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제법 더위를 느낄 만한 날씨. 바야흐로 여름에 가까워지고 있다. 미리 걱정할 필요까지야 없겠지만 올 여름은 또 얼마나 더우려나‥‥‥.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한다. 등나무 벤치에는 연보랏빛 등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도로 양쪽에 늘어선 이팝나무 가로수엔 눈이 내린 듯 꽃이 만발하다. 대체휴일로 이어지는 이번 주말은 짧은 휴가와 진배없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첫 시험을 치른 아들도 홀가분한 기분인 듯하다. 학교 방송반인 아들은 선배들과 함께 방송국 견학을 갔다고 했다.

 

지금 읽고 있는 책 <알 수도, 모를 수도 없는>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흘러간 과거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현재를 이렇게 저렇게 통제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오지 않은 미래를 기대하는 마음도 다 내려놓고 오직 담연히 깨어있으면 시공(時空)이 돈망(頓忘)해 집니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지면 매 순간 고요와 평화로움 속에서 너, 나가 없는 가운데 인연 닿는 모든 이들과 상생(相生)하면서 억지로 애쓰는 일 없이 절로 그러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현재를 안달복달하는 건 물론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마음을 놓지 못한다. 담백하게 산다는 건 그저 꿈 속에서나 가능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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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문장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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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고사성어가 있지요. 세 명이 모여 입을 맞추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인터넷이 없던 아주 먼 과거에도 맘만 먹으면 잘못도 없는 어느 한 사람을 불한당으로 만드는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나 봅니다. 그러니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 애먼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일은 그야말로 손바닥 뒤집기보다 더 쉬워졌다는 게 맞을 듯합니다. 비근한 예로 재작년에 있었던 '240번 버스 기사 사건'이나 작년 말에 있었던 '이수역 폭행 사건'만 보더라도 인터넷에 올라온 일방적인 글만 읽고 많은 사람들이 애먼 사람을 상종도 할 수 없는 인간쓰레기쯤으로 매도하는 댓글을 달았던 걸 기억하실 겁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을 듯합니다. 복장이 터질 일이지요. 속을 끄집어내어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입니다.

 

'소설가 P씨의 계정을 팔로한 지는 이 년 남짓 되었다.'는 고백으로 시작되는 구병모 작가의 단편소설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는 꾸준한 판매지수를 유지하던 소설가 P씨가 네티즌의 과도한 인신공격성 비난에 대처하는 모습과 인터넷상에서의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었다가 어느 한순간 소리도 없이 스러지는 SNS 상에서의 많은 논란으로 인한 치명적 여파를 다루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소설가 P씨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대변하고 있을 뿐 소설가라는 직업군의 특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소설가 P씨는 일 년에 평균 한 권꼴로 육 년째 저서를 출간하고 있는 성실한 작가로서 흔한 산문집 한 번 낸 적도 없고, 신문 잡지 방 송 어디에도 칼럼조차 싣지 않는, 그러면서도 그가 쓰는 소설 역시 딱히 내세울 것 없는 문체와 살짝 빈곤한 사유에도 불구하고 매해 꼬박꼬박 신간을 내는 것은 물론 꾸준한 판매지수를 유지하는 까닭에 뭘 해도 본전치기는 하겠다 싶은 작가라는 평을 듣고 있었습니다. 소설에서 관찰자의 입장에 있는 '나'는 '발표하는 소설마다 소비되기 좋고 소진되기도 쉬운 적당한 감흥을 주는 소설가 P씨의 신작이 편협함과 낡은 세계관으로 논란이 되었을 때 P씨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려고 P씨의 계정을 팔로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다니는 초중학교의 학부모회를 비롯한 각종 봉사는 작년부로 물러났지만, 때마침 친정과 시가에 질병과 빚 보증과 철이 덜 든 남동생의 사업 실패 등 진부하기까지 한 문제들로 늘 신경이 곤두선 상태에서, 책을 읽는다든지 사람들의 반응을 눈여겨본다든지 하는 일도 일종의 사치였다. 육체적 실무와 감정 노동을 제외하더라도, 누구도 증오하지 않으며 어디에도 환멸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삶을 꾸리는 일이란, 생각보다 높은 열량을 필요로 했다." (p.24~p.25) 

 

사실 P씨는 논란이 불거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적 비밀이나 개인 육성이 드러나는 어떠한 글도 자신의 SNS 계정에 올린 적이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자기 건지 누구 건지 모를 단상 한 토막을 올리는가 하면 저자가 명시된 시나 소설의 일부를 가끔 인용하는 걸로 활동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P씨의 저서는 출판사 계정에서 알아서 홍보했고, P씨는 자신의 신간이 나왔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논란이 된 P씨의 신작은 사회파 스릴러로 분류할 수 있는 것으로서 네티즌의 윤리적 비난이 거세지자 작가인 P씨와 출판사는 한동안 무대응으로 대응하다가 뒤늦게 진정성을 담은 해명을 내놓지만 논란이 잦아들기는커녕 오히려 비웃음과 맹비난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설가 P씨에 대한 네티즌의 관심은 사그라듭니다.

 

"그리 오래지 않은 SNS 경험에 따르면 그곳의 말들은 전기포트 속 물방울이었다. 포르르 끓다가 부서지는 거품이 수면에 다시 합류했다. 일부는 증발하여 공기 중을 떠돌았다. 그대로 두면 물은 식었다. 때를 보아 스위치를 넣으면 다시 끓어 방울진 거품을 피워올렸다. 그 과정을 무수히 반복하면 거품의 토대가 되는 수면의 높이만큼은 어느새 눈에 띄게 낮아진다는 사실이, 예정된 부서짐에도 불구하고 말을 그치거나 가두지 않는 이유일 터였다‥‥‥" (p.24)

 

그러나 논란의 당사자인 P씨에 대한 관심이 스러지는 것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논란이 된 자신의 작품으로 인해 P씨는 자신의 글을 쓰는 것조차 네티즌을 의식하게 되고,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 P씨는 서점 매대에서 그의 책이 내려짐은 물론 그의 계정 역시 삭제됩니다. 그럼에도 그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거나 그걸 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출판사 계정에 문의를 넣지 않았고, 출판사가 P씨의 근황을 꿸 만큼 그에게 공을 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으나, 어쩐지 P씨는 소설가로서의 삶을 종료하고 자신의 일상이나 취미에 조용히 스며들었으리라는 확신이, 드는 것이었다. 그는 어떻게 해봐도 부족한 말들의 숲을 어설피 배회하는 자가 될 것이며, 어디서도 그의 발자국을 다시 발견하지는 못하리라는, 확신이." (p.37~p.38)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쩌면 인터넷에 올라온 누군가의 일방적인 이야기에 열을 올리며 재능 있는 누군가를 한없이 비난함으로써 사회로부터 그를 영원히 격리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에너지만 소비하면서 별 소득도 없는 그 짓을, 어쩌면 사회 전체로 볼 때 큰 손실이 될지도 모르는 그 짓을,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법적인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습관적으로 반복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사람 세 명이 입을 맞추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 수 있고, 성실한 사회 구성원 한 명쯤이야 가볍게 매장시킬 수 있지요.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더러 두려운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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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잦은 탓인지 숲은 하루가 다르게 초록이 짙어지고 있다. 덕분에 아침 공기는 더없이 맑고, 적당한 습기를 머금은 등산로는 한결 부드러워졌으며, 구수한 낙엽 냄새와 짙은 솔향은 새벽 등산객의 기분을 좋게 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에서 계절의 변화만큼 우리들 시선을 끄는 것도 없을 듯싶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제비꽃의 청초한 자태가 눈에 들어오고, 철쭉의 화려함에 없던 기운이 샘솟기도 한다. 우리는 기대하던 사람에게 번번이 실망하고, 기대하지 않던 자연으로부터 더없는 기쁨을 만끽하곤 한다.

 

패스트트랙 국면을 지나오면서 우리는 보고 싶지 않았던 정치인들의 막말과 추태를 억지로 보느라 정신적 스트레스를 감수해야 했지만 한편으론 이것이 꼭 나쁜 것만을 우리에게 주었던 건 아닌 듯하다.  내 주변에서 보더라도 수구꼴통 소리를 듣던 선배 한 명도 이번 일로 자유당의 적나라한 실체를 보게 되었다며 청와대 국민청원에 서명까지 마쳤다고 했다. 오죽하면 그와 같은 국민청원이 있었다는 걸 나조차도 몰랐었지 뭔가. 국민청원 사이트에 접속해보니 자유당을 해산시켜 달라는 청원에 동의한 사람이 120만 명을 넘었다.

 

사람이 변해도 사상이나 이념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선배가 자유당 해산 청원에 동참했던 건 상식의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보수를 대표하는 상식적인 인물이 등장하거나 합리적인 보수정당이 나타나면 그도 열성적으로 보수정당을 지지할 것으로 안다. 나도 물론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현재의 자유당은 보수정당도 아니고 오직 자신들의 이권만 생각하는 그야말로 양아치 정당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준법정신을 기대하거나 국민을 위한 합리적 판단을 기대한다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선배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은 해산된 통합진보당보다 더 악의적인 정당이다. 통합진보당보다 의석수가 몇 배는 더 많아서 그 폐해도 몇 배나 크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땅히 청산되어야 하는 정당이다.

 

우리는 과거에 있었던 나쁜 것만 기억할 뿐 긍정적인 면은 무시하거나 들여다보지도 않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패스트트랙 국면에서 화도 나고 치미는 화를 엄한 데 풀었을지도 모르지만 국민들로 하여금 이념이나 사상이 아닌 상식의 기준에서 판단하도록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니 그거면 됐다는 생각이 든다. 흐렸던 하늘이 갠 오늘의 하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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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천천히 가도 괜찮아 - 글로벌 거지 부부 X 대만 도보 여행기
박건우 지음 / 소담출판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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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팽한 긴장감 속에 느슨한 일상을 살 때가 있다. 자신은 생과 사의 기로에 선 듯 어느 때보다 강한 긴장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살고 있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나의 일상이 한껏 느슨해 보이는 것이다. 박건우의 <느리게 천천히 가도 괜찮아>를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실 박건우의 책이 처음인데 나의 생각과는 달리 작가는 유튜브나 인터넷에서 꽤나 유명한 사람이었다. '글로벌 거지 부부'라는 닉네임에 걸맞게 그는 부인인 미키 씨와 최소의 경비로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글로벌한 거지 인생을 살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자녀 계획이 없다. 만약에라도 애가 생긴다면 이민을 와서라도 이 학교에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상상에 잠기며, 단념했던 평범한 미래를 그려본 게 얼마 만이던가." (p.86)

 

작가의 생각이나 현재의 삶이 범상치 않은 듯하여 인터넷을 여기저기 뒤져 그와 연관된 글들을 찾아보았다. 인터뷰 기사도 있고, 작가가 쓴 칼럼과 여행 팁 등 다양한 글들이 올리와 있었다. 물론 동영상도 여럿이었다. 게다가 박건우의 팬을 자처하는 블로그 글도 많았다. 먼저 눈에 띄었던 건 그의 최종 학력이 고등학교 중퇴라는 거였다. 기존의 체제에 순응하지 못하는 듯 보였던 작가는 반항아 기질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학교로부터 퇴학을 당했고, 그때부터 작가의 인생이 다른 방향으로 흘렀던 듯하다. 기타를 치며 잠시 음악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관광비자로 가게 된 일본에서 막노동을 하여 돈을 조금 모았고, 모은 돈으로 노인들이 타는 세발자전거를 구입하여 타고 일본 열도를 여행하기도 했단다. 여러 건의 단기 알바를 전전했고, 태국 여행에서 만난 일본인 여행객 미키를 보고 다시는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연애를 생략한 채 바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도 했다. <느리게 천천히 가도 괜찮아>는 대만 도보 여행의 기록을 책으로 엮은 것으로 총 68일에 걸친 1,113km의 대장정을 담은 그들만의 이야기이다.

 

"친구의 장례 직후 내 삶은 엉망이었다. 무작정 귀국한 탓에 돈도 없었고, 먹고살 대책도 없었다. 당장 잘 곳조차 없어 대전역 부근의 여관 달방에 살았다. 밤이면 마음이 뒤숭숭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자는 것이 고통이었던 나는 일본에 있던 미키를 대전으로 불렀다. 우리는 처절할 정도로 가난한 여관살이를 했다. 이후 소일거리를 잡고 틈틈이 책을 쓰면서 형편은 조금씩 나아졌다. 그해 무리를 해서 거처를 서울로 옮기고, 이듬해 허름한 전셋집을 마련하면서 이번 대만 여행도 가능해졌다." (p.110)

 

박건우 작가가 지나쳐 온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어쩌면 작가가 어렸을 적에 꿈꾸었던 미래는 이런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학교에서도 쫓겨나고, 어쩔 수 없이 살긴 살아야 했고, 그러다 보니 지금과 같은 삶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지금은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서울에 거처도 없고 가진 것도 없으니 다른 나라를 전전하면서도 살아야 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자족하면서 살아야 스트레스도 덜 받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막상 외국을 여행하다 보면 우리의 상상 속에서는 무척이나 어려웠을 일도 아주 쉽게 해결되기도 하고, 세상에는 나를 걱정하고 뭐라도 도와주고 싶어 하는, 친절이 몸에 밴 사람들이 넘쳐난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는 게 아닐까. 떠나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었던 일들.

 

"그러고 보니 800km를 돌파했다. 한창 뜨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한 거리다. 대만을 걷기 7주 전에 산티아고를 다녀온 나는 그로부터 채 두 달도 되지 않은 시기에 800km를 두 번째 걷고 있다. 아직 젊어서 그런지 오늘까지 버텨준 내 다리에 대해 기특함이나 건강한 육신에 대한 감사함은 느끼지 않았다. 감사를 하자면 선심을 베풀어준 대만인들, 그리고 당연히 미키에게도 하고 싶다." (p.282)

 

우리는 종종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곤 한다. 출생에서 비롯된 여정은 성장의 단계를 넘어 노년으로, 그리고 종착지에 다다르게 된다. 물론 우리네 삶의 목적이 죽음은 아니지만 누구든 피할 수 없는 여정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여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되는가. 우리 모두가 두려움 없이 인생을 시작하는 것처럼 여행도 그렇게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인생의 축소판과 같은 여행에서 우리는 많은 우연과 마주하게 되고, 그 우연을 통해 비로소 여행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더불어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인생을 시작할 때 많은 게 필요치 않았던 것처럼 우리 앞에 펼쳐질 여행의 우연성을 믿는다면 여행에 앞서 우리가 준비할 것은 다만 한 줌의 용기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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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보는 청명한 하늘이다. 가슴이 뻥 뚫릴 만큼 시원한 풍경을 마주하는 오늘과 같은 날이면 나도 꽤 괜찮은 나라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4계절이 있다는 것도 그렇고, 산과 바다를 원 없이 볼 수 있다는 것도 그렇고, 자원은 없지만 자연재해로부터 조금쯤 안전하다는 것도 그렇다. 물론 내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곳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런 천혜의 자연환경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은 과연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국민 전체가 그렇다는 게 아니다. 패스트트랙을 둘러싼 국회의원들의 거친 몸싸움과 욕설, 고성과 야유 등 일반인들이 길거리에서 그랬더라면 당장 현행범으로 체포되고도 남을 만한 짓을 서슴없이 하는 꼴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더구나 불법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들이 무슨 국가와 국민을 위한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양 포장한다는 게 텔레비전 화면으로 그 현장을 보고 있는 국민들을 분노케 했다.

 

사실 우리나라 정치는 정경유착뿐만 아니라 정언유착 등 그들끼리의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해 왔던 까닭에 공수처법으로 인해 그러한 동맹이나 카르텔이 깨지는 걸 두려워하는 것이다. 게다가 거대 양당의 독점 구조로 인해 설령 그들이 내세우는 공약이 맘에 들지 않더라도 당선 가능성 때문에 둘 중 하나를 골라야만 하는 불합리한 선거가 유지되어 왔던 게 사실이다. 더구나 검찰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됨으로써 검찰만 장악하면 아주 손쉽게 반대 진영을 제압할 수 있지 않았던가. 말하자면 선거제·개혁법안 패스트트랙을 강력 저지하는 이면에는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겠다는 목적만 존재할 뿐 그 어떤 다른 명분도 없는 것이다.

 

자유당과 민주당이라는 거대 양당이 독점적 권력을 쥔 채 국정을 운영한다는 건 국민 전체를 두 세력으로 양분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권력 구조하에서 국민의 단합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밥그릇을 챙기기 위한 사적인 싸움을 벌이면서도 기괴한 논리를 동원하여 국민들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의석 배치로는 어떠한 법도 통과되기 어렵다. 어차피 그리 되었으니 차기 총선이 치러지기 전까지 국회도 개원하지 않은 채 조용히 지내는 게 국민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좋을 듯하다. 되지도 않을 일을 괜히 시도만 하여 미친개처럼 날뛰는 자유당 의원들의 기만 살려주는 꼴을 만드느니 세비로 나가는 세금이 아깝기는 하지만 국민들 정신건강을 위해 그 정도 출혈은 감수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국회의원들의 밥그릇 싸움만 보지 않았어도 짙어가는 녹음과 맑은 하늘을 보며 순순한 감동에 젖어들 수 있었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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