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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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운동을 다녀오는 길에 비를 만났다.  여전히 무성한 숲의 잎사귀들이 떨어지는 빗방울을 막아주었지만, 간혹 하늘이 훤히 드러난 길에서는 한두 방울의 비가 얼굴을 스치곤 했다.  소슬한 가을바람에 비해 빗방울의 감촉은 차지 않았다.  아침 세숫물이 서늘하게 느껴지던 늦가을 아침, 찬물에 가마솥의 끓는 물을 반 바가지쯤 섞어 놓았을 때의 느낌이 그랬을까?  서둘러 산을 내려가는 사람들.  '조금 젖으면 어떠랴.'하는 태평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며칠 전 텐도 아라타의 소설 <애도하는 사람> 리뷰를 쓰면서 '이것도 괜찮겠다.'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책을 읽고 마음에 가득했던 여운을 차마 글로 옮기지 못했던 책들, 돌이켜 보면 그런 책들이 한두 권일까마는 나는 기억에 남는 그런 책들을 다시 읽고 리뷰를 쓰기로 했다.  그 생각만으로도 나는 한껏 고무되는 느낌이었다.  장롱 속 깊숙히 숨겨두었던 옛 추억을 다시 꺼내는 듯한, 내가 선택한 책들이 나를 앞에 두고 아련한 추억의 한 장면을 조곤조곤 들려줄 것만 같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상실의 시대>는 대학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처럼 열광적인 '하루키 신드롬'이 불기 이전부터 작가의 마니아층은 서서히 다져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그 시절의 나를 향해 나아가려 한다.  조금쯤(혹은 많이) 야하다는 평가를 받았을 법한,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가 오히려 건전하게 보이게 했던 <상실의 시대>는 주인공 와타나베의 회상으로부터 시작되는 '청춘 소설'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청춘'이란 시기는 얼마나 짧고, 다른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귀한 시간이었는지...  그러나 나의 청춘은 주인공 와타나베의 청춘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상실의 시대>는 오롯이 산 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죽음의 순간을 이 책의 어느 곳에서도 상세히 기록하지 않았던 까닭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의 죽음은 어떤 면에서는 살아있는 자에게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실의 고통'에 익숙하지 않은 청춘들에게 있어 그 아픔이나 시련은 딛고 넘어가야 하는 어떤 것일 뿐, 가슴에 오래 두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작가는 독자들에게 처음부터 주지시키고 있다. 

 

"물론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내 안에서 그녀에 관한 기억이 언젠가는 희미해져 가리라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나를 향해 자기를 잊지 말아 달라고 간절히 호소하지 않았던가.   "나를 언제까지라도 잊지 말아 줘.  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기억해 줘."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한없이 밀려오는 서글픔을 참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를 사랑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25)

 

왜 와타나베는 죽은 나오코가 했던 부탁의 말에서 나오코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었다고 느끼게 된 걸까?  그랬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사람은 그 마지막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의 남겨진 삶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죽음이 남겨진 사람의 삶에 커다란 상처로 남게 되리라는 사실을 어찌 견딜 수 있을까.  '청춘'이란 어쩌면 대비하지 못한 상실의 고통을 순간순간 겪으며 십자가를 진 채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것과 흡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 청춘의 시기에 '사랑은 언제든 상처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었다.  그 방어기제는 상실의 아픔으로부터 나를 지켜준 것이기도 하지만 '도덕과 윤리'라는 메마른 땅으로 나를 인도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 난 상대방 남자가 이렇게 말해주면 좋겠어.  '알았어, 미도리, 내가 잘못했어.  네가 곧 딸기 쇼트 케이크가 안 먹고 싶어지리라는 것쯤은 짐작했어야 했는데.  난 당나구 똥만큼이나 바보스럽고 무지한 것 같아.  사과할 겸 다시 한 번 다른 걸 사다 주지.  뭐가 좋아? 초콜릿 무스, 아니면 치즈 케이크?"

"그러면 어떻게 되지?"

"난 그렇게 해서 받은 것만큼 어김없이 상대방을 사랑할 거야."

"지극히 불합리한 이야기 같은데."

"하지만 나로선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하고 미도리는 내 어깨 위에서 살래살래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랑이란 게 지극히 하찮은, 혹은 시시한 데서부터 시작되는 거야.  거기서부터가 아니면 시작되지 않는 거지."    (p.130)

 

주인공 와타나베와 미도리의 대화 장면이다.  사랑을 경험해 본 많은 청춘들이라면 머리를 끄덕이며 수긍했을 듯싶다.  사랑의 시작은 언제나 유치한 것이라고.  세상의 어떤 사랑도 이성적인 판단이 개입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미도리는 와타나베에게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유치함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  상대방을 위해 나의 체면이나 규칙을 깨트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고지식한 나의 이면에는 나를 끝끝내 지켜내고자 했던 나의 이기심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지금은 안다.

 

"그런 압도적인 석양 속에서 나는 문득 하쓰미 씨를 생각해 냈다.  그리고 그때 그녀가 일으킨 내 마음의 소용돌이가 과연 무엇이었던가를 이해했다.  그것은 채워질 수 없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채워질 수 없을 소년기의 동경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타오르는 순진 무구한 동경을 벌써 까마득한 옛날에 어딘가에 잊어버리고 왔기에, 그런 것이 한때 내 속에 존재했다는 것조차도 오랫동안 생각해 내지 못한 채 살아온 것이다.  하쓰미 씨가 뒤흔들어 놓은 것은 내 속에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던  '나 자신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거의 울어버릴 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  그녀는 정말, 정말 특별한 여자였다.  누군가가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구원했어야만 했다."    (p.327)

 

와타나베의 선배였던 나가사와는 이렇게 말했다.  "와타나베도 나처럼 본질적으로는 자기에게밖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야."라고.  자기와 타인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타인의 감정을 공감할 수 없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가사와의 지독한 에고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이 분리됨으로써 헤매지도, 상처받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때 나가사와의 연인이었던 하쓰미 씨는 헤매지도 않고, 상처받지도 않는 인간이 어디 있느냐며 항변한다.  하쓰미 씨는 자신과 다른 유형이었던 나가사와를 사랑하면서도 그의 단단한 에고의 벽을 결코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진즉에 알았더라면 자살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작품 속의 나가사와와 비슷한 청춘이었던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죽음은 삶의 대극(對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만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어떠한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p.413)

 

주인공 와타나베의 말이 옳다.  우리에게 찾아온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배운 깨달음이 다음에 닥쳐오는 에기치 않은 슬픔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는 게 또 청춘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빛나는 청춘의 시기에 이성을 멀리함으로써, 또는 내가 세운 규칙을 가혹하리만치 철저히 지킴으로써 다른 청춘과 구별되는 '우월성'으로 나를 포장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비겁한 짓이었다.  떨어지는 유성우를 맨몸으로 견뎌야 했던 청춘의 시절을 나는 우산을 쓴 채 메마른 사막을 건너온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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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만나는 일이 때로는 한심하고 역겨울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예컨대 오늘 같은 날이 그랬습니다.  잠깐 얼굴이나 보자는 전화에 '합석할 사람이 또 있느냐'고 묻지도 않은 채 '그러마'고 대답했던 것이 제 실수라면 실수였습니다.  비가 내리는 거리를 30분쯤 운전을 하여 도착한 약속 장소는 무슨무슨 가든이라는 간판이 걸린, 그닥 마음이 내키지 않는 장소였습니다.  내게 전화를 했던 사람은 도착한 지 꽤 되었는지 고기를 굽는 불판은 검게 그을러져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소주병도 두어 개 놓여 있었습니다.  '이거 잘못 걸렸구나.'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그를 두고 그냥 돌아설 수도 없어 어정쩡한 자세로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마음은 영 개운치가 않았습니다.  테이블 맞은편에서 대작을 하던 사람이 내게 인사를 하기 전까지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었는데, 언젠가 지금과 같은 술좌석에서 몇 번 마주쳤는지 안면이 익은 듯도 하였습니다.  내가 술을 못한다는 것을 익히 아는 지인은 술을 권하지는 않았지만 앞에 앉았던 사람은 내게 한사코 술잔을 쥐어 주며 술을 따랐습니다.  받아만 놓으라면서.

 

삼겹살이 까맣게 타들어가도 두 사람은 도통 관심이 없는 듯 보였고, 마지못해 나는 고기를 굽고 팔자에도 없는 술시중을 들어야 했습니다.  거기까지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습니다.  두 사람은 거나하게 술기운이 올랐는지 말도 되지 않는 주장으로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지인의 고향이 경상도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앞에서 대작하던 사람의 고향은 내 관심사도 아니었고 지역색으로 누군가를 경멸하거나 헐뜯는 사람을 인간 이하로 보는지라 그 사람이 전라도 사람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술기운이 오른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침을 튀기며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다가 급기야는 언론과 정치인들의 판에 박힌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디 사람들은 야비하기 이를 데 없다는 둥, 어디 사람은 뒤통수를 잘 친다는 둥, 어디 사람은 빨갱이라는 둥, 무식하다는 둥 그들의 주장은 하나같이 논리도, 근거도 없는 헛소리였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과학적 근거나 논리를 들어 말하라고 몇 번이나 말하였지만, 그들의 뇌 어딘가에는 그들의 조상이나 어느 정치인 또는 일부 언론의 주장이 마이크로 칩으로 내장되어 있는지 앵무새처럼 같은 얘기만 되풀이할 뿐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인간의 탈을 쓴 인조인간이나 로봇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결국 그들 둘만을 남겨둔 채 자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가겠다는 인사도 없이 말입니다.  어찌 그들을 정상적인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그들은 그저 허깨비에 불과한 놈들이었습니다.  그런 놈들을 만나기 위해 비싼 연료를 소모한 것도, 귀한 시간을 허비한 것도 후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인간 같지도 않은 그런 놈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그런 허깨비들이 비싼 밥을 먹고 있습디다.  아직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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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여름 2013-10-10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완전 싫죠...그런 상황이요 ㅠㅠ
휙 뒤로 던지고 잊어버리세요^^

꼼쥐 2013-10-11 14:0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돌아와서는 그 사람의 전화번호를 지우는 것으로 화풀이를 대신했죠. 그런 인간은 더 이상 만날 가치도 없는 그런 사람이죠.
 
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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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에 아랫동서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오랜 암투병 끝에 편안히 눈을 감으셨다고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죽음'은 누구에게나 철저히 개별적이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문학 작품에 양념처럼 등장하는 죽음의 모습을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얘기다.  살아 있는 자들은 말과 행동으로써 죽음을 미화하거나 철저히 도외시할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보편적 죽음 속에서, 그 보편성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이 혼자서 죽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끝끝내 개별적이다. 다들 죽지만 다들 혼자서 저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썼던 김훈 작가의 말은 곱씹어 볼 만하다. 

 

살아 있는 자의 입장에서 덧붙이자면 누구나 겪는 '상실의 아픔'도 그렇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쩔 수 없는 상실의 고통을 겪게 마련이지만 그 보평성과는 상관없이 각자가 혼자서 슬퍼하는 것이다.  모든 슬픔은 끝끝내 개별적이며, 흐르는 세월 속에서 홀연 보편성 속으로 스며들다가 결국 망각의 늪으로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책 <상실의 시대>에서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라고 썼다.  그렇다.  여름의 녹음 속에도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숨어 있었던 것처럼.

 

낮게 드리운 잿빛하늘을 배경으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온다.  어제부터 나는 텐도 아라타의 소설 <애도하는 사람>을 읽었다.  3년쯤 전에도 나는 이 소설을 읽었었다.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 이 책을 읽으면 따뜻한 햇볕이 녹작지근하게 풀어지는 오후에 깊은 단잠에 빠져들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아무런 근심도 없이 말이다.  650쪽에 가까운 작지 않은 책의 볼륨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어쩌면 작가는 평화 속에서 이 책을 썼을지도 모른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삶과 죽음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없는 깊은 울림을 느꼈었다.  그때 나는 '진리'란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통하여 스며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느낌을 말로 풀어헤칠 자신이 없었고, 나는 결국 리뷰를 쓰지 못했다.  지금도 나는 리뷰를 쓸 자신이 없다.  나는 다만 잊고 싶지 않은 책의 구절들을 천천히 메모하면서 나의 느낌을 적고자 한다.     

 

"그 사람은 누구를 사랑했는가? 누구에게 사랑받았는가? 누군가가 어떤 일로 그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는가?"  매일같이 죽은 이들을 찾아다니지만 이 세 사지만 알 수 있으면 한 사람 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유일한 인물로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설령 그 사람이 병자였건, 장애를 안고 있었건, 직업이 있었건 없었건 간에, 또 인생 경험이 적은 아이 혹은 갓난아기라 하더라도 이 세 가지 질문의 답만 갖추면 어떤 형태로든 만족스럽게 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죽은 이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들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때는 한 가지라도 좋으니 답을 찾아내 가슴에 새긴다.  때로는 억지나 오해도 있겠지만 최근에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원래 그런 억지나 오해들까지 쌓여서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르니, 이를 두려워하기보다 먼저 그 사람을 기억한다는 사실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p.265~p.266)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현상으로서만 기억할 뿐 그가(또는 그녀가) 이 세상에서 살다 갔으며, 그로 인해 그의(또는 그녀의)삶은 우리의 삶에 어떤 도움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사건이 그 자체로서 엄청난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의 삶을 살아 있는 우리로부터 분리시키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인공 시즈토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편협된 시각을 지적한다.  

 

"하지만 살아 있는 자들은 언어와 물건으로 사체를 장식하고, 그로 인해 고인에게 영원성을 부여하려고 하거나 그 인생에 점수를 매기려 해.  인간이 사는 이유는 사랑도 꿈도 아니야.  세포의 힘이지.  원생동물과 같은 세포의 탐욕스러운 생명력이 사람을 살아가게 한다고.  인간이라는 종을 존속시키기 위해 발달한 뇌가 이른바 부작용을 일으켜 짚신벌레 같다는 말을 들으면 부끄러워 하고, 사랑이나 일 때문에 사니, 신이나 부처님 같은 성스러운 존재 덕분에 사니, 하고 어리석은 핑계를 만들어낸 거지.  뉴스를 오 분만 보면 그런 변명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알 수 있어.  인간의 중심을 이루는 세포는 원하는 것을 뺏거나 빼앗기지 않도록 먼저 공격하는 쪽으로 작용해.  이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증명된 진리인데,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망상으로 도망쳐.  그럴듯하게 생을 포장하고 죽음을 장식해.  아마 개죽음을 두려워하는 거겠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죽음이 무의미하다는 것,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 원생동물의 죽음과 똑같은 것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두려운 거지."    (p.351~p.352)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사쿠야의 말이다.  소설에서 사쿠야는 자신의 아내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하고 아내인 나기 유키오는 그렇게 한다.  그의 아내 유키오가 4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후 주인공 시즈토와 동행할 때 사쿠야는 혼령이 되어 아내 유키오에게 등장한다.  삶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쿠야에게서는 허무주의 냄새가 난다.  그러나 그의 말은 곱씹어 볼 가치가 있다.

 

"당신이 태어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당신이 '애도하는 사람'이 된 데는 가족과 환경, 인생의 상처 등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만은 아니다.  당신도 분명 모른다.  그렇게 보였다.  당신을 '애도하는 사람'으로 만든 것은 이 세상에  넘쳐나는 죽은 이를 잊어가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차별당하거나 잊혀가는 것에 대한 분노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도 별 볼일 없는 사망자로 취급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세상에 만연한 이런 부담감이 쌓여서, 그리고 그것이 차고 넘쳐서 어떤 이를, 즉 당신을 '애도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당신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당신 말고도 '애도하는 사람'이 태어나 여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도 어떤 이유로 죽었건 차별하지 않고, 사랑과 감사에 관한 추억에 따라 가슴에 새기고, 그 인물이 살아있었음을 오래도록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이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그걸 원하니까...... 적어도 지금 난 당신을 찾고 있다.  만약 살아날 수 있다면 그 이야기를 할 텐데. 눈에 보이지 않아도,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아도, 꼭 '애도하는 사람' 이야기를 할 텐데."    (p.431~p.432)

 

소설 속의 또다른 주인공인 마키노의 말이다.  마키노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를 쓰는 악덕 기자로 나온다.  그의 기사는 조작도 서슴지 않는 옐로우 저널리즘의 전형이었지만 시즈토를 우연히 만난 후 그는 변하기 시작한다.  위에 적은 말은 그가 조직 폭력배에 의해 보복을 받고 죽음의 위험에 처했을 때 그가 한 말이다.  아무리 악한 인간도 죽음 앞에서는 삶의 의미와 사랑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시오도 변비가 더 신해져 고생하고 있었다.  모녀가 식탁에 앉아 변비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극히 일상적인 화장실 문제로 고민하는 서로의 모습에, 죽음에 관해서도 탄생에 관해서도 폼나게 말해봐야 소용없어.  인간도 생물이니까 동물이니까 하며 깔깔거렸다.  참 이상한 데서 마음이 통한다 싶었다."    (p.440)

 

(어쩌면 그날의 광경이 그 아이 마음에 새겨졌을지도 몰라.  주목받지 못한 죽음, 아무도 돌이켜 생각하지 않는 죽음이 있다는 현실을 알고, 죽음의 무게는 다르지 않은데 어째서!  하는 슬픔과 함께...... 그 일이 지금 그 아이에게 전국을 걷게 하고 있는 거라고 해도 좋을까.)

다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조부모의 죽음과 소아 병동 아이들의 죽음, 소중한 친구의 죽음...... 다만 어떤 사람의 죽음을 그 연유에 상관없이 똑같이 애도해야 한다는 생각은, 히로시마를 맞은편에 둔 이 모래사장에서 많은 피서객들의 웃는 얼굴에 둘러싸인 가운데 처음 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p.476)

 

위의 두 대목은 주인공 시즈토의 어머니이자 끝까지 시즈토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사카쓰키 준코의 말이다.  준코는 암 말기 환자로서 자신에게 남겨진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남편과 딸 미시오와 함께 집에서 지낸다.  시즈토의 여동생인 미시오는 남자친구의 아이를 임신한 채 버림을 받았다.  그녀의 오빠가 이상한 행동을 한다는 이유로.  준코는 임신한 딸의 모습을 지켜보며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과 닮았다고 느낀다.  삶과 죽음은 그렇게 이어지나 보다.

   

"인생의 본질은 어떻게 죽었나가 아니라, 사는 동안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사랑받고 어떤 일로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았는가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p.551)

 

죽음에서 간신히 살아난 마키노의 말이다.  어쩌면 이 책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말은 내 가슴에도 메아리처럼 남았다.  삶이 가득한 세상이다. 그림자처럼 죽음 또한 가득한 세상이다.  누군가는 살아 있는 자의 말이나 장식에 의해 화려하게 장식되고 기억되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는 죽음과 동시에 잊혀지기도 한다.  죽어서도 인간은 평등하지 못한 것이다.  그 쓸쓸함을 달래기에는 이 책 <애도하는 사람>이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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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나는 <나이듦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한 편의 페이퍼를 썼었다.  자본주의가 보편화된 현대 세계에서 늙는다는 것, 또는 나이든다는 것은 잊혀지고 감추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도 세월에 따라 늙어간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려 들지 않는다.  아직은 젊다고 자신할지라도 '곧', 정말로 '곧' 나이가 들고 신체의 변화를 감지하는 날이 오고야 만다.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하면 된다고?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 '느닷없음'에 당신도 나도 허망하게 무너질지도 모른다.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말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아빠라고 불러본 기억이 없다.  가족 모두에게 모질게 굴었던 당신의 탓이기도 하지만 내가 성인이 된 후에도 나의 아버지와 가슴을 열고 대화할 기회는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의 아버지는 일찍 찾아온 치매로 이제는 가족들과 화해할 수 있는 기회마저 영원히 닫아버렸다.  엄정한 세월을 이길 수는 없지만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바꿀 수는 있다. 늦지 않았다면 말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 책을 읽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떠나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 대해 조금쯤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를 흠모하고 그리워할 것이다.  나도 그렇다.  나는 그를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비록 니는 그와 마주한 적도, 그의 책을 여러 번 읽은 적도 없지만 단 한 번 읽었던 그의 책은 너무도 강렬하게 내 가슴에 남았다.  어린 시절을 소로와 함께 보냈다는 저자는 분명 행복한 사람일 듯하다.

 

 

 

 

 

 

 

 

오늘처럼 바람이 좋았던 날에는 한 뼘 시인의 글이 그리워진다. 엷게 흐려지는 여름의 색깔들과 먼 시선으로 바라보던 하늘. 무엇을 배우겠다는 의무감을 턱 하니 내려 놓고 편하게 읽을 책이 필요하다. 이 가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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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의 배신 - 습관처럼 야근하는 당신이 꼭 알아야 할 것
니시다 마사키 지음, 김세원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명절이면 나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유년시절의 추억을 끄집어내는 바람에 당혹해 했던 적이 몇 번 있다.  그럴 때마다 '어쩌면 저렇게 세세한 것들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혹시 다른 사람과 착각한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문득문득 들곤 했다.  그렇게 내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터져나오는 이야기들을 마땅히 제지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기분좋게 만난 자리이니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수도 없지 않은가.

 

그 중에서도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형과 함께 자취생활을 했던 내 중,고등학교 시절의 얘기인데 얼마나 자주 들었으면 나의 성장과정을 알 길 없는 조카들도 모두 기억할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 시절의 내 얘기는 횟수를 더할수록 사그라들기는커녕 때로는 더 부풀려지고 지금도 새로운 얘기가 샘솟듯 만들어지고 있는 듯하다.

 

학창시절의 나는 지독한 완벽주의자요, 중증의 활자 중독증 환자였다.  그렇게 된 데에는 기질적 성향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둘러싼 환경이 주원인인 듯하다.  부끄럽게도 나의 아버지는 하루도 술을 거르는 날이 없었고, 그렇게 술에 취해 귀가하면 많지도 않은 가제도구를 부수기도 하고 가족들에게도 폭언과 손찌검을 서슴지 않았다.  나는 이런 아버지를 피해, 친구네 집을 일없이 전전하며 밤늦도록 그들의 집에서 책을 읽곤 했다.

 

인사불성이 된 아버지에게 맞지 않으려면 아버지의 눈에 띄지 않는 게 상책이었고, 악에 받쳐 바락바락 대드는 엄마의 애처로운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 덕분에 친구들의 집에 있는 책이란 책은 모조리 다 읽게 되었다.  시골에서 자란 터라 친구들이 갖고 있는 책도 그 나이에 읽을 만한 책은 많지 않았고, 그런 연유로 나는 어른들이 읽는 어려운 책도 가리지 않고 읽어야 했다.

 

내가 자취를 하며 공부를 하던 형을 좇아 도시로 전학을 하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력에서 벗어난 것이 무엇보다 기뻤고, 다른 어려움쯤이야 기꺼운 마음으로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도시로 나와 처음 계획했던 일은 잠을 세 시간으로 줄이는 것이었다.  그동안 읽었던 책에서 얻은 지식을 기반으로 수면시간을 11시에서 새벽 2시까지로 한정하였다.  돌이켜보면 치기에 가까운 행동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정해놓은 규칙을 지키기 위해 지독하게 버텼다.

 

새벽에 일어나 책상 앞에 앉으면 웃풍이 심한 자취방은 냉기가 감돌았다.  어깨에 담요를 두르지 않으면 책을 읽기 어려웠고, 졸음을 쫓기 위하여 마당 한켠에 있던 수도를 틀어 차가운 수돗물에 한참씩이나 머리를 담그곤 했다.  지금도 큰형은 그랬던 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때는 동생인 내가 무서웠었다고 말하곤 한다.  새벽의 고요 속에서 한동안 책을 읽다가 정각 다섯 시만 되면 전기밥솥에 쌀을 앉히고 집을 나섰다.  한 시간 동안 운동을 하고 돌아오면 할 일이 많았다.  간단한 반찬을 준비하여 도시락을 싸고, 형을 깨워 아침을 먹었다.  가방을 챙기고 자전거로 등교를 하면 길었던 아침시간이 마무리되곤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런 생활은 계속되었다.  늘 상위권을 유지했던 성적과 부러움으로 가득 찬 친구들의 시선이 보답이라면 보답이었다.  '노력과 그에 대한 보상'이라는 긍정적인 피드백은 '어떤 불가능한 일도 내가 하면 가능한 일로 바꿀 수 있다.'는 오만함으로 이어졌고, 신이 있다면 신은 항상 내 편이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4년 장학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잠깐의 회사 생활을 거친 후 창업을 했다.  단 한 번의 실패도 경험하지 않았던 나에게 사업의 실패는 뼈저린 것이었다.  실패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조금 더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하는 미련이 발목을 잡았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만 가던 그때 나는 아내에게 심한 독설을 퍼붓기 일쑤였고, 산후 우울증을 앓고 있던 아내는 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책 <노력의 배신>은 '해로운 완벽주의자'의 전형이었던 나를 되돌아 보게 한 책이었다.  어떤 책이든 자신의 얘기를 가감없이 기록한 것이라면 읽는 내내 마음이 거북해지기 마련이다.  내가 그랬다.

 

"완벽주의자는 자신의 실력보다 높은 목표를 설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목표를 달성하기까지 엄청난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나친 인내는 화를 불러올 우려가 있다.  게다가 타인에게도 자신과 똑같은 인내와 참을성을 요구하게 되면 인간관계에 금이 갈 수도 있다."    (p.238)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잠시의 여유도 찾을 수 없었던 나로서는 대학교 앞의 커피숍에서 노닥거리는 학생들이나 당구장에서 시간을 죽이는 학생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마음속으로는 항상 '밥벌레'라고 그들을 비웃었다.  나의 아집과 독선은 결국 사업의 실패와 함께 누그러졌다.

    

삶은 누구에게나 변화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 변화가 좋은 방향이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멈출 수 없는 변화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현장에서 수많은 환자들을 상담해왔다는 저자는 그간의 임상 경험과 최신 학술지식을 통해 ‘노력을 멈추는 기술’을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그리고 '해로운 완벽주의자'가 '건전한 완벽주의자'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베스트 셀러 작가이자 영적 스승인 안젤름 그륀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신뢰하고 숨은 가능성을 발견하고, 당신의 삶에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라. 그러면 당신의 샘물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줄 것이다."라고.  내가 사업에 실패하기 전까지 나에게 했던 일련의 행동들은 어쩌면 나 자신에 대한 폭력이었을지도 모른다.  예전의 나와 같은 성향의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은 '나를 가혹하게 대하는 사람은 언제든 다른 사람에게도 가혹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사실을 늦은 나이에 실패와 시련을 통해 배웠다.  항상 되물어야 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인내인가?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것은 아닌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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