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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세월호 희생자 합동 분향소를 다녀왔습니다.

간간이 비가 내렸고, 짙어가는 어둠 저편으로 바람이 불었습니다.  뚝 떨어진 기온만큼이나 스산한 날씨였습니다.  분향소 안을 떠돌던 무기력과 슬픔이 돌아서는 내 어깨에 천 근의 무게로 내려앉았습니다.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무력감이 짙어가는 어둠 속에서 바닷물처럼 차올랐습니다.

 

차창 밖으로 이팝나무 가로수가 비를 맞으며 크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찬물에 만 밥알갱이들처럼 푸스스 흩어지는 이팝나무꽃이 어찌나 쓸쓸해 보이던지요.  예년 같으면 나는 그 꽃을 보며 찬란한 5월을 준비하고 있었겠지요.  그러나 올해는 달라도 너무 다르군요.  처음인 듯 생경한 느낌.  흐르는 세월이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을 잊게 하고, 권력과 탐욕에 찌든 사람들도 언젠가는 백기를 들겠지만, 그 과정을 겪는 우리에게 세월은 참으로 더디게 흘러가는 것만 같습니다.

 

어찌어찌 마음을 다잡아보려 했던 최근 며칠의 노력이 무위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제단에 피어오르던 향냄새와 수북이 쌓여만 가던 국화꽃이 머릿속에서 파도처럼 일렁입니다.  살다 보면 별의별일을 다 겪게 마련이지만 생과사의 갈림길에 서면 모든 게 다 헛된 것처럼 허허로운 느낌만 가득합니다.  지나친 감상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허방을 짚은 듯 나를 꼿꼿이 세울 수가 없군요.

 

한 일도 없이 오전이 다 흘렀습니다.

어제부터 시작된 두통이 머릿속을 콕콕 찌르는 듯 헤집고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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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라고 다르진 않습니다.  며칠째 책도 손에 잡히지 않고 한 줄의 글도 쓰지 않은 채, 마치 물 속에 잠겨 숨만 쉬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며칠 새에 등꽃이 피어, 혹은 지려하고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인 양 제 멋대로 피었다 또 제 멋대로 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변덕 심한 봄날씨에도 그저 흘러가는 세월쯤으로 치부하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제 주변의 사람들도 다르지 않더군요.  작은 일에도 짜증을 내거나 말수가 줄다 못해 아예 입을 닫아버린 사람들, 멀뚱히 TV 화면을 지켜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대한민국은 지금 슬픔의 어항 속에 갇힌 굼뜬 열대어들로 가득차 있는 듯 보입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미없는 글이라도 끄적거리지 않으면, 어제 오늘 유난히 따가운 햇살을 더듬지 않으면, 봄꽃 만발한 화단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면 어디서부터 우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습니다.  상실의 고통은 아무리 많이 겪어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지만 언 땅을 뚫고 소생하는 복수초처럼 꺼져가는 생명력에 다시 기운을 북돋울 때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근 일주일만에 잡은 책.  여전히 생각은 부유하는 슬픔의 어항 속에서 까닭도 없이 흔들리지만, '생각불가'라는 딱지를 붙여 봉인하고 살아야겠다고, 이제는 정말 삶을 붙잡고 매달려야 할 때라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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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2014-04-24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아내는 세월만큼 인간스러워 지는건 아니라는걸 절실히 보고 듣고 있습니다. 정치판이 저런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지 , 원래 그런 사람들이 정치에 몸담게 되는지 , 몇몇사람들 정말 무뇌같습니다. 허망하고 허무하고 그러네요

꼼쥐 2014-04-27 13:34   좋아요 0 | URL
살아낸 세월만큼 인간의 영혼이 성숙되는 건 아니라는 데 공감합니다. 인간의 성숙도가 세월에 비례하는 것도 아니겠지요. 저도 TV를 보면서 분노하는 건 그런 인간들을 정치의 주체로 뽑아놓았다는 현실입니다.
 

세월호의 침몰 사고가 발생한 지 만 사흘이 지났습니다.

저는 그동안 언론의 보도로부터 일부러 멀어지려 애써 왔습니다.  그렇다고 그 소식들이 들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사고에 대처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판에 박인 행태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저으기 만족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오늘 처음으로 마주한 TV 보도를 보면서 저는 슬픔보다는 오히려 화를 억누를 길이 없었습니다.  마치 야구 중계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요.  실시간으로 보여지는 탑승자 수, 구조자 수, 사망자 수가 마치 스트라이크, 볼, 아웃을 표기하는 자막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이미 고인에 대한 애도나 추모의 숙연함보다는 숫자가 올라가는 흥분과 들뜬 분위기만 남아 있는 듯했습니다.

 

게다가 더욱 분통을 터뜨리게 했던 것은 그런 행태에 여러 방송사가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사망자가 29명이든 30명이든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자체로 이미 안타깝고 슬픈 것입니다.  스무 명의 죽음이라고 해서 슬픔도 스무 배가 되는 것도 아니요, 그렇게 될 리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아까운 생명의 죽음 앞에서조차 매번 경망스럽고 헛된 짓만 하는 걸까요.

 

오히려 하나의 주관 방송사가 차분하고도 통일되게 슬픈 소식을 전할 수는 없는 걸까요?  흥분하거나 경망스럽지 않게 말입니다.  이런 행태는 중심을 잡아야 하는 정부 관계자들도 다르지 않더군요.  대통령에게 잘 보이려고 그랬는지 그 이유는 알 길 없지만 탑승자 수나 구조자 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짓거리입니까.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국민들에게 사망자의 숫자가 그렇게도 중요했던 것인지 저는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까닭도 없이 죽어가야 했던 그 각각의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와 절망감보다도, 그 유가족들의 애끓는 심정보다도 사망자의 숫자가 그렇게도 중요했는가 말입니다.  정말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한 생명의 삶조차 한낱 의미도 없는 경쟁에 이용하려는 그들의 사고가 저는 마냥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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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책이라...  나는 정말 모르겠다.  책이 나에게 어떤 의미냐고 묻는다면 나로서는 정말 할 말이 없다.  이건 정말 멍청한 질문이다.  혹시 이런 질문은 어떨까?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라고 묻는다면.  나도 안다.  궤변도 그런 궤변이 없다는 사실을.  그러나 나에게는 그 질문이 그 질문일 뿐이다.  왜냐하면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말하자면 기억할 수 있는 연령의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책과 떨어져 지냈던 적이 결단코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 설명하거나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대상과 나 사이에 어느 정도의 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에 곧바로 대답할 수 없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나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스운 대답일지 모르지만 내게 책이란 동일시되는 나 자신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책과 가까워진 계기는 부끄러운 애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아버지의 폭력 때문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드셨던 아버지를 피해 나는 친구네 집을 전전했고, 그럴 때마다 책에 빠져 들었다.  한국전래동화나 세계문학전집, 셜록 홈즈나 괴도 뤼팽, 심지어 무협소설에 이르기까지 나는 밤이 늦도록 친구의 눈치를 보며 책을 읽었고, 아버지가 잠드셨을 늦은 시각에야 집으로 향하곤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도시로 전학을 나와 형과 함께 자취를 하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아니, 놓을 수가 없었다.  내가 새로 사귄 도시의 친구들 앞에서 조금이나마 어깨를 펼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은 책밖에 없었으므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해서도 다르지 않았다.  등록금의 부담에서 자유로웠던 나는 아르바이트에서 번 돈으로 마음껏 책을 살 수 있었다.  그만한 호사가 없다고 늘 생각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한 후에도 가방에는 언제나 책이 한두 권쯤 들어 있었다.  그리고 직장을 그만두면서 시작했던 첫 사업에서 큰 실패를 경험했을 때, 그 암울했던 긴 터널을 빠져나오게 한 것도 역시 책이었다.

 

아내뿐만 아니라 나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은 간혹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게 말할 때가 있다.  책 좀 그만 읽으라고.  그러나 멈추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외로움을 달래주던 어릴 적 기억 때문인지, 친구네 집에서 읽던 책에서 나던 퀴퀴한 곰팡내의 평온한 느낌 때문인지, 아니면 시간의 흐름을 잊기 위함인지...

 

어쩌면 나는 번지점프대 위에 오르는 순간에도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있어야만 안심이 되는 그런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책은 나 자신과 구분되지 않는 그 무엇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이없는 일은 아들놈도 나처럼 책을 즐긴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대책이 없다.  나도 남들처럼 이 질문에 우아하고 멋진 말들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그런 글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형편없는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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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4-19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까지나 아름다운 길동무로 책을 곁에 두면서
삶을 사랑하시기를 빌어요

꼼쥐 2014-04-24 11:4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아마 제 삶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어느 아파트나 비슷하겠지만 제가 사는 아파트에도 청소를 담당하는 아주머니 한 분이 있습니다.  짧게 자른 파마머리에 세월의 흔적이 얼굴 곳곳에서 묻어나는, 그러면서도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그런 분이죠.  물론 저는 그분의 이름도, 가슴 속에 아로새겨진 눈물의 문신들도, 혹은 즐거웠던 어느 봄날의 추억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언제나 같은 시각에 집을 나서는 까닭에 1층 현관의 계단을 청소하고 있는 그분과 저는 매일 아침 비슷한 장소에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할 뿐입니다.

 

지난 금요일 아침에도 비슷한 풍경으로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현관을 나서는데 그분도 잊은 물건이 있었는지 제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할아버지 한 분이 청소 아주머니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고, 곧 이어 아주머니도 밝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사를 마친 할아버지가 요즘 어찌 지내느냐 물었나 봅니다.  아주머니는 "머슴살이가 뭐 늘 비슷하지요."하자, 할아버지 왈, "아줌마가 왜 머슴이야?" 하고 되물었습니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놓아두었던 빨간 양동이를 집어 들며 아주머니께서는 담담히 대답하기를,

"사는 게 다 머슴살이 아닌가요?" 하였습니다.  저는 다만 그분들의 이야기만 들으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그 순간 아주머니의 말씀이, 그 한마디 말이 왜 그토록 크게 들렸었는지...  '누구나의 삶도 다만 하나의 머슴살이에 지나지 않는구나.'하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물 먹은 종이처럼 차곡차곡 쌓였을 세월의 그림자들이 아주머니의 그 한마디에 다 배어 나오는 듯했습니다.  마음이 금세 축축해졌는지 할아버지도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초록이 싱그러운 봄날이었고, 아름다움 뒤에는 언제나 가슴을 적시는 슬픔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꼈던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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