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코앞까지 바싹 다가왔다. 비교적 짧은 연휴 동안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많을 터, 명절은 언제나 비용 대비 만족도(소위 가성비) 면에서 평균 점수를 밑돌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 무서워서, 혹은 자주 뵙지도 못하는 연로하신 부모님 생각에 공항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애써 고향 쪽으로 옮겨 놓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처럼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상황과 맞닥뜨리면 빠듯한 월급에서 설 선물과 세뱃돈, 오가는 경비 등을 지출할 생각에 절로 한숨부터 새어 나온다. 물론 이런 명절이 아니면 사는 게 바빠 조카들 얼굴 한 번 보기도 어렵지만 말이다.


요 며칠 봄처럼 따스했던 날씨는 명절을 코앞에 두고 돌변한 느낌이다. 옷깃을 파고드는 소소리바람에 제법 오싹한 한기가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아직 2월도 초순이니 겨울 추위를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건만 워낙 따뜻한 겨울 날씨가 길게 이어졌던 까닭에 계절 감각이 둔해졌나 보다. 인터넷에서 설 선물 시세를 여기저기 훑어보던 나는 선물보다 현금이 오히려 싸게 먹히겠다는 얄팍한 계산과 함께 인터넷 서핑을 멈춘다. 잔뜩 흐린 하늘에 바깥은 여전히 칙칙한 무채색에 휩싸인 듯하고 문틈으로 새어드는 한기에 나는 이따금 나도 모르는 기침을 한다. 요즘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는 권여선 작가의 산문집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설날이든 추석이든 명절 때 나는 아무 데도 안 간다. 친정도 없고 시댁도 없기 때문이다. 명절에 차례도 안 지내고 함께 모이지도 않는 집안을 콩가루 집안이라 한다면 나는 콩가루 집안 출신의 콩가루이다. 이런 내 사정을 아는 사람들, 특히 내 또래의 여성들은 나를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른다. 콩가루에 대한 로망을 가진 그들은 한술 더 떠 긴 연휴 동안 자유롭게 여행이라도 떠나지 그러느냐고 권하는데 이건 뭘 몰라도 한참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내가 여행을 즐기지 않는 탓도 있지만, 내 생각에 긴 연휴 동안 집구석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만이 집구석을 떠나 어디로든 여행을 가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집구석에서 한껏 자유로운 나는 더 자유롭기 위해 굳이 여행을 떠날 필요를 전혀 못 느낀다. 그리고 설사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나는 평생 취업 한 번 하지 않고 자유 직종에 종사하며 살아온 자유인으로서의 윤리랄까 도의랄까, 그런 게 있어서 번듯한 직장인들이 놀러 가고 고향 가고 여행 갈 때는 가급적 안 움직이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들이 출근해서 열심히 일할 때 여유롭게 여행을 가면 될 걸, 하필 말도 못하게 붐비는 명절 연휴에 티켓과 여로를 놓고 그들과 경쟁할 필요가 있겠는가 말이다. 콩가루가 되어본 적 없는 가여운 사람들만이 그런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꾸 여행 타령을 한다."  ('오늘 뭐 먹지' 중에서)


이 대목만 보더라도 권여선 작가의 인기가 드높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윤리 의식이 투철하기 때문(?)이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데 나는 권여선 작가에게 몇 번이고 지고 만다.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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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2-10 0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절에 해외여행 떠나시는 분들은 이글을 읽고 무슨 생각을 할지도 궁금해지네요. 왜 나만 가지고 그래?라는 유명대사를 차용할 듯ㅎㅎ

꼼쥐 2024-02-13 17:12   좋아요 0 | URL
권여선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집구석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해서 여행을 떠나는 것일 테지요. 아니면 콩가루 집안이기 때문일까요? ㅎ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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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야생동물을 관찰하고 연구하던 어느 여성 생태학자가 생애 처음으로 쓴 소설을 세상에 내놓았을 당시 그녀의 나이는 70에 가까웠다. 늘그막에 웬 소설이냐고 타박을 들어도 한참을 들었을 나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을 것 같은 이 여인의 소설이 어찌 된 일인지 입에서 입으로 조금씩 소문이 나더니 2018년 출간 이후, 2022년 1월 기준으로 1,200만 부가 팔리면서 미국에서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책 중 하나로 꼽히게 되었음은 물론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하니 실로 놀랍지 않은가. 책이 출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단박에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던 것도 놀랍지만 그것이 생애 첫 작품이라니...


1960~70년대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의 습지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백인 우월주의가 팽배했던 당시의 시대상과 척박했던 노스캐롤라이나의 습지가 잘 어우러진, 게다가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어느 누구의 보호나 보살팜도 없이 자란 탓에 자본주의 공동체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처절한 고독과 사랑에 대한 갈망, 배신하지 않는 자연에 대한 애착과 자연의 순환 구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성장했던 한 여인의 성장 스토리는 자본과 유불리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외톨이가 된 카야의 앞날을 예견하는 듯 소설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습지는 늪이 아니다. 습지는 빛의 공간이다. 물속에서 풀이 자라고 물이 하늘로 흐른다. 꾸불꾸불한 실개천이 느릿하게 배회하며 둥근 태양을 바다로 나르고, 수천 마리 흰기러기들이 우짖으면 다리가 긴 새들이 -애초에 비행이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는 듯- 뜻밖의 기품을 자랑하며 일제히 날아오른다."  (p.13)


언니 오빠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카야는 다섯 아이의 막내였다. 여섯 살에서 일곱 살로 넘어가던 시기에 엄마를 필두로 언니 오빠들이 모두 아빠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렸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과 싸우다가 왼쪽 허벅다리에 파편을 맞고 폐인이 된 아버지의 수입원은 매주 수령하는 상이군인 연금이 유일했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조디 오빠마저 집을 떠난 후 카야는 아버지와 공존하는 법을 배웠다. 빨래를 하고, 땔감을 구해 오고, 청소를 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카야는 오빠의 매트리스에 털썩 주저앉아 하루의 끝이 벽을 타고 스르르 미끄러지며 떨어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해가 저문 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빛이 머물다 방 안에 고였다. 아주 짧은 찰나 어지러운 침대며 묵은 빨래 더미들이 바깥의 나무들보다 훨씬 또렷하고 다채롭게 보였다."  (p.25)


글을 읽을 줄도 셈을 할 줄도 몰랐던 카야가 학교에 갔었던 건 단 하루. 아이들의 놀림과 마을 사람들의 냉담한 시선에 카야는 스스로 습지에서의 고독을 선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에게서 편지가 왔다. 글을 모르는 카야는 편지에 어떤 내용이 쓰여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편지를 읽은 아빠는 편지는 물론 엄마의 체취가 묻은 모든 것을 불에 태우고 떠나버린다. 어린 나이에 홀로 남겨진 카야는 홍합을 캐고 훈제 물고기를 팔아 식료품을 사고 보트에 연료를 채웠다. 이런 모습을 가엾게 여긴 건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점핑 부부와 조디 오빠의 친구인 테이트가 유일했다. 흑인인 점핑 부부는 교회에서 얻어온 헌 옷과 신발을 주기도 하고 카야가 캐 온 홍합을 구매하기도 했다. 한편 습지 생태계를 잘 알고 있는 테이트는 카야에게 글을 가르치고, 카야와 함께 습지 생물들을 관찰하면서 애정을 키워갔다. 마을의 백인 사회에서 카야는 마시 걸로 불리는 것은 물론 더럽고 부정한 존재로 여겨졌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상록수는 몰라도 시카모어는 이미 눈치를 챘다. 암회색 하늘 가득 수천 장의 황금빛 잎사귀를 휘날렸다. 어느 날 오후 늦게 수업이 끝난 뒤 테이트는 가야 할 시간이 넘었는데도 가지 않고 미적거렸다. 테이트와 카야는 숲속 통나무집에 함께 앉아 있었다."  (p.153)


습지를 탐험하고 관찰하는 친구이자 유일한 대화 상대였던 테이트가 대학 진학과 함께 도시로 떠나자 카야는 다시 혼자가 된다. 꼭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던 테이트. 그러나 약속은 물거품이 되고 테이트에 대한 배신감과 함께 외로움만 커져간다. 결국 카야는 바람둥이 체이스와 사귀게 되고, 학업을 마친 테이트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카야에 대한 사랑과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과 미안함을 안고 있었던 테이트는 진심으로 용서를 빈다. 카야의 습지 생물에 대한 관찰 기록과 수집품을 본 테이트는 출판을 권유하고 그렇게 카야는 출판 기념회에 초대된다. 그 덕분에 군인이 된 조디 오빠와 극적으로 재회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신문에서 체이스의 약혼 소식을 접하게 된 카야는 분노한다. 카야를 단지 노리갯감으로 여겼던 체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카야를 만나러 오지만 카야는 이를 단호하게 뿌리친다. 화가 난 체이스는 카야를 폭행한다. 그러나 카야가 자신의 책을 출간했던 출판사 관계자를 만나러 마을을 떠난 사이에 체이스가 20m 망루 위에서 떨어져 죽게 되고 카야는 살인 용의자로 체포되는데...


"난 한 번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았어. 사람들이 날 미워했어. 사람들이 나를 놀려댔어. 사람들이 나를 떠났어. 사람들이 나를 괴롭혔어. 사람들이 나를 습격했단 말이야. 그래, 그 말은 맞아. 난 사람들 없이 사는 법을 배웠어. 오빠 없이. 엄마 없이! 아무도 없이 사는 법을 배웠다고!"  (p.434)


델리아 오언스의 첫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얼어붙은 독자들의 마음을 녹이고 주인공인 카야의 삶에 깊이 주목할 수 있게 되었던 까닭은 문학적 아름다움과 소설의 구성이 절묘하게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갈매기가 울고 파도가 치는 등 자연의 침묵 속에서 간간이 퍼지는 자연의 소리를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의 숨결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작가의 호흡이 문장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기 때문이리라. 자연을 동경하지만 무지와 두려움으로 인해 배척으로 일관해왔던 나와 같은 도시내기의 태곳적 향수는 카야라는 소설 속 인물을 통해 다시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산들바람처럼 스쳐가던 아름다운 문장들... 나는 한 권의 소설을 읽었던 게 아니라 어느 오지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한나절을 머무르다 온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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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의 불행을 피고인석에 앉힌 채 본인 스스로가 검사도 되고 변호인도 되면서 삶의 법정을 개최한다. 드물게 나타나는 행복을 참고인 삼아 내 불행의 원인을 따져 물을 때도 더러 있다. 그리고... 결론도 나지 않을 판결문을 우리는 매일 밤마다 반복하여 작성한다. 나의 불행은 유죄라고 거듭 주장하지만 배심원단의 표정은 냉랭하다. 나는 방청석에 앉은 수많은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나를 조금 더 이해해 달라고, 나의 불행이 유죄라는 사실을 조금 더 믿어 달라고 무언의 메시지를 보낸다. 그러나 불행의 원인인 결국 나에게로 회귀하고 만다. 그렇다면 나는 결국 유죄인가?


미세먼지가 걷힌 주말 오후. '立春大吉 建陽多慶'이라는 입춘첩을 큼지막하게 써서 대문에 붙여야 할 것만 같은 포근한 날씨. 나는 아침부터 서둘러 청소를 하고, 세탁기에 넣어둔 밀린 빨래를 돌렸다. 그렇게 분주하고 정신없는 오전을 보낸 나는 커피 한 잔을 들고 서재에 앉았다. 언제인지도 확실치 않은 낡은 노트에서 보았던 문장. 예전부터 나는 떠오르는 생각을 날짜도 기입하지 않은 채 낙서처럼 아무렇게나 써놓는 버릇이 있다. 어떤 글은 다른 누군가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문장들로 도배가 된 것도 있고, 또 어떤 문장은 내가 읽었던 어느 책에서 보았음직한 표절문 비슷한 것도 있고, 또 어떤 문장은 지금 읽어도 꽤나 괜찮아 보이는 것들도 간혹 눈에 띈다. 문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요, 그쪽 계통에서 일을 한 적도 없는 까닭에 나의 글쓰기 실력이야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거리도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매번 같은 언저리에서 맴을 도는 게 다이지만 가뭄에 콩 나듯 제법 그럴듯한 문장이 우연처럼 얻어걸릴 때가 있다. 신기하게도 말이다.


지난주부터 읽기 시작했던 델리아 오언스의 장편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거의 다 읽었다. 생애 처음 쓴 소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소설이었다. 나는 야금야금 아껴가며 읽느라 마음에도 없었던 병렬 독서를 해야만 했다. 

"평생 처음 혼자 맞는 밤이었다. 처음에는 숲속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몇 분에 한 번씩 일어나 앉아 차양문 밖을 살폈다. 한 그루 한 그루 모양을 낱낱이 아는데도 이따금 나무가 달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한참 침도 못 삼키고 뻣뻣하게 굳어 있는데 때마침 청개구리와 여치가 친숙한 노랫소리로 밤을 채워주었다. 어둠은 달콤한 향내를 간직하고 있었다. 더럽게 뜨거운 낮을 하루 더 견뎌낸 개구리와 도마뱀들의 텁텁한 숨결, 습지가 낮게 깔린 안개로 바짝 다가왔고 카야는 그 품에서 잠이 들었다."  (p.26)


금세라도 비가 쏟아질 듯 하늘은 잔뜩 흐려 있다. 행복도 불행도 다만 우리 삶을 이루는 하나의 구성 요소일 뿐이라는 걸 어렴풋이 이해할 나이가 되었다는 건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보다 적게 남았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삶에서 완벽한 이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나는 여전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떤 문장을 낙서처럼 끄적이고, 시간이 한참 지난 어느 날 예전에 알던 누군가로부터 온 편지처럼 반갑게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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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4 1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04 2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4-02-13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랑스럽게도 제가 가재가 노래하는 곳, 을 가지고 있어요. 아직 읽지는 못했고요.ㅋ

꼼쥐 2024-02-14 16:47   좋아요 0 | URL
아, 그러시군요. ㅎ
한 번 읽어보세요. 아주 재미있습니다. 어쩌면 다 읽으실 때까지 손에서 놓지 못할 수도 있어요.
 
퀴팅 : 더 나은 인생을 위한 그만두기의 기술
줄리아 켈러 지음, 박지선 옮김 / 다산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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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와의 아시안컵 8강전 축구 경기를 시청하느라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다. 16강전이었던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기도 그랬고 이번 경기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후반전 막바지까지 끌려가다가 경기가 끝나기 직전에서야 겨우 동점골을 넣음으로써 연장전에 돌입할 수 있었다. 극적인 것을 떠나 지켜보는 국민들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후반전 추가시간도 거의 끝나갈 무렵, '졌구나' 하는 체념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순간에 터진 동점골. 텔레비전으로 시청을 하는 우리도 이럴진대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하는 마음에 저절로 울컥해지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중꺾마)'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유행어처럼 쓰게 되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우리는 간혹 그릿(Grit)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안젤라 더크워스가 주창한 이 개념은 사실 성장(Growth), 회복력(Resilience), 내재적 동기(Instrinsic Motivation), 끈기(Tenacity)의 줄임말이며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미치는 투지 또는 용기를 뜻하기도 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성공'이라는 단어는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힌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마치 전쟁터에 나서는 군인처럼 끝없는 투지를 요구받기도 한다. 어떠한 이유로든 중간에 포기한다는 것은 '패배자' 혹은 '실패자'라는 낙인을 각오해야만 한다. 오늘 새벽에 펼쳐졌던 축구 경기도 다르지 않았다. 사력을 다한 선수들이 이제는 더 이상 뛰기 힘들다며 그라운드에 주저앉았더라면 경기를 지켜봤던 많은 국민들로부터 그런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낙인은 그들이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벗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릿의 유무가 삶을 재단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인식에 의문을 갖길 바란다.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열심히 일하고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자유를 여러분에게 주고 싶다. 언제나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자유, 시작한 모든 일을 끝마쳐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자유를 주고 싶다.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꺼이 그만두면 삶의 가능성은 확장될 수 있다. 이는 지금 붙잡고 있는 것을 놓더라도 자신에게 기회가 많음을 믿는다는 뜻이다. 퀴팅은 희망으로, 내일로 이어진다. 우리는 지금의 일을 그만두는 것으로써 변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얻는다."  (p.38 '머리말' 중에서)


언제부턴가 우리는 그릿은 미덕이고 퀴팅은 죄악이라고 믿게 되었다. <퀴팅(Quitting)>의 저자인 줄리아 켈러는 이와 같은 우리의 인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웨스트버지니아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학위 과정을 밟다가 그만두었던 경험, <시카고 트리뷴>에 입사해 기자로 일하면서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그만두고, 8권의 소설 시리즈를 집필하여 자신의 작품이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던 경험을 되살려 <퀴팅>을 썼다. PART 1 '퀴팅의 과학: 뇌는 퀴팅을 원한다', PART 2 '만들어진 그릿의 신화: "이제 그만할래"는 어떻게 모욕적인 말이 되었는가', PART 3'퀴팅의 기술: 다시 시작하는 법'의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하기 싫으면 그만두라는 무책임한 조언을 하자는 게 아니라 시작했던 어떤 일에 대해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그만둘 것인지 계속할 것인지를 냉철하게 결정할 수 있는 판단 근거를 제공한다.


"삶은 도박이다. 우리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여러분을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는 책에서는 정확히 그 반대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런 책에서는 삶이 무조건 자기 책임이라고 호언장담한다."  (p.154)


노력한다고 누구나 다 일론 머스크가 되지는 않는다. 온갖 노력을 쏟아부으며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능력과 한계는 어렴풋이 밝혀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동안 자신이 쏟았던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서 혹은 주변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이 두려워서 그만두겠다는 말을 '감히' 꺼내지 못한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그런 상황을 적어도 한 번은 맞닥뜨리게 된다. 그만두겠다는 말을 꺼낸다는 건 어쩌면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그동안 쌓아온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리겠다는 선언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결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어려운 과정을 벗어나고 보면 새로운 세상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것이 과거 자신이 누렸던 세상에 비해 좋을 수도 아니면 나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용서다. 매번 상황을 바로잡지는 않았던, 실패하기도 했던 자신과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는 또 실패할 테니까. 실패하고 계속 무언가를 그만둘 테니까."  (p.331 '맺음말' 중에서)


이렇게 말한다면 궤변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시작하는 모든 일은 자의든 타의든 결국 그만두기 위함이다.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어느 누구도 간절히 원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인식하기 시작했던 어떤 순간, 계속해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던 어떤 순간부터 우리는 죽기 위해서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우리는 죽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죽음 이후에 더 나은 삶을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는 게 다를 뿐이다. 단 한 번뿐인 삶이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도 이와 같은 규칙을 적용하려 드는지도 모른다. 익숙하거나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자가 하는 일과 추구하는 바는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언제든 그만둘 수 있고, 그것에 대해 죄의식이나 열패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언제든 새로운 길이 시작되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신중한 판단 기준도 없이 마구잡이로 그만두라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그만둘 시기를 하염없이 미루는 고지식한 사람이나 기준도 없이 수시로 그만두는 프로 이직러 모두에게 필요한 책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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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감옥에 갈 결심


겨울의 뒤꽁무니를 살금살금 밟아가면 꽃이 만발한 봄의 세계를 금세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포근한 주말입니다. 수컷멧돼지들의 발정기도 다 끝나가는 탓인지 다리의 힘이 풀리고 한낮에는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조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걸 잘 알지만 그게 어디 생각처럼 쉽기만 한 일이겠습니까. 나는 오히려 뒷골목 똘마니들과 마음껏 술이나 마시고, 기분 좋게 취해, 작금의 상황을 잊은 채 몇 날 며칠이고 잠이나 잤으면 좋겠습니다. 리더 멧돼지인 나에 대한 지지율이 끝도 없이 추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뇌물을 받은 아내 멧돼지에 대한 원성도 잦아들 줄 모르니 욱하는 성격의 나로서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나날입니다.


오늘은 전임 리더 멧돼지였던 그네 멧돼지의 생일인 까닭에 마음에도 없는 축하 인사를 했습니다. 내가 뒷골목에서 똘마니들과 어울려 다니던 시절, 나는 동운 멧돼지와 함께 그네 멧돼지를 붙잡아 감옥에 처넣었던 적이 있습니다. 암컷 멧돼지로는 처음으로 리데 멧돼지의 자리에 올랐던 그네 멧돼지는 몹시 낙담한 표정이었고, 그로 인해 리더 멧돼지의 자리도 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던 나였지만 그네 멧돼지를 지지하는 많은 멧돼지들이 안면에 철판을 깔고 나를 지지하게 되었던 건 모두 나를 두려워하는 마음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들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상황인식 때문이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리더 멧돼지의 자리에 오른 나로서는 애시당초 그네 멧돼지에 대한 원한이 없었음은 물론 감옥에 처넣었던 건 단지 어쩔 수 없는 시대상황의 결과였다는 걸 밝힐 필요가 있었습니다. 나는 마음에도 없는 생일 축하 인사를 함으로써 나의 성격이 그렇게 모질거나 악랄하지는 않다는 걸 상징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게 이제 다 지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법을 제정할 입법 멧돼지들을 뽑는 선거가 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나는 새로 선출된 입법 멧돼지들로부터 리더 멧돼지의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요구를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나와 나의 아내 멧돼지는 물론 나를 지지했던 많은 멧돼지들이 감옥에 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이 나라의 전체 멧돼지를 위해서는 옳은 판단일지도 모릅니다. 능력도 없고, 더 이상 리더 멧돼지를 하고 싶지도 않은 나로서는 감옥에 가는 게 더 편하다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는 말입니다. 내일 모레는 봄이 온다는 입춘. 봄이 오면 모든 걸 내려 놓고 감옥에 갈 결심입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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