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탈한 오늘
문지안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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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일상이 고스란히 내게 옮아오는 책이 있다. 마치 내가 저자의 삶을, 그 흔한 일상을 아주 오래전부터 살아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책. 그런 책이라면 값싼 감동이나 교훈은 그닥 필요치 않다. 가슴을 짓누르는 눅진한 무언가가 흔한 감동을 아주 값어치 없는 어떤 것으로 만들어버리니까 말이다. 오직 책에 실린 글과 사진만으로 자신의 익숙한 일상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남들에겐 없는 뭔가 특별한 능력을 작가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능력은 또한 누구에게나 있는, 분명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진심' 혹은 '공감'이라고 한다면 나는 작가의 능력을 1/n로 줄어들게 만드는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진심이나 공감의 능력은 스스로 개발하는 것이지 태어날 때부터 누구에게는 많고 누구에게는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흔하다는 이유로 하찮게 여기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흔하기에 더욱 소중히 여기는 극소수의 사람이 존재하는 까닭에 그 차이는 더욱 크게 벌어지는 게 아닐까.

 

"이별은 늘 응집된 형태로 일상에 파장을 일으키기에 그 여파에 휩싸여 있을 때는 남은 것들이 하찮아 보이기도 하고 일상을 꾸려가는 작은 노력이 무의미해 보이기도 하지만 밥 한 그릇 퍼주는 아침, 머리 한 번 쓰다듬는 저녁, 아무 일 없다는 듯 곁에 머물러 있는 오늘이 언젠가 가슴 아리도록 그리워할 일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늘 당연하다고 여기는 평화, 그 평화를 지켜주는 존재들 위로 흐르는 비가역적인 시간. 그 시간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에 일상의 평화는 참으로 연약하고 당연하지 않다." (p.60~p.61)

 

이런 글은 작가에 대한 선입견 없이 읽는 게 좋다는 걸 잘 알면서도 책의 앞머리에 소개된 작가의 이력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스무 살에 대학에 입학해 스물두 살에 퇴학당하고 스물네 살에 다른 대학에 입학했다. 평온한 생활이 시작된 지 6개월,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술만으로 해결될 거라 생각해 3000cc에 육박하는 조직을 덜어내고 보니 다른 장기에 전이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렇게 시작되는 작가 자신에 대한 소개글은 어쩌면 책을 읽는 독자에게 선입견을 심어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돈이나 명예, 승진과 같은 보편적 가치가 아닌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간절히 원한다고 작가는 덧붙였다. '믿기 어렵겠지만 세상에는 안온한 일상을 갈망하는 이들이 있다'고 말하면서.

 

작가는 반려견, 반려묘와 함께 하는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지만 이런저런 인연으로 함께 살게 되었던 반려견이나 반려묘와의 영원한 이별과 그로 인한 상실감을 아주 세심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털어놓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곁에서 평범한 일상을 지켜주는 반려동물들에 대해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 작가의 이야기는 이따금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회귀하다가 익숙한 듯 현재의 오늘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버릇처럼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향하는 생각의 섣부른 발길을 주저앉힌다.

 

"지나갈 것을 알지만

지나간 하루하루가 고될 때는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중에 웃으며 얘기할 거라는 사실도 알지만

당장 엷은 미소도 지을 수 없는 날들,

그 시기의 사람들은 대부분 몹시 외롭다." (p.192)

 

가슴이 따뜻해지는 사진과 짧은 글들 사이사이의 여백에서 나는 작가가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을 떠올려본다. 오늘처럼 흐리고 이따금 비가 내리는 주말 오후, 휴일을 계획하는 많은 사람들의 들뜬 기대 뒤에는 기척도 없이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시간 뒤편의 사람들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매일매일의 일상이 미래로 나아가는 하루가 되지 못하고 죽는 날까지 그저 묵묵히 견뎌야 하는 깨어 있는 시간에 불과하다고 느끼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어깨를 맞대고 자신의 체온을 조금쯤 나눌 듯한 작가의 진심이 느껴진다.

 

"순진한 생각인지 모르지만, 나는 몸으로 전하는 가치를 아직 믿고 있다. 손끝으로 전하는 온기, 소소한 것에 담긴 소소하지 않은 무엇, 그 엷은 온도를 느끼는 촉을 잃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쓰고 있다. 적어도 몸은 머리만큼 간사하지 않기에, 사람들의 안쪽에는 말로 다 전하지 못하는 뜨끈한 물 주머니 같은 것이 있기에." (p.204)

 

웅숭깊은 사색이 돋보이는 글은 사람을 들뜨게 하지 않는다. 평소 경박하거나 진중하지 못한 사람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힘이 있다. 날카롭기만 하던 표정도 어느 순간 온화하게 변하고, 옅은 미소만으로도 세상의 기온은 1도쯤 높아질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이들을 향해 무탈한 오늘을 비는 작가의 마음이 돋보였던, 금요일 오후의 여백 속으로 균질한 시간의 알갱이들이 안개처럼 스며들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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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성형외과를 개업한 친구의 전화를 받았던 건 어제 낮이었다. 시간이 되면 저녁이나 같이 먹자는 친구의 말에 '이 놈 또 부부싸움을 대판 한 거 아냐?' 하는 의심이 먼저 들었지만 드러나는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러마 하고 선선히 승낙을 하고, 약속 장소까지 일사천리로 잡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약속 시간보다 10여분 일찍 도착했건만 친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의사라는 직업을 핑계 삼아 약속 시간에 늦어도 된다는 생각은 애저녁에 버리는 게 좋다는 타박을 약속 시간에 늦을 때마다 여러 번 반복했건만 친구는 이번에도 늦을 듯했다. 식탁 위에 물 한 잔을 받아 놓고 멀뚱히 앉아 사람을 기다리는 일도 참 오랜만이었다. "갑자기 환자가 와서 말이야..." 하는 틀에 박힌 변명을 늘어놓으며 친구가 나타난 건 약속 시간이 30분쯤 지난 후였다. 늘 그래왔지만 친구를 기다리며 나는 '가버릴까?' 하다가 기왕 왔으니 올 때까지 기다릴까?' 하는 두 가지 상반된 질문을 놓고 내적 갈등에 시달렸다.

 

멋쩍은 웃음과 함께 친구의 변명도 한동안 이어졌지만 혼자 기다렸던 나의 시간은 이미 어쩔 수 없는 과거가 되었고, 누구에게도 보상받지 못할 무용한 시간이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나 나나 담백한 한식을 좋아하는 영락없는 촌놈인지라 메뉴 선정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두부전골이 맛있다는 친구의 말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고 음식이 나오자마자 우리는 전골냄비에 코를 박은 채 허기를 달래느라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느 정도 허기가 가시자 친구는 버닝썬 사태 때문에 걱정이라며 내 쪽을 쳐다봤다. 자다가 봉창 두들긴다더니 갑자기 웬 버닝썬 사태를 들먹이냐고 타박을 하자 친구는 아주 진지한 낯빛으로 자신의 말이 장난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고 했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려는지 시사에는 도통 관심이 없던 친구가 버닝썬 사태를 거론하니 조금 생뚱맞은 느낌이 들기는 했으나 들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의 말인 즉 자신의 병원을 찾는 고객은 대부분이 여성이지만 남자들도 미용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최근에는 남성 고객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라고 했다. 그런데 버닝썬 사태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여성 고객들 사이에서도 남자가 잘 생기면 인물값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회자된다면서 이런 추세라면 남성 고객이 증가하던 추세가 바뀌지 않을까 걱정이라는 말이었다. 한마디로 버닝썬 사태가 자신의 돈벌이에 타격을 줄 수도 있다는 얘기. 나는 친구의 말에 곧바로 반격을 가했다. "말은 바로 해야지. 버닝썬 사태는 인물이 잘생긴 애들에 의해 벌어진 일이 아니고,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돈을 소유한 사람들에 의해 사달이 난 거야. 돈은 사람들의 도덕성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너도 적당히 벌어." 친구는 나의 말에 몇 번인가 반박을 했지만 굳이 이겨먹을 심산도 아니었기에 적당한 선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내가 90년대 초에 호주로 어학연수를 갔을 때 놀랐던 건 캠퍼스를 활보하는 청춘들이 푸르른 생명력으로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진한 화장과 명품 옷으로 자신을 뽐내려는 각축장이 되어가던 우리나라의 대학과는 달리 당시의 호주 대학은 화장기 없는 얼굴에 청바지에 티셔츠 한 장을 걸친, 오직 자신의 젊음을 누군가에게 내보일 뿐 다른 꾸밈이라고는 전혀 관심조차 없는 대학생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야말로 대학 교정은 푸르른 생명력으로 넘쳐나는 듯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어제 친구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나는 문득 그때 생각을 했었다. 이제 대한민국은 자신의 미를 뽐내기 위한 각축장이 아니라 자신의 부를 자랑하기 위한 아비규환의 장이 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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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순례길이다 - 지친 영혼의 위로, 대성당에서 대성당까지
김희곤 지음 / 오브제(다산북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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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방사수까지는 아니지만 어쩌다 시간이 되면 싫증 내거나 지루해하지 않고, 때에 따라서는 아주 진득하게 시청하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텔레비전을 즐겨 보거나 쉽게 빠져들지 않는 까닭에 남들이 다들 재미있다며 추천하는 프로그램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시청한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은 듯하다. 그랬던 내가 자발적으로 텔레비전 앞에 앉게 될 줄이야. 나로서도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세간의 관심을 받는 인기 프로그램도 아닌 듯한데 말이다.

 

금요일 밤에 나를 텔레비전 앞으로 불러들이는 프로그램은 <스페인 하숙>이다. 유해진, 차승원, 배정남이 알베르게의 주인이 되어 방문하는 순례객들에게 음식과 숙소를 제공한다는 설정의 예능 프로그램인 '스페인 하숙'은 시청자들에게 특별한 재미를 안겨줄 것 같지도 않은데 나처럼 뭔가에 홀린 듯 이끌리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가 보았다. 현대인들의 숨 가쁜 일상에 대한 반작용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그런 연유로 금요일 저녁 시간을 몇 주째 텔레비전 시청에 쓰고 있다.

 

지난주에는 알베르게를 찾은 어느 외국인 순례객이 자신이 만났던 나이 든 순례객에 대한 언급이 시선을 끌었다. 10년쯤 전에 아내를 암으로 보내고 이제는 자신도 암환자가 되었다는 그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28번째 걷는다고 했다. 그가 남겼던 말은 '인생은 아름다운 선물과 같다'는 거였다고. 그것은 분명 어느 책에선가 한 번쯤 읽어보았음직한, 또는 누군가로부터 한 번쯤 들어본 말일 테지만 삶을 정리하는 어느 누군가로부터 듣게 될 때 그 무게는 사뭇 다르게 느껴질 듯했다. 약간의 뭉클한 감동을 느꼈던 덕분인지 나는 건축가 김희곤이 쓴 <스페인은 순례길이다>를 주말 휴일을 이용하여 단숨에 읽었다.

 

순례길의 막바지에 위치한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가 '스페인 하숙'의 촬영지라고 했다. 나는 이미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마을의 풍경을 여러 번 보아왔지만 책에서 보는 사진은 또 달랐다. 저자도 이곳에서는 뭔가 다른 기운을 느꼈던지 전에 없이 감상에 젖는 듯했다. 건축가의 시선에서 갑자기 문학가의 시선으로 바뀐 듯한 문장이 나로 하여금 잠시 넋을 놓게 했다.

 

"신의 품을 빠져나와 알베르게 마당을 가로질렀다. 스위스에서 온 숙녀가 돌담에 걸터앉아 미소 지었다. 그녀 옆에 나란히 앉아 계곡을 굽어봤다. 운무가 파란 능선 위에 솜사탕처럼 걸려 있었다. 마음도 안개구름을 타고 흘렀다. 돌집 아래 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천막 속 형형색색의 장식품들이 고개를 내밀고, 거친 벽에 매달린 표주박들이 아침 햇살을 기웃거렸다. 여기저기 농기구가 아무렇게 놓여 있는 길가에 검은 돌조각들이 담장을 따라 흐르다 산장의 벽을 따라 올라타고는 곧바로 지붕을 눌러썼다. 라 파바의 아침이 세상의 모서리에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고 있었다." (p.250)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많은 이들의 저서를 한두 권쯤 읽지 않은 사람이 없을 터,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독일의 유명한 코미디언 하페 케르켈링이 쓴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 한효정의 <지금 여기, 산티아고>, 김진세의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 등 많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블로그 이웃 중 한 분의 산티아고 순례기를 빼놓지 않고 읽었었다. 걷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프랑스 남부 생장피드포르에서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이어지는 728km의 기나긴 여정이 짝사랑의 대상처럼 가슴에 남았던 까닭이다.

 

"오늘날 파리가 매력적인 것은 순례길의 제로 포인트여서도 아니고, 단순히 아름답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 중세와 근대의 아픈 역사를 사랑으로 감싸고 미래로 묵묵히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순례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전에 파리의 역사를 되새겨보는 게 좋다." (P.51)

 

전에 읽었던 브르통의 산문집 <걷기 예찬>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히 경험하는 것이다. 기차나 자동차는 육체의 수동성과 세계를 멀리하는 길만 가르쳐 주지만, 걷기는 눈의 활동만을 부추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목적 없이 그냥 걷는다. 지나가는 시간을 음미하고 존재를 에돌아가서 길의 종착점에 더 확실하게 이르기 위하여 걷는다. 전에 알지 못했던 장소들과 얼굴들을 발견하고 몸을 통해서 무궁무진한 감각과 관능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확대하기 위하여 걷는다.'

 

우리는 아는 만큼만 보게 되는 까닭에 산티아고 순례길에 놓인 대성당과 수도원, 그리고 수많은 중세 스페인 건축물들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 혹시 걷게 될지도 모르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수많은 건축물들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나는 건축가 김희곤이 쓴 <스페인은 순례길이다>를 슬쩍 곁눈질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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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했던 언어는 봄볕을 받아 푸르게 부푼다. 봉긋봉긋 꽃이 부풀듯이. 그리고 나날이 짙어지는 초록물이 드는 것처럼. 나는 아이의 은근했던 말을 기억한다. 원시의 언어처럼 낯설었던, 그래서 문명에 찌든 나와 주변 사람들이 미처 말이 되지 못한 너의 소리와 그 소리에 어울리는 행동과 진지했던 너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나는 이따금 아주 짧은 시간 간직했던 너의 순수의 언어를 그리워한다.

 

어제저녁 아들과 통화를 하면서 아들의 어릴 적 모습이 문득 그리웠다. 이제 막 옹알이를 하던 모습도,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던 그 순간도, 간단한 말을 배운 후 모든 게 궁금했던 너의 초롱한 눈망울도... 중간고사를 일주일여 남겨둔 아들은 시험공부로 바쁘다고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첫 번째 맞는 시험. 불안한 기색은 없었지만 목소리에서는 전에 없던 피곤한 기색이 묻어났다.

 

세월을 자양분 삼아 자신의 영혼을 키우는 게 우리네 삶일 테지만 누군가의 성장은 영원히 멈추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비가 예보된 하늘은 끄물끄물 어둡고 어제오늘 높았던 기온 탓인지 장마철처럼 후텁지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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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그리고 엄마
마야 안젤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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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갖는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은 뭔가 특별한 사람이거나 애당초 특별한 무언가를 타고 태어난다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특별한 유전자를 물려받는다는 얘기인데 이와 같은 믿음은 선민의식을 강조하는 특정 종교로부터 나온 것일 수도 있고, 특별한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질투나 일반인의 열등의식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와 같은 믿음은 잘못된 것이라는 게 지금까지 수집된 여러 증거에 의한 정설이고 다들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에게 뭔가 특별한 점이 있지는 않은지 꾸준히 의심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무리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일지라도 그에게 주어진 우호적인 주변 환경과 그를 돕고 격려하는 조력자가 없다면 재능은 쉽게 사라지거나 미처 꽃 피울 기회도 없이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재능은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고 키워지는 것이지 물려받은 재능을 독립적인 환경에서 스스로 펼쳐 보이는 게 아니다.

 

마야 안젤루의 자서전적 에세이 <엄마, 나 그리고 엄마>를 읽는 독자라면 작가인 마야보다 마야의 어머니 비비언 백스터의 놀라운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까 싶다. 마야가 세 살 때 비비언 부부가 이혼하는 바람에 마야의 오빠인 베일리와 마야는 열세 살 때까지 친할머니의 손에 자라는 등 비비언은 다른 집 자식들은 겪지 않았을 특별한 시련을 마야에게 안겨주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마야와 베일리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후 비비언은 엄마로서 최선을 다했다.

 

"이걸 명심해라. 앞으로 너희를 따라다닐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평판이야. 옷이나 돈이나 앞으로 너희가 몰게 될지 모르는 커다란 차가 중요한 게 아니야. 헨더슨 할머니도 해주신 얘기라는 거 안다, 나랑 다른 표현을 쓰셨을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여기서 나와 클라이델 아빠와 함께 사는 동안에는 거짓말하지 말고, 남을 속이지 말고, 많이 웃었으면 좋겠구나.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해서, 그다음에는 서로를 향해서 말이다." (p.49)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미국의 시인이자 작가, 가수, 작곡가, 배우, 극작가, 영화감독, 프로듀서, 교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던 마야 안젤루는 민권운동가로도 유명했고, 토니 모리슨, 오프라 윈프리 등과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 여성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러나 화려하기만 했던 그녀의 이력 뒤에는 아픈 과거가 숨어 있다. 부모님이 이혼한 후 친할머니 손에서 자라던 일곱 살 무렵 성폭력을 당했고, 그때의 충격으로 열세 살 때까지 말을 하지 않았으며, 열여섯 살에 미혼모가 되는 등 파란만장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들을 낳은 지 두 달만에 독립을 하여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기도 했다.

 

"그래, 가거라. 하지만 이거 하나는 명심해. 우리집 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너는 자유의 몸이 되는 거야. 아칸소에서 헨더슨 할머니에게 배운 것과 나한테 배운 것이 있으니 옳고 그른 걸 판단할 수 있겠지. 옳은 일을 해라. 남의 유혹에 넘어가서 지금까지 배운 것들을 잊으면 안 돼. 사랑하는 관계 안에서나 친구들 사이에서, 또 사회생활이나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맞춰나가야겠지만, 남한테 휘둘려서 네 생각을 바꾸면 안 된다. 그리고 기억하렴. 넌 언제든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걸." (p.102)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한 용기는 자신에 대한 다른 누군가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에서 비롯된다. 대개는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과 믿음이 자녀로 하여금 자유로운 삶을 살게도 하지만 자식에 대한 과보호로 인해 세상을 향한 용기는커녕 작은 장애물도 넘지 못하는 지독한 겁쟁이로 길러내는 경우도 많다. 마야 안젤루의 어머니인 비비언은 미혼모가 된 마야가 생계유지를 위해 스트립 댄서가 되겠다고 했을 때도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옷을 안 벗을 참이면 맨살이 거의 다 드러날 정도로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어야 한다'고 조언을 하는가 하면 심각한 폭력을 가한 남자 친구에게 복수하라며 권총을 쥐어주기도 했다.

 

"어머니는 용기라는 이름의 크고 작은 선물들을 내게 주었다. 그중 작은 선물들은 내 의식의 틈바구니 속으로 워낙 미묘하게 스며들어 어머니의 그림자가 어디에서 끝나고 어디에서부터 나의 존재가 시작되는지 나조차 알 수 없을 정도다. 큰 교훈들은 밤하늘에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별들처럼 내 기억 속에서 반짝거린다." (p.223)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시대에 흑인으로, 그것도 남자가 아닌 여자로 살아간다는 건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많은 것들을 감수해야 한다는 걸 의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야의 어머니인 비비언은 목숨을 걸고 세상과 투쟁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던 듯하다. 마야 역시 그러한 어머니를 보고 자랐던 탓에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마야 안젤루의 자전적 에세이 <엄마, 나 그리고 엄마>는 세상을 향해 두려움 없이 나아갔던 두 여인, 비비언과 마야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서로 닮은 듯 각자 달랐던 두 여인의 삶을 말이다.

 

오늘은 부활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세상을 향해 담대하게 나아간다면 마야 안젤루처럼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종교를 떠나서 자신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누군가가 뒷배를 봐주고 있다고 믿는 것은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일인가. 한 아이의 부모로서 나는 아이의 결정을 전폭적으로 믿고 지지하는지 다시 한 번 반성하게 된다. 일 년에 단 하루뿐인 부활절에 세상의 모든 부모가 자신을 겸허히 뒤돌아보고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거듭날 수만 있다면 부활절은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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