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바쁘게 살다보면 꼭 해야지 하고 맘 먹었던 일들 중 대부분을 손도 대지 못한 채 흘려보내곤 한다.  그럴 때마다 순간순간 드는 생각은 내가 하고자 했으나 하지 못하고 그저 계획으로만 그쳤던 일들의 목록만 따져보아도 어림잡아 한 트럭은 족히 되겠다 하는 허망함이다.  엊그제 저녁에 나는 새로 모아 가르치기 시작한 아이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외출장과 장인어른의 수술로 가르칠 아이들의 선발도 늦어졌었고, 지난 주 월요일에 약속했던 첫 수업도 하지 못했다.  형편이 넉넉한 집의 아이들은 어떻게 하면 학원을 빠질 수 있을까를 궁리하지만 지금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처럼 학원을 다니고 싶어도 가정형편상 그럴 수 없는 아이들은 수업을 하루만 걸러도 따지듯 그 이유를 캐묻곤 한다.

 

아이들에게 내 사정을 솔직하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고자 시작한 잡담이 어쩌다 보니 내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하지 못했던 일들까지 튀어나왔다.  밤 시간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흐른다.  안되겠다 싶어 나는 "결론적으로 나는 지금껏 하지 못한 일들이 너무 많아서 그 많은 일들을 마무리지으려면 이 담에 나이 들어 죽었다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게 내가 세상에 다시 태어나야 하는 이유야."하며 농담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이제 고등학생인 아이들은 내 얘기에 회답을 하듯 자신들이 나보다 하지 못한 일들이 더 많다며 그런 논리라면 서너 번은 다시 태어나야 할 거란다.

 

청명,한식도 지난, 봄이 왔다고 호들갑을 떨기에도 약간 멋적고 쑥스러운 시기인 4월.  그럼에도 아침, 저녁으로는 여전히 쌀쌀하다.  저녁을 먹고 조잘대며 나의 숙소를 찾는 중학생들과는 달리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제법 늦은 시각에 오는 고등학생들의 표정은 매우 어둡다.  현재의 어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때때로 그들의 희망과 열정마저 날려버린다.  그런 아이들을 데리고 나는 확신할 수 없는 모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년에 건강상의 문제로 공부방을 그만둘 때 이제 두 번 다시 그 어려운 일을 시도하지 않겠노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출퇴근길에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과 우연히 마주치거나 아이들로부터 걸려온 안부 전화를 받게되면서 나도 모르게 그 다짐을 깨뜨렸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요, 부와 명예가 따르는 일도 아닌데 나는 또 다시 그 험난한 길로 들어서 그동안 내가 틈틈이 쓰고 기록했던 <초보강사의 좌충우돌> 그 2부를 준비하고 있다.  직장 동료들과 가족들의 걱정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까 싶어 알리지 않고 시작된 일.  작년에는 일주일 내내 수업을 했었지만 금년에는 월,수,금만 하기로 아이들과 합의를 보았는데도 한번 겪었던 일인지라 그 압박감이 만만지 않다.  작년에 가르쳤던 아이들과 새로 선발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실수를 하고, 얼마나 많은 후회를 할런지...  

지금 중학생 아이들이 골똘히 수학문제를 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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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3월이다!

신간평가단의 일원으로 활동을 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봄날의 새순처럼 여린 슬픔이 뾰족 고개를 내밀 듯하다.  겨울이 걷힌 봄하늘에 습관처럼 '희망'을 다짐하듯 다가올 계절과 나의 미래에 작은 미소를 보낸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도서관을 멀리하는 사람은 드물지 싶다.  내가 사는 곳에도 시립 도서관이 있고, 나도 물론 시도 때도 없이 '팥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한다.  공공 도서관이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고 이런 저런 일을 겪게 되지만 며칠만 발을 끊어도 금단증상처럼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른다.  누가 나를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교도소라는 폐쇄된 공간에서도 우리네 사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싶다. 

 

 

 

 

 

 

 

2003년의 봄을 기억한다.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이 바그다드 상공에 불꽃놀이를 하듯 폭탄을 투하하던 장면.  세계 각국은 마치 축구 경기를 중계하듯 히히덕거리며 21세기의 희안한 전쟁을 실시간으로 중계했다.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살던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우리는 불구경 하듯 전쟁 구경을 했다.  아직도 나는 그 순간의 내가 인간이 아닌 듯 느껴진다. 그리고 그때의 죄책감이 지워지지 않는다. 김영미 PD의 이 책을 읽으면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아물던 마음에 다시 생채기를 내겠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만큼이야 하겠나.

 

 

 

 

 

'알랭 드 보통'을 알게 된 것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럴 테지만 나 역시 "여행의 기술"을 통하여 이 특이하고 신선한 작가를 만났다.  그 후로 많지는 않았지만 작가의 작품들을 찾아 읽게 되었고, 작가의 문체와 사색의 즐거움에 서서히 매료되었다.  더러 리뷰를 남긴 적도 있지만 내 사유의 힘이 약해서인지 '알랭 드 보통'의 작품을 읽고 리뷰를 쓴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는 나에게 작가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기대된다.

 

 

 

 

 

 

지방으로 발령을 받고 가족을 떠나 나 혼자 살게 되었을 때, 공부 때문에 혼자 살게 되었던 학창 시절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나는 한동안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렸고, 회사를 그만둘까 하는 극단적 선택을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세월이 흐르고 나는 점차 누군가에게 등떠밀린 고독이 아니라 내 스스로 선택한 '고독'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장석주 시인의 이 책을 읽는다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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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좋았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지라 집에도 가지 못하고 숙소에서 머물렀다.  참 오랜만에 맞는 하루의 자유.  오전 내내 꼼짝도 하지 않고 번데기처럼 소파에 누워 꼬물거렸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때때로 내 성격에 대해 나조차도 의아할 때가 있다.  바지런을 떨 때는 뭐에 물린듯이 악착을 떨다가도 한번 느러지기 시작하면 방바닥에 벗어 놓은 빨랫감처럼 널부러지곤 한다.  그럴 땐 대책이 없다.  '이러면 안 되는데'하는 생각이 장난감 비행기처럼 내 머릿속에서 몇 번인가 선회를 하고 느즈막히 한 술 뜨는 점심.  입 안이 소태를 씹은 것 같이 칼칼하다.

 

작년에 내가 가르쳤던 중학생 몇몇에게 전화를 했다.  손쉽게 말벗이 될 수 있는 아이들.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을까 하고 기대에 부푼, 잘 숙성된 빵반죽 같은 얼굴들이 내 방으로 굴러 들어오자 칙칙했던 공기는 금세 짜르르 윤기가 흘렀다.

 

여전히 볕이 좋은 오후에 아이들 세 명을 데리고 숙소 근처의 산을 올랐다.       

이 길과 저 길 사이에서 만난 봄기운이 발 밑에서 폭신폭신 밟힌다.  꼭 쥐고 있던 겨울이, 그 쥠 때문에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던 봄이, 그렇게 하염없던 봄이 기어코 오고야 말았나 보다.  아이들 재잘거림과 지즐대는 묏새 소리에 산은 온통 포롱포롱 날을 듯한 봄이다.  쏟아지는 햇살 때문이었는지 까무룩 졸음이 쏟아질 것 같다.  기분 좋은 땀이 등줄기에 배이고 아이들 잰 걸음에 보조를 맞추느라 헉헉 숨이 가빴다.

 

도시에 있는 산은 한겨울에도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나 보다.  새봄에 오르던 소롯한 고향 산길을 기대했던 나는 짓이겨진 낙엽과 속살이 다 드러난 등산로를 보며 일순 암담해졌다.  소소리바람이 쳤다.  땀이 마르는지 오소소 소름이 돋고 아이들 재잘거림도 멀어질 즈음 깍깍 까치가 울었다.

 

오가는 등산객을 만날 때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는 내가 아이들 눈에는 이상했나 보다.  아는 사람이냐고 묻는다.  아니, 전혀 모르는 사람인걸, 하자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 봐, 인생에서 딱 한 번밖에는 볼 수 없는 사람과 자주 볼 수 있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더 소중할까? 하고 되물었다.  그야 한 번밖에 볼 수 없으니까 그 사람이 더 소중하죠, 한다.  그렇지? 지금 산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쩌면 내 인생에서 더는 만나지 못할지도 몰라, 그래서 소중한 인연이고.  에이, 그래도 아까 보니까 인사도 받지 않고 그냥 가는 사람도 있던데요? 한다.  그럼 그러라지,했다.

 

공부방을 다시 할까? 하고 물었다.

회사원으로서의 할 일과 퇴근 후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병행하던 작년의 기억이, 그 힘들었던 피로감이 내 목소리를 붙잡았다.  기어들어가는 내 목소리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아이들 귓볼에 앉았다. 정말요? 한다.  그래, 하지만 매일은 아니고 일주일에 삼 일만,했다.  봄 햇살이 산을 타고 떼구르르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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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하면서 이벤트에는 딱히 관심도 없었고, 워낙 게으른 탓에 마음먹은 바를 제대로 실천도 못하는지라 매번 '소 닭 보듯' 지나쳤던 내가 최근 며칠 동안 한 사이트에서 주관하는 리뷰 대회에 세 권의 책을 읽고 리뷰를 올렸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연유가 있었다.  하루 종일 직장에서 숫자를 갖고 씨름하는 나의 업무상 점점 정서가 메말라간다는 자각을 아니할 수 없었고, 그래서 블로그를 일종의 '영혼의 방부제' 역할로 삼아 숨통을 틔워보자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므로 이벤트는 자연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그랬던 내가 갑자기 세 개의 이벤트를 연달아 참가하다니...

 

지난 달의 어느 날, 직장의 후배와 저녁을 같이 먹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후배가 뜬금없이 리뷰대회 얘기를 꺼내며 한번 참가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평소에 후배나 나나 직장에서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후배의 말은 전혀 뜻밖이었고 난데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직장내에서는 블로그 접속을 금하는 까닭에 후배가 왜 갑자기 그런 제안을 하게 되었는지 그 출처가 궁금했다.  후배는 내가 블로그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듯했다.

 

후배의 감수성이 미덥지 않았던 나는 왜 그런 제안을 하였는지, 그리고 그 대상이 왜 나였는지 다그치듯 물었다.  한참 동안 뜸을 들이던 후배가 식은 숭늉처럼 내뱉은 대답은 사는 게 재미없다는 것이었다.  마치 어제까지는 참 재미있게 살았는데 오늘 갑자기 있던 재미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는 식이다.  여우비에 맑게 드러난 하늘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과 전공자가 대부분인 우리 부서에서 문과 전공자를 찾다 보니 내가 눈에 띄었고, 나라면 이런 제안을 해도 자신을 '미친 놈' 취급은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단다.  그냥 재미삼아 하자고 하면 안 할지도 모르니 내기를 하자는 말도 덧붙였다.  둘 중 하나가 당선이 되면 떨어진 사람이, 둘 다 당선되면 그 순위에서 밀린 사람이, 둘 다 떨어지면 각자 돈을 내어 저녁을 먹기로 하자는 제안.  그래야 적극적으로 글을 쓰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책도 읽고 가끔 글도 쓸 수 있지 않겠냐며 떨떠름해 하는 나를 부추겼다.

 

때로는 아무 이유도 없이 따라 나서는 경우가 있다.  미적거리던 겨울이 당연하다는 듯 자리를 내주고 물러나는 것처럼.  그 다소곳함에 이유를 묻는 것은 참 부질없다.  나는 후배의 제안에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승낙을 했고. '배신자'의 낙인이 두려워(?) 글을 올렸다.  아직은 젊디 젊은 후배는 이제 사는 게 재미없단다.  그러나 조금 더 세월이 가면 곁에 뉘를 두지 않아도 지난 세월의 숱한 경험을 떠올리며 종일이라도 심심치 않게 보낼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수북한 경험들을 닳을새라 아껴가며 떠올리는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오고야만다는 것을 후배는 아직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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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참석했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던 많지 않은 친구들이 모두 모였던 것이 이제는 그마저도 나뉘어 열네 명의 친구들만 만난다.  그것도 많은지 열네 명 모두가 한 자리에서 얼굴을 보는 경우는 극히 드문 예외적인 일이고 보면 고교시절 주말마다 만나 오전 한나절을 놀다가 땀냄새 풀풀 풍기며 한 친구의 집으로 우르르 들이닥쳐 라면을 끓여내라던 그 때가 마냥 그리워진다.

 

저녁을 막고 정치인을 안주삼아 술잔이 몇 순배 돌자 대화는 자연스레 아이들 교육 문제로 옮겨졌다.  그날 나왔던 친구들 중 외벌이는 나와 친구 한 명이 고작이었고 다들 맞벌이인지라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길러진 아이들의 문제가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나와 친구는 그저 듣기만 할 뿐 반박하거나 주도할 입장은 아니었다.  술잔이 도는 횟수가 더할수록 그동안 꽁꼼 싸매고 숨겨놓았던 이야기들이 봇물처럼 터져 신세한탄으로 이어질 때까지 우리는 멍하니 듣기만 했다.

   

지방에서 상경해 대학을 마치고, 취직을 하고, 짝을 찾아 결혼을 하고, 하나 둘 아이를 낳고, 이제는 그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에서 삶의 낙을 찾는 나이가 되었건만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던지 신입사원 시절의 단정한 모습도, 야망과 오기로 똘똘 뭉쳐 빈 틈이 없어 보였던 그들의 삶도  술기운에 게게 풀린 몸뚱이처럼 세월의 흐름에 흐트러지고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부자의 대열엔 들어서지 못했지만 큰 어려움 없이 아이를 교육시키고, 자신들의 체면을 유지할 정도로 먹이고 입힐 수 있는 정도의 경제적 여건을 갖추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건만 부모의 사랑스런 눈길을 받으며 자라지 못했던 아이들은 게임 중독과 나태함, 방종, 반항 등 부모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고민이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갖은 방법을 다 써보고, 어르고 달래도 보았으나 백방이 무효였다는 것이다.  무작정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아이를 데리고 정신과를 찾기도 했었단다.  그러나 육체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만 마음의 상처는 어떤 방법으로도 고쳐지지 않더라고 하소연했다.

  

부모의 체면, 경제적 편의, 또는 경쟁 의식에서 비롯된(맞벌이 부부 대다수가 부정하겠지만) 양육의 포기 또는 방치는 자녀의 미래를 그 댓가로 지불하곤 한다.  나는 아이들의 영혼이 부모의 시선을 먹고 자란다고 믿는다.  아이들에게 부모의 시선을 자양분으로 주지 못하는 처지라면 약간의 경제적 풍요는 오히려 아이들에게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하는 것을 주변에서 종종 보곤 한다.  그런가 하면 배를 곯을 정도로 가난한 집 아이들은 부모의 방치에도 불구하고 일찍 철이 들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동생들을 돌보며 잘 자라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아이들의 영혼은 부모와의 사랑스런 눈맞춤, 또는 극한의 상황에서 얻어지는 생존 본능의 발현으로 이루어지는 듯하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동의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경제적 편의나 자신들의 체면을 위해 맞벌이를 선택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잘못 성장했을 때 그 모든 책임을 아이들에게 돌린다.  "내가 너에게 못해준 것이 뭔데?"라며 항변하듯 외친다.  아이들도 과연 부모의 사랑과 경제적 편의 중에 경제적 편의를 선택하겠노라고 동의했던 것일까?

 

술을 먹지 못하는 나는 취하여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친구 한 명과 함께 지하철을 탔다.

주말의 고단한 피곤이 덜컹거리며 승객들을 비웃고 있었다.  그렇게 한 주가 저물고 습관처럼 출근을 하면 자울거리는 시간과 또 어찌어찌 하루해가 저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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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2-15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꼼쥐님의 생각과 같은 사람 중 한 사람이고 그것을 실천하며 살려고 하는데, 별것 아닌 이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데 '소신'이 필요하더라고요. 그 소신 지키며 살기가 참 쉽지 않다 싶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시선을 먹고 자란다는 말씀, 참 마음에 듭니다.

꼼쥐 2012-02-16 22:46   좋아요 0 | URL
아이의 미래와 부모의 체면이나 경제적 편의, 무엇을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는 가치관에 따라 다르겠지요. 저는 물론 아이의 미래를 선택하자는 쪽이지만 쉽지 않은 문제인 것만은 확실한 듯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