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바보의 일생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말과 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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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바보의 일생

P28. 행복이란 행복에 신경 쓰지 않는 때를 말한다.

P89. 문예 작품을 어떤 식으로 감상하면 좋을까, 물론 이것은 중요한 문제인데요, 제가 먼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솔직하게 작품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건 이런 작품이라는 둥, 저건 저런 작품이라는 둥 그런 생각을 갖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P255. 왠지 마음에 걸려 묻습니다. 정말로 나를 사랑해주겠습니까? 이 편지는 후미 혼자만 보십시오. 남이 보면 쑥스러우니까요.

인간 아쿠타가와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인간과 예술, 고뇌를 주제로 엮은 문장들을 시작으로 자전적 성격의 수기, 친구와 스승 그리고 연인에게 보낸 편지, 마지막으로 그가 떠난 후 동료들의 회상까지. 작품만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그가 가진 감정과 가치관, 그의 짧았던 생애를 일부지만 엿볼 수 있어서 기뻤다.
그의 문장들을 하나씩 천천히 읽다 보면 서른 다섯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만큼 인간과 그 삶을 꿰뚫고 있음은 물론이고 자신만의 확고한 예술관에 감탄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짧기만 한 그의 생애가 괜스레 아쉽고 안타까웠다. 만약 그가 더 살았다면, 그의 말로 이루어진 작품을 더 많이 접했을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아쿠타가와의 문장을 읽을 땐 단어 하나하나 꼭꼭 씹어서 삼켜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건 처음 그의 작품을 접했을 때도 그러했고, 이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문장력에는 자신이 있다는 그의 말처럼 문장마다 날카로움과 묵직함을 지니고 있어서 어느 것 하나 쉬이 넘길 수 없었다.
‘어느 바보의 일생’에서는 살아 생전 그가 느낀 불안감과 두려움이 생생히 드러나있었다. 미쳐버리거나 자살하거나. 정신병으로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의 영향으로 평생을 불안감에 시달렸다고 하는 그의 감정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뒤의 친구에게 남긴 편지에서는 자살하기 전 이것저것 재고 따지는 모습에서 삶에 대한 집착이 보여서, ‘어쩌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몰렸을까’ 하는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제일 좋았던 그가 아내에게 쓴 편지들. 이 부분만큼은 정말 꼭 읽어보라고 하고 싶다. 솔직하고 담백한 어조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문장들은, 비유를 섞은 그 어떤 고백보다 낭만적이다. 이 편지를 읽을 때 나는, 초가을의 선선함이 아닌 따뜻한 봄날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무엇보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아쿠타가와의 편지를 읽으면 누구라도 마음이 동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내가 결혼하고 싶은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건 내가 후미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동료들의 회상을 읽으면서 생각한 건, 편집할 때 제외되었다던 다니자키의 글이었다. 서평을 쓰면서 책에 들어가지도 않은 글을 언급하는 건 역시 아이러니일까, 싶었지만 역시 나는 이 사람의 글이 궁금했다. 아쿠타가와의 편지를 읽으면 이 사람이 얼마나 학교를 싫어하고, 글 쓰는 걸 얼마나 좋아했는지 선연히 나타난다. 사실 나도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런 사람에게 글 쓰는 걸 그만두라한 다니자키는 얼마나 무례했던거지…’ 했는데 그가 말년에 쓴 수기를 생각하면 이 사람의 말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들어갔다면 아쿠타가와를 다채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었을텐데. 조금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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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노 구즈 쏜살 문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엄인경 옮김 / 민음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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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노 구즈

<요시노 구즈> - 일본 남북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요시노 지방을 여행한 이야기
<장님 이야기> -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을 곁에서 보필한 장님의 이야기.

여뀌 먹는 벌레에서 더 나아간 고전풍의 작품이었다. 여뀌 먹는 벌레가 고전 문화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과도기적 작품이었다면 이번 요시노 구즈는 일본사에 심취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본사가 소재의 중심이 된 만큼 일본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으면 어느 정도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을 테지만, 나는 빠삭한 편은 아니어서 첫 장부터 꽤나 고전했다.
하지만 다니자키 작품이 늘 그러하듯 소재가 역사라 하더라도 그 초점은 역사적 사건보다 특정 여성에 맞춰져 있었다. 요시노 구즈의 경우 동행인이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하는 여성이 그러했고, 장님 이야기의 경우 장님이 모시던 마님(노부나가의 여동생)이 그러했다. 요시노 구즈에서는 목적의 여성이 후반부에나 나와서 의외라고 여기긴 했지만.
어떤 것을 소재로 하더라도 특정 여성을 관찰하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는 주인공의 구도는 다니자키 작품에서는 빠질 수 없다는 걸 느꼈지만 그 점이 불편하게 다가왔기 때문에 여기서 그만 읽어야 하나 고민이 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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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뀌 먹는 벌레 쏜살 문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임다함 옮김 / 민음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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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여뀌 먹는 벌레

이혼 직전의 부부 미사코와 가나메. 이들은 각자의 바람을 용인한 채 겉으로만 부부행세를 한다. 이혼으로 인해 겪을 사회적 시선과 그 과정에서 서로 불편한 감정을 떠안기 싫다는 이유로 이들은 이혼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한다.

P109. “아소는 또, 섣불리 약속을 하면, 그것 때문에 오히려 늘 ‘질리지는 않을까, 질리는 게 아닐까?’하는 기분이 들 게 틀림없고, 자기 성격으로는 분명히 그렇게 될 거라면서 그 점을 두려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서로 약속을 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 함께 있는 것이 제일 좋아요. 자기 기분을 속박하지 않는 편이, 결국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P123. 요컨대 남편도 아내도, 헤어진다면 자기가 버림받는 쪽이 되기를 바랐고, 둘 다 마음 편한 쪽이 되고자 했다. 그들은 어린애도 아니면서 무엇이 그렇게 괴로웠던 것일까.

<여뀌 먹는 벌레>를 읽기 시작했을 때, <치인의 사랑>과는 사뭇 다른 작풍이라 놀랐다. 자극적인 묘사가 많이 줄었고 그 대신 이혼 직전의 부부의 심리 묘사에 공을 들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서구 문물에 대한 동경도 엿보이지만 분라쿠, 교겐, 조루리와 같은 일본 전통 예술이 글에 등장하다 못해 비중이 꽤 있어서 ‘갑자기 이게 무슨 심경의 변화지?’라고 생각할 정도로 작풍이 상당이 바뀌었다. 위의 전통 예술 같은 경우 각주에 상세히 소개가 되어 있어서 몰라도 책을 읽는데 큰 지장은 없지만,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있다면 조금 더 술술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들었다.

화자인 남편은 부부 관계가 소원해진 원인에 대해 동양적인 아내의 몸매에 관심이 생기지 않아서 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내 입장에선 그건 핑계일 뿐, 결국 본인의 무관심이 이들의 관계를 악화시킨 것처럼 보였다.

<치인의 사랑>처럼 읽는 재미가 있다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이혼에 대한 당시의 사회적 시선, 그로 인한 부부 간의 갈등 그리고 부부 관계에 대한 고찰 등 여러 면에서 생각해 볼 부분이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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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인의 사랑 쏜살 문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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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인의 사랑

평범한 회사원인 가와이 조지. 맞선을 통한 결혼은 싫었던 그는 어느 날 찻집에서 일하는 나오미를 보고 그녀를 키워서 자신의 아내로 맞을 생각을 한다. 몇 번의 만남 속에 그녀와 친해진 그는 그녀를 설득해 동거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상적인 결혼 생활이 될 거라 생각했지만 그녀의 사치와 이성관계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출판사 소개글처럼 ‘읽는 재미’만은 있었다. 다니자키 선집들 중에서 두꺼운 편에 속했던 책임에도 술술 읽혀서 읽는 것만큼은 재미있었다. 다만 이전 단편들에 비해 성적인 묘사가 늘고 자극적이어서 읽는 내내 불편함과 불쾌함은 있었다. 앞의 단편들은 작가의 성향을 헤아려서 고혹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치인의 사랑에 와서는 성도착증 환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의 집요한 묘사와 가치관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이 책이 나왔을 때 ‘나오미즘’이라고 불릴 정도로 나오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대단했다고 하던데 나로서는 아직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엮이는 남자마다 다 목을 맬 정도로 그렇게 매력적인 여성이었던 건가…?

치인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바보라고 한다. 결국 바보의 사랑이라는 뜻이 되는데… 이렇게 보니 제목이 내용에 비해 너무 순한맛이라 타 출판사에서 미친 사랑이라고 번역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주인공부터 시작해서 일본인 서양인 가리지 않고 나오미에 미쳐서 놀아나기 바빴으니…
결국 나오미의 본 모습을 알고도 끝까지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가와이만이 치인으로 남아버린 소설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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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죽음 쏜살 문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민음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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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죽음

<인어의 탄식> 인어라는 새로운 종족의 신비로움에 매료된 중국 청년이야기
<마술사> 현실인지 환상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환상적인 마술쇼
<금빛죽음> 자신만의 예술을 추구하기 위해 온몸을 바친 청년이야기

P29. 그런데 눈 안쪽은 또 달콤하고 서늘한 윤기를 품어서 깊고 깊은 영혼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영원’을 응시하는 듯한 숭엄한 빛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인간의 어떤 눈동자보다 유현하고 묘원한 훈영이 감돌고, 낭려하고도 애절한 요영이 번뜩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습관적인 ‘미’를 훌쩍 뛰어넘는, 인간보다 신에 가까운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P123. 이윽고 눈을 떠 방 한복판 탁자 위에서 금빛의 몸 그대로 얼음처럼 차가워진 오카무라의 사해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 집 고용 의사의 설명에 의하면, 금박으로 인해 온몸의 모공이 막혀 죽었을 것이라는 얘기였습니다. 보살도, 아라한도, 악귀도, 나찰도, 모두 금색 사체 아래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일부러 비슷한 주제로 작품을 엮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번 단편집의 주제는 미의 추구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대상은 인어, 마술과 같이 어떤 특정 형태가 되기도 하고 예술 그 자체가 되기도 했다. 미의 추구라고 했지만 사실 각각의 주인공들이 보이는 건 추구를 넘어선 집착에 가깝다.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해 집착하거나, 마(魔)에 홀려 스스로 희생양이 되거나, 자신만의 예술을 고집하다가 스스로 예술품이 되어버리는 모습은 광기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서있던 이들은 끝내 아름다움에 미쳐 그곳에 자신의 몸을 던져버린다. 3자의 입장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스스로의 선택에 몸을 내맡긴 이들에게도 과연 비극일까?

개인적으로 <인어의 탄식>이 기억에 남았다. 미지의 존재가 지닌 아름다움을 몇 페이지에 걸쳐 다채롭고 풍부하게 묘사하는 걸 보고 이래서 다니자키, 다니자키 하는 거구나 싶었다. ‘아름답다’ 이 한마디를 이토록 다양한 단어로 묘사해낼 수 있는 것은 이 사람밖에 없지 않을까.

쏜살문고에서 나온 다니자키 선집을 읽을 때마다 감탄하는 건, 표지의 그림이 작품과 딱 맞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던 그림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아! 하고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데, 그럴 때마다 이것만큼 이 소설을 관통하는 표지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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