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외출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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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럼없는 시간이 또다시 봄을 알려 왔다. 아내의 부재와 함께 맞는 낯선 계절. 지난해 아내는 혼자서 맞아야 하는 낯선 계절들을 선물처럼 한아름 남겨 놓은 채 이 세상과 이별했다.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준칙 앞에서 나는 또다시 무너져 내리고 있다. 만발한 목련이 왠지 낯설고, 어제오늘 이어지는 꽃샘추위도 무덤덤하다. 나는 그렇게 예년에 없던 탈색된 봄을 갓 고등학생이 된 어린 아들과 함께 맞는다. 시간의 미끄럼틀을 한바탕 신나게 미끄러져 내려가면 그리운 아내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 <영원한 외출>을 읽었던 건 꽤나 오래 전의 일이다. 리뷰를 남겨야지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감당할 수 없는 슬픔 앞에서 나는 번번이 무너졌다. 속절없는 시간만 흐르고 슬픔은 잦아들지 않았다. 먹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오늘의 여린 봄햇살처럼 눅진한 슬픔의 시간 속에서 푸석한 시간들이 간간이 지나가는 동안 나는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 <영원한 외출>을 애써 외면한 채 그리운 이의 얼굴을 차마 그리워할 수 없었다.

 

"마음속에 구멍이 뚫린 것 같다는 비유를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내 마음속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그것은 그리 크지 않은 나 혼자 쑥 내려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다. 들여다보면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 깊이도 알 수 없다. 한동안은 그 구멍 앞에 서 있기만 해도 슬펐다. 그것은 추억의 구멍이었다. 구멍 주위에 침입방지 철책이 있어서 안으로는 도저히 들어가지 못한다." (p.155)

 

자식이 없었던 삼촌의 죽음과 곧이어 맞이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작가는 담담한 필체로 말하고 있다. 만화로만 읽어내던 작가의 마음을 그림이 없는 산문으로 읽는다는 건 왠지 낯설기만 했다. 그럼에도 감정이 깃들지 않은 듯한 단문의 간결한 문장들이 오히려 더 슬픔을 자아내게 한다고 느꼈던 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암 말기 진단을 받은 아버지가 퇴원하여 오사카의 집에 머무는 동안 작가는 아버지가 좋아하던 음식을 사 가거나 아버지의 어릴 적 추억들을 들으며 남은 시간들을 보낸다.

 

"소중한 사람을 이 세상에서 잃었다고 해도 '있었던'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알고 있으니 괜찮다. 그것이 흰나비를 대신하는 나의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힌트는 바깥에, 사람 수만큼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p.98)

 

지난해 가을,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내가 처음으로 마주했던 절망은 아내에 대해 궁금한 게 있어도 이제 더 이상 물어볼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는지, 아들이 어떤 사람을 아내로 맞이했으면 하고 바라는지,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늙어갔으면 좋을지, 그 어떤 사소한 질문도 내게 답을 해줄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막막함. 아내가 살아 있을 때 나는 왜 진작 그런 질문들을 묻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은 깊은 회한으로 밀려왔다.

 

"슬픔에는 강약이 있다. 마치 피아노 리듬처럼 내 속에서 커졌다가 작아졌다. 커졌을 때에는 운다. 시간이 지나면 그런 파도도 사라질 거라는 예감과 함께 슬퍼하고 있다. 구름이 끼어서 신칸센에서 후지산은 보지 못했다. 대신, 오렌지색 아름다운 저녁놀이 펼쳐졌다. 창에 이마를 대고 바라보았다. 이렇게 예쁜 저녁놀도 아버지는 이제 보지 못한다. 죽음이란 이런 것이구나 새삼 생각했다." (p.73~p.74)

 

작가는 아버지의 죽음과 그로 인해 남겨진 가족이 견뎌야 하는 슬픔에 대해,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오래된 기억들을 아주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다른 가족과 떨어져 장녀인 마스다 미리와 함께 있을 때는 은근히 허세를 부렸던 아버지, 서로 데면데면 지내면서도 사랑하는 마음을 언뜻언뜻 보여주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혼자 남겨진 작가의 어머니와 자신의 일상.

 

"본가에서 엄마와 둘이 보내는 날이 2, 3일 계속되자, 도쿄에서의 내 생활이 희미해졌다. 점점 엄마의 세계로 들어가서, "여러 가지 일들이 지나갔네." 하며 베란다에서 저녁놀을 바라보는데, 마치 노년을 보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직 40대라는 사실에 툭 하고 '시간'을 선물 받은 기분이었다." (p.111)

 

나는 아내가 떠난 후에야 비로소 법정 스님의 유언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달라'고 했던 유언. 나에 대한 기억은 나와 조금이라도 추억을 공유했던 사람들의 기억으로 그치는 것으로 족할 뿐 나와 조금의 인연도 없는 먼 후대의 사람들에게조차 내 이름 석 자가 정형화된 문구로 기억된다는 건 축복이 아니라 끔찍한 일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스님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스산한 봄바람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던 오늘, 나는 오래전에 읽었던 <영원한 외출>에 대한 감상을 쓰기 위해 용기를 냈다. '이 카레는 아마 엄마가 영원한 외출을 하기 전에 자식에게 남긴 마지막 음식이지 않을까' 하는 대목을 사카이 준코의 에세이에서 읽었다는 마스다 미리. 아내가 끓여주던 떡국을 몹시도 좋아했던 나와 아들. 아내가 끓여준 떡국이 사무치게 그리운 오후. 그런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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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 인포그래픽
Dominic Roskrow 지음, 한혜연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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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주가를 부러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체질적으로 술에 약했던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술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들은 공짜술이라면 사족을 못 쓸 판인데 나는 술자리라면 일단 피하고 보는 탓에 어떻게 하면 주량을 늘릴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접대 문화가 일반적인 시절이었고, 모였다 하면 일단 술부터 시키던 때였다. 그러므로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한다는 건 사회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는 큰 약점을 안고 살아간다는 걸 의미했다. 주량을 늘리기 위한 별의별 방법이 다 동원되었지만 그닥 효과는 좋지 않았다.

 

그 무렵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던 칵테일 바를 자주 찾게 된 것도 주량을 늘리기 위한 연장선에서 비롯되었다. 칵테일 한 잔을 주문하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음악을 들으며 편하게 머무를 수 있었으니 술이 약한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공간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앞에 앉은 사람의 얼굴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둑어둑한 조명도 지그시 눈을 감고 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아무튼 칵테일 바를 찾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베이스로 쓰이는 여러 종류의 술이 갖는 미묘한 맛의 차이와 원산지에 따른 특징 등 나와는 무관했던 지식이 비례하여 늘어만 갔다.

 

Dominic Roskrow가 쓴 <위스키 인포그래픽>을 읽게 된 것도 그때의 기억 때문이었다. 아이리시 커피, 맨해튼, 하와이안 펀치, 러스트 네일, 위스키 앤 소다, 위스키 앤 사워, 위스키 플로트, 올드팔, 홀인원,캘리포니아 레모네이드 등 셀 수도 없이 많은 칵테일의 주 베이스로 쓰이는 위스키는 어찌 보면 술을 잘 못하는 내게도 친숙한 술이 아닐 수 없었다.  

 

"위스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증류주와 음료 중에 위스키 같은 것은 없다. 이것은 열정을 쏟게 하고, 일생을 함께 할 긴 우정을 고취시킨다. 이제는 전 세계의 모든 위스키를 쉽게 구할 수 잇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으로  세계 곳곳을 경험하는 여행에 초대받는 셈이다." (p.7 '저자의 말' 중에서)

 

저자는 이 책에서 위스키를 마시는 방법, 맥주를 증류하여 오크통에서 최소 3년을 숙성시킨 싱글몰트 위스키, 여러 증류소의 싱글몰트들을 그레인 증류주와 섞은 블렌디드 위스키, 그레인 위스키는 없이 여러 증류소의 다양한 몰트 위스키들끼리 섞은 블렌디드 몰트 위스키, 옥수수를 원재료로 묶인 버번과 테네시 위스키, 호밀을 원재료로 하는 라이 위스키, 블렌디드 스카치 위스키에 섞을 추가액으로 사용되는 그레인 위스키,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하는 위스키 메이커들에 의해 탄생한 위스키계의 반항아를 각각의 챕터로 분류하고, 각 챕터에는 원산지별로 세분화하여 설명하고 있다.

 

"위스키는 생산자의 끝없는 긴장과 기도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술이다. 사람이 가진 모든 source(땅, 바람, 흙, 물)로 최고의 환경(그 지역 최고의 보리, 그 지역 최고의 피트, 그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오크, 최고의 와인을 담았던 최고의 캐스크)을 제공하고도, 그저 제발 이번에도 보통의 컨디션으로만 나와주었으면 하고 기도를 하게 만드는 술이 위스키이다." (p.220 '역자의 말' 중에서)

 

여러 위스키의 역사, 스타일별 추천과 증류소, 맛과 향, 흥미로운 뒷야기를 담고 있는 이 책은 단순히 맛을 음미하는 단계에서 본격적으로 위스키의 세계에 빠져들고 싶어 하는 마니아에 이르기까지 위스키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한 번쯤은 궁금해할 책이 아닐까 싶다. 끈적끈적한 재즈 음악이 흐르는 칵테일 바에서 상큼한 러스티 네일 한 잔 하고 싶은, 목련꽃 흐드러진 그런 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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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이다 - 세스 고딘의
세스 고딘 지음, 김태훈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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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카루스 이야기>를 관심 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영 구루이며 글로벌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세스 고딘을 알게 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카루스 이야기>의 저자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세스 고딘에 대한 기억은 내게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그런 까닭에 세스 고딘의 이름이 붙은 책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마케팅이다>와 같은 뜬금없고 생뚱맞은 제목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세스 고딘의 신간 <마케팅이다>를 읽으면서 나는 경제학을 전공했던 나의 오래전 기억을 억지로 소환해야만 했다. 기억마저 희미해진 해묵은 지식은 별 도움이 되지도 않았지만.

 

"이 책은 바로 그 뿌리에 대한 이야기다. 꿈과 욕망 그리고 당신이 섬기고자 하는 공동체에 당신이 하는 마케팅을 깊이 뿌리내리게 하는 문제를 다룬다. 사람들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하게 하고, 당신이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장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시장을 이끄는 문제를 다룬다." (P.11)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대개 마케팅 책을 읽지는 않는다. 마케팅이나 경영에 관련된 책을 읽는 시기는 오히려 장사를 계획할 때 잠깐일 뿐이다. 그러므로 막상 장사를 시작하고서부터는 계획이나 전략에 의존하기보다 운이나 인맥에 상당 부분 의존하게 된다. 그러므로 장사가 잘 돼도 운이 좋은 것이요, 장사가 안 돼도 운이 나쁜 탓일 뿐이다. 자신의 마케팅 실력이나 경영 전략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내 주변에도 지금 실제로 장사를 하고 있거나 머지않은 장래에 장사를 하려고 계획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는 까닭에 그들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 마케팅 관련 서적은 실전이 아닌 이론일 뿐이다. 마치 실전 경험이 없는 공무원이 책상머리 대책을 내놓는 것처럼.

 

총 23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각 장마다 펀딩 프로젝트의 담당자, 연봉을 협상하는 회사원, 부서를 키우려는 팀장, 혹은 스스로 고객을 관리하는 프리랜서 등 사례별로 적용할 수 있는 마케팅 전략을 세세하게 담아냈다. 하루 밤에 1억 100만 달러를 펀딩한 로빈 후드 재단, 1만 8000 유튜브 조회수를 갖게 된 영화 제작자 케이시 네이스탯 등의 사례를 통해 저자는 마케팅의 이론적 고찰을 꾀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부합할 수 있는 트렌디한 마케팅 방법을 독자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핵심은 당신이 진입하려는 시장, 그 시장에 존재하는 필요, 경쟁자, 기술 표준, 과거의 성공사례 및 실패사례다. 구체적일수록 좋다. 현장의 지식이 많을수록 좋다. 이야기가 생생할수록 좋다. 이 부분에서 중요한 점은 당신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분명하게 밝히고, 당신의 가정에 대한 사람들의 동의를 얻는 것이다. 이 부분은 당파적이지 않다. 즉, 어떤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실정을 기술한다." (P.210)

 

우리는 현실과 이론이 서로 부합하면서 더 나은 방향으로 서로를 이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실 참여자에게 이론은 그저 책 속의 이론으로 존재할 뿐이다. 어쩌면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 있어 그와 같은 이론은 지극히 허무맹랑하거나 현실에서는 한참이나 멀어진, 그야말로 현실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이야기로 인식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스 고딘의 통찰과 맛깔나는 입담은 그동안 우리가 지속해왔던 통념을 한꺼번에 무너뜨린다. 책을 읽음으로써 얻는 지식이 우리의 현실적인 고민을 해결하고 나아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다시 꿈꾸게 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게 한다.

 

"당신이 빚은 그릇이 가마에서 깨졌다고 해서 당신이 좋은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다. 단지 그릇이 깨졌고, 도예 수업을 받으면 실력이 나아질 것이라는 뜻일 뿐이다. 당신은 더 잘할 수 있다. 마케터로서 당신이 적절한 사람들에게 가르치거나 팔려는 더 나은 것이 당신이 매기는 가격보다 훨씬 가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자선기금을 모으려 한다면, 100달러나 1,000달러 또는 100만 달러를 기부하는 사람들은 그 비용보다 더 많은 가치를 얻을 때만 기부할 것이다. 1,000달러에 기기를 팔려한다면, 그 기기가 1,000달러보다 가치 있다고 믿는 사람들만 살 것이다. 마케팅은 세상에 가치를 제공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호응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당신이 기여하고자 하는 변화를 마케팅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훔치고 잇는 것이다." (P.359)

 

우리는 종종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게 되는 경향이 있다. 마케팅 기술이나 노하우가 단지 책 속의 허황된 주장이나 이야기쯤으로 인식되는 것도 그런 이유일지도 모른다. 기존의 마케팅 관련 서적이 내가 처한 눈 앞의 현실과는 무관하다고 여겨지기도 하거니와 순간순간 변하는 현실의 시장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론보다는 임기응변의 순발력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까닭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우리는 독서를 통해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다소 딱딱하게 읽힐 수 있는 마케팅 관련 서적이 에세이처럼 술술 읽혔던 것은 아마도 여러 사례를 통한 현실적 기술과 저자의 쉬운 설명이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그 이면에는 저자의 진심이 담겨있기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저자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 혹은 마케터가 자신의 진심이 통하지 않거나 성공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당신의 '존재 이유'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며 단지 중요한 일을 이루기 위한 여정에서 하나의 경로가 제외된다는 뜻일 뿐'이라고 위로한다. '이제 새로운 길을 찾으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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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새우 : 비밀글입니다 - 제9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42
황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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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내서 보여줄 수 없는 것들이 더러 있다. 놀라움은 대개 그런 것들에서 비롯된다. 아무도 볼 수 없으니 그러려니 무시하고 지내다가 어찌할 수 없는 막다른 국면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겨우 알아채는 것들. 자녀를 키우다 보면 그와 같은 일들을 수시로 겪게 된다. 걱정과 불안 속에 시작되는 첫째의 초등학교 입학, 학년이 바뀔 때마다 새롭게 형성되는 교우관계, 담임 선생님과의 관계 등 아이의 사회성에 대한 의심과 걱정은 고등학생이 되어도 끝나지 않는다. 올해 고등학생이 된 아들 역시 그와 같은 과정 속에서 성장했다. 사회성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숫기가 없는 아들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단짝처럼 붙어다녔던 두 명의 절친이 있다. 그러나 올해 각자 다른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중 한 명은 같은 학원에 다니면서 일주일에 한 번꼴로 얼굴을 볼 수 있다고는 하지만.

 

황영미 작가의 소설 <체리새우: 비밀글입니다>는 중학교 2학년인 주인공 다현을 통해 아이들 세계의 관계맺기와 만연한 따돌림, 그리고 청소년기의 고민과 피할 수 없는 여러 과정, 이를 극복하면서 맞는 한뼘 성장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 준다. 작가는 현실감 있는 언어와 어색하지 않은 상황 설정을 통해 청소년기의 학생뿐 아니라 다른 어떤 세대의 사람이 읽어도 이야기에 쉽게 동화될 수 있도록 한다.

 

소설은 중학교 2학년이 된 다현의 반 배정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초등학교 시절 은따를 경험한 바 있는 다현은 친구를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 단톡방 '다섯 손가락'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행운으로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반 배정은 그닥 나쁘지는 않았다. '다섯 손가락' 멤버 중 미소와 설아는 각자 다른 반이 되었지만 아람이와 병희가 한 반이 되었고, 담임도 좋아 보였다. 그러나 '다섯 손가락'이 선정한 밉상 2위인 노은유가 짝이 되면서 이야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국어 선생님인 담임이 반 아이들에게 모둠 과제로 마을신문 만들기를 내주었다. 다현의 모둠이 된 아이는 모두 네 명. 다현과 그녀의 짝인 노은유, 시후와 해강이 모둠으로 정해졌다. 같은 모둠이기는 하지만 '다섯 손가락' 멤버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은유와 가까이 지내기라도 하면 단톡방 멤버들로부터 압박을 받을 게 뻔한 상황. 설상가상으로 모둠의 회의 장소가 은유네 집으로 정해지면서 다현은 난감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데 첫날 모임은 치과 예약을 핑계로 빠지기로 했다. 그러나 모둠 멤버들과 딱 마주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은유네 집으로 가게 되는데...

 

"은유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파편처럼 와서 나한테 박혔다. 저렇게 덤덤하게 말할 수 있는 경지를 나는 안다. 저 말에 실린 무게도, 그것은 말이 아니라, 켜켜이 쌓인 그리움이다." (p.82)

 

변호사인 은유의 아버지는 이따금 방송에도 출연하는 유명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은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강남에 살던 은유네는 고모가 사는 아파트 근처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은유는 그때의 충격으로 대인기피증을 앓는 것처럼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게 되었다. 엄마가 없는 은유네 집은 공간은 넓지만 꾸미거나 정리가 되지 않은 듯 황량했다. 은유와의 만남이 계속되면서 '다섯 손가락' 멤버들과의 사이는 점점 벌어졌다. 단톡방에서도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고, 멤버들이 밉상 1위로 꼽았던 황효정이 자신을 대신해 멤버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독립영화를 좋아한다는 은유 역시 가곡이랑 클래식을 좋아하는 다현만큼이나 '진지충'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된다.

 

"체리필터의 <낭만 고양이>. 내 비공개 블로그 '체리새우'의 배경음악이다. 배경음악은 자주 바뀐다. 이 노래 말고도 좋은 노래를 많이 올려 놓았다. 책 읽다가 발견한 좋은 문장이나 내가 찍은 동네 풍경도 있다. 체리새우 블로그는 내가 좋아하는 걸 다 말하는 공간이다. 물론 비공개로." (p.20)

 

학원도 다니지 않고, 혼자 있어도 어색하지 않으며, 독립영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는 은유. 사고로 아빠를 잃은 후 마을에서 조그만 우동 가게를 하는 엄마와 함께 알콩달콩 살아가는 다현. 다현 역시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 모둠의 만남이 늘어갈수록 은유 쪽으로 살짝 마음이 기우는 다현. 다현은 자신을 '다섯 손가락'의 멤버로 이끌어주었던 설아에게 은유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심정과 짝사랑하는 남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러나 자신의 비밀을 지켜주리라 믿었던 설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자신의 이야기가 단톡방에서 오가는 것은 물론 밉상이라던 황효정을 다현의 짝남과 맺어주려 하는 걸 보면서 다현은...

 

"어차피 우리 모두는 나무들처럼 혼자야. 좋은 친구라면 서로에게 햇살이 되어 주고 바람이 되어 주면 돼. 독립된 나무로 자라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 그러다 보면 과제할 때 너희처럼 좋은 친구도 만나고, 봉사활동이나 마을 밥집 가면 거기서 또 멋진 친구들을 만나. 그럼 됐지 뭐." (p.156~p.157)

 

다현은 이제 비밀글로 하던 자신의 블로그를 공개로 전환한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시선이 어떻든 간에 '그래, 나 진지충이다. 어쩌라고!' 외치면서 세상을 향해 한 발 나아가는 다현. 그런 다현을 위로하는 댓글들이 다현의 블로그에 올라온다. 몸집이 자랄 때마다 주기적으로 탈피를 한다는 체리새우처럼 소설 속 다현이도 자신의 블로그를 공개함으로써 '비밀'이라는 껍질을 벗고 세상으로 나아갔던 게 아닐까. 어른들의 걱정과 불안이 우리의 아이들을 세상으로부터 꽁꽁 가두고, '비밀'이라는 껍질 속으로 숨어들게 하는 건 아닐까. 우리는 아이들로부터 그들의 '실수할 수 있는 권리'마저 빼앗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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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꼭 하나 배우고 싶은 기술이 있습니다. '과거를 다루는 기술'입니다. 인생 전체를 통해서도 결코 완벽해질 수 없는 기술이기도 하고, 아무리 갈고닦아도 타인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기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충격이나 외부 환경의 변화에 의해서도 아주 손쉽게 무뎌질 수 있는 허약한 기술이기도 하지요. 예컨대 질병이나 죽음, 경제적 파산이나 돌이킬 수 없는 사고 등으로 인한 충격은 아름답기만 하던 과거를 무지막지한 괴물로 변신시키는가 하면 그 괴물이 한 사람의 잔여 삶 전체를 통째로 삼켜버리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과거라는 괴물 앞에서 아주 미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의지를 통해 과거의 기억을 통제하고 언제든 과거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꼼꼼히 기록함으로써,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무시함으로써 자신의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곤 합니다. 그러나 최근에 벌어진 가수 정준영의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전자 기계에 남겨진 자신의 기록으로 인해 그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무너지거나 큰 타격을 감수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과거 기록을 철저히 소각하거나 지우려 했던 전두환에게서 보는 것처럼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따금 자신의 과거 속으로 한없이 빠져들게도 되고, 자신의 과거를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마치 남의 일인 양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나의 과거이지만 나의 의지만으로는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 나는 과거라는 게 그 자체로서 생명을 가진 별개의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과거라는 존재와 나는 내가 생명을 다하는 그 순간까지 서로 협조하고 상생하면서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다루는 기술'은 인생을 잘 살기 위해서 누구에게나 필요한 기술이지만 아무도 연마할 수 없는 허황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명력을 과거라는 존재에 조금씩 빼앗기다가 마침내 모든 것을 넘겨줌으로써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것은 아닐지... 봄볕 완연한 휴일 오후, 아슴아슴 졸음이 밀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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