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과연 신이 존재할까? 라거나 '너는 신이 있다고 믿어?'하는 질문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철학자나 종교학자가 아닌 나와 같은 일반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 나올 때는 그 사람이 정말로 신의 존재가 궁금해서 하는 질문은 아닐 것이다. 호기심 왕성한 어린애도 아니고 말이다. 아마도 그의 속내는 '만약에 신이 있다면 나의 이런 불행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이거나 '신이 나의 불행을 빨리 끝나게 해달라고 기도해줘.' 정도가 될 것이다.

 

적어도 그에게는 질문을 하기 바로 직전이나 얼마 지나지 않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생각지도 않았던 불행이 찾아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이 있다고 믿느냐? 의 질문 속에는 내 불행을 깨끗이 씻어내기 위해서는 지금 시점에서 신의 은총이 간절히 필요하다는 자신의 속내를 에둘러 표현한 말일 게다. 혹은 나를 위해서 신의 은총을 빌어달라는 의미이거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신이 인간에게 매정하리만치 무관심할 때 신의 존재를 강하게 의식하게 된다. 무슨 말인고 하면 신의 사랑은 당연히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나눠져야 한다고 믿는 까닭에 누구를 더 편애하거나 누구를 더 미워하는 식으로 행동하는 신의 존재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만일 그런 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인간을 닮은, 인간과 아주 흡사한, 신의 탈을 쓴 인간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신답게 처신을 하려면 그런 일은 절대로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누구의 불행이 더 커 보여서, 누구의 처지가 더 딱해서, 누구는 신을 향하여 간절히 빌었기 때문에 등등의 이유로 불행을 면제해주는 신이 있다면 그것은 신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는 뜻이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하게 공평해질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오직 신의 영역일 뿐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신은 인간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린 채 무관심할 수밖에 도리가 없는 셈이다. 어떤 기도에도 눈 하나 꿈적하지 않고, 아무리 큰 불행에도 표정하나 바뀌지 않아야만 모든 인간에게 공평할 수 있다. 결국 하느님(또는 신)의 가장 큰 사랑은 인간을 향한 완전한 무관심이다.

 

날씨가 무덥다. 더위를 먹었는지 한 친구가 내게 '신의 존재를 믿느냐?'는 뜬금없는 문자를 보냈다. 목사의 아들이었던 니체도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그게 언제 적 얘긴데 아직도 이런 철없는 질문을 하는 친구가 있다니...쯧쯧.  나잇값 좀 하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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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 이오덕과 권정생의 아름다운 편지
이오덕.권정생 지음 / 양철북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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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고흐, 영혼의 편지>를 읽어보셨는지. 가슴이 아려 차마 더 읽지 못하고 책을 덮었던 적이 나는 몇 번 있습니다. 살아생전 단 한 번도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던 고독한 천재화가의 지독한 불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편지가 주는 감동 때문이었습니다. 삶과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은 편지 곳곳에서 묻어납니다. '화가의 글이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탄에 감탄을 더한 적도 여러번이었습니다. 지난헤 봄이었나 봅니다. 서경식과 타와다 요오꼬의 편지를 엮어 만든 <경계에서 춤추다>를 우연히 읽고 나는 두 지성인의 아름다움에 다시 한번 흠뻑 취했었습니다.(http://blog.aladin.co.kr/760404134/6970969) 그것은 고흐의 편지에서 느낄 수 있었던 예술가의 뜨거운 열정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축적된 지식과 절제된 감정을 통하여 두 지성인이 보여준 삶의 균형미였습니다.

 

이번에 내가 읽은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온 삶을 아이들과 함께  살았던 이오덕 <강아지똥>과 <몽실 언니>의 작가 권정생. 1973년 1월에 만나 2003년 이오덕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을 함께했던 두 분의 우정은 편지 속에 오롯이 남아 있습니다. 일념으로 서로의 건강을 염려하였고, 문학가로서 서로를 존경했던 두 사람의 편지에서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이토록 맑고 투명해질 수 있을까 감탄하게 됩니다.

 

"여기는 어제 아침에 된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꽤나 얼었습니다. 그 허술한 방에 무더운 여름을 지나게 하고, 또 겨울을 보내도록 해서 참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사람 같지 않게 살고 있는 나 자신이 한없이 미워집니다. 선생님의 새 동화집을 모든 아이들이 읽을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하고 빌 뿐입니다."    (p.229)

 

권정생의 편지에서 찢어지게 가난했던 형편 속에서도 누구보다 성실한 생활인으로서 살고자 했고, 작가로서 스스로에게 너무나도 엄격했던 그의 인간적 면모가 가감없이 드러납니다. 또한 교사로 아동문학가로 우리 말 운동가로 평생을 아이들과 함께 하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권정생의 약값과 연탄값을 걱정하고, 아동문학을 논하며, 세상을 안타까워하고 더 나아지기를 꿈꿨던 이오덕의 마음 씀씀이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서로를 시기하고 욕심내고 탐하는 작금의 우리네 삶을 아프게 돌아보도록 합니다.

 

"생활에서 도피한다는 것, 저는 찬성하고 싶지 않습니다. 생활이 없이 어떻게 글을 씁니까? 제 동화가 무척 어둡다고들 직접 말해 오는 분이 있습니다만, 저는 결코, 제가 겪어 보지 못한 꿈 같은 얘기는 쓸 수가 없습니다. 쓰려고 노력하지도 않겠습니다. 팔 병신은 팔 병신다웁게 몸을 움직이고, 다리병신은 다리병신다웁게 절뚝거리는 것이 정상이라 봅니다. 잘못된 교육은 인간의 결함을 숨기려는 데서 비인간화시켜 버린다고 봅니다."    (p.159)

 

3년 전 이맘때 <빌뱅이 언덕>을 읽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나는 이 책에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동화작가로서의 권정생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나는 사실 그의 삶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습니다. 지난했던 그의 삶에 대해, 자신의 결핵으로 인해 동생의 결혼에 방해가 될까봐 집을 나갔던 것조차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평생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등짐처럼 병을 안고 살았던 것도 그때 알게 되었었지요.

 

가까운 사람 사이에 오고 간 편지만큼 그 사람에 대해 정확히 알려주는 것은 아마 없을 듯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편지가 다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겠지요.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편지는 오직 그 사람의 품성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읽고 감동을 받았던 편지글의 책들은 하나같이 힘든 삶을 사셨던 분들이었습니다. 반 고흐도, 서경식 교수도, 권정생 작가도 우리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힘든 삶을 살았었지요. 역경 속에서 자신을 지켜낸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요. 생각해 보면 편지 속에 드러난 권정생 작가의 모습은 들꽃 같은 것이었습니다. 뽐내며 나서는 것은 아니지만 들꽃처럼 아름다운 삶이었고, 이오덕과의 어울림으로 인해 세파에 몸을 맡긴 채 흘러갈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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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눈으로 산책 - 고양이 스토커의 사뿐사뿐 도쿄 산책
아사오 하루밍 지음, 이수미 옮김 / 북노마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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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5시 55분에 맞춰진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깼다기보다 그때까지 푹 자지 못했다는 게 옳다. 내가 일어난 시각은 아마도 4시경이었을 게다. 간헐적으로 들리던 빗소리와 높아진 습도 때문에 밤새 뒤척였었다. 잔뜩 흐린 하늘. 여느 날처럼 일찍 집을 나섰다. 빗줄기는 많이 약해져 있었다. 접이 우산을 펼쳐 들고 아파트를 빠르게 벗어났다. 산을 오르는 초입에는 폐침목으로 만들어진 계단이 있다. 물기 머금은 계단을 오르자 층계참에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빗물이 물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모든 게 새롭다. 빗길을 걷는 게 얼마만인지... 산의 능선에 이르렀을 즈음 빗줄기가 갑자기 굵어졌다. 뽀얗게 물보라가 일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내 노래는 마치 칭얼대며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이처럼 반경 2~3미터를 벗어나지 않은 채 주변을 겨우 맴돌다가 빗소리에 묻혀 이내 스러진다.

 

등산로 한켠에서 고양이를 만났다. 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는 고양이였다. 하얀색에 엷은 갈색이 드문드문 섞인 고양이는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이내 자리를 떴다. 지난 번에 만났을 때는 털에 땟국물이 감돌긴 했으나 그나마 보송했는데 오늘은 털이 빗물에 젖어 착 달라붙은 꼴이 영락없는 새앙쥐다. 온통 비에 젖은 숲에서 제 한 몸을 누일 마른 곳을 찾기도 쉽지 않을 텐데 어디로 달아난 것인지...

 

아사오 하루밍의 <고양이 눈으로 산책>을 읽었다. 아침에 만난 고양이를 떠올리면 가엾고 불쌍하다는 생각부터 들지만 아사오 하루밍이 생각하는 고양이는 더할 나위 없이 똑똑하고 사랑스럽다. 물론 작가가 말하는 '내 안의 고양이'는 실물이 아닌 작가의 상상 속에서 지어낸 고양이이지만 말이다.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에세이스트인 저자는 혼자, 또는 지인들과 함께 했던 도쿄 산책을 고양이의 시선으로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작품 속에는 실제로 '내 안의 고양이'가 이따금 등장하여 작가의 행동을 일일이 간섭하고, 생각을 바로잡고, 고양이의 느낌을 전달함으로써 작품에 재미를 더한다.

 

"내 안의 고양이는 요즘 내 안에서 반만 있다. 매일 옷집 호랑고양이를 만나러 가느라 바쁘다. 옷집 현관 매트에 엎드려 졸고 있는 그 호랑이에게 매일같이 풍뎅이를 잡아 선물하는 모양이었다. 내 안의 고양이는 서로 코를 비비는 고양이식 인사를 하고 싶은데, 호랑이는 풍뎅이를 흘끗 쳐다보기만 하고 다시 잠들어버렸다. 그래도 내 안의 고양이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풍뎅이를 잡아 톡 떨어뜨린다." (p.152)

 

사람의 시선으로 도시 산책에 나설라치면 크고 화려한 곳,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 가급적이면 도로에 인접한 곳 위주로 찾게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 다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고양이는 사람이 긴요한 볼일이 없다면 절대로 들어가지 않을 듯한, 벽과 벽 사이의 좁은 골목길도 주저 없이 드나든다. 오히려 그런 곳이 고양이의 주 통로가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고양이는 도시의 한 귀퉁이에 터를 잡고 산 지 단 며칠만 지나도 그곳 지리를 훤히 꿰뚫게 되지만 사람은 도시에 이사온 지 몇십 년이 지나도 뒷골목의 지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서울 촌놈'이라는 말도 있듯이. 일부러 나다니지 않으면 동국대학교에서 남산을 오르는 남산 산책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미처 알지 못한다.

 

작가는 '내 안의 고양이'와 함께 도시의 고샅고샅을 누비고, 식사를 하고, 사람을 만나고, 고양이도 만난다. 소소한 일상 속에 도시의 낯섦이 파고든 것인지, 낯선 도시의 뒷골목에서 소소한 일상을 맞는 것인지 헷갈리지만 우리가 어떤 목적지를 향해 차를 타고 휭하니 갔을 때는 결코 보지 못했을 풍경들을 작가는 고양이의 시선으로 감탄하며 기쁘게 기록하고 있다. 이따금 작가는 인간의 감성으로 진지하게 말하기도 한다.

 

"평소에 우리는 땅 위의 사물에만 관심을 두고 지면에 대해선 잊고 산다. 하지만 관점을 조금 바꿔 요시와라가 지니는 많은 요소 중 우선 '단'을 염두에 두고 마을을 바라보면 천 년 전 이 땅에 살았던 할아버지가 구름 위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마을 어딘가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들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 또한 땅 위에서 생활하는 일원으로서, 요시와라에 흥미를 가지는 마흔 넘은 여자로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반성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며, 그냥 생각나는 대로 살고 있다." (p.192)

 

이제 비는 완전히 멎었다.내가 만났던 숲속의 고양이는 배가 불룩한 게 새끼를 밴 듯했다. 사람을 경계하는 차가운 눈매와 공격에 대비하는 낮은 자세로 인해 나는 그 고양이에게 마음을 열고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안하무인의 도시는 오직 사람들의 북적임과 떠들썩함으로 영역표시를 하고, 도시에 터를 잡고 살던 다른 동물들에게는 그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행세깨나 하는 양 사람들은 도시를 온전히 자신들의 영역으로 착각하게 되고, 도시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게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고양이의 시선으로 도시를 바라보면 모든 게 새롭고, 모든 게 경이로울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제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이 선물처럼 한아름 쏟아질런지도 모르고 말이다. 내가 매일 아침 산을 오르면서도 우연히 만난 고양이의 거처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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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앞둔 시점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이런 말을 들으면 가끔 온 몸의 기운이 한꺼번에 빠져나간다. 마치 내 몸의 어느 부분에 수채구멍처럼 에너지만 배출되는 특별한 통로가 있어서 듣기 싫은 말만 들으면 곧바로 그 통로가 열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현 정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공직자의 지나친 부도덕성(또는 탈법성)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에게는 엄격한 준법정신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줄곧 들었다.(나만 그런가? 그럴지도...) 예컨대 공직자의 기강을 내세우면서 비서실이 작성한 문건을 두고 찌라시라고 한다거나, 국정원의 간첩조작 사건은 눈감아주겠다는 식으로 함구한다거나, 국정원이나 군 기무사의 댓글 공작을 통한 선거 개입에도 도움 받은 게 없다고 말하는 식이다. 그럼에도 개인의 사소한 잘못에는 가차없이 법의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이다.

 

요즘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국정원 감청 의혹 사건만 해도 그렇다. 해킹 프로그램 구입을 대행했던 기업의 대표는 야당의 출국 금지 요구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기업의 대표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유유히 출국했다. 뿐만 아니라 해킹 프로그램을 운용했던 국정원 간부는 컴퓨터 파일을 삭제한 채 자살했다. 웃기는 건 그가 마지막으로 탔던 마티즈 승용차의 진위여부였다. ccTV에 찍힌 번호판은 흰색으로 보이는데 왜 녹색 번호판을 달고 있느냐 하는 의문에 대한 네티즌의 문제 제기. 정부는 처음에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냥 믿으라고 햇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정부의 말대로 따라야 하는가?

 

정부의 탈법이나 불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사과의 말도, 그렇다고 책임자에 대한 어떠한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국민들은 그저 정부를 믿으라는 강요, 이것이 21세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이다. 이제는 국민들의 머릿속까지 통제하겠다는 것인지, 믿으라고 명령하면 믿어지는 것인지 되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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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 - 960번의 이별, 마지막 순간을 통해 깨달은 오늘의 삶
김여환 지음, 박지운 그림 / 쌤앤파커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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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에 찾아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는 호스피스 환자들은 오늘만이 내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는 삶의 진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오늘을 오롯이 살아내려면 호스피스 환자처럼 억지로라도 한 번쯤은 미래의 죽음으로 찾아가서 '남겨진 시간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p.161)

 

<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를 쓴 김여환 님은 호스피스 병동을 지키는 의사이다. 8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900명이 넘는 환자들에게 임종 선언을 했다는 그녀의 경험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순간을 우리가 어떻게 맞아야 할지, 생과 사를 가르는 영원한 이별과 그 상실의 고통을 우리는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곰곰 생각하게 한다. 죽음이란 결국 영원히 익숙해질 수 없는 마지막 고통이지만 애써 외면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기에 우리는 하시라도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도록 채비를 해야만 하지 않을까.

 

몇 년 전 나는 독일의 유명 요리사 되르테 쉬퍼가 쓴 <내 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읽은 적이 있다. 호스피스 병동의 요리사였던 그는 자신의 책에 '죽을 준비가 된 것'과 진짜로 '죽을 수 있는 것' 사이에는 종종 고통스러운 시간이 놓여 있다,고 썼다. 김여환 저자도 폐암 말기였던 자신의 어머니를 호스피스 병원에 모시고 직접 임종 선언을 했던 가슴 아픈 경험을 이 책에 쓰고 있다.

 

"나에게도 언젠가는 긴 꿈에서 깨어나듯이 죽음이 순식간에 밀려올 것이다. 아! 이것이 운명이다! 싶으면 이미 늦는다. 인생의 마지막에는 벼락치기 공부가 통하지 않는다. 마음의 눈으로만 보이는 우리의 마지막이 빛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건강한 오늘 내가 바뀌어야 했다. 엄마가 살아갔던 삶의 끝자락을 통해서, 나의 눈부신 마지막도 지금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p.178)

 

인간은 신이 만든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말이 있다. 어디 인간뿐이랴. 지구상에 신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 생명체가 어디 하나라도 있을까마는 생명이 주어지는 그 순간만큼은 그야말로 제각각이다.금 숟가락을 물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몸뚱아리 하나만 달랑 갖고 이 세상에 오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가. 복불복의 그 순간을 두고 신은 공평하다 말할 수 있는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끝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무대의 막이 내려지듯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다. 일찍이 하이네도 ‘죽음이야말로 유일한 평등’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 그 어떤 권력을 가진 자라 해도, 아무리 아름답거나 건강한 사람이라 해도 늙지 않고 죽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에 관해서는 대부분 두 눈을 가린 채로 살아간다. 괴로워하고 힘들어하고 또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도 죽음은 기어이 밀쳐낸다. 시간이 흘러 인생의 마지막 카드가 던져질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두 눈을 가린 붕대를 벗겨내고 찬찬히 과거와 현재를 자세히 들여다보지만, 때는 이미 늦는다." (p.142)

 

건강하게 살아있을 때의 삶은 오롯이 본인을 위한 삶이다. 아니라고 부인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의 모든 것을 내줄 정도로 이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을 준비할 때는 다르다. 비록 그것은 삶의 연장선에 있기는 하지만 생명의 유한성을 강하게 인지하는 자의 이타적 발현 과정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환자 자신의 삶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 환자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배려의 과정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잘 산다는 것은 어느 하나만 잘하는 게 아닌 둘다에 해당되는 것이리라. 그러나 우리는 한 달 뒤에나 있을 시험은 손가락으로 날짜를 짚어가며 하나하나 꼼꼼히 준비하지만, 당장 내일 있을지도 모를 우리의 죽음에 대해서는 남의 일처럼 무관심한 경향이 있다.

 

"높은 학벌, 좋은 직장,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인생…. 하지만 결국 내가 세상을 떠날 때 가슴에 담고 가는 것은 자식이 좋은 대학을 나와 남부럽지 않게 능력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나는 단지 인생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나의 아이들에게 나지막이 물어보고 싶다. '나를 엄마로 만나서 진정으로 행복했었니?'" (p.238~p.239)

 

다음달이면 나는 아버지를 가슴에 묻은 지 만으로 일주기를 맞게 된다. 지난 해 이맘때쯤 장례식장을 지키던 그 며칠은 비가 억수같이 내렸었는데 벽제로 향하던 그날 새벽길은 얼마나 투명하고 맑던지... 그 뜨거웠던 햇살 아래서 나는 당신에 대한 기억들을 무한의 시간 속에 올올이 풀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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