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본 한국사 - 김기협의 역사 에세이
김기협 지음 / 돌베개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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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국사'라는 단어와 그 의미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다.

국사는 편협한 내셔널리즘의 표출이며, 그런 의미에서 국사를 '해체'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좀 극단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그 의도가 불순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해체 이후를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한 대안이 마땅치 않아서 그게 문제지만.

 

이 책도 '밖'이라는 수사를 쓰면서 편협함을 벗어나야 한다는 의도로 쓰여진 역사 에세이다.

(저자의 부인이 중국교포이기 때문에 이런 식의 역사서술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에세이' 형식으로 쓰여진 각주 하나 없는 책이므로 부담 없이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읽어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가벼운 형식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게 무지 힘들었다.

앞에서 각주 하나 없기 때문에 부담이 없다..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답답했다.

서술 하나하나에 대한 근거가 무엇인지 불명확한데다가, 서술의 대부분이 추측으로 되어 있다.

문제는 저자가 분명히 추측의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확신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의 서술을 보자.

 

  서희의 담판 100여 년 후에는 여진이 중원을 점령했고 다시 100여 년 후에는 몽골이 천하를 휩쓸었다. 군사적으로는 고려가 이들의 기세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 정복자도 고려라는 국가를 없애려들지 않았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려 들지 않았다. 뛰어난 문명국인 고려가 자기 색깔을 가지고 살아남는 것이 천하의 균형과 조화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럴듯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이 결코 아니다.

특히 마지막 줄과 같은 서술은 '밖'이 아니라 철저하게 '우리'의 입장에서 해석한 것 아닌가? 다음의 서술도 보자.

 

  <삼국지> '동이전' 변한 조에 "나라에서 철이 나 한과 예와 왜가 모두 여기서 이를 얻었다"고 하는 기사가 특히 눈길을 끈다. 철광석은 흔한 물건이다. 현대의 철광 생산지는 철광의 질이 좋고 경제성이 뛰어난 곳을 택해서 채광하는 것이지, 철광석이 없어서 철을 만들지 못하는 곳은 세상에 별로 없다. 당시 변한이 철 생산의 중심지였다면 그것은 재료 획득의 중심지라기보다 생산기술의 중심지였다는 뜻이다.

 

이 부분도 마찬가지다. 현대의 철광 생산지 특성이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도 그럴거라고 생각하는 건 무리다.

채광에도 기술이 있고, 그 기술 능력에 따라 채광이 가능한 곳과 불가능한 곳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런 점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현대에도 그러니까 그때에도 그랬을 거라는 추정을 하는건 오류에 가깝다.

 

이렇다보니 각주가 없는 이 책에선 무엇이 추측이고 무엇이 사실인지 알 도리가 없다.

추측이 무조건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어떤 학문도 추측이나 가설 없이 연구가 진행될 수 없다.

하지만 추측도 나름의 '타당성'을 검토 받아야 하고, 그 추측을 뒷받침할 정황을 충분히 찾아야만 한다.

 

이 책에 덧붙여진 수많은 추천사와는 달리, 나는 이 책이 설정한 '밖'이 어디인지도 잘 모르겠고,

그 밖에서 본 역사가 기존의 것과 얼마나 다른지도 잘 모르겠다. 실망스러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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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리오스 폴립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데이비드 마추켈리 지음, 박중서 옮김 / 미메시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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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아니면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 글이 아니면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모아 놓았다면?

책을 대충 넘겨보면 '세밀함' 따위는 전혀 묘사되지 못할 것 같지만, 정말 의외의 책이다.

마지막 장을 넘긴 후 다시 앞으로 돌아가보면, 장면장면마다 복선이 있고 감정의 기복이 표현되어 있다.

여주인공 하나가 결국 울음을 떠뜨리던 그 순간, 나도 뒷통수, 아니 가슴을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의사소통'에 대한 생각보다 진지한 이야기.

 

'그래픽 노블'이란게 대체 뭐야?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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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의 노래
백성민 지음 / 세미콜론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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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두고 볼만 한 그림책.

굵직굵직한 선으로 휘어저은 하얀 종이 위의 그림들은, 이상하게도 여성적이다.

세밀한 극화를 그리다 지치면, '쉬기 위해' 이런 그림을 그렸다고 수줍게 말하는 작가를 보자니

'장인'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생긴다.

 

한 장 정도 그림의 배치에 문제가 있어 불만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책도 소장가치가 있으니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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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죽음 열린책들 세계문학 49
짐 크레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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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도 '과정'이 있다면,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은 어떤 것인가?

아마도 병원의 하얀 침대 위에서 산소 호흡기를 대고 누워있는 환자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삐- 소리를 내는 의료기기도.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녀의 얼굴과 목에 가해진 타격은 혈액 공급을 차단했다. 그녀의 두뇌는 갑자기 줄어든 산소와 포도당을 벌충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생명의 통로는 좁혀지고 납작하게 찌그러졌다. 두뇌가 보낸 조난 신호는 별이었다. 신화는 사실이었다. 대뇌 피질의 단절된 화학 작용 덕분에 그녀는 별들을 향해 돌진했다.

  셀리스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기 시작했다. 조금씩 숨을 들이마시고 헐떡거리며 한바탕 아우성을 치다가, 말을 더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마지막 고비에 이르렀다. 혈액 공급이 줄어들자 심장과 허파는 미친듯이 피와 산소를 공급하다가 갑자기 멈워 버렸다. 살아남기에는 너무 심하게 유린당한 그녀를 그녀의 심장과 허파가 포기해 버린 것이다. 흉근은 오르내리는 법을 잊어버렸다. 반사 능력도 사라졌다. 그녀는 기침을 할 수도 없었고, 피를 도로 삼킬 수도 없었다. 뇌세포막의 펌프가 멈춰 버렸다. 셀리스는 완전히 통제력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의술과 기적도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호흡도 사라지고, 기억도 사라졌다.

 

어쩌면 우리는 죽음이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생각만을 하고 싶어, 죽음의 '다양성'을 보려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토요일 오후에 두 고객은 시체 공시소에 보관되어 있는 남자와 여자들을 - 이제는 침묵 속에서 - 대충 훑어보고 시체의 발목에 매달린 꼬리표를 읽는 동안, 죽음에도 하나의 패턴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심장 마비는 살인 용의자 제1호였다. 이른 아침은 죽음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그 다음은 한밤중과 폐렴. 세 번째 살인 용의자는 자동차였다. 그 다음이 암인데, 암의 원인은 대부분 술이나 담배, 또는 바람이 실어 온 소금 속에 함유된 바다 찌꺼기였다. 죽고 싶지 않으면 숨을 쉬지 말 것. 운전하지 말 것. 담배를 피우지 말 것. 길을 건너지 말 것. 술을 마시지 말 것. 레스토랑에 가지 말 것. 그 지역에서 많이 나는 특산물, 게와 수에트 캐서롤, 돼지기름과 견과류로 만든 과자, 달걀을 넣은 리큐어, 푸른곰팡이 치즈 소스를 먹지 말 것.

 

또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노화의 결과'로만 생각하게 되고, 노화는 비난 받아야 할 그 무엇이 되고 만다.

 

조지프가 20년 동안 만나지 않은, 그래서 별로 좋아할 것도 없는 또 다른 사촌도 지난 봄에 죽었다. 셀리스와 동갑인 이웃집 아들도 지난 봄에 죽었다. 노총각 사이클 선수인 그는 야외 훈련을 하다가 심장 마비를 일으켰다. 그는 십대 이후로는 담배도 술도 입에 댄 적이 없었다. 몸은 자작나무처럼 호리호리하고 근육질이었다. 절대 죽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모친은 아들이 너무 일찍 죽었다고 말했다. 죽음이 마치 일정한 나이가 되어야 받을 수 있는 연금이라도 되는 것처럼, 너무 일찍 신청하면 당연히 퇴짜를 맞아야 하는 것처럼.

 

  반쯤 감은 눈을 통해 두 번째로 부모를 보았을 때, 부모는 묘하게도 젊고 건강해 보였다. 피부는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아버지의 이마에는 주름살이 없었다. 어머니의 아래턱은 단단했다. 하지만 부모를 젊게 보이게 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실비는 깨달았다. 부모가 죽은 방식 그 자체. 변사는 대개 젊은이들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느린 소모는 노인의 속성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그게 전혀 없었다. 급속히 파괴된 부모는 정말 아름다웠다. 손상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본질과 특성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그들은 개성을 빼앗기지 않았다. 나름대로 고양되어 있었고, 묘하게 침착했다. 이것은 일종의 자살이었다. 그들은 자궁에서 줄곧 사람들을 따라다니는 그 최후의 노인성 경련 - 발작은 지나치게 강한 표현이다 - 을 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살보다 더 행복한 죽음이기도 했다. 분노나 슬픔이나 절망의 징후는 전혀 없었다. 작별 인사도 없었다. 자해한 상처도 없었다. 유산으로 남긴 원한도 없었다. 마지막 회한도 없었다. 그들은 아직 희망찬 노년을 기대할 수 있고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할 때 세상을 떠났다. 실비는 부모가 이번만은 자기를 정말로 놀라게 했다고 인정했다. 적어도 그것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비를 놀라게 한 것은 부모가 살해된 사실만이 아니었다. 부모가 알몸이라는 사실만도 아니었다. 부모가 죽으면서 실비의 가슴에 - 뒤늦게나마 - 사랑을 가득 채울 힘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것은 어머니의 발목에 가볍게 닿아 있는 아버지의 손가락이었다.

 

죽음을 노화의 과정이 아니라 '구상시회권' 같은 부패해가는 한 인간의 몸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러니까 죽음을 좀 더 거시적인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이 소설의 마카브르는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 또한 '죽음의 과정'일테니까. (책의 원제가 'Being dead'라는 점은 그래서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 소설이 놀라운 것은, 단순히 죽음을 새롭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굉장히 냉철하지만 깊이 있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것도 비비꼬지 않는 문체로.

 

  날이 저물자마자 조문객들이 -여자들이 먼저- 찾아와 고인에 대한 덕담을 늘어놓고, 어깨가 들썩이게 흐느껴 울고, 구두와 지팡이로 마룻바닥을 쿵쿵 두드리고, 팔찌와 소맷부리를 달그락거린다. 삐걱거리는 의자나 느슨해진 마루청에서 삑삑 소리가 나게 하거나 가장 요란하게 곡한 여자는 누구나 자기가 가장 비탄에 빠져 있다고 생각해도 좋다. 소리가 클수록 슬픔도 깊은 법이니까. 백 년 전만 해도 죽음이 방 안에 있을 때면 아무도 요즘의 우리처럼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지 않았다. 백 년 전 사람들은 슬픔에 재갈을 물리지도 않았고, 일상생활에서 슬픔을 몰아내지도 않았다. 그들은 죽음을 마치 나무처럼 물을 주고 돌보았다. 죽음 앞에서 낮은 소리로 속삭이거나 무언극을 연출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책의 곳곳에 넘치는 선언(혹은 아포리즘)이 쓸데 없는 폼잡기로 느껴지지 않는다.

 

일기장은 아버지의 사적인 공간이다. 아버지의 내밀한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자식은 아무도 없다.

 

시제와 플롯과 죽음에 대한 관점이 '일상적인 것'에서 완전히 일탈해 있는 소설.

하지만 약간의 현기증에도 불구하고 한 번 책을 읽으면 놓을 수 없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다.

휴양지에 가서 읽기엔 어울리지 않는 책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휴양지에서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잡생각을 버리고 이 소설에 깊이 발을 담갔다 나오면, 무엇인가 '진지함'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무신론자인 작가가 '구원'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다.

자극적인 척하지만, 실은 담백하게 진실을 이야기하는 소설.

아직 많이 이르기는 하지만, 올해 읽게 될 책 중 최고의 소설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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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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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어가면서 나는 마치 누군가의 학위논문을 읽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 서장에 제시되는 사학사적 정리(한국전쟁사의 역사), 역사적 사실을 둘러싼 이론적 논쟁사(전쟁의 개전 · 성격 · 형성), 거기에 연구의 구성과 방법, 자료 분석까지, 이 책이 주는 느낌은 직전에 읽었던 손석춘의 책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커밍스의 책이나 손석춘의 책에 비하면, 정병준의 『한국전쟁』은 굉장히 차가운 책이다. 수많은 자료들을 꼼꼼하게 비교 · 분석하면서 기존의 ‘이론’들을 비판하며 새출발을 선언한다. 커밍스에 비해 과감한 추측이 만들어내는 충격은 없지만, 그보다는 훨씬 조심스럽기 때문에 헛점이 훨씬 적어 보인다. 손석춘에 비해서는 (비록 한국전쟁에 대해 집중하고 있는 포인트가 다르기는 하지만) 결이 다른 ‘미시적 관점’을 보여주며 역사가다운 사료의 사용을 보여준다.



6 · 25, 한국전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전쟁’, ‘북한의 기습으로 전쟁 초기 일방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던 전쟁’이다. 비교적 가장 최근 한국인들에게 한국전쟁의 존재감을 느낄 기회를 주었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생각해보자. 2003년 개봉한 이 영화는 당시 1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의 흥행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야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적어도 이 영화가 2003년의 한국인들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영화였음은 분명하다. 반대로 감독이 2003년 한국인들의 구미에 맞는 영화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좀 비약을 하자면,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한국전쟁에 대한 해석이나 관점이 2000년대 한국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초반 장면들을 기억해보자. 우애가 넘치는 주인공 형제가 가난해도 꿈을 가지고 살고 있는 장면들이 연출된다. 각종 세트와 배우들의 복장으로 재현되고 있는 이 장면의 정확한 시기와 장소는? 영화의 자막으로 정확하게 명시되고 있다. “1950년 6월 서울”.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한국전쟁에 대한 현대 한국인의 ‘상식’ 속에 존재하는 1950년 6월의 남한은 매우 평화로운 시기였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책 『한국전쟁』에서는 1950년 6월 25일 이후를 서술하지 않고 1948~1949년을 집중적으로 서술한다. 책의 3/5 지점까지도 전면전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책의 부제가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전쟁의 ‘발발’이 아니라 ‘형성’이라는 표현. 이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저자는 왜 1950년 6월 25일과 그 이후 전쟁의 전개에 포인트를 맞추지 않고 38선의 형성이나 1948~1949년 어간에 그토록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이미 1부 3장 ‘구성 · 연구 방법 · 자료’에서 그 이유를 내비치고 있다.



이상과 같이 남한의 한국전쟁관은 '진정한 불의의 기습공격', 북한의 한국 전쟁관은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 미국의 한국전쟁관은 '정보의 실패'로 요약된다. 여기에 한국전쟁의 핵심 비밀이 있다. 각국의 한국전쟁관은 모두 1949년에 비롯된 것이다. 북한은 1949년의 세계관에, 남한은 1950년의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었다. 북한은 1949년의 상황, 즉 남한의 표면적인 공격 태도와 '북침' 위협, 이에 대비되는 북한의 방어, 수세적 입장이 전쟁의 진실인 것처럼 꾸몄다. 북한은 위장된 평화 속에 대규모 공격을 준비해, 1950년 6월 전쟁을 시작했음을 대내외적으로 위장, 선전하는 데 성공했고, 급기야 이를 진실인 것처럼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한국에서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가한 '진정한 불의의 기습공격'만이 기억되었고, 1949년 남한측의 공세와 공격적 편성, 방어 부재는 기억되지 않았다. 즉 한국군이 '공격의지를 가진 방어형 군대'였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군의 초기 붕괴는 북한의 병력, 화력 우세 때문이었지만, 그 효과를 배가시킨 것은 '진정한 불의'의 공격을 가능하게 한, 한국군의 방어 부재 및 공격형 의도 및 편성이었다.

미국 역시 잘못된 가정하에 정보를 오도, 오판했고, 이로 말미암아 '정보의 실패'라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이 부분이 바로 이 책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쟁의 ‘형성 과정’이 ‘한국전쟁사의 역사’에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은 다시 전쟁의 형성 과정에 대한 ‘기억’에 거꾸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1부 3장에서 지적된 내용은 다시 3부 3장에서 요약된다. 그 부분을 인용해 본다.


여섯째, 이런 측면에서 남북이 주장하는 ‘도발받지 않은 불의의 기습남침’,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 ‘개전정보의 실패’는 모두 1949년에 그 연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북의 한국전쟁관은 기본적으로 전쟁의 출발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졌다. 북한의 한국전쟁관은 1949년의 피해의식에 머물러 있다. 북한은 자신들이 1950년 잘 준비된 대규모 전면 기습공격을 개시했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1949년 남한의 공세적 태도를 과대포장하며 ‘정의의 반공격전’을 주장할 뿐이다. 한편 남한의 한국전쟁관은 1950년 6월 불현듯 발생한 ‘불의의 기습남침’에 머물고 있다. 한국에서는 1949년의 공세적 태도와 공격적 배치는 기억되지 않는다.


그리고 미국의 입장에서는 "1950년의 정보 담당자들이 1949년 한국의 공격적 태도에 기초해, 북한의 전쟁 징후를 1949년 이래의 방어적 태도로 해석"하여 개전정보 수집 및 분석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공개된 러시아측의 자료만을 가지고 일방적인 책임을 돌리고 있다는 손석춘의 지적은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제까지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과도한 추측 없이 논리적으로 도출된 결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어도 남북한 측 모두의 ‘선제공격’에 대한 부담만으로도 ‘한국전쟁’에 미 · 소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거나 혹은 전쟁 발발시 필연적으로 개입될 수밖에 없음은 입증되고 있다.



하지만 몇 가지 의문점들은 남아있다.



첫째, 저자는 미군의 직접통치와 소련의 간접통치(혹은 배후통치)를 결국은 같은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소련의 확신을 인정하더라도, 그 둘을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둘째, 북침을 억제하려고 전전긍긍한 것으로 보이는 미국측에서 이승만과 한국의 군부를 통제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이런 의미에서 한국, 이승만의 시각에서 바라본 한국전쟁 연구가 더 진척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도발받은 ‘반공격’은 선호했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241쪽에 인용되고 있는 굿펠로우의 발언을 미국 정부의 입장으로 볼 수 있다면, 미국 정부가 (3차 대전이라는 엄청난 가능성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무계획적이거나 중요한 열쇠하나 가지고 있지 못한 남한의 세력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이 되는데, 이는 너무 편한 설명이 아닐까?



셋째, 1949년에는 저자의 지적대로 연대급의 정규군이 동원되는 군사적 충돌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당시 한국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리고 국지전과 전면전의 차이가 정확히 무엇일까?(한국전쟁을 38선 충돌의 확전으로 본다면 이 부분의 해명은 더욱 필요하다.)



넷째, “한국군이 주한미군의 철군을 반대하고 많은 무기와 지원을 획득하기 위해 38선상에서 긴장을 고조시킨 것은 설득력이 충분하지만, 적극적으로 대북 전면전을 구상했을 가능성은 없다”면, 제2차 고봉산 전투와 개성 송악산 488고지전투에 대한 설명이 더 필요하다. 이들 전투 모두 연대급 병력이 투입된 전투인데, 그에 비해 저자가 전면전으로 확전을 하기 위한 북측의 시도였을 거라고 주장하는 8월 옹진 제2차 충돌은 3개 대대가 투입이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 모든 충돌들은 시기적으로 그 간격이 너무 좁다. 그 사이에 북한의 전력이 탄탄하게 구축이 됐을 것이라거나 전면전에 대한 확신이 강해졌다고 분석하기엔 모자라는 것이 많다. 게다가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면 고봉산과 송악산 전투만큼 좋은 기회가 없었을텐데, 이 부분은 너무 소략하게 넘어가는 것은 아닌가?



다섯째, 1950년 ‘로동신문’에서 급작스럽게 시작된 선전이 기존의 것과 판이하다는 것(460~461쪽)이 증명되려면 1949년의 보도행태가 비교되어야 한다. 저자가 비교한 ‘함남로동신문’이 타당한 비교자료가 되려면 함남로동신문의 1950년 보도행태도 비교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시기 북한의 과장된 선전은 누구를 위한 선전인가? 저자는 “이러한 위장된 선전은 단지 남한과 미국을 상대로 한 것일 뿐만 아니라, 김일성과 북한군 수뇌를 제외한 모든 북한 주민들을 향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이 남한을 상대로 선전을 한다고 해서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이며, 국제사회에 알려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고 하기엔 ‘로동신문’의 역량에 의문점이 생기는 것은 마찬가지다.



여섯째, 저자가 규정하는 개념들이 다분히 자의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공격적 성향을 가진 방어형 군대'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북한군의 전력 평가에 대한 부분에서 '압도적인 우세는 아니었다'고 서술하지만, 전투 초반 기습임을 감안하더라도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이 사실이다. 전투는 단순히 심리적 충격으로 결판이 나는 것은 아니다. 남한군이 '공격적 성향을 가진 방어형 군대'였다면, 당시 부대의 배치 상황이라든가 하는 것이 정확히 분석되어야 한다. 사실 말 자체가 모호하지 않은가? 그래서 남한군이 방어에 유리한 부대였다는 말인가, 공격에 유리한 부대였다는 말인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냥 당시의 남한군이 '약했다'라고 표현하면 될 일 아닌가? 증명되기가 어려운 개념을 주요 개념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증명과 분석이 더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북한의 전력이 '압도적인 우세'가 아니었다면, 김일성은 왜 모택동의 지원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을까? 김일성이 당시 남한의 전력을 상당 수준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의문이 더욱 가시지 않는다. 병력과 군수물품은 많을 수록 좋은 것 아닌가? 그렇다면 북한이 중국의 간섭을 견제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소련의 눈치를 보았다는 말인가? 소련의 눈치를 보았다는 설명은, 사실 이 책에서는 불가능한 선택지이다. 책임전가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스탈린인데, 눈치 볼 일은 아니지 않았을까?



인상 깊은 것은 한국전쟁이 ‘기억’의 전쟁이라는 점이다. 2000년대 만들어진 영화가 당시의 자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그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면, 이건 굉장히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당시를 직접 살았던 사람들이 생존해 있음에도 가공의 상식이 무수히 ‘재생산’되고 있다면, 이것은 이상한 일일뿐만 아니라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부분에 손석춘이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앞으로 역사학은 물론 사회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진지한 접근을 시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800페이지가 넘고 각주만 해도 1,500개는 가뿐하게 넘기는 엄청난 책이다. 물론 4장의 경우 자료 해제에 가깝다는 느낌도 주긴 했지만, 이 정도의 자료를 읽고 이 정도로 분석, 정리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두께에 놀라 책을 들지 못한다면, 에필로그만 읽어도 이 책의 요지는 충분히 잡아낼 수 있다(게다가 그 에필로그엔 '해주 점령설'에 대한 명쾌한 해명이 담겨 있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중요 문서도 많을 뿐더러, 우리의 발목을 잡아온 고정관념과 내부검열 덕에 한국전쟁 연구는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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