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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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너그러울 수 있을까요? 관용과 포용의 한계는 과연 그 끝이 어디일까요? 나의 평가가 조금 박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들 각자가 지닌 너그러움의 한계는 스스로에게 오는 물질적, 정신적 피해가 전혀 없는 선에서만 가능하다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예컨대 성소수자에 대한 관대함은 그들로 인해 나의 종교생활에 조금의 피해도 미치지 않을 때, 천안함 생존 장병이나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배려는 나의 정치 성향과 내가 낸 세금에 눈곱만큼의 피해도 입히지 않는 선에서,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희생과 아픔은 폭력과 공권력의 대치라는 색안경이 벗겨졌을 때 등 대한민국 국민 각자가 생각하는 한계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미치는 피해의 유무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들 대부분은 이해관계가 있는 당사자가 아니라 제삼자의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종교가 달라서, 정치적 성향이 같지 않아서, 추구하는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직장 내에서 직급이 다르거나 나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 등 우리가 누군가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이유는 너무나 많고 복잡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차별받는 누군가에 대한 고통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적어도 주류로부터 배제된 비주류에 속하거나 그들과 함께 걸을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 까닭입니다. 그들 역시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라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잊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 공동체 밖으로 사라져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와 같은 인식은 김승섭 교수의 저서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에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지금 현재 고통을 받고 있거나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비정한 인식과 매몰찬 태도 말입니다.


"혐오는 쉽습니다. 가장 약하고, 아픈 당사자들을 욕하면 되니까요. 어떤 이들은 HIV 감염인에게 "네가 잘못해서 걸린 거다. 네 치료에 들어가는 세금이 아깝다"라고 함부로 손가락질합니다. 인권과 사회보장의 관점에서 그릇된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혐오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 아니라, 상황을 더 악화시킵니다. 혐오와 낙인은 한국의 HIV 신규 감염을 증가시키고 더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p.188)


책에서 저자는 직업병 피해자, 성폭력 생존자, 성소수자와 관련된 소송에서 전문가 소견서를 쓰거나 법정 증언을 했던 경험을 소개하면서 상대측 대형 로펌 변호사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마련하고, 우아한 얼굴로 합리적 주장을 펼침으로써 종종 승소하는 걸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신이 살아온 고된 역사와 몸 깊숙이 새겨진 상처 말고는 자신의 주장을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갖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우리의 현실이 이럴진대 합리성과 억지를 구분할 수 있는 '합지적인' 기준은 무엇이어야 하며, 사회적 합의라는 미명하에 차별금지법을 '나중에' 처리할 일로 치부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를 뒤집을 만한 합리적 근거는 무엇일지 묻고 있습니다. 영국의 BBC는 한국,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OECD 국가에서 이와 비슷한 법률이 존재한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결국 우리나라는 차별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두 국가 중 한 나라가 된 셈입니다.


"사회적 약자의 삶에 대한 연구는 기본적으로 불평등에 대한 연구이다. 사회역학은 권력과 자본에서 배제된 이들이 살아가는 삶의 환경을 측정하고, 부조리한 환경이 약자의 몸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역학 연구는 종종 사회적 약자 집단이 기득권 혹은 전체 인구 집단에 비해서 건강 상태가 어느 정도 나쁜지를 확인한다."  (p.168)


나는 김승섭 교수의 저작 대부분을 읽어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독서의 재미나 지적 허영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나를 비롯한 우리 사회 구성원 전체가 과거에 비해 해가 갈수록 이웃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폭이 줄어들고 있지나 않나 하는 자각과 반성의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내 이웃에 대한 이해와 배려심이 반려견 반려묘보다 못한 처지가 되어가고 있다는 뼈아픈 현실은 나를 슬프게 합니다. 그러나 저자가 밝힌 바와 같이 그와 같은 현실에 대한 감정적인 접근이나 감상적인 인식만으로는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정확한 근거와 합리적인 주장을 통해 의견이 다른 사회 구성원을 설득하는 게 급선무일지도 모릅니다.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를 낳지 않는다. 세상은 복잡하다. 사회문제 해결은 그 복잡함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한다. 복잡하게 얽힌 매듭을 푸는 대신, 큰 칼을 휘둘러 자르는 것은 칼을 휘두른 이를 영웅처럼 보이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영웅적 결정은 종종 상황을 악화시킨다.”  (p.161)


“모든 참사나 재난에서도 각 인간은 고유하거든요. 개인마다 고유한 관계와 역사와 상황 속에서 서로 다른 욕구와 고민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어떤 공통의 사건을 겪었다는 이유로, 그들을 하나의 동일한 집단으로 여길 때가 많아요.”  (p.300)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 대한 배척이나 소외 현상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정치적 견해나 종교적 주장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사회 현상이나 단순한 상식의 차원에서도 나와 의견이 다른 이는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고 혐오합니다. 사회 통합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앞장서서 도모해야 할 종교와 정치의 기능이 상실된 까닭입니다. 차별과 배제를 통해 강력한 지지자들을 획득하려는 정치 모사꾼들과 이를 정의인 양 보도하는 사이비 언론으로 인해 차별과 혐오는 더욱더 강화되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부조리를 그저 손 놓고 바라보기만 한다는 것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사회가 유지되고 건전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른 동물이 아닌, 우리 곁을 지키는 '인간'의 체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김승섭 교수의 저작을 읽는 것도 36.5℃의 진실을 믿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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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으로 퍼지는 물동그라미의 시선을 느껴본 적 있을까요. 수면에 떨어진 위험을 감지한 물 분자들이 서로 어깨를 겯고 원을 그리며 밖으로 밖으로 퍼져가는 모습. 나는 수면에 번지는 물동그라미의 파문을 볼 때마다 이상의 시 <오감도>를 떠올리곤 합니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길은막달은골목이適當하오.'로 시작되는 이상 시인의 대표작 말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시에서 아이(兒孩)들이 무서워하는 모습을 반복하여 말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불안의 동시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에 퍼지는 물동그라미의 파문도 어쩌면 불안을 감지한 물 분자들의 감응이 수면 위에 작은 파장으로 그려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현 정부 들어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듯합니다. 어떤 이는 강고한 공권력의 강압으로 인해, 또 어떤 이는 경제적 어려움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공포로, 또 어떤 이는 죽음과 같은 인간의 원초적인 불안 등 그 원인은 서로 다르겠습니다만 수면에 물동그라미의 파문이 일 듯 불안의 파장이 멀리멀리 퍼져나간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닙니다. 페르난두 페소아가 쓴 <불안의 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죽어가는 보랏빛 속에서 하루가 흐르며 저물어간다. 그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으리라. 내가 누구였는지 아는 사람도 없으리라. 나는 알려지지 않은 어느 미지의 산에서 미지의 계곡으로 내려왔다. 내 발자국은 저녁이 느리게 도래할 무렵 숲 속 개활지로 나 있었다. 내가 사랑한 모든 이가 그늘 속에 남겨진 나를 잊었다. 마지막 배에 관해서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누구도 쓰지 않았을 편지에 대해서, 우체국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굿바이(Good bye)'가 '굿날리'로 되는 세상, 그렇게 발음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압수수색을 당할 수 있는 세상, 우리는 집권자의 이러한 허무맹랑한 태도에 분개하면서도 자신에게 닥칠 막연한 불안을 떨쳐낸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듯합니다. 게다가 북극한파가 맹위를 떨치는 오늘 지나는 행인들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종종걸음을 칩니다. 우리는 그렇게 물동그라미의 파문처럼 서로 어깨를 겯고 불안의 시기를 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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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4-01-23 2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언젠가 봄바람 휘바이든 봄날이 오겠죠.

꼼쥐 2024-01-24 16:49   좋아요 1 | URL
벚꽃이 바이(?)는 봄날이 기다려집니다. ㅎ

미미 2024-01-24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상식이란게 무너지고 있네요. 저는 우리 국민들이 인내심이 강하다고 느껴요. 탄핵을 또 한다는게 우스운 일이니까 이번에는 더 참는것 같기도 하고요. 페소아의 문장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옵니다.

꼼쥐 2024-01-24 16:52   좋아요 1 | URL
이와 같은 무도한 정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더 놀라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감을 못 잡는 것 같아요. 그런 와중에 언론은 정권의 눈치를 보며 바짝 엎드렸고 말이죠.
 
시와 산책 말들의 흐름 4
한정원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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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안쪽 갈피에서 누군가의 빛바랜 대출확인증을 발견했을 때, 나는 한동안 물끄러미 말을 잃는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도 도서관 서가에 꽂힌 이 책을 발견하고 나처럼 설레었을까. 책을 들고 집으로 향하는 길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던 건 아닐까. 책을 펼치고 세상과 자신이 분리되었을 때, 시간은 어느 때보다 빠르게 흘러가지나 않았을까. 별별 생각과 상상으로 머리가 지끈거리면 나는 비로소 책을 덮는다. 지금이라는 시간과 누렇게 변색된 과거 어느 시점 사이의 간극이 시간을 초월하여 나에게 닿을 수 있었던 가냘픈 인연 혹은 내 상상력의 웜홀을 통해 누군과의 과거와 맞닿았던 여린 떨림의 순간을 나는 대여한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기억하곤 한다. 대여한 책에 별책부록처럼 딸려온 누군가의 마음을 나는 쉽게 반납하지 못한다.


"눈은 흰색이라기보다 흰빛이다. 그 빛에는 내가 사랑하는 얼굴이 실려 있을 것만 같다. 아무리 멀어도, 다른 세상에 있어도, 그날만은 찾아와 창밖에서 나를 부르겠다는 약속 같다. 그 보이지 않는 약속이 두고두고 눈을 기다리게 한다."  (p.14)


한정원의 산문집 <시와 산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왔던 건 일주일 전쯤이다. 200쪽도 안 되는 얇은 책을 나는 눈에 담듯 꼭꼭 눌러가며 읽었다. 그 사이, 털갈이를 하는 어린 강아지처럼 매일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놀랍도록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고,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다독이며 나는 고운 체로 거르듯 작가의 순한 마음들을 가슴에 담았다. '단편영화를 세 편 연출했고 여러 편에서 연기를 했다'는 작가 소개와 '책을 덮고 나면 아름다운 시들만이 발자국처럼 남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당부가 '한정원'이라는 작가의 이름 밑에 가지런한 일상처럼 매달렸다.


"세상의 조도가 낮아지고, 지붕과 나무와 빈 그네에 침침한 그림자가 진다. 선명함을 잃을 때 모든 존재는 쓸쓸함을 얻는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자주 의기소침해지는 이유도 그와 비슷하다. 상대방의 마음이라는 건 도대체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 같기만 하고, 나는 '저녁' 앞에서 노인처럼 어두운 눈을 비비는 것이다."  (p,121)


계절이 순한 까닭은 가난한 이의 마음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이다. 겨울비가 잦은 온화한 겨울의 한 모퉁이에서 계절처럼 순한 마음의 <시와 산책>을 읽는다는 건 우연처럼 포장된 누군가의 선물이겠지. 채울 게 없어 늘 허전했던 내 마음의 한켠은 한정원 작가의 찰랑거리는 마음들로 조금씩 차올랐고, 바깥공기는 내가 내뿜은 날숨들로 조금 무거워졌을 테다. 나는 겨울을 다녀간 많은 이의 비밀을 순한 계절을 통과하는 뒷산 나무들의 몸피를 타고 흐르는 물소리를 통해 전해 듣는다. 어쩌면 그것은 곧 봄이 오리라는 생명의 외침이었는지도 모른다.


"걷다가 죽어가는 벌레 곁에 있어주고, 창을 내다보는 개에게 인사하고, 고양이의 코딱지를 파주며 탕진하는 시간이 나는 부끄럽지 않다. 그 시간의 나는 진짜 '나'와 가장 일치한다. 또한 자연이나 스치는 타인과도 순간이나마 일치한다. 그 일치에 나의 희망이 있다. 부조리하고 적대적인 세계에서 그러한 겹침마저 없다면, 매 순간 훼손되는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고 견딜까."  (p.157)


시간의 옆모습을 가만가만 그려본다. 내가 살았던 그 시간들은 어느 한순간도 멈춤이 없어서 시간의 전면이나 온전한 모습을 전혀 그릴 수가 없다. 나는 오직 시간의 속도와 옆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다. 겨울이 가고 또 봄이 찾아오겠지만 순했던 이 겨울의 풍경을 나는 어떻게 그려야 할까.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돌아서는 길, 나는 한 인터넷 서점에서 한정원의 <시와 산책>을 찾아 구매 버튼을 누른다. 이 순한 계절에 나는 한정원의 <시와 산책>을 눈에 담듯 꼭꼭 눌러가며 읽었노라고 시간의 옆모습에 낙서를 하듯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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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I Believe'를 다시 듣는다는 건


비가 오락가락하는 궂은 날씨입니다. 이런 날, 낫살이나 먹은 어떤 인간은 "군불을 넉넉히 땐 뜨끈한 아랫목이 생각난다"고도 하고, 솜털이 보송한 어떤 계집아이는 "경치 좋은 스터디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 마시기에 좋은 날씨"라고도 했습니다. 우리 멧돼지 세계에서는 천차만별의 날씨를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게 '국룰' 아닌 '국룰'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연약한 인간들처럼 날씨에 따른 특별한 감상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따금 한국인이 사랑한다는 어느 축구감독의 '어퍼컷' 세리머니를 기이한 자세로 따라 하고는 있습니다만 그마저도 "멧돼지가 오죽이나 할 짓이 없으면 인간을 다 따라 하느냐"는 타박을 계속하여 듣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될 날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겁도 없이 다른 멧돼지가 주는 뇌물을 넙죽넙죽 잘도 받아 챙겼던 아내 멧돼지의 행실이 알려지면서 조사를 하여 죄가 있으면 벌을 주자는 주장이 들끓고 있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나는 사실 아내 멧돼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전형적인 '아내 바라기'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은 나와 가까운 주변의 모든 멧돼지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명목상으로는 내가 리더 멧돼지인 듯하지만 실상은 아내 멧돼지에 의해 모든 게 진행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아내 멧돼지를 조사하여 죄가 있으면 감옥에 보내자는 주장은 일견 타당한 듯 보이지만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멧돼지들을 통솔할 리더 멧돼지가 사라지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는 까닭에 나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제안이기도 합니다. 내가 리더 멧돼지로 남아 있는 한 말입니다. 여러 멧돼지들의 주장이 온 나라를 뒤덮어도 그것을 수용한다는 건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지요.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 어느 인간 가수가 불렀다는 'I Believe'를 다시 듣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내 멧돼지를 감옥에 보낸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으로 아내 멧돼지의 사과 카드를 꺼내 들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I Believe'를 배경음악으로 깔고 조신한 태도로 무대에 올라 내조에만 충실하겠다는 다짐을 하면 강경한 주장을 하던 여러 멧돼지들의 주장도 조금쯤 사그라들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비록 악어의 눈물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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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4-01-20 15: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더 멧돼지는 끊임없이 충격적인 소재거리를 제공해 주는군요.
콘텐츠가 마를 날이 없습니다.

꼼쥐 2024-01-20 15:59   좋아요 1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걸 기쁘다고 해야 할지 슬프다고 해야 할지...
 
버지니아 울프, 문장의 기억 (양장본) -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박예진 엮음, 버지니아 울프 원작 / 센텐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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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책을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한 작가가 평생 동안 쓴 모든 작품을 읽는 것, 이른바 '전작 읽기'에 도전하여 자신이 뜻한 바대로 성공하는 경우는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읽고자 하는 작가가 살아생전 몇 작품 남기지도 못한 채 요절을 한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장수를 한 것으로도 모자라 작품 활동에 성실했던 다산 작가라면 더더욱 힘이 들 것임은 물론이다. 그래서인지 한 작가의 모든 작품 중 널리 알려진 문장 혹은 그에 덧붙여 발췌자 본인이 마음에 두었던 문장들을 하나의 책으로 엮은 발췌본이 종종 눈에 띄기도 한다. 이러한 발췌본은 문장을 가려 뽑은 발췌자의 안목이 전적으로 책의 질을 좌우하겠지만, 잘만 한다면 전작 읽기는 숫제 엄두도 내지 못하는 나와 같은 게으른 독서가에게는 꽤나 유용한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수박 겉핥기식이지만 작가의 작품 성향이나 철학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었는지 전작(全作)을 읽지 않고도 조금쯤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을 쉽게 얻으려는 얄팍한 생각 자체가 낯을 뜨겁게 만들기는 하지만.


"이 책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유명 작가, 버지니아의 문장들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그의 글 속에는 여러 차례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물상, 자연현상의 의식적 표현 등 버지니아의 글은 때로 난해하게 읽히기도 해 종종 독자들에게 좌절감을 주기도 하니까요."  (p.17 '프롤로그' 중에서)


<버지니아 울프, 문장의 기억>은 북 큐레이터이자 고전문학 번역가인 박예진 작가에 의해 발췌된 문장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29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박인환 시인의 시 '목마와 숙녀'에도 등장하는 버지니아 울프. 그녀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고안한 선구자이자 영국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평가되기도 한다. 1920년 인도 뭄바이에서 그녀의 숙모가 낙마 사고로 숨지자, 숙모의 유언으로 매년 500파운드의 연금을 받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에 몰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제인 오스틴의 팬이었고 그녀에 관한 훌륭한 평론을 남기기도 했던 버지니아 울프. 1882년에 태어나 1941년 59세의 나이에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마감하기까지 그녀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책의 표지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이 책은 '그림자로 물든 버지니아의 13작품 속 문장들'이다.


"sentence 061

 I understand Nature's game-her prompting to take action as a way of ending any thought that threatens to excite to pain.

나는 자연의 순리를 이해합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흥분이나 고통을 끝내기 위한 행동을 유도합니다."  (p.74)


우리는 어쩌면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비극적인 삶에 대해서만 말할 뿐 그녀가 열정을 갖고 몰두했던 작품 활동과 그녀의 문학적 성취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그녀의 내면에 흐르는 철학이나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는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태도는 우리 이전 세대에 살았던 다른 남성 작가와의 비교에서도 타당한 일이 아니며,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는 과정에서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되는 측면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적 성취는 그녀의 열정과 노력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sentence 201

The way to rock oneself back into writing is this. First gentle exercise in the air. Second the reading of good literature. It is a mistake to think that literature can be produced from the raw. One must get out of life... one must become externalised; very, very, concentrated, all at one point, not having to draw upon the scattered parts of one's character, living in the brain.

다시 글쓰기로 돌아가는 방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먼저, 가벼운 운동을 합니다. 두 번째로 좋은 문학을 읽습니다. 문학이 날것에서 생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은 일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람은 외부의 존재로 변해야 합니다. 매우 집중되어 하나로 모든 것을 집중해야 합니다. 분산하지 말고, 머릿속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p.194)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라는 여류작가를 명명하는 것이 자신의 시적 낭만과 지적 허세를 뽐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쯤으로 생각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댈러웨이 부인>이나 <등대로> 등 그녀가 쓴 몇몇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감히 그런 이유로 버지니아 울프를 입에 올리지 못할 것이다. 상류사회 출신이지만 성차별이 만연했던 시대를 살았던 버지니아 울프.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 위해서는 여성이라는 사회적 편견과 끝없이 싸워야만 했던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녀를 평생 괴롭혔던 정신병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감히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 앞에 '여류작가'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못할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다만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옮길 수 있는 훌륭한 작가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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