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1년 제1회 솔베이 학술회의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에 관한 논문을 발간한 지 여섯달이 채 되지 않은 10월에 30명의 양자물리학자들이 브뤼셀이 모였다. 물리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회의로 역사에 남게 될 한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 역사적인 날들 가운데 몇 분이 필름에 담겼다. 낸시 그린스펀은 보른의 사진사로서 그 떨리는 흑백 영상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여기 장식된 창살이 달린 문에서 막스 보른이 나오고 있다. 닐스 보어는 말쑥한 에어빈 슈뢰딩거와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활기차고 자신 있게 웃고 있다. 파울 에렌페스트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름도 모르는 사진 기자에세 감사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그리고 어린 티가 나는 루이 드 브로이는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이것이 바로 1927년 브뤼셀에서 열린 솔베이 회의다. 처음 며칠동안은 결정론자나 비결정론자들 가릴 것 없이 모두들 웃고 있었다."

1927년 5회 솔베이학술회의(위의 글은 1927년 솔베이 회담에 참석한 물리학자들을 찍은 작가의 회고)
화면 위의 사진은 우리집 책장의 한 풍경이다. 과학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깨달은, 아인슈타인의 천재적인 발상에 대한 존경심으로 이 책에 수록된 사진을 찢어 액자에 끼어놓은 사진들이다. 워낙 유명한 사진이라 인터넷에선 쉽게 볼 수 있는 사진이지만, 과학책에는 사진을 집어 넣으면 책값이 비싸지므로, 과학책속 실물로는 보기 힘든 사진들이다.
평소 나는 저 사진을 가지고 싶었다. 크게 확대된 사진을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두고 싶었는데, 저 사진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라... 외국의 포스터사이트까지 다 들어가봤지만, 없었다.
그러다가 까치사에서 나온 <양자혁명>책 속에 이 사진들이 있어, 이게 왠 횡재냐 싶어 작은 사진이지만, (워낙 까치사에서 센스있게도 좋은 종이로 찍어 삽입해줘서) 그래~ 이거다! 싶어, 책 산 며칠 후 액자 사서 끼어 놓은 사진들이다.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이미지만 올릴려했는데, 자랑도 할겸해서....함께 올려봤다.
참고로, 벨기에의 화학회사 설립자인 솔베이가 물리학 발전을 위해 만들어진 솔베이 회담은 1911년 10월에 처음 개최된 이후, 4년에 한번 10월에 개최되고 있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물리학계에선 아주 유명한 학술회의이다.
솔베이 회담중에서 가장 유명한 회담이 1927년 양자역학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모인 저 회담인데, 워낙 유명한 물리학자들이 모인 자리라 오늘날 가장 전설적인 회담으로 기록되고 있다.
첫번째 사진보면 알겠지만, 저 사진도 두번째 사진 못지 않은 유명한 물리학자들의 토론장이었다. 얼핏보면, 천재과학자들의 토론사진 가운데 한장이구나 하고 지나칠 수 있는 사진이다.
그리고 나는 사실 당대의 천재과학자들을 찍은 사진이구나하고 넘어갔다. 그러다 사진중에 저 시대의 분위기상 도저히 불가능한 한장면이 찍혔다는 것을, 나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고 난후에 깨달았는데, 그건 바로 마리 퀴리의 모습들이었다.
버지니아가 저 책을 쓴 1920년대에도 여자는 대학을 가기 힘들고 여자는 도서관을 들어갈 수 없고 심지어 여자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었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솔베이 회담에 당당히 머리를 한 손에 짚고 무엇가 열중해 하는 모습, 그리고 두번째 사진에서는 나이가 들었지만 당당히 남자물리학자들하고 맨 앞줄에서 사진을 찍었던 마리 퀴리의 위대한 모습을 말이다.
우리는 일상적인 지식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이나 마리 퀴리같은 과학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 과학자들에 대해, 관습적 지식으로 저들 과학자들이 위대하다고 떠들어대니깐 위대하구나 싶은 거지, 사실 왜, 무엇때문에 아인슈타인이나 마리 퀴리가 위대한 줄 모르고 살아간다. 아마 나도 과학관련책을 읽지 않았다면, 그냥 아항,관습적으로 위대한 과학자들이구나 ! 하고 살아갔을 것이다. 관습적으로 사물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저런 위대함이 하찮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아보니 그렇다. 위대함조차 일상에 쫒겨 하찮아지고 평범해지는 것이다.
마리 퀴리같은 경우는 남편인 피에르 퀴리가 마리 퀴리의 과학적 열정과 재능을 알아보고, 동반 연구한 것이 플래티늄이나 라듐의 발견으로 이어졌고(저 물질 발견은 마리 퀴리임), 그 연구가 워낙 중요하다보니, 피에르 퀴리가 요절했어도, 업계나 학계에서 마리 퀴리를 내 칠 수 없었던 경우로 보여진다. 워낙 연구성과가 과학계나 과학기술계에 미치는 영향이 커서, 마리 퀴리의 업적이나 위상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쫓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분량이 짧지만 마리 퀴리가 어떻게 피에르 퀴리를 만나 과학자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되었는지를 서술한 책이다. 책분량은 짧아도 실험에 관한 보고가 많아, 솔직히 연구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더라. 단지 이 책을 읽으면서, 마리 퀴리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핵심에만 몰두한다는 것. 피에르 퀴리의 학문적 개방성과 관대함을 묘사함에 있어서, 다른 쓰잘데기 없는 설명은 생략하고 과학적 실험같은 핵심만 서술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피에르 퀴리의 과학적 업적도 마리 퀴리 못지 않게 상당하다는 것이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만약 피에르 퀴리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마리 퀴리의 독보적인 여성 과학자로서의 방사능물질, 플래튬과 라듐의 과학자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하고 말이다. 피에르 퀴리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마리 퀴리의 과학적 성과를 빼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의 초창기 공동업적이 지금 현대과학사에서는 주로 마리 퀴리의 업적으로 기록되서 하는 말이다. 마리 퀴리에 대한 공정한 역사적 평가인가?
이런 식의 의문과 논리는 사실 너무 헛되고 터무니 없는 망상이다. 왜냐하면 피에르 퀴리의 죽음 후, 마리 퀴리의 연구는 계속되었고, 마리 퀴리가 물질을 발견했다는데 과학사적 이견은 없다. 게다가 그 물질의 발견이 산업계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그녀의 여성과학자로서의 입지는 굳건하다.
글을 공론화할 때는 적어도 역사적인 사실과 증거를 찾아보고 써야 한다. 나 같이 마리 퀴리의 여성과학자로의 위상을 피에르 퀴리와 연결하여 추측과 망상으로 마리 퀴리를 의심하면 그건 한 개인의 추측으로 치부되어,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넘어가면 된다. 반면에 글이 공식화하기 위해 책을 출판할 때는 정확한 자료에 근거에 써야하지 과학사적으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지, 뭐뭐 했다더라라고 쓰면 그건 잘못된 정보의 전달이고 추측으론 인한 오류가 끝없이 작동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