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
루 버니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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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속도도 빠르고 사건도 흥미롭게 풀어나가는데, 아쉬운 건 두 화자(와이엇과 줄리애나)의 접점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 80년대 두 개의 사건이 해결되면서 하나로 이어지는 줄 알었더니 전혀 아니다. 두 건의 사건이 독립되어 각각 해결될 봐엔 뭐하러 한 틀에 묶어 놓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얼마나 연관성이 없냐하면, 와이엇의 사건과 줄리애나의 사건중 하나를 빼고 읽어도 사건을 풀어나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와이엇의 사건을 빼던, 쥴리애나의 사건을 빼던 독립된 두 개의 사건이 단지 사건이 일어난 시기와 지리적으로 같다라는 의미 하나만으로 묶여 있을 뿐이다.

각각 중편 정도급의 사건을 장편으로 묶어 놓은 느낌. 차라리 각각의 사건을 중편으로 만들고 사건 해결의 트랩을 곳곳에 정교하게 설치하지, 맨 마지막에 가서 하나의 단서로 단번에 사건을 해결해 버린다.

작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으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재주는 막힘이 없다. 생각해 보니…음… 작가가 욕심이 많긴 하다, 사건이 세개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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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일가 - 교토 로쿠요샤, 3대를 이어 사랑받는 카페
가바야마 사토루 지음, 임윤정 옮김 / 앨리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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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의 역사

평소 커피를 좋아해 하루 두세잔씩 마셨지만, 나이가 드니 그 좋아하던 커피도 하루에 한잔으로 줄였다. 위가 받아 들여지지 않으니 마시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상황.

그런 아쉬움탓인가, 커피 일가라는 책 타이틀이 눈에 확 들어왔다. 커피에 관한 썰로 기대했는데, 그러니깐 찻집을 하면서 겪은 좋은 원두 고르는 법, 원두 볶는 법, 원두을 갈아 내리는 법, 손님에게 커피를 대접하는 과정 같은 이야기인 줄 알었는데, 전혀 아니다.

교토에 위치한 커피집, 로큐요샤(의미는 여섯 여자) 커피집의 역사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 삼대가 운영하는 오랜 역사를 가진, 평범한 소시민들의 역사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도가 너무 좋았다. 우리 세계는 위대한 인물만 들여다 보고 해석했는데, 우리가 같이 살고 있는 우리 주변의 소시민의 역사를 이 작가는 일본의 에도 시대 상점문화에서 볼 수 있는 자식을 다른 상점 사환으로 보내는 기록에서부터 일본의 격동의 현대적 역사와 그 역사와 부딪히는 개인,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유속의 시대의 흐름에서 커피점이 어떻게 변신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한 일가를 통해 잘 보여 주고 있다.

역사책에서 볼 수 없는, 딱 일본 소시민의 백년 역사일 수 있다. 이 커피 일가는 교토에서 소시민인 자신들만의 맛과 역사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박찬일쉐프가 말하는 노포, 맛의 역사가 백년이 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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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자기 고백적으로 흘러 가장 선호하지 않은 시점이 1인칭이지만 성장소설을 읽고 싶어 선택한 책인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1인칭으로 전자책 500페이지 가량을 어떻게 쓸 수 있지, 시점이 워낙 제한 되서 이야기를 장악하지 못할텐데, 혹시나 했던 말 무한반복인가 의심도 했었다. 하지만 기우일뿐, 이야기의 속도감과 흥미가 유투브를 이겼다. 작가의 이야기 솜씨가 보통 아니다.

사건의 개요는, 주인공이 흠모하는 이웃집 소녀 린다가 강간을 당한 후의 그녀와 관련된 주인공의 성장담과 루이지애나 배턴루지 이웃들의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커다란 줄기는 용의자를 찾는 것이지만, 줄기의 여러 가닥은 사춘기 소년의 고민, 불안, 아버지의 부재, 따스함, 의심, 어둠등,

한 소년이 제대로 된 성인으로 성장할 있었던 요소들이 잘 뻗어 있었다.

성장소설은 천진난만했던 어린 시절에서 어른의 세계(사회)혹은 어른들의 갈등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 아무 걱정 없이 십대를 보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그런 가정이 몇 프로나 될까?

아마 우리 대부분의 십대 시절은 부모님 싸움을 바라보며 무력감으로 지켜보고 힘들어하지 않었을까! 그 안에서 나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애쓰면서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십대의 인생을 지켜줄 수 있는 버팀목을 만나는 건 축복이다.

The way, way back이라는 성장영화에서 새아빠와 갈등하고 있던 소년은 오웬이라는 어른을 만나 위기의 순간을 버틸 수 있었고, 오웬이 그 소년을 위해 한 행동은 단 한가지, 그의 편에 서 주었다는 것이다. 그 와의 추억이 그를 반사회적 성인이 아닌 오웬같은 아픈 청춘을 위로할 수 있는 성인으로 자라날 것이다.

십대의 혼돈을 지키는 것이 꼭 사람일 필요는 없다. 버팀목은 음악일 수도, 상상의 친구일수도, 몽상일수도, 운동일 수도, 책일 수도 있다. 앨리스처럼 다른 세계로 빠져들어 가 은신하고 기대며 정체성을 찾을 때, 우리는 좀 더 제대로 된 성인의 문턱으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

마이 선샤인 어웨이,는 주인공 소년이 자신의 상처, 린다를 위해 뭔가를 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굴욕적인 결과를 얻기를 했지만, 자신의 정체성이 뭔지를 깨닫고 이십대를 맞이한다.

소설은 주인공의 삼십년을 조명하면서, 해피 엔딩으로 끝나며 미국의 80년대와 90년대 남부의 조용하고 목가적인 중산층의 시대 배경을 중심으로, 이십대 초반에 보았던 딱 케빈은 7살,12살 그 분위기라서 낯설지 않었고 작가의 시점이 또한 따스하면서 감정적이어서 부담감 없이 읽었다.


덧 : 어제는 이 책의 재미에 빠져 즐겨보던 정치유튜브조차 못 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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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신작이 예약판매중인데, 제목이 흥미롭다. 일인칭 단수, 개인적으로 소설에서 가장 싫어하는 시점이 일인칭 시점인데,

일단 나는, 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사건의 전체적이고 입체적인 흐름을 알 수 없고 이상하게 자기 고백적(혹은 독백적 혹은 내면적 혹은 심리적)이고 감정적으로 처지는 느낌이 나서, 일인칭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믿고 거른다.

그래서 내가 극혐하는 시점인 일인칭 단수,라는 제목을 본 순간, 어 뭐지??? 왜 일인칭이야? 일인칭 시점 캐릭터로 어떻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려고?? 물론 일인칭 시점을 다루는 그만의 방식이 있겠지만, 이야기를 다루는 솜씨가 만만찮은 하루키가 아니 이야기로 할 말이 많은 작가가 일인칭 시점은 소설 캐릭터들의 행동반경이 넓지 않아, 운신의 폭이 좁을텐데, 다 담아낼 수 있을까??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것일까?

작가들이 글을 쓸 때 선호하는 시점은 뭘까? 모든 이야기를 풀고 싶을 때 역시 작가 시점이 제일 좋지 않을까? 일인칭 시점을 선택할 때는 작가들이 한번쯤은 고심해 보지 않을까? 그리고 독자도 읽고 나서 아, 이건 작가 시점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하면서 안타까운 작품이 있을 수 있지 않으려나.

내 독서 경험상으로, 상반기에 읽은 GV 빌런 고태경,이 딱 그런 소설이었다. 재밌게 읽은 일인칭 소설이었지만( 캐릭터도 좋고 이야기 흐름도 좋은 작품이었다),

그런데 읽고 나서, 아 이 작품은 삼인칭 작가 시점이었으면 더 좋은 작품으로 남었을텐데, 작가가 처음 몇 장만이라고 일인칭도 써 보고 삼인칭도 써 보는 테스트를 했더라면, 휠씬 더 좋은 작품으로 남지 않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적어도 나는 고태경의 실체 그리고 그의 본심을 알고 싶었기에, 작가가 일인칭 시점을 내세운 건 두고두고 아쉬웠던 작품이었다.

사실 우리 나라 작가들이 유독 일인칭 소설을 애정애정해서.. 나랑는 잘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은데, 작가들마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 낼지 고심은 하겠지만, 좀 더 3인칭 시점으로 캐릭터나 이야기의 스케일을 키워보는 것, 이게 한국 문학의 과제 아닐런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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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부터 킹의 신간은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다. 창작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은 지, 고희가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이년 간격으로 작품이 나오는 것 같다. 경외롭다.

고도에서,는 읽은지 꽤 된 중편소설이지만 내용이 따스하고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그가 중력에 대해 꽤 자세하게 알고 있구나! 하는 점이었다. 대충 두리뭉실하게 아는 게 아니고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중력을 대상으로 아주 재미난 상상을 했다는 점에서 이 작은 소설에 높은 점수을 주고 싶다.

킹은 나이가 들어도 소설적 상상력은 자유롭구나, 그 나이 되면 상상력도 무뎌지고 인식의 틀은 보수적으로 변하는데, 전혀 그런 티가 나지 않는다.

고도에서,를 읽고 킹이 과학에 대한 관심과 과학 공부를 시간 들여하고 있나, 하고 호기심이 일었는데 그 호기심을 이번에 읽은 인스티튜트의 작가 후기에서 어느 정도 충족이 되었다. 킹이 소설을 쓸 때는 자료 조사를 하는 조사인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조사인이 킹의 의뢰를 받으면 과학이든 의학이든 전반적인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초와 지식 자료를 킹에게 알려주는 것이었다(인스티튜드의 후기 꼭 읽어보사길).

인스티튜트,는 밤새워 읽었을 정도로 재밌긴 했지만 끝으로 갈수록 뭔가 부족하고 아쉬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상상력은 이야기를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가 가당키나 하나? 이거 너무 음모론적인 웃기는 상상력 아닌가 싶었는데,

순간 이야기적 상상력에 제한을 두는 내가 꽉 막힌 인습론자 아닐까 하는 반성이.. 우리 뇌에서 나오는 상상력에 한계를 둘 필요가 뭐 있지, 이야기적 상상력은 무한하고 자유로워서, 과거를 갈 수도, 미래를 갈수도, 심지어 우주 여행까지 가능한데, 왜 나는 작가의 상상력에 장막을 덮는 걸까!!

우리의 뇌(상상력)는 현실의 불가능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 그 상상력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만들현재라는 베이스에서 모든 걸 대입해서 소설적 상상력에 의문을 떠올리기 보다 즐기는 쪽으로, 우리의 뇌적 상상력은 무한한데 괜히 브레이크 걸지 말자,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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