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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어디를 가나 숏팬츠를 입은 여자들 일색이다.
그 모습이 보기 좋다거나, 보기 민망하다는 식의 호불호를 떠나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모습을 이제는 사람들에게서도 보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할 뿐이다.  그런 모습은 유행에 민감한 어린 학생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닌 듯, 다 큰 아이를 하나쯤 두었음직한, 나이 지긋한 여인도 그 대열에 동참하는 것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현대 물질문명의 모습은 일상의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고, 그것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닌데 굳이 내가 이런 말을 꺼낸 것은 따지고 보면 나의 오지랖일 수도 있겠으나 내가 그런 차림의 여자들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마치 하나의 공장에서 일률적으로 찍어낸 듯한 인간들이 로봇처럼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어서이다.

 며칠 전 친구가 운영하는 식당을 들렀다.
다니던 직장에 갑자기 사표를 낸 친구는 주변의 우려와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식당을 개업했다.  퇴근 후에는  좀체 짬을 내지 못하는 탓에 개업식 초대에도 응하지 못했었다.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해서 한가한 점심시간을 택해 잠시 들른 것인데 신장개업을 한 식당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손님이 없었다.  친구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걱정도 되고, 친구의 기분도 풀어줄 겸 해서 "한복 입은 사람을 출입금지 시켰던 어느 호텔의 노이즈 마케팅처럼 너도 숏팬츠 입지 않은 사람은 출입금지라고 현괸문에 써 붙여봐.  돌 맞을지도 모르지만 검색어 순위에 들을지도 모르잖아?"했더니 친구는 정색을 한다.  농으로 던진 말인데 친구는 정말 그렇게라도 하려고 했었나 보다.  "잘 되겠지.  기운 내."하는 인사로 친구와 헤어졌다.

 겉모습이라도 같아져야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생각은 외로운 현대인의 공통된 모습이다.  마음으로 다가가는 방법을 모르니 오직 겉모습에 의지해 친구를 사귈 수밖에.  친구도 얼마 전에는 말끔한 양복 차림으로 그들과 닮아 있었을 때는 그렇게 우울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옷을 벗은 지금의 모습을 본인은 외롭다고 느끼나 보다.  나조차도 너와 나를 구분할 수 없는 이 가엾은 현실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몰개성화가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다양성을 인정하라는 것은 어쩌면 헛된 구호일지 모른다.

 소비 중독증에 빠진 현대인의 몰개성화는 마치 제복을 입은 군인을 연상시킨다.
예비군 훈련을 받아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지만 평상시에 멀쩡하던 사람도 제복만 입으면 광기가 발동한다.  누가 누구인지 모르게 하는 제복의 힘은 억눌렸던 본능을 맘껏 분출하게 하는 것이다.  지나가는 아까씨를 향해 휘파람을 불거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소변을 보는 모습은 광기 어린 모습 중에 비교적 약한 것에 속한다.

 언젠가 우리는 숏팬츠를 입은 한무리의 여인들이 지나가는 남자를 향해 휘파람을 날리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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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동료들과의 점심 식사 시간에 나누었던 대화의 주제는 단연 수해 소식이었다.
내가 있는 이곳은 다행히도 비가 오는 둥 마는 둥 하다 그쳤지만 어찌나 습도가 높은지 숨을 들이 쉴 때마다 후끈한 열기와 함께 기도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이러다가는 내 허파꽈리가 물풍선이 되는 것은 아닐지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오늘도 여전히 후텁지근한 날씨에 불쾌지수는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을 듯싶다.
그나마 대한민국 곳곳이 물난리로 떠들썩한데 이곳은 평온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동료들은 자신의 지인들로부터 전해 들은 전국 각지의 이런저런 수해 소식을 약간의 과장을 섞어가며 역사 활극을 선뵈는 듯 자신의 말과 행동에 시선을 잡아두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역시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아픔은 한낱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는가보다.  예로부터 흔히 재미있는 '3대 구경거리'를 꼽으라 하면 불구경, 물 구경, 싸움 구경을 들지 않던가.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며 놀랐던 것은 우면산의 산사태와 강남 지역의 물난리를 전하는 대목에서였다.
잘못 들었던 것인지는 몰라도 부자 동네의 수해 소식에 은근히 고소해 하거나 잘된 일인 양 간간이 웃음을 섞어가며시끌벅쩍 떠드는 작태가 영 눈에 거슬렸다.  어떤 모습으로 살건 사람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아니던가.  그들의 축재 과정이 어떠했건 간에 동 시대에 그것도 같은 나라에 사는 사람의 재난을 안타까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닐까?

나는 서둘러 점심을 마치고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물기 머금은 공기는 답답한 가슴을 더욱 숨막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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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초등 저학년 중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학생들이 급격히 증가했다.
이런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를 갖게 되지만 그 바람과는 반대로 아이는 자라면서 점점 더 안 좋아지기만 할 뿐 나아질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될 즈음이면 부모는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겼던 문제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하고, 그제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는 서둘러 정신과 병원을 찾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이제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었다.
옛날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부모들은 여전히 쉬쉬하는 분위기지만 한 집 건너 자신의 아이와 닮은 모습을 목격하게 되면서부터 그마저도 대수롭지 않은 일상이 된 듯하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에게서 다른 아이보다 나은 장점을 하나둘 발견하려 애쓰게 되고 그동안 크게만 보였던 문제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된다.  ’그래도 이것만은 00보다 나으니 다행이야’하고 자위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이러한 아이들이 늘어난 것일까?
내 생각은 이렇다.  인간이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우리 육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영양분을 땅으로부터 얻게 되고, 영혼도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적 토양에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신적 토양을 상실한 가정이 너무도 많다.  45억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우리가 사는 지구별의 토양이 형성되었듯 수만 년에 걸쳐 형성된 정신적 토양은 우리의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왔고, 그 토양 속에서 자신이 필요한 영혼의 자양분을 섭취해 왔었다.

불과 1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경사회의 특성상 내 부모가 아닌 공동체의 다른 이웃도 그와 같은 정신적 토양을 후대에 잘 전달해주었지만, 핵가족화 되고 이웃을 상실한 지금은 오직 부모만이 전달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맞벌이에 내몰린 현대의 부모는 전달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방관자로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마디로 지금의 아이들은 그들이 딛고 살아가야 할 정신적 토양을 상실한 것이다.  땅이 없는데 어찌 꽃을 피울 것이며, 어떻게 중심을 잡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게다가 땅에서 자라는 모든 생명체는 자연의 시간에 따라 성장해야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화석연료를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시계에 맞춰 속성으로 기를 때 지구 환경의 오염을 피할 수 없듯이 아이들을 어른들의 욕심에 맞춰 빠르게 성장시키다 보면 영혼의 토양이 무참히 오염되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  우리는 계절의 순환에 따라 흐르는 자연의 시간마저 잊은지 오래다.

어제는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중 한 명이 가출을 했다.
이런 현실을 마주하며 나는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통렬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아이들은 이제 성적의 순위가 아닌 생존의 문제에 점차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조금 더 진행된다면 대부분의 부모가 성적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아이들의 생존을 염려하게 될 날이 도래할 것임은 너무도 자명하다.  이 안타까운 현실 앞에서도 성적순으로 줄을 세우려는 기성세대에게 돌이라도 던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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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송뽀송 마른 옷을 입는 것까지는 좋은데 어찌나 더운지 옷을 입고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몸에 척척  감기는 느낌은 참기 어렵다.  남들보다 땀을 덜 흘리는 내가 이러니 살집이 있는 사람들은 오죽하랴.  한낮의 햇빛은 뜨겁다 못해 따갑다.  긴 장마 뒤에 온 더위는 그야말로 찜통이다.  오후 들어 아스팔트 도로는 절절 끓고, 뙤약볕 아래 세워 둔 자동차의 문을 열면 후끈한 열기가 한증막을 방불케 한다.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를 뚫고 퇴근을 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저만치 기울어가는 태양은 마지막 열기를 내뿜으며 지면을 달구는데 숙소로 향하는 길이 어찌나 멀어 뵈던지...  등을 타고 흐르는 굵은 땀방울이 졸라맨 허리띠를 넘지 못하고 바지며 셔츠를 축축히 적셨다.  시큼한 땀냄새가 걸을 때마다 가슴을 타고 올라와 코를 자극했다.  이 땡볕에 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천천히 걷자니 땀은 비오듯 흐르고...  오늘따라 신호등을 기다리는 시간도 왜 그리 길던지...

숙소에 도착하니 부지런한 아이들이 현관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나를 기다리고 있다.
시원하게 샤워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는 수밖에.  찝찝한 기분을 억지로 누르고 수업을 시작하려니 선풍기 하나로는 사람의 열기로 후끈 달궈진 방안 공기를 식히기 어려웠다.  아이들 성화에 에어컨을 켰다.  올 들어 처음 켜보는 에어컨 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중학생 아이들은 내가 내준 수학 문제를 풀면 곧 집으로 갈 것이다.
연이어 고등학생들이 들이닥칠테고 10시까지는 꼬박 자리를 지켜야 한다.  질문이라도 많은 날이면 더 늦어질지도 모르지만 아이들이 방학을 한 탓에 어제부터는 그나마 일찍 수업을 마친다.  방학임에도 보충수업을 받으러 여전히 학교에 오가는 아이들은 무에 그리 좋은지 혹서의 고통은 아랑곳 않고 연신 싱글벙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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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깅을 처음 시작한 것도 벌써 만 2년이 다 되어간다.
얼리 어답터라기 보다는 슬로우 어답터에 가까운 내가 온라인 상의 작은 공간에 터를 잡고, 일상에서 벌어진 일들을 글로 옮기는 것에서부터 읽었던 책의 느낌을 기록하거나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끄적거리는 것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잊고 살았을 많은 것들을 놓치지 않고 모아 놓았다는 느낌이 든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들락거리는 인터넷 공간에 글을 올리는 것은 때로는 의무감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마치 골동품에 취미를 붙인 사람이 별 가치도 없어 보이는 쇠붙이에도 눈길을 주고는 끝내 그것을 구매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처럼  새로운 방문객의 시선을 의식해 가치도 없는 글을 급조하여 올려야만 안심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어느 정도 초보 블로거의 딱지는 뗀 듯 보이지만 여전히 초보 티를 벗지 못하는 것들도 많이 남아 있다.  사진의 편집이나 글의 구성만 보아도 그렇다.  그런 까닭에 가급적 사진이 들어간 글은 자제하고 있다.  남들이 보기에 한심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그만큼 블로깅을 했으면 달인 소리는 듣지 못해도 남들 하는 만큼은 쫓아가야 하거늘 처음이나 지금이나 별반 나아진 게 없으니 말이다.  아무튼 기계치에 가까운 내게는 넘지 못할 벽임에 틀림없다.

기술적인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생각이나 마음의 깊이가 좀체 나아지지 않는 것을 보면 내가 생각해도 구제불능이다.  원체 유약한 성격인 나로선 처음 블로그를 할 때만 해도 평소 가깝게 지내던 블로거가 어느 날 갑자기 블로그를 폐쇄하고 보이지 않으면 한동안 마음이 싱숭생숭 하여 블로그에 접속조차 하기 싫었던 적도 있었다.  혹은 거의 매일 거르지 않고 방문하던 블로거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아니면 내가 뭐 잘못한 일이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오만 걱정을 하기도 했었다.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블로그 세상도 우리네 현실 세계와 그닥 다르지 않은 듯하다.
서로 얼굴을 보지도 못하였고, 나이도 짐작만 할 뿐이지만 성격이 통하는 사람이 있고 자연스레 멀어지는 사람도 있는가 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블로그를 하면서 세상의 시름을 잊고 다른 블로거를 통하여 위로를 받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처음에 각별히 지내던 블로거 중에는 지금은 다른 사이트로 옮겨갔거나 아예 블로깅을 작파한 사람도 더러 있지만 지금은 나도 그분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직업이 없던 사람이 새로운 직업을 구했거나, 사업이 번창하여 바빠졌다거나, 능력을 인정받아 두루두루 바빠졌을 거라고.

나와 같이 블로그를 시작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가끔 그리울 때가 있지만 새로운 블로거가 그 자리를 어느새 메우고 있음을 발견할 때, 만나고 또 헤어지는 어길 수 없는 자연의 이치를 생각하곤 한다.  거꾸로 흐르지 않는 세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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