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각도의 겨울 햇살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희끄무레 물때가 묻은 베란다 유리창을 통해 너울너울 퍼지는 햇살. 겨울 햇살은 마치 꼬리가 긴 저녁노을을 닮은 듯합니다. 성긴 햇살 알갱이 사이로 그리운 이름과 얼굴들이 떠다닙니다. 중학생인 듯 보이는 네 명의 아이들이 추위도 잊은 채 아파트 놀이터에서 캐치볼을 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입니다. 피곤에 지쳐 께느른한 오후 햇살이 아슴아슴 졸음을 몰고 옵니다.


굥교롭게도 문제가 많았던 합참의장 후보자가 오늘 임명되었습니다. 자녀의 학폭 의혹과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 당일 주식 거래와 골프를 한 사실 등 합참의장은커녕 일반 사병의 경계 태세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를 군의 최고 실세(각군의 작전부대를 작전지휘·감독하고, 합동작전 수행을 위하여 설치된 합동부대를 지휘·감독) 자리에 앉힘으로써 대한민국 군대가 당나라 군대로 전락했음을 만방에 알리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자칭 세계 최고의 디지털 정부라면서 영국 런던 내각부를 방문했던 행안부 장관은 디지털정부를 담당하는 영국의 알렉스 버가트 내각부 장관과 '한-영 디지털정부협력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고 하니 소가 웃을 일입니다. 국내의 행정 전산망 먹통 사태의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면서 말입니다.


장석주 박연준이 쓴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보오>를 읽고 있습니다. 1월에 시작된 그들의 책 읽기 일기는 6월이 되어서야 끝이 납니다. 그들이 읽었던 많은 책에 대한 짧은 일기 형식의 글이 책의 지면을 메우고 있습니다.


"아껴 읽던 <A가 X에게>를 방금 다 읽었다. 좀 울고 싶어졌는데, 누가 코끝에 고추냉이를 쑤셔넣은 것처럼 찡해졌다. 어떤 밤은 감정을 쏟아내고 싶지 않고 쟁여놓고 싶어지기도 하는 법이다. 그런 밤이 있다. 감정을 아끼게 되는 밤. 아모스 오즈의 단편을 더 읽고, 음악을 들으려 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상처 나서 벌어진 틈새로 피가 고이고, 아물 때 즈음이면 결국 마음의 결이 바뀌게 되는 글. 이 책은 정치범으로 독방에 갇힌 남자를 그리워하는 여인이 그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 한 번의 면회도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리움으로 야위는 여성의 말들이 담겨 있다."


나도 어쩌면 오래전에 읽었던 존 버거의 <A가 X에게>를 다시 읽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코끝에 고추냉이를 쑤셔넣은 것처럼 찡해지는' 기분을 느껴보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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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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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진적'이라는 말은 달팽이처럼 느리고 완고한 이미지를 연상시키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대개 스스로 형성한 제 나름의 삶의 방식을 고수한 채 평생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자신이 세운 삶의 방식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요지부동의 사람들에게 있어 '점진적'이라는 말은 가히 혁명에 가까운 말이 아닐 수 없다. 그와 같은 까닭에 자신이 선 자리에서 한 발짝을 내딛는다는 건 천지가 개벽할 일이며 기적에 가까운 변화라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그러므로 '점진적'이라는 말은 혁명이자 기적을 향한 발걸음임을 새롭게 되새겨야 한다.


"당신이 잃은 건 생명보다 더한 것이었다. 말, 투명한 말의 맛, 참된 말에 대한 사랑, 그 모두를 잃은 것이다. 말 앞에서 당신은 먹을 것을 앞에 둔 아픈 아이 같았었다. 그런데 릴케가 당신에게 먹을 것을 다시 준다. 한 편의 시, 이어지는 또 한 편의 시, 한 편의 이미지, 또 한 편의 이미지. 헐벗은 말과 함께 온전한 진실이 돌아온다. 진실과 함께 온전한 영혼이 돌아온다."  (P.26~P.27)


크리스티앙 보뱅의 산문집 <작은 파티 드레스>를 올해 두 번째 읽었다. 150쪽도 안 되는 이렇게 얇은 책을 한 해에 두 번 반복해서 읽는다는 건 전에는 없던 일이다. 가장 최근에 이 책을 읽고 블로그에 짧은 글을 남겼던 건 6월이었다. 나의 독서 편력(그렇다. 나는 정말 이런저런 책을 다양하게 읽고 있을 뿐 하나의 주제, 혹은 어느 한 명의 작가에 심취하여 전작(全作)을 읽는 일은 거의 없다.)에 비추어 볼 때 같은 책을, 그것도 네댓 달 만에 다시 읽는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작가 스스로 밝혔던 것처럼 '삶의 저변 즉 근원에 닿는 한 문장에 영혼이 물들기 위해서' 이 책을 다시 꺼내 들었는지도 모른다.


"혜성 같은 사랑은 영원에 단 한 번 우리의 심장을 스친다. 밤낮없이 지켜야 그걸 목격할 수 있다. 오랫동안, 오랫동안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사랑의 본성이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 이 사실이야말로 사랑이 갖춘 위엄이자, 사랑의 놀라운 특성이다. 소음과 부산함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온갖 발작으로부터도 훌쩍 떨어져,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사랑은, 그리고 사랑의 가볍고 경쾌한 자각이자 더없이 겸허한 형상이며 각성한 얼굴인 시(詩)는, 심오한 기다림이고 달콤한 기다림이다. 부드럽고도 오묘하게 반짝이는 희망이다."  (P.35~P.36)


누구나 그렇지만 크리스티앙 보뱅의 글에 매료되는 첫 번째 이유는 문장의 아름다움에 있다. 그렇다고 미사여구만 나열한 허튼 문장이 아니라 현실에 숨겨진 진실을 간결하고 응축된 언어로 아름답게 표현한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꾸며진 아름다움과 진실되고 투명한 아름다움은 쉽게 눈에 띄기 때문에 나처럼 어리석은 독자도 어렵지 않게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가 보뱅에게서 주목할 것은 깊은 사유와 관찰을 통해 보이지 않던 관계를 우리 앞에 드러낸다는 점이다. 사랑과 기다림, 피로와 어머니, 빛과 목소리, 기도와 침묵, 독서와 고통 등 우리가 미처 그 연결점을 찾지 못했던 수많은 관계와 이어짐을. 혹은 그 가능성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반면 여자들은 굶주린 고양이 같은 고통을 받아들인다. 되살아나려면 그들을 파괴할 필요가 있는 고양이이다. 그들은 꼼짝하지 않는다. 되는 대로 내버려 둔다. 그리고 고통으로 정지된 이 시간을 메우려고 책을, 소설을 편다. 여전히 소설이다. 거기서 그들은 각각의 나날 속에 내재된 그것을 발견한다. 희망과 영락, 근심과 은총, 살아감의 영원한 상처를."  (p.89~p.90)


휴일 한낮의 소음이 빛의 소멸과 함께 빠르게 스러지고 있다.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의 없고, 가난한 삶만 있으면 된다.'고 썼던 크리스티앙 보뱅의 글은 불어오는 저 바람처럼 보이지 않는 힘으로 압도한다. '당신이 신문을 빠짐없이 낱낱이 읽을 수 있는 건 그 안에 본질적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 골목을 빠져나온 바람이 회오리처럼 가볍게 맴을 돌다 스러지듯 명멸하는 나의 기억 속에서 아주 잠깐 스쳐간다. 바람이 바람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크리스티앙 보뱅의 문장들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처럼 끝없이 이어진다. 휴일 하루가 또 그렇게 소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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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 첫눈이 내렸다. 첫눈 내리는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사람들. 처음이라는 설렘과 기대는 차치하고서라도 첫눈에 대한 느낌은 우리 모두에게 각별한 것이어서 "와~" 하면서 몰려드는 사람들의 시선 너머로 아련한 그림움이 물방울처럼 맺혔다. 그렇게 우리는 첫눈 내리는 풍경에 한동안 넋을 놓았다. 그리움! 딱히 떠오르는 대상이 없을지라도 첫눈과 함께 누렸던 가슴 따뜻했던 경험과 기억들. 우리는 어쩌면 닿을 수 없는 그런 기억들에 대한 간절한 욕망에 사로잡히는지도 모른다. 첫눈과 함께 말이다.


어제는 온라인 민원 서비스인 '정부24'가 종일 먹통이었다. 현 정부의 특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현 정부의 책임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이나 부의 창출에만 관심이 있을 뿐 대다수 서민의 삶의 질 향상이나 복지에는 관심이 전혀 없다. 사실 그런 증거들은 차고도 넘치지만 가축 전염병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는 뉴스에 보도조차 되지 않던 전염병이 보수당이 집권하면 이상하게도 전국적으로 창궐하여 집권 말까지 이어지곤 한다. 구제역이나 조류독감, 아프리카 돼지 열병, 이제는 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럼피스킨병에 이르기까지 각종 전염병이 농민들을 괴롭힌다.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전염병은 사실 예방이 중요한데 보수정권의 위정자들은 서민들의 삶에 관심이 없다 보니 병이 확산한 후이거나 언론의 질타가 이어진 후에나 움직이기 때문이다. 사후약방문인 셈이다. 그런 조치는 집권 말기까지 이어진다. 잘 돌아가던 '정부24'가 왜 갑자기 먹통이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스티븐 킹이 쓴 동화 <페어리 테일>을 읽고 있다. "쓰는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진 뒤 이 소설을 답으로 제시했다고 하는데, 작가는 아니지만 나 역시 스티븐 킹의 생각에 동의하는 바이다. 게다가 해피엔딩의 아름다운 동화를 쓰고 있노라면 쓰는 일 자체가 얼마나 행복할까.


"우리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언제 찾아오는지 절대 알 수가 없다. 나도 이때가 보디치 씨와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아차렸다. 그는 좀 더 버티다가 (살짝) 긴장을 풀고 내게 이마와 뺨을 맡겼다."  (1권 p.141)


"아빠는 나를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추고는 왔던 길로 언덕을 내려갔다. 나는 아빠가 가로등 불빛 속으로 번번이 등장했다가 다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는 여전히 잃어버린 세월을 떠올리며 아빠를 원망할 때가 있었다. 그건 내게도 잃어버린 세월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빠가 다시 돌아와서 기쁜 마음이 훨씬 컸다."  (1권 p.189)


눈이 그친 주말 하늘은 어둡고 을씨년스럽다. 첫눈에 대한 두근거리던 느낌은 하루 혹은 반나절로도 충분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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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에 듣는 클래식 - 클래식이 내 인생에 들어온 날
유승준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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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다. 가을비는 왠지 후줄근하고 추레한 느낌이 먼저 드는 것이다. 아스팔트를 뒤덮은 낙엽 더미가 떠오르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비에 젖어 볼품없어진 은행잎이나 단풍잎의 잔해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배수구로 쓸려가는 모습은 처연하다 못해 씁쓸하다. 마치 우리네 삶의 끝자락을 보고 있는 듯해서 말이다. 비가 내리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지금 낮게 깔리는 피아노 선율에 젖어 있다.


"인생에서 사랑을 빼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요? 끝이 어디든 한번 시위를 떠난 사랑의 화살은 어딘가에 꽂힐 때까지 날아가는 법입니다. '빗방울 전주곡'을 들으며 미소가 머금어진다면 사랑에 빠진 것이고, 눈물이 난다면 실연의 아픔을 겪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생채기가 아물면 다시 사랑할 시간이 올 겁니다. 거센 겨울비가 내리는 밤 홀로 남겨진 쇼팽이 고독의 심연 속에서 위대한 음악을 만든 것처럼 말입니다."  (p.128)


나는 며칠째 유승준의 음악 에세이 <오십에 듣는 클래식>을 읽고 있다. 클래식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짬이 날 때마다 즐겨 듣는 까닭에 책에서 작가가 토로한 여러 문장에 나는 깊이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사실 클래식을 좋아하는 데 무슨 나이 구분이 필요할까마는 나이에 따라 좋아하는 곡도 달라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더구나 오늘은 대입 수능일. 오늘이 지나면 수능 시험을 본 학생들이 한동안 긴장감을 잃고 방황하는 시기가 아닌가. 젊은 시절의 열정과 사랑, 미래에 대한 불안 등을 고스란히 담은 명곡을 듣고 클래식에 빠져드는 시기도 바로 그때가 아닐까 싶다.


"억지로 듣는 음악이 아니고, 뭔가를 주장하거나 강요하는 음악이 아니어서 좋았습니다. 가사가 없어서 더 좋았습니다. 물론 클래식 음악에도 가사가 있는 장르가 있지만, 팝송이나 가요처럼 자극적이거나 직설적이지 않았습니다. 멜로디와 하모니를 따라서 느끼고 싶은 대로 느끼고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하면 되니 편안했습니다."  (p.17~p.18 'prologue' 중에서)


작가도 언급한 것처럼 그림이나 음악은 언어를 통한 대화의 매체가 아닌 까닭에 창작자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의무나 부담감이 없다. 언어는 말을 하는 상대방의 분명한 의도와 말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면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다. 언어는 그만큼 직설적이면서도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음악이나 미술은 창작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감상하는 나의 감정이나 느낌이 중요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음악이나 미술은 작품 감상을 하는 관객의 상상력이 중시되는 매체라고 할 수 있다. 관객의 각기 다른 상상력에 의해 해석의 여지도 다양하게 변하는 까닭에 음악이나 미술은 오히려 젊은이의 차지일 수도 있다. 자신의 미래를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며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모습이 음악에 심취한 어느 관객의 모습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첼로 연주로 들어보신 적 있나요? 피아노나 바이올린 혹은 오케스트라 연주와는 또 다른 감성을 전해줍니다. 피아노가 막 사랑에 빠진 엘가와 캐롤라인의 설레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고, 바이올린이 행복의 절정에 있는 엘가와 캐롤라인의 가슴 벅찬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면, 첼로는 황혼 녘에 테라스에 앉아 붉은 노을을 바라보는 엘가와 캐롤라인의 넉넉하면서도 애잔한 마음을 표현하는 듯합니다."  (p.320)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각 장에 5편의 클래식 곡과 5명의 음악가에 얽힌 비화를 다룸으로써 우리의 귀에 익숙한 20편의 클래식 곡을 작가 나름의 해석과 감상을 덧붙여 놓았다. 이를테면 눈으로 읽는 클래식 명곡 감상이랄까. 오늘처럼 가을비가 촉촉이 내려 손발은 물론 가슴까지 시려오는 날이면 좋아하는 클래식 명곡을 틀어놓고 하염없는 상념에 빠져드는 것도 좋을 듯하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불안을 모두 내려놓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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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소슬한 한기를 느낄 만큼 차갑다. 계절의 순환을 무시한 채 여름에서 겨울로 펄쩍 순간이동을 한 듯한 날씨. 벚나무 잔가지에 지저분하게 남아 있던 잎사귀들은 이제 다 떨어지고 없다. 검은빛의 나목. 무채색으로 변하고 있는 지상의 변화, 말하자면 처연한 색의 함몰에 비해 쪽빛으로 반짝이는 하늘은 더없이 화려한 색채를 자랑하고 있다. 기온이 낮아질수록 청명한 빛깔을 드러내는 하늘의 높고 고고한 자태를 나는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곤 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공기는 맑지만 코끝이 쨍한 추운 날씨와 미세먼지 가득한 따뜻한 날씨 중 선택하라면 나는 언제나 전자에 한 표를 던지는 사람이다.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 시오니스트들의 무차별적인 공습으로 인해 민간인 사상자가 급증하고 있다. 그들의 잔인함이 도를 넘고 있는 것이다. 규모는 다르지만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를 그들이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사실 모든 죽음은 개별적이지만 숫자로 발표되는 뭉뚱그려진 죽음은 단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하다. 우리가 숫자에 대고 추모나 애도를 표하지 않는 것처럼 각각의 죽음과 그에 따른 슬픔을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는 다만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뿐 인간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태원 참사가 터졌을 때 우리나라 대부분의 언론들 역시 사망자의 숫자에만 집착했을 뿐 사망자 개개인의 개별적인 슬픔을 보도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도 아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이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을 어찌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주말을 맞아 유럽 곳곳에서는 휴전을 촉구하는 시위가 잇따랐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30만 명 이상의 시위 참가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적어도 그들은 지난 역사에서 저질렀던 자국의 실수가 현재의 가자지구 참극을 불러왔음을 인식하고 있을 터, 우리 이웃의 죽음을 나의 슬픔인 양 애도할 수 있는 민간인이 피도 눈물도 없는 각국 정부의 정치인들을 질타하고, 선거를 통해 끌어내리고, 더 이상의 비극을 내 주변에서 용인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이런 비극의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소맷귀를 파고드는 찬바람에 계절을 실감하고 있다. 겨울이 오면, 그리고 한 해를 보내는 연말이면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는 진정 따뜻한 피가 흐르는 한 사람의 인간인가 아니면 숫자에 대고 형식적인 애도를 표하는 빌어먹을 놈인가 하는 문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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