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쟁이 피터 - 인생을 바꾸는 목적의 힘
호아킴 데 포사다.데이비드 S. 림 지음, 최승언 옮김 / 마시멜로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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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으면 넓을수록 풍요롭고 만족한 인생을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는 멀마 전 고등학생 때 만나 지금껏 소중한 인연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 분을 만나고 왔습니다. 스님으로서 평생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분이죠. 속세와 동떨어진 작은 암자에 기거하며 단식과 좌선으로 일관하셨으니 이제는 적당히 사셔도 될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은가 봅니다. 아무튼 저는 어떤 고민이 있거나 마음이 답답할 때면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곤 합니다. 한번 그렇게 휑하니 다녀오면 마음도 몸도 한결 가벼워지곤 합니다.

 

스님은 그런 저를 보고 이따금 농담삼아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천주교 신자가 신부를 찾아갈 일이지 왜 애먼 중을 찾아 오느냐고 말이죠.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종교를 떠나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한결 편한 걸요. 차를 타고 서너 시간을 가서 다시 산길을 두어 시간 올라야 닿을 수 있는 곳이니 제가 사는 곳에서 아침 일찍 출발하지 않으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저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게 사실이죠.

 

이번에는 특별히 당부하실 말이 있었던지 스님이 먼저 청하셨습니다. 드문 일이죠. 만사 제쳐두고 달려가는 게 도리이겠으나 세상에 매인 몸이 어디 그리 쉽게 떠날 수 있습니까. 이 핑계 저 핑계로 한참 뜸을 들이다가 간신히 시간을 내어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스님을 뵐 때면 으레 밀렸던 이야기가 늘어지는지라 보통은 하룻밤 신세를 질 각오를 하고 떠납니다. 스님과 하루 반나절 나누었던 대화를 이곳에 다 옮길 수는 없지만 이번 산행에서 깊이 새기게 된 말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인생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나와 죽음과의 거리에 있어. 죽음과의 거리란 시간상의 거리가 아니라 마음 속의 거리를 의미하지. 가령 내일 죽을 사람도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죽음과의 거리가 한없이 멀 테고, 죽을 날이 사오십 년 남은 사람도 내일 당장 죽음이 찾아올 것이라고 맏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죽음이 지척으로 가까운 법이지. 어차피 죽음이란 순리이고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명확히 인식하는 순간, 그 사람의 시야는 온 우주를 품을 듯이 넓어지는 게야. 생각해 봐. 어차피 죽는 마당에 욕심낼 게 뭐가 있겠어? 그제서야 나를 잊게 되고, 가족이 보이고, 이웃이 보이고, 우주가 보이는 법이지. 천지개벽이라고나 할까? 하여, 죽음 직전에라도 자신의 죽음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행복한 사람이라고 해야 하겠지. 대개는 내일도 오늘처럼 살게 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면서 지금 당장 죽어 나자빠지는 사람이 허다하니까."

 

결국 스님의 말씀은 '죽음과의 거리'를 좁히라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상으로가 아니라 인식의 차원에서 말입니다. 나의 성공, 나의 가족, 나의 건강 등 오직 나에게만 집중되었던 시각을 이웃과 사회, 혹은 전 인류를 향해 시야를 넓히려면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어야 가능하겠지요. 더구나 젊은 나이에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적을 듯합니다.

 

저는 자기 계발서로 분류되는 책을 그닥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스님의 말씀에 부합하는 책으로 <난쟁이 피터>만한 책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교적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저도 책을 읽는 내내 몇 번이나 울컥하는 감정을 추스려야 했으니까요. 책의 주인공인 피터는 얼굴도 못생기고 키도 작은 아이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학교에서는 늘 놀림과 따돌림의 대상이었구요. 게다가 집안 형편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극적인 반전을 노린 작가의 의도였겠지만 말입니다. 피터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의 막노동꾼이었고, 폭력을 일삼기도 했었죠. 불쌍한 피터를 이해하는 사람은 어머니가 유일했습니다.

 

그러나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피터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던 어머니마저 교통사고로 죽게 됩니다. 결국 아버지와 둘만 남은 피터에게 불행은 또 다시 닥쳐옵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피터의 아버지를 이웃이 신고한 것이지요. 아버지마저 요양원으로 보내지자 피터는 가출을 합니다. 노숙자 생활을 전전하던 그는 어느 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올라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길이 보이지 않는 외로운 사막에서도, 파도가 무섭게 몰아치는 망망대해에서도 별빛에 의지해 방향을 잡고 두려움을 이겨냈대. 그래서 별빛은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꿈이 되고, 사랑이 되는 거야. 피터, 살다 보면 정말정말 힘들 때가 있을 거야. 이 엄마조차 도움을 줄 수 없는 때..., 그때는 별을 한번 쳐다봐. 나의 목적이 뭔가를 생각하고 방향을 확인하는 거지. 그런 다음에는 다시 씩씩하게 걸어가는 거야." (p.46)

 

집에서 갖고 나왔던 돈도 떨어지자 피터는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고, 신원도 불확실한 그로서는 그마저도 쉽지 않습니다. 어느 날 그는 택시 회사에 취직을 합니다. 알선료를 지불하면서 어렵게 만든 자리였죠. 택시기사를 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피터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일등공신은 단연 크리스틴 선생님이었죠. 피터의 어머니가 죽은 후 가출한 피터를 찾기 위해 노숙자를 위한 봉사활동을 시작할 정도로 애정을 보이셨던 분이니까요. 크리스틴 선생님을 통하여 여자친구도 사귀게 됩니다.피터의 택시를 탔던 승객 중에는 무료진료 봉사를 하는 소아마비 의사도 있었습니다. 그는 피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며 사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서로 나누며 사랑하는 마음에 있다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욕심부릴 때 세상은 한없이 불공평해 보이죠. 왜냐하면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분명 존재하니까요. 하지만 내 것을 먼저 나누고,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하면 세상은 공평하게 보입니다. 어디에 목적을 두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죠." (p.109)

 

피터의 인생에 멘토 역할을 한 사람은 그 외에도 많았습니다. 노숙자들을 돌보는 알렉스 경, 같은 택시기사이면서 형 동생으로 지냈던 가브리엘, 하버드 법학대학원 교수인 프랭크, 피터의 곁을 지키며 응원을 해주었던 여자친구 미셀 등이 대표적입니다. 불행한 환경이었지만 그의 곁을 지켜주던 많은 멘토가 있었기에 피터는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워너 교수의 '회복 탄력성'이 생각나더군요. 피터는 야간 대학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됩니다. 물론 택시기사를 하면서 말이죠. 그후 프랭크 교수의 도움으로 하버드 법학대학원도 마치게 됩니다. 노숙자에서 변호사가 된 신화를 쓴 셈이죠. 그는 교수로 남는 게 어떠냐는 프랭크 교수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돕겠다며 뉴욕의 거리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비록 졸업은 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한때 몸담았던 고등학교에서 연설도 하게 됩니다.

 

"저를 바꾼 것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목적의 힘'이었습니다. 그 힘은 나(ME)를 뒤집어 우리(WE)를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가난은 참 많은 면에서 사람을 힘들게 하지만 인생을 좌우할 만한 결정적인 변수는 되지 못합니다. 신체적 결함 또는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나 시련 같은 불가항력적인 고난 역시 우리 삶을 멈추게 할 정도로 중요한 요인은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목적이 없다면 삶은 확실하게 엉망이 됩니다." (p.245)

 

저는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죽음과의 거리는 얼마나 먼 것인지요? 혹시 영원처럼 먼 거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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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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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 책이 베스트 셀러에 올랐지?' 의아해지는 경우가 있다. 물론 사람들의 기호도, 관심도, 웃음이나 낭만 코드도 다 제각각이니 뭐라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최근에 골랐던 책 중에는 마저 다 읽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했던 책이 있다. 요나스 요나손이 쓴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그것이다. 황당한 이야기의 연속, 나의 웃음 코드와는 번번이 빗나가는 썰렁함, 낯선 지명과 이름들의 연속, 도대체 나는 뭘 의지하여 이 책을 다 읽어낼 수 있을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이 얇기라도 했으면 그나마 다 읽지 않았을까 생각하지만.

 

그랬던 게 엊그제인데 또 다시 나는 요나스 요나손의 책을 고르고 말았다.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가 그것이다. 저자도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고른 내 잘못이 컸지만 책을 읽기도 전에 하품부터 나오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이런 젠장! 한바탕 욕이라도 퍼붓고 나면 속이라도 후련하련만 집에 들어 오는 순간부터 내 대화 상대라고는 TV나 라디오, 컴퓨터가 유일하니 그들이 내 욕설에 맞장구를 쳐줄 리도 만무하고 등을 토닥이며 한마디 위로의 말을 건넬 리도 없지 않은가.

 

눈물을 머금고 책을 펼쳤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읽어야지', 이를 악물었다. 장장 541쪽의 험난한 여정. 이건 뭐 숫제 마운틴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거나 진배없었다. 소설은 소설일 뿐, 오해하지 말자는 심정으로 읽어나갔다. 소설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남동쪽 소웨토(흑인 거주지)에서 시작된다. 시너에 중독된 엄마를 돌보며 생계를 이어 나가기 위해 다섯 살 때부터 분뇨통을 날라야 했던 소녀 놈베코. 분뇨 수거인에서 갑작스레 관리자가 된 그녀는 자신을 성추행하려 했던 옆집 아저씨로부터 글을 배우고 매일같이 라디오를 들으며 똑똑하게 말하는 방법도 터득한다. 유난히 셈에 밝았던 그녀는 우연히 손에 넣은 다이아몬드를 들고 소웨토를 탈출한다. 단순히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목적으로.

 

놈베코는 보도를 걷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지만 보상을 받기는커녕 가해자에게 보상하기 위해 7년 동안의 노예생활을 하게 된다. 그녀가 간 곳은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던 비밀 연구소 '펠린다바'. 교통사고 가해자였던 엔지니어는 그 연구소의 연구소장으로서 그는 오로지 아버지의 권력과 부유함 그리고 넘치는 행운으로 남아공 최고 핵 전문가가 된 인물이다. 놈베코는 연구소에 있던 모든 책을 독파하여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던 엔지니어를 도와 무난히 핵폭탄을 생산하게 되지만 생산된 핵폭탄은 여섯 개가 아닌 일곱 개였다.

 

연구소를 감시하고 있던 이스라엘 첩보원 모사드 A와 B를 따돌리고 스웨덴으로 망명한 놈베코. 그러나 그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잘못 배달된 핵폭탄 한 기를 떠안게 되고 망명자로서 인정도 받기 전에 핵폭탄과의 불안한 동거가 시작된다. 여차저차 하여 놈베코는 둘 중 하나만 주민등록이 되어 있는 쌍둥이 형제 홀예르1, 홀예르 2. 그리고 CIA가 자신을 쫓고 있다는 불안증에 걸린 미국인,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짝퉁 사기'를 일삼는 중국 여자들과 철거 예정지의 주택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여전히 핵폭탄 처리 방법을 고민하면서 말이다.

 

놈베코는 그 와중에도 스웨덴어를 배우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홀예르 2를 사랑하는 놈베코와 존재하지만 생각할 줄 모르는 홀예르 1을 사랑하는 셀레스티네의 좌충우돌 생활기가 그려지고 놈베코는 결국 스웨덴 수상과 국왕을 만남으로써 핵폭탄을 후진타오 중국 주석의 스웨덴 방문 기념품과 함께 중국으로 보낸다. 뿐만 아니라 놈베코와 홀예르 2는 수상의 도움으로 신분증을 획득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복귀한다. 스웨덴 대사의 자격으로 말이다.

 

작가는 황당한 인물과 황단한 설정을 통하여 세계의 역사를 풍자하고 가장 낮은 신분인 놈베코로 하여금 지배층을 조롱하고 불합리한 사회 구조와 체제를 비판한다. 작가의 생각은 여과없이 소설에 반영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핵무기의 개발, 인권이나 환경문제 등 현대 사회의 부조리가 패키지로 등장하는 셈이다.

 

 "이로써 조지 W. 부시는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된 반면, 알 고어는 심지어는 스톡홀름의 아나키스트들조차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시한 환경 운동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부시는 사담 후세인이 가지고 있지도 않은 무기들을 모조리 파괴해 버리기 위해 이라크를 침공했다." (p.386)

 

작가는 분명 특이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단지 나와는 웃음 코드가 맞지 않았을 뿐. 얼마 전에 읽었던 천명관의 <고래>만큼이나 새로운 소설이지만 서양 작가의 풍자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작가의 천재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탓인지 아무튼 나는 힘겹게 읽었다. 정말 힘들었다. 힘들다는 게 감상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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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즈음 2014-12-03 23:48   좋아요 0 | URL
아직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사 놓고 읽지 못하고 있는데요....저도 끝까지 못 읽으면 어쩌죠...

꼼쥐 2014-12-04 18:13   좋아요 0 | URL
ㅎㅎㅎ
이 악물고 한번 읽어보시죠. 그러다 이가 부러지면 책임질 수는 없지만.

별족 2014-12-04 09:05   좋아요 0 | URL
저도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끔찍했어요-_-;;;

꼼쥐 2014-12-04 18:14   좋아요 0 | URL
저는 다 읽지도 못하고 중도 포기했어요.ㅜㅜ

완벽한위로 2014-12-04 10:03   좋아요 0 | URL
재미있다던 100세 노인을 정말 힘들게 읽었는데...
저만 그런 게 아니었네요. -ㅁ-;

꼼쥐 2014-12-04 18:15   좋아요 0 | URL
이 작가의 책은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는 것 같아요.
최악이거나 최상이거나.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 불멸의 인생 멘토 공자, 내 안의 지혜를 깨우다
우간린 지음, 임대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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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이었던 그해 겨울방학에 나는 '명심보감'을 외우기 시작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었고, 뜻하는 바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당시 어머니는 하숙을 쳐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고 계셨고, 하숙생 중에는 몇 달 밀린 하숙비를 떼어 먹고 야반도주를 하는 사람도 가끔 있었다. 그 사람들은 으레 필요도 없는 옷가지며 자질구레한 가재도구를 마치 꼭 다시 오겠다는 맹세의 일환인 양 손도 대지 않은 채 떠나가곤 하였다. 떠난 사람이 다시 돌아올 것을 굳게 믿었던 까닭인지 아니면 물건에서 어떤 단서를 찾기 위함이었는지 어머니는 언제나 그 물건이 놓였던 자리를 한동안 정리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놓아두셨다. 약간의 미련이 묻은 그 옷 보따리를 말이다.

 

그해에도 그렇게 떠난 사람이 있었고, 나는 그 옷 보따리 속에서 모서리가 너덜너덜 닳아빠진 책 한 권을 발견하였다. '명심보감'이었다. 기껏해야 '아들 자, 계집 녀'를 지나 '배울 학, 학교 교'의 수준에 이르렀던 나의 한자 실력으로는 눈에 익은 글자를 찾아내는 데만도 가뭄에 콩나듯 하였다. 버릴까? 하다가 왜 갑자기 마음을 돌이키게 되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불현듯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전에 없던 호승심이 치솟았던 것이다. '이번 겨울 방학에 이 책이나 외워볼까?' 하는 생각과 함께 친구들 앞에서 어려운 말을 줄줄 읊어대는 내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가자 저절로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이었다. 참으로 인연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시작된 '명심보감' 외우기는 그해 겨울의 엄혹한 추위처럼 맵고도 쓴 것이었다. 자치기를 하자는 친구의 유혹도, 외발 스케이트를 타는 스릴도 꾹꾹 눌러 참으면서 나는 집 밖 출입을 삼가한 채 명심보감과 한자 사전을 끼고 살았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참담했다. 명심보감 초략본 19편 247조 중 계선편 11조를 간신히 외웠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알량한 지식의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자왈, 위선자 천보지이복'으로 시작되는 명심보감의 문구를 이제 막 변성기가 시작되는 걸걸한 목소리로 읊을라치면 친구들은 마치 공자의 현신을 뵙는 듯 존경과 경외의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곤 하였다. 개중에는 그게 무슨 뜻이냐며 한수 배움을 청하는 친구도 가끔 있었다. 나는 그럴 때면 '네깟 것들이 설명을 해준들 이해나 할 수 있겠냐'는 표정으로 뒷짐을 진채 한껏 점잔을 빼곤 하였다. 나와 공자의 첫 만남은 그렇게 특별했었다.

 

내가 공자를 다시 만난 것은 대학 신입생이었던 어느 봄날의 광화문 교보문고에서였다. 친구를 기다리면서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던 나에게 후광이 비치는 듯 밝게 빛났던 '논어'. 나는 익숙한 스승을 다시 만난 듯 반가웠었다. 그때 나는 '그래, 대학생이라면 적어도 '논어'는 읽어줘야지.'하는 심정으로 꼬깃꼬깃 접힌 지폐를 미련없이 꺼냈던 것이다. 스승님을 다시 뵙는데 그깟 돈이 대수이겠는가. 그러나 '논어'의 한 구절 한 구절의 깊이는 '명심보감'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나는 대학 시절 내내 잘 읽지도 않는 논어를 마치 부적처럼 가방에 고이 모시고 다녔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만 주야장천 읊어대면서. 그랬던 내가 최근에 공자를 다시 만난 것은 우간린의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를 통해서였다. 나에게는 이제 유식한 문구를 읊어댄다고 해도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봐 줄 만한 친구도 없고, 그때의 치기는 더더욱 남아 있지 않은 까닭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책은 단순한 한자의 뜻풀이가 아닌 이야기와 에피소드의 방식으로 쓰였으므로 마음을 담아 조용히 읽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공자의 가르침은 고지식하다거나 구태의연하다고 말한다.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가장 보편적인 지혜는 쉽게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심오한 진리를 쉽게 설명하기란 더더욱 어렵다는 것을. 이제 나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悅乎)'의 의미를 간신히 깨우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내가 아는 공자는 자신의 지난했던 삶의 체험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가장 보편적인 언어로, 무엇보다 가장 쉬운 말로 제자들을 가르쳤던 위대한 스승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그 깊은 의미를 새록새록 깨닫게 되지만, 가슴 한편에서는 '아, 진즉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때늦은 후회가 밀려오기도 한다. 나를 바로 세우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초석이다. 단언컨대 공자의 가르침을 빨리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 가능성은 높아진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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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랑 - 언젠가 너로 인해 울게 될 것을 알지만
정현주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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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부터 얘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이렇게 말하기는 좀 뭣하지만 사실 제 취향은 아닙니다. 저는 글쎄, 뭐랄까 세심하거나 다정한 성격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책을 읽을 때에도 내용부터 먼저 살피다가 뒤늦게서야 표지를 살피곤 하지요. '아, 이 책의 표지가 이랬구나' 나중에야 깨닫게 됩니다. 그것도 우연처럼 말이죠. 사람을 만날 때도 그래요. 어제 만났던 사람도 그날 어떤 옷을 입었었는지 도통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날 그 사람의 표정이 어땠는지, 목소리 톤은 어땠는지, 웃음 소리는 밝거나 어두웠는지 또렷이 기억하곤 하지요. 그런 성격을 가진 제가 책을 읽은 느낌을 말하기 전에 표지부터 말한다는 건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표지의 색깔은 음, 화이트 그레이라고 해야 할까요. 종이 표면은 천을 직조한 듯한 격자 무늬의 엠보싱이 보이구요. 중앙 상단에는 잠기지 않은 옷핀이 그려져 있고, 그 밑으로 '그래도,/사랑'이라는 책 제목이 행을 나누어 쓰여져 있습니다. 색깔은 암녹색쯤으로 보입니다. '사랑'의 '사'자와 '랑'자 사이에 부제인 듯 작고 검은 글씨로 '언젠가/너로 인해/울게 될 것을/알지만'이라는 문장이 역시 행을 나누어 쓰여져 있습니다. 그 밑으로는 약간의 여백을 두고 '정현주 지음'이라는 검은 글씨체가 보입니다. 표지에서 받은 저의 느낌은 깔끔하고 단정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정현주 작가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있나요? 음, 기억나지 않는 걸 보니 저는 처음인 것 같아요. 라디오 작가라고 하는군요. <별이 빛나는 밤에>, <최강희의 야간비행>, <장윤주의 옥탑방 라디오>, <FM데이트 강다솜입니다> 등 화려합니다. 이 책에 소개된 40 편의 사랑 이야기도 <장윤주의 옥탑방 라디오>의 데일리 코너인 ‘그 여자의 노란 일기장’의 수많은 에피소드 중 청취자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던 이야기를 새로 써서 엮었다는군요. 한 편 한 편의 이야기 뒤에는 작가가 보았던 영화나 책, 그에 어울리는 노래 등을 소개하며 작가 자신의 느낌도 함께 기록하고 있습니다.

 

책은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SCENE 1 만나고', 'SCENE 2 사랑하고', 'SCENE 3 헤어지고', 'SCENE 4 그리워하고', 'SCENE 5 다시 만나다'의 다섯 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뒤에는 장윤주, 최강희, 김동영의 추천사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책에 소개된 영화와 책과 노래의 제목이 색인처럼 실려 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모든 사람은 잠재적인 작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사연 하나하나를 모두 읽고, 선별하고, 각색하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인생을 배울테니까요. 조금 길다 싶지만 작가가 선별한 에피소드 중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이사를 하고 며찰 뒤,

고양이가 사라졌다.

여자는 추운 겨울의 밤거리를 다니며

고양이의 이름을 불렀으나

골목 가득 냉정한 어둠만 가득 차 있을 뿐,

익숙한 대답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달조차 얼어버릴 것 같은 밤.

여자는 온몸이 굳도록 골목을 헤매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에 살던 집에 가보았다.

 

고양이는

거기 있었다.

 

주인이 바뀌어

아무리 소리를 내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문 앞에 있었다.

그것이 꼭 자신의 모습 같아서 여자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주인이 떠난 집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고양이와

사랑이 떠났는데도,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사랑을 기다리는 여자.

 

둘은 함께 새로운 집으로 돌아왔고

여자는 말 없는 고양이에게 말했다.

 

"이제는

여기가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야."

 

그것은 마치 그녀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고양이가 다가와

얼어붙은 손을 따뜻하게 핥아주었을 때,

여자는 '현실을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편안하구나'하고 웃었다. (p.286~p.287)

 

제가 이따금 듣게 되는 라디오 프로그램 중에는 '여성시대'가 있습니다. 거기에 올라오는 시청자 사연은 어느것 하나 허투루 들을 수가 없습니다. 삶의 무게가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저는 어쩌면 그 사연 하나하나를 통하여 인생을 배우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책도, 영화도, 노래도 그런 것이겠지요. 이 책에 실린 사연들은 모두 사랑과 이별에 관련된 것들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사랑, 참 쉽다' 느꼈지만 사랑 앞에서 늘 망설이고 주춤거렸던 제 젊은 날의 모습이 아로새겨졌습니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라면 어쩌면 이 책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용기를 내어 사랑을 고백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사랑도, 이별도 삶의 한 과정일 뿐,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사랑 앞에서 늘 망설이고 한 발 물러서게 됩니다. '이 사람이다' 확신할 수 없는 게 사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어설프고 서툰 사랑마저 없다면 인생은 얼마나 삭막하고 황폐한 것인지요. 정현주 작가의 <그래도, 사랑>은 참 괜찮은 책이라고 느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구성도 괜찮은 것이구나 느꼈다는 게 옳겟지요.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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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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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 하루키에 대한 나의 팬심이 대략 30리터쯤 덜어졌었는데 그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고 다시 채워진 느낌이다. 어쩌면 그 이상이었는지도. 말하자면 이 책에서 작가는 예전의 그의 모습, 소설가로서 내가 상상하는 그의 면모를 다시 회복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의 단편집 <중국행 슬로보트>를 읽었을 때의 순한 감동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하루키 문학의 특징은 독자와의 일정한 '거리두기'에 있다. 물론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 간의 거리두기가 되겠지만 말이다. 예컨대 작가는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듣거나 보았거나 때로는 상상해보았다"는 식으로 툭 던져놓고는 작가 자신은 왜 그것을 말하려 하는지, 어떤 목적으로 썼는지, 쓰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도통 말하지 않는 것이다. 독자가 알아서 생각하라는 듯. 작가는 독자의 관심이나 애정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투다. 그런 하루키식 '거리두기'는 수필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만 소설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하루키의 이런 방식은 그의 내면을 조금이라도 더 들여다 보고 싶어 하는 독자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역할을 한다. 여자들이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것처럼.

 

세상과(또는 독자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겠다는 작가의 태도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타자와 완벽하게 하나가 될 수 없음을 인식하게 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상대방의 생각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완벽하게 읽어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인간의 노력으로는 닿을 수 없는 한계, 그 절망적인 한계를 인식한다면 굳이 노력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더 가까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는 관음증적 욕구는 어차피 사그라드는 게 아닐테니까. 작가는 그 한계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쓰는 듯하다. 작가가 이 책의 제목으로 <여자 없는 남자들>이라고 붙인 이유도 아마 그럴 것이라고 짐작된다. '여자'는 젠더(gender)적 구분이 아닌 남자가 가장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가까워질 수 있는 대상, 또는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다만 해소될 수 없는 욕구일 뿐이다.

 

이러한 거리두기의 방식은 인간의 절대적인 고독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게 하는 한편 인간의 선천적인 관음증적 욕구를 최대로 자극하곤 한다. 나는 모든 지적 욕구가 선천적인 관음증에서 비롯된다고 이해하고 있다. 타인의 감춰진 비밀을 엿보려는 심리나 자연이나 기타 다른 사물의 비밀을 캐내려는 욕구는 그 대상만 다를 뿐 방식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본능인 동시에 지극히 은밀하고도 사적인 영역으로 남겨두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관심을 갖고 무엇인가 알아내려고 하는 일련의 행위,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싶어하는 욕구는 그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에 관음증적 욕구는 더더욱 강해지는 게 아닐까.

 

이 책 <여자 없는 남자들>에는 표제작인 '여자 없는 남자들'을 포함하여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물론 각각의 단편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여자가 없다. 아니, 여자는 있는데 관심을 갖고 상대방의 비밀을 속속들이 탐구하고 싶어하는 대상은 아닌 것이다. 소설을 이해하는 관점은 독자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성욕이나 사랑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감추어진 어떤 것을 은밀히 엿보거나 탐구하려는 욕구.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이 책의 첫 단편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아내와 사별한 가후쿠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배우인 그는 아내가 암으로 죽기 전에 몇 명의 남자와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가후쿠는 그 중 한 명인 다카스키를 만난다. 가후쿠는 아내가 죽기 전 왜 그 사람과 섹스를 했는지, 왜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었는지 끝내 묻지 못했다. 가후쿠는 다카스키를 통해 그것을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것은 끝내 의문으로 남는다.

 

두 번째 작품인 '예스터데이'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까운 친구로 지내왔던 기타루와 에리카가 등장한다. 연인 관계였던 둘은 에리카가 대학에 합격하고 기타루가 재수를 하게 되면서 소원해진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끝내 육체적 관계를 요구하지 않았던 기타루에 대해 에리카는 이해하지 못한다. 에리카는 일일 데이트 상대였던 화자에게 자신이 꾸었던 꿈 얘기를 들려준다.

 

"우리는 단둘이 작은 선실에 있고, 밤늦은 시간이라 둥근 창 밖으로 보름달이 보여. 그런데 그 달은 투명하고 깨끗한 얼음으로 만들어졌어. 아래 절반은 바다에 잠겨 있고. '저건 달처럼 보이지만 실은 얼음으로 되어 있고, 두께는 한 이십 센티미터쯤이야.' 아키가 내게 알려줘. '그래서 아침이 와서 해가 뜨면 녹아버려.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 동안 잘 봐두는 게 좋아.' 그런 꿈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꿨어." (p.97)

 

세 번째 작품인 '독립기관'에는 성형외과 의사인 도카이가 등장한다. 그는 쉰두 살의 독신남이다. 그는 지금껏 결혼을 하지 않았고, 그가 원하는 것도 '매력적인 여자들과의 친밀하고 지적인 교류'일 뿐이다. 상대는 대개 유부녀거나 연인이 있는 여자들이었다. 아무런 문제도 없이 여자들을 만나고 쿨하게 헤어질 수 있었던 그가 결국에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상대는 물론 애가 있는 유부녀다. 도카이는 그녀로부터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한 언젠가 닥쳐올 이별에 대해 염려한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이젠 그녀의 마음과 내 마음이 뭔가로 단단히 묶여버린 느낌이에요.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면 내 마음도 따라서 당겨집니다. 로프로 이어진 두 척의 보트처럼. 줄을 끊으려 해도 그걸 끊어낼 칼 같은 것은 그 어디에도 없어요. 이런 건 지금까지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감정입니다. 그게 나를 불안하게 만들어요. 이대로 점점 그리움이 깊어지면 나는 대체 어떻게 될까 하고." (p.145~p.146)

 

네 번째 작품인 '셰에라자드'에는 늘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하바라라는 남자가 등장한다. 그에게는 그를 대신해 일정한 주기로 장도 봐주고 그와 섹스도 하는 여자가 한 명 있다. 그녀는 성행위가 끝나면 매번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미모의 왕비처럼.

 

"그는 원래부터 혼자인 것에 익숙했다. 그의 신경은 혼자가 된다고 그리 쉽게 망가지지 않는다. 하바라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그렇게 되면 더이상 셰에라자드와 침대에서 이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좀더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뒷부분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p.178~p.179)

 

다섯 번째 작품인 '기노'에는 스포츠용품 회사의 영업사원이었던 기노가 등장한다. 그가 출장을 갔다 돌아왔을 때 그의 아내는 자신의 직장 동료와 자신의 집에서 한 몸이 되어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후 그는 직장에 사표를 내고 집을 나왔다. 이모의 가게를 임대하여 바를 개업했었는데 어느 날 이혼을 한 전처가 그의 가게로 찾아온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과를 하지만 그는 다만 형식적인 용서를 할 뿐이다. 일시적으로 가게의 문을 닫고 여행을 떠났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 그때 상처를 받았음을 인식한다.

 

여섯 번째 작품인 '사랑하는 잠자'는 다들 짐작하겠지만 카프카의 '변신'에 등장하는 그레고르 잠자가 주인공이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던져진 듯 느끼는 그레고르 잠자는 고장난 자물쇠를 수리하러 온 꼽추 여자를 만난다. 그 여자로부터 여러 이야기를 듣게 되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그 여자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마음만 있었을 뿐.

 

"그녀를 생각하고 그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속이 아련히 따스해졌다. 그리고 자신이 물고기나 해바라기가 아니란 사실이 점점 기쁘게 다가왔다. 두 다리로 걷고 옷을 입고 나이프나 포크로 식사하는 것은 분명 몹시 성가신 일이다. 이 세계에는 배워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만일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물고기나 해바라기가 되었다면 이렇듯 신기한 마음속 온기를 느끼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p.311)

 

일곱 번째 작품은 표제작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나'는 한밤중 한 시가 넘은 시각에 엠의 남편으로부터 그녀의 자살 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받는다.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아주 사소한 인연으로(단지 지우개를 빌려주었다는) 연인 관계로 발전했던 그녀는 2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만났었고 그렇게 헤어졌다. 그러나 그녀가 스스로 세상을 떠남으로써 '나'의 열네 살은 세상에서 함께 사라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그날은 아주 작은 예고나 힌트도 주지 않은 채, 예감도 징조도 없이, 노크도 헛기침도 생략하고 느닷없이 당신을 찾아온다. 모퉁이 하나를 돌면 자신이 이미 그곳에 있음을 당신은 안다. 하지만 이젠 되돌아갈 수 없다. 일단 모퉁이를 돌면 그것이 당신에게 단 하나의 세계가 되어버린다. 그 세계에서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로 불린다. 한없이 차가운 복수형으로." (p.327)

 

작가의 소임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인간에 대한 탐구(그것이 여자든 남자든, 타인이든 자기 자신이든), 그리고 흐르는 시간과 그 속에서 존재했던 사람들의 관계와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어렴풋이 짐작하는 일일 것이다. 문학이란 결국 나 스스로, 오픈된 장소가 아닌 사적인 영역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몰래 엿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합법적으로 타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방법은 많다. 타인과의 대화가 그렇고, 드라마 시청이 그렇고, SNS가 그렇고, 독서가 그렇다. 그러나 가장 은밀하고 스릴있는 방법은 역시 독서가 아닐까 싶다. 나는 왜 그때 그것에 끌렸을까? 작가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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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와 관계없이 기억하고 싶은 문구를 따로 적는다.

 

"스무 살 전후의 나날, 나는 일기를 쓰려고 몇 번 노력해봤지만 영 잘되지 않았다. 당시 내 주위에는 너무 많은 일들이 쉴새없이 일어났고, 그걸 따라잡기에도 벅찼다. 도저히 날마다 멈춰 서서 그날 일어난 일들을 일일이 노투에 적어둘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건 꼭 적어둬야지' 하고 생각할 만한 사건도 아니었다. 나로서는 거센 맞바람 속에서 가까스로 눈을 뜨고, 호흡을 가다듬고,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게 고작이었다." (p.111~p.112)

 

"인생이란 묘한 거야. 한때는 엄청나게 찬란하고 절대적으로 여겨지던 것이, 그걸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버려도 좋다고까지 생각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혹은 바라보는 각도를 약간 달리하면 놀랄 만큼 빛이 바래 보이는 거야. 내 눈이 대체 뭘 보고 있었나 싶어서 어이가 없어져." (p.211~p.212)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현실에 편입되어 있으면서도 현실을 무효로 만들어주는 특수한 시간, 그것이 여자들이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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