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지 않은 순한 시간의 궤적 위에 추억이라 할 만한(혹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될지도 모를) 목록 몇 개를 별다른 목적도 없이 툭툭 던져보는 날 하늘은 조금 우중충했고, 따사로운 대기엔 탁한 미세먼지가 고였다. 아파트 주변의 너른 공원을 마스크도 없이 걸었고, 아침에 읽다 만 어느 소설의 스토리를 잠깐 생각했다.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원의 낯선 풍경. 사람들과의 대화나 공감보다는 동물에게 내리는 일방적인 명령이 더 편하고 일반적인 현상이 되어버린 도시인의 정서가 오늘의 미세먼지보다 더 탁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을까.


몇몇 동물에 대한 애정이 깊어질수록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가치는 비례하여 줄어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개 식용 금지법'을 통과시켰던 우리 국회는 가자 주민들에 대한 이스라엘 시오니스트의 잔인한 학살을 그저 남의 일인 양 외면하고 있다. 먹을 게 없어서 구호품을 향해 달려드는 가자 주민들을 향해 총을 겨눴던 이스라엘 병사들과 그와 같은 명령을 내린 이스라엘 정치인들의 잔인성이 이스라엘 전체 국민을 대변하는 이스라엘 국민성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럴 리도 없을 테고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나치의 잔인성을 닮아가고 있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와 같은 잔인한 학살에 대해 국제사회는 마땅히 분노해야 한다. 적어도 인권을 존중하는 자주 국가라면 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 정부는 이스라엘이 전쟁을 시작한 이후 이렇다 할 논평을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침묵은 암묵적인 동의와 다르지 않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은 바로 이런 것을 지적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2022년 11월 15일 기준의 세계 인구는 이미 80억 명을 넘었다. 1900년경에 20억 명이었던 세계 인구는 불과 100여 년만에 4배가 증가한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마구잡이로 학살해도 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올해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이 0.6명대로 진입할 것이라며 국가 소멸 운운하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던 걸 기억한다. 사실 출산율을 늘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젊은 사람들에게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주택을 보급하고 양질의 일자리만 제공하면 된다. 그와 같은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정책을 시행하는 순간 젊은 사람들에게 비싼 가격으로 자신의 주택을 팔려고 했던 중장년층이나 건설업체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려면 정년이 가까운 장년층의 희생이 필수적이다. 현시점에서 기득권층인 그들이 자발적으로 희생을 감내할 리가 없다. 여당의 공천 결과만 보더라도 그와 같은 사실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디올백을 받았던 어느 여인은 관종 욕망을 억누른 채 잠행을 계속하고 있다. 디올백 수수 이후 세계적인 셀럽 반열에 올랐는데도 말이다. 세상은 참으로 요지경이다. 학살의 피해자였던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을 대상으로 학살의 가해자로 돌변했고, 관종 욕망이 강했던 어느 여인은 세계적인 셀럽이 되자 모습을 감춰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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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바람이, 키가 큰 나무의 우듬지를 쏴쏴 휩쓸고 갈 때마다 나무들은 버티기 힘들다는 듯 끽끽 소리를 냈다. 등산로에 쌓인 낙엽들이 앞뒤로 몸을 뒤채며 가볍게 흩날렸다. 겨우내 계곡에 몸을 숨기고 있던 추위가 바람과 함께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연휴가 시작되는 첫날, 갑작스러운 추위 때문인지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볼에 닿는 공기가 꽤 차가웠다. 등산객의 스틱 자국이 뿅, 뿅, 뿅 지워지지 않은 채 얼어붙었다. 마치 쥐라기나 백악기의 어느 동물이 남긴 발자국처럼.


오늘은 삼일절. 일제의 강압에 맞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순국선열들의 의지가 온 나라에 울려 퍼진 날이 아닌가. 그럼에도 현 정부는 일제를 찬양하는 친일 인사를 독립기념관 이사로 임명하였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들으면 우리가 마치 일제 침략으로 인해 큰 덕이라도 본 줄 알겠다. 해방 이후 수십 년 동안 보수정권이 집권했었지만 현 정부처럼 근본이 없는, 막무가내의 정치를 하는 꼴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여권의 한 인사는 문화방송의 일기예보에 나온 숫자 1을 두고 '일기예보를 통해 사실상 민주당 선거운동성 방송을 했다.'고 말함으로써 정치를 개그의 한 부분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이런 인사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으니 대한민국의 미래가 암담할 수밖에... 더구나 일본은 정부 관료와 언론을 통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는 주장과 공세를 대대적으로 펼치고 있는데 대통령은 삼일절 기념 연설에서 "한일 양국이 교류와 협력을 통해 신뢰를 쌓아가고, 역사가 남긴 어려운 과제들을 함께 풀어간다면, 한일관계의 더 밝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참으로 안일하기 짝이 없는, 일본의 야욕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바보 같은 연설이 아닌가.

스테판 에셀의 저서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를 읽고 있다. 2010년 당시 92세의 나이로 발표했던 32쪽 분량의 작은 책 <분노하라>를 통해 세계적으로 분노 신드롬을 일으켰던 그의 저력은 이 책에서도 십분 발휘되는 듯하다.

"분노는 우리를 자각하게 해주고, 의식을 일깨우고, 체념한 사람을 무관심에서 빠져나오게 하고, 좌절로부터 걸어나와 우리의 마음을 자극하는 일에 맞서 저항하고 싸우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게 해준다. 그러나 이것은 생각의 첫 단계, 붉은 신호등,  '길의 시작'에 불과하다. 이 도약의 순간이 또다른 움직임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정당하고 중대한 임무를 달성하기 위한 우리의 능력을 결코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내가 나의 아이들, 친구들,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전하고자 하는 바이기도 하다. 우리의 모든 노력이 아직 큰 결실을 거두지 못했을지라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우리가 실천해온 앙가주망이 아직 성공의 화관을 쓰지 못했을지라도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 중에서)

오늘은 삼일절. 일본의 극우세력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부정하고 우리나라를 향해 독설을 쏟아낼지라도, 대한민국 정치인 중 일부 친일 세력들이 그들의 만행을 미화할지라도 우리는 역사의 진보를 믿고 불의에 저항해야 한다. 그리고 부정에 동조하는 여당의 정치인들과 현 상황에 분노해야 한다. 그것이 곧 우리가 정당하고 중대한 임무를 달성하기 위한 우리의 능력을 믿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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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까지 달이 밝았다. 부옇게 번지는 새벽안개를 통과한 달빛은 도심의 밝은 조명에 흔들려 땅에 닿기도 전에 스러지면서도 어스름한 등산로에 희미한 숲의 그림자를 그려놓곤 했다. 어제부터 불던 바람은 밤을 꼬박 지나 신새벽이 되어서도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새벽의 어둠을 틈타 멀리서 목이 쉰 듯한 고라니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새벽마다 오르는 이 산의 느낌이 오늘따라 꽤나 생경했던 것은 아마도 오랜만에 듣는 고라니 울음소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몇 년 전 이 산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된 후로 이따금 보이던 고라니도, 이맘때면 분주히 오가던 청설모 가족도 마치 구전설화의 주인공으로 변한 양 등산객의 시야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총선이 멀지 않은 요즘, 각 당의 공천 작업이 연일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어느 지역에 누가 후보로 지명되었는지 세세히 알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지역구에 누가, 어떤 공약으로 선거 유세를 하고 있는지 정도는 유권자로서 당연히 살펴야 하지 않을까.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당신이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해서 정치가 당신을 자유롭게 두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던 것처럼 지난 대선에서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까닭에 작금의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국민의힘 당적만 갖고 있을 뿐 보수주의자라고 말할 수 없는 대통령을 이유도 없이 지지하는 까닭과 대통령실에서 근무했던 낙하산 후보자들을 과감히 배제하지 못하는 이유, 그리고 세수결손으로 인해 서민들의 복지 혜택이 줄줄이 삭감되는 현 상황을 보면서도 여당을 지지하는 철부지 유권자들의 행태는 논리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참으로 웃긴 것은 세계사에 독재자로 이름을 올린 아돌프 히틀러의 말이다.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들을 관리하는 정부에게는 얼마나 행운인가." 당시에도 히틀러는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들처럼 여당을 지지하는 생각 없는 유권자들이 있어 행운이라고 했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말하길 "정치에 대한 참여를 거부한 형벌 중 하나는 자신보다 하등한 존재에 지배당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당신도 그런 형벌을 받고 있지는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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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가뭄이 심하던 예년과 다르게 올해는 비가 잦다. 작년 이맘때만 하더라도 등산로를 걸을라치면 발을 옮길 때마다 먼지가 풀썩 일고 매캐한 먼지내가 솔내음보다 더 진하게 퍼져나가곤 했었다. 이맘때의 등산로는 표토층만 겨우 녹아 쭉쭉 미끄러지는 통에 사정도 모르고 나온 초보 등산객의 발길을 꽁꽁 묶곤 했던 예년과 다르게 올해는 따뜻했던 겨울 날씨와 잦은 비로 등산로는 물 반 진흙 반으로 꽤나 질척거린다. 비탈진 등산로에서는 늘어진 나뭇가지를 붙잡지 않고서는 똑바로 서 있기조차 힘이 들 지경이다. 덕분에 뽀얗게 이는 흙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쓰는 일도, 산불의 위험도 크게 떨어진 게 사실이지만 왠지 나는 겨울과 봄 사이의, 이전에 겪어 보지 못한 전혀 다른 계절을 살고 있는 듯한 느낌에 마음이 께름칙한 것이다. 이제껏 본 적 없었던 겨울과 봄 사이의 1.5의 봄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습한 날이 지속되면 알레르기 비염 환자들에게 조금쯤 도움이 되지 않나 싶기도 하고, 아무튼.


남녘에선 속속 꽃소식이 전해오고, 강원도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려지는 이런 이상한 계절 한가운데서 나는 오늘도 계절과 더불어 이상한 하루를 보냈다. 제정신이 아닌 게 어디 계절과 사람뿐일까마는 나는 오늘도 분분히 낙하하는 영혼의 잿빛 무리를 목격하며 저 무리들 속에 나의 영혼도 힘없이 꺾이겠구나, 절망했었다. 허수경 시인의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의 어느 봄날에 쓴 일기 한 구절은 오늘의 날씨처럼 스산하였다.


"다만 봄이 아직 지나지 않았고 까무러칠 만큼의 고독한 시간은 이제 시작될 것이다. 당신도 그렇겠지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아, 이 고독이라는 건 정말 고독하구나. 술을 마시고 누구에겐가 편지를 쓰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이생에 더이상은 없었으면 좋겠다."


"......

섬득섬득 사라지는 빛의 봄 오후/북풍의 봄 오후/정말, 당신 때문일까,/이렇게 저녁을 준비할 자격이 있을까, 햇살아?/당신에게 부치지 못하는 편지들을 곱게 접는 봄 오후//" 


궂은 날씨를 뒤로 한 채 귀갓길을 서두르는 사람이 있고, 궂은 날씨를 핑계로 귀가를 미루는 사람이 있다. 오늘의 날씨는 두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 명확한 선을 그었다. 나는 집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하였다. 어제 읽던 허수경 시인의 유고집을 마저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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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한결 홀가분한 마음


봄날씨처럼 따사롭고 화창했던 어제는 아내 멧돼지와 함께 모처럼 진흙목욕을 했습니다. 발정기가 지난 수컷 멧돼지들에게 어쩌면 2월은 잔인한 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를 잡고 앉아 꾸벅꾸벅 조는 게 하루의 일과처럼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선거도 멀지 않았는데 그렇게 멀뚱히 앉아서 매일 잠만 잘 거냐는 아내 멧돼지의 성화에 못 이겨 나는 결국 마음에도 없는 전국 순회공연에 나섰던 것입니다. '돈생 토론회'라는 거창한 제목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내 멧돼지의 명령이라면 해외 순방도 취소하는 나로서는 그깟 국내 순회공연쯤이야 하는 심정으로 호기롭게 나섰던 것입니다.


남쪽 부산에서는 새뜻이 핀 동백꽃이 나를 반겨주었습니다. 부산에서 개최하려고 했던 국제 행사의 유치에 실패한 이후 나는 부산의 멧돼지들로부터 심한 야유와 비토 정서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나는 사실 국제 행사의 유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다만 그것을 핑계로 해외여행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사실과 재물이 많은 멧돼지들을 대동하고 언제든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행사 유치가 실패로 돌아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로는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똘마니들의 조언과 이러다 다 죽게 생겼다는 아내 멧돼지의 비명 때문에 나서기 싫은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가는 곳마다 공약(空約)을 쏟아냈습니다. 그 많은 공약을 지키려면 나라의 곳간이 거덜 나겠지만 그게 공변될 공(公)이 아니라 단순히 빌 공(空) 자 공약(空約)이라는 걸 나의 똘마니들도 잘 알고 있는 까닭에 내가 어떤 말을 하건 크게 걱정을 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시쳇말로 어차피 '뻥'이고 '쇼'일 뿐이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몇 번 뻥을 치면서 다니다 보니 대전의 한 행사장에서는 나의 연설 도중에 바른말을 하는 멧돼지가 나타났습니다. 나는 그냥 둘 수가 없었지요. 마음 같아서는 날씬하게 두들겨 패서 감옥에 처넣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똘마니 멧돼지들을 시켜 강제로 쫓아냈을 뿐입니다. 보는 눈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거를 치르기 전까지 이와 같은 쇼를 몇 번 더 진행할 요량입니다. 미련한 일반 멧돼지들은 이것이 쇼라는 사실도 모른 채 나의 공약(空約)에 열광할 것입니다.


변덕스러운 날씨입니다. 화창하고 따사롭던 날씨는 하루 만에 급변하여 소란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국운을 예견하는 듯 말입니다. 나는 어쩌면 리더가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될 무능한 멧돼지일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게 하늘을 찌를 듯한 아내 멧돼지의 욕심 때문에 비롯된 일이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나는 리더 멧돼지로서의 능력이 없으니 각자 알아서 생존을 도모하기를... 꽃이 피고 녹음 무성한 여름이 오면 나는 어쩌면 리더의 자리에서 쫓겨나 합당한 처벌을 받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만 된다면 지금보다 한결 홀가분한 마음일 테지요.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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