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발한다 - 해제ㅣ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의 양심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7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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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드레퓌스 사건'에 가장 앞장 서서 진실을 외쳤던 에밀 졸라의 글을 모은 책이다. 가장 유명한 글인 '나는 고발한다'는 의외로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직접 읽은 사람도 드물다. 아무래도 '현장의 글'이기 때문에 맥락을 자세히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리라. '나는 고발한다'도 명문이지만, 졸라가 드레퓌스의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도 좋은 글이다.


'드레퓌스 사건'이 오늘날에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건, 정작 당사자 드레퓌스는 그리 존경할만한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드레퓌스가 사면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를 지지했던 많은 이들을 배신한 꼴이 되었지만, 졸라는 여전히 '사건'을 바라본다. 아마도 그가 '사람의 편'이 아니라 '진실의 편'에 서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도 얼마나 많은 일들이, 친분에 의해 왜곡되고 무마되는가. 나부터가 공적인 문제에 대해 인간관계를 들이대지 않고, 서운해하지 않고, 기대하지 말아야겠다. 또 잘잘못이 분명한 일에 친분을 내세워 누군가를 방어해주려는 것도 삼갈 일이다.


뒷부분에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해제가 있는데, 짧은 글이지만 전체 글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해당 사건을 들어봤다면, 한 번쯤 시간을 내어 읽어볼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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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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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문장에 대한 관심이 많다. 주제도 모르고 무슨 작가가 되겠다는 건 아니고, 인문학을 한다는 학자들이 문장이 엉망인 경우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물론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즉, 아름다운 문장을 원해서가 아니라 정확하고 간결한 문장, 문법에 맞는 문장을 쓰고 싶기 때문에 문장을 다룬 책을 종종 사서 본다. 이 책도 그 책 중의 하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의 분량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정보가 많은 책이다.


행위가 진행될 수 없는 동사에 보조 동사 '있다'를 붙일 수는 없다. (44쪽)


보조 용언, 그러니까 보조 동사나 보조 형용사처럼 보조해 줄 낱말을 덧붙일 때는 당연히 이유가 있어야 하고 그 효과를 봐야 한다. (45쪽)


문장의 주인은 문장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주어와 술어라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52쪽)


분명하게 뜻을 가려 써야 할 때까지 무조건 '대한'으로 뭉뚱그려 쓰면 글쓴이를 지적으로 게을러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64~65쪽)


지적인 문장이 아니라 지적으로 '보이는' 문장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지적으로 보이게끔 포장하지만 사실은 게으름을 그대로 드러내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69쪽)


그러니 한글 문장은 순서대로 펼쳐 내면서, 앞에 적은 것들이 과거사가 되어 이미 잊히더라도 문장을 이해하는 데 문제가 없어야 한다. 그러려면 문장 요소들 사이의 거리가 일정해야 한다. ......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문장의 주인이 문장을 쓰는 내가 아니라 문장 안의 주어와 술어라는 사실이다. (196~197쪽)


 그리고 단편 소설 같은 이야기를 중간 중간 넣는 흥미로운 구성으로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나름의 반전(?)도 있고, 한참 생각할만한 좋은 표현도 있다.


오해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만듭니다. 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풍경을 만들고 시선을 만들죠. 이해한 자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시선과 결코 볼 수 없는 풍경. 그것이 설사 왜곡된 시선이고 왜곡된 풍경일지라도 말입니다. 이해한 자는 풍경을 갖지 않습니다. 아니, 풍경을 가질 필요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왜나하면 이해한 자는 자신과 이해된 것 사이에 거리를 둘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 이해한 것인데 굳이 거리를 두는 건 바보 같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해한 자가 갖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장면이죠. 이해한 자신과 이해된 대상이 함께하는 장면. 하지만 오해하고 오해된 자들은 거리를 갖고 풍경을 갖습니다. 어떻게 해도 좁혀지지 않는 거리와 어떻게 해도 내게로 와서 장면이 될 수 없는 풍경을 말이죠. ......

누군가에겐 그 모습이 내가 속한 풍경이기도 하고 내 모습 자체가 풍경이기도 하겠지만, 최소한 내겐 결코 풍경이 될 수 없죠. 왜냐하면 내가 지켜보고 있는 것은 풍경을 만드는 거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144~146쪽)


물론  이런 류의 책이 다 그러하듯, 모든 부분에 동의하기는 힘들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는 '시작하다'의 뜻에 집착해서 그 사용을 엄격히 제한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놀라기 시작했다"는 문장은 시작과 끝을 명시하기 어렵기 때문에 어색하다는 거다. 그러나 "사람들이 놀랐다"라는 표현과 "사람들이 놀라기 시작했다"는 표현은 어색한지 어색하지 않은지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다. 두 표현은 분명 다른 상황을 보여주는 문장이다. "직원들이 하나 둘 퇴근하기 시작했다"도 마찬가지다. 필자가 말하듯 이 표현이 바통을 주고 받으며 퇴근한다는 걸 표현하기 위한 문장일리가 없다. 만약 단어의 정확한 뜻에 그렇게 집착한다면, 서브플롯 속의 "미망인"이라는 단어는 왜 그렇게 자주 사용하는지 모를 일이다. 심지어 상대를 직접 지칭할 때도 미망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건 그야말로 어색한 표현이다. 또 단어에 담긴 뜻을 생각하면 어색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표현이기도 하고.


어쨌거나 이런 부분은 내가 알아서 받아들이면 될 일. 재미있게 잘 읽은 책이었다. 특히 "문장은 손가락이 아니다"라는 지적에는 많이 뜨끔했다. 다음과 같은 표현은 사용할 때에 꼭 필요한 문장인지 재확인을 해야겠다. 이 책의 목차를 두고 퇴고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있었다, 있다

- 관계에 있다

-에 대한(대해)

-시키다

될(할) 수 있는

그, 이, 저, 그렇게, 이렇게, 저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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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로 간 한국전쟁 -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
박찬승 지음 / 돌베개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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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우연히 구술 프로젝트에 두 건이나 참여했다. 이전까지 구술 작업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던 터라, 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구술자가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하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일부터, 적절한 질문지 작성, 구술 녹음 자료의 검수까지 매 작업 단계마다 곤란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어떤 구술자는 미리 약속했던 구술을 거부하거나, 구술한 며칠 뒤 2시간 넘게 구술 받은 것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요구한 적도 있었다. 심지어 구술 주제가 민감한 사안이 아니었음에도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구술’하면 그냥 이야기를 듣는 것쯤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는데, 직접 경험해보니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구술 작업을 토대로 연구 성과물을 만드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의 작업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구술 자료를 사용할 때에 주저하는 마음이 생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객관’과 ‘사실’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역사가들은, 구술 자료의 가능성에 주목하기보다는 위태로움을 걱정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구술 자료는 매우 주관적이며-모든 자료가 주관적이라는 보호막을 쳐도 달라지는 건 별로 없다-기억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듯이,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스러지고 떨어져나간다. 그리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왜곡하고 편집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술 자료는 매력적이지만 위험하다.


『마을로 간 한국전쟁』은 구술을 바탕으로 진행한 연구라는 점에서 다른 연구와 차별성을 지닌다. 당연하게도, 연구 방법이 다르니 연구결과도 달랐다. 한국전쟁의 큰 특징은 민간인 피해자가 다수 발생했고 그 민간인 피해는 민간인끼리의 분쟁이 원인이었다는 점이다. 기존의 거시적 연구는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에 주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상이나 계급만이 쟁의 원인이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현미경을 들이대고 살펴보니 현실은 달랐다. 사상보다는 신분 갈등, 계급 갈등, 친족 내의 갈등, 마을 간의 갈등, 종교 갈등이 사상을 압도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그 갈등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갈등은 존재했고 한국전쟁이 그 갈등을 극적으로 폭발시킨 것뿐이었다.


이 글에서는 과거의 양반-평민 간의 신분 갈등, 지주-소작인(혹은 머슴) 간의 계급 갈등, 친족 내부의 갈등, 마을 간의 갈등, 기독교도와 사회주의자 간의 종교 혹은 이념 갈등 등이 '복합적 갈등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했다.(56쪽) 


이러한 한국전쟁의 이면은 새로운 연구 방법을 사용했기에 드러난 것이다. 구술이라는 어려운 작업을 진행하고, 사료를 구에 적용하는 또 다른 차원의 지난한 작업을 진행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연구사적 의의를 충분히 찾을 수 있다. 한국전쟁이라는 주제의 민감함을 생각하면,이 작업이 얼마나 어려웠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게다가 저자가 사학계의 중견 연구자임을 감안하면, 현장연구를 진행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럼에도 책을 읽으면서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쉽게 찾기가 힘들었다. 물론 반복되는 문장이 많고, 어떤 부분에서는 중언부언하는 느낌을 준 탓도 있다. 허나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에서의 미시사’가 가지는 문제와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현미경을 들이대듯 자세하게 살핌으로써 거시사가 놓칠 수밖에 없는 부분을 되살리고,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존재들에게 기회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 미시사의 가장 큰 장점이다. 서양에서의 미시사가들이 대부분 좌파인 건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어떠한가? 수많은 ‘일반인’들이 등장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이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그들은 모두 주체가 아니라 정황을 묘사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인명이 등장하지만 사람이 없는 것 같은 괴상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물론 민감한 구술 자료를 온전히 사용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한계라고도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점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방법론적인 충돌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즉, 미시적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빚는 손길이 여전히 거시적 기법이라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윤택림의 2003년 저작, 『인류학자의 과거여행: 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와 대비된다. 윤택림은 애초에 연구 대상을 더 축소하여 한 걸음 더 마을로 들어간다. 또 족보처럼 기초적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무의미한 계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도식화하고 그 변화를 추적한다. 그래서 윤택림의 저작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 가명임에도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존 인물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을 연구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되살리는 데에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다.


이런 차이가 어디서 발생하는 것일까? 나는 역사학 연구자의 강박에서 그 이유를 찾고 싶다. 미시적 기법에 대해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역사학자는 미시적 연구를 사례 연구와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것은 미시사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단턴이나 긴츠부르그, 데이비스의 연구를 보면,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 하나하나의 연구가 ‘사례연구’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사례‘들’을 합치면 큰 그림이 나올까?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한국인 개인의 역사를 모두 모으면 한국사가 되거나, 반대로 한국사를 분해하면 개인사가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례 하나에 대한 연구자의 믿음이 필요하다. 사례 하나를 깊게 분석하는 고집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 사례를 일반화할 수 있느냐?”라는 뻔한 질문에 대항할 용기도 필요하다. 어쩌면 이 민감한 주제야말로 구술사와 미시사가 꽃필 수 있는 영역이 아닐까?


또 하나의 아쉬운 점은, 저자의 중요한 문제 제기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총론에 언급한 다음의 주장을 살펴보자.


남과 북의 국가 권력은 전쟁 상황을 이용하여 마을 주민들에게 어느 한쪽을 분명히 선택하도록 함으로써 충성도를 높이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남북의 국가권력이 마을 주민들을 동원하여 직접 학살에 나서도록 한 것은 주민들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50쪽)


여기서 우리는 국가권력이 마을에 그처럼 깊숙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과연 마을 안팎에서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 즉, 국가권력의 개입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대규모 민간인 학살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민간인들끼리 죽고 죽이는 학살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민간인들끼리 죽고 죽이는 학살은 사실상 국가권력의 조장에 의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51쪽)


이런 주장은 개연성이 높은 중요한 문제 제기다. 그러나 본문 속에서 이 문제 제기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보이진 않는다. 국가 권력이 어떻게 침투해서 민간인 사이의 갈등을 조장했는지, 구체적인 사례속에서 입증하지 못했다. 이 부분을 제대로 입증하지 않는다면, 이 연구가 지적했던 기존 연구의 한계를 답습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연구는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 선구적 연구로 기억될만 하다. 특히 저자가 자신이 속한 대학의 학생들과 함께 진행한 구술 수집 작업은, 학생들에게 중요한 자극제가 될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자료 수집를 수집하여 더 다양한 관점으로 분석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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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나라, 브라질 빠우-브라질 총서 2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창민 옮김 / 후마니타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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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이야기꾼, 슈테판 츠바이크의 미래의 나라, 브라질은 무엇보다 재미를 보장하는 책이다. 츠바이크는 브라질의 짧지만 역동적인 역사부터 경제, 문화, 도시를 훑으면서 남미에 큰 관심이 없던 나 같은 사람까지도 순식간에 책 속으로 빨아들인다. 내가 브라질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은 축구, 삼바, 커피, 포르투갈 정도였다. 이 책은 그런 무지를 깨닫게 해주는 동시에, 문학적인 즐거움까지 선사한다. 물론 누군가는 이 책의 뭉뚱그림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세한 설명이나 각주를 중요하게 여기는 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 뭉뚱그림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이다. 브라질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사람에게 그 사회의 역사와 문화, 경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세부 사실의 나열보다는 전체 흐름을 쉽게 보여주는 것이 나을 테니까.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허나 흥미진진하게 책을 읽으면서도 뭔가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츠바이크의 미래인 현재, 지금의 브라질을 과연 미래의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 브라질에서 들려오는 정치, 경제, 사회의 소식을 생각할 때 미래의 나라라는 표현은 너무 아득하다. 여행에 관심과 경험이 많은 사람들조차 브라질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해야하는 곳이다. 신문의 경제면에선 몇 년 전과 달리 브라질 경제를 침체나 위기로 표현한다. 심지어 한 때 라틴아메리카는 물론이고 전 세계 좌파의 희망처럼 보였던 룰라 전 대통령은 위기에 몰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텍스트를 다른 방식으로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일단 우리는 이 텍스트를 20세기 전반기 유럽인이 찍은 브라질의 스냅샷으로 읽을 수 있다. 당시의 유럽인이 보는 브라질은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살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는 역으로, 당시의 유럽인이 브라질을 통해 보았던 유럽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츠바이크가 이 책 곳곳에서 보여주는 문명이나 진보에 대한 성찰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몇 해 동안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문명''문화'라는 용어의 의미에 대해 우리의 견해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우리는 '문명''문화'를 흔히 생각하듯 '조직화''안락함'이라는 개념과 동등한 것으로 보고 싶지 않다. 이런 치명적인 오류를 가장 많이 조장한 것은 통계다. 통계는 기계적 지식으로서, 한 나라에서 국민의 부가 얼마나 증가했고, 개인의 수입은 어떻고, 자동차와 욕실, 라디오 수신기는 평균 보급률은 얼마이고, 보험료는 얼마나 되는지 계산한다. 이런 지표에 따르면, 가장 문화적이고 문명화된 국민은 생산에 대한 열망이 가장 강하고, 가장 소비를 많이 하고, 개인당 자산이 가장 많은 국민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지표들은 정작 중요한 요소를 반영하지 못한다. 인간의 사고방식을 측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화와 문명의 가장 핵심적인 척도는 인간의 사고방식이다. 가장 완벽한 조직이라도 몇몇 국가들이 가장 완벽한 조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류를 위해 활용하지 못하고 오로지 야만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현실을 우리는 보아 왔다. (21)

 

츠바이크가 브라질의 밝은 면만 과장했을 수도 있다. 아니, 분명 그러할 것이다.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살육을 체계적으로 자행하던 유럽에 좌절한 츠바이크의 입장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텍스트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늘의 우리에게 이 텍스트가 중요한 까닭은, 그의 글이 우리가 잊었던 상상력의 중요함을 되새기게 만들기 때문이다. 극단의 상황에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자극에서 일말의 가능성을 보는 그의 태도야말로 우리가 이 텍스트에서 얻을 수 있는 보석이다. 다음의 글을 보라. 굳이 브라질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치가 아니던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상을 실현한 지상낙원의 사례가 아니라 이상이 실현될 수 있다는 확신이나 신념이 아닐까?

 

브라질에서는 시간보다 삶 자체가 더 중요하다. (181)

 

아주 근래 몇 년간의 경험을 보았을 때 그저 조바심과 열망이 부족한 것을, 다시 말해, 진보를 위해 서두르지 않는 것을 단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주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히 브라질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든 개인이든 자발적으로 순응하는 평화로운 삶이 과장되고 과열된 역동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닌가? (184)

 

끝 모를 자본주의의 시대는 우리가 이 사회를 이라고 명명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이제까지 계속 그래왔던 것만 같은, 그리고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이 시대는 실은 그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츠바이크의 브라질과 현재 브라질 사이의 간극은, 역설적으로 지금의 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과 상상력을 준다. 현재에 좌절하지 않고 미래를 상상하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가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역사가 없는 사람, 혹은 많이 양보해서, 아주 근래의 역사만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보다 더 브라질 사람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170)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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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체파리의 비법 팁트리 주니어 걸작선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지음, 이수현 옮김 / 아작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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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좋은 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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