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월드시리즈 1차전이 있었던 날입니다.  관심이 있는 분은 익히 아시겠지만 보스턴 레드삭스가 세인트 루이스를 상대로 8대 1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제목에는 프리메라리가 소속의 유명 축구팀 써놓고 웬 야구 얘기냐구요?  아, 그렇군요. 제가 혹시 낚시글을 쓰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이 드신다면 읽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제가 여기에 쓰려는 얘기는 축구나 야구 얘기는 아니니까 말이죠.  다만 요즘의 제 관심사가 야구나 축구 등 스포츠에 쏠려 있는 관계로 제목을 그렇게 정했을 뿐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나요?  뉴스는 보면 볼수록 짜증만 나는지라 뉴스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지낸 지가 반 년 이상은 되었고, 맘에 드는 드라마도 없고, 그렇다고 특별히 보고 싶은 다큐멘터리도 없으니 관심은 주로 스프츠로 향하게 되더군요.  아무튼 따분한 시간이 지겹도록 오래 지속되는 듯하여 오늘은 낙서 삼아 소설 좀 써보려고 합니다.

 

#소설 1

 

프리메라리가 소속의 두 팀인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가 결승에서 맞붙었습니다.  리오넬 메시를 필두로 네이마르, 이니에스타 등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한 바르셀로나는 위협적인 호날두와 카시야스, 사비, 벤제마 등이 포진된 레알 마드리드와 붙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하여, 바르셀로나의 감독은 불안한 마음에 심판을 매수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매수된 심판은 경기를 바르셀로나에게 유리하도록 이끌었고, 결국 바르셀로나는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소설 2

이번에는 바르셀로나의 감독이 불법적으로 심판을 매수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심판으로 내정된 사람들이 모두 바르셀로나 감독과 친분이 있거나 우호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심은 숫제 바로셀로나 팀과 한편이 되어 같이 뛰기까지 했습니다.  패스도 하고 태클도 하면서 말이죠.  바르셀로나 팀은 결국 열한 명이 아닌 열두 명이 뛴 셈이죠.  팽팽하게 진행되던 경기는 결국 바르셀로나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경기를 지켜보았던 관중들은 당시에 뭔가 찜찜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결과가 달라질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약간의 의심도 희미해지는 듯하던 어느 날 바르셀로나 감독의 심판 매수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 팀의 열성 팬들은 "심판을 매수하기는 했지만 우리는 실력으로 이겼다."고 항변하는 감독을 적극 옹호했습니다.

 

소설 2에 대하여 바르셀로나의 감독은 일말의 부끄러움이나 죄의식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심판이 도와주지 않았어도 실력으로 이길 수 있었던 경기였다고만 주장하였죠.  그러므로 심판도 죄가 없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황당한 상황에서 그들의 주장이 맞다고 박수를 칠 수 있겠습니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민주주의는 스포츠와 같이 룰이 깨지면 모든 것이 깨지는 불안한 시스템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정의로운 법과 제도의 구축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죠.  그러나 완벽히 정의로운 제도는 아닐지라도 그동안 우리가 만들어 놓았던 룰이 지난 대선에서 깨졌다는 것을 스포츠 경기의 관중만도 못한 우리 국민들이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경기는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법에 대해 사과하기는커녕 실력으로 이겼다는 말만 여전히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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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얼굴 - 어느 늙은 비평가의 문학 이야기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지음, 김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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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가 고통스러운 것은 책읽기처럼 세계를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계가 책 속에서 이야기되는 것처럼 선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분명하지 않은 세계 속에서 분명하게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다만 방황할 따름이다.  그 방황을 단순히 지적 놀음이라고 폄하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근본적인 질문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나도 최인훈의 회색인에 가깝다.  나는 내 자신이 불행이고 결핍이다."    (김현, <책읽기의 괴로움>중에서)

 

책읽기에 대하여 언급한 문학평론가 '김현(본명 김광남)'의 말이다.  멋지지 않은가!  나는 김현 작가를 통하여 비로소 비평을 독자적인 문학의 한 장르로서 이해하게 되었다.  비평이 단순한 논쟁이나 악의적으로 폄훼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 또는 문학작품의 해설이나 소개쯤으로 알고 있던 나에게 김현 작가의 글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내가 문학평론에 매료될 수 있었던 데에는 전적으로 김현 작가의 도움이 컸다.  그러나 아쉽게도 1990년 48세의 젊은 나이로 그가 죽은 이후 나는 이렇다 할 평론집을 읽은 적이 없다.  책을 고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서평집은 간혹 읽은 기억이 있지만 그것은 그저 참고 도서에 불과했을 뿐 평론집으로서의 가치를 느껴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오늘 모처럼 좋은 문학평론집을 읽었다.  더불어 하나 덧붙이자면 이 책은 좋은 번역서이기도 하다.  나는 가끔 맘에 쏙 드는 책을 만났을 때 아이를 품에 안은 것처럼 행복해진다. 다들 그렇겠지만 나와 같은 평범한 독자들은 으레 작가의 이름 뒤에 숨겨진 '옮긴이'의 이름을 기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번역을 하는 사람에 따라 원서가 주는 감동이 달라질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은 작고하신 이윤기 작가 덕분이었다.  그러나 내가 관심을 두고 있던 책들은 대개 이름도 알지 못하는 번역가에 의해 번역되기 일쑤였고, 나는 어느 정도 번역서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여기에는 원서를 읽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나의 외국어 실력 탓에 번역본이 갖는 고질적인 병폐- 이를테면 번역 오류로 인한 이해 불가의 문장들-를 익히 알면서도 그 불만을 속으로만 삭일 뿐 육두문자를 곁들여 화를 내지는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 <작가의 얼굴>은 독일의 노비평가인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쓰고 김지선이 옮긴, 평론집으로서는 근래에 보기 드문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의 생소한 이름과는 달리 글은 술술 읽힌다.  평론이 갖는 딱딱함이나 현학적인 문체는 결코 찾아볼 수 없었다.  독일의 문학평론가로서 ‘문학의 교황’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는 저자는 독일인의 98퍼센트가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설문 결과가 보여주듯 꽤나 유명한 사람인가 보다. 

 

저자는 이 책 <작가의 얼굴>에서 스스로 수집한 작가들의 초상화를 한 점 한 점 소개하며 그들의 삶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놓는다.  이 책에는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평생 수집한 작가들의 초상화가 60점 넘게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40여 명의 작가들의 문학작품을 논하고 있다.  괴테와 하이네, 토마스 만과 브레히트 등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들과 더불어, 생소한 이름들도 다수 등장한다.  그들 중에는 유대인이 많다.  저자도 유대계 독일인이다.

 

게다가 올해 93세인 저자는 이 책에서 연륜이 묻어나는 깊이 있는 비평과 해박한 지식을 선보이고 있다.  평론으로서 당연히 득하여야 하는 '정직함'과 '명료함'을 바탕으로 저자는 이 책에 등장하는 어떤 작가, 어떤 작품에 대해서건 자신이 판단하는 것을 솔직하고 분명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때로는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논쟁적인 듯도 하여 저자가 거만하고 독선적인 인간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사게도 한다.

 

"하지만 많은 낭만주의 시들이 지닌 내면성이라는 게 나는 참 마음에 들지 않고, 아니 때로는 정말이지 넌더리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진부한 서정성과 태평스러운 목가시풍, 무아경의 자연 예찬과 괴이한 비합리주의, 과장된 열광과 도취, 그 모호함과 평온함.  이 모두가 어찌나 철없고 갑갑한지."    (p.73)

 

문학의 한 장르로서 평론이 필요한 이유는 간단하다.  문학작품과 독자 사이의 벌어진 간극에서 비롯되는 억측과 왜곡을 제거함으로써 둘 사이의 친밀을 도모하는 일이며, 나와 같은 일반 독자가 미처 알지 못했던 유망한 작가의 작품을 읽게 하는 것으로서 평론이 갖는 일차적인 임무를 달성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평론가는 객관성과는 거리가 먼,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지하여 작품을 해석하거나 어떤 유명 작가의 위세에 눌려 칭찬 일변도의 글을 쏟아내거나, 자신의 지식을 돋보이기 위하여 독자는 감히 안중에도 없이 현학적인 문체로 일관하는 등 평론가로서의 고귀한 의무를 망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책에서 저자가 보여준 평론으로서의 모범적인 글들을 일일이 열거하기는 어렵지만 '하인리히 뵐'에 대해 그가 평한 글은 특히 매력적이다.

 

"그는 전 세계가 인정하는 작가가 되었으나, 언제까지나 여전히 약자들의 형제요, 그들 중 하나였다.  혹은 이렇게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  그는 '보통 사람'이었다고 말이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군인이었던 뵐이 쾰른에 있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얼마 전 출판되어 그를 아끼는 많은 독자들과 팬들에게 당혹감과 나아가 실망감을 안겨주기까지 했다.  이 편지들이 우리가 몰랐던 그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미숙하고 때로 미련하며, 편협하고 간혹 국수주의적이며, 고지식하고, 걸핏하면 유순하게 체념하며 신에게 모든 걸 의탁해버리는 그런 청년의 모습을.  수백만 다른 독일 군인들처럼 그도 전쟁으로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흘러 명성이 까마득히 높아진 뒤에도, 여전히 그의 시선은 박해받고 고통받는 사람들, 짓밟히고 쫓겨난 인생들을 향해 있었다.  그랬다.  정말로 뵐은 늘 '보통 사람'의 자리에 머물렀다.  그리고 아마도 바로 그랬기에 그는 세계적인 작가로 우뚝 설 수 있었으리라."    (p.300~p.301)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은 많지 않았다.  나는 집 근처의 도서관에서 그의 저서 <사로잡힌 영혼>을 발견하여 그 자리에서 대출을 했다.  깨알 같은 글씨로 500여 쪽에 이르는 두툼한 책이다.  나는 이 책을 덤처럼 읽을 생각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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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희돌이 2013-11-11 13:44   좋아요 0 | URL
축하드립니다^^

꼼쥐 2013-11-13 13:24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운이 좋았던 듯해요.

블루버드 2013-12-06 13:42   좋아요 0 | URL
서평을 보니 사고 싶어지는 책이네요 ^^

꼼쥐 2013-12-06 16:40   좋아요 0 | URL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재미도 있을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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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가는 문 - 이와나미 소년문고를 말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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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학창 시절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부끄러움에 낯이 뜨거워지곤 한다.  도무지 심심할 틈이 없어 보이는 요즘의 아이들이 내 얘기를 들으면 '그게 뭐 부끄러워 할 얘기예요.  오히려 자랑스러워 할 이야기 아닌가요?'하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오히려 책에 빠져 살았던 학창 시절이 때로는 부끄럽게 여겨지니 말이다.

 

초등학교를 포함하여 중,고등학교 시절, 어쩌면 대학 시절까지의 내 삶은 책과 떨어져 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책이 전부였던 생활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어른들은 그런 나를 늘 대견해 했고, 자신의 아이들과 비교하며 부러워 하는 것이었다.  친구들의 시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미처 몰랐을 수도 있는 시시껄렁한 지식을 말할라치면 친구들은 모두 신기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곤 했으니 말이다.  그런 탓인지 나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졸업 이후에도 간혹) 줄곧 친구들의 고민 상담을 도맡아야 했었다.

 

무엇 하나 변변한 것 없이 가난하기만 했던 나였기에 누군가의 인정은 끊을 수 없는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시작이 무엇이었든 간에 나는 책에 더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의 고민을 상담할 때마다 괜스레 목이 뻣뻣해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 보면 '밥맛'이고 '왕재수'일 수도 있었던 나에게  보여준 친구들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는 또래 집단에서의 내 위치를 확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때 약간의 오만과 허세를 부렸을지도 모른다.

 

책을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로 그렇게 기고만장했던 내가 독서의 '무용론(無用論)'에 대하여 '그럴지도......'하면서 수긍 아닌 수긍을 하게 된 계기는 강원도의 한 사찰에서 만났던 스님 때문이었다.  스님은 내게 다짜고짜 정말 필요한 책이 아니면 독서를 자제하라고 권했다.  그 시간에 명상을 하거나 산책을 하는 것이 오히려 내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독서를 권하면 권했지 독서를 자제하라는 말은 여지껏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말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책을 고르는 데 어느 정도 신중을 기하게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에세이집 <책으로 가는 문>을 읽으며 나는 그때의 일을 생각했다.  나는 사실 누구로부터의 독서 지도를 받아 본 적이 없었고,  책을 살 돈도 없었으므로 눈에 띄는 책이면 가리지 않고 읽었었다.  이 책의 저자도 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부이자 세계인이 예찬하는 ‘상상력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책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가장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읽었던 세계 명작 50권을 소개하고 있다.  1부에서 저자는 추천한 책마다 짤막한 독후감을 덧붙여 놓았는데,『어린 왕자』 『삼총사』 『서유기』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책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저는 『이와나미 소년문고 50권』소책자를 쓸 때 한 독자를 염두에 두고 ㅆ섰습니다.  어느 초등학생 친구입니다.  그가 읽는다면 뜻이 전해지기를 바랐습니다.  실은 지금 그 소년을 상대로 싸우고 있습니다.  제가 책을 추천했거든요.  굉장한 집중력이 있는 아이인데, 초등학생이 되기 전에 제가 일하는 곳에 놀러 오곤 했습니다.   ---(중략)--- 그런 그 아이가 지금은 도서관의 책을 굉장한 기세로 닥치는 대로 읽고 있습니다.  건너뛰면서 대충 읽는 것이 아니라 내용도 제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설픈 것을 추천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이건 승부의 세계입니다."    (p.133)

 

2010년 이와나미 소년문고 창간 6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었다고 하는 이 책은 저자가 오랫동안 즐겨 읽어온 소년문고 가운데 손수 50권을 골라 세 달에 걸쳐 다시 읽으며 차분히 정리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의 2부에서 자신의 독서 체험을 소개하며 애니메이션 제작 현장에서 느끼는 독서 경험을 술회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심심할 틈이 없는 요즘의 세대에게도 책은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쇠퇴했다 해도 여전히 인쇄물이 쏟아지고, 강요하는 듯한 텔레비전과 게임과 만화가 아이들 영혼을 다 차지하고 있습니다.  비명 같은 음악도 흘러넘칩니다.  이만큼만이라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하며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 중이겠지요.  아무리 그렇게 해도 허사일 때가 올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p.156)

 

저자는 다가올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저자의 관점이 옳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기술이나 문명의 발달은 육체적 편리 이상을 제공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의 악영향에 대해 염려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여 원천적으로 생산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  인간의 영혼보다는 육체적 편리를 중시하는 시대가 바로 지금이다.  가까운 미래에 황무지와 같이 황폐화된 영혼의 소유자들이 우리가 사는 지구를 무법천지로 만드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면 지나친 기우일까? 

 

나의 아들도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편이다.  그럴 때 나는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떠올라 피식 웃곤 한다.  그렇다고 아내나 나나 '이 책 읽어라.  저 책 읽어라.'하고 간섭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내는 가뜩이나 나쁜 아들의 시력을 염려하여 책을 읽는 것을 가끔씩 말리는 편이다.  요즘 아들은 아르센 뤼팽의 소설에 빠져 있다.  저자가 말했 듯이 독서의 경험을 통해 아들도 자신에게 중요한  한 권의 책을 만날 수 있기를 나는 바라고 있다.

 

"책에는 효과 같은 게 없습니다.  '이제야 되돌아보니 효과가 있었구나'하고 알 뿐입니다.  그때 그 책이 자신에게 이러저러한 의미가 있었음을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것입니다."    (p.141)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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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고상미 그림, 봉현선 옮김 / 혜원출판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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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부터 피어 오른 하얀 구름이 마치 길게 늘인 목화솜처럼, 혹은 골목마다 자욱이 내뿜고 달리던 연막 소독차의 부연 연기처럼 코발트빛 가을하늘을 휘감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하늘이다.  어학 연수 시절 퍼스의 퀸 파크에서 바라보던 하늘도 오늘과 비슷했었다.

 

호주 시드니에서 어학 연수를 시작한 지 두 달쯤 지났을 무렵 대학 동기인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어학 연수차 퍼스에 갈 거라고.  시드니 외곽에서 자취를 하던 나는 그 연락을 받자마자 친구를 만날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나는 그때 통학용으로 구입한 1980년식 닛산 사파리를 타고 호주 남해안을 돌아 퍼스까지 갈 생각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다소 엉뚱하고 미친 짓에 가까운 모험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먼 거리를 차로 달린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호주 지리도 모르는 이방인이 낡은 중고 자동차를 타고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더더욱 그랬다.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떠난 여행이 순조로울 리 없었다.  죽을 고생을 하여 나는 간신히 퍼스에 도착하였고, 친구와 함께 호주 서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내가 살아 돌아온 것도 따지고 보면 천지신명의 도움이 컸다고 하겠다.  그 여행길에 가지고 갔던 휴대품 속에 짐짝처럼 실려 있던 책이 바로 <위대한 개츠비>였다.  물론 호주에서 구입한 원서였다.  나는 어쩌면 소설 속의 개츠비처럼 여유롭고 낭만적인 여행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개츠비가 닉에게 했던 말처럼.

 

"그 후로 나는 유럽을 돌아다니며 인도의 왕자 같은 생활을 했지요.  파리, 베니스, 로마 등지에서 말입니다.  주로 보석을 수집하고, 사냥도 즐기고, 가끔 그림도 그렸습니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그림은 아닙니다.  그저 혼자 심심풀이로 그린 것이니까요.  그렇게 지내면서 오래 된 슬픈 기억을 떨쳐 버리려고 노력했지요."    (p.118)

 

물론 나는 보석을 수집한 것도, 사냥을 즐긴 것도, 그렇다고 그림을 그린 것도 아니다.  털털거리는 차가 제발 퍼스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을 뿐이다.  5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데이지를 잊지 못하는 소설 속의 개츠비처럼 그 친구에 대한 나의 우정이 열렬했던 것도 물론 아니다.  나는 그저 먼 이국땅에서 나와 인연이 있는 자국민을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마침내 친구를 만났고, 개츠비가 데이지와 재회한 심정을 이해했다.

 

"그는 두 단계를 지나서 새로운 세 번째 단계로 접어들고 있음이 분명했다.  당황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쁨을 거쳐 이제는 데이지가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사실로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그는 오늘 일을 머리 속으로 치밀하게 계획해 왔고,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인내력으로 참고 기다렸던 것이다.  그는 끝까지 감은 시계의 태엽처럼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    (p.165)

 

그랬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내가 달려온 길을 친구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친구를 만남으로써 그 팽팽했던 긴장감에서 비로소 서서히 풀어질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오늘처럼 푸르렀던 퍼스의 하늘을 보며 친구에게 내 속내를 털어놓았다.  내가 대학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굳이 먼 타국으로의 어학 연수를 결심했던 이유를.  그것도 대학 기간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며 소중히 모아 두었던 돈을 모두 털어 호주로 향하게 된 특별한 이유를.

 

나는 대학 신입생 시절에 만났던 한 여인의 사랑 고백에 무척 당황했었고, 빈털털이에 가까운 나의 집안 환경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던 그 여인의 집안을 비교했었고, 혹시나 찾아올지 모르는 실연의 고통을 두려워 했었다.  어쩌면 나는 결국은 손에 넣지 못할 동경하는 대상에게 내 욕심만으로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진지하게 의심했었을 것이다.  마치 개츠비의 환상처럼 말이다.  그때 내 얘기를 듣고 친구는 나에게 어떤 조언을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무심히 하늘을 보고 있었는지도......

 

"5년만의 만남!  이 재회의 순간에도 데이지가 그의 꿈을 깨뜨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잘못은 아니다.  그 동안 너무나 간절했던 개츠비의 환상 때문이다.  환상이 그녀의 현실을 뛰어넘고, 또 모든 것을 훌쩍 뛰어넘었을 것이다.  그는 창조적인 열정과 집착으로 환상을 키워왔고, 그러면서 찬란한 깃털로 환상을 장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뜨거운 정열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아무리 지순한 순정을 지니고 있었다 해도 남자가 가슴 속에서 키워 온 환상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p.173)

 

내가 도망치듯 호주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 나는 그녀의 사랑 고백을 끝끝내 수용하지 않았던 내 자신에 대해 자책하며 한편으로는 아쉬움과 더불어 약간의 후회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둠이 깔린 시드니 공항에 내렸을 때 나는 비로소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를 실감했었다.  나는 결국 그녀도 소설 속의 데이지처럼 '결국은 모두 흙으로 돌아갈 사람들이 서로 아웅다웅하며 경쟁을 하는' 가난한 환경의 사람들만이 갖는 강한 생활력에 두려움을 느낄 것이며, 언젠가 나에 대한 사랑이 식어갈 때면 그 두려움은 곧 나에 대한 원망으로 변할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나는 그렇게 내가 내린 결정에 일말의 위로를 한 셈이다.  나는 어쩌면 서른 살이 가까워 오는 그 시점에 소설 속의 주인공 닉의 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서른 살 - 그것은 독신 남자가 알아야 할 일을 적어 넣는 목록이 점차 줄어들고, 정열의 부피도 줄어들고, 머리숱도 눈에 띄게 줄어들 고독한 10년을 예고하는 나이다.  하지만 내 곁에는 조던이 있었다.  그녀는 데이지와는 달리 총명해서 쉽게 떨쳐 버릴 수 있는 일을 두고두고 곱씹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는 여자였다.  차가 어두운 다리 위로 들어서자 그녀는 창백한 얼굴을 내 어깨 위로 천천히 기댔다."    (p.250)

 

'많은 남자들이 데이지 때문에 열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벅차게 했다.'는 사실에서 보듯 어쩌면 개츠비는 누구나 원하는 어떤 대상을 동경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돈이 젊음과 신비를 지켜 주는 위대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개츠비처럼 나 또한 돈에 집착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개츠비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가난한 청년의 고뇌와는 멀리 떨어져서 은처럼 빛나는 존재'가 데이지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달았던 것처럼 나는 한국에 두고온 그녀를 그렇게 느꼈는지도 몰랐다.         

 

그때 보았던 하늘처럼, 오늘 하늘은 하얀 구름에 휩싸인 채 먼 과거로 유영하고 있었고, 나는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본을 읽으며 퍼스에서 만난 친구를 생각하였다.  '우리는 물살에 휩쓸려 가면서도 계속 노를 저어 과거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주 빠르게, 때로는 아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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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국의 딸들 - 나남창작선 29 나남신서 105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박경리의 소설『김약국의 딸들』이 생각날 즈음이면 가을은 벌써 생기를 잃고, 발랄함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태평한 고독 속에서 늦가을의 소슬한 추위를 맞이하곤 했다.  쇠락해가는 녹음과 서서히 스러지는 한낮의 열기를 감안하면 인생의 여름은 마냥 더딘 것이지만 박경리 작가가 이 소설에서 그려낸 삶의 궤적은 마치 순간인 양 허망한 것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박경리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이 거의 끝나가는 무렵이었다.  어느 하숙생이 버리고 간 한 무더기의 책더미 속에는 시시껄렁한 무협지 몇 질과 박경리 작가의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이 섞여 있었고, 나는 그때 무슨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신나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우리집에는 읽을 만한 책이라고는 단 한 권도 없었던지라 내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반가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유난히 추웠던 그 해의 겨울방학에 나는 이 책을 아껴가며 야금야금 읽었었다.  마치 처음으로 받았던 종합선물세트의 과자를 빼먹듯 말이다.

 

그러나 『김약국의 딸들』은 어린 내가 읽고 이해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책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손에서 책을 놓지 못했다.  그 이유는 딱 하나였지 싶다.  소설 속에서 몰락해가는 김약국 가문이 누군가에 의해 '짠'하고 다시 일어서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바로 그것이었다.  미약하게나마 김약국의 딸들 중에서는 가장 똑똑하고 공부도 많이 한 '용빈'이 바로 그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나는 이제나저제나 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었다.

 

그러나 몰락해가는 김약국 가문이 '용빈'에 의해 다시 일어서는 장면은 끝끝내 찾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손끝 야물고 성실한 용옥마저 아이와 함께 죽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삶의 아득함을 넘어 공허감이 몰려왔다.  어쩌면 그것은 삶의 균질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앞으로의 내 삶도 혹시, 아무도 찾지 못하는 성긴 공간에 위치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이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용빈은 용옥이 행복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용옥이 결혼한 후 더욱 광신적으로 기독교에 기울어지는 것으로도 능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메마른 얼굴, 빛을 잃은 눈동자, 용빈은 가엾은 동생을 위하여 남몰래 간혹 근심을 하기는 했으나, 여러 가지 격심한 사건의 연속 속에 용옥의 존재는 그다지 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용빈은 그것을 생각하니 더욱 감슴이 아팠다.  그야말로 용빈의 마음은 억만 군졸이 짓밟고 지나간 형상이었다."    (p.363)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김약국의 딸들』이 내게 던져준 삶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나는 그때 소설 속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운명'이라는 강력한 힘에 넋놓고 끌려가는 듯한 인상을 받았었다.  비록 삶을 관조하기에는 이른 나이였지만 알 수 없는 삶의 굴레에 진저리를 쳤었다.  휑한 바람이 가슴을 통과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면 뭔가 합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어쩌면 내가 청소년기의 어린 나이에 철학에 빠져든 까닭도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살아갈 이유, 운명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바로 그것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의 허무와 공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존주의 철학에 매달렸었다.

 

그때의 내 나이가 된 아들과 통화를 한 후, 나는 박경리의 소설『김약국의 딸들』을 다시 읽었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와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운명' 앞에서 한없이 주눅들게 했던 그때의 작가는 이제 가고 없다.  잔인하리만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었던 박경리 작가.  '우리의 잔혹한 현대사는 한 작가를 키워내기 위해 그녀의 가슴에 모진 발자국을 차근차근 새겼고 그 멍자국 속에서 그녀는 문학이라는 푸른 생명의 나무를 키워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던 공지영 작가의 추모사가 생각난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고 노래했던 폴 발레리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늦가을의 하루가 또 고요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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