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알라딘 마실뿐만 아니라 북스피어 홈피 마실도 안 다니다 보니, 미야베 미유키의 신간이 나왔다는 것을 그제 저녁 알라딘서재 화제의 신간을 흝어보다 알았다. 보자마자 주문하고 어제 저녁에 책 받고, 오늘 하루 청소하다, 애들 밥 차려주고 설거지 하다, 빨래 널고 개다 하면서 짬짬히 다 읽었다.
5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아주 재밌어 죽겠다는 아니였지만, 피비리내나는 사건의 추악한 본질보다 범죄적 사회와 인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따스해서 기분좋게 후다닥 페이지가 술술 넘어갔다만,
5편의 단편들 잘 짜여진 미스터리 단편가운데, 개인적으로 마지막 단편<성흔>은 읽는데 심적으로 걸리는 것이 많았다. 이런 저런 잡다한 생각때문에. 어제 오늘 인터넷뉴스 메인화면에 뜬 사건사고중 부모에게 맞고 자다가 숨진 8살난 아이의 사건과 <성흔>의 시바노 가즈미와 겹쳐졌기 때문에 읽다가 책을 내려놓고 이런저런 생각, 심지어 낙태가 과연 비난 받을 만한 행동인가?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평소에도 부모가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해 주눅이 들어있었다는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와 숙제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해 죽음으로 몰고 간 그 상황이 어느 정도 머리 속에 그려졌고, 아이는 8년을 사는 동안 부모의 사랑스런 존재가 아닌 화풀이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에 분노와 허탈감이 들었다.
이제 겨우 8살인데, 그 아이가 지금까지 그 부모밑에서 살면서 얼마나 잦은 폭행과 눈치밥을 먹었을까, 8년을 살면서 추위와 배고픔과 폭행 그리고 학대가 그 아이의 삶 전체로 채워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아이에 대한 연민으로 맘이 무거웠다. 그 아이는 하루동안 몇번이나 웃을 일이 있었을까. 부모가 자기를 언제 괴롭힐까 공포속에 살았을텐데. 차라리 그렇게 학대할 봐엔 낳지나 말지 이 험한 세상 그 어린것이 얼마나 잘 못 했다고 그 아일 그렇게 모질게 대했을까.... 한 생명을 끝까지 책임져 주지 못할 봐엔 차라리 낳지나 말지, 왜 애는 낳아가지고 한 생명을 끝까지 고통스럽게 살다 보냈을까하는. 그리고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그런 고통속에서 살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고 나는 그 아이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해 줄게 없는 무능력자라는 자괴감같은 감정에 휩쓸이며 마음을 다잡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간만에 알라딘에 와서 이런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친부와 계모를 원망하며, 아이를 저 지경에 놔둘 봐엔 왜 애시당초 낙태를 하지 않았을까. 생명존중이란 거창하고 숭고한 마음이 그 땐 들어 낙태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시기를 놓친 것일까....낳고 보면 어떻게 되겠지란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낳은 것일까.
미혼 시절, 나는 낙태란 있을 수 없는 반인륜적이고 범죄적인 카테고리에 넣었었다. 힘든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낙태란 살인이다라는 종교적 믿음을 그대로 받아들였었던 것이다. 낙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라는 명제를 다시 보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닉하게도 애를 낳고 애를 키우면서부터다. 내 아이를 키우면서 다른 아이가 보이기 시작했고, 여러 유형의 부모가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고 방치되는 모습(녹색 어머니회 하면서 추운 겨울 등교길에 얇은 점퍼 하나 입혀 벌벌 떨면서 등교하는 아이을 지켜보면서)을 보면서, 한 때나마 강건하게 지켰던 내 신념의 끈이 끊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난 낙태찬성론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낙태를 찬성하는 나에게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살인동조자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살인동조자란 말이 불쾌감을 유발하긴 하지만 나는 여전히 주변의 힘들게 사는 아이들을 보면서 낙태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몇 년전에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절대적인 선,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양비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그의 정의론을 읽고 뭐 이따위 정의가 있을 수 있지? 세상 참 자기식대로 합리화 쩌네하면서 이것도 정의론이라고 코웃음을 친 적이 있었는데(그래서 중고샵에 팔어먹은), 요즘 들어 그의 정의론에 입각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아, 센델의 말하고 싶은 정의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속으로 되내이며 뒤늦게 깨닫고 있다. 센델의 정의론에 빗대어 낙태를 말하자면,
우리 공동체에선 낙태 반대론자와 낙태 찬성론자가 있다. 두 입장의 차이가 너무 커서 사실 중도적 입장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아마 국가의 적극적인 복지 시스템이 존재한다면, 낙태찬성론자들의 입장은 다소 누그러질 것이다. 센델 정의론의 원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기본적으로 생명의 씨앗은 소중한 것이므로 인위적 낙태란 있을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권리가 있고 이 땅에서 부대끼며 살 권리가 있는 것이다. 수정된 이상 무조건 그게 초기 세포분열이라 할지라도 건드려서는 안되는 소중한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 생명이 미래에 부모에게 학대받고 온갖 고통을 다 당할지라도. 수정이야말로 인권의 제일 큰 가치 태어날 권리의 시작 단계인 것이다.
반면, 센델식 정의론에선 절대적인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의 정의론이 여러 사람의 이해관계에 얽혀 가변적이고 플레시블하다는 말은 아니다. 이제야 나는 그의 정의론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는데, 낙태찬성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이가 태어나는 권리가 가장 기초적인 인권인것 만큼 아이가 성장하면서 부모로부터 사랑받고 행복해 질 권리 또한 가지고 있다고 보는, 정의론인 것이다. 부모가 아기를 맡아 키울 자격이 되지 않는다면, 국가의 복지가 한 아이를 끝까지 책임져 주지 못할 것이라면, 아이에게 미래의 고통을 안겨 주느니 세포일 때 낙태는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낙태반대론자들의 사후피임약까지 반대하는 것은 솔직히 꼴통스러워 보인다).
그 아이의 미래가 어떻게 되든 무조건 낳아 길러야한다는 생명 기본권과 아이는 부모로부터 보호받고 사랑받아야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권리, 그 어느 인권이 우선적인가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몫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낙태찬성론자들이 살인동조자란 비난 받아야할 이유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준비되지 않는 부모로부터 아이에게 닥쳐 올 불행을 최소 줄여보자는 의도니깐. 낙태찬성론자들이 낙태를 찬성하는다는 이유만으로 냉혈한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세상과 부딪혀보고 나니, 세상이 이론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약자인 아이가 저항 한번 못하고 부모의 학대와 방치와 같은 삶의 고통속에서 살면서 자존감 파괴와 인성 파괴 그리고 밑바닥 인생에서 쓰디 쓴 인생의 맛을 다 볼 봐엔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보는 것이다. 누군 좋은 부모 만나 행복하게 사는데, 누군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화풀이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면 세상 참 불공평한 거 아닌가. 아이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지도 못하는데. 인생은 복불복?
아이의 행복추구권을 우선시하고 부모가 아이를 책임지지 못할 봐엔 과감한 결론을 내려야한다고 보는 입장이지만,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부모가 책임져 주지 않는 아이들을, 지켜낼 수 있는 시스템이 확고해지면 나같은 낙태찬성론자들은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사라져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과연 국가가 아이들을 20살까지 지켜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국가의 복지가 아이들을 위해 완벽하게 갖춰진다 하더라도, 사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부모와 자식간의 유대감정을 대신할 수 있을런가 모르겠지만.
미야베 미유키의 <성흔>에서 불만스러웠던 것이, 학대당하는 아이들이 간절히 소망하는 검은 메시아 대신 국가 시스템이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없었던 것인지. 가즈미가 선택한 불행한 결말이 모호하지만(자세히는 쓰지 못하겠다. 읽을 분들을 위해서), 학대당하는 아이들에 대한 작가의 절망을 글에서 보았다면 나의 오독일까. 그녀의 따스한 시선이 느껴지기 보다 힘겨움이 느껴졌던 단편이었다. 읽는 나도 부모에게 맞아 죽은 8살 그 아이에 대한 가여움으로 만감이 교차해서 감정적으로 힘들었던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