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나의 보물섬이다 - 의류 수출에서 마천루까지 가는 곳마다 1등 기업을 만드는 글로벌세아 김웅기 회장의 도전경영
김웅기 지음 / 쌤앤파커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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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의 회고록이나 성공담을 읽거나 들었을 때 나는 그가 부럽다거나 나도 그의 삶의 태도를 따라서 열심히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이 그가 현재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힘든 과정을 겪었을까 하는 조금은 짠한 생각이 먼저 들곤 한다. 타인의 성공 노하우나 경험담을 듣는 자리에서도 나의 태도는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대개 자리를 배정받기 위해 광클릭을 해야 하거나 만만치 않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지만 그렇게 지난한 과정을 통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강사로부터 그만의 노하우를 하나라도 더 배울 생각은 않고 저 사람은 저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다소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앉아 있으니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의 태도에 혀를 끌끌 차게 마련이다. 더구나 그런 강연이나 좌담회는 대체로 강의 후에 강사와 참석자들 간의 질의응답이나 참석자들의 느낌이나 각오를 듣는 게 일반적인지라 내가 엉뚱하게도 강사님은 지금 위치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힘드셨느냐 하는 다소 안 됐다는 느낌의 질문이라도 할라치면 참석자들 대부분으로부터 싸늘한 시선을 받게 마련이었다.


"세상을 탐험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자신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가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껴본 사람만이 기회와 가치를 알아보고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본 만큼, 아는 만큼 거둔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만난 세상에는 온통 보물이 가득했다. 나는 늘 나 자신을 낯선 곳에 데려다 놓았다. 거기서 얻은 사람과 기회, 성취가 안전한 곳에서 편안함을 누리고 싶은 마음을 이겼다. 행운의 여신은 언제나 모험가의 편이어서 기회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쉼 없이 모험 중인 사람에게만 온다. 물론 보물을 알아보는 안목과 인내심, 먼저 달려가는 실행력과 성실함은 필수다."  (p.7~p.8)


글로벌세아 그룹 김웅기 회장의 사업 도전기를 담은 <세상은 나의 보물섬이다>를 다 읽은 나의 소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35세의 직장인이었던 저자가 자본금 500만 원과 직원 2명으로 의류 수출 회사를 설립하여 37년이 지난 지금 자산과 연매출 모두 6조 원을 상회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의 역경과 도전의 기록을 담은 이 책은 여타 기업의 창업 성공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사양산업으로 분류되던  의류, 섬유를 기반으로 창업 전선에 뛰어들어 세아상역이라는 작은 회사로부터 나산(인디에프), 쌍용건설, 태림, 발맥스기술, 세아STX엔테크, 전주페이퍼까지 품으며 2023년 대기업 집단(공시대상 기업집단)에 포함되는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시킨 건 순전히 김웅기 회장 본인의 열정과 노력 덕분이라 하겠다.


"어떻든 기업은 정치 앞에서 무기력하다. 세아상역은 경협보험에 가입하여 투자비 100억 중 70억은 보험금으로 회수했다. 그러나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영세한 중소기업들은 막대한 투자손실이 발생했다. 북측 근로자들은 직장도 잃고 기술을 배울 기회를 잃었다. 개성공단 폐쇄처럼 정치적인 이유로 중단되어 경제 개발이나 발전에 지장이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정치가들이 발 벗고 나서서 투자를 유치하고 나라를 혁신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나라도 많았다."  (P.187)


누구나 다 열정과 노력만으로 제2의 김웅기, 제3의 김웅기가 될 수는 없다. 그렇게 될 리도 없고 말이다. 다만 우리는 누군가가 이룩한 결과만 부러워할 뿐 그 과정의 고단함을 간과하곤 한다. 뿐만 아니라 삶에서는 언제나 얻는 게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게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아무것도 아닌 양 흘려보내곤 한다. 예컨대 1억 달러의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내 가족의 생일을 놓칠 수도 있고, 부모님과의 여행 약속을 취소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는 다만 그 사람의 가치관의 문제일 뿐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삶의 성취라는 건 결국 순간순간 자신이 고른 선택의 총합일 뿐이다. 내가 누군가의 성취를 딱히 부러워하지 않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웃풋(output)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풋(input)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성취는 그 사람의 시간과 에너지, 즉 그의 희생에 대한 당연한 성과인 것이다.


"바람개비에게 바람이 없는 상황은 절망적이다. 하지만 바람개비를 돌리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바람이 불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바람개비를 들고 뛰어서라도 돌리고야 만다. 인간의 의지는 새로운 것을 만들고, 놀라운 결과를 보상으로 돌려받게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천수답(天水畓) 경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자주 말한다."  (P.328)


책의 저자인 김웅기 회장도 이제 70대가 되었다. 남들이 보기에 많은 성취를 이룬 행복한 사람으로 인식될 수도 있겠지만 사업가로서 그의 시간은 언제나 긴장의 연속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인생의 황혼기에 이른 그가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볼 때 자신이 이룬 경제적 성과보다는 가난한 나라 아이티에 세운 세아학교에 더 많은 자부심을 느낄지도 모른다. 나는 김웅기 회장이 이룬 성과와 그의 철학을 존중한다. 그리고 피가 끓는 젊은 시절의 누군가가 이 책을 읽는다면 한 번쯤 그의 열정을 닮아보라고도 말해주고 싶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는 얻는 게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게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야속하게도 신은 우리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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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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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너그러울 수 있을까요? 관용과 포용의 한계는 과연 그 끝이 어디일까요? 나의 평가가 조금 박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들 각자가 지닌 너그러움의 한계는 스스로에게 오는 물질적, 정신적 피해가 전혀 없는 선에서만 가능하다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예컨대 성소수자에 대한 관대함은 그들로 인해 나의 종교생활에 조금의 피해도 미치지 않을 때, 천안함 생존 장병이나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배려는 나의 정치 성향과 내가 낸 세금에 눈곱만큼의 피해도 입히지 않는 선에서,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희생과 아픔은 폭력과 공권력의 대치라는 색안경이 벗겨졌을 때 등 대한민국 국민 각자가 생각하는 한계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미치는 피해의 유무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들 대부분은 이해관계가 있는 당사자가 아니라 제삼자의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종교가 달라서, 정치적 성향이 같지 않아서, 추구하는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직장 내에서 직급이 다르거나 나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 등 우리가 누군가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이유는 너무나 많고 복잡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차별받는 누군가에 대한 고통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적어도 주류로부터 배제된 비주류에 속하거나 그들과 함께 걸을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 까닭입니다. 그들 역시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라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잊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 공동체 밖으로 사라져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와 같은 인식은 김승섭 교수의 저서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에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지금 현재 고통을 받고 있거나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비정한 인식과 매몰찬 태도 말입니다.


"혐오는 쉽습니다. 가장 약하고, 아픈 당사자들을 욕하면 되니까요. 어떤 이들은 HIV 감염인에게 "네가 잘못해서 걸린 거다. 네 치료에 들어가는 세금이 아깝다"라고 함부로 손가락질합니다. 인권과 사회보장의 관점에서 그릇된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혐오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 아니라, 상황을 더 악화시킵니다. 혐오와 낙인은 한국의 HIV 신규 감염을 증가시키고 더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p.188)


책에서 저자는 직업병 피해자, 성폭력 생존자, 성소수자와 관련된 소송에서 전문가 소견서를 쓰거나 법정 증언을 했던 경험을 소개하면서 상대측 대형 로펌 변호사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마련하고, 우아한 얼굴로 합리적 주장을 펼침으로써 종종 승소하는 걸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신이 살아온 고된 역사와 몸 깊숙이 새겨진 상처 말고는 자신의 주장을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갖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우리의 현실이 이럴진대 합리성과 억지를 구분할 수 있는 '합지적인' 기준은 무엇이어야 하며, 사회적 합의라는 미명하에 차별금지법을 '나중에' 처리할 일로 치부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를 뒤집을 만한 합리적 근거는 무엇일지 묻고 있습니다. 영국의 BBC는 한국,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OECD 국가에서 이와 비슷한 법률이 존재한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결국 우리나라는 차별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두 국가 중 한 나라가 된 셈입니다.


"사회적 약자의 삶에 대한 연구는 기본적으로 불평등에 대한 연구이다. 사회역학은 권력과 자본에서 배제된 이들이 살아가는 삶의 환경을 측정하고, 부조리한 환경이 약자의 몸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역학 연구는 종종 사회적 약자 집단이 기득권 혹은 전체 인구 집단에 비해서 건강 상태가 어느 정도 나쁜지를 확인한다."  (p.168)


나는 김승섭 교수의 저작 대부분을 읽어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독서의 재미나 지적 허영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나를 비롯한 우리 사회 구성원 전체가 과거에 비해 해가 갈수록 이웃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폭이 줄어들고 있지나 않나 하는 자각과 반성의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내 이웃에 대한 이해와 배려심이 반려견 반려묘보다 못한 처지가 되어가고 있다는 뼈아픈 현실은 나를 슬프게 합니다. 그러나 저자가 밝힌 바와 같이 그와 같은 현실에 대한 감정적인 접근이나 감상적인 인식만으로는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정확한 근거와 합리적인 주장을 통해 의견이 다른 사회 구성원을 설득하는 게 급선무일지도 모릅니다.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를 낳지 않는다. 세상은 복잡하다. 사회문제 해결은 그 복잡함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한다. 복잡하게 얽힌 매듭을 푸는 대신, 큰 칼을 휘둘러 자르는 것은 칼을 휘두른 이를 영웅처럼 보이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영웅적 결정은 종종 상황을 악화시킨다.”  (p.161)


“모든 참사나 재난에서도 각 인간은 고유하거든요. 개인마다 고유한 관계와 역사와 상황 속에서 서로 다른 욕구와 고민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어떤 공통의 사건을 겪었다는 이유로, 그들을 하나의 동일한 집단으로 여길 때가 많아요.”  (p.300)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 대한 배척이나 소외 현상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정치적 견해나 종교적 주장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사회 현상이나 단순한 상식의 차원에서도 나와 의견이 다른 이는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고 혐오합니다. 사회 통합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앞장서서 도모해야 할 종교와 정치의 기능이 상실된 까닭입니다. 차별과 배제를 통해 강력한 지지자들을 획득하려는 정치 모사꾼들과 이를 정의인 양 보도하는 사이비 언론으로 인해 차별과 혐오는 더욱더 강화되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부조리를 그저 손 놓고 바라보기만 한다는 것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사회가 유지되고 건전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른 동물이 아닌, 우리 곁을 지키는 '인간'의 체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김승섭 교수의 저작을 읽는 것도 36.5℃의 진실을 믿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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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산책 말들의 흐름 4
한정원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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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안쪽 갈피에서 누군가의 빛바랜 대출확인증을 발견했을 때, 나는 한동안 물끄러미 말을 잃는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도 도서관 서가에 꽂힌 이 책을 발견하고 나처럼 설레었을까. 책을 들고 집으로 향하는 길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던 건 아닐까. 책을 펼치고 세상과 자신이 분리되었을 때, 시간은 어느 때보다 빠르게 흘러가지나 않았을까. 별별 생각과 상상으로 머리가 지끈거리면 나는 비로소 책을 덮는다. 지금이라는 시간과 누렇게 변색된 과거 어느 시점 사이의 간극이 시간을 초월하여 나에게 닿을 수 있었던 가냘픈 인연 혹은 내 상상력의 웜홀을 통해 누군과의 과거와 맞닿았던 여린 떨림의 순간을 나는 대여한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기억하곤 한다. 대여한 책에 별책부록처럼 딸려온 누군가의 마음을 나는 쉽게 반납하지 못한다.


"눈은 흰색이라기보다 흰빛이다. 그 빛에는 내가 사랑하는 얼굴이 실려 있을 것만 같다. 아무리 멀어도, 다른 세상에 있어도, 그날만은 찾아와 창밖에서 나를 부르겠다는 약속 같다. 그 보이지 않는 약속이 두고두고 눈을 기다리게 한다."  (p.14)


한정원의 산문집 <시와 산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왔던 건 일주일 전쯤이다. 200쪽도 안 되는 얇은 책을 나는 눈에 담듯 꼭꼭 눌러가며 읽었다. 그 사이, 털갈이를 하는 어린 강아지처럼 매일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놀랍도록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고,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다독이며 나는 고운 체로 거르듯 작가의 순한 마음들을 가슴에 담았다. '단편영화를 세 편 연출했고 여러 편에서 연기를 했다'는 작가 소개와 '책을 덮고 나면 아름다운 시들만이 발자국처럼 남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당부가 '한정원'이라는 작가의 이름 밑에 가지런한 일상처럼 매달렸다.


"세상의 조도가 낮아지고, 지붕과 나무와 빈 그네에 침침한 그림자가 진다. 선명함을 잃을 때 모든 존재는 쓸쓸함을 얻는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자주 의기소침해지는 이유도 그와 비슷하다. 상대방의 마음이라는 건 도대체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 같기만 하고, 나는 '저녁' 앞에서 노인처럼 어두운 눈을 비비는 것이다."  (p,121)


계절이 순한 까닭은 가난한 이의 마음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이다. 겨울비가 잦은 온화한 겨울의 한 모퉁이에서 계절처럼 순한 마음의 <시와 산책>을 읽는다는 건 우연처럼 포장된 누군가의 선물이겠지. 채울 게 없어 늘 허전했던 내 마음의 한켠은 한정원 작가의 찰랑거리는 마음들로 조금씩 차올랐고, 바깥공기는 내가 내뿜은 날숨들로 조금 무거워졌을 테다. 나는 겨울을 다녀간 많은 이의 비밀을 순한 계절을 통과하는 뒷산 나무들의 몸피를 타고 흐르는 물소리를 통해 전해 듣는다. 어쩌면 그것은 곧 봄이 오리라는 생명의 외침이었는지도 모른다.


"걷다가 죽어가는 벌레 곁에 있어주고, 창을 내다보는 개에게 인사하고, 고양이의 코딱지를 파주며 탕진하는 시간이 나는 부끄럽지 않다. 그 시간의 나는 진짜 '나'와 가장 일치한다. 또한 자연이나 스치는 타인과도 순간이나마 일치한다. 그 일치에 나의 희망이 있다. 부조리하고 적대적인 세계에서 그러한 겹침마저 없다면, 매 순간 훼손되는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고 견딜까."  (p.157)


시간의 옆모습을 가만가만 그려본다. 내가 살았던 그 시간들은 어느 한순간도 멈춤이 없어서 시간의 전면이나 온전한 모습을 전혀 그릴 수가 없다. 나는 오직 시간의 속도와 옆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다. 겨울이 가고 또 봄이 찾아오겠지만 순했던 이 겨울의 풍경을 나는 어떻게 그려야 할까.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돌아서는 길, 나는 한 인터넷 서점에서 한정원의 <시와 산책>을 찾아 구매 버튼을 누른다. 이 순한 계절에 나는 한정원의 <시와 산책>을 눈에 담듯 꼭꼭 눌러가며 읽었노라고 시간의 옆모습에 낙서를 하듯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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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 문장의 기억 (양장본) -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박예진 엮음, 버지니아 울프 원작 / 센텐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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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책을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한 작가가 평생 동안 쓴 모든 작품을 읽는 것, 이른바 '전작 읽기'에 도전하여 자신이 뜻한 바대로 성공하는 경우는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읽고자 하는 작가가 살아생전 몇 작품 남기지도 못한 채 요절을 한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장수를 한 것으로도 모자라 작품 활동에 성실했던 다산 작가라면 더더욱 힘이 들 것임은 물론이다. 그래서인지 한 작가의 모든 작품 중 널리 알려진 문장 혹은 그에 덧붙여 발췌자 본인이 마음에 두었던 문장들을 하나의 책으로 엮은 발췌본이 종종 눈에 띄기도 한다. 이러한 발췌본은 문장을 가려 뽑은 발췌자의 안목이 전적으로 책의 질을 좌우하겠지만, 잘만 한다면 전작 읽기는 숫제 엄두도 내지 못하는 나와 같은 게으른 독서가에게는 꽤나 유용한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수박 겉핥기식이지만 작가의 작품 성향이나 철학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었는지 전작(全作)을 읽지 않고도 조금쯤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을 쉽게 얻으려는 얄팍한 생각 자체가 낯을 뜨겁게 만들기는 하지만.


"이 책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유명 작가, 버지니아의 문장들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그의 글 속에는 여러 차례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물상, 자연현상의 의식적 표현 등 버지니아의 글은 때로 난해하게 읽히기도 해 종종 독자들에게 좌절감을 주기도 하니까요."  (p.17 '프롤로그' 중에서)


<버지니아 울프, 문장의 기억>은 북 큐레이터이자 고전문학 번역가인 박예진 작가에 의해 발췌된 문장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29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박인환 시인의 시 '목마와 숙녀'에도 등장하는 버지니아 울프. 그녀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고안한 선구자이자 영국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평가되기도 한다. 1920년 인도 뭄바이에서 그녀의 숙모가 낙마 사고로 숨지자, 숙모의 유언으로 매년 500파운드의 연금을 받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에 몰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제인 오스틴의 팬이었고 그녀에 관한 훌륭한 평론을 남기기도 했던 버지니아 울프. 1882년에 태어나 1941년 59세의 나이에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마감하기까지 그녀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책의 표지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이 책은 '그림자로 물든 버지니아의 13작품 속 문장들'이다.


"sentence 061

 I understand Nature's game-her prompting to take action as a way of ending any thought that threatens to excite to pain.

나는 자연의 순리를 이해합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흥분이나 고통을 끝내기 위한 행동을 유도합니다."  (p.74)


우리는 어쩌면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비극적인 삶에 대해서만 말할 뿐 그녀가 열정을 갖고 몰두했던 작품 활동과 그녀의 문학적 성취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그녀의 내면에 흐르는 철학이나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는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태도는 우리 이전 세대에 살았던 다른 남성 작가와의 비교에서도 타당한 일이 아니며,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는 과정에서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되는 측면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적 성취는 그녀의 열정과 노력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sentence 201

The way to rock oneself back into writing is this. First gentle exercise in the air. Second the reading of good literature. It is a mistake to think that literature can be produced from the raw. One must get out of life... one must become externalised; very, very, concentrated, all at one point, not having to draw upon the scattered parts of one's character, living in the brain.

다시 글쓰기로 돌아가는 방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먼저, 가벼운 운동을 합니다. 두 번째로 좋은 문학을 읽습니다. 문학이 날것에서 생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은 일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람은 외부의 존재로 변해야 합니다. 매우 집중되어 하나로 모든 것을 집중해야 합니다. 분산하지 말고, 머릿속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p.194)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라는 여류작가를 명명하는 것이 자신의 시적 낭만과 지적 허세를 뽐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쯤으로 생각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댈러웨이 부인>이나 <등대로> 등 그녀가 쓴 몇몇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감히 그런 이유로 버지니아 울프를 입에 올리지 못할 것이다. 상류사회 출신이지만 성차별이 만연했던 시대를 살았던 버지니아 울프.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 위해서는 여성이라는 사회적 편견과 끝없이 싸워야만 했던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녀를 평생 괴롭혔던 정신병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감히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 앞에 '여류작가'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못할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다만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옮길 수 있는 훌륭한 작가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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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오후 네시 블루 컬렉션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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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소설은 이따금 현실에선 맞닥뜨릴 수 없는 가슴 답답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스토리의 진행이나 결말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럴 때는 정말이지 곁에 있는 가까운 사람에게라도 화풀이를 하여 속에 있는 응어리를 시원하게 풀어버리고 싶은 심정이 절로 드는 것이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되고, 그럴 수도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소설을 쓰는 작가는 답답한 독자들의 마음에는 영 관심이 없다는 둥 풀어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답답한 것은 오직 독자의 몫으로만 남을 뿐이다. 그렇다고 기껏 읽던 책을 결말도 알지 못한 채 내팽개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진퇴양난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일 게다.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오후 네시>는 책을 읽는 독자들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답답함에 나도 모르게 가슴을 치게 되는 그런 소설이다. 이야기는 은퇴한 노부부가 꿈에 그리던 자신들만의 집을 갖게 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제 그들은 혼잡한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호젓한 시골 생활을 즐기며 행복한 노후를 보낼 생각에 마냥 들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사한 집에서 가까운 단 하나뿐인 이웃인 팔라메드 베르나르댕 씨가 방문한다. 의사 출신이라는 그의 방문을 부부는 반갑게 맞이한다. 그러나 그 이웃은 첫 방문 이후 매일 같은 시각에 찾아와 두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안락의자에 꼼짝 않고 앉아 있다가 돌아가곤 했다. 그는 이제 불청객의 수준을 넘어 부부의 평화와 안식을 깨트리는 공포의 대상으로 변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세월이 느리게 간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온 세상 사람들이 세월이 빨리 간다고 떠들어 댄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해 1월만큼 그 말이 틀렸던 적도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루에는 각 시간대별로 독특한 리듬이 있었다. 저녁나절은 길고 안온했고, 아침나절은 짧고 희망에 넘쳤다. 오후의 초반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고통이 시시각각 심해져서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그리고 4시가 되면 시간은 진창 속에 처박히는 것이었다."  (p.85~p.86)


부부는 이제 불청객으로 변한 베르나르댕 씨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별별 수단을 다 강구한다. 베르나르댕 씨가 올 시간에 맞춰 집을 비운 채 산책을 나가기도 하고, 베르나르댕 씨가 듣건 말건 지루한 이야기로 대화를 이끌어 머무르는 시간이 고통스럽도록 유도하기도 하고, 저녁 식사에 베르나르댕 씨 부부를 함께 초대하기도 하고, 자신이 가르쳤던 옛 제자의 방문을 흔쾌히 허락하기도 한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였다. 베르나르댕 씨를 떼어내려 하면 할수록 자신에 대한 자각과 함께 자존감의 하락이 몰려왔다.


"나는 일개 시골 고등학교 교사로 40년 동안 세상이 경원하는 사어(死語)를 가르쳤고, 찬란한 원칙이라는 미명하에 아내에게 평범한 즐거움들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생활에서 내가 얻어 낸 자그마한 이점, 다시 말해서 재능 있는 학생의 진심 어린 경탄의 감정은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그 젊은 처녀의 눈빛에서 나를 가엾은 늙은이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읽었던 것이다."  (p.141)


주인공은 결국 다시는 방문하지 말아 달라는 경고를 베르나르댕 씨에게 하게 되지만 소심한 성격의 주인공 역시 그날 이후 이유도 알 수 없는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이웃집 남자의 자살 시도 장면을 목격한 주인공은 그를 구해 낸다. 공포의 대상이자 미움의 대상이었던 이웃집 남자의 자살을 못 본 척 넘길 수도 있었는데 그를 구해 준 의미를 주인공 본인도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한 질문은 이제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무엇인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으로 확대되는데...


"오늘은 눈이 내린다 1년 전 이곳으로 이사 온 그날처럼. 나는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본다. <눈이 녹으면, 그 흰빛은 어디로 가는가?>라고 셰익스피어는 묻고 있다. 그 이상 위대한 질문이 어디 있으랴. 나의 흰색은 녹아 버렸고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두 달 전 여기 앉아 있었을 때,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었다. 아무런 삶의 흔적도 남기지 않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쳐 온 일개 교사라는 것을. 지금 나는 눈을 바라본다. 눈 역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녹으리라. 하지만 이제 나는 눈이 규정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p.217)


내 주변에도 은퇴 후 전원생활을 즐기겠노라는 선언과 함께 시골에 집을 짓고 귀촌을 했던 지인들이 몇몇 있다. 그러나 그들 중 90% 이상의 사람들이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도시로 복귀하고 말았다. 금전적 손해를 감수하면서 복귀를 단행하게 된 구체적인 원인이야 알 수 없겠지만, 시골 원주민들과의 갈등이나 평생 길들여진 도시 생활의 패턴을 버리지 못한 게 주된 이유 중 하나였음은 물론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는 공포의 대상이거나 기피하고픈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만남의 횟수나 물리적 근접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결코 아니다. 결국 우리는 매일 만나고는 있지만 상상 속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살인을 꾀하는 어떤 대상과 섞여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오후 네시>의 주인공 에밀과 베르나르댕 씨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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