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천원 인생 -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우리 시대의 노동일기
안수찬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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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4명의 기자가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취업을 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빈곤노동의 현장으로.

그들은 식당, 마트, 가구공장, 조립공장에서 직접 몸으로 빈곤노동과 불안노동을 체험했다. 그야말로 발로 뛴 기자들.

 

난 경험을 절대적 기준이나 가치로 내세우는 사람들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경험이란 건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그걸 '내세우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경험'은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만이 진리가 되고 타인의 경험은 예외적인 것이나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여전히 경험은 중요하다. 그것이 직접 경험이든, 간접 경험이든.

내게도 반년 정도 공장에서 일했던 경험, 3년 동안 호프집에서 일했던 경험이 매우 중요했다.

적어도 난 종업원들에게 '아저씨', '아줌마'란 호칭을 절대 쓰지 않고, 손님이 왕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단순작업이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알고, 단순할 수록 오히려 사고율이 높아진다는 것도 안다.

 

우리 대부분은 '아르바이트'라는 이름으로, 불안노동을 체험한다.

아니, 우리는 곧 거기서 떠날 것을 알고 계속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기에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서 그곳에 계속 머물러야 하고, 불안해하고, 무조건 참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이는 존중하되, 연공서열을 무시하는 호칭이 '형님'이었다. 연공서열을 타파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곧잘 말한다. 마트 노동자에겐 타파할 연공서열이 없었다. 나는 '형님'이라 불릴 때마다 씁쓸했다. 일한 시간만큼 존중받아야 할 기술, 지식 따위가 마트엔 없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우리 공장 도장반의 피우롱이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건 1999년 초 여름께다. 여행비자로 왔다. 한 소파공장이 그의 첫 근무지였다. 2004년 지금의 공장에 오기 전 마석가구공단에 대규모 단속이 벌어졌다. 단속 때문에 출근을 미루고 집에 있는데 단속반원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는 2층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밖에서 '문 열어, 문 열어' 그랬어. 무서워서 정신없었어. 나 뛰어내렸어." 허리와 팔이 아팠다. 하지만 달렸다. 잡히면 끝장이다. 방글라데시에 있는 식구들한테 돈을 부쳐야 한다.

  그 뒤 병원에서 추락으로 다친 오른쪽 팔과 허리 수술을 받았다. 520만원의 치료비가 나왔다. 한국 직원들과 달리 건강보험 적용대상이 아닌 그에게 병원은 수술비와 입원비를 액면가대로 청구했다. 함께 공단에서 일하는 피우롱의 친형과 친구들이 도와줬다. 그 뒤로도 물건을 잡거나 상처 부위를 만지면 팔이 아팠다. 다시 수술을 받았다. 여전히 그의 팔은 성치 않다. 팔뚝을 만져보니 딱딱한 무언가가 잡힌다. 의사는 그에게 "시간 있을 때 와서 수술하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새 정부 들어 단속이 강화된데다 토요일에도 오후 5시까지 공장에서 연장근무를 하는 그는 병원에 갈 수 없다.

  "형, 생각해봐요. 아파도 낮에는 병원에 못가. 우리 '불법 사람'이잖아요. 지금 날씨 추워요. 신발이랑 옷 사러 (시내에) 나가고 싶어도 못 가요. 잡혀가잖아요."

 

주위를 돌아보라. 하루를 생각해보라. 당신의 눈 앞에 지나가는 사람들 중 '정규직'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대다수인 '비정규직' 즉 '불안노동'의 현장에서 들리는 구체적인 묘사와 상황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불편하다는 건 몰랐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정보의 홍수 속에서 몰랐다는 건 거짓말이다.

내 의지대로 눈을 감은 것일 뿐, 모를 리가 없다(정말, 정말로 모른다면, 이 책을 읽으라).

이 불편한 이야기에 '그럼 대안이 뭐란 말이냐'라고 묻기만 하는 것, 그건 불편하니 그만하라는 말과 비슷하다.

 

  "너무 절망스럽습니다. 왜 대안과 해법은 말하지 않는 거죠?" 드물게 불편해 하는 반응도 있었다. 그들은 거듭 대안을 물었다. "대안은 노동자들이 편하게 공장에 출근할 수 있는 통근 버스를 마련해주는 것"이라고 임인택 기자는 말했다. 그 버스 안에서 노동자들은 쉬고, 생각하고 대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대안은 식당 아줌마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이라고 임지선 기자는 말했다. 공장의 불안정 노동자가 식당의 불안정 노동자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그 시선이 곧 연대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내 엄지손가락을 출롱에게 병원에서 진료비와 주사값으로 1만500원을 냈다고 하자 자신은 같은 경우에 2만5000원 이상 내야 했다고 말했다.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되기 때문이다. "너네는 정말 아프면 안되겠다"고 하자 그가 "형, 우리도 사람인데 어떻게 아프지 않아"라고 내게 물었다. 그의 말이 옳다.

 

그들도, 나도, 사람이란 걸 느끼는 것도 대안의 출발점이다.

너무 뻔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겠지만, 현장에서 들려오지 않는가. 이 뻔함이 전혀 뻔하지 않다고.  

 

 '감자탕 노동일기'를 쓴 뒤, 그래서 무엇이 바뀌었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그럼 되받아친다. 당신조차 어렴풋이 '뭔가 바뀌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이 변화라고. 수많은 사람이 빈곤 노동으로 일생을 보내야 하는 사회구조를 만들어놨다는 점에 있어 우리 모두는 공범이다. 변화의 시작은 현실을 냉정하고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내가 즐겨 쓰는 말도 비슷한 맥락이다. "연대는, 단순한 동정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동정에서 출발할 수 있다."




그래서 다음의 말에도 100% 동감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노동'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경험을 공유하고, 문제점을 지적하고, 불평불만을 시끄럽게 늘어놓으시라. 현실을 바꾸는 건 거기서부터다.

 

최근에 하게 되는 생각이지만, 도덕적 허영을 부추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적 허영과 마찬가지로, 이런 종류의 허영은 타인에게 치명적인 피해는 입히지 않으면서도 종종 도움이 된다.

 

그리하여 다시 뻔한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제발 좀, 우리 함께 사람답게 살아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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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P Collector's Edition (25CD Box Set) 재즈 명반 박스세트 9
데이브 그루신 (Dave Grusin) 외 연주 / 유니버설(Universal)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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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박스셋 나오는 속도 맞추느라 허리가 휘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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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 초한지 세트 - 전8권 고우영 초한지
고우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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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이야기꾼, 고우영의 초한지.

역시나 스포츠 신문에 연재하던 것을 복원하여 세트로 출간한 것.

항상 그렇지만 고우영의 만화를 읽다보면, 다 아는 이야기를 어찌 이렇게 자기만의 이야기로 풀어내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거기다 이게 일일연재가 된 거라고 생각하면 더 신기...)

 

그건 그렇고, 삼국지와 초한지를 비교해보면 좀 이상한 점이 있다.

삼국지만 해도 군주에 대한 충이 전체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데,

고작(?) 몇 백 년 전의 이야기인 초한지에서는 협은 있을 지언정, 충 따위는 찾아보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 고작 몇 백 년 왕조가 유지되는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뀌었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삼국지가 수많은 특색있는 영웅들이 있어 재미가 있다면, 초한지는 역시 깔끔하게 이분 되어 있는 구도가 재미를 준다.

처음에야 항우보다는 유방의 편에서 이야기를 읽게 되지만, 결국에는 항우가 안타깝기만 하다.

이상하게 유방에겐 뒤로 갈 수록 정이 안간달까. 그런 점에서 고우영이 잡아낸 캐릭터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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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1-02-16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 보니까 구매욕구가 꿈틀꿈틀 ㅎㅎㅎㅎ

낮에뜬별 2011-02-21 00:16   좋아요 0 | URL
ㅎㅎ ^^
 
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김동춘 지음 / 돌베개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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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누가 이겼는가라고 묻는 것은 샌프란시스코 지진에서 누가 이겼는가 묻는 것과 같다 - 케네츠 월츠(447~448쪽)


초등학교(실은 국민학교) 시절, 6월만 되면 학교에서 꼭 하는 연례행사가 있었다. 반공 글짓기, 반공 웅변, 반공 포스터 그리기 등의 대회가 바로 그것이다(실제로 나는 그런 대회에서 몇 개의 상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중에 인상 깊이 남아있는 것은 반공 그림 그리기였다. 대한민국 국군이 승리하는 순간이 아니라면, 연상되는 그림은 컴컴한 새벽에 붉은 별을 단 북한군의 탱크가 철조망을 짓밟으며 넘어오는 장면이다. 바로 1950년 6월 25일의 순간을 그린 것인데, 교과서 등에서 이미 익숙해진 장면이었다. 그 장면은 마치 내가 38선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장병이 된듯한 느낌을 준다. 그 그림이 포착하는 탱크의 모습은 주로 앞모습이었지 뒷모습이나 옆모습이 아니었다. ‘남침기습’이라는 공식에 걸맞으려면 그렇게 그려지는 것이 당연했으리라.



이 책 『전쟁과 사회』의 저자 김동춘은 역사학자가 아닌 사회학자답게, 한국전쟁의 ‘기원’을 찾는다거나 ‘책임자’를 추궁하는데 몰두하지 않는다. ‘코리언’들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시작했는가’보다 ‘왜 시작되었는가’이며, ‘왜 시작되었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 전쟁 중 무슨 일이 있었으며, 전쟁을 통해 누가 무엇을 얻었는가, 지금 코리언에게, 전쟁 당사자인 미국과 중국인들에게, 그리고 동아시아 평화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어떤 교훈을 이끌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85쪽). 그래서 이 책은 기존 연구가 집중하고 있던 한국전쟁의 원인, 배경, 경과 같은 부분보다는 ‘피란’이나 ‘점령’, ‘학살’과 같은 조금은 낯선 부분에 주목한다. 그것이 이 책이 기존의 연구서들과 가장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보면 당연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이 기존 연구들과 ‘다르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책이 출간될 당시의 현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그리고 실은, 2011년 현재가 그 당시보다 더 '퇴행'한 느낌이다).



사실 저자가 한국전쟁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한국의 노동운동을 연구하다보니 한국사회의 갈등이 단순한 사회갈등이 아니라 전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성들은 군사적인 것과 사회경제적인 현상을 분리해서 사고해 온 한국의 기존 사회과학과 그러한 패러다임에 입각한 한국 사회연구에 대한 회의로 연결되었다. 군사적으로 볼 때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휴전체제가 평화체제로 바뀌지 않고 있으며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는 극히 평범하고 상식적인 사실을 그동안 필자가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그 동안 필자가 겪어 온 과정, 그리고 군사적인 조건과 결부시키지 않고 이해해 온 정치적 지배질서와 사회적 갈등, 사회통제 등을 전쟁의 연장, 전쟁의 지속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으로 가닥이 잡혔다. (55쪽)



이런 문제의식을 시작으로 연구를 시작했지만, 저자가 보기에 한국전쟁 연구는 지나친 편향성을 띄고 있었다. 그것이 또 다시 저자의 문제의식으로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자는 한국전쟁의 영향을 연구하려는 출발점에서 더 나아가 한국전쟁 자체를 일단 다뤄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은 베트남전쟁, 걸프전쟁, 이라크전쟁이 그러하듯이 실제로는 '미국의 전쟁'이자 세계전쟁이었고, 이 점에서 '한국전쟁'이라는 명칭도 아직은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41쪽)



저자는 기존의 연구에서 이상하게 간과하는 점을 지적해나가기도 한다. 예를 들어 힘의 불균형 상태.



우리는 은연중 미, 소가 국제정치에서 대등한 영향력을 가진 나라라는 전제하에 문제에 접근한다. 이것은 소련과 국제공산주의의 위협을 과장했던 미국발 냉전적 사고의 영향이며 잘못된 가정이다. (43쪽)



그래서 북한의 침공을 공산주의 진영의 자유세계 위협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한 것은 사실상 레토릭에 가까운 것이지 객관적 혹은 주관적 위기를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한반도 개입 역시 맞수가 되지 않는 북한과 싸우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세운 나라를 지켜 주지 않을 경우 잃을지도 모르는 미국의 국제적 위신 때문이었다. (44쪽)




저자의 이런 지적들은 타당해 보인다. 게다가 아직까지도 '통설'로 받아들여지는 내용들이 모두 저 잘못된 가정 하에서 논지를 전개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저자가 사회학 전공이어서 그런지 때때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이론가들을 인용한다던가 서론 부분에서 너무 당연한 이야기들을 조금은 지루하게 늘어놓는다던가 혹은 사료를 다소 작위적으로 사용한다는 느낌이 있었다. 실은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군의 통수권은 군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에게 있으며, 정치가로서 대통령과 의회는 오직 군사작전의 필요에 의해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하면서 전쟁을 수행한다”(105쪽)라는 부분에 기대를 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저자의 말대로 “군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국내외 ‘정치적으로는’ 명백한 이유를 갖고 있었”(45쪽)다면 그 ‘명백’한 이유를 좀 더 상술했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의 성격’이라는 부분도 마찬가지다. 저자의 문제의식이 시작된 지점은 책에도 직접 서술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특질이 한국전쟁에 기원하는 바가 크다고 보는 가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우리는 ‘한국전쟁은 어떤 전쟁이었나’라는 질문을 ‘한국전쟁은 남북에 각각 어떤 국가, 어떤 사회를 건설했는가’라는 질문과 결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108쪽). 물론 이건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다. 하지만 ‘전쟁의 성격’이라고 할 때, 두 질문은 또 때로는 분리될 필요도 있다. 사후의 일이 그 사건 자체의 성격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사건의 해석을 바꾸기는 할지언정.



마지막으로 하나 더 지적하고 싶은 점은, 저자가 ‘문명화 과정’을 종종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사적폭력을 국가가 통제를 하지 못한다는 점, 그리고 감정의 과잉이 지나친 폭력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점을 이유로 1950년의 양 체제가 제대로된 근대 국가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근대적 국민국가의 반열에 오르면 폭력이 제대로(?) 통제될 수 있을까? 또한 폭력이 ‘통제’된다는 의미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한국전쟁과 같은 특수한 경우를 놓고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상이한 역사공동체 간의 전쟁-예를 들어 베트남 전쟁과 같은-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난무도 ‘문명화 과정’으로 설명이 가능할까?



이런 의문점들이 남기는 하지만, 아직 '미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가 언젠가는 완수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애초의 의도대로 한국전쟁이 전후 한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제대로 분석해낸다면, (지금 상태로도 이 책은 좋은 책이지만) 이 책은 굉장한 역작이 되리라 믿는다. 또한 저자가 인용한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 “우리가 어떤 것을 칭하는 방식은 실제 그것이 어떤 것인가보다 더 중요하다”(66쪽)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 사회에선 도발적으로 보일 이 질문을 반드시 던져야만 할 것이다(허나 이 책이 2000년에 초판이 나온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부터 하는 나도 이미 자기검열을 시작하게 된 걸까? 여튼 지금 한국사회의 분위기가 이렇다. 이런 글을 쓴다는 것 자체로 신변을 한 번 생각하게 되는).


우리는 지금까지 ‘국가 건설’이라는 대의를 앞세워 한국전쟁 전후의 ‘빨갱이 청소’를 정당화해왔지만, 오늘의 시점에서는 누구를 위한 국가 건설이었는가를 다시 물어야 한다. 즉 피학살자가 국가 건설의 희생양이었다는 주장들은 그 국가가 어떤 국가이며, 누구의 국가이며, 그 국가의 정치가 어떤 내용을 갖는지의 관점에서도 비판되어야 하지만, 한반도의 ‘반쪽 국가가 과연 그러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건설되었어야 했는가?’라는 또 다른 질문에 의해서도 도전받아야 한다.(381쪽)


어쩌면, 한국전쟁의 연구는 이제 시작단계라고 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국제전과 내전이 뒤섞인 이 복잡한 전쟁을 다루면서, 오히려 우리는 '코리언'을 잊어야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런 과감함이 없다면, 저자가 지적하는 오류-좌파의 미국의 남침유도론이나 우파의 혈맹론, 맥아더 영웅론-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국전쟁에 관심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코리언이기 때문이지만, 한국전쟁은 결코 한반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것이 이 전쟁이 비극인 이유이자, 저자가 '코리언들에게 정작 중요한 것'을 밝혀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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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 18세기 조선의 문화투쟁
백승종 지음 / 푸른역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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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을 '문화투쟁'이라는 키워드로 새롭게 조명한 책. '문화투쟁'이란 과연 무엇인가?

 

  독일 역사에는 "문화투쟁Kulturkampf"이라는 말이 있다. 거칠게 말하면 "문화를 둘러싼 싸움"이라는 뜻이다. 정확하게는 "교회의 영향으로부터 문화를 해방시키는 투쟁"이라는 의미다. 이것은 1871년부터 1880년까지 독일 프로이센의 철혈수상 비스카르크가 교황 비오 9세의 지배 아래 있던 독일의 가톨릭교회, 특히 그 대변자 격이던 가톨릭 정당 "중앙당Zentrumspartei"을 상대로 벌인 투쟁이었다. 독일을 통일한 비스마르크는 가톨릭교회가 일부 지방에서 국가 대신 교육기관을 장악한 것에 반대하여 반反가톨릭 정책을 폈다. 가톨릭교회는 그에 맞서 격렬히 투쟁했고, 결과적으로 가톨릭 반대 법안은 대부분 폐기되었다. 하지만 문화투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독일의 교육기관은 교회의 통제를 벗어나 국가에 종속되었다. 교회에 대한 국가의 승리였다.

  "문화투쟁"이라는 개념은 역사상 다른 사례에도 적용되었다. 현재는 더욱 확장되어 어떤 사회에서든 "문화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기 위한 모든 투쟁, 특히 국가의 가치와 정체성의 규정을 둘러싼 다양한 싸움을 가리키는 광범위한 개념이 되었다. 문화투쟁은 시공간을 초월해 사용될 수 있는 일반 개념인 것이다. 가령 중국 공산당의 최고지도자 마오쩌둥이 1966년부터 1976까지 10년 동안 벌인 이른바 "문화대혁명"도 일종의 문화투쟁이었다. 당시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가치관의 실현을 목적으로 대중운동을 일으켜 자신의 정적들을 모두 숙청했다.

 

그렇다면 18세기 조선에 어떤 문화투쟁이 있었다는 말인가?

저자는 우리가 흔히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개혁군주'라고 칭송하는 정조가 그 문화투쟁을 일으켰다고 말한다.

물론 그 문화투쟁의 방향은 '문체반정'과 같은 것들이 말해주듯이, 결코 '진보적 개혁'이 아니었다.

 

정조가 문체의 자유까지 억누를 정도였다면, 그가 과연 "문예부흥"을 일으킬 수는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정조 대에 부흥된 문예가 과연 무엇인지 그 성격도 불분명하다.

 

정조는 글의 내용이나 형식 뿐만아니라 글씨체까지 트집을 잡아가며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려 했다.

이것을 두고 여전히 '문예부흥'이라 칭한다면, 국내 영화 제작 편수가 최고조에 달했던 전두환 정권 때도 문예부흥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정조가 이렇게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과민반응을 보인 것은, 조선사회 전반에 감돌던 이상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 이상기운을 대표하는 것으로 천주교와 '정감록'과 같은 종말론을 앞세운 예언설을 꼽고 있다.

그리고 그 불온한 상상력을 가진 보잘 것 없는 선비 강이천을 무대의 중심으로 불러낸다.

여기서 이 책의 탁월함이 느껴지는 것은, 그렇다고 강이천을 '혁명가'로 목마를 태워 올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점이 역사가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강이천을 혁명적 사상가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강이천은 다분히 공상적이었고, 신비주의에 경도되어 있었다. 강이천이 '육임'과 '둔갑'을 통해 시운을 점치려 했다는 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강이천을 문제적 인간으로 만든 것은 그의 상상력이지, 현실적 조직능력이나 구체적인 혁명 프로그램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 부분이야말로 정조의 보수적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이며, 또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 어떠한 '실질적' 위험이 아님에도, 어떤 보잘 것 없는 개인이 가진 망상조차 통제와 제거의 대상이 되고 있는 상황.

물론 저자의 지적대로 정조의 입장에서는 당연하고도 명민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그에게 '진보적 개혁'이나 '문예부흥'과 같은 수사는 어울리지 않는다.

정조는 오히려 상고주의적 원칙의 길을 앞장서서 걸어갔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권력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므로 그가 조선의 '왕다운 왕'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오늘의 관점을 투영한 '개혁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읽어나가면서 생기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기는 했다.

우선 강이천 사건에서 주요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주문모 신부가 왜 자수를 했을까 하는 것.

이 점은 저자도 과제로 남겨둔다고 솔직하게 서술하고 있다.

둘째, 강이천이 그렇게 '샛길'로 빠지게 된 동기가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

물론 그가 애꾸에 절름발이인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고, 소북이라는 상대적 소수파이기는 하지만,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에 등장하는 인물들과는 또 다른 처지에 있는 자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자의 다음과 같은 지적이 허를 찌르는 점이 있으나, 여전히 선뜻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근대교육의 수혜자이자 동시에 희생자이기도 한 나 같은 사람은 강이천이나 김건순과 같은 인간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나는 모든 현실적인 문제들을 합목적적,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데 필요 이상으로 익숙하다. 예컨대 신라 때는 골품제의 폐해가 컸으니까, 그로부터 제일 피해를 많이 받은 6두품이 반신라적 경향을 띠게 되어, 결국 6두품이 고려 창업의 기수가 된다는 식의 해석에 젖어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뤄지는 강이천 등의 역사적 선택은 그런 방식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들은 계급투쟁의 전사가 아니었다. 때로 인간은 계급이 아니라 개인적 성향과 취미와 욕망을 위해 목숨을 걸 수도 있다. 내가 이 연구를 통해 이처럼 평범한 진리를 재발견하게 된 것은 큰 다행이다.

 

또 '문화투쟁'이 주는 어감과는 달리 그 투쟁의 장에서 정조의 상대, 강이천이 너무나 약해보인다는 점이 약간 걸린다.

왕인 정조가 절대적 강자인 거야 당연하지만, 강이천의 투쟁'의지'를 문헌에서 읽어내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심문과정에서 보여준(실은 저자가 읽어낸) 강이천의 전략은 그만의 재량권을 보여주지만,

정조와 강이천(혹은 그가 영향을 받은 문화들)의 '투쟁'이라기 보다는 일방적인 '탄압'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물론 이건 저자의 지적대로 강이천에게 자신의 세계관을 표출할 충분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잘한 부분으로는 '邪學'에 대한 해석인데, 어떤 부분에서는 사학이 분명 천주교를 칭하는 것이 맞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그것이 그렇게 해석되어야할 이유에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는 느낌도 받았다.

 

몇 가지 의문점이 남아있지만, 이 책은 저자의 전작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보다 더 신선하게 다가왔다.

문학적 표현 방식이나 구어체의 활용 등이란 점에서 "역모사건"이 더 신선하다라고 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나도 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입장이어서 그런지, 이 책의 구성은 내게 작은 충격을 주었다.

학자들, 특히 역사학자들은 보통 '가설'을 세웠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든다.

'감춘다'라는 말이 좀 심하다면, '굳이 표현하지 않는다'라고 해야할까.

가설 같은 것 보다는 "사료를 읽다보니 이러이러한 흐름이 보이더라"는 식으로 말하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그 어떤 학자가 일말의 가설 하나 없이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겠는가?

가설이나 가정 없이 어떻게 역사가가 사료에 접근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의 저자는 과감하게 가설을 정하고 사료에 접근한다. 사료를 통해 가설을 정비하고 마지막으로 기존 연구를 체크한다.

 

  개인적으로는 스즈키와 같이 꼼꼼하고 투명한 스타일을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독일의 역사학자들을 부러워할 때가 더욱 많다. 그들은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되 꼭 필요한 문제만 따진다. 그들은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무엇이든 피하지 말고 날카롭게, 논리적으로 파고들라며 채찍질한다. 10년 넘게 나는 그런 독일식 연구 풍토에 젖어 살았다. 그것도 한창 젊었을 적에 그런 이색적인 경험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문제를 다루든지 미리 가설을 만들어 놓고 접근하는 습관이 생겼다. 어떤 문제를 다루더라도 나름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강해졌다.

(중략)

연구자는 어느 선에선가 읽기를 중단해야 한다. 그 결정은 타당할 뿐만 아니라 불가피한 것이다.

 

이런 연구방식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는 방식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보통은 기존 연구를 검토하여 연구사 정리를 다 해놓고, 사료를 본 후에, 자신의 관점을 정리하는 식으로 진행을 하니까.

물론, 저자의 방식대로 모든 연구가 진행될 필요는 없다. 게다가 나같은 풋내기가 시작할 수 없는 '내공'이 필요한 방식이다.

그럼에도 저런 연구 스타일이 내게 던저주는 메시지는 굉장히 강하다.

하지만 이 책이 더 놀랍고 흥미로운 것은 그 부분에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이 가장 빛나는 부분은 과정을 꼼꼼히 기록한 연구노트를 바탕으로 역사가의 모습을 가감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독히도 꼼꼼하고 성실한 연구노트가 있기에 가능한 일. 이로 인해 독자는 저자와 함께 추리해나가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저자가 그동안 시도해왔던 서술의 실험보다도 이 책의 구성이 더 실험적으로 느껴진다.

 

저자의 말대로 변명은 필요 없다. 역시나 문제는 역사가가 어떠하냐는 것이다.

 

  근대적 역사가들은 "자료가 없다"라고 말하면서 역사적 탐구를 포기할 때가 많다. 물론 자료는 역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자료의 부족함을 내세우는 것은 정당하지 못할 때가 많다. 역사가는 자료에 종속된 존재, 과거의 하수인이 아니다. 내가 지향하는 역사 쓰기는 되도록 자료 타령을 적게 하는 것이다. 기록이 남아 있는지의 여부보다 역사가의 문제의식이 연구의 진행에 결정적이라는 입장을 나는 견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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