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고교 동창들과의 조촐한 송년회가 있었습니다.  하루 걸러 송년 모임이 잡혀 있다고 다들 손사래를 칩니다.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나이가 들면서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모임은 하나둘 늘어만 가고, 그렇게 가입된 모임마다 모두 참석하려면 한 달로는 어림도 없을 듯싶습니다.  그래도 요즘은 예전보다는 형편이 좀 나은 편입니다.  경기가 좋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건강이 좋지 않아서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밝히기 어려운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인지 다들 1, 2차에서 헤어지자는 분위기입니다.

 

아무튼 마지 못해 참석하는 자리가 있는가 하면 어제처럼 기꺼이 참석하는 자리도 있게 마련이지요.  이것저것 눈치 보지 않고 자기 속내를 털어놓아도, 술에 취해 조금쯤 실수를 하더라도 다 이해하고 덮어줄 수 있는 자리는 제 경우에도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게다가 술을 한 잔도 못하는 저로서는 송년 모임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닙니다.  그나마 친구들은 저를 위해 매번 술대신 음료수를 시키곤 합니다.

 

친구들도 이제는 중년의 전형적인 아저씨 포스를 닮아가는 듯 보였습니다.  주름도 늘고, 배도 나오고, 머리도 희끗희끗해지고...  그럼에도 나이를 잊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은 동창 모임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대화의 주제는 일정합니다.  학창시절의 추억과 세상 살기의 어려움과 서로의 건강과 아이들의 교육 문제 등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어제는 고등학교 1학년 아들을 둔 친구의 고민을 듣고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들 한번쯤은 듣고 고민하는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친구의 고민을 간략하게 옮겨보면 이랬습니다.  친구는 자신의 아들을 교육함에 있어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지 말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남들이 뭐라 하든 끝까지 밀고 나갔다고 합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과외는 물론 학원도 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맞벌이를 하는 그들 부부는 아이만 행복하면 되는 줄 알았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하니 여간 후회되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뭐가 문제였을까요?  아이는 비록 공부는 못하지만 다른 수험생들처럼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 같지도 않고, 그만하면 아이는 잘 자란 듯 싶은데 말이죠.  대다수의 교육 전문가나 정신과 전문의, 또는 성직자들로부터 흔하게 들어왔고 그렇게 믿고 실천했던 사람들.  그러나 자신의 자식들이 행복하게, 그렇지만 공부도 잘하는 아이로 성장하기를 바랐던 그들의 염원은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다른 아이와 비교하지 않는 데서 오는 행복은 부모에게도, 아이에게도 중학교까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대학 입시를 코앞에 둔 고등학생의 아이는 자신과 친구들의 학습능력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고, 그 현격한 격차를 인식하는 것과 동시에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아이와 부모는 모두 불행한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결과에 이른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이 스스로 자기 객관화에 실패한 것도 한 이유가 되겠고, 시간이라는 유한정성을 간과한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상대적 기준이 아닌 절대적 기준에 의해 스스로를 평가하려면 그 기준과 실천의 근거가 명확해야 합니다.  예컨대 하루에 몇 시간을 공부할 것인지, 나는 얼마나 그 목표를 달성하였고 그 발달 정도가 꾸준히 향상되고 있는지 스스로 판단하고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자기검증을 위한 기준이 명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절대적 평가는 오히려 상대적 평가보다 더 어려운 것도 같습니다.  자기 합리화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아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오히려 요즘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자기 합리화를 잘하는 듯 보이더군요.  늘 나태하게 보내면서도 자신은 열심히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고 어느 순간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이 열심히 하고 있다고 확신에 차서 말하곤 합니다.

 

시간의 유한정성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고 자신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은 인생 전체를 계획하는 데는 적합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한정된 단기 목표에 있어서는 잘 들어맞지도, 적합하지도 않은 듯 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일찍 시동이 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늦게 시동이 걸리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니까요.  가령 내 아이가 공부의 필요성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가정할 때, 아이는 공부에 몰입하기보다는 허송세월한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와 자신보다 앞선 친구들을 보면서 좌절하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자기 객관화에 실패한 아이들 대부분은 국어 성적이 형편없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국어는 절대적으로 자기 개관화가 필요한 과목이니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것을 선택해야지 자신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한다면 낮은 점수를 받을 수밖에요.

 

저는 친구의 고민을 들으면서 우리나라의 교육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 생각했습니다.  초등학생인 제 아들 녀석을 보란 듯이 키울 자신도 없습니다.  아이가 부모의 뜻에 맞춰 성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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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이 춤이 된다면 - 일상을 깨우는 바로 그 순간의 기록들
조던 매터 지음, 이선혜.김은주 옮김 / 시공아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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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추는 시간입니다. 그보다 더 황홀한 순간은 춤추는 나 자신이 사라지고 오직 춤만이 남는 순간이지요. 나는 그 순간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러시아 출신의 전설적인 무용수 바츨라프 니진스키가 했던 말이다.  그는 "당신의 삶에서 최고의 순간은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었던 것이다.

 

조던 매터의 사진집 <우리 삶이 춤이 된다면>을 보면서 나는 문득 니진스키를 떠올렸다.  무용수들의 홍보용 사진으로 시작되었다는 이 프로젝트는 일상의 공간과 무용수를 결합함으로써 열정으로 가득찬 우리 삶의 모습을 예술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아들 허드슨이 장난감 버스를 가지고 노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 사진집을 만들어야겠다는 영감을 얻었다는 작가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처럼 독자들도 크든 작든 매 순간을 즐기고, 우리를 둘러싼 아름다움에 눈을 떠 활기 넘치는 삶을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듯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이러한 열정, 이러한 능력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이러한 천진무구한 경험은 왜 그리도 쉽게 냉소와 권태, 무관심에 자리를 빼앗기는 것일까?  나는 아이와 노는 동안, 내 아들의 눈에 투영된 세상을 보여 주는 사진 작품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상 속에서 활기찬 모습을 보여 주는 사람들을 작품에 담기로 마음먹었다."    (p.8) 

 

Dreaming, Loving, Playing, Exploring, Grieving, Working, Living 등 일상을 구성하는 7가지 키워드에 의해 분류된 사진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익숙한 풍경에 무용수의 춤동작이 더해져 '와!'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게 한다.  트램펄린이나 포토샵의 도움 없이 오로지 무용수의 신체만으로 정직하게 만들어진 사진들은 마치 무중력의 우주를 떠올리게도 하고, 하늘로 도약한 무용수들이 혹시 다치지나 않았을까 하는 염려를 아니 할 수 없도록 만든다.  1000분의 1초의 타이밍이 아니면 결코 탄생할 수 없는 여러 사진들이 틀에 갇힌 우리의 상상력을 먼 우주까지 확장시키는 듯하다.

 

학창시절 프로 야구 선수가 꿈이었던 작가는 연습벌레 야구 선수였다고 한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배우가 되려고도 했었던 그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에 매혹되어 결국 사진 작가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의 다양한 경험과 지난 날의 꿈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의 작품 속에서 살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뛰어난 연출과 무한한 상상력은 그의 이력과 결코 무관치 않을 것이다.

 

서핑을 즐기러 바다로 향하는 남자, 다이아몬드 야구장에서 신나게 응원을 하는 여자, 거리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악사, 방금 타고 온 지하철에서 내려 기대에 들뜬 채 낯선 곳으로 달려가는 남자, 변기에 얼굴을 박고 괴로워하는 취객, 시계를 보며 횡단보도를 나는 듯 달리는 출근객, 보드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는 어느 청년 등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찰나의 순간들이 작가에게는 강렬한 에너지로 포착되고 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자신의 사진과 함께 삶의 이력을 담담히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사진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성인인 우리들은 성숙함과 극기심을 혼동하고는 한다.  결국 슬픔을 발산할 기회를 잃고 마는 것이다.  어른이 놓은 수많은 덫 가운데에서 가장 파괴력이 강한 것은 슬픔이 우리를 찾아올 때 '기운을 차리고 그 감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믿음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고통을 느낄 시간을 가져야 한다.  고통을 피해서 달아나려 하지 말고 슬픔에 몸을 내맡기도록 하자."     .(p.134)

 

이 책의 표지에 실린 <빗속의 댄서>, 즉 비 오는 거리에서 빨간 우산을 들고 가볍게 공중으로 뛰어오른 빨간 외투 차림의 여자는 책이 출간되기 훨씬 전부터 전 세계의 블로거들 사이에서 유명해졌었지만 작가는 이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는 메이시스 백화점Macy's 앞을 촬영 장소로 골랐다.  안마리아는 퍼붓는 빗속에서 하이힐을 신은 채 삼십 분 동안 도움닫기 멀리뛰기를 마흔다섯 번이나 했다.  이 사진은 프로젝트의 첫 작품들 중 하나였고, 경험이 부족했던 나는 촬영 당시에 이러한 상황에서 점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예상하지 못했다."    (p.223)

 

우리 민족만큼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민족이 또 있을까.  '남는 건 사진밖에 없어.'라는 말을 나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들었다.  여행지에서, 졸업식장에서, 결혼식장에서, 팔순잔치의 연회장에서...  우리가 찍고 간직했던 수많은 사진들이 삶의 열정으로 되살아나기를, 그리고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던 그 사람들이 다들 잘 지내기를 조던 매터의 사진집을 넘기면서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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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산이 울렸다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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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너 그런 거 알아?  좋은 음악을 듣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곁에 있는 누군가를 붙잡고 나의 행복한 느낌에 대해 한나절 자랑을 늘어놓고 싶은 심정 말이야.  그래, 때로는 약간의 과장된 몸짓을 섞을 수도 있겠지.  만약 내 얘기를 듣는 상대방이 나의 느낌에 격하게 반응한다면 아마 더없이 좋을 거야.  어쩌면 내 수다는 한나절이 아니라 날밤을 샐 때까지 계속될지도 모르지.  마치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풋내기 청춘처럼 말이야.

 

나는 오늘 딱 그런 심정이야.  맘에 쏙 드는 그런 책을 만났거든.  할레드 호세이니라고 너도 들어봤을 거야.  못 들어봤다고?  <천 개의 찬란한 태양>과 <연을 쫓는 아이>를 썼던 그 작가 말이야.  읽지는 않았지만 제목은 들었다고?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워낙 책을 싫어하는 너로서는.  맞아.  우리나라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지.  네가 기억할 정도면 아마 우리나라 국민의 반 이상이 적어도 책의 제목은 들어봤을 거야.  최근에 그 작가가 새로운 작품을 냈거든.  난 오늘 그 작품에 대해 얘기하려고 해.  그렇게 노골적으로 뚱한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어.  너도 들어보면 좋아할 테니까.

 

음, 무슨 얘기부터 시작해야 할까?  아, 그래.  할레드 호세이니의 작품에서 느꼈던 내 느낌부터 말하는 게 좋겠어.  뭐랄까?  내 생각에 그는 작품을 쓸 때 잉크대신 암청색의 짙은 슬픔을 듬뿍 찍어 글을 쓰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곤 해.  책을 읽으면 그다지 슬픈 내용도 아닌데 난 금세 슬퍼지곤 하거든.  나만 그렇다고?  그럴지도......  아프카니스탄 카불에서 태어나 지금은 미국에서 의사로 지내는 그가 내면에 그런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을 품고 있다는 건 아이러니이긴 해.  몇 대목 읽어줄 테니까 들어볼래?

      

"아버지는 딱딱했다.  그의 눈은 똑같은 세상을 바라보았지만, 무관심밖에 보지 못했다.  끝이 없는 고생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세계는 비정했다.  좋은 건 아무것도 공짜가 아니었다.  사랑마저도 그랬다.  모든 것에 값을 지불해야 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고통이 화폐였다."    (p.42)

 

"그녀가 잔인하다거나 무정했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마르코스 씨, 나는 오래 살았습니다.  내가 오래 살면서 알게 된 것 하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판단할 때는 겸손하고 측은히 여기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p.158)

 

"나는 반세기가 넘게 술레이만을 보살폈습니다.  나의 하루하루는 그와의 교류와 그가 뭘 필요로 하느냐에 따라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든 걸 자유롭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자, 그 자유가 환영처럼 느껴졌습니다.  내가 원했던 것이 대부분, 나한테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목적을 찾고 그걸 위해 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삶에 목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은 삶을 살고 나서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이라는 것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 나는 그걸 다 이뤘으니, 목적도 없어지고 어찌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p.184)

 

어때?  그닥 슬프지 않다고?  그럴 수도 있겠지.  이 책은 570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이니까 그 일부를 읽고 판단하기는 어려울 거야.  더구나 너는 작가가 쓴 다른 작품도 읽어보지 않했으니 그렇게 느끼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라.  나는 가끔 할레드 호세이니처럼 처연한 슬픔이 묻어나는 이런 작품을 쓰는 작가를 만날 때면 그 사람이 처음부터 남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감정을 안고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어쭙잖은 운명론자 같지?

 

너무 보채지 마.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책의 내용을 말하려던 참이야.  네 표정을 보니 조금 지루해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사실 네가 바라는 것처럼 아주 긴 애기를 짧고 간결하게 말할 자신이 없어.  더구나 너는 몹시 지루한 표정인데 말이야.  어떻게 하면 너의 흥미를 잃게 하지 않으면서 책의 내용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을까?  자신은 없지만 아무튼 시작해보자.  1952년의 아프가니스탄. 압둘라와 여동생 파리는 아버지, 새어머니와 함께 작은 마을 샤드바그에 살고 있었어. 날품을 팔아 근근이 살아가는 아버지 사부르는 끊임없이 일자리를 찾아야 했고, 그들 가족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했지.  친엄마를 잃은 압둘라와 파리. 요정이라는 뜻을 지닌 여동생 파리는 그때부터 압둘라의 모든 것이었던 듯했어.  깃털을 좋아했던 파리를 위해 공작깃털과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신발을 맞바꾸기까지 했으니 말이야.  파리에게 압둘라는 오빠라기 보다는 부모였던 거야.

 

어느 날 압둘라와 파리 남매는 아버지와 사막을 건너 카불로 향하고, 그때까지 남매는 그것이 평생의 이별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이 소설은 큰 틀에서는 두 남매의 이별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그들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를 소설 속에 담고 있어.  쌍둥이로 태어나 불행한 삶을 살았던 압둘라의 새어머니 파르와나와 쌍둥이 언니 마수마의 이야기, 파르와나의 오빠로, 부잣집에서 일하는 나비와 그가 사랑하는 여주인 닐라, 나비가 평생을 돌보았던 닐라의 남편 술레이만의 이야기, 미국으로 이민 가서 의사가 되어 안주하는 이드리스와 사촌 동생 티무르의 이야기, 프랑스 혈통을 가진 진보적인 여류 시인인 닐라와 그녀의 양녀인 파리가 술레이만과 헤어져 프랑스에 정착하여 살았던 길고 지난한 삶,  압둘라와 파리가 어릴 적 살았던 샤드바그의 과수원에 대저택을 짓고 부유하게 살아가는 타락한 전쟁 영웅과 그의 아들 아델 이야기, 전쟁이 끝난 후의 카불에서 구호반원으로 활약하는 그리스인 성형외과 의사 마르코스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어릴 적 개에게 물려 불행한 삶을 살아야만 했던 탈리아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노년에 극적으로 재회한 압둘라와 파리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지. 흥미로운 것은 각각의 인생 이야기가 문학에서 다룰 수 있는 다양한 형식으로 기술되어 결코 지루하지 않다는 거야.  때로는 회상의 형식으로, 때로는 유언장과 같은 편지의 형식으로.

 

나는 그 중 나비가 마르코스씨에게 남겼던 편지 형식의 인생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어.  압둘라의 새어머니 파르와나의 오빠인 나비는 카불의 부잣집에서 요리사 겸 운전기사로 일하게 되지.  그가 주인으로 모셨던 술레이만은 처음부터 나비를 좋아했었어.  그래, 맞아.  술레이만은 동성애자였던 거야.  둘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이 있었지만 술레이만은 나비의 일상을 지켜보며 그의 모습 하나하나를 그림으로 남겨.  어느 날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그의 부인이었던 닐라와 양녀 파리가 프랑스로 떠나고 집에는 이제 나비와 술레이만만 남게 되지.  나비가 짝사랑하던 닐라가 떠난 후 술레이만이 자신을 그렸던 스케치북을 발견한 나비는 술레이만을 떠나려고 결심도 했었지만 결국 그는 술레이만이 죽을 때까지 곁을 지키고 마지막 순간에는 술레이만을 꼭 안아주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돼.  그 내밀한 이야기를 나비는 그의 집에서 구호활동을 하며 친해졌던 마르코스에게 편지로 남긴 거지. 
   

"술레이만은 나한테 결혼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인생을 돌아보면서 내가 어쩌면 사람들이 결혼에서 찾는 것을 이미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걸 깨닫고 있었습니다.  나한테는 편안함과 벗, 그리고 나를 언제나 환영하고 사랑하고 필요로 하는 집이 있었습니다."    (p.174)

 

"나는 반세기가 넘게 술레이만을 보살폈습니다.  나의 하루하루는 그와의 교류와 그가 뭘 필요로 하느냐에 따라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든 걸 자유롭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자, 그 자유가 환영처럼 느껴졌습니다.  내가 원했던 것이 대부분, 나한테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목적을 찾고 그걸 위해 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삶에 목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은 삶을 살고 나서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이라는 것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 나는 그걸 다 이뤘으니, 목적도 없어지고 어찌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p.184)

 

나비는 그가 짝사랑했던 닐라가 프랑스에서 자살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술레이만이 자신에게 물려준 유산을 주인집의 양녀이자 자신의 조카인 파리에게 전해달라고 마르코스씨에게 부탁하지.

 

"나는 그녀가 자살했다는 걸 알고 그다지 놀라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제 압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사랑을 하는 것처럼 불행을 느낀다는 걸 말입니다.  은밀하고 강렬하게,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고서."    (p.188)

 

프랑스에서 공부하여 수학자가 된 파리는 그녀 자신이 양녀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자랐어.  닐라가 그녀의 친어머니라고만 생각했던 거지.  닐라가 죽고, 그녀의 외삼촌인 나비마저 죽은 후 마르코스씨로부터 연락을 받고서야 그녀는 자신의 지워진 어린 시절을 찾으려고 해.  닐라가 죽은 후 파리가 했던 그녀의 독백은 내 가슴에서 오래도록 맴돌았던 것 같아.

 

"어머니, 당신의 자궁에서 잉태되고 자라면서 나는 뭐가 되어야 했나요?  희망의 씨엇이었나요?  당신이 어둠의 늪을 건너기 위해 구입한 표였나요?  당신의 가슴에 난 구멍에 댈 헝겊 조각이었나요?  그렇다면 내가 충분하지 못했죠.  충분 근처에도 못 미쳤죠.  나는 당신의 고통에 대한 진통제도 못 되었고 또 다른 막다른 골목이자 짐이었을 뿐이죠.  당신은 그걸 일찍부터 알아차렸던 게 분명해요.  그러나 당신이 뭘 할 수 있었겠어요?  전당포에 가서 나를 팔아버릴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p.310)

 

어때?  이제 이 소설에 조금쯤 흥미가 생기지? 내친 김에 마르코스의 이야기도 들려줄까?  음... 마르코스는 그리스 태생이야.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자랐어.  어머니에게는 어려서부터 절친했던 친구가 있었지.  둘은 사이가 너무 좋아서 성인이 되어 결혼한 후에도 곁에서 같이 살자고 굳게 약속했었어.  그러나 배우가 된 어머니의 친구는 개에게 물려 얼굴이 흉하게 된 딸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떠나.  그 애가 아까 말했던 탈리아야.  탈리아는 마르코스와 한 집에서 자란 셈이지.  누이처럼 말이야.  NGO활동을 하며 이곳저곳을 떠도는 마르코스를 대신해 탈리아가 어머니를 돌보기도 해.  마르코스는 사실 탈리아 때문에 성형외과 의사가 된 거야. 

 

"나는 오랜 세월이 흘러, 성형외과 의사로 실습을 시작할 때, 그날 부엌에서 탈리아에게 티노스를 떠나 기숙학교에 들어가라고 할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세상은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않으며, 살과 뼈에 가려진 희망과 꿈과 슬픔에 대해서는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걸 배우게 되었다.  그것은 그처럼 단순하고 불합리하고 잔인했다.  나의 환자들은 이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현재와 미래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그들의 골상의 좌우대칭, 눈 사이의 간격, 턱의 길이, 코끝이 이상적인 비전두각에 따라 정해지는지 알았다.  아름다움은 임의로, 어리석게 그냥 주어지는 엄청난 선물이다."    (p.464)

 

"나는 지금, 쉰여섯 살이다.  나는 그 말을 들으려고 평생을 기다렸다.  너무 늦은 걸까?  우리에게는 너무 늦은 걸까?  우리는, 어머니와 나는 너무 오랫동안 유랑했던 걸까?  나의 일부는 우리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살아가고, 우리가 얼마나 서로한테 안 맞는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덜 고통스러울지 모른다.  때늦은 말보다는 어쩌면 그게 더 나을지 모른다.  우리 사이에 가능할 수 있었을 것에 대한 어렴풋한 감지.  가슴 떨리는 감지.  그것은 회한만을 가져올 뿐이다.  회한이 무슨 소용인가?  그것은 /아무것도 되돌려주지 않는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되찾을 수 없다."    (p.485~486)

 

이제 내 얘기를 마칠 때가 된 것 같아.  조금 길었지?  하지만 네가 이 소설에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뻐.  그나저나 작가는 의사인데 뭐하러 소설을 쓰느냐구?  글쎄, 내 생각에 그는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너무나 많을지도 모르지.  가슴 속에서 흘러 넘치는 애기들을 아마 주체할 수 없었을 거야.  독자들에겐 더없이 반가운 일이지만 그는 꽤나 힘들지 않았을까?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할 길은 없다.  가령 이 순간이 그렇다.  내 어머니와 내가 오랜 세월 동안 같이했던 수많은 순간 중에서, 가장 빛나기도 하고 가장 큰 울림으로 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은 눈부신 햇살이 그녀의 피부에 반짝거릴 때, 어머니가 고개를 내려뜨린 채 어깨 너머로 나를 올려다보며 알라께서 얼마나 나를 착하고 강하게 만들었는지 아느냐고 묻는 모습이다."    (p.535)  

 

내 기억력이 조금 더 좋았더라면, 그리고 내가 말을 잘하는 달변가였더라면 네게 이것보다는 더 재미있게 말해줄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쉽네.  하지만 네가 만약 이 책을 읽게 된다면 그때는 너와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거야.  물론 그렇게 되리라고 나는 기대하고 있어.  어쩌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가슴에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지도 몰라.  오늘 내가 들뜬 모습으로 네게 들려주던 이 순간의 기억들도 네 가슴에서 조용히 편집되고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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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셉을 잡아라 - 모든 기획자를 위한 닌텐도식 아이디어 정리법
다마키 신이치로 지음, 이랑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언제부턴가 우리는 '컨셉(concept- 정확한 외래어 표기로는 콘셉트)'이라는 단어를 일상어처럼 쓰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처음에는 마케팅이나 기획, 또는 디자인 계통에서 그들만의 전문용어로 쓰였음직한 이 단어가 요즘에는 어떤 상황에서건 무시로 쓰이고 있다.  마치 과학용어인 DNA가 일상어처럼 쓰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의 저자인 다마키 신이치로는 '컨셉이란 세상을 보다 좋게 바꾸는 동시에 당신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나는 이것도 다분히 자의적인 정의라고 이해한다.  사실 말이란 어떤 상황에서 쓰이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닌텐도 Wii를 직접 기획했던 저자는 자신의 경험과 다년간의 연구를 통해 깨달았던 컨셉의 힘과 영향력에 대해 이 책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의 필요성은 업무 연관성이 있는 독자에게 한정될지도 모른다.  어떤 필요에 의하지 않으면 가독력도 떨어지고,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어떤 깨달음도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 독자로서의 내가 리뷰를 쓰고자 하는 이유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컨셉의 위력을 이 책을 통하여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컨셉은 어디에서든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게임기를 만들려는 회사는 물론 당신이 시작하려고 마음먹은 어느 곳에서도 컨셉이 필요합니다.  컨셉은 다양한 현장에서 출발점에 서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죠.  이를테면 혁신적인 상품이나 서비스를 기획하려는 사람, 새로운 회사를 세워서 사업 방향을 잡으려는 사람, 회사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은 사람, 좋은 아이디어를 내보라는 상사의 요구에 막막한 사람 등."    (p.11~12)

 

이 책에서 저자는 좋은 컨셉을 만들기 위한 준비 도구로 종이와 펜, 함께 생각할 좋은 동료들을 들고 있다.  저자는 방에서 혼자 즐기던 게임을 가족들이 함께하는 거실로 이끌어내는 획기적인 컨셉을 세움으로써 닌텐도 Wii를 전세계적인 히트 상품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이면에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고 그들의 need에 맞추려고 했던 저자의 노력이 한몫했다.  제품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우리는 간혹 자신만의 아집과 편견에 빠져 결국에는 처참한 실패로 마감하는 사례를 종종 본다.  사업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도 이와 다르지 않다.  컨셉 워크란 결국 타인을 이해함으로써 내게 속한 아집을 조금씩 지워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타인을 바꾸는 것은 법칙, 과거, 사회 구조를 바꾸는 것보다는 간단하고 실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타인을 바꾸는 것 역시 힘들다.  타인이라는 표현 속에는 언제나 경쟁사라는 개념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업계가 나쁘다, 경쟁사가 너무 강하다, 라고 한탄하는 일은 쉽지만 실제로 업계나 경쟁사를 바꾸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지 상상이 갈 것이다."    (p.244) 

 

 저자는 우리가 컨셉을 잡기 위한 다섯 단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경쟁사의 부러운 점, 우리 회사의 부족한 점, 업계에 대한 불만 늘어놓기.

둘째, 동료들이 발언한 불만사항 중에 숨겨진 정보나 생각을 끌어내 불만을 최대화할 것.

셋째, 지금까지 나온 불만과 생각들을 비슷한 주제들로 묶어서 그룹화할 것.

넷째, 그룹들 중에 우리가 나아가고 싶은 방향으로 화살표를 그릴 것.

다섯 째, 나아가고 싶은 방향(원하는 컨셉)의 사이사이에 문제점은 없는지 다시 한 번 불만과 불안감을 정리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것.

 

우리가 어떤 일의 시작 단계에서 하는 컨셉 워크란 결국 타인을 이해하고,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일 것이다.  타인의 불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자세가 어찌 컨셉 워크에서만 필요하겠는가.  우리의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것도 결국에는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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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평범한 말 한마디가 사람들의 마음을 적시기도 합니다.

다들 보셔서 알겠지만 고려대 게시판에 붙었던 한 학생의 대자보가 연일 이슈가 되고 있더군요. 저도 보았습니다.  특별하지 않은, 우리가 늘 듣고 말하는 <안녕하시냐?>는 한마디의 말에 저도 모르게 울컥했습니다.  왜였을까요?

 

8,9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저는 어쩌면 대자보 문화에 익숙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 당시에 제 주변의 친구들은 열성적으로 투쟁에 동참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그들과 의견을 나누고, 서로 위로하며, 때로는 울분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저도 이제 나이가 들고 보니 우리는 그때 어떤 사상적 연대보다는 같은 세대를 사는 젊은이로서의 일체감, '하나'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에 더 열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들지 않는 젊음이란, 오염될 수 없는 젊음이란 언제나 외로운 법이고, 그 때문에 더 많은 위로와 관심이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의 젊은이들은 다들 뿔뿔이 흩어진 채, 각자의 방에서 본인의 외로움을 스스로 풀어야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이기주의라고 폄하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 또 누구는 사회적 문제에 저항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리고 국가 권력과 기성세대의 무관심이 너무도 높은 장벽으로 그들을 구속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다만 외로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외로움이 임계점에 다다랐을 뿐입니다.  <안녕하시냐?>는 한마디에 왈칵 울음을 터뜨릴 수 있는 것이 젊음입니다.  그 울음을 같이 보듬을 수 있는 것도 젊음입니다.  그렇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어려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어찌 기성세대의 눈으로 그들을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철부지 어린애라구요?  천만에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제 그들의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서로를 감싸주고, 때로는 연대하고, 같이 울음을 울어주지 못한다면 세상은 그야말로 사막처럼 변할 것입니다.  저는 그걸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한 학교에 붙었던 어느 학생의 자필 대자보보다 그것을 계기로 그들이 연대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 힘으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기를 또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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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 하십니까?>

어제 불과 하루만의 파업으로 수천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다른 요구도 아닌 철도 민영화에 반대한 이유만으로 4,213명이 직위해제된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본인이 사회적 합의 없이는 추진하지 않겠다던 그 민영화에 반대했다는 구실로 징계라니. 과거 전태일 청년이 스스로 몸에 불을 놓아 치켜들었던 '노동법'에도 "파업권"이 없어질지 모르겠습니다.

정부와 자본에 저항한 파업은 모두 불법이라 규정되니까요. 수차례 불거진 부정선거의혹,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이란 초유의 사태에도, 대통령의 탄핵소추권을 가진 국회의 국회의원이 '사퇴하라'고 말 한 마디 한 죄로 제명이 운운되는 지금이 과연 21세기가 맞는지 의문입니다.

시골 마을에는 고압 송전탑이 들어서 주민이 음독자살을 하고, 자본과 경영진의 '먹튀'에 저항한 죄로 해고노동자에게 수십억의 벌금과 징역이 떨어지고, 안정된 일자리를 달라하니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비정규직을 내놓은 하수상한 시절에 어찌 모두들 안녕하신지 모르겠습니다!

88만원 세대라 일컬어지는 우리들을 두고 세상은 가난도 모르고 자란 풍족한 세대, 정치도 경제도 세상물정도 모르는 세대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1997~98년도 IMF 이후 영문도 모른 채 맞벌이로 빈 집을 지키고, 매 수능을 전후하여 자살하는 적잖은 학생들에 대해 침묵하길, 무관심하길 강요받은 것이 우리 세대 아니었나요? 우리는 정치와 경제에 무관심한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단 한 번이라도 그것들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고 목소리내길 종용받지도 허락받지도 않았기에, 그렇게 살아도 별 탈 없으리라 믿어온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수조차 없게 됐습니다. 앞서 말한 그 세상이 내가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만 묻고 싶습니다. 안녕하시냐고요. 별 탈 없이 살고 계시냐고요. 남의 일이라 외면해도 문제없으신가, 혹시 '정치적 무관심'이란 자기합리화 뒤로 물러나 계신 건 아닌지 여쭐 뿐입니다. 만일 안녕하지 못하다면 소리쳐 외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것이 무슨 내용이든지 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묻고 싶습니다.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  

 

 고려대 경영08 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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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12-14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말 한마디에 왈칵합니다. 안녕하십니까라면 그래도 덜했을 텐데 "들"이라는 한 글자가 제 눈에 자꾸 밟히네요....

꼼쥐 2013-12-17 14:0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그랬습니다.
너무도 무관심한 채 소외되었던 개개인들이 그 한마디에 다들 마음의 벽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oren 2013-12-14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이 대자보를 읽었을 때만 해도, 대한민국 청년들의 기백이 겨우 이런 정도의 나약한 질문밖에 내놓지 못할까 싶어 연민조차 느껴질 정도였는데, 문득 눈으로 뒤덮힌 온통 꽁꽁 얼어붙은 세상을 폭주하는 '설국열차'의 꼬리칸에 올라탄 승객들이 겹쳐 떠올랐습니다. 마주하고 있는 여러 현실들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겨우 '뒤켠에서 모기만한 목소리로 웅성거리는 듯한' 글밖에 써붙이지 못할까 싶어 짠한 마음부터 앞서네요...

nama 2013-12-15 10:02   좋아요 0 | URL
이만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참으로 어려운 세상입니다.

꼼쥐 2013-12-17 14:07   좋아요 0 | URL
그것이 기성세대가 잘못 가르쳤기 때문인 것 같아요. 권력에 대항하며 자랐던 기성세대가 그 대가의 혹독함을 경험하면서 자식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하고 바랬겠지요. 하여, 체제에 순응하는 방법만 가르친게 아닌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