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에 잠시 짬을 내 투표소를 찾았다. 제22대 국회의원선거 사전투표가 시작되는 첫날. 투표를 하려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회사에 묶인 사람들이 휴일도 아닌 평일에 투표를 위해 시간을 낸다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일 터, 시간이 자유로운 노인들과 주부, 혹은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이 한산한 시간을 이용하여 투표장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만개한 벚꽃이 제 소임을 다했다는 듯 서서히 지고 있었다. 주말의 여유로움이 한껏 내려앉는 봄의 뜨락에 게으른 봄 햇살이 나릇나릇 번지고 있었다.


현실을 제대로 인지할 수 있는, 정신이 온전한 사람들은 여당인 국민의힘을 절대 지지할 수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간혹 있는 듯했다. 그들은 어쩌면 봄마다 헛심을 쓰는 저 도시의 벚꽃처럼 자신의 노력이 무위로 끝났음을 실감하게 될지도 모른다. 식물이 꽃을 피우는 까닭은 새 생명의 싹을 틔우기 위함인데 아스팔트 포장이 된 도시의 가로수는 아주 잠깐 사람들의 눈만 즐겁게 할 뿐 본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다. 그야말로 헛심만 쓰는 꼴이 아닌가.


박여름의 에세이 <좋은 일이 오려고 그러나 보다>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한때는 좋아하는 마음 하나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연습만 하면 받아쓰기 백 점은 쉬웠고 꾸준히 좋아하던 누군가에게 받는 답장 하나에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런데 어른이 되어 보니 아니더라. 어떤 일에서 1등을 하는 건 시간을 쏟는다고 해서 무조건 되는 일이 아니었고 때로는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날 가장 많이 울리기도 했으니까. 기다리면 될까. 기다리면 올까. 하염없이 목 내밀어 봐도 버스가 오지 않아 물어보니 막차는 떠났단다. 하지만 내 잘못 아니다. 다만 오늘 운행하는 차가 끊겼을 뿐이니까. 까만 밤 잘 보내고 나면 또다시 오겠지. 그때 졸지 않고 잘 나아갈 준비를 하면 되겠지. 사는 게 참 쉽지 않지만, 그래도 그렇게 좋은 날 좋은 기회는 또 올 거다."  (p.30~p.31 '첫차' 중에서)


사는 게 팍팍하고 힘들지만 우리 곁에는 여전히 타인의 슬픔을 내 것인 양 함께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고, 비바람 몰아치는 거리에서 우산을 들고 묵묵히 함께 걸어 줄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2024년 4월 16일은 세월호 10주기! 그렇게 우리는 10년을 버텨왔다. 벚나무가 헛심을 쓰는 도시 가로수길의 분분한 낙화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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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4-05 1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했습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아서 놀랐습니다.
인용하신 문장 넘 좋네요~

꼼쥐 2024-04-05 16:48   좋아요 2 | URL
책의 제목처럼 ‘좋은 일이 오려고 그러나‘ 봅니다. 낮 시간에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기다리지 않고 빠르게 할 수 있었어요. 좋은 일이 있어야 할 텐데...

렛잇고 2024-04-05 16: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하고 왔어요!! 사전인데다 첫 날인데도 많으시더라고요. 투표 후기 글 올려주시니 반갑네요~~😃😃

꼼쥐 2024-04-05 17:34   좋아요 1 | URL
렛잇고 님도 오늘 사전투표 하셨군요. 저는 내일 약속도 있고 바쁠 듯해서 오늘 하고 왔어요. ㅎ 생각보다 많기는 했어요. 좋은 소식이 있어야 할 텐데 말이죠.
 
하필 책이 좋아서 - 책을 지나치게 사랑해 직업으로 삼은 자들의 문득 마음이 반짝하는 이야기
김동신.신연선.정세랑 지음 / 북노마드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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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책이 좋아서'라고 하면 '하필'이라는 부사에 먼저 눈길이 쏠린다. '그 많고 많은 것 중에 하필이면 책을 좋아하다니!'라는 한탄과 함께 '다른 좋은 것도 많은데'라는 선행 어구가 불현듯 떠오르기도 한다. 말하자면 '하필 책이 좋아서'라는 말 속에는 말하는 이의 가치 판단이 함께 들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책'이라는 무용한(혹은 효용가치가 떨어지는)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시간과 열정을 허비(?)하는 것에 대한 자조가 짙게 배어 있는 말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처럼 '하필'이라는 단어 속에 깃든 여러 의미를 모를 리 없을 텐데 굳이 이 단어를 쓴 데에는 어떤 특별한 까닭이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역시 이미지는 좋지만 결국 돈은 안 되는 게 책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책을 주제로 하는 TV 프로그램이 꾸준히 생기면서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이유도 비슷할 것이다. 어떤 유명인이 읽고 있다는 책에는 반짝 관심이 쏟아지지만 그 책이 다음 책으로 넘어가는 징검돌 역할은 하지 못하는 것도 같고. 전직 대통령이 국내 최고의 출판 마케터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는 실정이니 출판 시장 진짜 어떡하지......"  (p.213~p.214)


<하필 책이 좋아서>의 저자인 세 사람은 '하필 책이 좋아서'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너무도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가장 느린 미디어인 책을 만드는 일에 열정과 정성을 다하는 이들. 그러나 그들에게도 갈등과 머뭇거림의 순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저작, 편집, 디자인, 홍보, MD, 콘텐츠 제작 등 한 권의 책이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하나의 상품으로 완성되어 판매될 때까지의 과정과 단계들이 여느 상품에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열정과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이들 세 작가의 시선은 '출판계' 안쪽을 향하기도 하지만 책의 인기가 날로 시들해지는 '출판계 바깥의 사람들에게 털어놓는 하소연이기도 하다. <보건교사 안은영>, <피프티 피플>, <시선으로부터> 등 쓰는 작품마다 독자들의 사랑과 주목을 받고 있는 정세랑 작가의 주도로 출판사 홍보 기획자로 로 일하다가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신연선 작가, 출판사 돌베개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 현재는 기획자 및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동신 작가와 함께 쓴 이 책은 책을 둘러싼 이런저런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준다.


"좋아하는 동료들과 작은 책을 쓰고 싶었다. 신연선 작가, 김동신 작가에게 손을 내밀었더니 흔쾌히 맞잡아주었다. 세 사람 모두 10년 차에서 20년 차를 향해 기고 있는 업계의 허리 세대에 속한다. 꾸준히 걸어왔지만 남은 길도 많은 상태에서 방향을 가늠하는 이야기를, 그다지 무겁지 않게 해보고 싶었다."  (p.7 '들어가는 말' 중에서)


추천사, 증정본, 개정판, 리커버, 굿즈 등 출판사와 함께 작가가 결정해야 하는 것들에서부터 작가에게 오는 강연 요청이나 문학상 심사 등의 문제, 젠더, 환경, 문화 정책, 취향, 북디자인, 로고, 계약(서), 기획, 홍보, 마케팅, 베스트셀러, 브랜딩, 덕질 등 독자들은 모르고 있거나 관심 밖에 있는 문제들이 가벼운 터치로 다루어진다.


"책은 대표적인 다품종 소량 생산 상품이지만 예상치 못한 악성 재고는 발생하기 마련이며, 유통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파본도 생긴다. 파쇄해버리기에는 아까운 책들을 어떻게 판매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책이 살짝 구겨지거나 더럽혀져도 크게 개의치 않는 편인데, 못난이 과일을 즐겨 먹는 소비자가 있는 것처럼 차본을 파쇄에서 구하고 싶어하는 소비자도 있을 것이고 효율적인 연결 방법을 생각해보고 싶다."  (p.72)


오늘은 제주 4·3 희생자 추념일. 밖에는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고 만개한 목련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스마트폰이 없던,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가 문득 떠오른다. 오늘처럼 궂은 날씨에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귀가를 서둘렀고, 방에 배를 깔고 엎드려 학교에서 빌려왔거나 친구에게서 빌려온 책을 붙잡고 밤이 깊을 때까지 독서 삼매경에 빠져들곤 했다. 아귀가 맞지 않아 벌어진 문틈으로 스며드는 비 비린내와 똑똑 처마에서 떨어지는 밤의 낙수 소리.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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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도 못한 시각에 아침이 오고, 낮고 부드러운 봄 햇살이 창문을 두드리는 주일의 아침. 게으름이 둥둥 떠다니는 이 방의 주인은 일어날 줄 모르고 코끝을 간질이는 봄꽃 향기에 놀라 기지개를 켜며 늦은 아침을 맞는다. 몸만 빠져나온 침구를 정리하고,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 보고, 미련이 남은 듯 다시 한번 하품을 한다. 시나브로 해가 점점 길어지고 있다. 자욱하던 황사 먼지는 완전히 사라져 화사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이제 막 벚꽃이 피는데 겨우 하루가 남은 3월.


총선이 멀지 않았다. 사전투표를 생각하면 채 일주일도 남지 않은 셈이다.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고 주변에서 많이 듣게 되는 말이 있다. '경제가 이 모양인데 국민의힘을 찍는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지요. 똑바른 정신으로 우째 국민의힘을 찍겠어요?' 하는 말. 망가진 게 어디 경제에 국한되는 것일까마는 문제는 우리나라의 국정 시스템 전반이 무너졌는데 그에 대한 반성도, 앞으로의 대책도 없다는 데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3년도 가기 전에 나라가 망할 거라는 우려가 온 나라, 전체 국민의 가슴에 팽배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정부와 여당을 지지한다는 건 세상 물정도 모르는 산골 무지렁이나 할 짓이 아닌가.


어제는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 한 명과 점심을 같이 했다.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그는 IMF 외환위기 때만 하더라도 약국 매출은 더없이 좋았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아파도 약 사 먹을 돈도 없는지 약국 매출마저 떨어지고 있다며 하소연을 했다. 거리를 걷다 보면 빈 상가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견디다 견디다 두 손 두 발 다 들고 떠난 사람들. 그들은 지금 어떤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을까. 살 만하다는 전문직 종사자들도 이렇듯 죽는소리를 하는데 맨몸뚱아리 하나로 세파와 맞서 싸워나가야 하는 사람들은 작금의 상황이 얼마나 막막할까. 이런 사정도 모른 채 대통령이라는 자는 대파 한 단에 875원이면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헛소리나 하고 있고...


철학자 서동욱의 저서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를 읽고 있다. 재미있는 책이다. 책에 있는 한 구절을 옮겨 본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가 침해받는 것을 못 참으며, 특히 자신이 진실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할 자유(즉 철학함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가 침해받는 것을 가장 못 참는다. 이런 자연적인 자유를 국가가 침해하려 할 때 국가는 자유의 침해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전복될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안녕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둘 때 얻어질 수 있다. '국가의 목적은 자유이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에 담긴 핵심적인 생각 가운데 하나이다."  (p.147~p.148)


'MBC는 잘 들어'라면서 언론인에 대한 군부 독재 시절의 회칼 테러 사건을 언급했던 황 모 씨가 떠오른다.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17세기의 철학자도 알던 사실을 400년이나 지난 21세기의 그는 왜 몰랐을까. 그렇게 하면 국가가 전복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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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4-04-0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가 있네요. 대파 한 단이 아니라 한 뿌리에 875원입니다.
- 범죄 심리 전문가 프로˝파˝일러 올림 -

꼼쥐 2024-04-03 16:28   좋아요 0 | URL
ㅎㅎ 그렇군요.
잉크냄새 님 덕분에 프로파일러의 의미를 다시 깨닫게 됩니다. 알고 보니 프로‘파‘일러는 파 전문가인 듯.
 
북극을 꿈꾸다 - 빛과 얼음의 땅 봄날의책 세계산문선
배리 로페즈 지음, 신해경 옮김 / 봄날의책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때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어떤 책은 다 읽고 나면 생각지도 못한 얼굴 하나가 문득 떠오르곤 한다. 나도 모르게 말이다. 때론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일 수도 있고, 할머니일 수도 있으며, 갑자기 세상을 떠난 가까웠던 친구의 얼굴일 수도 있다. 이따금 일면식도 없었던 엉뚱한 사람일 수도 있다. 배리 로페즈의 저서 <북극을 꿈꾸다>를 다 읽었을 때도 그랬다. 내게 떠올랐던 얼굴은 법정 스님. 2010년 열반에 드신 법정 스님의 얼굴을 떠올렸던 데에는 까닭이 있을지도 모른다. 법정 스님이 열반에 드신 직후, 한동안 마음이 허전하여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나는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에 나와 있는 책들을 구해 읽기 시작했고, 한동안 나는 스님의 추천 도서 외의 어떤 다른 책도 읽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스님이 권하는 대부분의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다.


법정 스님이 권하는 추천 도서에 빠져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스님의 철학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스님의 주장은 일관되게 우리가 사는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의 일부분인 우리도 자연 속에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레이그루크의 <내일로부터 80킬로미터>도 그때 읽은 책이었다. 일본인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의 에세이 <나는 알래스카에서 죽었다>를 읽었을 때에도 나는 법정 스님의 얼굴을 문득 떠올렸었다. 스님이 살아계셨더라면 어쩌면 자연주의 작가 배리 로페즈의 저서 <북극을 꿈꾸다>를 추천도서 목록 제일 윗자리에 올려놓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스님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비가 온다고 생각했다가 흰기러기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다시 잠들었던 그날 밤, 나는 머리 바로 위에서 녀석들이 야간 비행을 하며 내는 공기를 두드리는 듯한 요란한 날갯짓 소리도 들었다. 이런 태고의 소리들을 들으면 클래머스 강 유역은 매년 돌아오는 동물들이 다스리는, 기이할 정도로 인적 없는 오랜 동물들의 영토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기러기 떼 근처에서 며칠을 보내면서도 침입자가 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나는 새가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평온함을 느꼈다. 그리고 고요해졌다. 나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수수께끼들의 어렴풋한 실체를 감지했다. 자연과 공간의 범위, 창공에서 내려오는 빛, 마치 물처럼 현재로 고여드는 시간."  (p.224)


55년이 넘는 동안, 북극을 포함해, 초원, 사막, 섬 등 80여 개 나라를 탐사하면서 스무 권이 넘는 책을 펴낸 저자는 2020년 75세의 나이에 암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온 인생을 걸고 자연과 인간의 잃어버린 유대를 복원하기 위한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가 아는 북극은 나와 별 상관도 없는 동토, 눈과 얼음밖에 없는 공허의 황무지였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북극을 꿈꾸다>를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북극은 지상 최대의 육식 동물인 북극곰이 2만 마리 이상 서식하고 있고, 279종에 달하는 철새 수백만 마리가 짧은 여름 북극에서 번식하는 곳이다. 7월에는 다년생 식물의 꽃도 피고 곤충류도 번식하며, 알래스카와 캐나다 북부에는 모기도 있다. 대형 초식동물인 사향소, 야생 순록인 카리부, 1천 km 이상의 장거리를 이동하며 사는 북극여우가 있고 바다에는 바다표범, 바다코끼리, 고래가 서식하는 곳도 바로 북극이다.


"북극을 여행하던 4, 5년 동안 이 두 가지 기억이 자주 떠올랐다. 한 기억은 시간을 초월한 듯 빛에 가득 찬 숭고한 순수성과 침해받지 않은 대지 본래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었다. 다른 하나, 엇나가버린 그 꿈은 북극이라는 단어에 서려 있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인간의 오랜 투쟁을 상기시켰다. 여행을 하면서 나는 인간의 욕망과 목표도 바람이나 외톨이 동물, 돌투성이의 환한 들판과 툰드라만큼이나 이 대지의 일부분임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대지는 이 모든 것과 동떨어져 스스로 존재한다는 사실도."  (p.18~p.19 '서문' 중에서)


유려한 문체와 작가의 탁월한 문장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이 책은 독자로부터 쉽게 외면받았을지도 모른다. 총 아홉 개의 장으로 구성되었지만 본문만 500쪽이 넘는 분량을 단숨에 읽어낼 수 있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듯 보이기 때문이다. 시적인 표현과 각각의 장이 갖는 완결성, 장과 장 사이의 긴밀한 연결성이 없었더라면 책이 갖는 가치를 차치하고서라도 나 역시 완독을 포기하고 말았을 듯하다. 학술적 가치는 크지만 표현이 매끄럽지 않은 책은 사실 웬만한 인내력으론 버티기 힘든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셈이다. 저자의 생생한 현장 경험이 문장의 생명력을 더하고 있는 것도 큰 장점이다. 게다가 서구인들의 욕망으로 인한 북극 생태계의 파괴를 그곳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는 동식물과 원주민들의 특별한 삶과 대비시킴으로써 극적 효과를 살리는 듯하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화성만큼이나 멀게만 느껴졌던 북극이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변화하고 있음을 책을 읽는 독자들은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


"나는 사람들이 찾아 헤매고, 결국 찾아내는 아름다움이란 것이 땅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깊고도 드문 아름다움의 한쪽 끝은 복잡한 역설과 다른 존재들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p.536)


나는 작가가 써 내려간 한 문장 한 문장의 글에 매번 감탄하며 읽었다. 그와 같은 감탄은 책을 읽는 내내 지속되었다. 우리 주변을 감싸는 모든 동식물, 심지어 하늘과 구름, 물과 흙 등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주변의 모든 환경에 조응하고 그 미세한 언어를 자신의 몸을 통하여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은 작가가 지녀야 할 선행 조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에 관심이 없어진 인간의 지나친 오만은 작가로서의 능력마저 점차 앗아가고 있는 듯하다. 미세먼지가 전국을 뒤덮은 오늘, 나는 법정 스님의 청아한 목소리가 그립다. 어떤 책을 읽으면 누군가가 그리워진다. 오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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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스러운 게 어디 봄 날씨뿐일까마는 창밖에는 여전히 추적추적 봄비가 내린다. 잎도 나지 않은 잿빛 가지 위에 촛불을 닮은 흰 목련 봉오리가 이제나저제나 개화의 시기만 기다리고 있다. 비는 그치지 않고 하마 핀 산수유꽃의 노란 그림자가 봄비 속에서 소리도 없이 지워진다. 그렇게 며칠 남지 않은 3월도 아쉽게 흐른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시간의 굴레 속에서 '나는 이쯤에서 작별을 고한다'며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겨울의 잔상들. 성긴 빗발의 발치에는 물웅덩이가 고이고 수면 위로 번지는 물동그라미의 파장을 따라 그리움의 물결이 너울지듯 인다.


 총선도 멀지 않았다. 현 정권 들어 정부에 비판적인 내용의 몇몇 글을 블로그에 올렸더니 내가 야당의 당원이거나 관련자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나는 지금껏 어느 당이건 당원으로 가입한 적이 없다. 사실 정부 정책에 불만이 있거나 자신의 주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비슷한 정당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건 어쩌면 매우 비겁한 처신일지도 모른다. 혹자는 말하길 정당에 가입하여 권리당원으로 활동하지 않는 사람은 현재의 정치 상황에 대해 비판할 자격도 없다고 한다. 나 역시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정당에 가입하지 않았던 나의 과거 행적은 어떤 해명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정치 성향에 있어 중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정치 지형은 80%의 보수와 20% 혹은 그 이하의 진보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아야 옳다. 엄밀한 의미에서 민주당 역시 온건 보수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현 정권은 극우 보수 세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보수 축에도 속하지 않는 일베 수준의 인사들이 행정 권력을 잡고 있지만 말이다.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혹은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내 주변에도 정부를 지지하는 몇몇 인물들이 있다. 그들을 분류하자면 이렇다.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음에도 더 많은 부를 획득하기 위해 정부를 지지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자들, 부자는 아니지만 종교적 신념에 의한 맹목적 추종자들, 박정희 시대의 세뇌와 학습에 의해 형성된 과거의 가치관을 변경하려 들지 않는 과거 회귀형 인간들, 그리고 현재의 상황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판단할 수 없는 인지 부조화형 인간들이 그들이다. 혹여라도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어디에 속하는 인간인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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