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흉하게 꿈꾸는 덱스터 모중석 스릴러 클럽 4
제프 린제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소설은, 작가의 사적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건조하고 깔끔한 문체로 이야기를 이끌어 내는 소설들이다. 작가의 사적 감성이나 감정은 캐릭터의 성격에 대입해 충분히 살릴 수 있으며, 소설에서 작가의 감정을 위임 받는 것은 캐릭터의 몫이다.

 

그래서 캐릭터를 다룰 때는 작가는 조심해야 한다. 작가의 감정이 과잉으로 캐릭터에 대입되었을 때는 과도한 자기 연민으로 이야기가 흐를 수 있고, 감정이입을 거의 하지 않을 땐 캐릭터가 이야기에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잘 짜여진 이야기의 힘으로 소설이 이끌여 나가는데, 개인적으로 과잉으로 소설이 이끌려 나가는 것보단 차라리 이야기의 힘만으로 전개되는 것도 나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을 때 캐릭터보다 이야기에 중점을 둔다. 아주 독특한 캐릭터가 아닌 이상,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역량에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프 린제이의 소설속 인물 덱스터는 좀 다르다. 아마 그는 내가 만난 몇 안 되는 정말 특이하고 독특한 캐릭터일 것이다. 나는 미국스릴러나 미스터리물을 읽긴 하지만, 정말 좋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특히나 남들이 이구동성으로 다 좋다고 말하는, 할렌 코벤, 마이클 코넬리, 제프리 디버같은 거물급 작가들의 미스터리물을 읽고 난 후의 그 텁텁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도록 계산된 장면, 거듭되는 반전의 반전의 트릭과 악의 클레쉐적인 설정등. 재미는 있지만 매력을 느낄 수 없다.

 

덱스터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의 직업은 경찰내부에서는 공개적으로 혈액분석가이지만, 그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스런 직업이 있다. 그건 바로 연쇄살인범. 그것도 연쇄살인범을 죽이는 연쇄살인범 말이다. 그는 세상에서 없어져 버려야 하는 사람들을 한동안 지켜보고 죽일 기회를 찾는다. 자신의 살인 본능을 선량하고 일반적인 사람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고 죽어 없어져도 무방한 사람들, 연쇄살인범에 촛점을 맞춰 자신의 살인 행위를 정당화 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덱스터는 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캐릭터이다. 과연 연쇄살인범을 죽이는 그의 연쇄살인 행위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왜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을 개인의 처벌해야하는가? 그의 그런 캐릭터로 비춰볼 때 사람은 환경에 지배 받는 것이 아니고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것인가? 선이나 악을 집단적(성선설, 성악설)으로 정의내릴 수 있는가?

 

연쇄살인범을 죽이는 연쇄살인범인 그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은 법적인 면에서는 정당화 될 수 없지만, 사회적 통념상 암묵 될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제프 린제이가 창출해 낸 덱스터의 본능이다. 그의 살인행위는 사실 정의로운 의지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그는 수 많은 연쇄살인범들처럼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살인 본능을 타고 났다. 그래서 그의 양부 해리가 그의 본능을 알아채고 그에게 사람 대신 동물들을 죽이도록 인도해 주었지만, 결국 그의 본능을 잠재울 수가 없어 타깃이 된 것이 바로 연쇄살인범인 것이다.

 

제프 린제이의 이 소설에서 만들어낸 교활한 장치는 덱스터가 연쇄살인범을 죽인다는 것 때문에 침묵의 공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 연쇄살인범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용기 없는 우리 대신 그가 칼을 들었다는 사실은, 그가 살인 본능을 타고 났다면 차라리 그런 사람을 죽이도록 부추기고 침묵으로 유도한다는 것이다. 그의 행동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그의 행동을 소리 높여 비난 할 수 없다는 것.

 

그렇다면, 제프 린제이는 덱스터의 살인 본능을 어떤 관점에서 보았을까? 우리는 대체로 사람은 주변 환경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는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윈 이후, 많은 과학자들은 한 인간을 형성하는데 있어 유전자(우생학)과 환경결정론, 두 이론 중에서 어느 것이 인간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논쟁은 분분하다.

 

제프리가 만들어 낸 덱스터의 살인본능은 환경보다는 유전자쪽에 무게를 둔다. 하지만 그의 살인 본능이 전적으로 유전자의 무게중심으로 쏠리지 않는다. 그는 그의 살인본능, 양부모지만 번듯한 부모밑에서 자랐고, 그의 양부 해리는 그가 살인에 대한 쾌감을 느낀다는 것을 알고 무단히도 그의 살인본능을 잠재우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선 환경적인 요인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 환경적인 요소는 그가 연쇄살인범만을 죽이도록 도덕적인 라인을 제시한 것이기.

 

양부 해리의 노력에도 불과하고, 그의 잠재적인 살인본능을 덮어버릴 수는 없었다. 살인에 대한 쾌감은 마침내 발현되었고, 그 대상이 연쇄살인범으로 유도되었을 뿐. 그러고 보면, 도킨스가 말한 우리는 유전자의 대를 이어주는 수단(껍데기)에 불과하는 말은 소름끼칠 정도로 맞는 말일 주도 모르겠다.

 

덱스터나 여타의 살인자들(테디 번디나 김길태 같은)과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살인본능은 환경적인 요인도 무시 못하지만, 유전적인 요인이 크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선악을 집단적으로 몰아부치는 성선설이나 성악설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판단이 아닐 수 없다. 인간 개개인은 개별적이며 고유의 바코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덧 : 리뷰 제목은: 리처드 도킨스의 <무지개를 풀며>에서 별빛의 바코드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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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키튼 1 - 사막의 카리만
우라사와 나오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1998년 10월
평점 :
품절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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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 오기 전에 뭔가 좀 끄적여 보려고 했는데, 아침에 지하철에서 오가며 생각한 것들이 생각한 만큼 제대로 쓰여지지 않는다.

 

요 며칠동안 존 하트의 <라스트 차일드>와 레이 브레드베리의 <일러스트레이트맨>을 읽었고, 세이초의 을 읽고 있는데, 

 

한동안 소설이 안 읽혔던 것에 비하면 위의 소설들은 짜릿한 감정을 느끼며, 읽었고 읽고 있는 중이다.

 

이왕 소설에 매진하는 거 작년에 1,2권만 읽다가 때려치운 킹의 <언더 더 돔>이나 마저 읽을까,라는 생각이 오늘 아침 지하철에서 갑작스레 들었다. 게다가 미국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진다고 하니 말이다. 킹은 드라마복도 많다. 쓰는 족족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니 말이다. 마지막 권을 읽어야 개운하고, 1,2권만 읽었으니 저 책을 읽었다고 할 수도 없고...마지막이 궁금해서라도 읽어야하는게 맞은데, 1,2권 읽으면서 킹의 주인공 캐릭터 답지 않게 무진장 갑갑해서 나와서 3권은 또 얼마나 답답하게 나올까 싶어, 엄두가 나지 않는다.

 

킹의 트레이드, 초능력이나 초자연적인 힘이 발산되어 뭔가 좀 깡그리 때려부수고 깔아 뭉개야 시원한데, 이번 소설은 어떻게 된 일인지, 주인공이 아무 힘(초능력은 커녕 캐릭터의 매력도)이 없었다. 적어도 2권까지는. 마을이 돔이 갇혀 우왕좌왕하는 꼴만 보고 있으려니 속이 타서 더 이상 읽은 것은 무리겠다 싶어 내려놓았던 것이다. 내가 킹을 좋아하는 이윤가 뮌데? 순문학 독자들은 유치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주류에 비껴나 있는, 혹은 소외된 주인공의 초능력이나 초자연적인 힘의 발산해서 세상을 들었나났다하는, 거기에서 카타르시스의 절정을 느끼는 거니깐.

 

 

 

이 소설 처음 나왔을 때, 이야기 소재가 심슨의 극장판 영화와 유사하다고 해서 말들이 많았다. 이러한 방응에 킹은 위의 심슨 영화를 본 적도 없다고 주장하자, 킹의 팬들이 닥달같이 달려들어 당신같은 팝문화광이 이 영화를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며, 심슨 영화의 크리에이터인 Matt Groening와 함께 밴드를 만들어 무대에 활동했는데, 이 영화를 모른다는 것이 말이 돼? 라고 몰아부치자, 킹은 1978년에 비슷한 상황을 설정한 소설을 생각해 냈고 1985년쯤엔 <카니발>이란 제목으로 미발행 소설로 썼다고 자신의 웹사이트에 IBM 타자로 친 60여 페이지의 초고를 올려, 영화 심슨을 표절했다는 오해는 어느 정도 해소된 것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심슨을 제작한 측에서도 킹의 소설에 대해 왈가왈부를 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변호사의 나라에서, 게다가 소설가로서 벌어들이는 돈이 상상을 초월하는 그에게 표절 고소를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봐서), 심슨의 크리에이터 Matt Groening가  킹의 미발표 원고를 보고 심슨영화의 소재을 만든 것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추측해 볼 수 있겠다.

 

여하튼, 한바탕의 표절 소동이 어떻게 끝나든, 이 소설에서 맘에 드는 것이라고는 소설적 상황과 제목뿐. 언더 더 돔이라는 갇혀 있는 상황이 어떤 소설적 소재로 단순히 치부되기 보다는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 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살면서 정말 눈에 보이진 않지만 어딘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생활, 구태의연한 인식의 폭, 사람과 사람의 관계, 세상을 보는 시각과 갈등과 투쟁 등등.

 

나를 둘러싼 세상이 돔 안에 있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돔이 둘러쳐져 있지 않다 뿐이지. 내 삶이 돔 밖의 세계에 있다고 그 누가 장담 할 수 있겠냐 말이다.  흔히 말해 갇힌 세계, 혹은 체제에 대한 저항은 수 많은 영화와 소설의 소재이고 익히 알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우리 모두는 돔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나의 일상이 갇힌 세계이고 닫혀 있는 세상이다. 돔 밖으로 나가야한다면 투쟁을 저항을 해야 하는데, 내 삶의 에너지가 과연 그 돔을 깰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언더 더 돔만한,  갇힌 세계에 대한 비유와 상징만한 것도 없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3권에서 돔을 누가 깼을까 싶다. 과연 그 닫힌 세계를 내부에서 깨졌는지 혹은 외부에서 깨고 들어갔는지 말이다.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내가 살고 思考 하는 세상 그리고 인식의 틀을 돔처럼 내부에서 서서히 깨고 좀 더 밖의 세상으로 두려움 없이 나가고 싶다. 외부에서 깨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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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르, 앙리오트, 에렌페스트, 헤르젠, 드 동데르, 슈뢰딩거, 버샤펠트, 파울리, 하이젠베르크, 파울러, 브릴루앙
디바이, 크누센, 브래그, 크라머스, 디랙, 콤프턴, 드 브로이, 보른, 보어
랭뮤어, 플랑크, 퀴리 부인, 로렌츠, 아인슈타인, 랑주뱅, 게이, 윌슨, 리처드슨

 

자주 가는 모님의 블로그에서 흥미롭게 읽은 폴 디랙의 글, 

창피하게도 꽤 오래 전에 <20세기를 만든 아름다운 방정식>을

사다 놓고 읽지도 않은 채,

책장에 쟁겨 두고 있었다. 아마 모님의 글을 읽지 않았다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을지도.

 

방정식의 위력은 실로 신비롭다. 마법사의 제자가 만들어 낸 빗자루처럼, 그것은 힘을 갖고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며, 그것의 창조자는 기대하지 못했던 결과물들에 생명을 불어 넣는 등 통제할수 없고 심지어 모순된 모습을 보이기도 하다. 아인슈타인이 E=mc^2을 발견했을 때, 고전 물리학의 토대를 통합한 특수상대성 이론의 정점에서 그는 대량살상무기도, 무진장한 에너지 발전기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물리학의 모든 방정식들 중에서 `가장 마술과도 같은 것'은 아마도 디랙방정식일 것이다. 그것은 실험에 의한 제약이 거의 없이 가장 자유롭게 고안되었지만, 가장 이상하고 깜짝 놀랄만한 결론을 만들어냈다.

 

1928년 초반 전기공학에서 이론물리학으로 전공을 막 바꾼 물리학자 디랙이 훗날 디랙방정식으로 명명된 놀랄만한 방정식을 만들어냈다.  - 252p

 

위의 사진은 1927년 브뤼셀에서 열린  5차 솔베이회의에서 찍은 사진.

폴 디랙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인슈타인의 뒷줄에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 참석한 29명의 과학들 중 17명이 노벨상을 수상하였고, 퀴리부인은 두 부문에서 노벨상을 받았다. 과학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사진을 보고 흥분했을텐데. 세계를 뒤 흔든 사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폴 디랙은 처음 들어본 물리학자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오후에 갑자기 하이젠베르그가 쓴 <부분과 전체>에서 폴 디랙과의 일화가 생각났다. 분명 일화의 주인공이 폴 디랙이고 맞는다면, 디랙 방정식의 주인공일 것이라고 생각되어 내가 기억하고 있는 부분을 찾아보았는데, 맞았다. 종교에 대한 나의 생각과 너무나 흡사한 종교관을 가지고 있어 기억했던 일화였던 것이다.

 

하이델베르그는 저 솔베이 회의 때 브뤼셀의 호텔에서 동료들과 종교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25살의 폴 디랙이 끼어 들어

 

 

"나는 도대체 이 자리에서 왜 종교에 관해서 논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면서 반론을 폈다.

 

"만약 사람들이 정직하다면 - 특히 자연과학자들은 그래야하지만 - 종교에서는 그야말로 아무런 정당성도 없는 터무니 없는 거짓 주장만을 외치고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신'이라는 개념은 도대체가 인간의 환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보다도 휠씬 더 자연의 위력에 눌려 살던 원시 민족들이 자연의 위력에 대한 공포에서 그 힘을 의인화해서 신성의 개념에 이르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지금고 같이 자연의 연관성을 통찰하고 있는 우리 세계에서는 그런 표상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전능의 하나님아른 존재의 가정이 우리를 어떻게 해서든지 계속 도울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가정이 어째서, 예를 들어 하나님이 이 세사에 불행과 불의를, 부자들에 의한 가난한 자의 억압을, 그리고 그가 막을 수 있는 다른 모든 무서운 일들을 어찌하여 허락하였느냐 하는 따위의 무의미한 문제 설정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시대에서 아직도 종교가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우리를 납득 시킬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있어서라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즉 민중을 달래려는 욕망이 배후에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썽이 없는 사람은, 불안하고 불만에 차 있는 사람들보다 다스리기 쉬울 것이다. 이들을 쉽게 이용할 수도 있고, 착취하기도 쉽다. 민중을 행복한 소망의 꿈으로 부풀게 해 놓고 그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부정을 기만하기 위하여 민중에게 던지는 일종의 아편인 것이다. 그러니깐 커다란 정치적 권력단체인 두 단체, 즉 국가와 교회의 동맹도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비하신 하느님은 지상에서가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불의에 반항하지 않고 침착하고 참을성 있게 의무를 다하는 사람에게 크게 보답하신다는 환상을 이 두 단체는 공통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까닭에 이 하나님을 인간의 환상의 산물에 지난지 않는다고 정직하게 말하면그것은 죽음에 해당하는 가장 흉악한 대죄로 여겨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36p

 

에피소드의 끝은 파울리가 "예,예 우리들의 친구 디렉은 하나의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종교의 주제는 "하나님은 없다"는 것입니다. 디렉은 바로 종교의 예언자입니다"라고 말해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고 또한 디렉도 웃으면서 그 날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후에 그는 "신은 매우 높은 차원의 수학자이고 신은 이 우주를 만드는 데 높은 수준의 고급 수학을 썼을 것"(p34)이라는 말때문에 디렉이 신의 품으로 귀화한 것처럼 말하기도 하지만, 정확한 자료를 찾아 보지 않는 이상 그가 유신론자가 되었다고 하기엔 좀처럼 신빙성이 없다. 마치 다윈이 죽음 직전 신을 찾았다는 가정부의 말 한마디로 그가 신적 존재를 인정한 것처럼 유신론자들에게 전해내려오는 오해처럼 말이다.

개인적인 생각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폴 디랙이 신따윈 찾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가장 큰 두려움인 죽음앞에서라도 말이다.

 

폴 디랙은 슈뢰딩거와 함께 1933년 원자 이론의 새로운 형식의 이론의 발견으로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어린시절은 프랑스인 아버지의 학대로 매우 불행했는데, 큰 형의 자살 이후 아버지와의 관계를 완전 끊냈다고 전해진다. 노벨상 수상식에도 아버지는 초청하지 않고 어머니만 초청할 정도로. 하지만, 그가 이론 물리학자 유진 위그너의 동생인 마르지트 위그너와 결혼해 낳은 자녀들에게는 좋은 아버지는 아니였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회고록에 "역사가 반복된다는 말은 그의 가족에게 딱 들어 맞았다. 디렉은 횡포한 아빠는 아니었지만 자녀들과 거리를 두었다. 이런저런 면에서 그것은 낡은 빅토리아 시대 같은 결혼생활이었다"라고 썼다고 하니 말이다.

 

20세기초반은 물리학이 막 꽃을 피우고 절정을 이루었던 시대라, 이 시대의 물리학자들을 들춰본다는 것에 어떨 때는 경외감이 든다. 또한 그들의 천재성을 즐긴다고 해야 하나. 남들이 풀지 못해 끙끙거리는 문제들을 거침없이 해결하는 그들의 천재적인 에피소들을 읽을 때마다 감탄과 즐거움의 감정이 동시에 생겨난다. 물리학자들의 책을 읽을 때마다 좀 더 체계적인 나만의 과학사를 정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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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계기로 마츠모토 세이초의 작품을 읽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일본 미스터리물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일본 추리 소설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해서 어떤 작가길래 그래?, 하는 호기심에 읽었을 것이다.

 

2006년께였나. 그 당시에는  세이초의 작품을 읽을 수 있었던 유일한 작품이 바로 저 <점과 선>뿐이었다. 아니 한 작품 더 있었나.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여하튼 저 작품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오래된 작품(50년대 작?)인데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세 편의 단편이 실려 있었고, 완벽한 트릭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눈치 챌 수 있는 허점 또한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세 편의 단편만 읽고 세이초는 잊혀졌다. 덜도 말고 더도 말고 한 두편의 작품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지난 날의 작가일 뿐이었던 것

 

이다.  그러다가 북스피어에서 세 권의 마쓰모토 세이초의 걸작 단편집을 냈다. 세이초의 장녀라고 알려진 미야베 미유키(갸악~)가 주도적으로 관여했다고 해서 묻지마 식으로 사서 읽었다.

 

단편 <점과 선>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 전에 읽던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점과 선>이나 <제로의 촛점>보다 사회적, 정치적인 세이초의 입장을 명확하게 보았다고 해야하나. 

 

사건에만 촛점을 맞춘 <점과 선>의 단편에서보다 북스피어에서 낸 단편집은 사회적 비리와 병폐 그리고 인간의 범죄적 추악성을 예리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좀 더 색다른 세이초의 발견이었다. 그의 많은 작품을 접할 수 없었기에 트릭의 작가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 책을 읽고 나선,  세이초에게 뭔가 얻을 수 있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작품은 심리 묘사가 뛰어 나거나 감성적이지 않다. 전체적으로 건조해서, 이야기의 전개와 캐릭터의 행동에 중점을 둔다. 작중 인물의 심리 묘사가 없기에 이야기의 장면마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지루하지 않다는 말). 독자에게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고, 캐릭터들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에 온통 신경을 쓰게 만든다. 그런 글쓰기는 사건과 인물에 집중할 수 있게 해서 읽는 속력을 부여한다는 것을 알았다.

 

작가마다 각 자의 개성이 있는데, 나는 세이초의 장점은 뛰어나지 않는 심리묘사에 있다고 본다. 어쩡쩡한 캐릭터의 심리 묘사는 소설을 그것도 미스터리를 감성적으로 이끌 수 있다. 감성이 풍부한 10대을 

 

위한 소설이 아닌 이상 감성은 소설에서 불필요한 재료라고 생각하는 사람인지라. 세이초의 르포스타일의 건조한 이야기 전개에 상당한 흥미를 가지고 읽었다. 

 

그 전에 난 세이초의 이력에 대해 잘 알지 못했는데(도대체 그에 대해 뭘 읽었는지 모르겠다는), 물론 북스피어에서 낸 컬렉션집에서 그의 논픽션을 읽었고 그게 일본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가지고 왔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그가 반 우익의 노골적인 정부비판자라는 사실을 인지 하지 못했다.

 

이 책 책 날개에 이런 소개글이 있다. 세이초는 평생 규범을 넣어선 작가였고, 전쟁과 조직과 권력에 반대한 사람이었다. 그로 인해 문단과 학계에서는 한번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1976년부터 실시한 독서 여론조사(마이니치 신문 주최)에서 10년동안 `좋아하는 작가' 1위로 선정 되면서 명실상부하게 국민 작가의 지위을 얻었지만, 관에서 받은 훈장은 평생 동안 단 하나도 없었다.

 

<짐승의 길>을 읽고 저 문장을 보면, 1억부 판매에도 불구하고 관에서 단 하나의 훈장을 받지 못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작품 성향으로 미루어 볼 때, 세이초는 우익에서 볼 때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우익과 일본 정부가 어떻게 연대를 하고 맺고 있는지, 일본의 권력들이 우익앞에서 어떤 식으로 꼬리를 내리는지를 불쾌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통속적으로 일본 정치를 묘사한, 세이초를 읽으면 일본 권력의 우스꽝스러움이 보인다. 그리고 통렬히 비판한다. 일본 권력은 제대로된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고 알 수 없는 실체에 의해 쥐락펴락 한다는 것이다. 후쿠시마의 원자력 사고 후 일본 정부가 보인 대응 능력만 봐서도, 일본 권력이 얼마나 무능력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이초가 이 소설을 통해 일본 우익과 정부의 실체를 드러낸 것처럼, 아마 지금 현재도 일본 우익과 정부는 쌍쌍 연합으로 세이초가 묘사한 60년대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세이초는 지금도 통하는 작가이고 읽을 건덕지는 많은 작가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문제는 내가 세이초를 수집해야 하는 것이냐에 있다. 종이책 부담스럽다. 정말 부담스럽다. 이사갈 때마다 이고지고 해야하는 책들이 이젠 뿌듯함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짐짝으로 느껴지기에. 게다가 과연 일본 국민 작가를 내가 굳이 수집해서 읽어야하는 의문도 자꾸 드는 것도 사실이고(너무 옹졸한 생각인가!)

 

 

 

 

저 두꺼운 두께의 책들을 보고 있자니, 정말 내가 세이초를 모아야할까,하는 고민은 계속 된다. 모비딕에서 나온 의 초판 증정은 세이초파일이고 북스피어에서 나온 초판 증정본은 <르찌라시>인데, 개인적으로 북스피어 좋아하지만, 증정본 형태는 모비딕이 휠씬 낫다. 일단 책으로 나와 세이초의 약력부터 세이초 기념관에 가서 인터뷰한 내용까지 일목요연해서, 찌라시처럼 쫘악 펼치지 않아서 읽기 편하다. 인터뷰 읽다가 세이초하고 미야베 미유키가 함께 찍은 사진을 세이초 기념관 관장님이 보여주셨던데...그 사진 좀 올려주시지. 아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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