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태어나 1957년 세상을 떠난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최근 유명세를 타고 있다. 뉴 룩으로서 전후 패션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디오르는 모드의 세계화, 기업화를 위한 발판을 구축하였으며 후진 양성에도 크게 기여하였던 것으로 알려진 그가 자신의 조국 프랑스도 아닌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이토록 유명세를 타는 까닭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유일 것이다. 어느 욕심 많은 여인이 디올 백을 무척이나 사랑한 데서 비롯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요즘 개인적인 용무나 공적인 업무로 외국의 지인과 통화를 할 때마다 디올 백과 김건희에 대한 사적인 농담, 사건이 터지게 된 저간의 사정과 나의 견해를 묻는 질문 등으로 인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디올 백과 더불어 김건희 씨의 명성이 세계적인 셀럽 수준으로 높아진 것에 대해 소식을 듣는 나조차도 깜짝깜짝 놀랄 정도이다. 게다가 크리스챤 디올사는 자사의 상품을 어떤 보상도 없이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알리기 위해 불철주야 애쓴 김건희 씨에 대해 사례를 톡톡히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어제는 독일에 사는 지인 한 명과 길게 통화를 했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예정되었던 독일과 덴마크 순방을 취소한 것에 대해 그는 별다른 코멘트도 없이 대통령이 부인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게 아니냐고 묻는 바람에 나는 갑자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우물쭈물 궁색한 대답을 하려는데 그분이 느닷없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떤 타당한 이유가 있겠느냐고 따져 묻는 바람에 나는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이것과 같지는 않지만 디올 백과 김건희 씨에 대한 질문은 다른 나라의 지인에게서도 여러 번 받은 바 있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서 작금의 경제 상황과 국격의 추락을 초래한 윤석열 대통령을 선택한 국민들은 진심으로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국가의 존립과 미래를 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사람을 잘못 판단해서, 욱하는 마음에, 단순히 진보 정권의 재집권이 싫어서 윤석열 대통령을 선택하는 실수를 저질렀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참담한 결과를 보고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반성할 줄 모른다면 그는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가까운 친구나 일가친척들 중에도 보수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들에게도 이따금 말하곤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후 국민을 위해 잘한 게 한 가지라도 있으면 말해달라고, 그것으로 나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 나는 김건희 씨가 디올 백을 받았던 것도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덮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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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4-02-17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탄희 의원이 정치권의 혐오정치로,반사이익으로 또 이런일이 있을 수 있다고해서 심란했습니다. 워낙 이슈가 많아 다 덮히는 느낌도 들고요.

꼼쥐 2024-02-17 16:22   좋아요 1 | URL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현 정권의 무능조차 덮어주는 언론과 하루가 멀다 하고 상대편을 험담하는 정치인들의 비이성적 언어를 그대로 보도하는 언론 행태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정치를 혐오하는 건 사실이죠. 그놈이 그놈이라는 양비론도 비등하고 말이죠. 그런 상황을 일부러 만드는 게 아닌가 싶어요.

잉크냄새 2024-02-17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지자들은 인지부조화의 상태가 아닌가 싶어요. 자신의 실수를 도저히 인정할 수 없으니 오히려 그 실수를 정당화해버려 더 수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랄까요.

꼼쥐 2024-02-17 16:19   좋아요 1 | URL
실수가 실수였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말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몇몇의 사람들일 테고, 나머지는 알면서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일 테지요. 작금의 경제 상황과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의 외교 현실을 보면서도 혹은 잘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사람들이 정말 악인이죠.
 
오늘 뭐 먹지? - 권여선 음식 산문집
권여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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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들의 고민 중 하나는 오늘 점심에는 뭘 먹을까? 하는 문제이다. 남들이 생각할 때 그게 뭔 고민이 될까? 생각하겠지만 그건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 얘기다. 사무실 근방의 음식점이야 손으로 꼽을 정도로 빤하고 각각의 음식점에 대한 맛의 평가도 이미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여러 번 들어 달리 변할 것도 없지만 그 많지 않은 선택지 중에서 오늘의 메뉴를 고르는 일은 매번 어렵기만 하다. 그래서인지 점심시간이 되기 전부터 나 대신 그 어려운 문제를 떠안을 다른 누군가를 물색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곤 한다. "김 대리, 오늘 뭐 먹을까?"


오늘은 사무실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으로 차를 몰고 나가 토종닭을 먹었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을씨년스럽게 내리던 오전과는 다르게 비는 이제 진눈깨비로 변해 있었다. 급변하는 날씨에 오싹한 한기가 스며들었다. 요 며칠 기형적으로 따뜻했던 날씨 탓에 옷을 얇게 입고 나왔던 게 화근이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간신히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주문 요청이 들어왔다. 맛을 음미할 새도 없이 공깃밥에 닭볶음탕을 볼따구니가 미어져라 욱여넣었다.


"내가 감자탕을 처음 먹은 때가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감자탕 맛에 제대로 꽂히게 된 때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한다. 제법 추운 날이었다. 남자친구가 감자탕을 잘하는 집이 있는데 먹으러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사귄 지 얼마 안 되어 매우 설레던 때라 "난 감자탕 별로 안 좋아하는데" 어쩌고 해서 남자친구의 제안에 초를 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법 규모가 크지만 허름하기 짝이 없는 식당에 앉아 한참을 펄펄 끓인 감자탕의 첫 국물을 떠먹는 순간 나는 화들짝 놀랐다. 감자탕 국물이 원래 이렇게 시원하고 맛있었던가? 믿을 수 없었다."  (p.181)


권여선 작가의 음식 산문집 <오늘 뭐 먹지?>를 다 읽고도 리뷰를 쓸까 말까 며칠을 고민했다. TV나 인터넷 방송의 먹방과 ‘쿡방’이 넘쳐나는 시대에 책이라는 낡은 매체가 이들과 경쟁하는 것도 우습고, 음식에 대한 호불호가 그리 크지 않은 나로서는 작가가 밝힌 음식과 그에 얽힌 여러 뒷얘기에 덧붙일 말도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블로그 활동을 하는 여러 블로거 중 다수가 자신이 방문했던 여러 음식점의 사진과 메뉴 등을 경쟁하듯 올리고 있는 게 현실 아니던가. 현실이 그와 같은데 나 역시 남들이 읽지도 않을 글을 올리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쓴다는 게 그닥 내키지 않았다.


"술꾼은 모든 음식을 안주로 일체화시킨다. 그래서 말인데 옛날 허름한 술집 문이나 벽에 붙어 있던 '안주 일체'라는 손글씨는 이 땅의 주정뱅이들에게 그 얼마나 간결한 진리의 메뉴였던가. 내게도 모든 음식은 안주이니, 그 무의식은 심지어 책 제목에도 반영되어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줄이면 '안주'가 되는 수준이다. 이 책 제목인 «오늘 뭐 먹지?»에도 당연히 안주란 말이 생략되어 있다."  (p.10 '들어가는 말' 중에서)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1부 '봄.청춘의 맛', 2부 '여름.이열치열의 맛', 3부 '가을.다디단 맛', 4부 '겨울.처음의 맛'의 사계절과 5부 '환절기'가 더해지고 있다. 음식은 대개 추억과 함께 기억된다. 그러므로 음식에 대한 이야기는 그에 얽힌 말하는 이의 추억일 수밖에 없다. 다만 그것을 쓰는 이의 성정과 글솜씨에 의해 독자의 감흥이 달라질 뿐이다. 그런 까닭에 이 시대의 이야기꾼인 권여선 작가의 음식 이야기는 책을 잡은 어떤 이에게도 매혹적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고, 작가가 떠올린 어떤 추억은 마치 내 일인 양 울고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이십 대 후반 무렵 겨울에 비록 반지하방이긴 해도 처음 독립해 자취를 하면서 가장 좋았던 건 내 부엌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 방에서의 첫 식사를 아직도 기억한다. 이사를 마치고 피곤한 와중에도 나는 기운을 북돋워 시장에 나가 소고기와 콩나물, 꼬막과 양념거리를 사 왔다. 소고기에 콩나물과 대파를 넣어 고깃국을 끓이고 꼬막을 삶아 양념장을 듬뿍 넣어 조린다. 내 조그만 자취방은 금세 맛난 고기와 조개, 양념 냄새로 가득했다. 훌륭한 만찬에 소주까지 곁들이니 부러울 게 없었다."  (p.210)


낮에 먹었던 닭볶음탕이 생각난다. 창밖으론 진눈깨비가 내리고 식당의 좁은 문으로 드나들던 많은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도 사실, 느긋하게 맛을 음미할 새도 없이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 했던 그 한 끼의 식사가 날씨처럼 스산했던 오늘 오후를 지탱하는 든든한 힘이 되었기를... 그리고 언젠가 오늘보다 느긋한 하루가 주어진다면 오늘의 식사를 함께 했던 식탁 위의 얼굴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기억하기를... 그렇게 맛있게 늙어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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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이라도 꽃이 피고 새순이 돋을 것만 같은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침 운동을 하기 위해 새벽에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의 아침 기온은 두꺼운 외투를 입지 않아도 추위를 전혀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인한 새벽의 쌀쌀한 기온을 느낄 새도 없이 등을 타고 촉촉한 땀이 배어 나온다. 약동하는 봄의 기운이 발끝에서 전해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절의 변화가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산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등산로에 버려지는 쓰레기도 차츰 증가하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산에 오를 때마다 눈에 띄는 쓰레기를 주워서 내려오는 까닭에 쓰레기가 증가한다는 것은 나의 분노 게이지가 비례하여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등산로의 낙엽 더미 밑에 버려진 사탕껍질하며, 등산로의 중간중간에 놓인 벤치 주변에 버려진 검은 비닐봉지며, 쓰다 버린 마스크 등 쓰레기의 종류도 다양하다. 물론 일회용 커피 용기를 비롯한 생수나 음료를 담았던 플라스틱병들이 등산로 주변을 따라 여기저기 버려지기도 한다.


통계를 내본 것은 아니지만 도심지 주변의 산을 찾는 사람들 중 다수를 차지하는 건 역시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닐까 싶다. 아침에 내가 만나는 사람들도 대부분 나이가 지긋한 노인분들인 것을 보면 말이다. 가까운 산에 올라 맑은 공기도 마시고, 자연경관도 감상하고, 더불어 등산로에서 만난 이웃들과 즐거운 담소도 나눌 수 있으니 산은 그들에게 더없이 큰 혜택을 제공하는 셈이다. 그러나 내가 하고픈 말은 그분들도 역시 염치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산으로부터 그와 같은 큰 혜택을 입었다면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은 물론 산을 아끼고 보호하려는 마음도 함께 들어야 하는 게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렇다고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로 불거져 나온 나무뿌리를 다시 묻어주라거나 어린 묘목을 새로 심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적어도 큰 은혜를 입은 산을 망치는 짓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염치가 있다면 말이다. 사탕껍질이나 음식을 담아 온 비닐봉지를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버리면서 젊은 사람들로부터의 예의와 존경을 기대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염치가 없는 노인들이 이 나라에 차고 넘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예의도, 염치도 없는 노쇠한 정치인들이 그들을 가르치거나 그들 위에서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이준석과 같은 어린 정치인으로부터 노인회장이 욕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노인이 그에 걸맞은 존경과 대우를 받으려면 염치가 있어야 한다. 자연으로부터 혹은 타인으로부터 어떤 은혜를 입었다면 당연히 감사한 마음과 함께 그에 합당한 보답을 생각해야 한다. 정치인이 국민들로부터 사랑과 지지를 통해 권력을 획득했다면 마땅히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할까 밤낮으로 고민할 일이지 최고 권력자에게 90도로 허리를 꺾을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여당 야당을 가릴 것 없이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최고 권력자에게 잘 보일 생각만 하지 국민을 위해 헌신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러니 그런 모습만 보아 왔던 이 나라의 노인들 역시 그런 염치없는 사람들로 동화된 게 아닐까. 글을 쓰다 보니 다시 또 분노 게이지가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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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사이 Rosso (리커버) 냉정과 열정 사이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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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 톨스토이의 명대사 '행복한 가정은 모두 서로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달리 불행하다.'의 의미에 대하여 이따금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일을 하다가도 불현듯 습관처럼 떠오르곤 하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기도 한 이 대목은 소설을 읽은 사람이건 읽지 않은 사람이건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며 제법 유명세를 타기도 했지만 톨스토이 자신이 어떤 의미에서 이 문장을 꺼내 들었을까 하는 작가의 의도 또는 작가의 철학적 기반에 대해서는 이것이다 하고 답을 내기 어려운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수많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작가가 생각했던 그 말의 진의에 대해서 곰곰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를 읽으면서도 나는 아주 오래된 습관처럼 그 문장을 떠올렸다. 바삭바삭 부서질 것처럼 건조하고 짧은 호흡의 문체에 소설 속 주인공 아오이의 행복한 일상이 얹히는 것은 꽤나 이질적인 조합으로 읽혔기 때문이었다. 일본 교포 출신의 주인공이 이탈리아라는 특별한 공간에 거주하는 것도, 그곳에서 포도주 수입상을 하는 미국인 남자친구 마빈을 만나 동거를 시작하는 것도, 자신에게 거의 모든 것을 허락하고 헌신적으로 대하는 남자친구 덕분에 행복한 일상을 이어가는 것도 행복의 무작위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사례쯤으로 여겨졌다. 사실 현실에서의 행복은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무작위로 받게 되는 하나의 작은 선물과 같은 것이며 우리가 의도한다고 해서 작위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현실에서의 불행은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일이긴 하지만 그것은 모두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결과물임을 알게 된다. 비록 우리는 자신의 불행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극구 부인하곤 하지만 말이다. 톨스토이는 어쩌면 행복의 이러한 무작위성과 불행의 개별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는 비가 잎을 흔들고, 공기를 흔들고, 7월의 거리를 적시고 있다. 사륵사륵 희미한 빗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시간도, 장소도, 모든 것이 형태를 빼앗기고 만다. "따분하지 않아?" 태산목을 지나, 오른쪽 정원을 따라 이어지는 검정색 철책을 손가락으로 만지면서 걷고 있던 안젤라가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p.65)


교포 출신의 아오이는 일본에서 밀라노로 다시 돌아온 지 삼 년째이다. 주택가의 작은 보석 가게에서 일주일에 사흘만 일하면서 한가하고 조용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밀라노에서 사업을 하는 마빈은 보석 가게의 손님으로 왔다가 아오이와 사랑에 빠져 동거를 하게 된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는 마빈이지만 아오이의 가슴 한켠에는 채워지지 않는 어떤 것이 자리하고 있다. 도쿄의 대학에서 만나 연인으로 발전했던 쥰세이에 대한 그리움이 그것이다. 마빈과의 행복하고 조용한 생활이 이어지던 어느 날 마빈의 누나인 안젤라가 찾아오고 아오이의 삶에 균형을 깨는 묘한 긴장감을 던진다.


"마빈에게 등을 보인 채, 콸콸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뜨거운 물에 손을 대고 말했다. "나에게는 나의 생활이 있어요." 물소리, 물 냄새. "그거야 알지(I know.)." 소름이 끼칠 정도로 쓸쓸한 목소리가 들려 나도 모르게 뒤돌아보았다. "마빈." "알고 있었어. 아오이에게는 아오이의 인생이 있고, 나는 근접할 수조차 없다는 것을." 상처 입은 목소리였다. 마빈은 절망적으로 피식 웃으며 "I know"를 반복한다. 나는 후회했다."  (p.160)


마빈과의 사랑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던 어느 날 쥰세이가 보낸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된다. 완전히 털어냈다고 생각했던 쥰세이에 대한 기억은 그날 이후 조금씩 되살아났다. 그리고 마빈과 함께 시작했던 새로운 생활 속으로 되돌리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러나 모든 게 허사였다. 결국 아오이는 자신의 짐을 싸서 나와 방을 따로 얻고 보석 가게에서도 풀타임 아르바이트로 전환했다. 그럼에도 마빈은 아오이를 포기하지 않았고...


"엄마와 달리, 나는 이 도시의 인간이다. 국적이야 어떻든 간에.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소리도 없이. 그러면서도 전혀 그칠 기미가 없다. "아오이." 페데리카의 방은 기묘하다. 방 전체가 페데리카 같다. "네?" 담배를 낀 손가락에, 오늘도 남편에게 선물 받은 묘안석 반지를 끼고 있다. "사람의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속밖에 없는 것이란다." 페데리카는 내 얼굴도 보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거의 혼자 중얼거리듯."  (p.196~p.197)


우리의 사랑이 엇갈리는 것도, 간절히 원하던 어떤 것도 결국에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무위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까닭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행복이 랜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리는 행복의 형태는 서로 비슷하다. 비슷할 수밖에 없다. 우리들 각자가 만들어낸 개별적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불행은 각각의 선택이 도출한 개별적인 결과물일 뿐이다. 우리는 서로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노라고 자신이 믿는 신 앞에서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거짓을 고백하곤 하겠지만 말이다. 십 년 후 5월 25일 피렌체의 두오모를 함께 오르자고 했던 쥰세이와의 약속을 아오이가 기억하고 로마행 열차를 타야 했던 것처럼.


명절 연휴의 피로가 대기중에 떠도는 미세먼지처럼 탁하기만 하다. 며칠 지나면 다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비슷한 날들이 예전처럼 이어지겠지만 지금 당장의 피로를 떨쳐낼 수만 있다면 악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을 듯하다. 우리의 불행은 언제나 우리와 가까운 곳에서 달콤한 목소리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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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코앞까지 바싹 다가왔다. 비교적 짧은 연휴 동안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많을 터, 명절은 언제나 비용 대비 만족도(소위 가성비) 면에서 평균 점수를 밑돌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 무서워서, 혹은 자주 뵙지도 못하는 연로하신 부모님 생각에 공항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애써 고향 쪽으로 옮겨 놓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처럼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상황과 맞닥뜨리면 빠듯한 월급에서 설 선물과 세뱃돈, 오가는 경비 등을 지출할 생각에 절로 한숨부터 새어 나온다. 물론 이런 명절이 아니면 사는 게 바빠 조카들 얼굴 한 번 보기도 어렵지만 말이다.


요 며칠 봄처럼 따스했던 날씨는 명절을 코앞에 두고 돌변한 느낌이다. 옷깃을 파고드는 소소리바람에 제법 오싹한 한기가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아직 2월도 초순이니 겨울 추위를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건만 워낙 따뜻한 겨울 날씨가 길게 이어졌던 까닭에 계절 감각이 둔해졌나 보다. 인터넷에서 설 선물 시세를 여기저기 훑어보던 나는 선물보다 현금이 오히려 싸게 먹히겠다는 얄팍한 계산과 함께 인터넷 서핑을 멈춘다. 잔뜩 흐린 하늘에 바깥은 여전히 칙칙한 무채색에 휩싸인 듯하고 문틈으로 새어드는 한기에 나는 이따금 나도 모르는 기침을 한다. 요즘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는 권여선 작가의 산문집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설날이든 추석이든 명절 때 나는 아무 데도 안 간다. 친정도 없고 시댁도 없기 때문이다. 명절에 차례도 안 지내고 함께 모이지도 않는 집안을 콩가루 집안이라 한다면 나는 콩가루 집안 출신의 콩가루이다. 이런 내 사정을 아는 사람들, 특히 내 또래의 여성들은 나를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른다. 콩가루에 대한 로망을 가진 그들은 한술 더 떠 긴 연휴 동안 자유롭게 여행이라도 떠나지 그러느냐고 권하는데 이건 뭘 몰라도 한참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내가 여행을 즐기지 않는 탓도 있지만, 내 생각에 긴 연휴 동안 집구석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만이 집구석을 떠나 어디로든 여행을 가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집구석에서 한껏 자유로운 나는 더 자유롭기 위해 굳이 여행을 떠날 필요를 전혀 못 느낀다. 그리고 설사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나는 평생 취업 한 번 하지 않고 자유 직종에 종사하며 살아온 자유인으로서의 윤리랄까 도의랄까, 그런 게 있어서 번듯한 직장인들이 놀러 가고 고향 가고 여행 갈 때는 가급적 안 움직이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들이 출근해서 열심히 일할 때 여유롭게 여행을 가면 될 걸, 하필 말도 못하게 붐비는 명절 연휴에 티켓과 여로를 놓고 그들과 경쟁할 필요가 있겠는가 말이다. 콩가루가 되어본 적 없는 가여운 사람들만이 그런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꾸 여행 타령을 한다."  ('오늘 뭐 먹지' 중에서)


이 대목만 보더라도 권여선 작가의 인기가 드높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윤리 의식이 투철하기 때문(?)이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데 나는 권여선 작가에게 몇 번이고 지고 만다.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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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2-10 0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절에 해외여행 떠나시는 분들은 이글을 읽고 무슨 생각을 할지도 궁금해지네요. 왜 나만 가지고 그래?라는 유명대사를 차용할 듯ㅎㅎ

꼼쥐 2024-02-13 17:12   좋아요 0 | URL
권여선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집구석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해서 여행을 떠나는 것일 테지요. 아니면 콩가루 집안이기 때문일까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