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젓한 사람들 - 다정함을 넘어 책임지는 존재로
김지수 지음 / 양양하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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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작가가 말하는 의젓함이란 무엇일까.
의젓함은 삶의 무게를 견디며 자신의 몫을 책임지는 태도이자더 나아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그것을 자신의 윤리로 껴안는 자세를 뜻한다.


이 개념은 아침마다 한 페이지씩 읽고 있는 레비나스의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레비나스는 철학이 타인을 향한 책임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그는 타인의 얼굴 앞에서 느끼는 윤리적 부름을나를 넘어서 타자에게 응답하는 존재의 시작으로 보았다.


의젓한 사람들에는 국내외 예술가와 인문학자 등 14인의 깊이 있는 인터뷰가 담겨 있다이들은 말로 설득하기보다삶으로 증명해 보이는 사람들이다. 인터뷰는 그들이 걸어온 삶의 기록이자고통과 불안흔들림 속에서도 끝내 자신만의 방식으로 선택하고 책임져온 태도의 이야기다.


“인생이 그냥 슬럼프의 연속이에요.”
슬럼프가 언제였느냐는 질문에작곡가 진은숙은 이렇게 답한다.
2024
클래식 음악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지멘스 음악상을 수상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창작자로서 특별한 비밀이나 거창한 철학을 들려줄 것 같지만그의 답변은 오히려 담백하고 쿨하다.


음악만이 자신의 인생이자 해방구라 믿기에
그저 묵묵히 작품을 쓰는 일에 몰두할 뿐이라고 말한다그리고 이어서 “음을 붙들고 있으면 마약을 한 것 같아요그냥 머리부터 발끝까지 음악에 푹 잠겨 있을 뿐이에요”라고 덧붙인다.


“어제도 포기하고 싶었고오늘 아침에도 포기하고 싶었다고요. 365일 중 65일은 도망가면서도 300일을 버텨요.”
배우 박정민의 말이다. “왜 그렇게 초인적으로 열심히 사느냐”는 질문에 그는 “다들 열심히 살지 않나요?”라며 반문한다영화 동주하얼빈에서그리고 자신이 운영하는 출판사 '무제'에서까지 그는 언제나 묵묵하게그러나 치열하게 자기 몫의 자리를 지켜낸다.

“사는 건 어차피 고군분투입니다원하는 것을 이뤘더라도 고통과 문제는 계속되지요문제없는 삶이란 없으니까요.”
신경 끄기의 기술의 저자 마크 맨슨은 말한다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나는 어떤 종류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가어떤 것이 내게 가치 있는 고통인가.


14인의 인터뷰 중에서도 나는 이 세 사람이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알 수 없는 위안을 느꼈고그들의 말에 깊이 감응했다이들에게 공통되는 점은삶의 고통과 불안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껴안으며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는 것이다.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 있을까
?”라는 질문에 머무르기보다자신이 가치 있다고 믿는 방향을 향해 온몸을 걸고 살아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들이 남다른 재능을 지녔거나스스로에게 잘 맞는 길을 비교적 일찍 발견했을 수도 있다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어떠한 조건 속에서도 끝내 책임지는 태도를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있다. 14인의 인터뷰이는 각자의 삶에서 분명 의젓하게 살아왔지만작가가 정의한 의젓함타인의 얼굴에 응답하는 책임의 윤리까지 나아갔는지는 다소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의젓함 너머에 있는타인에 대한 책임의 윤리가 좀더 나은 존재로 살기 위한 지향점이라고 생각한다. ‘나’로부터 시작해 ‘나’ 끝나는 삶은 결국 허무로 이어질 수 있다그것은 자아에 갇히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뛰어나든 그렇지 않든, ‘나’를 열고 ‘너’에게 다가가는 일은 존재를 더 풍성하고 깊게 만든다. ‘내’가 빛나지 않더라도 ‘너’에게 빛을 전할 수 있는 삶그것이야말로 의젓함을 넘어선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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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 - 장영희가 남긴 문학의 향기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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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삶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졌네. 위대한 희생이나 의무가 아니라 미소와 위로의 말 한마디가 우리 삶을 아름다움으로 채우네." - 메리 하트만 『삶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졌네』


유학파 영문과 교수가 쓴 글이라 하면, 어딘가 세련되고 이지적인 분위기를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장영희 교수의 글은 그와는 전혀 다르게, 슴슴할 정도로 담백하면서도 다정하다. 화려한 수사를 걷어낸 문장 속에서, 작가는 우리가 놓치고 지나치기 쉬운 소중한 가치들을 이야기한다.


라는 말만 점점 커지는 시대에, ‘우리나의라는 말은 나만큼 소중한 타인을 함께 품는 언어다.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내며 말썽만 피우던 한 제자는우리 상호, 많이 다쳤구나라는 선생님의 한마디에 마음을 열었다고 고백한다. ‘우리라는 단어에 담긴 연대의 힘이, 그의 닫힌 마음을 천천히 녹여낸 것이다.

야학에서 가르쳤던 한 학생은 성적 부진으로 꿈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가 정비공이 되기로 한다. “에이, 선생님. 제가 어떻게 이 세상에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겠어요?”라는 자조 섞인 질문에, 장영희는 유학 시절 만났던 경비 아저씨 토니의 이야기를 꺼낸다.

전직 택시 기사였던 토니는 크리스마스 새벽, 한 할머니 승객을 태운다. 호스피스 병원 주소를 내민 할머니는 시내를 돌아서 가자고 부탁한다. 그는 그녀가 젊은 시절 일했던 곳, 처음 갔던 무도회장, 신혼 때 살던 동네를 차례로 돌며 조용한 드라이브를 함께한다.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할머니는자네는 늙은이에게 마지막 행복을 줬어. 정말 행복했다우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는 삶이 특별한 사건이나 위대한 성취로 채워져야 한다고 믿지만, 작가는 말한다. 진짜 위대한 순간은 어쩌면무심히 건넨 한마디 말, 별생각 없이 내민 손, 스치듯 지은 작은 미소 속에 보석처럼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나를 살게 하는 근본적 힘은 문학이다.
문학은 삶의 용기와 사랑, 인간다운 삶을 가르쳐준다.
나는 기동력이 부족한 사람이라 문학을 통해 삶의 많은 부분을 채워왔다.”

어릴 적 소아마비에 걸려 신체가 자유롭지 못했던 그녀는 세상의 많은 문턱 앞에 자주 가로막혔다. 입학조차 거절당하는 현실 앞에서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문학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과 연결되는 창이자 날개였다. 자유롭게 걷는 대신 문장 위를 걸었고, 타인과의 거리는 언어의 온기로 좁혀갔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글에는 삶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 고통을 외면하지도, 미화하지도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빛나는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주홍 글자』 속 칠링워스에게서 느낀 연민도, 어쩌면 자신의 그림자를 조용히 들여다본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암 투병 끝에 2009년 세상을 떠난 장영희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이다. 영문과 교수이자 에세이스트, 번역가로 활동했던 그녀는 중학교 영어 교과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혹시나 싶어 아이방 책장을 뒤적여 봤지만, 그녀의 이름이 적힌 책은 이미 정리된 듯 보이지 않았다.


폭염 속에서 그저 시원한 것만을 찾던 내게, 이 책은 오히려 마음 깊은 곳에 아련하고 따스한 온기를 남겼다. 마치 이른 아침에 마시는 따뜻한 차 한 잔처럼, 고요히 하루를 열어주는 그런 문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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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닿는 거리
우사미 마코토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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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을 감싸는 사랑이 태양빛이라면우리의 인연은 달빛 같은 거야부드럽고 덧없는 달빛에 감싸인 가족."


고등학생 미유는 예기치 못한 임신으로 집에서 쫓겨나 거리를 헤맨다절망 끝에 아이도 자신도 모두 포기하려는 순간따뜻한 손을 내민 이들을 따라 오쿠타마의 게스트하우스 ‘그린 게이블스 향한다이름은 빨간머리 앤의 매튜와 마릴라 남매의 집에서 따왔다소설 속 중년 남매가 고아 앤을 품었듯현실의 ‘그린 게이블스’에서도 아키라와 가나코 남매가 사정 있는 아이들의 위탁 부모 역할을 하고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간다집을 뛰쳐나와 거리를 전전하며 몸을 파는 소녀들그 절박함을 이용하는 어른들이름만 부모일 뿐 자식을 품을 힘도 책임도 없는 이들그리고 스스로의 무력함에 갇혀 아이를 돌보지 못하는 사람들작품은 그들의 상처를 교차시키며 묻는다과연 가족이란 무엇인가.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는 분명 특별할 수 있다그러나 이름만 가족인 관계가 진정한 가족이 될 수는 없다피로 이어졌다는 사실만으로는 사랑도 보호도 대신할 수 없다. TV와 책 속에서 그려지는 가정은 대개 따뜻하고 포근하지만그 이미지는 상처와 억압을 덮은 채 만들어진 환상일지도 모른다.


아이는 연약하기에 혼자 살아갈 수 없다그래서 우리는 ‘가정은 따뜻해야 한다’, ‘엄마는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믿음을 만들어낸다그 믿음과 관념이 가족을 성스러운 것으로 고정시키고때로는 가장 은밀한 억압의 형태로 만든다.


알튀세르는 자서전에서 가족을 “항상 성스러운 장소권력과 종교의 자리”라 부르며 그것이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라고 말한다.

가족은 개인을 지탱하는 첫 울타리이자 동시에 치명적인 억압의 구조일 수 있다그렇기에 '가족'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품는다. 『달빛이 닿는 거리는 이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지점에서이름만으로는 결코 완전할 수 없는 가족의 본질을 드러낸다.


우사미 마코토는 이 작품을 통해 ‘가족은 따뜻하다’는 이상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진정한 애정과 유대를 보여준다혈연이 없어도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돌보는 관계야말로 가족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모습일 것이다가족이 해체되고 타인에 대한 혐오와 배제가 일상화된 시대 속에서태양처럼 뜨겁지 않더라도 달빛처럼 은은하게 서로를 감싸주는 온기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이 소설은 일깨운다.


그린 게이블스의 아키라와 가나코 남매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런 달빛 같은 사랑이다어두운 밤길을 잃지 않도록 끝까지 남아 빛을 비추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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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여전히 빛난다 - 무력한 일상에서 찬란함을 발견하는 철학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이주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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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그냥 생존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를 깨닫게 해준 것이 아름다움과 마주했을 때 느끼는 극도의 기쁨이다."


평소 책을 읽을 때는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로 잔잔한 재즈를 틀어놓는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가 문득 더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튜브를 검색해 카라얀이 지휘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핸드폰 화면에 띄워두고 '스탕달 증후군' 챕터를 읽어 내려갔다.


피렌체에 처음 발을 디딘 스탕달은 뙤약볕 아래서 쓰러질 듯 숨이 막혔다. 도시 곳곳에 넘쳐나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한 것이다. 피렌체에서는 이런 일이 드물지 않다고 한다. 골목 하나를 돌 때마다 마주치는 르네상스의 걸작들이 관광객들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스탕달 증후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우연이었지만, 글자를 읽어 내려가던 중 배경음처럼 흘러가던 라흐마니노프가 나를 침범해왔다. 시선과 생각은 책에 향해 있었는데 음악이 파고들었다. 어느새 귓속을 가득 채운 선율이 나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감정을 뒤흔들더니 결국 눈물이 흘렀다.


핸드폰 속 유튜브 공연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니 카라얀이 우아한 자세로 지휘하고 있었다. 그의 지휘도, 흘러나오는 음악도 모두 아름다웠다. 아름다워서 눈물이 났다. 저자가 말한 '찬란함'과 '아름다움'은 아마도 이런 것일 것이다.


저자 드빌레르는 아름다움을 광기를 깨어나게 하는 충격이라고 말한다. 일상이 멈춘 것 같은 혼란함, '나'라는 자아도 사라지고 우리는 갑자기 온전히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특히 공감이 가는 구절은 '고통에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부분이었다. 라흐마니노프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스물네 살에 발표한 교향곡 1번의 처참한 실패 이후, 그는 깊은 우울에 빠져 몇 년간 작곡을 멈췄다. 그러던 중 최면 치료로 겨우 어둠에서 빠져나온 그가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 탄생시킨 곡이 바로 이 협주곡이었다. 가장 어두운 시절을 지나며 만들어진 이 곡에는 그 어둠의 무게만큼 깊은 아름다움이 스며들어 있다. 베토벤, 반 고흐, 렘브란트⋯ 그들의 작품 역시 고통의 심연에서 빛을 길어 올린 흔적들이다.


삶은 빨갛게 잘 익은 사과처럼 예쁘지만은 않다. 벌레를 품은 사과처럼 고통과 죽음을 안고 있다. 고통이 있었기에 기쁨이 있고, 슬픔을 겪었기에 행복이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말이다.


저자는 "인생은 그냥 생존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어쩐지 우리는 팍팍한 하루를 생존을 위해 소비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어제와 같은 오늘 속에서 삶이 여전히 빛난다고 느낄 수 있는 순간이 필요하다.


그 빛은 피렌체나 루브르 박물관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장 한구석에서 야채를 파는 노인의 눈빛에도, 오슬로의 바람에도, 여름밤 별빛에도 그것은 숨어 있다.


삶의 찬란함은 먼 곳의 보물이 아니라, 불쑥 다가오는 우연이다. 그리고 그 우연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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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 꾸준히, 천천히, 묵묵히 삶을 키우는 나무의 지혜
리즈 마빈 지음, 애니 데이비드슨 그림, 박은진 옮김 / 아멜리에북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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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 책의 제목과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 시절의 나는 관계에서도,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도 길을 잃은 듯 혼란스러운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할 때마다 그저 한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나무들에게 위안을 받았다. 아무 말 없이, 그러나 한결같이 곁을 내어주는 존재. 나에게 나무는 그런 이미지로 남아 있다. 흔들리되 쓰러지지 않고, 고요히 제 자리를 지키며 곁을 내어주는 존재.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에는 59종의 나무가 아름다운 일러스트와 함께 저마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겉으로는 외롭게 홀로 서 있는 듯 보이지만, 땅속에서는 촘촘히 얽힌 뿌리로 서로의 자원을 나누는 사시나무. 애벌레의 공격을 받으면 특유의 페로몬을 내뿜어 기생말벌을 불러들이는 느릅나무. 그 이야기를 읽는 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연결과 서로를 지켜내는 힘에 대해 생각했다.


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우산가시 아카시아는 코끼리와 기린의 주요 먹이가 된다. 그런데 기린이 잎을 뜯으려 하면 이 나무는 에틸렌 가스를 내뿜어 이웃 나무들에게 위험을 알린다고 한다. 나무들이 그렇게 서로를 지켜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도 삶의 일부다.” 그 문장을 읽는 동안 오래 시선을 붙잡은 장면이 있었다. 중남미의 열대성 폭풍에 쓰러진 구아레아 나무였다. 땅에 고꾸라져 누운 채로도 그 나무는 포기하지 않고 쓰러진 줄기에서 새순을 틔운다고 한다. 옆에 실린 일러스트 속 연약한 새싹은 더욱 귀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책의 뒷부분에서 또 한 번 발걸음을 멈추게 한 나무가 있었다. 산사나무였다. 바람 한 점 없는 그림 속에서 그 나무는 마치 거센 바람을 맞고 있는 듯 한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위태롭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무심히 보면 그저 수형이 독특하고 예쁠 뿐이다. 그러나 나무는 본래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려 한다. 끝없이 바람이 스치는 탁 트인 공간에서는 그 본능을 온전히 따를 수 없다. 산사나무는 결국 바람을 받아들이며 덜 흔들리는 방향을 찾아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그렇게 자신만의 균형을 만들어간다고 한다.


집 마당 한켠에 참빗살나무가 있다. 조경업체 사장님은 나무의 줄기를 가리키며 “이렇게 곡이 있는 수형은 드물고 귀한 거예요”라고 말했었다.


삶은 때때로 힘겹다. 액정 속 매끈한 사진과 현실은 다르다. 때로는 폭풍 같은 바람이 몰아칠 때도,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밀려올 때도 있다. 곧게 뻗은 길을 걷고 싶어도, 어느새 앞에는 굽이진 오솔길이 놓여 있곤 한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며칠 전 화집에서 본 램브란트의 자화상이 떠올랐다.


30대의 정점을 찍은 그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에서부터, 40대에 접어들며 상실과 파산, 세월의 무게가 스며든 눈빛으로 변해가는 초상들까지. 화폭 속 변화는 마치 삶의 길이 직선에서 굽은 오솔길로 이어지는 순간을 그대로 담아낸 듯했다.


그의 자화상이 주는 울림은 아마 그것이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을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이며,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한 겹 한 겹 쌓아 올린 그의 얼굴은 결국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얼굴과 닮아 있지 않을까.


창밖으로 참빗살나무의 잎이 반짝인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지 못하고 몸을 구부린 채 자라온 나무. 그 곡선에는 어떤 바람과 시간이 스며 있었을까. 풍경으로만 보이던 나무도, 사람도 결국 그 굽은 형태 속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곡진 형태가 곧 아름다움임을 깨닫는다.


덧. 책은 얇고 아름다운 일러스트가 가득해, 휴가철이나 가을 공원 벤치에 앉아 읽기에도 잘 어울릴 듯 하다. 실로 꿰맨 실제본의 단단한 만듦새 또한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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