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일기 - 우리가 함께 지나온 밤
김연수 지음 / 레제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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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도 그렇지만 소설가란 마치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별종의 인간인 양 생각하기 쉽다. 아

침이면 직장에 출근하여 지친 몸으로 퇴근하는, 그날이 그날 같은 대부분의 직장인과는 달리 뭔가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쓴 자신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우리네 삶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비록 생각은 우리와 크게 다를지언정 정해진 시간에 노동하듯 규칙적으로 글을 쓰고, 그와 같은 힘든 노동을 견디기 위해 운동으로 체력을 비축하는 등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은 일반 직장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보이는 것이다.

 

<시절 일기>는 소설가 김연수가 지난 십 년간 보고 듣고 읽고 써내려간 한 개인의 일기이자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한 개인의 진솔한 삶을 보여준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 속한 한 구성원으로서 우리 사회를 걱정하는 사십대의 어른이자 평범하기 짝이 없는 개인인 동시에 끊임없이 쓰고 지우고 다시 쓸 수밖에 없는 한 직업인으로서의 고민을 이 책에 담고 있다.

 

"일단 스펙터클이 된 타인의 불행에 사로잡히면 찌꺼기처럼 어떤 감정이 우리에게 들러붙는다. 목구멍 안에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하지만 이물감 외에는 그다지 고통을 주지 않는 생선 가시 같은 것. 고통이라기보다는 불편함에 가까운, 우리 내부의 타자. 그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슬퍼한 뒤에야 우리는 우리 안의 이 타자를 애도하는 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어떤 슬픔으로도 그 타자를 애도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타자에 대한 윤리의 기본은 그냥 불편한 채로 견디는 일이다. 이렇게 견디기 위해서 소설가들은 소설을 쓰고 감독들은 영화를 만들고 시인들은 시를 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견디기 위해서 사람들은 소설과 시를 읽고 영화를 본다. 애도를 완결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애도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들은 날마다 읽고 써야만 한다." (p.43~p.44)

 

한 사람의 일기라는 게 늘 그렇듯 글의 소재가 되는 것은 꽤나 다양하다. 세월호와 같은 국가적 재난에 대한 작가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이 글로 쓰일 수도 있고, 최근에 본 영화나 책에 대한 간단한 소회가 글의 소재가 될 수도 있고, 자주 듣던 노래나 문득 떠오르는 추억 혹은 더위나 추위 등 시답잖은 이야기들이 글의 소재로 등장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시절 일기>가 우리네 일기와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글을 잘 쓰고 못 쓰는 데서 오는 차이가 아니라 '쓰기' 자체에 대한 질문들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데 있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작가라는 직업의 특성상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소설가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며, 소설가는 평생을 마침표 없이 과정으로서의 삶을 살다 가는 특이한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러나 더 많은 소설을 창작하고 난 뒤, 나는 생각과 문장 사이의 시간차를 줄이는 일이 어떤 소설을 끝까지 쓸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중에 그만둔 소설들 - 대개 작가 생활 초기에 이런 미완성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 과 끝까지 써서 출판한 소설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애초의 구상에서 대대적인 수정이 가해졌느냐 아니냐에 있었다. 내 경우 출판까지 이른 소설들은 대개 애초의 구상과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와 플롯으로 완성됐다." (p.242)   

 

몸이 기억하는 시간은 의식이 기억하는 시간과는 사뭇 다르게 흐른다. 일정한 루틴을 따라 큰 변덕 없이 흐르는 몸의 시간은 매번 죽음이라는 한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의식의 시간에 한계와 매듭을 지어주는 것은 몸의 시간이 있기에 가능하다. <시절 일기>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가 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우리의 삶은 우리를 매혹시킨 근대적 기계들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닮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구불구불 흘러내려가는 강을 닮아 있습니다. 인간의 시간은 곧잘 지체되며, 때로는 거꾸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깊은 어둠 속으로 잠겨들지만, 그때가 바로 흐름에 몸을 맡길 때라고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쉼 없이 흘러가는 역사에 온전하게 몸을 내맡길 때, 우리는 근대 이후의 인간, 동시대인이 됩니다. 그때 저는 온전히 인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깊은 밤의 한가운데에서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역사의 흐름에 몸을 내맡길 때, 우리의 절망은 서로에게 읽힐 수 있습니다. 문학의 위로는 여기서 시작될 것입니다." (p.301)

 

13호 태풍 링링이 휩쓸고 간 거리는 참담했다. 강풍에 부러진 가로수 잔가지들이 도로 곳곳에 수북수북 쌓여 있고, 피비린내처럼 질펀한 풋내가 풍겼다. 그러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흐린 하늘 밑으로 태풍의 잔해가 공포처럼 흘렀다. 지난 한 달 동안 뒤덮었던 대한민국의 사법 개혁에 저항하는 괴벨스의 광풍이 태풍 링링과 함께 사라진 듯하다. '뭘 계속 쓰다보니까 어느 날 소설가가 됐다'는 김연수 작가. '수천 번의 무와 대면한 뒤에야 한 편의 글이 완성'된다고 믿는 작가는 괴벨스의 광풍이 몰아쳤던 지난 한 달의 대한민국을 어떤 모습으로 쓰고 있을까. 나는 태풍이 스러지고 있는 아득한 하늘을 보며 역사의 침묵만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문득 깨닫는다. 꽁꽁 닫았던 창문을 이제야 열어본다. 신선한 바람 한 점이 훅 들이친다. 책상 위에 놓인 <시절 일기>가 바람에 펄럭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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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불거진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에 대한 확인되지도 않은 여러 의혹과 인격 살인에 가까운 언론 보도 그리고 악의적인 왜곡과 sns를 통한 전파 등 근 한 달여 동안 대한민국을 뒤덮었던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독일 나치 체제에서 활약했던 요제프 괴벨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1897년~1945년)는 나치 독일에서 국가대중계몽선전장관의 자리에 앉아 나치 선전 및 미화를 책임졌던 인물이다. 라디오와 TV를 통해 정치 선전을 했던 그는 유창한 말솜씨로 대중을 사로잡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내가 굳이 괴벨스를 떠올리는 것은 작금의 사태를 불러온 상황이 언론과 검찰, 공안검사 출신의 자유당 의원들에 의한 선전 선동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주목하는 인물은 공안검사 출신의 의원들이다. 그들은 군사 독재 시절 정권에 저항하는 대학생과 일반인들을 향해 없는 죄도 만들어내던 인물이 아닌가. 거짓과 공작에는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박정희와 박근혜 정권의 시녀로 봉직했던 김기춘을 비롯하여 황교안, 김진태, 주광덕, 곽상도 등 검사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용하여 죄 없는 국민들을 향해 온갖 악행을 일삼았던 인물들이 이제는 대한민국의 민심을 흔들고 정권을 붕괴하려는 흑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몇몇 공안검사 출신 의원들의 치밀한 작전만으로는 이와 같은 엄청난 일을 벌일 수는 없었을 터, 권력에 기생하는 언론과 정치 검찰의 비호가 없었다면 애시당초 가능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록 없던 죄도 있는 것처럼 만들어내던 기술은 과거 군부독재 시절에나 통했을까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가능하지도, 그런 거짓 선전에 넘어갈 만큼 국민들 수준이 그렇게 허술하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10대 소녀의 사생활이 담긴 생활기록부를 당사자의 동의도 없이 공개하는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국민들의 알 권리로 포장하던 그 낡은 기법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음을 그들 역시 직시해야 할 것이다.

 

오늘은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청문회가 열리고 있다. 공안검사 출신의 국회의원이 야비한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자신이 마치 대한민국을 지키는 독립투사라도 되는 양 말이다. 내년 총선이 끝나면 사라질 인물이지만 지금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울분이 치솟는다. 그들은 지금도 불법과 탈법이 난무하던 군부 독재 시절의 권위를 그리워하고 있는 듯하다. 괴벨스의 망령이 그들 머릿속에 있는 한 그들의 파멸도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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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짐, 맺힘 문지 에크리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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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독자라는 관계에서 작가는 그저 독자가 읽은 몇몇 작품에서 만들어진 희미한 이미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TV에서 보는 어느 연예인의 이미지를 그 사람의 전부인 양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내게 있어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에 대한 인상이나 느낌은 그의 저서 <행복한 책 읽기>로 국한된다. 문학을 통해 나타난 한 시대의 다양하고 복잡한 '꿈'을 작가들의 의식과 무의식의 이면까지 들추어내어 비평도 창작 못지않은 언어 예술의 한 분야임을 독자들에게 깊이 각인시켰던 문학평론가 김현은 냉철한 분석과 해박한 지식으로 인해 독자들의 감탄을 자아내곤 했다. 그러나 <행복한 책 읽기>에서 김현은 적확하고 면밀한 언어 구사로 인해 다소 까칠한 이미지로 굳어졌다. 그의 실제 성격과는 별개로.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의 창립자이기도 한 김현의 산문집을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후반에 걸친 글이 다수를 차지하는 이 책에서 작가는 그 시대의 한국과 예술, 그리고 삶에 관한 사유를 기록하고 있다. 생활의 공간에서 작가가 느낀 단상들을 엮은 1부 '두꺼운 삶과 얕은 삶', 작가의 일기장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2부 '즐거운 고통', 외국을 여행하며 쓴 기행문이 실린 3부 '묘지 순례', 만화·음악·영화를 중심으로 다양한 글쓰기를 선보인 4부 '사라짐과 맺힘', 작가가 직접 방문했던 유럽의 미술관에서 감상한 피카소, 자코메티, 고흐, 드가, 로댕에 대한 짧은 인상을 남긴 5부 '미술관을 나오면서'로 구성된 <사라짐, 맺힘>을 통해 나는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 지성인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의 드가는 발레리의『드가·춤·데상』이라는 에세이에 나오는 드가이다. 브룬스비크에게 인식론이 무엇인가를 5분 안에 설명해달라는 질문을 던져 그를 당황하게 만들고, 밀라르메에게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데도 왜 시를 쓸 수 없느냐고 물었다가, 시란 생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말로 쓰는 것이라는 그의 핀잔을 받은 드가가 바로 내 기억 속의 드가이다. 그 드가가 말(馬)과 춤의 형태를 하고 나에게 달려든 것이다." (p.261)

 

비평가로서의 김현은 이 책에서 에세이스트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드러내는 듯하다. 물론 <김현 문학 전집>을 통해 평론뿐만 아니라 작가가 쓴 다양한 장르의 글을 접했던 독자라면 그닥 새로울 것도 없겠지만 나처럼 그가 쓴 평론만 겨우 읽었던 허술한 독자라면 책을 읽는 내내 '아, 작가에게 이런 면모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았을까 싶다. 첫 한글세대이면서 4·19세대로서 창작과 문학 이론, 비평의 관계를 혁신하고 한국문학에 새로운 통찰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은 작가이기에 빼어난 글솜씨야 이미 정평이 난 것이지만 일상의 언어로 써내려간 여러 꼭지의 글들에서 평론과는 다른 부드러운 면모와 친근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인간은 자기 환상의 노예이다. 그는 항상 자기 안에 그리고 자기 뒤에 유령을 데리고 산다. 때때로 그는 그의 앞에서도 유령을 본다. 술에 취해 있거나, 눈이 눈의 역할을 하기를 포기했을 때에 말이다." (p.166)

 

책을 읽을 때의 우리는 주변 환경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한다. 그곳에서 우리들 각자가 건져 올린 사유는 때때로 현실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기발한 생각들로 채워지기도 하고, 현실의 불안과 여러 걱정거리로부터 해방된 무한한 자유를 선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문학은 살풍경한 현실로부터 우리를 잠시 도피시키기도 하고, 다른 시각으로 현실을 돌아볼 수 있는 분명한 계기를 제공하는지도 모른다.

 

"불안은 의식인의 사치이다. 그것은 자기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자신이 분명하게 알지 못할 때 생겨난다. 그것은 대부분 초조를 동반한다. 그것은 걱정과는 전연 다른 감정의 질이다." (p.172)

 

태풍 링링이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에도 아랑곳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가을비가 내리고 이따금 천둥이 치는 하늘을 무심한 눈길로 그저 바라볼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게 없는 것처럼 말이다. 김현의 글을 읽는다는 건 내가 건너온 오래전 시간을 한 번쯤 되새기는 일인 동시에 태풍 전야의 불안을 조금쯤 잠재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오래도록 가라앉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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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 그 사람과의 관계가 멀고 가까움에 따라 평가는 사뭇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것이 꼭 인간성과 연계된다고는 보지 않는다. 예컨대 사물이 아닌 한 사람에 대한 평가라는 건 지극히 주관적인 영역에 속할 뿐 객관성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허다분하기 때문이다. 명백한 범죄의 증거를 들이밀어도 고개를 외로 틀고 보려 하지 않는다거나 합리적인 추론과는 별개로 감정에 따라 믿음의 추가 기우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봐왔던가. 그런 사람들 앞에서 상식을 말한다는 건 얼마나 허망하고 무용한 일인지...

 

어제 있었던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기자간담회를 보면서 질문을 하는 기자들의 수준을 떠나서 그들 안에 내재하는 감정의 중심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대한민국 국민의 9할이 자신이 믿고 있는 어느 한편으로 기운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기자만큼은 일말의 객관성을 유지한 채 사실에 의거하여 기사를 쓴다고 믿었는데 그와 같은 믿음이 산산이 부서진 하루였다. 기자라는 직책을 수행하는 자들이 오히려 편협한 국민들보다 더 심하게 편향되어 있음을 눈으로 확인한다는 건 서글픈 일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보수정권에 줄을 댄 채 자신들의 이익을 편취해왔던 구린내 나는 행태를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그들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 말이다.

 

조국 후보자의 답변이 진실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인식하고 무엇보다도 먼저 바로잡아야 할 문제는 바로 언론이 권력 위에 서려한다는 것이 아닐까. 조국 후보자가 언론을 향해 자신을 둘러싼 문제를 아무리 진실되게 설명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사람은 결국 믿지 않을 테고 미워하는 사람은 결국 미워하는 채 남을 문제이기에 후보자 본인은 속이 후련할지언정 그가 국민들을 향해 긴 시간을 두고 반복하여 답변했던 여러 의혹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한 게 없었다고 본다. 시간이 가면 잊힐 문제이고 언론도 지치면 그만둘 테니 말이다.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린다. 최초의 근대적 보수주의자로 알려진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분노와 광란이 신중함, 숙고, 선견지명을 가지고 100년 동안 건설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단 30분 만에 파괴할 수 있다.'고 했다. 미친 언론과 광신적 보수주의자들이 우리 사회를 철저히 무너뜨리고 있다. 2019년의 대한민국에서 '보수의 품격'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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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 예찬 - 숨 가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품격 있는 휴식법
로버트 디세이 지음, 오숙은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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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에는 지독한 일 중독자이거나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많다. 물론 내 주변만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말이다. 어쩌면 대한민국의 성인 대부분이 그럴지도 모른다. 모처럼 여가 시간이 주어져도 도무지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없는 사람들. 그래서인지 노는 것보다 일하는 게 편하다는 말을 거침없이 하기도 하고, 일할 때가 좋을 때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기도 한다. 게다가 자신들의 말을 증명이나 하려는 듯 휴일이면 뒹굴뒹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보내도 될 것을 마치 누군가로부터 쫓기는 사람처럼 안절부절 갈피를 못 잡거나 맨정신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도무지 진정시킬 수 없다는 듯 서둘러 술에 취하려 드는 경우가 많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러시아 문학 연구자이자 TV 프로그램 진행자, 소설가, 에세이스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로버트 디세이는 자신의 책 <게으름 예찬>에서 '바쁘다는 말은 자신이 노예 상태에 있음을 광고하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평소에 우리가 자랑처럼 또는 습관처럼 떠벌리는 '바쁘다'는 말이 결코 자랑이 아니라는 얘기다. 자신의 일이 아무리 즐겁고 유용하거나 필요해도, 일할 때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시간만큼은 분명 누군가의 노예로 보내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오랜 세월 동안 지배계급이 주장해 온 '노동은 신성하다'는 말은 순전히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자신들의 여가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지배계급을 제외한 모두가 뼈가 부서져라 일하도록 그런 논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최근에 일(Work)과 삶(Life)에 있어서 균형(Balance)을 유지하려는 추세가 확산되고는 있지만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게으름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그러나 '워라밸' 문화의 확산 추세로 인해 일과 여가를 분리하려는 직장인들의 수가 증가하였고, 기업의 입장에서도 근로자에게 충분한 휴식을 제공함으로써 일의 능률과 생산성을 높인다는 측면에서 일과 여가를 분리하는 것은 결코 손해가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그럼에도 일밖에 몰랐던 과거 베이비붐 시대의 관성은 목적이나 결과 없이 게으름을 피우는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도록 하는 게 사실이다. 휴식을 통해 자신의 삶과 존재 가치를 깨닫는 게 아니라 일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는 얘기다.

 

"빈둥거리기는 재미있고 깃들이기는 뿌듯한 만족감을 주지만, 놀이야말로 최고의 여가 활동이다. 그것이 주는 즐거움 때문에 자유롭게 선택되었다는 전제만 있다면, 놀이는 가장 훌륭한 여가이며, 무엇에도 뒤지지 않을 좋은 삶이다." (p.202)

 

저자가 생각하는 게으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가 아니라 '어떤 것이든 할 자유'이다. 말하자면 게으름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여분의 어떤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적극적으로 계획하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유용한 시간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빈둥거림, 독서, 걷기, 여행, 놀이, 낮잠, 섹스, 목욕, 청소, 요리, 세탁, 아무것도 하지 않기 등 익숙했던 게으름의 방식을 주도적으로 선택하라는 것이다. 꼼짝하지 않은 채 모험을 하는 독서의 방식이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무언가를 한다는 느낌의 무작정 걷기의 방식이든 우리가 선택하는 게으름의 방식이 무뎌졌던 감각을 깨우고, 각자에게 삶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게으름을 현명하게 활용하면 할수록 삶에 깊이가 생기고 행복에 한 발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슬프게도 좋은 놀이(초월적인 가벼움)는 우리 대부분의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조금씩 멀어지고, 그러다 어느새 우리는 편안히 놀지 못할 만큼 늙어버린다. 밖에 나가기에는 눈이 침침하고 숨은 너무 금세 가빠오며 관절은 시큰거리고 동작은 굼뜨다. 뭐가 뭔지 헷갈리고 썩 내키지도 않는다. 대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놀이하는 것을 텔레비전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때쯤 되면 그것조차 좀처럼 하지 않는다." (p.202)

 

우리는 대개 좋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 이를테면 휴식이나 여행, 외식, 문화체험 등 자신의 삶을 깊이 있게 하는 것들을 '다음에'라는 말로 일축하거나 반복하여 유보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 당장'이라는 말은 일에서나 통용될 뿐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에는 인색하다. '그리고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말로 변명한다. 우리는 이렇듯 자신의 삶을 외면하거나 천대한다. 물웅덩이처럼 다양한 모양의 시간을 옮겨 다니며 순간순간을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사용해보라고 저자는 권한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삶을 희생한다는 생각, 다음으로 유보되었던 행복, 바쁘다는 이유로 나를 되돌아보지 않는 삶은 결국 크나큰 후회를 우리에게 선물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 평생 희생의 이유와 명목만 찾았던 게 우리 부모 세대의 삶이었다면 우리는 진정 다른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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