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인근의 공원에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야자매트가 깔린 공원 둘레의 산책로에는 운동복을 입고 뛰거나 걷는 사람들로 붐비고, 공원 한편에 설치된 운동기구를 이용하려는 몇몇 사람들도 눈에 띕니다. 그 옆에 마련된 간이 족구장에서도 코트에 공이 꽂힐 때마다 서로 함성을 지르며 경기에 집중하는 모습입니다. 공원 여기저기에 놓은 벤치에는 노인분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담소를 나누고, 어떤 사람은 그런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습니다. 공원에 산책을 나온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의 한 손에는 반려견의 목줄이 들려 있었습니다. 여전히 초록이 우세하지만 공원의 나무들도 이제는 울긋불긋 단풍이 들고 있습니다. 나뭇가지에는 언뜻언뜻 보이는 딱새와 까치와 비둘기들이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는 모습입니다.


남유하 작가가 쓴 에세이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를 읽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았겠지만 마음이 약한 나로서는 차마 읽을 수가 없어서 책꽂이 한켠에 고이 꽂아 두었던 책입니다. 여전히 나는 읽을 수 없는 부분을 차례로 건너뛰며 몇몇 꼭지를 겨우 읽을 뿐입니다.


"엄마를 떠나보내고 엄마가 보고 싶을 때마다 무조건 걸었다. 미세먼지가 심하면 마스크를 쓰고 걸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걸었다. 아이처럼 엄마를 부르며 울면서 걸었다. 사람이 없는 길을 골라 걸었다. 간혹 맞은편에서 사람이 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울음이 저절로  잦아들었다. 사람이 지나가면 다시 목 놓아 울었다. 그렇게 걷고 울다 떠오른 말이 있었다. 슬픔을 걷다."  (p.251)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삶의 고통이 찾아올 때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한 특별한 처방전을 펼쳐들곤 합니다. 나는 속으로 '지금부터 펼쳐지는 이야기는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삶(my life)'이 펼치는 서사다.'라는 생각을 마치 세뇌를 하듯 몇 번이고 되뇌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뇌를 한 채 바라보면 나의 삶이 펼쳐지는 모습은 마치 내가 예전에 읽었던 누군가의 평전이나 전기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나로부터 나의 삶을 분리시키는 방법은 내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내가 내릴 수 있는 매우 극단적인 처방인 셈입니다.


반면 니시 가나코가 쓴 에세이 <거미를 찾다>는 낯선 타지에서 작가 자신에게 찾아온 유방암 발병 사실을 인지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아주 담담히 사실적으로 기록한 에세이입니다. <거미를 찾다>와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를 번갈아가며 읽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두 권의 책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을 수 있을 듯하기 때문입니다.


"수술 당일, 새벽 5시에 일어났다. 바깥은 아직 한밤중이었다. 7시까지는 물을 마실 수 있어서 끓인 물을 마시고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수술 후에는 팔을 올릴 수 없으니 앞이 벌어진 옷을 입는 편이 낫다고 들었다. 그래서 전날에 준비해 둔 면 소재로 된 흰 잠옷을 입었다. 일본에 있는 친구 리사가 보내준 것이었다. 남편과 아이는 아직 자고 있었다. 편지를 써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p.188~p.189)


우리가 사는 삶은 시간에 맞서 투쟁하는 투쟁의 기록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이 각각 다르고, 주어지는 환경도 서로 다르겠지만 우리 모두가 시간에 맞서 싸우게 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로 그 사실이 무서워 주춤 물러설 때도 있지만 어느 누구도 나와 내 시간의 싸움에 개입할 수도 없고 도와줄 수도 없습니다. 오직 자신만의 분투가 필요한 고독한 싸움일 뿐입니다. 아까운 10월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나는 공원 산책로를 남들처럼 몇 바퀴 돌았을 뿐입니다. 산책을 하듯 아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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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의 모든 것
백수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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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도 다 지난 시점에 이 책을 읽는다는 게 조금 쑥스럽고 생뚱맞은 느낌도 든다. 이맘때의 나라면 <가을밤의 모든 것>이나 <가을밤의 어떤 것>쯤은 읽어야 할 터인데 아쉽게도 그런 제목의 소설은 없는 듯하다. 사실 나는 백수린 작가가 쓴 <봄밤의 모든 것>이 출간되었던 올해 초부터 읽어야지, 읽어야지, 노래를 부르다가 끝내 읽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고 말았다. 물론 소설 한 권 읽는 데 무슨 기한이 정해진 것도 아니요, 다 읽은 후 시험을 치를 것도 아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왠지 모르게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말하자면 나는 올해가 다 가기 전에 이런 찝찝한 기분을 털어버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책을 손에 잡았다.


어떻게 보면 약간의 의무감으로 시작한 일인데 책은 의외로 빠르게 읽혔다. '아주 환한 날들', 빛이 다가올 때', '봄밤의 우리', '흰 눈과 개', '호우豪雨', '눈이 내리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등 7편의 단편이 실렸다고는 하지만 작가가 의도했던 어떤 순간을 스냅사진에 담듯 포착하여 독자들에게 그 정점의 시간만을 제시하는 까닭에 책을 읽는 독자는 마치 그 상황을 영상으로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오히려 하나하나의 단편이 결말을 향해 치달릴 때면 '벌써?' 하는 물음이 절로 나왔고, 하나의 단편이 끝날 때면 언제나  못내 아쉬운 마음을 달래느라 들여마셨던 숨을 길게 내뱉어야만 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p.36 '아주 환한 날들' 중에서)


작가는 이 책에서 시간으로도 되메울 수 없는 상실의 무력감에 대해 담담한 필체로 묘사하고 있다. 어떤 이유로든 우리는 가까웠던 사람이나 존재들과 이별을 할 수밖에 없고, 그와 같은 상실의 아픔은 다른 어떤 관계로도 대체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가 겪었던 상실의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다만 우리는 삶에서 겪는 여러 상실의 상처를 안은 채 시간의 경과를 통하여 혹은 다른 존재와의 새로운 관계를 통하여 과거의 아픔을 조금씩 치유할 뿐이다. 작가는 각각의 단편에 등장하는 주인공 모두가 그와 같은 아픔을 공유하지만 그들이 치유하고 위로받는 순간은 각각 달라서 그 하나하나의 모습을 세밀한 필체로 그려내고 있다. 들뜨지 않고 담담하게 그려냄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는 가슴이 아릿해지기도 한다.


"거듭될수록 소희의 상상은 익숙한 서사를 게으르게 변주한 형태를 띠었는데, 그건 악의 때문이 아니라 소희에게는 죽음이 아직 너무나 추상적인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단 한 번도 말을 나눠본 적 없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해야 할 이유는 없지, 소희는 생각했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범죄자일 수도 있었고 자식들에게 버림받을 만한 일을 한 부도덕한 아버지였거나 사기꾼, 자발적인 고독을 택한 은둔자일 수도 있었다. 만약 한 번이라도 대화를 나눴다면 소희가 싫어하게 되었을 만한 인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었든 한때 존재했던 생生이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없다니. 그건 대체 무슨 말이지?"  (P.172 '호우豪雨' 중에서)


오세영 시인의 시 <10월>에는 다음과 같은 시구가 등장한다. '우리는/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오늘도/잃어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단 한 번의 영원한 이별을 위해 수많은 이별을 경험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또 내면서 눈물도 메말라 더 이상 누군가를 위해 흘릴 눈물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영원한 작별을 고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구가 탄생한 이래 단 한 번도 같은 날씨가 반복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는 탄생과 더불어 똑같은 상실의 상처를 단 한 번도 반복하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의 마음에 굳은살이 생길 때까지 여러 이유로 이별하고, 떠난 사람을 때로 미워하기도 하면서 또 다른 만남을 이어간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이별과 동시에 또 다른 이별을 준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나서 주미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최악을 상상하며 얼마나 쓸데없이 인생을 낭비하며 살고 있는지 마침내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어떤 얼굴로 다가올지 짐작할 수조차 없는 미래와 끝에 대해서 대비할 능력이 마치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헛되게 믿으면서. 그렇게 말한 후 우리는 주미의 이제 일곱 살이 된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한없이 잔혹한 인생이 얼마나 변덕스러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또다시 기쁨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조금 더 말했다. 이미 다 환해졌다고 생각한 연노란색 하늘과 부드러운 윤곽을 지닌 산등성이가 맞닿은 부분을 따라 아주 가느다란 선이 생기고 그것을 우리가 발견할 때까지."  (P.245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중에서)


문학평론가 박혜진은 백수린 작가가 쓴 이 소설집에 대해 <잘 적응된 허무>라는 제목으로 비교적 긴 글을 썼다. 그의 글은 '사라지지 않는 빛을 만드는 백수린은 한국문학의 새로운 경지다. 암흑 같은 마음을 살리는 소중한 백야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다. 백수린 작가는 어쩌면 우리 삶에서 결코 깨뜨릴 수 없는 상실의 아픔과 허무의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 자신의 소설집 이름을 <봄밤의 모든 것>으로 정했는지도 모른다. 눈밭의 상처에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서 말이다.


별로 한 것도 없는 듯한데 다시 또 주말. 10월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부스스한 가을 햇살에도 모과가 익어가고 있다. 그렇게 어수선한 가을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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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이 크게 떨어졌다. 맹렬하게 뜨거웠던 여름과 하루 건너 비가 내렸던 가을. 늦장마가 연상되는 궂은 날씨였지만 가을은 여전히 진행중이리라 믿었는데 갑작스레 기온이 뚝 떨어져 오슬오슬 추위를 느끼다 보니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절로 들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1년 중 더없이 좋은 이 짧은 계절의 흥취를 느껴본 적도 없는데 누군가에게 가을을 통째로 도둑맞은 기분이 드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가뜩이나 서늘한 날씨에 오후 들어 하늘마저 어두워진 탓에 반차라도 내고 일찍 퇴근하고 싶은 욕구를 억지로 참았던 하루.


점심으로 뜨끈한 순두부를 먹었다. 펄펄 끓는 뚝배기에 담긴 얼큰한 순두부찌개를 정신없이 퍼먹느라 입천장이 벗겨지는 줄도 몰랐다. 새벽 등산로에는 요즘 산을 오르는 등산객이 부쩍 줄었다. 날씨가 조금 더 추워지고 눈이라도 한 차례 내리면 등산객의 숫자는 눈에 띄게 줄어들 것이다. 겨우내 활동량을 줄였던 사람들은 새순이 돋는 봄이 되어서야 다시 또 산을 찾을 것이다. 몇 달 동안 불어난 체중에 제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들어하면서 말이다.


국정감사가 한창인 요즘 대법원장을 비롯한 몇몇 판사들의 일탈행동으로 사법부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법부는 국민들의 신뢰가 비교적 높은 부처였다. 그러던 것이 윤석열 정권과 내란 시국을 거치면서 사법부의 몇몇 인사들은 노골적으로 제 욕심을 채우는 데 급급했고, 그들이 추구해야 할 양심이나 정의는 안중에도 없었다. 과거에도 그런 사람들이 왜 없었을까마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활성화되고 그 바람에 비밀 유지가 갈수록 어려워지다 보니 그런 인사들의 비행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각자의 욕심을 좇아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걸 보면 한편으로 가엾고 딱해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이 간혹 잘못 알고 있거나 착각하는 게 하나 있다. 나이가 들면 사람들이 인생의 여러 경험을 두루 겪어서 판단도 현명해지고, 성격도 원만하게 바뀔 것이라고 지레짐작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겪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신의 본래 성격이 되살아나고, 감정이나 인지 편향의 통제력이 감소하는 까닭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는, 그야말로 고집불통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물론 존재한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대개 젊은 시절부터 성격도 좋고 판단력도 좋았던 사람들이다. 그런 까닭에 나이가 들어서도 젊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조희대 대법원장처럼 늙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벚나무처럼 얇고 여린 잎들은 한 차례 바람에도 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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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0-22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일년만의 변화이기를 바래보지만, 지구 자전축이 조금 틀어져 버린 듯한,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다가온 것이 아닌가 싶군요.

꼼쥐 2025-10-24 12:27   좋아요 0 | URL
지구 환경의 변화가 확실히 심각한 것 같아요. 그럼에도 정치인들은 이를 바로잡을 노력은커녕 권력 놀음에만 급급하고 있으니... 내년 여름은 또 어찌 날지 지금부터 걱정입니다.
 
월요일 수요일 토요일
페트라 펠리니 지음, 전은경 옮김 / 북파머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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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잎에 단풍이 들기 훨씬 전부터 은행잎을 통과하는 가을 햇살이 먼저 노랗게 물이 들고 있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가 아기를 껴안기도 전에 입꼬리에 걸린 미소와 눈웃음이 절로 피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계절의 엽서와도 같은 그런 전조를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이나 포옹보다도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이나 온기를, 실수가 잦은 아이의 성장을 믿어주는 엄마의 단단한 눈길을 더 사랑하는 까닭이다. 좋아하는 마음을 동네방네 소문내지 않더라도 만남이 이어질 때마다 내 가슴에 닿는 그 푸근함을 더 좋아한다. 유난을 떨거나 서로에게 확인을 받지 않아도 당신과 나 사이의 관계가 쇠사슬보다 더 단단하다고 믿는 그런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나는 더 좋다. 헤어짐에 앞서 내 뒤주머니에 나도 모르게 슬쩍 찔러주던, 편지봉투에 담긴 당신의 사랑을 나는 여전히 잊지 못한다.


오스트리아 작가 페트라 펠리니가 쓴 <월요일 수요일 토요일>은 그런 소설이다. 15세 소녀 린다의 마음을 누군가 알아줬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소설, 치매에 걸린 후베르트 할아버지의 마음을 또 누군가 알아줬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소설. 그런 바람들이 아무리 페이지를 넘겨도 사그라들지 않는 소설. 그래서 조금쯤 지루하다 느낄 수도 있는 소설. 그럼에도 이쯤에서 갑자기 뚝하고 멈추는 걸 바라지 않게 되는 소설. 멈춤이 곧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너무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까닭에 책을 읽으면서도,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면서도 남은 페이지를 나도 모르게 슬쩍 바라보게 되는 소설.


"후베르트와 에바와 나, 이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가 제일 친한 친구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면 과장이 될 테지. 우리는 서로를 느낀다. 서로 파고들거나, 그게 아니라도 어쨌든 서로에게 다가가는 물결 또는 아이들이 손으로 하는 놀이와 비슷하다. 제일 위에 있는 손 위에 다른 손이 놓이고, 제일 아래에 있는 손이 빠져나와 다시 제일 위에 놓이고,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감정과 분위기와 몸짓이 쌓인다. 어떤 때는 후베르트의 으르렁거림이, 또 어떤 때는 에바의 국가가, 또 어떤 때는 내 유머가 위에 놓인다."  (p.119~p.120)


이미 세상을 떠난 아내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86세의 노인 후베르트와 죽는 것이 소원인 15세 소녀 린다가 무너져가는 일상 속에서 서로를 보듬으며 삶의 희망을 되찾아가는 내용의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마치 내가 마르셀 푸르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단행본으로 읽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매일 조금씩 다르지만 특별하지 않은 일상이 반복해서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치매를 앓는 후베르트는 하루가 다르게 기억을 잃어가고, 그런 후베를트를 24시간 간병을 하고 있는 폴란드 출신의 에바, 간병인 에바에게 잠시의 휴식을 제공하기 위해 같은 건물에 살면서 일주일에 세 번 방문하여 후베르트의 말벗이 되고 있는 린다, 후베르트의 딸 나방, 린다의 남사친이자 유일한 친구인 케빈, 린다의 엄마와 엄마의 남자 친구인 위르겐 아저씨 등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다. 370여 쪽의 긴 소설 분량에 비하면 인물 설정은 꽤나 단출한 편이다.


"나는 한숨을 내쉰다. "우리 그냥 그런 척하자." 엄마가 무슨 말이냐는 눈길로 나를 본다.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척하며 지내. 사는 게 괜찮은 척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다들 잘해내지 못해. 우리도 그런 척할 수 있어. 우리 삶이 괜찮은 척." 엄마는 손가락을 치켜들고 붕대를 가만히 노려본다."  (p.222)


린다는 평생을 야외 수영장 안전요원으로 일했던 후베르트를 위해 어렵게 외출을 감행하기도 하고, 일시적으로 간병인 자리를 잃었던 에바의 복귀를 위해 애쓰기도 한다. 그럼에도 린다는 16살이 되는 자신의 생일 즈음에 맞춰 도로를 달리는 차에 뛰어든다. 그러나 심각하지 않은 부상을 입고 퇴원한다.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린다는 목발을 짚은 채 후베르트를 찾는다. 후베르트는 이제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다. 그리고 후베르트의 죽음 이후에도 삶을 이어가야 하는 린다와 에바. 린다는 이제 엄마를 생각하여 죽지 않기로 결심한다.


"죽음에서 가장 좋은 점이 뭔지 아세요? 아무도 미래로 할아버지를 협박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미래로 나를 협박할 때면 엄마는 내가 미래를 잘못 설계한다거나 망친다거나 뭐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해요. 그런 상황에서 내가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몸을 뒤로 기대고는, 강아지들이나 손뼉치기 노래 가사를 생각해요. 아, 죄송해요. 말이 다른 데로 샜네요."  (p.322~p.323)


"나는 후베르트처럼 한다. 모든 것을 한곳에 쓸어 담는다. 사람과 계절, 사건을 모두 한군데에 담고 뒤섞으면 다 괜찮아진다. 모두 살아 있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 빠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현실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게 내버려두면 안 된다."  (p.368)


도로 옆 인도에도 조금씩 낙엽이 쌓이고 있다. 무심한 발길이 그 위를 오가고, 닳고 닳은 시간처럼 부스러진 낙엽이 흩어진다. 계절을 닮은 석양이 휴일 언저리를 훑고 지나는 동안 먼 곳에서 구급차 소리가 요란하다. 페트라 펠리니의 소설<월요일 수요일 토요일>은 사실 스토리에 끌린다기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더 매력적인 작품이다. 스토리는 어쩌면 작가의 사유를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슬한 바람이 분다. 창문을 닫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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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 단편선 소담 클래식 6
에드거 앨런 포 지음, 임병윤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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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거 앨런 포의 남다른 재능은 소재의 선정에 있지 않을까 싶다. 작가들이 선호하지 않는 소재, 그런 까닭에 독자들에게는 낯설었던 소재를 인간 공포의 아주 작은 영역에 몰아넣음으로써 소설을 읽는 독자의 시선을 한순간에 사로잡는 능력은 그가 천재적인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항상 낯선 소재를 현실과 결합하고자 하는 그의 고민이 선행되지 않았을까 싶다. 낯선 소재가 공포라는 궁극적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어떤 면에서 강하고 짧은 호흡이 유리했을 터, 장편보다는 단편소설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포는 1편의 장편과 74편의 단편을 남겼다. 단편의 대부분이 공포 소설이지만 말이다. 내각 읽었던 소담출판사에서 출간한 <포 단편선> 역시 공포 소설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검은 고양이'를 비롯하여 포의 또 다른 대표작인 '어셔가의 몰락', '적사병의 가면', '모르그가街'의 살인', '도둑맞은 편지', '함정과 시계추', '유리병에 남긴 편지' 등 우리에게도 친숙한 7편의 단편이 실려 있지만, '모르그가街'의 살인'과 '도둑맞은 편지'는 그의 저작 중 많지 않은 추리 소설로 분류된다고 하겠다.


"내 기분 따위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나는 정신이 혼미해져  비틀대다가 반대편 벽에 겨우 기대섰다. 계단을 올라가던 경찰관들도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는지, 그 자리에 잠시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열두 개의 건장한 손이 달려들어 벽을 파내기 시작했다. 벽돌은 한꺼번에 모두 떨어져 나갔다. 이미 심하게 부패하고 머리에 핏덩이가 말라붙은 시체가 바로 눈앞에 똑바로 서 있었다."  (p.28 '검은 고양이' 중에서)


사실 우리가 읽은 공포 소설의 대부분은 어쩌면 어린 시절에 집중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소설보다 더 공포스러운 경험을 현실에서 직접적으로 체험하기 때문에 공포 소설에서 느끼는 공포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상대적으로 체감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현실에서의 경험이 많지 않았던 어린 시절, 스산한 바람이 부는 겨울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읽었던 공포 소설의 충격은 그야말로 고압 전류에 감전되는 듯한, 순수하면서도 직접적인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 후로 한동안 멀어졌던 공포 소설을 다시 읽었던 건 '애드거 앨런 포'라는 이름에서 오는 친숙함과 그 시절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다.


"무척 눈을 뜨고 싶었지만 두려웠다. 눈을 뜨면 주위가 어떤 모습일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무엇인가 끔찍한 게 보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보다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더욱 무서울 것 같았다. 마침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눈을 번쩍 떠 보았다. 정말 두려워했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만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숨이 막혀 오는 것 같았다. 짙은 어둠이 무겁게 내리누르며 숨통을 죄는 듯했다. 공기마저도 숨을 턱턱 막았다."  (p.198~p.199 '함정과 시계추' 중에서)


공포 소설 작가로서 포의 재능은 인간이 느끼는 공포의 원인과 그 현상을 나름의 방식으로 분석하여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환경을 포착하고 기술한다는 데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짧은 순간 극한의 공포를 맛보게 한다. 그리고 공포 이후의 나른한 휴지(休止). 공포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휴지(休止)의 느낌은 더욱 달콤하다. 이러한 반복을 통하여 우리는 공포 소설에 익숙해지고, 중독의 단계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공포를 기피하면서도 심리적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포의 소설은 우리가 왜 공포 소설에 열광하는가? 하는 물음에 가장 교과서적인 답을 제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공포감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마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이상하고도 무시무시한 해역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호기심에 절망적인 두려움조차 달아나 버렸고, 내가 맞이하게 될 끔찍한 죽음까지도 그러려니 하는 생각이 든다. 분명 우리는 짜릿한 흥분을 주는 무언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다. 그것을 알게 되는 그 순간이 곧 죽음을 의미하며 앞으로도 결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그것을 향해서 말이다."  (p.245 '유리병에 남긴 편지' 중에서)


어린 시절 나는 공포 영화를 보거나 공포 소설을 읽은 날이면 혹여라도 꿈속에서 그와 같은 공포를 되새김질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인해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웬만한 일들을 다 겪어 본 나로서는 이제 공포로 인해 잠들지 못하는 날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공포보다는 오히려 억누를 수 없는 슬픔으로 인해 잠들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아졌다. 상상 속에서의 공포는 현실에서의 체험을 통해 극복되지만 슬픔은 아무리 많은 체험으로도 결코 극복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애드거 앨런 포의 단편선을 다시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어렸을 때 내가 느꼈던 순수의 공포를 이제 다시는 되살릴 수 없겠구나 하는 서글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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