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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뼈 ㅣ 여성 작가 스릴러 시리즈 1
줄리아 히벌린 지음, 유소영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8월
평점 :
우리는 현실에서 다양한 수학 공식을 만나기도 하고, 수학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듯 보이는 곳에서 복잡한 수학 공식을 어렵게 발견하기도 한다. 그와 같은 수학 공식 중에는 '공포 수치'라는 게 있다. 영국 킹스대 연구팀은 공포영화에서 공포감을 일으키는 요인을 찾아내 이것을 수치화한 후 그들이 만든 공식에 대입함으로써 공포 수치를 도출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 공식이 우리의 실생활에 자주 이용되는 것도 아니고, 공식의 존재를 아는 사람도 드물지만, 공식에 이용되는 변수는 꽤나 다양하다. 5개의 범주에 속하는 13가지의 세부 변수로 구성되고 있으니 말이다. 참고로 그들이 제안한 5개의 범주는 서스펜스, 사실성, 환경, 피, 진부한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닥 재미도 없는 수학 공식을 내가 이렇게 세세하게 말하는 까닭은 사실성에 속한 변수를 설명하고자 함이다. 사실성에는 두 가지 변수, 즉 현실성과 환상성이 포함되어 있다. 영화가 현실성만을 강조하게 되면 관객은 다음 장면을 쉽게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영화는 자칫 지루해질 수 있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현실성과 환상성이 균형을 이루어야 공포감이 극대화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영화가 아닌 소설에서도 현실성과 환상성의 균형은 독자들로 하여금 공포에 대한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다. 특히 줄리아 히벌린이 쓴 <꽃과 뼈>와 같은 심리 스릴러 소설에서는 더욱더.
"우리의 무덤도 화재 때문에 움푹 팬, 바닥이 고르지 않은 경사진 구덩이였다. 우리가 거기 버려지기 오래전부터 블랙 아이드 수잔이 피어나서 화려하게 들판을 단장하고 있었다. 블랙 아이드 수잔은 버려져서 누렇게 뜬 땅에서 종종 제일 먼저 번성하는 탐욕스러운 식물이다. 치어리더처럼 아름답지만 경쟁심이 강하다. 빠르게 번식해서 다른 종을 몰아낸다. 끄지 않고 아무렇게나 던진 한 개비 성냥, 그 때문에 연쇄살인범 이야기에 영원히 새겨질 우리의 별명이 탄생했다." (p.31)
히벌린의 소설 <꽃과 뼈>는 열여섯 살의 나이에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묻혔다가 간신히 생존한 테사 카트라이트가 사건이 발생했던 1995년과 현재를 오가며 그때의 사건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블랙 아이드 수잔 꽃이 만발했던 들판에서 발견된 유일한 생존자였지만 심한 충격과 공포로 인해 일시적인 실명을 경험했던 테사는 살인범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다. 어렸을 때 엄마를 잃은 테사는 정신과 의사를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해보자는 아버지의 배려로 상담을 이어간다. 그러나 테사는 의사보다는 절친인 리디아의 조언에 더욱 의존한다. 테사는 그렇게 트라우마를 극복하려 애쓰지만 17년이 지난 지금도 함께 묻혔던 희생자의 유령에 시달린다. 테사는 현재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낳은 딸 찰리와 함께 살고 있다.
"나는 벌떡 일어나지 않으려고 침착하게 콘크리트 바닥을 발로 밀어내며 그네를 계속 흔들려고 안간힘을 썼다. 낯선 사람이 찰리에게 선물을 남겼다니. 내 머릿속의 수잔이 슬그머니 찰리에게 옮겨갔다니. 게다가 이 이야기를 이제야 나한테 하다니. 찰리가 이런 비밀을 나한테 이야기하기 어려워서 혼자 품고 있는 것은 절대 원치 않았지만 사실 정확히 그 때문이었다." (p.165)
연쇄살인범으로 지목되어 감옥에 수감된 테렐은 사형 집행일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심은 블랙 아이드 수잔 꽃이 자신이 사는 집 주변에 피어나면서 테사는 테렐이 진범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는다. 법의학자와 형사의 도움을 받아 희생자들의 DNA를 추출하고 그날의 사건을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의 증언 때문에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일은 피하고 싶어 하는 테사와 법의학자의 노력 그리고 충격적인 결말이 이어지는데...
"나는 문을 닫고 방범 비밀번호를 눌렀다. 돌아서는 순간, 숨이 멎을 뻔했다. 메리의 얼굴이 벽에 걸린 거울에 달라붙어 이쪽을 내다보고 있었다. 약국 주차장의 자동차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있던 날 밤처럼 유리 반대쪽에 갇혀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이 우연히 지나가다 구출해 줄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희망으로, 파란 스카프로 재갈이 물린 채 약에 취한 반죽음 상태로 뒷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느라 얼마나 안간힘을 썼을까. 내 머릿속의 모든 수잔들 중에서 메리는 가장 덜 보채고 나를 가장 덜 비난하는 존재였다. 죄책감이 심했다." (p.396~p.397)
나는 이따금 인간이 소설을 읽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 어떤 교훈을 얻기 위해서? 그런 통속적인 대답이 아니더라도 다른 이유가 분명 더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남들처럼 많은 사람을 만났고, 다양한 유형의 사람을 경험했고, 그럼에도 여전히 알 수 없는 게 인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 아무리 많은 사람을 겪어본다 한들 삶이 유한한 같은 인간으로서 분명한 한계가 존재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책이나 영화를 통하지 않고서는 경험의 확장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소설을 읽고, 때로는 인간을 깊이 있게 연구한 철학 서적이나 인문학 서적을 읽기도 하고, 읽었던 책에 대해 곰곰 생각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극복되지 않는 공포가 존재한다. 줄리아 히벌린의 소설 <꽃과 뼈>를 읽어도 인간에 대한, 가까웠던 사람의 배신에 대한,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는다. 알 수 없는 게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