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별개의 나라들이지만, (앞의 전前은 후대의 역사가들이 편의로 붙인 명칭이다. 국호 자체는 진나라들이다. 그러니 동일한 한자를 사용하였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너무 많은 국가가 명멸하였기에 일일이 다 언급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춘추전국시대 역사 관련 사료를 읽을 때 나오는 진나라에 대하여 파악하고 싶다면, 위의 세 나라에 대한 언급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먼저 본격적으로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에 대하여 이야기를 조금 적어놓을까, 한다. 춘추시대는 서주가 멸망하고 동주로 수도를 옮겨 그 명맥을 유지했을때, 여러 제후들이 왕을 존중하고 이민족을 쫓아낸다는 기치 아래에 거병한 때를 일컫는다. 이 시대의 이름은 춘추, 라는 책을 따서 명명이 되었다. 이때만 해도 왕을 존중한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감히 천자를 논하지 못했다. 하지만 전국시대는 달랐다. 이 시대는 진晉나라가 멸망하고, 한, 위, 조, 이렇게 세 나라로 쪼개진 시점을 기점으로 잡는다. 이때부터는 왕을 그다지 존중을 하지 않게 되었다. 한, 위, 조 세 나라는 왕이 먼저 승인을 한 뒤에 쪼개져 나간 것이 아니라, 먼저 쪼개진 뒤에 왕에게 승인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저 선후관계가 바뀌었을뿐이지만, 이는 매우 큰 차이다. 후자의 경우엔 왕권은 그다지 중요하지가 않다, 라고도 생각할 수 있으니 말이다.

 

세 나라 모두 시기적으로 엇비슷하게 시작하지만, 그나마 추측해보자면 진秦나라가 가장 먼저 등장하였으리라 본다. 나라로서의 진나라가 아닌, 어떤 부족연맹체로서의 등장말이다. 왼쪽의 진시황 평전의 저자인 장펀텐, 은 이야기한다. 만약 춘추전국시대를 한 사람의 일대기로 축약하여서 그 역사를 그려낸다면, 당연히 주인공으로는 진秦나라 사람이 어울릴 거라고 말이다. 진秦나라가 그만큼 오래 그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라는 것을 반증해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진秦나라의 기원은 고대 중국의 은나라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전의 기록이 있기는 하나, 요순시대의 기록은 확인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많다.) 은나라의 왕 주왕의 신하였던 비렴은 주 무왕에게 쫓겨 서북쪽으로 이주하고 만다. 이 비렴이라는 자가 진나라 씨족의 직계 선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권력 투쟁에 휩쓸려 그대로 망한 씨족의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주 목왕때 이들은 화려하게 부활한다. 바로 조보, 때문이다. 진나라 씨족 중에서 특히나 말을 잘 다루는 사람이었다. 반란이 일어났을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몇 마리고 말을 바꾸며 천자를 모셨던 조보는, 그 행위 덕분에 천자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영지를 받아 춘추시대의 나라들 중 가장 서쪽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자리 잡은 영지는 그다지 좋은 땅은 아니었다. (물자가 비옥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근처에 이민족 - 주나라로 일통되지 못했던 - 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들과의 싸움에서 진나라는 먹히느냐, 먹느냐, 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주나라의 이야기를 조금 하면, 주나라는 크게 시대상으로 서주와 동주로 나뉜다. 시대상으로 앞선 서주는 말 그대로 수도가 서쪽에 있기에 저렇게 일컫어지며, 동주는 이후에 수도를 동쪽으로 옮긴 후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의 분기점이 되는 사건은 주 유왕의 죽음이다. 주 유왕이 죽은 뒤 서주가 멸망하고, 주나라는 동주로 이름을 바꾸어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한다. 중국 고대사를 살펴보면 하나라의 걸왕은 말희때문에 멸망당했고, 은나라의 주왕은 달기때문에 멸망당했다. (물론 이렇게 단일 요인만 존재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 나라의 멸망에 이런 경국지색이 있었다고들 한다.) 마찬가지로 주나라 유왕에게는 포사, 라는 미녀가 있었다. 이 포사, 는 잘 웃지 않는 미녀였는데, 이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유왕은 무리수를 두게 된다. 그것은 봉화를 올리는 것이었다. 당시 시대상으로 봉화는 제후들의 소집에 쓰이는 그런 중요한 기구였었다. 그런 봉화를 단지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사용한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봉화에 제후들은 완전 무장을 하고 모이게 된다. 하지만 주 유왕은 그들앞에서 침략은 없으며, 그대들은 헛걸음했노라고 이야기하고, 화를 내다가 너털걸음으로 돌아가는 제후들을 보며 포사는 깔깔거리며 웃음소리를 높였다. 이런 일이 반복이 되자 제후들은 어느 순간부터 봉화를 울려도 가지 않게 되었다. 말하자면 중국판 양치기 소년이었던 것이다.

 

 

주 유왕은 이렇게 어리석었다. 하지만 단지 어리석을 뿐이었다면 주나라는 당대에는 망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마지노선이었달까, 안그래도 지방 제후들의 권력은 가면 갈수록 천자의 권력에 비등해질정도로 강해지고 있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고대의 믿음들 - 삼황오제의 전설 등 - 이 그들을 끝끝내 억누르고는 있었다. 그리고 명분이 없다는 것도 한 몫하였었기에, 만약에 유왕이 어리석기만 하였었다면 주나라는 조금 더 서쪽에 수도를 둘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맹자는 말한다. 은나라의 주왕을 주 무왕이 죽인 것을 두고, '한 필부를 죽였다는 소리를 듣기는 하였으나 천하를 찬탈했다는 소리를 듣지는 못하였다' 라고. 결국에는 민심이 중요한 것이다. 당시의 주나라가 아무리 부패하였다고는 하나, 민심은 은나라 말기만큼이나 날카롭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주 유왕은 어리석기만 한 것이 아니라 포악하고 의심도 많은 사람이었다. 바로 여기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가 한 일은 많으나, 가장 자충수처럼 여겨지는 일은 자신의 외척을 의심하고 죽이려 몰아붙였던 일이다. 그 외척은 결국 달아나 견융, 이라는 이민족과 연합하여 먼저 공격당하여 죽임을 당하기 전에 주 유왕을 죽였다. 주 유왕은 봉화를 울리라 명하였으나, 이미 여러번 낭패를 맛본 제후들이 그 봉화를 보고 달려올 리 없었고, 결국 주 유왕은 죽고, 포사는 끌려가 범해진 뒤 자살을 한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견융이 주나라의 수도를 차지하고 있지는 못했다. 위기는 언제나 기회와 함께 오는 법, 진秦나라의 당시 군주는 이 상황을 두고 예리하게 분석했다. 아직 주나라의 국운이 쇠할 때가 아니다. 그렇다면 남들이 돕지 않는 이 때 가장 먼저 가서 돕고 천자에게서 완전히 인정받는 것이 좋다, 이런 판단을 내렸던 그는 바로 군대를 몰아 견융과 외척세력을 몰아내버린다. 덕분에 오등작 - 공후백자남 - 중 백작을 받고는 제대로 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때 진秦나라와 함께 도운 나라가 진晉나라이다. 진晉나라에 대해서는 밑에서 이야기 할 것이다.

 

앞서 진秦나라는 이민족과의 먹느냐, 먹히느냐의 싸움을 계속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환경은 진나라인들에게는 도리어 전화위복이 되었다. 그래서 순자는 후에 진나라에 들러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진나라는 법도가 엄격하고 규율이 잘 지켜져서 백성들이 삿되지 않다, 고 말이다. 다만 순자는 그런 말 다음에 탄식을 하는데, 이는 진나라는 이민족들과 어울리다 보니, 예와 인에 대해서 잘 모른다, 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처럼 깊은 개념은 당장 이민족들과 싸워야 할 진나라에게는 익숙하지는 않았다. 아니, 당장은 소용이 되지 않았다.

 

진나라가 본격적으로 반석에 오르게 된 것은 진 목공때부터이다. 진 목공은 춘추오패의 일원으로써 그 위세를 떨쳤었는데, 그가 이렇게 오패의 일원에 들게 된 것은 그 자신의 능력도 능력이었지만, 모사들을 잘 활용했었던 것에 있다. 진 목공의 모사는 크게 두 명이 알려져있는데, 백리해와 건숙이 바로 그들이다. 가도멸괵의 고사를 아는가? 진晉나라는 근처의 괵나라를 멸망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바로 옆의 우나라에게 길을 빌려주기를 청하고, 그들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겠다, 선언하였다. 어리석게도 우나라는 진晉나라에게 길을 빌려주었고, 결국 진나라에게 멸망당했다. 이때 이 진晉나라의 속셈을 알아채고는 도망쳐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 바로 백리해이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진秦나라에서 벼슬자리에 올라서 진秦 목공을 패자의 자리에 우뚝 서게 만들었다. 건숙은 또 어떤가? 그는 진秦 목공이 승산없이 초나라를 쳐들어가려고 하자 말렸던 사람이 아닌가? 앞날을 꿰뚫어 보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모사였었다.

 

여기서 공은 진晉나라로 넘어간다. 진晉나라에서도 춘추오패를 배출해내었기 때문이다. 대저 춘추오패라 함은 다음을 말한다. 제나라 환공, 진秦 목공, 진晉 문공, 초나라 장왕, 송 양공. 패는 왜 패覇인가? 제후의 모임인 회맹을 주도하기 때문에 패覇이며, 천자를 대신하고는 그 회맹의 중심이 되기에 패覇이다. 그렇기에 초 장왕은 감히 주나라의 구정의 무게를 물었던 것이다. 진晉나라의 춘추오패는 바로 문공이다. 그런데 이렇게 문공이 오패로 우뚝 서기까지는 정말 많은 고난이 있었다. 그리고 진晉나라 자체도 많은 부침이 있었다.

 

진晉 나라와 진陳 나라는 그 출몰연대가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굳이 따지자면 진晉나라가 앞선다. 진晉나라의 기원은 주 무왕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은 주왕에 반기를 든 희창, 그 희창의 뒤를 이은 주 무왕은 이윽고 중국 천하를 주나라의 산하로 만들었었다. 그 주 무왕의 아들이자 주나라 3대 왕인 주 성왕의 동생이 바로 진晉나라의 시조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晉 나라가 생긴 시점은 대략 기원전 1000년 정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진晉나라가 우리가 아는 춘추시대의 진晉나라와 완전히 동일한 나라이냐면, 또 그렇지는 않다. 진晉 나라는 기원전 1000년에 어느 정도 기틀을 잡은 뒤 두 나라 - 익, 곡옥 - 로 나뉘고 말기 때문이다. 한참을 그렇게 두 나라로 나뉘어 기틀을 다져가던 그때, 곡옥의 왕이었던 무공은 익나라를 공격후 멸망시키고 하나의 진으로 다시금 통합시킨다. 이 진 무공이 후에 패자가 되는 진 문공의 할아버지다.

 

여기서 진나라의 환란이 끝이 난 것은 아니다. 후계자 문제로 저 무공의 아들인 헌공때 다시 환란을 겪는다. 헌공은 가도멸괵, 순망치한의 바탕이 되는 사건을 일으켰지만 - 괵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이야기이다. - 자신의 후계를 제대로 지정하지 않았고, 그래서 후계 문제는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이 환란은 바로 옆의 국가였었던 진秦 나라의 개입으로 인하여 중이가 왕에 오름으로써 끝이 나고 만다. 여기에 얽힌 이야기가 흥미롭다. 당시 진秦 나라의 왕은 패자 목공이었는데, 외국으로 망명한 중이에게 간단한 질문을 던진다. 그대를 곧 왕으로 만들어 주면 어떻겠소이까? 하지만 당시에 자신의 아버지인 헌공을 잃은 시기였었던 중이는 천륜을 어길 수 없다, 이런 혼란스러울때에 왕위에 오를 수 없다, 하여 고개를 가로젓는다. 하지만 동생인 이오는 중이와 다른 인물이었고 진 목공에게 만약에 자신이 왕이 된다면 진秦 나라에게 진晉나라의 성을 바치겠노라고 공언해버린다. 처음엔 중이를 왕위에 올리려 하였던 진 목공도 이오의 태도를 보고, 이오를 진晉나라의 왕에 올리는 것이 자신들 진秦 나라에 보탬이 되리라 여기고 이오를 왕위에 올리고 만다.

 

하지만 하늘이 정한 자는 결국에는 모든 난관을 거쳐 우뚝 천하에 서리라. 중이가 초나라에 망명할 당시 왕이었었던 초 성왕은 그들을 모조리 죽이라 주장을 하는 신하들에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야기한다. 중이는 어진 이이고, 하늘이 정한자이니 지금 죽이는 것은 천리에 맞지 아니한 것이다. 초 성왕이 그런 판단을 하게 된 것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그는 중이에게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만약에 그대가 왕이 되어 우리와 전쟁을 하게 된다면 그대는 우리에 어떤 보답을 할 것인가? 중이는 한참을 고민하고는 왕에게 이렇게 답한다 : 전쟁시 90리를 물러서겠습니다. 주위의 신하들은 저 중이는 매우 방자한 인물이고, 또한 위험한 인물이니까 당장 죽이라 간언하였지만 성왕은 호쾌한 웃음을 지으며 받아들인다. 결국 이 두 나라는 실제로 결전을 벌이게 되고, 진晉나라는 실제로 90리를 물러난 뒤 초나라를 패퇴시킨다.

 

우여곡절끝에 중이는 이오 - 진晉 혜공, 그리고 이오의 아들인 진晉 회공을 쫓아내고는 왕에 오른다. 여기까지는 좋았었지만 동시대 패자를 다툴 초 성왕은 매우 기세가 당당한 인물이었다. 당시에 패자의 자리에 오르려 했던 송 양공을 - 패자의 의미를 회맹을 주도하였다, 로 둔다면 송 양공을 패자로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송 양공을 패자의 하나로 본다. - 부상입혔고 결국 패자의 자리서 쫓아내었으며, 진秦 목공 다음의 가장 유력한 패자가 되리라 볼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성왕은 결국 진 문공, 중이에게는 패퇴를 당하고 만다. 여기서 90리를 물러난 약속이 실제론 계책이었다, 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 상대가 기세가 등등할 때에는 맞서 싸우지 않고, 상대의 기세가 수그러졌을때 공격을 하여 승리를 가져갔었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리라. 그 90리의 약속이 정말 진실된 마음때문에 지킨 것인지 계책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전쟁은 진晉문공을 패자로 만들게 되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진秦 목공은 진晉 나라의 혼란을 틈타 멸망시키지를 않았나? 상대의 혼란은 나에겐 득이다. 그러나 진秦 목공은 진晉 나라를 그대로 유지시켜주었다. 이는 파악컨대 두 가지로 이유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멸망시키는 것 보다 그대로 놓아두고 속국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 더 경제적으로 이득이라는 것을 진 목공이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라는 것이다. 치안과 정치 그리고 문화 등 귀찮은 부분은 그 나라 군주들에게 맡기고 경제적 알맹이들만 자신들에게 들어오도록 한다. 근대의 식민지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경우에 백성의 불만도 그들의 군주들에게 돌아가버리니 민심을 잃을 가능성 자체도 낮다고 할 수 있겠다. 이를 위해서 진秦 목공이 이오를 왕위에 올린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진秦 목공이 실제로 그렇게 여겼었다면 그 전략은 실패로 돌아간 것 같다. 결국 이오는 진秦 목공을 배신하고는 신의를 지키지 않았고 때문에 진秦 목공에게는 큰 이득이 돌아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일을 겪고도 진秦 목공은 진晉 을 멸망시키지는 않았다.

 

결국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춘추시대까지는 존왕양이의 이념이 강했다, 라고 말이다. 왕을 존중하면서 이민족들을 몰아내버린다. 그런데 진晉 나라는 사실 주 나라 왕실에 직접 토지를 받은 제후일지니 - 앞서 설명한 바에 따르면 진晉 의 국성國姓은 희씨로 주와 같은 성씨다. - 함부로 건드리지를 못했다, 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주가 직접 질서를 만들어 낸, 토지를 나눠준 진晉 이었기에 존왕양이의 기치를 가장 먼저 내세운 - 앞서 주가 이민족에게 공격받았을때 가장 먼저 군사를 내었다고 말했다. - 진秦 은 공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단순히 춘추시대는 상대를 멸망시킬 정도로 심하게 공격을 하지는 않는 시대였었다, 라고 본다면 진晉에게 멸망당한 괵같은 곳들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 것인가? 물론 여기에 반박은 있다. 괵나라 자체도 매우 높은 위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였었다. 괵의 군주는 주 문왕의 자손의 나라였었다. 그렇다면 진이 괵을 멸망시켰던 것은 주 가 세운 질서를 무너뜨린 꼴이 되지 않겠나?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진 목공은 멸망을 시킬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라는 것이다. 실제로 한 국가가 외부의 침입을 받으면, 그때까지는 서로 내분을 일으키더라도 뭉치게 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진 목공은 공격을 통해서 멸망시키는 것을 중단하고는 이오를 밀어주었다. 아마도 그 당시 진 목공의 심정은 이 세 가지 중 어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진晉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엄밀히 말하면 어느 정도의 명맥은 유지를 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멸망에 가깝다.) 왼쪽의 책 치도를 보면 멸망 당시의 진晉나라에 대한 흥미로운 일화가 나온다. 당시 진晉나라는 네 집안이 세력을 거의 나눠가지고 있었다. 지씨와 한씨, 위씨, 조씨가 바로 그들인데 가장 강력한 집안은 지씨였었고, 한씨와 위씨는 지씨의 가신들이나 다름없었다. 유일하게 조씨가 지씨의 패권에 도전했지만 지씨의 세력 앞에서 성 안으로 갇히고 만다. 그러나 조씨의 군주 조양자는 덕이 강한 인물이었고 성내의 백성들 모두 조양자와 함께 죽을 것을 각오하고 결사항전을 하니 도저히 점령할 수가 없었다. 물론 만약에 한씨와 위씨가 지씨를 열심히 도왔었다면 분명 결과가 있었겠으나 무력에 의한 겁박덕분에 도우고 있으니 어찌 전심을 바치겠는가. 그렇게 점차 지구전으로 상황이 흘러가던때에 지씨의 수장인 지백은 한씨의 수장 한강자와 위씨의 수장 위환자를 자신의 수레를 끌게 한 뒤 직접 전투 상황을 시찰하러 나갔다. 사실 지백의 머리속에는 이미 조양자는 안중에도 없었고, 승리한 다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지백의 입에서 무의식중에 말이 흘러나왔다. 여기 이 강물이 흐르는 곳은 어디인가, 라고. 그 말을 들은 한강자는 위환자를 팔꿈치로 툭 쳤다. 당시 지씨가 공격하고 있던 성의 근처에는 강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 강물을 따라 나아가다보면 한씨의 영토까지도 다다랐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 강물을 따라 그대로 진군하여서 한씨마저도 멸망시켜야겠다, 라고 무의식중에 말한 것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이에 위환자는 한강자의 발등을 밟는 것으로 그 대답을 대신하였다. 한씨가 멸망한 다음에는 당연히 위씨다. 탐욕스러운 지백이 그들을 살려둘 리가 없을 것이니.

 

이윽고 조양자는 위환자와 한강자에게 밀서를 보내 지씨를 함께 멸망시키자고 말한다. 그리고 한, 조, 위, 세 가문은 힘을 합쳐 지씨를 모조리 죽이고 만다. 그 여세를 몰아 그대로 세 가문은 세 국가로 탈바꿈해버린다. 이를 두고 삼가분진이라는 말을 쓴다. 물론 진晉 자체는 이때까지만 하여도 이름은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조리 세 국가 - 한, 조, 위 - 들에게 땅을 빼앗겨버리고 만다. 여기서 춘추시대는 막을 내리고 전국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만약에 주나라 왕실이 아직도 힘이 있었다, 라고 한다면 분명 한, 조, 위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분봉한 국가를 건드리지 말고 다시 진晉 으로 돌아가도록 하여라, 라고. 하지만 당시의 왕은 힘이 없었고 그대로 승인해버리고 만다. 이를 보고 다른 국가들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더이상 주나라는 힘이 없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이리라, 라고.

 

진陳 나라에 대해서는 사실 그렇게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 간단하게나마 언급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때문이다. 진陳 왕족이었던 진완은 제나라로 건나가 제나라를 자신의 나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전국시대에 칠웅으로 자리를 잡았던 제나라는 바로 이 진陳씨의 제나라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바로 여기에도 매우 흥미로운 얽힌 이야기들이 있다.

 

진陳 나라의 건국은 주 무왕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 무왕의 딸은 진陳 나라의 시조와 결혼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진陳 국가의 시작을 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결혼을 통하여 진陳이 제후국으로 발돋움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진陳 은 계속 주위 나라들에게 시달렸었고, 업친데 덮친 격으로 내분까지도 일어나게 된다. 바로 후계자 문제다. 한 나라를 기업으로 보자면, 이 기업이 잘 유지되려면 후계를 잘 둬야 한다. 진陳 이라는 기업은 여기서 제대로 맞물리지가 않았다. 결국 후계구도에서 쫓겨난 완이라는 공자는 제 나라로 도망가버리고, 거기서 처음으로 진陳씨를 써서 자신을 진완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이 진陳완은 제나라에서 착실히 일하여 전田땅을 하사받으니 이로써 전田완이라고도 불렸다. 전씨는 상공업에 계속 종사하였고 결국 제 내부에 깊숙히 뿌리를 내리게 된다. 결국 기회를 엿보던 전씨는 힘을 기른 뒤 제나라의 왕을 쫓아내고 왕위를 차지하고야 만다. 원래 제나라는 강태공을 시조로 하는 나라였지만 이를 기점으로 제나라는 전씨가 왕이 되었다. 이를 전田제라 일컫고 허수아비에 가까웠던 주나라 왕은 그대로 인정하고야 만다.

 

이제 이 긴 글의 결론을 내릴 때가 되었다. 사실 이 글의 제목인 '진나라가 몇 개 있었나?' 에 대한 정답은 세 개,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진軫 나라가 하나 더 있기는 하다. 진軫. 하지만 그야말로 기록에도 거의 없는 나라일테니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나라 입장에서는 진나라가 너무 많다고 헷갈리겠지만 중국인 입장에서는 발음이 모두 제각각이기 때문에 헷갈릴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이 글의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일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여야 할 것은 진나라의 갯수 따위가 아니라 저 진나라들을 살아간 사람들 자체에 얽힌 이야기들이다. 춘추전국시대만큼 여러 나라들이 난립하고 이해득실을 따지며 여러 분야가 발달한 시대는 드물 것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왜 중국이 결국엔 유럽에 따라잡히게 되었나, 에 결국엔 중국이 안정을 추구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라는 해답을 내놓았었다. 이를 뒤집어 이야기하자면 만약에 계속된 분쟁이 있다면 그 분쟁에 참여한 국가들 모두는 계속 발전할 여지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 시대에 가장 무기가 발달한 시기는 1, 2차 세계 대전 때였다. 이런 분쟁은 물론 해가 되겠지만, 동시에 득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책 등을 통하여 굳이 전쟁을 겪지 않고도 그들의 정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p.s. 여기선 여담인데, 나는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주장인 계속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때문에 유럽이 중국을 앞서나가게 되었다, 라는 것에는 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물론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근거가 저것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중국은 진시황이후로 하나의 중국이라는 신념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요순시대에 하나의 중국이 있었다지만 문헌의 이야기 뿐이다. 그 넓은 땅덩이 모두를 지배한 모습을 백성들 눈에 똑똑히 새겨준 때는 진시황때였으니까. 그래서 수많은 전쟁을 겪고도 결국엔 중국은 다시 하나로 돌아갈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한 번 일어난 것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그리하여 중국사에서는 만성적 통일이 몇 번이고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사실 발전상으로 볼때는 가치중립적인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서, 통일 자체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장 우리 나라만 해도 북한과 끊임없이 분쟁 중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가 이 분쟁을 통해서 경제력이나 군사력에서 미국을 앞지를 수 있을까? 문제는 그 운용에 있다. 또한 하나의 중국, 그리고 통일이라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무엇을 대가로 치르더라도 다시 통일을 하려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이런 목표하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막연한 분열들에서 일어나는 전쟁보다는 훨씬 치열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훨씬 국가의 힘을 강하게 만들 것이다. 나는 청나라의 성군들, 그러니까 강희제에서 옹정제로 이어지고, 건륭제에서 마무리되는 그 시기에 유럽에 추월을 당하게 된 근본적 이유가 있으리라고 본다. 좀 더 말하자면, 나는 청나라가 만약에 좀 더 유연해졌다면 유럽을 도리어 앞지를 수 있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가지는 편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만성적인 분열과 만성적인 안정이라는 유럽과 중국의 차이점에서 유럽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말이다.

 

p.s.2  다음엔 도교에 관한 이야기를 끄적여 볼까.. 생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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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3-07-21 11:39   좋아요 0 | URL
평소에 저도 궁금하던 부분인데, 엄청난 페이퍼로 정리해주셨네요.잘 읽었습니다 ^^

가연 2013-07-31 17:58   좋아요 0 | URL
어허허.. 감사합니다. 답이 매우 매우 매우 늦어버렸습니다

희선 2013-07-21 23:39   좋아요 0 | URL
陈 [chén]
(陳) 늘어놓을 진
1.[동사] 진열하다. 배열하다. 차려 놓다. 벌여 놓다.
2.[동사] 진술하다. 말하다.
3.[형용사] 낡다. 오래 되다.


晋 [jìn] (알파벳을 그대로 읽으면 진이지만 찐이라고 들리더군요)
(晉) 나아갈 진
1.[동사] 나아가다.
2.[동사] 오르다. 승급하다. 승진하다.
3.[명사][역사] (Jìn) 진나라. [주(周)대의 나라 이름. B.C.1106〜B.C.376년. 지금의 산시(山西)성·허베...


秦 [Qín] 친(발음을 들어보니 이렇더군요)
1.[명사] 주(周)대의 나라 이름.
2.[명사] 진(秦)나라. [B.C 221〜B.C 206년]
3.[명사] 산시(陕西)와 간쑤(甘肃) 일대의 지역.



轸 [zhěn]
(軫) 수레뒤턱나무 진
1.[명사][문어] 수레뒤턱나무. [고대의, 수레 하부의 사방으로 가로지르는 횡목]
2.[명사][문어] 수레.
3.[명사][천문] 진수(軫宿). [이십팔수(二十八宿)의 하나]



중국어 사전에 한자를 넣어보니 이렇게 나왔습니다(중국식 한자인 간체자는 작게 보이죠 그냥 뒀습니다) 모두 발음이 다르군요(陳 첸, 晉 찐, 秦 친) 요즘은 한자 그대로 읽지 않고 중국말로 하게 됐잖아요 이 나라 발음도 그렇게 바뀌어야 하지 않을지... 이렇게 말하지만 예전에 한자음으로 읽은 것과 다시 중국말로 했을 때 다른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게 뭐였는지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전쟁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아주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나라를 하나로 만들려 한다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예전에는 유럽이 중국을 앞질렀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중국이 앞지르려 하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아직 이런저런 문제가 있지만... 그리고 우리나라도 중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죠 책이 많이 나오고 있고, 중국말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도 많을 것 같군요 저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할 뿐이지만...^^

진나라, 그냥 이 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많이 있었군요 중국말로는 다르지만... 주 유왕이 한 일은 조금 웃기는군요 왕이 여자를 웃기기 위해서 그런 일을...

역사 왜곡은 그만했으면... 우리나라가 거기에 잘 대응해야 하지만...


희선

가연 2013-07-31 18:00   좋아요 0 | URL
맞아요, 모두 발음이 다릅니다. 위의 진시황 평전에도 Qin이라고 나와있습니다. 그나저나 중국어 사전을 찾아보시다니.. 대단한 학구열이신데요ㅎㅎㅎ

동북공정은 끊이지 않지요, 우리나라의 역사를 편입시키려는 움직임들도 있으니. 그래서 도리어 더욱 중국 역사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조금씩 합니다

2013-07-28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31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04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05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