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일을 매듭짓고 나면 산적했던 또 다른 일이 내 앞에 나타난다. 마치 제 차례를 기다렸다는 듯 말이다. 한숨을 돌릴 만한 잠시의 여유도 없이 이렇게 일이 몰아칠 때면 내가 마치 그리스신화 속 시지프스의 삶을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무거운 바위를 어렵게 어렵게 산의 정상까지 굴려다 놓으면 바위는 반대편으로 굴러 떨어져 다시 제자리에서 바위를 굴려야만 하는 반복적인 삶. 그와 같은 무의미한 행동을 아무런 생각도 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시간에 쫓겨가면서 말이다. 그렇게 어찌어찌 위태로운 시간을 보내다 보면 반나절이 훌쩍 흐르고, 기계적으로 일상을 반복하다 보면 금세 또 일주일이 흘러가고 만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쉽게 얻은 듯한 주말.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백세희 작가의 부고 소식을 신문 기사로 읽었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또는 삶에 지친 많은 이들에게 작가의 글은 언제나 작은 위로가 되곤 했었는데 35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는 소식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견딜 수 있는 거붓한 일상을 살고 있는 듯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어쩌면 일상의 무게에 눌려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상태에 놓였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대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굴려가는 일상의 바위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정도로 힘에 겨울 때, 우리를 대신하여 그 바위를 굴려줄 이는 누구인가. 우리의 근원적인 외로움은 거기에서 출발하는지도 모른다.


"대학생 때 나는 시각장애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내가 속한 세계가 아니었기에 알 수도 없었고 구태여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무용지물 박물관」을 읽고, 그해 갑작스럽게 발병했던 녹내장 수술을 받고 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시각장애에 관심이 생겼다. 그리고 점자블록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걷거나 뛰는 보도블록 사이에 함께 깔린 울퉁불퉁한 노란색 블록. 그게 시각장애인의 안전을 위한 블록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그때 이 문장이 떠올랐다. 모든 것은 눈앞에 있다. 우리는 손만 뻗으면 된다. 몇십 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길을 걸었으면서도 한 번도 점자블록을 의식하거나 의문을 품은 적이 없다. '노란색 블록이 있구나' 정도도 생각한 적이 없다.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즈음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못 본 채로 눈을 감고 있는지 생각하게 됐다."  ('다름 아닌 사랑과 자유' 중 백세희 작가의 글에서)


<다름 아닌 사랑과 자유>는 김하나, 이슬아, 김금희, 최은영, 백수린, 백세희, 이석원, 임진아, 김동영 등 9명 작가의 글이 실린 책이다. 백세희 작가의 글을 비교적 길게 옮겨 적는 동안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작가의 명복을 빌어본다. 오늘 밤에는 어쩌면 속살거리는 빗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소슬한 추위를 함께 느낄지도 모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니르바나 2025-10-17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섯분에게 생명을 이어주신 백세희작가님의 명복을 빕니다.

꼼쥐 2025-10-18 15:00   좋아요 1 | URL
저도 그 사실을 기사에서 읽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기쁜 소식일 텐데 그것으로 인해 더 북받쳐 오르는 슬픔이...
 
장미
로베르트 발저 지음, 안미현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베르트 발저의 저작을 읽을 때면 언제나 아동문학가 권정생을 떠올리게 된다. 두 사람 모두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남들처럼 학업을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문학을 향한 열정만큼은 다른 어떤 이들보다 뜨거웠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로베르트 발저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타당했던 반면, 권정생에 대한 우리나라 문학계 및 국민들의 평가는 한참이나 못 미치는 듯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한다. 한 사람의 재능이나 성품에 대한 평가보다 그가 가진 학벌이나 인맥을 더 중시하는 대한민국의 질긴 악습은 문학계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우리가 부유하는 어떤 감정의 색깔을 또렷이 구분하는 건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로베르트 발저의 산문집 <장미>를 읽는 독자는 작가의 또렷한 사유와 거침없는 방식의 글쓰기 시도에 대해 어떤 무례함을 표하기보다 세련됨이나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는 건 왜일까. 책에 수록된 글은 대개 두세 쪽 내외의 짧은 산문이고, 뚜렷한 결말이나 극적 반전을 보여주지도 않지만, 글에서 보이는 작가의 번뜩이는 감각과 사유의 선명성은 글을 읽는 또 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나는 한때 진짜 숙녀인 한 부인을 흠모했다. 하지만 요즘은 『피가로』가 내 버릇을 나쁘게 한 만큼 그녀를 촌스럽다고 생각한다. 『마탱』이 나를 반쯤 바보스럽게 만들지 않았던가? 내 동료들이 위기의 시대인 오늘날 녹초가 되도록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내가 읽는 신문들 때문에 기고만장해졌다."  (p.26 '파리의 신문들' 중에서)


시를 표현하는 문학적 방식이나 기법과는 다르게 산문은 그 길이에 상관없이 작가의 개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작가들은 자신의 개성을 숨긴 채 소위 '튀지 않는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수필이 비록 붓 가는 대로 쓰는, 무형식의 글이라고는 하지만 알게 모르게 그들 세계에서 존재하는 무형식의 형식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로베르트 발저의 산문은 그와 같은 관례나 형식을 과감히 벗어던진다. 게다가 산문의 소재로 쓰인 대부분의 인물들이 지극히 서민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들이 사실적이거나 구체적이지 않고 작가의 문학적 지식과 환상 속에서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처럼 여겨진다. 그럼에도 이들은 일상의 우리들처럼 여행을 하고,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눈다. 작가의 환상 속에서 태어난 인물인 듯하지만 현대인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작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설명한다.


"사무실에서 한 젊은이가 경건하고 다정하게 그리고 예의바르게 글을 쓰고 있었다. 그는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고, 누이들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주고, 이런저런 특별한 일을 적었으며, 마지막에는 항상 답장을 당부했다. 그의 부모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그에 대해 걱정하셨을 것이다. 그는 단지 생각이 너무 많아 창백해졌고, 오로지 너무 섬세한 감정 때문에 감정이 없었다."  (p.66 '에리히' 중에서)


발저의 산문은 무척이나 쉽고 가볍게 읽히지만 불과 두세 쪽으로 구성된 하나의 꼭지를 다 읽은 후에도 '그래서 결론이 뭔데? 도대체 뭘 말하려고 하는 거야?' 하는 식으로 이해를 하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문장의 구성 방식, 예컨대 두괄식이나 미괄식 혹은 병렬식이나 수미쌍괄식 등의 어떤 방식도 아닌, 산만한 문장 몇몇에 스무고개의 힌트를 숨겨 놓은 것처럼 그의 글이 펼쳐지는 까닭에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여운이 길게 남는 것이다.


"책을 읽을 때면 나는 쉽게 몰입하고 몇 주라도 독서를 하며 보낼 수 있다. 그렇게 나는 몰리에르의 희극과 모파상의 소설을 읽었고, 이 두 위대한 작가들을 기쁜 마음으로 나란히 두었다. 그들은 기질이나 인간에 대한 통찰이 비슷했다. 모파상을 읽으면 그는 놀라운 것을 눈앞에 제시해서 인생의 일반적인 흐름을 과소평가하게 만들 수 있다. 세련된 감정에 믿을 수 없는 힘이 들어 있고, 더 위대한 단편 작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읽는 것은 기분이 좋고, 놀랍고 행복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p.98 '몇몇 작가와 어느 성실한 부인에 관해' 중에서)


어찌나 비가 자주 오는지 명절 연휴가 끝난 후에도 연휴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한낮에는 모처럼 맑은 하늘이 드러나더니 저녁이 되자 금세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행복해하던 로베르트 발저도 1929년부터 발다우 정신병원에 입원하지 않았던가. 이러다가는 정말 가을도 다 가기 전에 우울한 기분에 취해 꼼짝달싹 못 할지도 모른다. 발저의 다른 산문집에 나오는 한 구절을 옮겨본다. '아침의 꿈과 저녁의 꿈, 빛과 밤, 그리고 별. 낮의 장밋빛 광선과 밤의 희미한 빛. 시와 분. 한 주와 한 해 전체. 얼마나 자주 나는 내 영혼의 은밀한 벗인 달을 올려다보았던가.'(발저의 산문집 '산책자'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이 흐르는 고랑 어디쯤에 얕은 웅덩이 하나 파 놓으면 나의 시간은 그쯤에서 잠시 멈출 수 있을까. 미래를 잃고 잠시 멈춘 웅덩이 속의 시간은 그렇게 남은 과거와 현재가 번갈아가며 자맥질하듯 들끓게 될까. 천국보다 얕은 시간 속에서 우리는 더러 행복과 유사한 어떤 추억을 손안에 움켜쥘 수 있을까. 길었던 추석 연휴를 마치고 출근한 직원들의 얼굴에 드리운 피로의 그늘은 오늘의 하늘처럼 어둡기만 했다. 연휴 내내 흐리고 개는 일이 반복되던 날씨는 연휴가 끝난 오늘도 관성처럼 지속되고 있다. 사람들도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관성처럼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페트라 펠리니의 소설 <월요일 수요일 토요일>은 소설이라기보다 차라리 서사를 동반한 철학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고 독자를 훈계하거나 명령하는 투의 일반적 철학 서적처럼 읽기 곤란한 소설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잔잔하고 감동적인 서사를 기본 베이스로 깔고 있지만, 이따금 부드럽게 등을 토닥이는 듯한 어떤 경구들이 톡 쏘는 양념처럼 이야기에 넋이 나간 독자들의 정신을 환기시키곤 한다.


"나는 앞날을 예상하고 있고, 많은 것을 이해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왜 죽음을 두려워할까라는 점이다. 삶을 두려워한다면 그건 이해가 된다. 어제 케빈과 나는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는 모든 것, 정말로 모든 것이 불안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삶은 맹렬하게 다가온다. 사람들은 거기 부응하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또 실패한다.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 항상 뭔가 증명해야 하고, 자기 자체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슬프다. 정말 슬프다."  (p.84)


소설 속 주인공인 린다의 생각이다. 린다의 나이는 고작 열다섯 살. 린다는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어떤 인물보다 더 어른스럽다. 중증 치매 환자인 후베르트 할아버지의 24시간 요양보호사 에바가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도록 일주일에 세 번(월요일, 수요일, 토요일) 할아버지를 돌보는 경험을 통해 열여덟 살이 되면 깨끗하게 세상을 등지려고 했던 린다 역시 조금씩 변하게 되는데...


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시간의 고랑을 따라 각자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어쩌면 연휴의 잔상과 여운이 자맥질하듯 현재의 시간에 뒤섞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 여름의 항해
앤 그리핀 지음, 허진 옮김 / 복복서가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거에 벌어진 일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에 대한 마음속 시각이나 평가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과거에 대한 각자의 평가는 어쩌면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가 과거를 향해 내리는 평가인 동시에 그러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각자의 의지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우리는 윤석열이라는 미치광이를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선택하는 믿지 못할 과오를 저질렀지만, 3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우리는 그러한 선택에 대한 자책과 깊은 반성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평가는 어쩌면 우리들 각자가 아닌, 우리 앞에 펼쳐질 미래가 과거를 향해 내리는 평가인 동시에 그런 과오를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는 우리들 각자의 의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는 확정된 것이 아닌 까닭에 지극히 유동적이며, 그러한 미래가 과거에 대해 내리는 평가 역시 시시각각 변할 수밖에 없다.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내 마음을 피해 다녔지만 어쩔 수 없이 생각이 많아졌다. 그러면 핸드폰을 보면서 휴를 생각했고, 내가 용기를 내서 전화하면 어떤 대화가 이어질지 상상했다. 아니,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바로 여기 로어링 베이에서 사랑에 빠졌던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나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간 남자. 그는 나를 사랑했고 나 역시 그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사랑은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용기를 내서 전화할 때마다 전화를 받는 사람은 항상 나에게 가라고 말한 남자였다. 지치고 망가진 남자. 하지만 그 시간을 버텨내고 시간이 흐르면 예전의 우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듯, 우리는 통화 시간을 늘리려고 애썼다."  (p.86~p.87)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앤 그리핀이 쓴 소설 <그 여름의 항해>를 읽는 내내 나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젊은 나이에 고향인 로어링 베이를 떠났던 로지.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찾았던 로어링 베이에서 사랑을 찾아 연인인 로지와 함께 더블린으로 떠났던 휴. 그러나 29년이 지난 지금 두 사람은 처음 그들이 있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겪었던 일들. 8년 전 그날, 창 너머로 딸 시어셔가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오는 모습을 지켜보던 로지는 딸의 실종과 함께 그 순간에 머물러 있다. 거짓말처럼 사라진 딸과 로지의 애틋한 모정. 딸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는 로지는 점점 현실적으로 변하는 남편 휴가 마냥 섭섭하게만 느껴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 사이의 간격도 멀어진다. 휴가 내린 마지막 결단은 로지가 자신의 고향인 로어링 베이로 돌아가 심신의 안정을 찾게 하는 것. 로지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와 허리가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여객선 이브니스를 운행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시어셔와 함께 갔던 그 어두운 곳이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힌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아무리 스스로를 달래보아도 그 생각이 내 머릿속에 숨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가끔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내가 딸이 사라지기를 바랐었다는 생각에 눈을 꼭 감는다."  (p.220)


29년 만에 다시 찾은 고향은 예전 같지 않았다. 자신의 따뜻한 안식처와도 같았던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 혼자 고향 섬과 페리를 지키고 있었다. 게다가 한때는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던 여객선 이브니스마저 낡고 병들어 있는 듯했다. 딸을 잃은 채 남편과 아들 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로지는 이브니스를 다시 바다에 띄우며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항해를 시작한다.


"부모님은 나에게 로지 드리스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십 년 후 나는 아빠처럼 페리 선장이 된다. 그로부터 이십구 년 후에는 완전히 망가진 상태로, 하지만 다시 배의 키를 잡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더블린에서 돌아온다. 여전히 한 사람의 아내이자 - 더블린에 있는 남편은 생각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 어머니였지만."  (p.14~p.15)


앤 그리핀의 소설 <그 여름의 항해>는 우리의 삶에서 마주치는 어쩔 수 없는 상처와 그럼에도 여전히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네 삶의 한계를 들여다보고, 그 치유의 과정을 조망한다. 우리는 현실에서 혹은 책을 통하여 다른 이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그들도 역시 나와 다르지 않은 아픔과 한을 지닌,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길었던 추석 연휴를 끝내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첫날이었던 어제는 꽤나 힘든 하루였다. 어떤 여행이든 기쁨이나 설렘은 여행이 시작되기 전의 예비적 과정일 뿐 막상 여행이 시작되면 힘든 하루하루가 이어지는 것처럼 명절이 낀 긴 연휴도 기대감으로 설레던 그 며칠만 좋을 뿐 연휴 이후의 뒤끝은 감당하기 힘든 피로감으로 녹초가 되곤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곧바로 주말 휴일이 이어진다는 것. 많은 회사들이 금요일도 쉬고 다음 주 월요일에 출근하도록 배려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루 연차를 써서 주말까지 쉬는 이들이 많았던 것으로 안다. 그러나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는 생각에 나는 금요일 출근을 강행(?)했었다. 여전히 피로는 풀리지 않고 모처럼 맑은 가을 하늘이 께느른한 오후를 지키고 있다. 잠시 산책이라도 다녀와야겠다. 사선으로 쏟아지는 가을 햇살이 그저 좋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계절을 준비하는 동안 아파트 화단에는 어느새 소국이 피었습니다. 보란 듯이 말입니다. 초록의 물결 속에서 점점이 피어나는 하얀 소국의 대비는 마치 풍성한 생명력 너머의 깊은 우울을 암시하는 듯 이 짧은 계절을 지켜냅니다. 추석 명절이 낀 긴 연휴를 맞은 사람들의 표정에는 나른한 여유가 묻어나고, 저마다의 분주한 일정을 숨기려는 듯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하늘을 봅니다. 며칠 전에는 저명한 침팬지 연구자이자 세계적 동물 보호 운동가인 제인 구달 박사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구달 박사의 팬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그녀의 저서를 여러 권 읽으면서 존경과 지지의 뜻을 굳혀왔던 건 사실이었습니다.


침팬지를 비롯한 여러 동물과 식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면 알수록 인간의 잔인함이 더욱 부각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합니다. 홀로코스트를 감행했던 히틀러와 나치 잔당의 잔인함은 금세기 들어 이스라엘 시오니스트의 잔인함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가자지구에서 벌인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은 홀로코스트의 잔인함을 능가하면 능가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장 그르니에의 산문집 <일상적인 삶>을 읽고 있습니다. 여행, 산책, 포도주, 담배, 비밀, 침묵, 독서, 수면, 고독, 향수, 정오, 자정 등 12가지 주제에 대해 작가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옮기고 있는 이 책은 꽤나 흥미롭습니다. 물론 작가의 또 다른 작품 <섬>에서 선보인 유려한 문체와는 크게 다르지만 말입니다.


"신앙을 간직한 채 죽은 자를 두고 흔히 <그는 주님의 품 안에 잠들었도다>라고들 말한다. 죽음이란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기, 혹은 돌아가기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수면은, 설사 영원한 것이라 할지라도, 영원한 안식의 형상화이므로 거기에 결코 해로운 것은 없다. 잠자는 기독교인은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망각이 그의 목적이 아니므로 수면이 치유의 한 방법인 것은 아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용서, 즉 죄의 사면이다. 그리고 잠은 지은 죄의 기억을 완화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을 씻어내지는 못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감람산에 올라 고뇌에 찬 기도를 하는 동안은 <잠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수면은, 예컨대 다음날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게 해준다든지 하는, 일정한 조건 하에서만 가치 있는 것이다. 혹시라도 그것이 신과의 교감을 유지하는 데 장애물로 작용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쓸모없는 것이 된다."


연휴의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우리가 그동안 유지하고 지켜왔던 삶의 규칙들이 하나둘 깨지기 시작합니다. '수면'도 다르지 않습니다. 수면 시간이나 식사 시간의 변화는 우리를 금세 지치게 합니다. 자고 먹고, 자고 먹고 하면서 다른 때보다 많은 휴식 시간을 가진 듯한데 몸은 천 근 만 근 무겁기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체중은 예상보다 쉽게 불어납니다. 건강을 지킨다는 게 이렇게나 어렵습니다. 우리는 또 얼마나 오랫동안 빡빡한 식단과 운동 시간에 골머리를 썩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연휴 이틀째가 흐르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