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K 대학교 장모 교수의 사건은 엽기적이다. 소위 '인분 사건'이라고 보도된 이 사건은 우리나라 사회 지도층의 이중적인 행태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한때는 새누리당의 정책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내기도 했고 현재까지도 새누리당의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정책자문위원이기도 한 그가, 게다가 한 대학의 교수로서, 그리고 아내와 두 아이를 둔 가장인 그가 시정잡배만도 못한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분을 샀던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어느 사회에나 가혹한 범죄자는 있게 마련이고, 사회 구성원이 그 모든 범죄자를 낱낱이 가려낼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스물아홉 살이나 된 젊은이를 노예 부리듯 한 걸로도 모자라 자신의 인분을 먹게 하고 야구 방망이로 구타를 일삼고 호신용 스프레이를 얼굴에 뿌리기까지 한 사람을 주변에서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지 못했다는 건 우리 사회가 분명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반증하는 것이리라.

 

소위 교수 직함을 단 사회 지도층 인사가 그런 비인간적 행동을 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을 뿐더러 피해자보다 나이가 어린 학생이 범행에 동조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부패한 단면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사건도 한 개인의 일탈행위로 보도되고 또 그렇게 알려질 것이다. 지금까지 고위공직자가 저지른 범법행위도 언제나 개인의 일탈행위로만 보도되었으니까.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그렇게 덮고 끝없이 꼬리자르기를 한 사회는 인류 역사를 빛낼 정도로 크게 발전하기는커녕 남의 종살이를 연연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놈은 시쳇말로 '낫닝겐'이다. 그런 놈들이 우리 사회에서 활보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 민음사 모던 클래식 72
요나스 하센 케미리 지음, 홍재웅 옮김 / 민음사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창피한 일이지만 이 책이 말하는 바를 파악할 수 없다. '말하는 바'라고 하기 보다는 이 소설의 이야기 전개, 소설의 개요조차 감이 오지 않았다. 이건 숫제 열린 결말을 추구하는 프랑스 소설의 모호성보다 더 희미하게 다가왔다. 이런 소설을 만나본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독서에 있어서 만큼은 나는 간혹 지나친 호승심을 느끼곤 하는데, 이를테면 작가가 독자와 숨바꼭질을 하는 것처럼 작품 속에서 자신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는 비밀의 열쇠를 아무리 꽁꽁 숨겨두었다 할지라도 나는 기필코 그 열쇠를 찾아내어 작가를 엿먹이고 말겠다는 결연한 다짐을 하는 것이다. 사실 그 싸움에서 내가 승리했다고 할지라도 누가 크게 기뻐하거나 알아주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그때마다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곤 한다. 단지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나는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책을 이해가 될 때까지 반복하여 읽는 경우가 있다. 시간을 무한정 낭비하면서 말이다.

 

내가 이 책을 단 한 번 읽었을 때는 '이게 뭥미?' 하는 느낌밖에 없었다. 정말 그랬다. 그렇다고 이 얇디 얇은 책을 설럴설렁 읽었던 것도 아니다. 하나하나의 단어에 대해 어떤 상징성이나 함축적 의미를 파악하려는 나름의 시도도 없지 않았었다. 그러나 시간이 날 때마다 짬짬이 읽어서인지 소설을 이루는 전체적인 맥락이나 구조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젠장, 나는 작가에게 지고 말았다는 열패감을 감출 수 없었다. 책이 얇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나는 분을 이기지 못해 폭발했을지도 모른다.

 

책의 처음부터 천천히 다시 읽어나갔다. 간혹 의미를 두지 않고 넘어갔던 문장들이 처음 보는 낯선 사람처럼 내 시선을 붙잡았다. 책을 처음 읽었을 때보다 시간은 더 걸렸으리라. 그러나 여전히 감이 오지 않았다. '이것이다!' 생각할 만한 강한 느낌이 없었다. 근 일주일 동안 책의 순서를 신경쓰지 않고 제멋대로 읽었다. 예컨대 '1부 샤비'를 읽고 '4부 카롤리나'를 읽는다거나 '2부 알렘'을 읽은 후 '5부 튀라'를 읽는 식이었다. 때로는 '3부 발레리아'만 하루 종일 읽었다.

 

'뭔 책인데 그렇게 열심히 읽으세요?'하는 질문을 도대체 몇 번이나 받았는지... 사람들은 내가 이 책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책을 손에서 놓기가 못내 아쉬워서 그러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 도통 뭔 내용인지 알 수 없어서 그래.', 변명할 수 없었다.

 

2010년 12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타이무르 압둘와하브(Taimour Abdulwahab)라는 남성의 자살 폭탄 테러를 배경으로 쓰여졌다는 이 책은 이민 2세대인 작가에게도 각별한 작품인 듯했다. 전 세계에서 일상처럼 흔한 일이 되어버린 테러, 그와 함께 확산되는 인종차별주의와 이슬람 혐오주의, 그리고 암묵적으로 용인되는 백색테러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소수자, 약자, 혹은 혐오 대상자의 불안과 공포, 그 밑바탕을 이루는 정신적 기조에 대해 주인공 아모르를 통해 작가는 말하고 싶었나 보다.

 

"아모르, 한 가지 기억해 둬. 나는 홀을 향해 걸어갔다. 증오는 증오로 멈춰지지 않는 법이야. 신문 1면에는 부서진 자동차와 접근 금지 테이프, 연기, 그리고 제목이 보였다. 증오는 오직 사랑으로만 극복될 수 있어. 이게 영원한 규칙이야." (p.41~p.42)

 

소설은 친구 샤비가 주인공 아모르에게 전화를 거는 것으로 시작된다. 술에 취한 채 클럽에서 춤을 추고 있던 새벽에 말이다. 대화의 내용은 논리를 벗어난 듯 모호하다. 마치 술에 취한 두 사람이 각자 상대방의 얘기는 배제한 채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처럼. 주인공은 곧 이어 알렘의 전화를 받고, 또 발레리아의 전화를... 주인공이 전화를 받는 대상뿐만 아니라 전화를 받는 장소 또한 계속해서 바뀐다. 클럽에서 집으로 집에서 다시 테러 현장으로 시내로, 다시 집으로... 그러나 주인공의 동선 역시 구체적이지 않다. 실제와 의식 사이의 어느 한 지점인 듯, 현실과 의식이 한데 뒤섞인 플라즈마의 상태인 것처럼 혼란스럽다.

 

"나는 그의 머리색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 이걸로 충분해. 그래서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나의 걸음은 납이었고, 나의 눈은 네온이었고, 나의 팔은 비소였다. 그리고 경찰들이 등지고 서 있는 그 남자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는 나의 형제였다." (p.117~p.118)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미래에 대한 예측도, 적과 친구의 구별도, 심지어 이곳과 저곳의 경계 또한 구별하기 어렵다. ‘주류 사회’에 속한 이민자의 삶은 그 경계를 더 모호하게 한다. 공포와 경계심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네 발을 지녔건, 날개가 달렸건, 비늘이 있건, 아니면 털이 있건 간에 개개의 생명의 고유함에 대해 모두가 존중받아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P.107)

 

작가는 그 모든 상황을 전통적인 서사적 기법으로 보여줄 수는 없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주인공 아모르가 처한 상황과 그 주변 인물들의 심리를, 그리고 주인공이 스쳐가는 익숙한 환경을 주인공 아모르의 의식이 아닌, 작가 자신의 의식을 통과하여 흐르도록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소설을 '나'(아모르)에 의해 전개되는 1인칭 시점이 아닌, 작가 자신의 의식을 통과하여 배출되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침마다 오르는 산의 일정 구간은 요즘 터파기 공사가 한참 진행중이다.

멀쩡한 산 하나를 통째로 까뭉개서 아파트를 지으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처럼 매일 산을 오르던 사람들이 등산을 포기할 리는 만무하다. 그런 까닭에 건설사 측에서는 등산객들이 공사 현장을 무시로 질러 다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노끈으로 펜스를 치고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나무와 풀을 베어낸 우회 등산로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이 우회 등산로라는 게 현장 밖으로 빙 에둘러 돌다 보니 거리도 멀고, 가파른 비탈길도 생기는 바람에 등산객들로부터는 영 환영을 받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노끈 펜스를 뚫고 현장을 가로질러 가는 지름길을 내기 시작했다. 연세가 많은 분들이 다니기에는 거칠고 위험한 길이지만 중장년의 사람들은 그럭저럭 다닐 만했고 단연 지름길을 선호했다. 건설사 측에서도이런 사실을 알고 그냥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경비원도 배치하고 펜스도 보강했지만 사람들의 발길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펜스에 더불어 우회하라는 팻말도 곳곳에 세우고 다쳐도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경고성 문구도 곳곳에 붙여 놓았지만 새벽에는 상주하는 경비원이 없는 까닭에 사람들은 여전히 지름길로 다녔다.

 

오늘도 아침에 산을 내려오는데 등산복을 멋지게 차려 입은 아주머니 한 분이 펜스를 뚫고 당당히 걸어오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나도 산을 오를 때는 우회로를 따라 얌전히 돌아갔었는데 내려올 때는 과감히 펜스를 뚫고 질러오던 처지였던지라 그 아주머니를 비껴갈 때는  나도 모르게 괜히 웃음이 터졌다. 알지 못하는 아주머니와 공범으로서의 동지애를 느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오늘도 죄 아닌 죄를 지으며 아침을 시작하고 있었다.

 

사실 내가 사는 지역에도 주택 보급률이 100을 넘은 지는 오래되었다. 이미 집이 남아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정부와 지자체는 끝없이 집을 짓는다. 숲을 없애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 덩어리를 채우는 걸 보면 사람 몸에 암세포가 퍼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출생률 최하위의 국가에서 그렇게 많은 집을 지어댄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지금의 경제 상황이 나빠지는 걸 조금이나마 지연시키기 위해 미래 세대에게 암덩어리를 넘겨주는 것과 같은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건강한 세포를 파괴하며 끝없이 증식되는 암세포처럼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건강한 국토를 끝없이 잠식하고 있다. 암세포를 키워 돈을 벌겠다는 악랄한 욕심이 우리 국토에 암세포를 키우고 있는 셈이다. 무서운 세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흔하지 않은 일이지만 방금 읽은 책의 줄거리는커녕 주인공의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머릿속은 성긴 부분이 점점 늘어만 가고 급기야는아무것도 없이 텅 빈 듯한 느낌, 무엇인가 떠올리기 위해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하얗게 변해가는 경험은 매번 낯설고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책에서 받는 이러한 느낌은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라기보다는 오히려 독자 개개인의 개별적인 독서 경험 내지는 개개인의 정서적 반영에 의한 것이겠지요. 이를테면 나는 황정은의 소설 <백의 그림자>를 읽고 어떤 알맹이도 손에 쥐지 못한 채 오롯이 따뜻한 느낌만 받았더랬습니다. 마치 내가 공들여 책을 읽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한 번 진하게 껴안았던 것처럼 말이죠. 아, 이것도 말이 되지 않는군요. 책이 살아 있는 생명체도 아닌데 체온을 가졌을 리 만무하니까요. 아무튼 나는 책에서 받은 느낌이 다른 무엇보다 소중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품게 되었고, 그 느낌이 금세라도 사라질까봐 서둘러 리뷰를 쓰게 된 것입니다.

 

"은교 씨, 나는 특별히 사후에 또 다른 세계가 이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고요, 사람이란 어느 조건을 가지고 어느 상황에서 살아가건, 어느 정도로 공허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인생에도 성질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래 허망하니, 허망하다며 유난해질 것도 없지 않은가, 하면서요.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잇어요. 어떤 생각을 하느냐고 나는 물었다.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 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무재씨가 말했다.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일까, 하고 말이에요.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P.144)

 

소설의 배경이나 이야기의 뼈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부터 말이지요. 그림자가 일어선다는 이야기, 일어선 제 자신의 그림자를 쫓아 한참이나 따라간다는 이야기, 나는 예전에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주인공인 은교와 무재가 기척도 없이 등장합니다. 두 사람은 도심 재개발 사업으로 철거를 목전에 둔 낡은 전자상가에서 근무합니다. 별다른 설명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도시와는 전혀 다른 부류의, 도심 속의 섬주민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소설은 자세한 묘사보다는 오히려 간결한 설명과 대사 위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습니다. 게다가 은교와 무재가 나누는 대화는 어휘의 반복을 통한 운율감과 상징적인 특정 단어를 강하게 부각시킴으로써 주인공의 심리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길게 이어지는 산문시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리스의 서사시 호메로스나 일리아스를 읽는 것처럼 문장 하나하나에서 정제된 아름다움과 여백을 느끼게 되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은교 씨, 뭘 그렇게 걱정하나요, 너무 어두워서요, 밤이니까 어둡죠, 그게 아니고요, 너무 어두워서, 정말로 밝은 곳에 당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요, 말은 안 되는데요 무재 씨, 자꾸자꾸 드네요, 그런 생각이, 하고 대화를 나누다가 전방이 나루터임을 알리는 팻말의 반사광을 보았다." (P.163)

 

이상하게도 은교와 무재의 일상에서는 도시인의 맹목적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언제쯤 결혼을 하고, 얼만큼의 돈을 모아 어떤 집을 사고, 몇 명의 아이를 낳아 어떻게 키우겠다는 식의 흔한 목적의식 말이지요. 그들의 하루하루는 그저 물 흐르듯 그렇게 흘러갈 뿐입니다. 노래 가사 속 '콩밭 매는 아낙'의 처지가 안쓰러워 '칠갑산'을 차마 부를 수 없다는 무재와 그만큼이나 순수한 심성을 지닌 은교의 연애담은 얼핏 한 편의 동화를 보는 듯 따뜻합니다. 그러나 스러져가는 전자상가에서 생계를 꾸리고 있는 은교와 무재를 둘러싼 환경은 비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주인공의 따뜻한 심성과 냉혹한 도시 생태계의 비정함이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문턱에 코를 댄 채로 나뭇결이라고 진작되는 어두운 얼룩을 들여다보며 젖은 듯 마른 듯한 문턱 냄새를 맡고 있었다. 차라리, 라고 생각했다. 어두운 것이 되면 이미 어두우니까, 어두운 것을 어둡다고 생각하거나, 무섭다고 생각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아예 그렇지 않을까, 어둡고 무심한 것이 되면 어떨까, 그렇게 되고 나면 그것은 뭘까,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 모르겠다, 모르겠어, 모르도록 어두워지자, 이참에, 라고 생각하며 눈을 뜨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P.90)

   

작가가 생각하는 도시 소시민의 삶은 절망과 무력감 속에 묶여 제 자신의 그림자, 자신이 만든 어둠에 하염없이 이끌려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겪는 실존적 위기는 익숙한 어둠과 자포자기의 생활방식, 희망이 없는 현실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메르스 사태가 벌써 두 달째를 맞고 있습니다. 무능한 정부 때문에 빚어진 국민들의 극심한 불안과 공포, 곳곳에서 예견되는 암울한 미래, 내 이웃의 지금 모습은 소설 속 은교와 무재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다들 제 자신의 그림자를 쫓아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먼저 가겠다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시선을 피하여 어물쩍 자리를 뜨려고 일어설 때 그곳에 있던 누군가가 " 왜요, 가시게요?" 묻기라도 하는 날이면 무르춤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엉거주춤 자리에 다시 앉았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지 싶다. 대개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거나 직책이 위인 사람들과 함께 했을 때 겪는 일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어제는 다음주에 입대를 하는 한 젊은 친구의 송별회 자리에 참석했었다. 내가 그 나이였을 때의 군입대 송별회는 친구들끼리 학사주점과 같은 어둡고 퀴퀴한 장소에 모여 코가 삐뚤어 질 때까지 마시고는 집에 갈 사람은 적당히 가고 남을 사람은 남아 그 중 제일 만만한 친구의 집으로 자리를 옮겨 뒷풀이를 하곤 했었다. 집 근처의 슈퍼에서 사온 맥주로 가볍게 입가심을 하자는 게 친구집으로 자리를 옮긴 주된 이유지만 다음날이면 집주인도 그게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하나의 변명이었음을 알게 된다. 맥주로 시작된 술판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밤새도록 이어지고 입대를 앞둔 주인공은 인사불성이 되어 밤새 토하다가 입대하는 그날까지 숙취로 고생을 하는 게 다반사였다.

 

요즘은 우리 때처럼 그렇게 한 번에 끝내는 법이 없고 입대 전에 한번쯤 만나야 할 사람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일정을 조율하여 모임의 성격에 맞게 장소를 정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했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그 자리에 참석했던 젊은 친구들의 눈치가 보이기도 하고 슬슬 다음날의 일정에 차질이 빚어질까 염려되는 바도 있어서 분위기를 깨지 않고 몰래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었다. 계산을 하고 나오려는데 화장실에 가던 한 친구의 눈에 띄어 그만 다시 자리에 앉게 되었다. 시간은 늦고, 체력은 방전되고 도무지 끝날 줄 모르는 술자리가 야속하기만 했다.

 

내가 어제 마신 술이라고는 맥주 한 잔과 소주 한 잔이 다인데 나는 오늘 마냥 늘어지는 피곤과 숙취로 하루 종일 고생을 하고 있다. 이 더위에 군대를 가는 사람이나 남아서 고생을 하는 사람이나 불쌍하기는 매일반인 듯하다. 하늘도 땅도 다들 더위를 먹었는지 간신히 숨만 쉬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