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오후 네시 블루 컬렉션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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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소설은 이따금 현실에선 맞닥뜨릴 수 없는 가슴 답답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스토리의 진행이나 결말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럴 때는 정말이지 곁에 있는 가까운 사람에게라도 화풀이를 하여 속에 있는 응어리를 시원하게 풀어버리고 싶은 심정이 절로 드는 것이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되고, 그럴 수도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소설을 쓰는 작가는 답답한 독자들의 마음에는 영 관심이 없다는 둥 풀어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답답한 것은 오직 독자의 몫으로만 남을 뿐이다. 그렇다고 기껏 읽던 책을 결말도 알지 못한 채 내팽개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진퇴양난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일 게다.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오후 네시>는 책을 읽는 독자들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답답함에 나도 모르게 가슴을 치게 되는 그런 소설이다. 이야기는 은퇴한 노부부가 꿈에 그리던 자신들만의 집을 갖게 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제 그들은 혼잡한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호젓한 시골 생활을 즐기며 행복한 노후를 보낼 생각에 마냥 들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사한 집에서 가까운 단 하나뿐인 이웃인 팔라메드 베르나르댕 씨가 방문한다. 의사 출신이라는 그의 방문을 부부는 반갑게 맞이한다. 그러나 그 이웃은 첫 방문 이후 매일 같은 시각에 찾아와 두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안락의자에 꼼짝 않고 앉아 있다가 돌아가곤 했다. 그는 이제 불청객의 수준을 넘어 부부의 평화와 안식을 깨트리는 공포의 대상으로 변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세월이 느리게 간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온 세상 사람들이 세월이 빨리 간다고 떠들어 댄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해 1월만큼 그 말이 틀렸던 적도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루에는 각 시간대별로 독특한 리듬이 있었다. 저녁나절은 길고 안온했고, 아침나절은 짧고 희망에 넘쳤다. 오후의 초반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고통이 시시각각 심해져서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그리고 4시가 되면 시간은 진창 속에 처박히는 것이었다."  (p.85~p.86)


부부는 이제 불청객으로 변한 베르나르댕 씨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별별 수단을 다 강구한다. 베르나르댕 씨가 올 시간에 맞춰 집을 비운 채 산책을 나가기도 하고, 베르나르댕 씨가 듣건 말건 지루한 이야기로 대화를 이끌어 머무르는 시간이 고통스럽도록 유도하기도 하고, 저녁 식사에 베르나르댕 씨 부부를 함께 초대하기도 하고, 자신이 가르쳤던 옛 제자의 방문을 흔쾌히 허락하기도 한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였다. 베르나르댕 씨를 떼어내려 하면 할수록 자신에 대한 자각과 함께 자존감의 하락이 몰려왔다.


"나는 일개 시골 고등학교 교사로 40년 동안 세상이 경원하는 사어(死語)를 가르쳤고, 찬란한 원칙이라는 미명하에 아내에게 평범한 즐거움들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생활에서 내가 얻어 낸 자그마한 이점, 다시 말해서 재능 있는 학생의 진심 어린 경탄의 감정은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그 젊은 처녀의 눈빛에서 나를 가엾은 늙은이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읽었던 것이다."  (p.141)


주인공은 결국 다시는 방문하지 말아 달라는 경고를 베르나르댕 씨에게 하게 되지만 소심한 성격의 주인공 역시 그날 이후 이유도 알 수 없는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이웃집 남자의 자살 시도 장면을 목격한 주인공은 그를 구해 낸다. 공포의 대상이자 미움의 대상이었던 이웃집 남자의 자살을 못 본 척 넘길 수도 있었는데 그를 구해 준 의미를 주인공 본인도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한 질문은 이제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무엇인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으로 확대되는데...


"오늘은 눈이 내린다 1년 전 이곳으로 이사 온 그날처럼. 나는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본다. <눈이 녹으면, 그 흰빛은 어디로 가는가?>라고 셰익스피어는 묻고 있다. 그 이상 위대한 질문이 어디 있으랴. 나의 흰색은 녹아 버렸고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두 달 전 여기 앉아 있었을 때,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었다. 아무런 삶의 흔적도 남기지 않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쳐 온 일개 교사라는 것을. 지금 나는 눈을 바라본다. 눈 역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녹으리라. 하지만 이제 나는 눈이 규정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p.217)


내 주변에도 은퇴 후 전원생활을 즐기겠노라는 선언과 함께 시골에 집을 짓고 귀촌을 했던 지인들이 몇몇 있다. 그러나 그들 중 90% 이상의 사람들이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도시로 복귀하고 말았다. 금전적 손해를 감수하면서 복귀를 단행하게 된 구체적인 원인이야 알 수 없겠지만, 시골 원주민들과의 갈등이나 평생 길들여진 도시 생활의 패턴을 버리지 못한 게 주된 이유 중 하나였음은 물론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는 공포의 대상이거나 기피하고픈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만남의 횟수나 물리적 근접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결코 아니다. 결국 우리는 매일 만나고는 있지만 상상 속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살인을 꾀하는 어떤 대상과 섞여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오후 네시>의 주인공 에밀과 베르나르댕 씨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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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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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도 그것은 다만 보는 이의 시각이나 관점의 차이일 뿐 제자리이거나 오히려 뒷걸음질 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건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게 된 나 자신에 대해 꽤나 기특한 마음이 들었고, 삶의 진실을 향해 조금쯤 거리를 좁힌 듯하여 뿌듯해했던 것이다. 다른 이의 칭찬이 없다 해도 말이다. 직장에서 승진을 하거나 작년에 비해 돈을 조금 더 모았다거나 하는 일들은 일견 내 삶에 있어 진전이나 발전인 듯 보이지만, 그 작은 성취를 이루기 위해 내가 포기해야 했던 많은 것들을 생각할 때 내 자신이 문득 측은해지는 것이다. 개인의 영역을 넘어 사회 전체로 확대했을 때도 그와 같은 현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 문명으로 인류의 삶이 풍족하고 여유 있게 변하는 듯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직장을 잃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우리의 미래가 암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는 나처럼 생각하는 소수의 사회 구성원들에게 위안과 긍정의 메시지를 전한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하여 인간의 출생과 자유까지 마음대로 통제하는 미래의 문명 세계를 그린 이 작품은 가족이라는 유대가 사라진 세계, 죽음까지도 익숙해지도록 길들여진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던지는 한편 기술의 진보와 과학의 발전이 우리 인간을 과연 어떤 곳으로 인도할 것인지 깊게 살펴야 한다고 조언한다.


“세계는 이제 안정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행복하고, 원하는 바를 얻으며, 얻지 못할 대상은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잘살고, 안전하고, 전혀 병을 앓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늙는다는 것과 욕정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즐겁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 때문에 시달리지도 않고, 아내나 아이들이나 연인 따위의 강한 감정을 느낄 대상도 없고, 마땅히 따르도록 길이 든 방법 이외에는 사실상 다른 행동은 하나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리고 혹시 무엇이 잘못되는 경우에는 소마가 기다립니다. 그것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당신이 창밖에 던져버렸어요, 야만인 씨. 자유 말입니다!” 그가 웃었다. “델타들이 자유를 이해하리라고 기대하다니! 그리고 이제는 그들이 「오셀로」를 이해하리라고 기대하고요! 참 순진한 청년이군요!”  (p.333~p.334)


생물학자로 유명했던 할아버지 토머스 헨리 헉슬리와 생물학자로 유네스코 초대 회장을 지냈던 그의 형 줄리언 헉슬리 등 명문가에서 성장한 올더스 헉슬리는 종교와 철학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말년에는 동양철학과 불교에도 관심을 보였던 헉슬리 자신의 사상은 이 책에 등장하는 원시 지역(Reservation)의 ‘야만인’ 존을 통하여 표출된다.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의 다섯 계급으로 나뉘어 ‘맞춤형’ 대량 생산으로 탄생하는 인류, 그들은 하나의 난자에서 수십 명의 일란성 쌍둥이들이 태어나고, 반복되는 수면 학습과 세뇌를 통해 어떠한 의문도 갖지 않고 정해진 운명에 순응한다. 노화도, 외로움도 겪지 않는 인류는 원할 때면 언제든 문란한 성관계를 맺는 등 쾌락과 만족감 속에서 삶을 향유한다. 노동 시간 이외에는 단순한 오락들로 짜여진 일과를 보내고, 혹여라도 기분이 나쁘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겪으면 소마(soma)를 통해 즉각적인 쾌감을 경험한다. 소마는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사고 능력까지 빼앗는다. 이 세계의 구성원은 모두가 행복하다.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야만인이 도전적으로 말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늙고 추악해지고 성 불능이 되는 권리와 매독과 암에 시달리는 권리와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고생하는 권리와 이虱투성이가 되는 권리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아갈 권리와 장티푸스를 앓을 권리와 온갖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할 권리는 물론이겠고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요구합니다.” 마침내 야만인이 말했다.
  (p.362~p.363)


100여 년 전에 발표되었던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주는 충격은 당시에 비해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지금 올더스 헉슬리가 상상했던 미래의 모습에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기 때문이다. 조직화된 꿀벌의 세계처럼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에게 부여된 직분에 충실하고, 아무 생각도 없이 기계적으로 활동하며, 노후의 삶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이 사라지는 게 과연 행복일까. 야만인 청년 존을 통해 유토피아와 원시 세계를 비교하고 있는 이 소설은 우리에게도 야만인 '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것을 권한다. 문명사회를 떠나 원시 사회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 잔류할 것인지...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가 대기층에 미세먼지의 농도를 더하고 있다. 하나가 좋으면 반드시 하나가 나쁠 수밖에 없는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의 규칙인가 보다. 어쩌면 우리가 간절히 기도했던 새해 소망이나 바람도 그 대가로 우리가 잃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다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주말 휴일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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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김욱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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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도둑눈이 조금 내렸다. 기척도 없이. 그렇게 내린 눈은 어느 중년 가장의 머리칼처럼 멀리 보이는 뒷산 풍경을 희끗희끗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어느 중년 가장의 한숨처럼.


요즘 서점가에는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인기가 드높다. 도대체 왜?라고 묻는다면 나로서도 딱히 할 말이 없다. 왜 지금 시점에?라고 질문을 바꾸어 묻는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차라리 쇼팽이나 쇼스타코비치라면 모르겠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일정 부류의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라니. 여러 궁금증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건 나에게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었던 듯하다. 몇 번 만나 이름만 겨우 아는 지인이 한민족이 원래 이렇게 철학적인 민족이었어?라고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해댈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것도 평일의 늦은 밤에. 앞뒤 맥락도 없이.


"세상에 진실한 것이 있을까. 진지하게 마주하고도 상처받지 않을 희망이 존재할 수 있을까. 세상은 그저 먼지 쌓인 침대와 같아서 인생은 눕기를 바라고, 잠들기를 바라고, 영원히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소원도 없다. 사람을 자살로 이끄는 절망도 따지고 보면 찰나에 주어진 통증 같은 것이다."  (p.42)


시류에 편승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는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를 읽었다. 읽게 되었다거나 읽음에 처해졌다거나 읽어버렸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찌 보면 원하지도 않았던 책을 비자발적인 동기로 읽게 되었지만 책의 내용은 생각보다 좋았다. 철학자의 저서라고 해서 현학적인 말들로 가득 채워진 것도 아니요, 염세주의 철학자인 쇼펜하우어 본인의 사상에 비추어 볼 때 그의 글이 지극히 절망적이거나 딱딱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따금 보이는 위트와 유머는 왠지 모를 미소가 번지게 했다.


"젊은이들이여, 돈과 명예에 한 번뿐인 삶을 팔지 말라. 돈과 명예는 부도덕한 자들과 동행하지 않는 한 그대들을 반기지 않는다. 물질과 직위는 사람의 성품을 얕은 여울로 인도하는 사막의 물길임을 기억해야 한다."  (p.160)


글을 마무리 짓기 전에 앞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한 나 나름의 답변을 해야 할 시점이 된 듯하다. 그렇다고 책을 통하여 완벽한 답변을 준비했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쇼펜하우어에 대해서 쥐뿔도 몰랐던 내가 이 책을 읽음으로써 조금이나마 그의 생각을 이해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굳이 나의 대답을 제시하는 까닭은 우리들 마음속으로만 간직했던 속내를 쇼펜하우어가 속 시원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친한 친구에게도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마음속 생각을 쇼펜하우어는 족집게처럼 쏙쏙 뽑아내어 거리낌 없이 쓰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체면 때문에 혹은 그렇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으로 짐짓 안 그런 척 허세를 부렸던 우리로서는 쇼펜하우어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저 아프면서도 반가운 것이다.


"많은 재물을 소유한 자들, 사람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들, 천국이 저희 것인 양 함부로 면죄부와 구원을 판매하는 목사들마저도 나이가 들면 그들이 누리는 권위와 명성보다 나이를 먹고 몸에서 빠져나간 혈기와 기운을 그리워한다. 천국이 가까워졌음에도 밤마다 욕정에 시달려 침상을 뒹굴던 수십 년 전의 보잘것없었던 자신을 그리워한다."  (p.55~p.56)


새해가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 많은 이들이 계획을 세웠을 테고, 어떤 이는 그 계획에 따라 지금까지 착실히 실천에 옮겼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벌써 작심삼일을 실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새해가 되면 많은 이들의 희망고문이자 계획인 부자 되기 프로젝트를 세운 이들은 어쩌면 쇼펜하우어로 인해 그 계획을 모두 지워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허무맹랑하고 무모한 계획을 실천하느라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느니 오히려 실현 가능하고 즐거운 일에 매진하는 게 백 번 옳은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터, 그것이 어쩌면 지하에 계신 '쇼' 선생을 기쁘게 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고 썼던 폴 발레리의 시구를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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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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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술을 못 마신다. 불행하게도 내 몸에는 알코올을 분해할  때 생성되는 아세트 알데하이드를 제거하는 효소가 전혀 없거나 있더라도 타인에 비해 대단히 적다는 것이다. 내가 술을 해독하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던 건 대학에 입학한 후였다. 술을 조금만 마셔도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속이 거북해서 토하기 일쑤였다. 그런 나를 보고 선배들은 자꾸 마시다 보면 술도 늘고 그런 증상도 사라질 거라며 위로와 함께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그러나 선배들의 진심 어린 조언에도 불구하고 나의 체질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술은 입에도 대지 못하면서 어쩌다 참석한 술자리에선 언제나 술에 취한 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고단한 일과를 보내곤 한다.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차라리 내가 마시고 취하는 게 낫겠다.'는 푸념을 넋두리처럼 내뱉으면서 말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일약 스타 작가가 된 정지아의 에세이집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는 나와 같은 특이 체질의 사람들에겐 그저 대리만족의 경험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술에 얽힌 작가의 잡다한 경험을 풀어놓은 이 책이 그닥 부담스럽지 않았던 건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작가의 너스레와 솔직함에 있지 않을까 싶다. 틀에 박힌 유교적 사고방식의 굴레에서 성장했을 성싶은 그녀가 '여자'라는 불리한 조건하에서도 그처럼 다양한 사람들과의 음주 문화를 즐길 수 있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지만 그럴 수 있었던 건 아마도 남녀평등을 신념으로 삼았던 빨치산 아버지를 둔 덕분이 아니었을까.


"내가 이런 이야기를 엄마가 아니라 아빠에게 한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 엄마는 남녀평등을 원해서 사회주의자가 되었지만, 당신 딸을 대하는 마음은 여느 엄마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남자애들과 밤을 새워 논다는 걸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반면 아빠는 진정한 평등주의자였다!"  (p.22)


소문난 애주가이자 자칭 시티걸이었음을 강조하는 작가는 해가 짧은 구례의 산간 마을에서 고양이 네 마리와 두 마리의 개, 그리고 100세에 가까운 어머니와 함께 산다고 했다. 한적하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고 있을 듯한 풍경이지만 그녀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지리산의 눈에 담을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술을 부르고, 혼자 취할 수 없는 기나긴 밤이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술 한 잔에 녹아든 옛 시절의 추억과 사람들. 고향에서, 수배길에서, 강단에서, 먼 이국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소주를 숟가락으로 떠 계란에 붇던, 큰아버지의 그 조심스런 손길이 그립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렇게 속절없는 게 아닐까. 무슨 일로 심사 복잡한 날이면 고립된 우주 같던 큰아버지의 방이 떠오르고, 큰아버지에게 술 한잔 대접하지 못한 게 마음에 얹히고, 위스키가 아닌 소주가 그리워진다. 위스키로는 달래지지 않는, 소주로밖에는 달랠 수 없는 어떤 슬픔이, 우리 민족에게는 있는 모양이다."  (p.106)


별것도 아닌 이야기들을 읽으면서도 책에서 손을 떼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술보다는 그녀의 인생 이야기에 끌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깨트릴 수 없는 벽에 잔금을 내고 종국에는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서로가 확인할 수 있는, 마법과 같은 음료가 술 아니겠는가.


"나에게도 찬란한 젊음의 시절이 있기야 했겠지. 그때의 나는 몸 따위 돌아보지 않았다. 몸 따위, 하찮았다. 정신은 고결한 것, 육체는 하찮은 것. 그래서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는 모든 행위를 혐오했다. 혐오라니. 몸이 있어 존재하는 것인데. 젊은 나는 참으로 하찮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하찮게 천대해왔던 불쌍한 나의 몸에게 블루를, 귀하디귀한 블루를 아낌없이 제공했다. 아름다운 육체가, 찬란한 젊음이 펼쳐보이는 어느 여름날의 천국에서."  (p.262~p.263)


누군가에게 술은 고단한 삶을 견디게 하는 위로와 희망의 손길이 되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도록 하는 마법의 양탄자가 되기도 한다. 녹록지 않은 현실,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 견딜 수 없는 삶의 고통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 다리를 뻗고 편안히 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술이 우리에게 주는 크나큰 혜택일지도 모른다. 사회주의자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늦둥이 딸로 태어나 독재정권으로부터 늘 감시의 대상이 되었던 작가가 술을 매개로 좋은 사람들과의 연대를 꿈꿀 수밖에 없었던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 터, 그에 얽힌 질펀한 이야기들이 이보다 훨씬 더 많지 않았을까 싶다.


갑진년 새해 첫 주가 포근한 날씨 속에서의 진득한 미세먼지처럼 몽롱하게 흩어지고 있다. 술도 마시지 못하는 내게 한잔 하라고 권하는 듯 말이다. 나를 위로하는 누군가에게 건배를 청하고 싶은 밤. 그렇게 2024년의 첫 주가 미끄러지듯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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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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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감정을 등급별로 명확히 선을 그을 수는 없겠지만, 소설가 최은영은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가장 낮은 등급에 자신의 감정을 위치한 채 글을 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최은영 작가가 표현하는 감정은 대체로 슬픔에 국한된다고 하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곳의 슬픔, 타인이 느끼는 날것 그대로의 슬픔을 자신의 가슴에 넘치도록 가득 담아 자신이 쓰고자 하는 한 문장 한 문장의 소설에 고스란히 우려내는 것을 볼 때마다 내게는 없는 그 능력이 내심 부럽기도 하고, 이따금 질투를 쏟아낼 때도 있지만 작가의 재능을 아끼는 한 사람의 애독자로서 무엇보다 작가의 건강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많다. 소설을 쓰는 얼마 간의 시간 동안 그와 같이 깊은 슬픔에 젖어 지낸다는 건 개인의 건강에는 아무래도 독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가 전달하는 낱낱의 감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건 독자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반가운 일이겠지만 말이다.


"어느 날 퇴근하던 길, 나는 그녀를 마음속으로 부르고 긴 숨을 내쉬었다. 나의 숨은 흰 수증기가 되어 공중에서 흩어졌다. 나는 그때 내가 겨울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겨울은 사람의 숨이 눈으로 보이는 유일한 계절이니까. 언젠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을 참으며 긴 숨을 내쉬던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보일 것처럼 떠올랐다. 그 모습이 흩어지지 않도록 어둠 속에서,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p.44~p.45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중에서)


최근에 발간되어 독자들로부터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역시 우리의 감정 가장 깊은 곳을 자극한다. 은행원이었던 '희원'이 뒤늦게 대학교 영문과에 편입한 후 만났던 시간강사와의 관계와 헤어짐을 되돌아보면서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는 내용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교지 편집부 활동을 함께 했던 세 사람의 경험과 한계를 그린 '몫', 비정규직 문제 속에서 동갑내기 인턴 다희와 카풀을 하면서 전혀 다른 대화를 하는 지수의 관계를 다룬 '일 년', 엄마가 집을 나간 뒤 부모 역할을 해온 언니와 그 언니가  결혼을 한 후 형부로부터 무시당하는 현실의 모멸감에 맞서려는 ‘나’의 모습을 그린 '답신', 텃밭을 배경으로 일찍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 자신을 보살펴준 오빠와, 오빠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여동생 이야기를 담은 '파종', 작고한 이모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여온 조카의 관계를 그린 '이모에게' 어릴 적 식모로 일했던 경험이 있는 기남이 결혼하여 홍콩에 살고 있는 작은딸을 만나기 위해 짧은 여행을 떠나고 그곳에서의 작은 실수와 손자인 마이클의 위로를 통해 자신의 기억 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는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는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기남의 마음에는 사라지지 않는 방들이 있었다. 언제든 그 문을 열면 기남은 그 순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이 생생했다. 그 중식당의 냄새, 식기의 모양, 음식의 종류, 노인 옆에 있던 젊은 남자, 그러니까 노인의 아들이 입었던 옷과 큰언니라는 사람의 표정까지도. 기남은 살면서 수시로 그 문을 열었다. 문을 열 때마다 기억의 세부는 조금씩 사라져갔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마음의 통증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 문을 열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차갑고 단단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여전히."  (p.306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중에서)


감정의 소모는 체력의 소모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몸속 에너지를 허비함은 물론 사람을 지치게 한다. 타인의 삶을 연기하기 위해 자신이 맡은 배역의 감정에 몰입하는 배우처럼 최은영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각각의 인물에 빠져들곤 한다.


"하지만 모두 다 부질없는 상상일 뿐이었다. 죽어서라도, 다시 태어나서라도 그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녀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에는 단순한 진실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이제 세상에 없으며, 그가 자신에게 준 마음을 갚을 방법 같은 건 없다는 진실이었다.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고,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은 지울 수 없는 후회와 미안함으로 남으리라는 진실이었다."  (p.199 '파종' 중에서)


새해가 시작된 후의 며칠은 하루하루가 무척이나 빠르게 흘러가는 느낌이다. 남은 날들이 많아서 하루를 설렁설렁 보내는 탓도 있을 테고, 1년의 아득한 날들을 계획하다 보면 사는 게 참으로 부질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밀린 숙제를 하듯 분초를 다투며 바삐 움직이던 12월의 농밀한 시간에 비하면 1월은 얼마나 성근 시간들로 채워지는가. 최은영의 소설집을 읽다 보면 가슴 한켠에 '쿵' 하고 무거운 바윗덩이가 얹히는 느낌이 든다. 가벼워지기 쉬운 연초의 내 발걸음에 묵직한 모래주머니를 채우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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