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정의 소설 문득 시리즈 4
김유정 지음 / 스피리투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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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한번쯤은 읽어봤던 작가지만 아직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소설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라면 독자들에게는 큰 기쁨이다. 새로운 글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작가를 더 잘 사랑할 수 있는 경험을 공유할 수 있도록 기획된 이번 문득 시리즈에서 선보인 작품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상, 프란츠 카프카,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등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 작가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이번에 김유정의 소설을 만나고 나서 다른 작품들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이 높아졌다. 김유정이라고 하면 교과서에 실린 <동백꽃>의 저자로 꽃다운 스물아홉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여 더욱 안타까운 작가이다. 짧지만 강렬하고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들을 선보여 그때 당시에도 주목을 받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빛나는 존재감은 감출 수 없다.

책의 구성은 <떡>, <만무방>, <봄·봄>, <아내>, <동백꽃>, <생의 반려>, <따라지>, <땡볕>의 여덟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구수한 사투리와 순 한국어 단어를 사용하여 처음에는 다소 낯설고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읽다보면 순 우리말의 매력에 푹 빠져들게 된다. 무엇보다 글이 너무 재미있다. 일제의 지배하에 암울했던 현실을 겪으면서도 이렇게 유쾌하고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었는지 김유정의 필력은 글의 희극적인 요소를 더해 맛을 살려내는 것 뿐만 아니라 비참했던 시대상을 은연중에 보여주는 표현법이 탁월하다. 소설의 특징이라고 하면 농촌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많다. 김유정 자신이 강원도의 농촌 마을에서 오랜 기간 동안 생활했던 경험에서 우러나온 생동감 넘치는 글이다. 사실성과 향토성을 담고 있으면서 식민지하의 하층민들이 겪어야 하는 가난함과 고달픈 삶을 해학적으로 잘 그려내고 있다. <땡볕>, <따라지>에서는 공장 노동자, 카페의 여급과 같은 소외되고 고통 받는 도시의 하층민을 <동백꽃>, <봄·봄>에서는 지주의 횡포와 착취에도 저항할 수 없는 소작농의 생활을 역설적 해학의 세계로 잘 보여주고 있다. 글이 너무 재미있는데 반해 억압받는 민중의 삶은 너무도 처참한 현실이기에 웃고 있지만 눈에서는 피 눈물이 나는 아픔이 느껴지는 듯하다. 가슴 저 깊숙한 곳에서 아려오는 찡함은 어느 작품에서도 매 한가지이다. 이것은 지금에서야 소설로 읽히지만 그 당시에는 현실이였고 삶 그 자체였다. 김유정의 작품에는 이 땅의 언어 뿐 만 아니라 질긴 생명력과 흙내, 모진 삶의 한이 서려있는 듯하다.

<떡>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어 아사 직전의 상태에 이른 어린 옥이는 우연히 개똥어머니를 따라가 나릿댁 음식 장만하는데서 떡을 얻어먹게 되는데 너무 오랫동안 굶은 탓에 주는 대로 받아먹다 그만 탈이나 버린다. 사람이 떡을 먹은 것인지 떡이 사람을 먹은 것인지 분간이 안 되는 상황을 주위 사람들은 그저 히히덕 거리며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식민지배하에 빈곤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심각하였을 것이다. 어린 아이는 자신이 왜 굶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음식을 먹으면서 타인의 조롱 섞인 시선과 비웃음을 받아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누군가는 맛있는 음식을 이리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데 어찌하여 같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이리도 불평등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안톤 체호프의 <굴>이 떠올랐다. 가난으로 오는 결핍은 음식으로 배를 채우더라도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 가난이 죄가 아니라 아이를 굶기는 어른들의 무능함이요 사회가 방관하고 무시한 상황을 만든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일 것이다.

<만무방>

응칠은 가난 때문에 마누라와자식과 헤어져 산으로 들로 다니며 자연인으로 날건달로 살아가지만 동생 응오는 소작농으로 정착해서 아픈 마누라와 살고 있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둥아리 하나 뿐인 인생이라 죽어라 일만하고 살아가지만 나아진 것이라고는 늘어나는 빚뿐이다. 응오는 친구와 짜고 자신의 논에 벼를 누가 훔쳐간 것으로 소문을 내는데 형 응칠은 그것도 모르고 동생을 생각해서 밤낮으로 도둑을 잡아내려 하는데 그 도둑놈이 다름 아닌 동생 응오임을 확인하고 불쌍히 여겨 돈을 구할 다른 방도를 모색하게 된다.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가을에 추수하여 곡식을 거둬들이면 지주에게 받치고 남는 것은 낟알 몇 개. 열심히 일한 소작농의 애환과 궁핍한 삶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먹는 형의 삶보다 못한 현실. 형과 아우의 대비되는 현실이 비극적인 상황을 더욱 극명히 나타내준다. 어떤 방법으로도 궁핍하고 가난한 현실을 탈피할 방법이 없는 농민들의 삶. 살아있음이 곧 고통이요 지옥 같았음을 알 수 있다.

몇 푼 바람에 그까짓 걸 누가 하느냐.

보다는 송이가 좋았다.

왜냐면 이 땅 삼천리강산에 늘여놓인 곡식이 말쩡 누 거람.

먼저 먹는 놈이 임자 아니야.

먹 다 걸릴 만치 그토록 양식을 쌓아두고 일이 다 무슨 난장맞을 일이람.

걸리지 않도록 먹을 궁리나 할 게지 .

p. 26

<따라지>

따라지의 사전적 의미는 보잘것없거나 하찮은 처지에 놓인 사람이나 물건을 속되게 이르는 말. 소설 속 인물들을 지칭하는 단어인 듯 싶다.

셋방살이하는 인간 군상들과 주인집의 신경전을 재미있게 그려냈다.

세 들어 사는 사람들 어느 하나 제때 방세를 내지 않아 주인은 답답하기만 하고 방세를 받기 위해 여러 가지 묘책을 세우지만 매번 허망하게 실패하고 만다.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의 능청스러운 대응과 절대 굴리지 않는 호방함이 주인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든다. 가진 것 없고 내세울 것 없지만 가난함에 당당하고 좌절하지 않는 모습이 멋있게 그려진다. 요즘에 말하는 갑과 을의 관계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상황이 유쾌하고 재미있다.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닫게 된다.

제일 많이 알려진 <동백꽃> 이외에도 이렇게 재미있고 훌륭한 작품이 많이 있다는 것을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이 기쁘다. ‘한국 단편 문학의 결정체’라 평가 되는 김유정의 숨겨진 보물들을 발견한 느낌이다. 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은 작품들을 많이 선보였을까?

남겨진 작품들을 더 찾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시대가 다르지만 같은 시간 흐름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하다. 방식이 조금 다를 뿐 우리는 그가 살아낸 삶의 연속일 뿐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인간의 삶과 모습들이 낯설지만 부자연스럽지 않나보다. 그를 통해 시대 초월적 한국 문학에 대한 우수성을 발견하였고 한국 문학에 대한 자부심이 생겨난 듯싶다. 스피리투스의 문득 시리즈가 더욱 궁금해져서 찾아 읽어봐야겠다. 한국 문학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역사적으로 역경과 고난을 뚫고 살아온 끈질긴 민족의식이 그대로 반영된 독자적인 작품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투박하면서도 특유의 서정적인 감수성을 지니기도 하고 유쾌한 캐릭터와 흡입력 있는 스토리가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도 재미있게 읽힐 것 같다.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아 읽고 쓴 개인적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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