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에 듣는 클래식 - 클래식이 내 인생에 들어온 날
유승준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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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다. 가을비는 왠지 후줄근하고 추레한 느낌이 먼저 드는 것이다. 아스팔트를 뒤덮은 낙엽 더미가 떠오르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비에 젖어 볼품없어진 은행잎이나 단풍잎의 잔해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배수구로 쓸려가는 모습은 처연하다 못해 씁쓸하다. 마치 우리네 삶의 끝자락을 보고 있는 듯해서 말이다. 비가 내리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지금 낮게 깔리는 피아노 선율에 젖어 있다.


"인생에서 사랑을 빼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요? 끝이 어디든 한번 시위를 떠난 사랑의 화살은 어딘가에 꽂힐 때까지 날아가는 법입니다. '빗방울 전주곡'을 들으며 미소가 머금어진다면 사랑에 빠진 것이고, 눈물이 난다면 실연의 아픔을 겪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생채기가 아물면 다시 사랑할 시간이 올 겁니다. 거센 겨울비가 내리는 밤 홀로 남겨진 쇼팽이 고독의 심연 속에서 위대한 음악을 만든 것처럼 말입니다."  (p.128)


나는 며칠째 유승준의 음악 에세이 <오십에 듣는 클래식>을 읽고 있다. 클래식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짬이 날 때마다 즐겨 듣는 까닭에 책에서 작가가 토로한 여러 문장에 나는 깊이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사실 클래식을 좋아하는 데 무슨 나이 구분이 필요할까마는 나이에 따라 좋아하는 곡도 달라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더구나 오늘은 대입 수능일. 오늘이 지나면 수능 시험을 본 학생들이 한동안 긴장감을 잃고 방황하는 시기가 아닌가. 젊은 시절의 열정과 사랑, 미래에 대한 불안 등을 고스란히 담은 명곡을 듣고 클래식에 빠져드는 시기도 바로 그때가 아닐까 싶다.


"억지로 듣는 음악이 아니고, 뭔가를 주장하거나 강요하는 음악이 아니어서 좋았습니다. 가사가 없어서 더 좋았습니다. 물론 클래식 음악에도 가사가 있는 장르가 있지만, 팝송이나 가요처럼 자극적이거나 직설적이지 않았습니다. 멜로디와 하모니를 따라서 느끼고 싶은 대로 느끼고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하면 되니 편안했습니다."  (p.17~p.18 'prologue' 중에서)


작가도 언급한 것처럼 그림이나 음악은 언어를 통한 대화의 매체가 아닌 까닭에 창작자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의무나 부담감이 없다. 언어는 말을 하는 상대방의 분명한 의도와 말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면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다. 언어는 그만큼 직설적이면서도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음악이나 미술은 창작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감상하는 나의 감정이나 느낌이 중요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음악이나 미술은 작품 감상을 하는 관객의 상상력이 중시되는 매체라고 할 수 있다. 관객의 각기 다른 상상력에 의해 해석의 여지도 다양하게 변하는 까닭에 음악이나 미술은 오히려 젊은이의 차지일 수도 있다. 자신의 미래를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며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모습이 음악에 심취한 어느 관객의 모습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첼로 연주로 들어보신 적 있나요? 피아노나 바이올린 혹은 오케스트라 연주와는 또 다른 감성을 전해줍니다. 피아노가 막 사랑에 빠진 엘가와 캐롤라인의 설레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고, 바이올린이 행복의 절정에 있는 엘가와 캐롤라인의 가슴 벅찬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면, 첼로는 황혼 녘에 테라스에 앉아 붉은 노을을 바라보는 엘가와 캐롤라인의 넉넉하면서도 애잔한 마음을 표현하는 듯합니다."  (p.320)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각 장에 5편의 클래식 곡과 5명의 음악가에 얽힌 비화를 다룸으로써 우리의 귀에 익숙한 20편의 클래식 곡을 작가 나름의 해석과 감상을 덧붙여 놓았다. 이를테면 눈으로 읽는 클래식 명곡 감상이랄까. 오늘처럼 가을비가 촉촉이 내려 손발은 물론 가슴까지 시려오는 날이면 좋아하는 클래식 명곡을 틀어놓고 하염없는 상념에 빠져드는 것도 좋을 듯하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불안을 모두 내려놓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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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오페라 - 아름다운 사랑과 전율의 배신, 운명적 서사 25편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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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내가 속한 고등학교 동창 모임의 송년 회합은 오페라 공연 관람이 주가 되었다. 12월의 어느 날을 골라 참석이 가능한 사람의 인원수를 체크하고, 회장이나 총무가 티켓을 예매하여 공연 당일 저녁에 모여 가벼운 식사와 함께 티켓을 배부하면 공연 관람으로 하루의 일정이 마무리되는, 예전에는 없던 건전한(?) 모임으로 바뀐 것이다. 부어라 마셔라 하며 술로 시작하여 술로 끝을 보던 젊은 시절의 모임은 이제 친구들 모두에게 부담으로 작용하는 까닭이다. 술에 관대하던 지난 시절의 문화도 많이 바뀌어 온 게 사실이고 말이다. 그렇게 관람한 오페라 공연이 제법 된다. 오페라의 '오'자도 모르던 친구들이 이제는 자신이 듣고 배운 오페라에 대한 지식을 뽐내느라 여념이 없는 걸 볼라치면 절로 웃음이 나오곤 한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인터넷에서 스치듯 본 오페라 공연 소식이나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보게 되는 오페라 관련 서적의 제목을 꼼꼼히 적어 두었다가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알리곤 한다. 그것이 마치 나만 알고 있는 대단한 지식이라도 되는 양.


"물론 오페라를 생소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저 또한 그랬으니까요. 소극장이나 야외 공연도 병행하는 뮤지컬과 달리 대부분 전용 극장에서 공연하는 오페라는 낯설고 먼 장르로 느껴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오페라도 콘서트나 뮤지컬처럼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장르입니다. 오페라도 결국 하나의 단편 문학이기 때문입니다. 뮤지컬이 개인의 꿈과 사랑의 드라마를 노래한다면, 오페라는 역사나 인생의 역경을 표현하는 문학적인 줄거리를 노래합니다. 다채로운 매력으로 완전한 문학적 서사를 펼치는 무대. 성악가의 육성으로 전해지는 전율을 '오페라'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p.5~p.6 'Prologue' 중에서)


우리의 삶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돌연 끝나버리는 까닭에 살아가는 동안 나에 대한 기억이 타인의 기억 마당 한 귀퉁이에서 한껏 성장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나 싶다. 친구들과 오페라 공연을 관람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문화콘텐츠 전문작가인 이서희가 쓴 『방구석 오페라(리텍콘텐츠, 2023.11.01)』는 우리가 익히 들어보았음직한 오페라 25편을 소개하며, 이를 통하여 우리 삶에 색다른 전율을 전해준다. 우리가 오페라의 매력에 빠질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오페라 속 인물들이 우리들 각자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감동적인 순간 이후로 이끌리듯 오페라를 찾아다녔다는 저자의 경험처럼 우리는 다만 오페라에 대한 '첫 경험'이 중요할 뿐, 오페라에 빠져드는 그다음 과정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순서가 아닐까 싶다. 오페라는 결국 '나'의 이야기인 동시에 내가 알고 있는 '너'의 이야기인 까닭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환상과 비참한 현실이 교차하는 가운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 곡 '밤의 여왕의 아리아(Konigin der Nacht)'가 탄생합니다. 해당 아리아의 유명세로, <마술피리>는 오페라 입문자에게 추천하는 작품으로 자주 선정됩니다. 이처럼 <마술피리>는 어렵지 않게, 익숙하게 감상하기 좋은 작품입니다. 남녀노소 모두가 어울려 무대를 즐기다 보면 작품 속 인물들과 긴 여정을 함께한 것처럼 어느새 끈끈한 유대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p.161)


사랑하는 이를 구하기 위해 변장까지 한 <피델리오>나 젊음을 얻기 위해 잔혹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 <파우스트> 등 저자의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풀어낸 25편의 명작 오페라를 담고 있는 <방구석 오페라>는 어쩌면 오페라라는 낯선 장르를 경험하는 데 지레 겁을 먹었던 사람들에게 그럴 필요 없다는 걸 알려주는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내가 동문 모임에서 있었던 단체 오페라 관람을 통하여 오페라라는 낯선 장르를 어렵사리 경험하게 되었던 것처럼 이 한 권의 책이 오페라라는 낯선 세계로 안내할 수만 있다면 당신의 인생 또한 얼마나 풍요로워질 것인가.


"<마탄의 사수>는 하나의 사건에 엮인 여러 인물의 입장과 마음을 다각도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극을 감상하며 인물들의 마음과 입장을 헤아리다 보면 누군가의 욕망에 동화된 자신의 모습을, 또 다른 '나'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p.192~p.193)


날씨가 춥다. 갑자기 변한 날씨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든다. 2023년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올해도 나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 함께 편안한 의자에 앉아 화려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한 편의 오페라를 감상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보낸 즐거웠던 추억이 내 모습과 함께 친구들의 기억 한 귀퉁이를 차지할 테고 나의 역사가 시나브로 타인의 기억 속에서 완성되어 갈 것이다. 오페라의 조명이 화려하게 빛나는 것처럼 우리네 생명의 불빛이 환하게 타오르는 한 나의 서사는 계속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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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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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류진 작가의 소설 속 인물은 입체적이다. 작가의 소설 단 두 권을 읽어본 사람이 단도직입적으로 평가할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다. 사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차원적인 인물을 다면적인 모습의 살아 숨쉬는 듯한 인물로 재창조한다는 것은 웬만한 필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기에 신진 작가(2018년 데뷔)라고 말할 수 있는 장류진 작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그녀의 전공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작가의 필력이라는 것은 대상에 대한 꼼꼼한 관찰과 대상이 관여하는 관계의 연관성에 대한 분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닌 작가도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연구와 관찰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펼칠 수 없기 때문이다.


"액셀을 밟은 발에도 살짝 더 힘을 줬다. 하늘과 구름, 연둣빛 잎사귀들을 머금은 호수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 순간, 나는 운전이 무섭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느낀 적은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신기한 일이었다. 심지어 전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드라이브하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운전이 하고 싶어서 핸들을 잡는 사람들의 마음을."  (p.43 '연수' 중에서)


표제작인 '연수'를 포함하여 총 6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소설집 <연수>는 작가의 작품 중 내가 두 번째로 선택한 책이다. 내가 처음 읽었던 장류진의 소설은 <달까지 가자>였다. 코로나 시국에 코인 투자 열기가 뜨겁던 당시를 배경으로 각기 다른 세 여성의 유쾌한 생존 분투기를 그린 <달까지 가자>는 단박에 나를 사로잡았고, 나는 그 길로 소설가 장류진의 팬이 되고 말았다. 소설집 <연수> 또한 작가의 개성이 잘 드러난다. 운전공포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 '주연'이 동네 맘카페를 통해 알게 된 '작달막한 단발머리 아주머니' 운전강사로부터 도로 연수를 받으면서 가볍게 스쳐갈 수도 있는 그 짧은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는 내용의 '연수', 이박 삼일의 대기업 합숙면접에 참여한 '지원'이 조원 모두가 참여하는 협동 장기자랑 '펀펀 페스티벌'을 준비하면서 겪게 되는 심리적 갈등과 위기 상황 등을 사실적으로 그린 '펀펀 페스티벌'.


보수적인 기업문화를 지닌 새중앙에너지의 팀장 '김건일'은 '천 사장'이 운영하는 술집 '천의 얼굴'을 단골 회식 장소로 택하곤 했는데 '현수영'이 부장으로 승진하면서 새중앙에너지의 회식문화는 급변하게 되고, 이에 따라 쇠락을 이어가는 '천의 얼굴'과 암에 걸린 '천 사장'. '김건일' 부장은 '현수영'에게 은밀한 부탁을 하게 된다는 내용의 '공모'. 로드바이크 동호회를 운영하는 '나'와 회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장면들을 그린 '라이딩 크루'와 작은 방송사에서 인턴 생활을 하는 '선진'의 올림픽 취재기를 그린 '동계올림픽'.


"요즘 자주 하는 종류의 생각이 있는데 또 그 생각을 하게 된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말하자면 이런 것들. 어떤 착한 사람이 나를 납치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부드러운 실크 스카프로 내 입에 재갈을 물리고 내 두 팔을 등 뒤에서 묶고 극세사로 만든 보송보송한 안대로 내 눈을 가리고 하얀 봉고차에 태운 다음 내가 모르는 곳, 나를 모르는 곳으로 데려가줬으면. 그래서 딱 한달만 날 가뒀다가 풀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같은 것들."  (p.271 '동계올림픽' 중에서)


서른두 살의 나이에 국문과에 진학한 '박미라'. 본인이 창업한 회사가 성공해 억만장자의 부자가 되었지만 글쓰기 실력은 형편없었던 미라는 소설창작회 멤버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등 수모를 겪은 후 그리스로 창작 여행을 떠나게 되고, 졸업을 앞둔 '나'는 미라 언니와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창작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미라 언니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뛰어난 작품을 내놓는데...


"라라. 그러고 보니 언니에게는 필명이 있었다. 핸드폰 번호 바꾸고 필명을 쓰면 다시 소설 써내는 데 별문제 없지 않겠느냐고, 시간이 지나고 상처가 아물면 다시 쓸 수 있지 않겠느냐고, 내일 언니한테 그렇게 말해줘야지,라고 생각하면서 멀어지는 하얀 차를 바라봤다."  (p.330 '미라와 라라' 중에서)


위대한 소설가는 어쩌면 글솜씨가 빼어난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사회에, 그곳에 속한 사람과 그들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고 꾸준히 관찰하는, 말하자면 이 사회와 그에 속한 인간에 대한 애정이 남들보다 곱절은 뛰어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런 기준에서 바라볼 때 장류진 작가는 분명 소설가로서 크게 성장할 사람인 듯 여겨진다. 물론 이것은 객관적인 잣대로 평가하는 평론가의 입장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갖는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1차적인 이유는 너와 나의 관계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배우며 우리네 삶의 8할은 결국 관계일 수밖에 없음을 자각하기 위함이다. 소설가는 보이지 않는 그곳에 환히 불을 밝히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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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가장 보통의 인간 - SF 작가 최의택의 낯설고 익숙한 장애 체험기
최의택 지음 / 교양인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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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은 '정'이 많은 민족이라고 한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적어도 10여 년 전까지는 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이전까지로 몇 년 더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을 다녀간 외국인이나 오랫동안 우리나라에 살았던 외국인들은 서로 입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너도나도 한국인의 '정'에 대해 말해 왔으니까 나 역시 그런 줄 알았고, 그러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게 사실이다. 나의 성장기를 뒤돌아보더라도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의 사람들은 서로의 아픔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음은 물론 자신에게 있는 어떤 것을 타인에게 조금이라도 나누어 주고자 하는 마음이 일상이었으니까 지금도 여전히 그 오래전 풍습이 유지되고 있는 줄 알았다. 나는 그렇게 '옛날 사람'이었던 것이다. 영어 사전에도 없다는 '정'이 일종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한민국의 브랜드인 양 생각하며 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이제는 더 이상 '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독서를 통해 배우고 있다. 자신의 아픔을 책으로 쓴 에세이를 읽고도 사람들은 더 이상 내 일인 양 아파하거나 눈물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마음일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다 있구나.' 하는 호기심 혹은 동물원의 희귀 동물을 구경하는 듯한 신기함, 어쩌면 그런 마음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않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더러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다수의 국민들이 그럴진대 대한민국의 브랜드가 더 이상 '정'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현실 아닌가. 나는 최의택 작가의 에세이 <어쩌면 가장 보통의 인간>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단단히 고정한 다음 자퇴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보조 선생님과 함께 엄마가 기다리고 있는 2층 교사 휴게실로 갔다. 2층 복도 저 끝에 가방을 들고 있는 인영이 보였다. 눈이 빛에 적응하자 엄마 얼굴이 보였는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온몸을 들썩이며 대성통곡을 했다. 엄마는 물론 보조 선생님까지 눈물을 보였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눈앞이 뿌예진다. 하지만 그 이유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억억억 하면서 엄마랑 학교를 나서면서 그때 막연하게나마 느꼈던 건 딱 하나였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허망함. 그 허망함을 자초한 건 분명 나였다. 지금도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며, 내가 살면서 내린 선택 중 가장 현명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아쉬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 어떤 사람의 인생은 스스로 내리치는 철퇴로 산산조각 내는 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을까."  (p.33~p.34)


근육병(선천성 근위축증)을 앓고 있는 작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걸어본 적 없이 오직 휠체어에 앉아 세상을 바라봐 왔고, 고등학교를 그만둔 뒤 세상과 단절된 채 집에서만 지냈다고 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쓰고 있는 책의 곳곳에는 유머가 넘치고, 이 사람이 과연 그와 같은 고통 속에서 사는 사람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게 하는 대목도 여럿 등장한다. 책을 다 읽은 후 나는 '가장 깊은 슬픔이 가장 큰 웃음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뜬금없이.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인생은 가까이서 볼 때, 전부는 아닐지라도 분명 비극적인 사건으로 점철돼 있다. 그러나 이 에세이처럼, 인생은 멀리서 조망하며 인생 자체를 개인이 감독으로서 재편집하는 작업을 통해 우리네 인생은 나름대로 재밌는 인생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p.222)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작가가 세상과의 단절을 경험하면서 작가 지망생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10여 년의 기억이 담긴 1장과 2장에는 <슈뢰딩거의 아이들>로 문학상을 받고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고군분투가, 그리고 3장에는 SF 소설가로서 작가가 체득한 글짓기 방법과 최의택이라는 한 인물의 세계가 그려진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이따금 직장 동료들과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은 세상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긍정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던 어느 후배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의 마음 한 구석에는 두려움 같은 게 웅크리고 잇다. 나의 장애를 똑바로 응시함으로써 알게 되는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버리는 게 아닐까 싶어서. 삶의 의욕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는 상황이 두렵긴 하다. 하지만 이제 와 멈출 수도 없다. 그러니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않고 여행하는 것처럼 가볍게 가보려 한다."  (p.13 '프롤로그' 중에서)


우리는 이제 당신의 아픔이 나의 언어가 아닌, 이해도 할 수 없는 먼 이국의 언어가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당신의 아픔이 우리로부터 분리된 채 당신만의 아픔으로 남게 되었음을 의미하며, 먼지만 날리는 슬픈 내 마음의 풍경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부끄러운 현실의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당신의 아픔이 오롯이 나의 언어로 이해되는 그날을 꿈꾸고 있다. 그날이 오면 대한민국의 브랜드도 다시 '정'으로 환원되지 않을까. 그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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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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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중학교 운동장의 풍경은 허허롭다. 너른 운동장 한 귀퉁이에 한 소녀가 등장한다. 회색 트레이닝복 차림에 검은 가방을 멘 소녀는 뭔가 신경 쓰인다는 듯 이따금 뒤를 힐끔거리며 학교 건물을 향해 운동장을 가로지른다. 소녀의 뒤 10여 미터쯤 뒤에서 검은색 트레이닝복에 검은 가방을 멘 남학생이 소녀의 뒤를 따르고 있다. 나는 먼 거리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소녀와 소년이 예전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지, 아니면 일요일인 오늘 아침에 우연처럼 마주친 사이였는지 나는 그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한다. 다만 뒤를 힐끔거리며 앞에서 걷는 소녀의 태도로 보아 두 사람은 이미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사이가 아니었을까 내심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서로의 존재를 그저 알고만 있었을 뿐 다정한 말을 건네거나 우연한 기회에 서로에게 호감을 느껴 특별한 관계로 진행되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데면데면한 관계로만 남았던 두 사람. 뒤에서 걷던 남학생도 여학생의 존재가 자못 신경이 쓰이는 듯 처음 설정한 거리를 더 넓히거나 좁히지 않는다. 나는 그 남학생에게 큰소리로 말해주고 싶었다. '어서 달려가서 여학생에게 네 마음을 고백해 봐. 먼 훗날 오늘의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으려면 말이야.' 여학생이 학교 건물의 출입구를 통과한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한 남학생이 다른 출입구를 통과한다. 나는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그 건물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추억 속에서 문학에 대한 사랑은 모든 짧은 사랑, 사람에 대한 사랑에 비해 큰 우위를 지닌다. 우리는 언제 그리고 어디서 그 '타인'을 만났는지, '그'가 그날 우리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때가 있다(오히려 그날 밤 우리가 '그'를 즉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에 매우 놀라워한다). 반대로 문학은 우리를 첫눈에 매료시킨다. 달리 말하면, 떠들썩한 굉음을 내면서 결정적이면서도 정확한 이끌림을 선사한다. 나는 내 인생의 위대한 책들을 어디서 읽었는지, 어디서 발견했는지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거기에는 내 청춘의 내적 풍경과 외적 풍경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p.195)


우리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매력에 쉽게 빠져드는 이유는 그녀 자신의 생각이 글로 전환되는 회로가 남들에 비해 매우 발달해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직관적이거나 감각적인 것으로 읽히는 그와 같은 생각들은 때로는 도발적인 듯 여겨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사강 자신의 솔직함을 부각하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그녀의 글은 짧지만 후회 따위는 하지 않는 사랑, 뜨거웠던 여름과 우울함을 한껏 드러낸 그림자, 오만과 굴욕, 자기 자신으로 강렬하게 살다 지는 것, 밤의 유희와 한낮의 피곤, 뻔뻔스러움과 순수함 같은 것들로 가득 차 있지만 적어도 사강 자신이 추구했던 삶의 모습에서 철저히 등을 돌렸던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두 번의 결혼과 이혼, 약물중독,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도발적인 선언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기계적으로 태양을 향해 손바닥을 내민다. 그러나 손을 다시 쥐지는 않는다. 시간과 사랑을 붙잡으려고 애쓰지 말아야 하듯이, 태양도 인생도 붙잡으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나는 웃고 잊어버리는 사람들, 어느 곳이든 다른 곳, 그러나 이곳을 닮은 다른 곳, 혹은 이곳을 닮으려고 애쓰는 다른 곳, 그러나 결단코 그것에 성공하지 못할 다른 곳을 향해 다시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로 내려간다."  (p.176)


사강의 에세이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은 사강 자신이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찾아낸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을 주저리주저리 써 내려가지 않았다는 데 놀라움이 있다. 어쩌면 그와 같은 글은 그녀의 성향에도 맞지 않는 주제일 테지만 말이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이 만났던 여러 인물의 고통과 환희에 대해 쓰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어느 누구의 삶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그렇지만 정작 본인은 알지 못하는 제삼자적 관점의 객관적인 평가일지도 모른다.


"빌리 홀리데이에 대한 내 경탄 혹은 내 기억의 힘은 이러하다. 그 공연이 보잘것없고, 끔찍하고, 웃음거리가 될 만한 결함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가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노래했다. 한 소절을 불렀고, 힘겹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풍랑이 심한 바다에서 상갑판의 난간에 매달리듯 피아노에 매달렸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분명 나와 똑같은 마음으로 그곳에 온 듯했다. 그녀에게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냈으니 말이다. 그러자 그녀가 빈정거리는 듯하면서도 불쌍히 여기는 듯한 시선을 그들에게 던졌다. 사실 그것은 그녀 자신을 향한 사나운 시선이었다."  (p.35)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은 그야말로 화려하다. 재즈의 디바 빌리 홀리데이, 미국을 대표하는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미국의 배우 겸 영화감독 오손 웰스, 러시아 출신의 유명 발레리노이자 안무가 루돌프 누레예프, 프랑스를 대표하는 실존주의 사상가 장 폴 사르트르 등 사강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좋아했던 인물들의 명과 암에 대해 주관적인 필체로 펼쳐 보이는 이 책은 사강이 썼던 다른 어떤 소설보다도 극적이고 화려하며 깊은 울림을 준다. 그렇다고 사강의 소설이 그녀가 쓴 이 한 권의 에세이에 비해 격이 떨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사강의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은 우리가 아무리 겪어도 결코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삶에 대해 쓰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인이라는 것도 그들이 겪었던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이 보통 사람들에 비해 더 극적이었을 뿐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사강은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휴일 오전에 보았던 중학교 운동장의 풍경이 마치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잊히지 않는다. 해가 지고 있다. 종일 비었던 운동장엔 동네 꼬마들이 공을 차고 있다. 떠들썩한 소음도 늦가을 밭은 해걸음에 금세 사라질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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