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을 못한다는 착각 - 우리 스스로 수학 지능을 구축하는 놀라운 생각의 기술
다비드 베시 지음, 고유경 옮김 / 두시의나무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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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 게 많아서 머리가 어지럽고 복잡할 때는 유튜브에 올라온 수학 문제를 풀어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예컨대 '심심할 때 풀어보는 문제'라는 제목으로 올라오는 간단한 기하 문제가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좀 더 깊이가 있는 난해한 문제를 풀어볼 때도 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수학 문제라니, 그러면 머리가 맑아지는 게 아니라 골치만 더 아파지는 거 아니야?"라고 반문하기도 하지만 그건 정말 몰라서 하는 얘기다. 수학에 필요한 언어와 소통을 위한 약간의 요령만 터득한다면 수학만큼 단순하고 명쾌한 것도 없다. 그것은 우리가 지하철을 타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티켓에 돈을 충전하고, 출입구의 일정한 위치에 티켓을 터치하면 문이 열리고, 자신의 목적지와 일치하는 지하철 노선을 타고, 목적지에서 내리면 된다. 각 구간마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 하라는 대로 해야지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내세우면 목적지에 도착하기는 어렵다. 도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힘겨운 과정이 될 것이다. 수학 문제를 푸는 과정도 비슷하다. 주어진 도형에 보조선을 긋고, 식을 세워 모르는 값을 찾고, 이를 적절히 대입하여 원하는 답을 구하면 된다. 물론 적정한 보조선을 그을 수 있느냐가 관건인데 보조선을 긋지 않더라도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어렵지 않게 풀 수 있는 문제가 대다수인 까닭에 문제를 풀기 위해 집중하는 그 잠깐의 시간이 우리의 뇌에게는 '쉼'이자 '휴식'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직관은 수학의 영혼이다. 직관이 없으면 수학은 그 의미를 잃는다. 하지만 수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를 바꿀 방법이 없다고 단정하면 안 된다. 수학적 직관이 딱 굳어진, 극복할 수 없는 한계라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수학적 대상을 향한 직관은 타고나는 게 아니다. 고정된 것도 아니다. 올바른 방법을 따르기만 하면 날마다 새로운 직관을 쌓아 올리며 더 강력하게 만들 수 있다."  (p.18)


다비드 베시의 저서 <수학을 못한다는 착각>을 읽다 보면 수학에 대한 대중의 편견이나 오류가 하나둘 벗겨질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이 우리의 삶을 획기적으로 유익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학을 업으로 하지 않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수학과 한 발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는 대학 진학을 목표로 쳐다보기도 싫은 수학 문제를 억지로 풀거나 그런 과정을 반복하는 바람에 수학으로부터 멀어진, 이른바 '수포자'의 길을 오랜 시간 동안 걸어오기도 했다. 그리고 수학이 대학 진학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기능할 뿐 그 이후에 우리는 수학과 완전히 결별하는 불행한(?) 선택을 마다하지 않았다.


"수학이 영원한 진리를 만들어내는 데만 유용했다면, 우리 삶에 아무런 쓸모가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경험에는 영원한 진리가 들어갈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우리의 언어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수학을 배우고 가르친다. 어떤 식으로든 수학이 여전히 우리에게 유용하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수학이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또 수학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제대로 이해하려면, 수학의 가장 현실적인 측면을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 된다. 수학은 우리의 사고방식에 직접 작용해 세상을 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주는 도구다."  (p.316)


한 사람의 어휘 수준이 그가 보고 이해하는 세계의 범위를 결정한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세상을 언어를 통해 이해하고,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의 언어와 더불어 수학적 언어 등 다양한 언어를 접하고 배울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경험하는 세상이 한층 넓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어휘를 접하고, 어휘와 문장을 익히는 까닭은 세상을 향한 나의 이해력을 높이고자 함이다.


"내 목표는 수학을 더 쉽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수학은 누구에게나 결코 쉬운 과목이 될 수 없다. 수학이 쉬워야 할 이유도 없다. 나는 다만 수학이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수학을 탐구하고자 하는 이들이 자신의 열정과 야망에 따라 수학을 접할 수 있도록 돕고 싶을 뿐이다."  (p.374 '에필로그' 중에서)


수학은 분명 일상의 언어와 확연히 다른 언어다. 나 역시 관심은 있지만 수학적 언어는 기초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수학적 언어를 사용하는 즐거움은 알고 있다. 일상의 언어와는 다르게 수학적 언어는 쓰는 과정에서 논리를 발견하고, 때로는 오류도 발견하면서 원하는 정답에 이르게 된다.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지만 하나하나의 과정을 넘다 보면 자연스레 정답과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일상의 언어는 결코 그와 같은 과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뜻과 정의가 명확하지 않은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수학적 언어에는 증오나 비하의 표현도 없다. 일상의 언어로 인해 지치고 힘든 사람이라면 한 번쯤 수학적 언어를 통해 정화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수학과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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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고쇼 그라운드
마키메 마나부 지음, 김소연 옮김 / 문예출판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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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세상과 가상의 세계가 혼재된,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몽롱한 플라스마 상태의 세상을 살아가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나는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상상은 신화가 상존하는 원시 부족의 세계로 나를 이끌기도 하고, 지금도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무시로 오가는 듯한 일본 국민을 떠올리게도 한다. AI를 비롯한 첨단 과학 문명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21세기 과학 중심의 시대에 지금도 여전히 자신이 믿는 신의 존재를 맹신하는 것은 물론 이미 세상을 떠난 조상님들과의 소통도 가능하다고 믿는 일본 국민의 특성은 때로는 신기하고 부럽기도 하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아는 범주에서 일본 국민은 죽은 조상이 그들이 사는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때로는 존재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들과 함께 삶을 향유하고 있다고 믿는 것으로 안다. 어쩌면 환상일 수도 있는 그런 믿음은 어찌하여 일본 국민에게만, 지금도 여전히 강한 믿음으로 그들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옆에서 달리고 있는 건 일고여덟 명. 늘 그렇듯이, 라고 해야 할까, 모두 남자. 어쩐 일인지 모두 거무스름한 기모노를 입고 잇었다. 그뿐 아니라 머리에는 '상투'까지 틀고 잇었다. 개중에는 검은 헬멧 같은 걸 쓴 사람도 있었는데, 달리는 동작에 맞춰 상투가 머리 위에서 거짓말처럼 출렁거렸다."  (p.43~p.44 '12월의 미야코오지 마라톤' 중에서)


170회 나오키상을 수상한 마키메 마나부의 소설 <8월의 고쇼 그라운드>는 표제작인 '8월의 고쇼 그라운드'와 단편 '12월의 미야코오지 마라톤'이 실려 있는 책이다. 일상적인 언어와 평범한 소재를 선택하여 읽는 데 크게 어려움이 없는 소설이지만, 두 작품 역시 일본 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판타지가 현실에 개입하는 장면을 주입함으로써 '아, 이게 바로 일본 소설이지' 하는 느낌이 들게 한다. 사실 현실과 판타지의 혼재는 하루키를 비롯한 많은 일본 작가가 흔히 쓰는 기법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지만, 현실이 파괴되거나 부풀려지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배합하고 자연스럽게 이어 붙이는 일은 미슐랭 스타 셰프의 요리 솜씨만큼이나 어렵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조금 과하다 싶으면 아이들에게나 먹힐 법한 동화로 흐를 수 있고, 부족하다 싶으면 재미를 반감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입학하고 겨우 한 달 만에, 학생에서 군인이 됐다. 그리고 다섯 달 후에는 전사해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런 인생을 강요당했던 젊은이가, 지금 여기 눈앞에서 땅을 밟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신 고쇼G에서 하얀 셔츠에 옅은 녹색 바지를 입은 엔도 군이 행진하고 있는 이미지는 쉽게 뇌리에 떠올랐다."  (p.217 '8월의 고쇼 그라운드' 중에서)


작가는 여름의 살인적인 무더위와 겨울의 무자비한 추위가 번갈아가며 펼쳐지는 교토의 양극단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치명적인 방향치인 여고생 사오리가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역전 마라톤에 참가하게 됨으로써 낯선 지역인 교토에서, 그것도 눈이 휘몰아치는 교토 거리를 달리는 상황을 재미있게 그린 '12월의 미야코오지 마라톤'과 친구 다몬의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야구 시합에 참가하게 된 대학생 구치키 군이 8월 교토의 찌는 듯한 더위를 피해 새벽에 펼쳐지는 기이한 야구 경기의 이상한 체험을 다룬 '8월의 고쇼 그라운드'는 어쩌면 '에이, 어떻게 그런 일이...' 하는 다소 비판적인 시각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어떤 것도 가능한 소설의 가상공간에서 펼쳐진다는 점을 감안하고 좀 더 포용적인 관점으로 읽는다면 주인공인 사오리나 구치키 등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는 결코 눈에 띄지 않았을 사람들도 소설과 같은 어떤 특별한 일을 계기로 삶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가능성과 희망을 안겨 준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우리의 청춘은 어떠했던가. 여린 마음을 헤집는 혼돈과 흔들림의 시절. 미지의 것들로 인해 불안하고, 미숙해 무모하기 쉬운 시절. 그럼에도 인생에서 가장 뜨겁고 용감해 감히 눈부신 시절. 사탄과 계약도 마다하지 않고 되찾고 싶어 하는 이 청춘의 허리를 잘린 이들이 <8월의 고쇼 그라운드>에 나타났다."  (p.249 '옮긴이의 말' 중에서)


현실의 삶에서 자신의 꿈을 미처 펼쳐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등진 청춘도 있고, 이 세상을 살고는 있지만 어떤 이유로든 마치 죽은 사람처럼 주눅이 들어 살고 있는 청춘도 있다. 작가는 어쩌면 한스럽게 세상을 등진 가여운 청춘을 소설 속에서 다시 불러내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 용기가 없어 자신의 꿈을 실현할 꿈도 꾸지 못하는 작금의 청춘 세대에게 지금 그럴 시간이 없다고 호되게 꾸짖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은 한시적이고 청춘은 너무나 빨리 흘러가는 까닭에.


'가을비 한 번에 내복 한 벌'이라는 속담도 있지만 기온은 크게 떨어지지 않은 듯하다. 나는 어제 친한 친구 어머니의 병문안을 갔었고, 수술 이후 뼈만 앙상한 그 모습에 마음이 울적했었다. 사는 일보다 떠나는 일이 더 어렵고 힘든 것처럼 느껴졌던 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비가 내리는 휴일 오후. 마키메 마나부의 소설 <8월의 고쇼 그라운드>에서처럼 지금은 세상에 없는 그리운 이들과 8월의 그라운드에서 땀을 흘리며 뒹굴고 싶다.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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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도 아닌데 비가 자주 내렸다. 등산로는 축축하거나 물이 고여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버섯과 같은 종균이 자라는지 이따금 쾨쾨한 냄새가 났고, 알밤도 들지 않은 빈 밤송이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새벽 어둠을 뚫고 산을 오르는 등산객의 랜턴 불빛과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 괴괴한 적막이 그렇게 깨지고 짓이겨져 도심의 아침은 늘 서둘러 찾아오곤 했다. 늘 잠이 부족한 도시인에게 계절을 구분하지 않고 일정한 출근시간을 요구하는 것은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


대한민국 1세대 개그맨으로 불리던 전유성 씨가 향년 76세로 별세했다. 나는 아직도 그의 저서 <컴퓨터 일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 또는 <하지 말라는 것은 다 재미있다> 등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가물가물한 오래된 책들이 먼저 떠오른다. 전유성 씨의 별세 소식과 더불어 윤석열 씨의 재판 출석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 규칙적인 구치소 생활 덕분인지 그는 꽤나 건강한 모습이었다. 술에 절어 살았던 대통령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건강을 회복한 모습이었다. 과거 군에 갓 입대한 신병에게 늘 하던 말, "너는 군대 체질이다."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윤석열 씨가 곁에 있었다면 진심으로 해주고 싶었던 말, "당신은 구치소 체질입니다."


추석 명절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길게 이어지는 연휴 탓인지 해외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듯했다. 시계를 30년 전으로만 되돌려도 지금과 같은 날이 오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해외여행이라는 건 일부 특별한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특별한 행사처럼 여겨졌었다. 지금처럼 맘만 먹으면 국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보편적인 일이 되리라고 그 시절에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9월의 마지막 주말. 다음 주에는 10월이 시작된다. 2025년도 어찌어찌 다 흘러가는 느낌이다. 아직 세 달이나 남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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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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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렇지만 삶의 실제와 자신의 바람은 늘 어긋나게 마련이다. 그것은 동물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닌 듯하다. 그들에게도 꿈이나 바람 같은 게 있는지 나로선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성격이나 성향이 밝다고 해서 그의 삶도 늘 꽃길만 걸으라는 보장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손으로 셀 수 없는 숱한 부침의 날들을 겪다 보면 '내가 이러자고 이 세상에 온 게 아닐 텐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들기도 하고, '나는 어쩌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부대끼며 살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라 흐르는 시간을 아무런 걱정도 없이 그저 평화롭게 관찰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을지도 모르는데..' 하는 부질없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시봉은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올해 만 네 살이 된 수컷 비숑 프리제다. 시봉이라고 부르면 알은척을 안 하고, 꼭 이시봉이라고 성까지 불러야지만 뒤돌아보거나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리다는 종종 이시봉을 '노숙견'이라고 불렀다. 물론 이시봉이 없는 자리에서 그랬다. 이시봉이 일 년 넘게 미용실을 가지 않아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나도 '노숙자'라고 불러야 마땅하다(혹 모르지, 나 없는 곳에선 그렇게 부를지). 나 또한 일 년 넘게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 우리 둘 다 심한 곱슬머리라서 크게 불편한 것은 없다."  (p.10)


이기호의 소설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은 작가의 능청스러운 넉살과 유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실 우리나라 소설 대부분이 현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심하게 사실적이거나 문체와 구성 역시 지극히 점잖고 무거워서 독서의 목적이 현실로부터 살짝 비켜가거나 한 발 떨어져서 현실을 바라볼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는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현실과 이어진 끈을 놓지는 않되 소설이라는 가상의 세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은 충분히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게 나의 바람이었다. 물론 독자들 개개인의 다양한 취향을 소설가가 일일이 맞춰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나의 이러한 바람에 비추어 볼 때 이기호의 소설은 꽤나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개들은 보이지 않는 희망에 들뜨지 않는다. 눈앞에 놓인 희망만 면밀히 관찰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그래서 그 희망이 좌절되었을 때도 서로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의 희망은 대부분 상대와 관계없이, 상대를 신경쓰지 않은 채, 자기 내부의 화학반응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대부분의 희망은 권태에서 온다). 그래서 그 희망이 좌절되었을 땐 상대를 아예 파멸로 몰고 가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면서도 상처받는 쪽은 되레 자기 자신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p.204)


소설은 20대의 청년 이시습의 가족과 반려견인 이시봉의 이야기다. 타이어 공장을 퇴사한 후 피자집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반려견으로 데려온 비숑 프리제 한 마리, 그것이 바로 이시봉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퇴근을 하던 아버지가 도로에 뛰어든 이시봉을 구하려다 교통사고를 당하여 세상을 뜨고 만다. 아버지의 죽음이 이시봉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어머니는 이시봉을 냉대하고,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딱히 하는 일 없이 지내던 이시습은 술에 빠져 폐인처럼 지낸다. 반면 매사에 똑부러지는 성격인 여동생 이시현은 그와 같은 환경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다. 외동딸로 자란 어머니가 외할머니의 병환으로 집을 비우게 되고, 시습, 시현 남매와 반려견만 남은 집에 반려견 교육 업체인 '앙시앙 하우스' 관계자들이 찾아온다. 그들이 말하기를 이시봉이 과거 유럽 왕실에서 기르던 고귀한 혈통의 후예라며 자신들에게 이시봉을 양도하면 거액의 돈을 지불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그리고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시습이 집을 비운 사이에 이시봉을 돌봐주기로 했던 리다가 시습 몰래 '앙시앙 하우 사람들에게 이시봉을 넘기는데...


"실제로 우리집에서 팔 년째 함께 살고 있는 강아지 이름이 이시봉이다. 이시봉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볼 때마다 이야기 하나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그만 이렇게 길어지고 말았다. 소설은 강아지에 대해 말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장르일지 모른다. 하지만 강아지를 둘러싼 인간의 책임을 묻기엔, 여전히 유효한 장르이다."  (p.525 '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은 크게 세 갈래로 전개되면서 독자의 흥미를 북돋운다. 앙시앙 하우스의 대표인 정채민이 프랑스 유학 시절 만나게 된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통한 비숑 프리제의 한국 유입,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번성했던 비숑 프리제, 즉 이시봉의 선조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노조 활동을 하던 이시습의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두고 이시봉을 반려견으로 데려오게 된 사연과 그 후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시봉의 선조에 대한 이야기도 일부 다른 책에서 참고한 것은 있으나 이 소설에 맞게 편집되고 각색되었다. 그럼에도 작가는 시치미를 뚝 뗀 채 그 이야기가 마치 권위 있는 다른 책에서 인용된 것인 양 가상의 도서 제목과 저자를 표기하기도 한다. 왕실에서 보호되었던 이시봉의 선조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천일야화처럼 꾸며진 이야기이지만 책에서 인용된 것인 양 표기함으로써 권위를 갖게 된다.


업무 때문에 며칠 바빴던 나는 이제야 겨우 한시름 놓게 되었다. 젊었을 때는 힘든 일 하나를 처리하고 나면 뭔가 뿌듯하고 마음이 턱 놓이곤 했었는데 나이가 드니 그런 극적인 기분은 잘 들지 않는다. 오히려 뭔가를 빼먹거나 잃어버린 듯한 불안한 느낌도 괜스레 들고, 조만간 다른 큰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기도 한다. 그런 기분에서 벗어나고자 더 열심히 소설을 읽는지도 모른다. 억지로라도 나는 현실의 뜨뜻미지근한 기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때로는 아주 기쁘고, 때로는 아주 슬프기도 하면서, 때로는 사심 없이 웃을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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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우리는 자신의 미래가 걱정되기보다는 지나온 과거가 손상되거나 파괴되지 않을까 염려하며 노심초사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과거의 기억은 우리가 떠올릴 때마다 머릿속에서 수십, 수백 번 변형되고 재편집되며 오늘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특별한 노력을 경주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갈고 닦고 매만지면서 오랜 세월 동안 가꿔온 것이기에 그 기억이 어느 한순간 감쪽같이 사라지거나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짠 하고 등장하지나 앓을까 하는 불안,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자신의 기억을 끝없이 되새김질하게 됩니다.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한 편의 영화를 제작하는 한 사람의 편집자이자 제작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것은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자신을 유일한 관객으로 초대하고자 함이라는 사실이 다른 영화와 구별되는 고유한 특징일지도 모릅니다.


어제는 군에 있는 아들을 면회하기 위해 오산에 다녀왔습니다. 간간이 비가 내렸고 때로는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아들을 차에 태워 집에 도착한 것은 생각보다 이른 시각이었습니다. 점심을 먹은 후 공원묘지에 들렀는데 생각보다 많은 방문객들이 있어 조금 놀랐습니다. 추석은 아직 먼 느낌인데 말입니다. 저녁으로 피자헛에서 피자를 배달시켜 먹고 집을 나섰던 게 저녁 7시. 병장이 된 아들은 이제 군복을 입은 모습이 꽤나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아들을 부대에 내려주고 홀로 돌아오는 길은 무척이나 어두웠습니다.


김탁환의 산문집 <읽어가겠다>를 읽고 있습니다.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책이 처음 출간되었던 10여 년 전에도 나는 이 책을 읽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책에 대한 기억은 흐릿할 뿐 책의 내용은 온전히 새것인 양 남아 있는 게 전혀 없습니다. 뚝 떨어진 아침 기온으로 인해 가을을 실감하였던 나는 생텍쥐페리의 소설 <남방우편기>에 대한 김탁환의 생각을 읽은 후 책을 덮고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잠깐 맑았던 하늘엔 다시 먹구름이 몰려와 어두워졌습니다. 아파트 뒤편 놀이터에는 엄마 아빠와 함께 나온 아이들이 까르르까르르 연신 웃음을 터뜨립니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생텍쥐페리에겐 이런 거듭된 단절이 너무나도 강한 충격이었으니까, 삶에서 만나게 되는 다른 갈등이나 마찰은 충격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전쟁 전야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담담하게 출격 준비를 하는, 비행이 곧 자신의 직업인 존재들만이 갖는 특별한 감정에 근거하여, 생텍쥐페리는 삶과 사랑과 죽음을 바라봤던 것이겠지요."  (p.57)


더없이 좋은 계절에 우리는 괜스레 우울해지거나 그런 감정에 빠질 수밖에 없는 몇몇 이유를 가슴에 품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좋은 계절이 1년 중에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적다는 것과 이 아름다운 계절에 사랑하는 누군가와 영원한 이별을 경험했던 아픈 기억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올해의 가을이 극적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지난여름이 너무나 무더웠던 탓일 테지요. 극과 극의 변화가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지금은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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