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의 사랑 소담 클래식 5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지음, 안영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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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랑은 평가하고 음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사랑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우적대거나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변하기 일쑤여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사랑은 결국 사랑이 모두 끝난 시점에 쓰일 수밖에 없음을 인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읽게 되는 대부분의 사랑 이야기는 과거 어느 시점에 대한 회고록이거나 체험담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비록 그것이 현재 시제로 변형되었다 할지라도.


막스 뮐러의 생애 유일한 소설인 <독일인의 사랑>은 한 사람이 체험할 수 있는 낭만적인 사랑을 언어학자였던 작가가 시적인 문체로 그려 낸 아름다운 소설이다. 물론 사랑을 에둘러 표현할 줄 모르는 현대인이 읽기에는 다소 오글거린다는 느낌이 없지는 않으나 젊은 남녀의 사랑이 이렇게 지적이고 이상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한편으로는 놀랍게 다가온다. 물론 그처럼 이상적인 사랑을 구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자 주인공인 마리아가 일생을 병상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던 기구한 운명에서 기인하는 바 크지만 그럼에도 혈기왕성한 남자 주인공인 '나' 역시 마리아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철학이나 종교적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퍽이나 존경스러운 측면이 있다.


"그러다가 인생의 폭포라는 것이 다가오게 된다. 그것들은 언제까지나 기억에 남아 있어 우리가 그곳을 멀리 지나 영원이라는 고요한 대양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을 때에도 먼 곳에서 그 폭포수가 쏟아지는 웅장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뿐만 아니라 그 소리는 우리에게 남아 우리를 앞으로 전진시키는 인생의 추진력까지도, 그 근원과 영향력을 폭포수로부터 얻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p.39)


'첫 번째 회상'에서 시작하여 '일곱 번째 회상'을 거쳐 '마지막 회상'으로 이어지는 이 소설은 주인공인 '나'의 기억이 시작되는 유년기로부터 사랑의 싹이 트는 청소년기를 거쳐 사랑이 무르익는 청년기로 이어지는 과정을 각각의 회상에 소상히 담고 있지만, 여자 주인공인 마리아의 기구한 운명으로 인해 두 남녀의 사랑이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서둘러 막을 내리게 된다는 점은 독자들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을 자아내게 한다. 물론 '나'가 병상에 누워 지내는 마리아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두 사람 모두 정신적으로 한층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 역시 먼 훗날 그 시절을 되돌아보고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평가한다는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사랑이 계속되던 시점에서 두 남녀의 감정은 무척이나 애달픈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의 위안이 되고 그녀는 나의 휴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인생이란 결코 장난이 아니다. 두 영혼은 열풍에 불려 모였다가 허물어지는 모래알 같은 게 아니다. 다정한 운명의 손길이 우리에게 안내해 준 영혼들을 우리는 단단히 붙잡고 놓아주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들은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위하여 살고 싸우고 죽는다면 그 어떤 힘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하리라."  (p.94)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마을의 지체 높은 후작 부부를 알현하게 되고 이때부터 후작의 성을 드나들며 그의 자녀들과 어울려 지낸다. 후작에게는 현재의 부인이 낳은 자식들 말고도 사별한 전처 소생의 마리아라는 딸이 있다. 그러나 그녀는 병약하여 늘 침대에서 누워 지내는 처지였다. 자신의 생일이자 견신례를 받은 날 마리아는 언젠가 자신이 하느님 곁으로 가더라도 자신을 기억해 달라며 손에 끼고 있던 반지들을 빼서 이복동생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준다. 그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동생들만큼 그녀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워하는데, 이를 본 마리아가 자신이 죽을 때 끼고 가려던 반지를 나에게 건넨다. 그러나 '나'는 '네 것은 다 내 것'이라는 말과 함께 거절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대학에 진학하여 한동안 고향에서 떨어져 지내던 '나'는 여름 방학을 맞아 고향에 돌아오고, 이 소식을 들은 마리아로부터 한 통의 서신을 받게 된다. 그날 이후 매일 저녁 마리아를 찾아간 '나'는 그녀와 예술과 종교 등 여러 주제로 그녀와 즐거운 대화를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아를 돌보던 노년의 의사가 찾아와 마리아가 시골에 있는 성으로 요양을 떠날 테니 다시는 방문하지 말라는 통보를 한다. 이에 낙담한 '나'는 여행을 떠나게 되고...


"나는 적막 속에 우두커니 홀로 서 있었다. 뇌의 활동이 정지된 것만 같았다. 무엇을 생각해도 결론에 도달할 수 없었다. 이 지상에 나 홀로 있어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느껴졌다. 대지는 관과 같았고, 검은 하늘은 시체를 감싸는 마포 같았으며, 아직도 내가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죽은 지가 이미 오래된 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p.140)


사랑하기 좋은 계절 가을이 왔다. 한낮 기온은 한여름처럼 여전히 뜨겁지만 말이다. 막스 뮐러의 소설 <독일인의 사랑>은 사랑에 대한 체험을 시적으로, 때로는 철학적으로 그린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삶 전체가 사랑의 기억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막스 뮐러 역시 대상은 서로 다를지언정 '나'의 회상과 회상 전반에서 사랑에 대한 기억을 빠트리지 않고 있다. 유년기에는 부모님의 사랑이 청소년기와 청년기에는 친구와 연인에 대한 사랑이 그리고 장년기에는 아내와 자녀에 대한 사랑이... 우리는 그렇게 자신의 삶 전반에서 사랑에 대한 기억만 안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물론 신에 대한 사랑이나 자연에 대한 사랑이 그가 아는 사랑의 전부인 사람도 있을 테지만 말이다. 결국 사랑은 우리들 삶의 전부인 셈이다. 막스 뮐러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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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미래에는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가 인간을 사육하는 날이 기어코 오고야 말 것이라는 상상을 이따금 하게 된다. 그들이 만든 지저분한 축사에서 그들이 던져주는 사료를 먹고 자란 인간을, 알맞게 살이 오른 인간을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고, 그렇게 팔려 온 인간을 도축장에서 부위별로 자르고 분해하여 그들이 원하는 요리의 재료로 선별되고 포장된 인육. 그리고 그 생명체들에 의해 최종적으로 소비되는 현장. 도무지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이지만 인류가 개인의 욕심에 따라 진화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허무맹랑한 가정이라고 치부하기에도 뭔가 미진한 면이 있는 것이다.


성숙한 인간이 가장 먼저 깨닫는 바는 자신의 몸과 마음 등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다. 내 마음이지만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이가 듦에 따라 자신의 육체 역시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부위가 차츰 늘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수양이 부족한 인간은 자신에 속한 영과 육을 자신의 통제하에 둘 수 있는 능력이 차츰 소멸되어감에 따라 인간 스스로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타인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에 집착하게 된다. 예컨대 젊고 건강한 육체를 가졌음은 물론 여러 사람을 제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큰 권력을 소유한 인간을 대상으로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그들을 유혹할 수 있는 미끼를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와 같은 용도의 미끼는 매우 다양하지만 가장 흔한 것은 돈이다. 그리고 우리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미끼는 종교를 통한 지배이다. 우리나라에서 또는 전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치는 이유도 그런 까닭이다. 물론 우리가 정통 종교라고 믿고 있는 여러 종교도 이러한 욕심에 의해 세속화되고 도구화되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말이다.


우리가 내란 특검과 김건희 특검을 통해 보게 되는 진실은 인간의 욕망과 그러한 욕망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발현되는 믿을 수 없는 추악함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가 조찬 기도회를 주관하고 설교에 나섰던 김 모 목사뿐만 아니라 기도회에 참석한 단일종파 최대 교회의 이 모 목사 등은 종교를 빌미로 권력을 움직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인간들이다. 그야말로 노욕이 아닐 수 없다. 나이가 들어 자신의 영과 육을 자신의 통제하에 둘 수 없음을 인지함에 따라 자신의 외부에 있는 다른 사람의 권력을 통해 자신의 욕심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항상 자신의 다음 선거를 염려해야 하는 정치인은 종교인이 지배하는 신도들이 늘 탐이 나는 건 당연한 일, 노쇠한 종교인의 욕심과 정치인의 야욕이 적절한 선에서 맞아떨어진 셈이라고 하겠다. 매관매직은 물론 부패한 관리의 구명 그리고 자신의 신도들을 동원한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 이처럼 악취가 진동하는 욕심의 대환장 파티는 통일교와 신천지 등 사이비 종교인의 노욕에도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을 테다.


영과 육이 노쇠하여 어느 것 하나 자신의 통제하에 둘 수 없는 늙은 종교인의 지시에 따른다는 건 종교를 믿는 게 아니라 부패한 종교인의 노욕의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다. 아무런 비판도 없이 그들의 지시에 따른다는 건 산업현장의 로봇과 하등 다를 게 없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욕심이 진화하다 보면 언젠가 우리 인간은 다른 생명체의 지배하에 들어갈 수도 있고, 우리가 지금 사육하는 가축과 같은 신세로 전락하는 일은 어쩌면 시간문제일지도 모른다. '젊은 여집사에게 빤스 내려라 해서 그대로 하면 내 성도요, 거절하면 내 성도 아니다.'라는 말은 노쇠한 종교인이 외부인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게 얼마나 손쉬운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비판의식이 없다면 우리는 그런 신세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언젠가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에 지배당하는 것도 허무맹랑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과연 현실인가 아니면 SF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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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꿈인 동시에 생시 여백과 결 1
강우근 외 지음 / 출판사 결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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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보자. 줄리언 반스의 소설 <시대의 소음>은 '그 일은 기차역에서 일어났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그 일이 과연 무엇인지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그럼에도 작가는 성격이 급한 독자들을 향해 약간의 실마리, 이를테면 '전쟁이 한창이던 때'라는 시간적 배경과 '주위를 둘러싼 끝없는 평원과 다르지 않게 흙먼지가 날리는 평지였던 기차역'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제시함으로써 '나머지 얘기는 차차 들려줄 테니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아요'라고 달랜다. 그렇게 다시 쓰게 된 첫 문장은 '그 일은 전쟁이 한창이던 때, 주위를 둘러싼 끝없는 평원과 다르지 않게 흙먼지가 날리는 평지였던 기차역에서 일어났다.'로 바뀐다. 성격 급한 독자도 이제 안심하고 책을 읽을 수 있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이야기 속으로 깊이 침잠하게 된다. 겉으로 드러난 현실은 내 일이 아닌 양 잠시 내팽개친 채. 일반인의 독서는 대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인연을 떠나보낸다. 비가 오지 않는데도 제멋대로 화락 펼쳐지는 장우산처럼, 내 속도 있는 대로 펼쳐지던 때가 있다. 바야흐로 사랑의 우기였다. 그럴 때에 나는 해가 쨍쨍 드는 거리에서 혼자만이 커다란 장우산을 쓰고 가듯 종종걸음으로 걷는다. 어디 구석에다가 이 거추장스러운 속마음을 버리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 기어코 접어지지 않는 커다란 장우산을 쓰고 내가 걸어왔던 거리를 그대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마음의 빗살을 하나하나 다시 가누고 우산을 접듯 속마음을 접어둘 수가 있다. 언제 비가 올지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우산을 어딘가에 기대어놓고 깜박 잊은 척 다시 길을 간다. 갑자기 비가 오는 날 누군가는 내가 깜박한 우산을 쓰고 비를 피할 수 있으리라. 나는 어디든 놓고 올 수 있는 우산 하나를 장만하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  (p.122 '호접몽' 중에서)


시인이 쓴 에세이를 좋아한다. 우리가 책을 읽는다는 건 우리가 바라는 꿈의 외피를 현실에 두른 채 남에게 들키지 않은 속마음을 은밀한 곳에 새긴 타투처럼 언제고 잊지 않는 일이다. 독서는 그렇게 꿈과 현실을 모호하게 한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끝없이 지워나가기 위해 나는 틈이 날 때마다 책을 읽고, 내 마음을 혹은 내 꿈을 잊지 않기 위해 메모를 한다. 두려워서 내게 주어진 잔여 시간은 계산하지 않은 채, 나는 시선을 과거로 돌려 지금 지워지고 있는 현재의 시간을 끝없이 바라본다. 지워지는 현재를 끝없이 지켜보다 보면 언젠가 덜컥 하고 허방을 짚는 날이 반드시 올 테고, 나는 끝도 없는 심연 속으로 사라질 테지만 그때까지 나는 꿈과 생시를 오가며 마르지 않는 현재를 지워갈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어설픈 호랑이처럼 등을 굽히고 파고 들어가는 일이 주어진 삶이 아니었을지 싶다. 나를 굽히고 숙인 채 동굴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를 스치는 꿈의 파편에 다치는 일. 불현듯 어느 파편으로 인해 그것을 쥐고 동굴 밖까지 기어이 가지고 나가고 싶다는 마음."  (p.87 'cave dream' 중에서)


강우근, 여세실, 조온윤, 차유오, 차현준 등 다섯 명의 시인이 쓴 산문집 <이것은 꿈인 동시에 생시>는 시와 산문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 채 시인 각자가 지닌 개성을 저마다의 문장 속에서 뚜렷이 드러낸다. 시인이란 본디 현실을 잊고 꿈을 좇는 사람들인 까닭에 그들이 쓰는 문장은 때로 환상의 외피를 입고 출현하는 경우가 다반사, 현실밖에 모르는 우리는 환상을 번역하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자 한 자 꼼꼼히 읽다 보면 우리도 시인처럼 현실을 잊고 한 발 한 발 환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시의 효용이란 바로 그 지점에 있지 않을까 싶다. 현실의 삶이 물리거나 지겨울 때면 '레드 썬!' 하는 외침과 함께 최면에 빠져드는 것처럼, 시인이 전하는 문장 하나하로 인해 꿈을 꾸듯 천상을 거니는 듯한 효과를 볼 수만 있다면 시인의 언어를 번역하고자 하는 우리의 작은 노력도 전혀 힘들지 않을 것이다.


"꿈이 아닌 현실이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기 마련이다. 꿈의 증발이 조금 더 빠를 뿐, 현실도 미래와 과거라는 이름의 조수 간만에 차츰 지워지고 있으니까. 이때 과거는 당연히 썰물 때를 의미할 테다. 과거를 떠올리면 세월에 가려지고 옅어졌던 옛 문장들이 희미하게 드러나기에. 간혹 그곳 해안으로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낯선 물질로 된 알갱이들이 쓸려오기도 한다. 그것은 자칫 모래알과 똑같아 보여 한데 섞이면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진 탓에 그 기억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게 된다."  (p.113 '매몽과 몽매' 중에서)


꿈을 꾸듯 한 권의 책을 읽고 나면 또렷하던 현실이 조금쯤 뿌옇게 보이기도 한다. 다시 또렷해진 현실을 보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드넓은 평원을 달리는 기차가 기차역에서 잠시 머무르는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책을 읽는다는 건 '꿈인 동시에 생시'의 경험을 끝없이 반복하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가장 간결한 언어로 우리를 꿈의 세계로 안내한다. '레드 썬!' 하면 최면에 걸리는 것처럼. 주말 오후의 하늘에 알록달록한 빨래를 널듯 누군가의 꿈이 이름표도 없이 걸렸다. 가을이 오려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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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는 매물로 나온 폐가 한 채를 보러 갔다 온 적이 있습니다. 시골에 있는 단독주택이지만 사람이 집을 비운 지는 채 1년이 되지 않아서 집은 비교적 멀쩡할 거라는 집주인의 얘기만 듣고 갔었는데 막상 그곳에 도착하고 보니 건물 주변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당은 온통 잡초와 잡목으로 우거져 이곳이 과연 사람이 살던 곳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습니다. 어떻게든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 보려고 사람의 키 높이만큼 자란 잡초를 한 손으로 젖히자 숨어 있던 모기와 벌레들이 우르르 몰려나왔습니다. 몇 발자국 내딛지도 않았는데 땀은 비 오듯 흐르고 어린 아카시아 나무의 가시와 억새풀 등 외부 침입자의 진입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보이는 잡초의 등등한 기세에 눌려 나는 그만 진입을 포기한 채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그랬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는 그들 나름의 방어기제가 존재한다는 걸 나는 처음으로 목도하였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삶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드러내는 낯선 생명체에 대한 적의는 그 폐가의 마당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도 조용히 간직하고 있었던 듯 보였습니다. 나는 그것을 무시한 채 겁도 없이 그들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려 했었고, 그곳의 생명체들은 단합하여 낯선 침입자의 진입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나는 순하고 여리게만 보았던 강아지풀도 그곳에서는 위협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노란 달맞이꽃의 대궁도 억세디 억센 잡목으로만 보였습니다. 그들은 논두렁이나 시골길에서 보았던 친숙한 존재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살고자 하는 욕망은 식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오늘 아침 예전에 같은 직장의 동료였던 한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문득 폐가의 여린 식물들이 내게 보였던 날 선 적의를 떠올렸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소극적인 방어책이었을 뿐이지만 낯선 이방인이었던 나에게는 충분한 위협으로 느껴졌습니다. 식물들도 그렇게 살고자 애쓴다는 걸 나는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습니다. 과거 한때 직장 동료였던 그분은 올해 초 내게 전화를 걸어 시간이 되면 언제 식사나 같이 하자는 말을 전했었습니다. 그리고 내내 연락이 없었는데 오늘 아침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던 것입니다. 그분은 놀랍게도 자신이 지금 골육종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내게 알렸습니다. 허리가 아파 척추관 협착증 치료를 받으러 내원했다가 우연히 종양이 발견되었고, 정밀 검사를 받은 결과 암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전화를 하겠다고 해놓고 오랫동안 전화를 하지 못해 미안했다는 그분의 말에도 한마디 대꾸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다음 주 월요일 서울대 병원에 입원한다고 하면서 몸이 좀 나아지면 다시 전화하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폐가에서 보았던 식물의 생명력, 그 날카로운 적의를 그분도 머릿속 깊이 간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인이 된 위지안 교수의 에세이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가 머릿속에서 똬리를 틀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언제 밥이나 먹자'는 그분의 말이 영원히 빈말로 남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그분 역시 기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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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즈음 2025-09-05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좋은 소식을 들고 연락오셨음 좋겠습니다.

꼼쥐 2025-09-06 12:51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마음이 심란한 주말입니다.
 
꽃과 뼈 여성 작가 스릴러 시리즈 1
줄리아 히벌린 지음, 유소영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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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현실에서 다양한 수학 공식을 만나기도 하고, 수학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듯 보이는 곳에서 복잡한 수학 공식을 어렵게 발견하기도 한다. 그와 같은 수학 공식 중에는 '공포 수치'라는 게 있다. 영국 킹스대 연구팀은 공포영화에서 공포감을 일으키는 요인을 찾아내 이것을 수치화한 후 그들이 만든 공식에 대입함으로써 공포 수치를 도출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 공식이 우리의 실생활에 자주 이용되는 것도 아니고, 공식의 존재를 아는 사람도 드물지만, 공식에 이용되는 변수는 꽤나 다양하다. 5개의 범주에 속하는 13가지의 세부 변수로 구성되고 있으니 말이다. 참고로 그들이 제안한 5개의 범주는 서스펜스, 사실성, 환경, 피, 진부한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닥 재미도 없는 수학 공식을 내가 이렇게 세세하게 말하는 까닭은 사실성에 속한 변수를 설명하고자 함이다. 사실성에는 두 가지 변수, 즉 현실성과 환상성이 포함되어 있다. 영화가 현실성만을 강조하게 되면 관객은 다음 장면을 쉽게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영화는 자칫 지루해질 수 있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현실성과 환상성이 균형을 이루어야 공포감이 극대화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영화가 아닌 소설에서도 현실성과 환상성의 균형은 독자들로 하여금 공포에 대한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다. 특히 줄리아 히벌린이 쓴 <꽃과 뼈>와 같은 심리 스릴러 소설에서는 더욱더.


"우리의 무덤도 화재 때문에 움푹 팬, 바닥이 고르지 않은 경사진 구덩이였다. 우리가 거기 버려지기 오래전부터 블랙 아이드 수잔이 피어나서 화려하게 들판을 단장하고 있었다. 블랙 아이드 수잔은 버려져서 누렇게 뜬 땅에서 종종 제일 먼저 번성하는 탐욕스러운 식물이다. 치어리더처럼 아름답지만 경쟁심이 강하다. 빠르게 번식해서 다른 종을 몰아낸다. 끄지 않고 아무렇게나 던진 한 개비 성냥, 그 때문에 연쇄살인범 이야기에 영원히 새겨질 우리의 별명이 탄생했다."  (p.31)


히벌린의 소설 <꽃과 뼈>는 열여섯 살의 나이에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묻혔다가 간신히 생존한 테사 카트라이트가 사건이 발생했던 1995년과 현재를 오가며 그때의 사건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블랙 아이드 수잔 꽃이 만발했던 들판에서 발견된 유일한 생존자였지만 심한 충격과 공포로 인해 일시적인 실명을 경험했던 테사는 살인범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다. 어렸을 때 엄마를 잃은 테사는 정신과 의사를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해보자는 아버지의 배려로 상담을 이어간다. 그러나 테사는 의사보다는 절친인 리디아의 조언에 더욱 의존한다. 테사는 그렇게 트라우마를 극복하려 애쓰지만 17년이 지난 지금도 함께 묻혔던 희생자의 유령에 시달린다. 테사는 현재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낳은 딸 찰리와 함께 살고 있다.


"나는 벌떡 일어나지 않으려고 침착하게 콘크리트 바닥을 발로 밀어내며 그네를 계속 흔들려고 안간힘을 썼다. 낯선 사람이 찰리에게 선물을 남겼다니. 내 머릿속의 수잔이 슬그머니 찰리에게 옮겨갔다니. 게다가 이 이야기를 이제야 나한테 하다니. 찰리가 이런 비밀을 나한테 이야기하기 어려워서 혼자 품고 있는 것은 절대 원치 않았지만 사실 정확히 그 때문이었다."  (p.165)


연쇄살인범으로 지목되어 감옥에 수감된 테렐은 사형 집행일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심은 블랙 아이드 수잔 꽃이 자신이 사는 집 주변에 피어나면서 테사는 테렐이 진범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는다. 법의학자와 형사의 도움을 받아 희생자들의 DNA를 추출하고 그날의 사건을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의 증언 때문에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일은 피하고 싶어 하는 테사와 법의학자의 노력 그리고 충격적인 결말이 이어지는데...


"나는 문을 닫고 방범 비밀번호를 눌렀다. 돌아서는 순간, 숨이 멎을 뻔했다. 메리의 얼굴이 벽에 걸린 거울에 달라붙어 이쪽을 내다보고 있었다. 약국 주차장의 자동차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있던 날 밤처럼 유리 반대쪽에 갇혀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이 우연히 지나가다 구출해 줄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희망으로, 파란 스카프로 재갈이 물린 채 약에 취한 반죽음 상태로 뒷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느라 얼마나 안간힘을 썼을까. 내 머릿속의 모든 수잔들 중에서 메리는 가장 덜 보채고 나를 가장 덜 비난하는 존재였다. 죄책감이 심했다."  (p.396~p.397)


나는 이따금 인간이 소설을 읽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 어떤 교훈을 얻기 위해서? 그런 통속적인 대답이 아니더라도 다른 이유가 분명 더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남들처럼 많은 사람을 만났고, 다양한 유형의 사람을 경험했고, 그럼에도 여전히 알 수 없는 게 인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 아무리 많은 사람을 겪어본다 한들 삶이 유한한 같은 인간으로서 분명한 한계가 존재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책이나 영화를 통하지 않고서는 경험의 확장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소설을 읽고, 때로는 인간을 깊이 있게 연구한 철학 서적이나 인문학 서적을 읽기도 하고, 읽었던 책에 대해 곰곰 생각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극복되지 않는 공포가 존재한다. 줄리아 히벌린의 소설 <꽃과 뼈>를 읽어도 인간에 대한, 가까웠던 사람의 배신에 대한,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는다. 알 수 없는 게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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