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림을 화투를 놓고도 색을 분별 못하는 나와 같은 급이지 않을까? 그림이나 예술에 조예가 깊어서라기보다는 숲이나 정원이 잘 갖추어진 공공장소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다 보나 발길하게 된 곳이 미술관. 아마 그 애정의 시작은 당림미술관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이영미술관이 앞선 기억일 수 있겠다. 당진의 아미미술관은 미술관산책의 정점을 찍을 수 있겠다. 그야말로 진심 미술관 산책!! 잘 모르는 작품들을 보고 나와 잔디밭을 뛰거나 숲길을 걷거나 하면서 하늘을 보다보면 뭔가 끄적이고 싶어지는데 그럴때는 아무곳이나 주저앉아 낙서라는 것을 해보는 것이다. 그런 여유가 좋아서 시의 중심지보다는 교외의 장소를 기웃거리기를 즐겨한다.
이곳에 와서도 그랬다. DIC museum은 따지고들자면 차라리 시골이라 해도 좋을 곳에 위치해있다. 나리타에서 돌아오는 저녁즈음 이정표를 보고 들어섰다가 짙은 안개에 쌓인 키큰 삼나무의 어둠속에서 섬뜩하기까지 했었다. 그 섬뜩함때문에 맑은 한낮에 DIC museum을 홍보하는 버스에 그려진 작품을 보고 가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싹 사라져버렸었다.
그러던 엊그제, 파란 하늘은 자꾸만 밖으로 나와 놀라고 손짓을 해댔다. 문밖을 나서니 어디로 가야하나? 산책이 제격인 4월 초순의 봄하늘과 봄볕. 근교의 미술관 산책!!
이십여분을 달려 미술관 입구에 들어서니 삼나무 숲길. 인쇄용 잉크를 생산하는 회사에서 설립한 미술관이라는데 분위기는 중세유럽의 느낌이다. 물론 나는 유럽에 가보지도 중세에 살아보지도 못했지만 듣고 봉 풍월에 의하여!!
미술작품관람보다 미술관 산책이 더 우선인 나는 4살 아들과 12살 딸아이를 뛰어놀게 하고픈 욕구가 강하였기에 미술관의 숲길과 정원, 호수에 더 매력을 느꼈다. 쉬이 관내를 둘러보고 나오려 입구에 들어서니 까막귀인 내 귀에 대고 안내언냐가 두 시에 뭔가 있다고 한다. 두시? 1분 남았다. 본전 생각이 진한 아줌마 근성. 1분 뒤 안내방송.
“ 나모나크.. 미나상..로비”
까막귀 엄마와 천방지축 막무가내 4살 아들과 어리버리 12살 딸은 로비로 서둘러 돌아갔다. 블루투스 이어폰까지 나눠주기에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폼을 좀 잡을 수 있어서 혹은 그것도 본전생각에 이어폰까지 주렁주렁 달고 가이드를 쫓아다녔다. 조용한 분위기 탓인지 혹은 무거운 이어폰 탓인지 혹은 정말 미술작품에 대한 관심인지 못알아듣는 외국어임에도 나름 경청하는 척하는 우리셋.
모네의 수련, 샤갈, 카딘스키, 피카소 등등 열심히 설명해주지만 어차피 우리는 까막눈, 까막귀. 내내 우리에겐 까악까악까-
그러다 유독 눈에 띄는 작품 하나, 렘브란트의 1635년 작 챙이 큰 모자를 쓴 남자의 초상. 다 모르겠고!! 살아있는 듯한 표정에 게다가 다각도로 살펴보면 그 표정이 달리 보인다. 유화의 맛이랄까? 혹은 작가의 솜씨덕분이랄까? 가이드 설명이 끝나고 돌아나오면서도 다시 들여다본 사백여년 전의 렘브란트 작품. 덕분에 집에 와서 렘브란트에 대해 검색.
가이드 설명을 들으며 쫓아다니기 시작한지 삼사십분 되었을 때 어린 아이가 드디어 지루해지기 시작했는지 자꾸 내게 안기기 시작했다. 그 때 관람객들은 102호실을 벗어나 미술관 1층의 복도 끝으로 향해나아갔다. 20kg에 육박하는 아이를 안고 복도 끝으로 향하니 창문에는 나무들 사이로 빛이 내리쬐는, 그 어떤 미술관 작품보다도 아름다운 모습. 그 창문으로 보이던 나무들의 종아리. 곤강하고 탱탱한 수백년을 살아왔을 나무등걸. 그 등걸을 타고 줄기마다마다 올해 새롭게 돋아난 어리고 푸른 잎들이 바람과 봄볕에 싱싱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역시 미술관은 산책이 제맛이구나! 싶은 마음에 어서 밖에 나가서 놀아야지 하며 들어간 방은 마크 로스코의 방.
헉!! 절로 탄성이 나왔다.
낮은 조도의 조명을 받으며 시그램의 벽화들이 웅장하게 방안을 채우고 있었다. 몇 초전에 보았던 봄날의 나무의 영상과 강렬하게 대비되어서였을까? 넋을 놓고 아무 생각도 없이 작품을 둘러보았다. 사실 아무생각도 못할 수밖에 없었다. 아는 것이 없으니까. 그럼에도 강렬했다. 조명탓이라고 여겨보기도 했다. 아는게 진짜 없으니까 전시를 저리 오묘하게 해놓았으니 그런거라고 생각해야 했던 것일까?
그 방을 나온 뒤엔 어떤 작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 반이 지나나 아이들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랗다. 남겨놓고 미처 보지 못한 작품이 없나 둘러보다가 며칠뒤 있을 특별전시를 위해 작가와 디렉터들이 모여 벽에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레이저를 이용해 위치를 정확히 잡고 있는 모습이 작품보다 더 인상적이었으니 마크 로스코 작품이 너무 강렬했던 탓이었을까? 미술관을 나오면서 다시한번 들린 마크 로스코의 방, 그리고 그 방 입구의 복도에 있던 창문의 풍경.
딸아이는 건물 자체에 매료당해 “미술관이 우리 집이었으면..”연신 감탄하고 있고 아들아이는 자꾸 작품을 만지려고 해서 경호원들에 강한 제지와 지적을 받고 있음에도 서둘러 빠져 나올 수 없었던 이유는.
그럼에도 결국 미술관을 나와 오후 세 시 반 경의 호수를 바라보면서 뭔가 마음속에 무거운 것이 자꾸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결코 가볍지 않은 그 무엇인가가.
하지만 미술관은 산책이 정점이거늘, 제지와 지적에 억눌려있었을 아이들에게 뛸 수 있고 소리칠 수 있은 자유를 주었다. 연두빛 잎들이 자랑스런운 키 큰 나무들과 봄볕과 봄바람이 있어 더 아름다운 색색의 꽃들이 잘 가꾸어진 숲길과 잔디밭. 르누와르와 모네의 그림같은 정원이구나!! 이 미술관같은 집을 평생 짓지 못하고 살게 될 내 마음은 샤갈과 마크 로스코와 피카소같은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마음일지라도.
그런 하루를 보낸 날은 무엇인가를 끄적여보고 싶어진다. 그러다가 잡다한 말꼬리까지 잡게 된다. 이 미술관은 kawamura memorial DIC museum of art가 정식 명칭이란다. 인쇄용 잉크의 창업자부터 몇몇의 회장들의 전세계 미술 수집. 그리고 특히 유화작품을 상설 전시하고 있었다.고도의 홍보전략이자 예술작품 수집으로 경제적 부의 다양한 표현이랄까? 물론 액면가에는 문화기부라는 주장을 할 수 있겠지만.
마크 로스코의 작품은 대개의 사람들은 나도 그리겠다, 라고 말한만큼 단순해보인단다. 하지만 그 붓터치는 무척이나 어려운 작업이라 하며 어떤 작품은 935억에 경매되기도 했다고 하니 그런 기사를 읽는 내 마음이 시그램의 벽화같달까?
예전에 봤던 Best offer란 영화도 떠오른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그려진 그림들을 수집하기 위해 경매 과정에 속임수를 쓰고 그렇게 수집한 작품들은 오직 혼자만 감상하기 위한 비밀의 방에 전시한다. 현실의 사랑을 믿지 않으며 작품일 때만 그 아름다움에 빠져드는 경매사의 반전 이야기.
내가 마크 로스코의 방에서 헉 소리를 낸 것은 어쩌면 작품자체에 대한 감탄보다 그 전에 듣게 된 그의 어머어머한 작품 가격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비싼 작품을 여기서, 이렇게 예기치 못하게 접하게 되다니! 그것도 이렇게 누추한 차림새로.
미술관 산책은 곁 길로 빠지면 더 즐겁다. 남들이 모르는 길을 걸으면서 나만 아는 즐거움이나 혹은 내가 먼저 이 멋진 산책길을 걸었다는 자부심같은것을 느낄 수 있어서이다. 마침 이 미술관에도 호젓한 오솔길이 있어 체리꽃 꺾어 보겠다는 딸아이에게 눈 딱 감아 뭇인해주고 신나서 앞서 걷는 아들의 발걸음과 웃음소리를 듣는 기분은, 미술관을 빠져나와 숲길을 내달리기 시작하면서 “신난다” 외친 우리 아들 마음처럼 내마음도 신났다.
여기저기 샛길로 곁길로 빠지는 재미. DIC 미술관 관람이 그런 경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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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개인주의자선언
헛헛한 밤, 나를 질책하다가 뭔가 잊기 위해 뒤적여 읽기 시작한 전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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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이 곳을 지나쳐가다 주홍불빛이 따스하게 느껴져 꼭 한번 와봐야지 했던 도미사토시 도서관. 근교 도서관 중에서 한국어 책이 가장 많은 도서관. 누구도 펼쳐본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겉표지를 보니 출간된 지 오래된 책들. 연관성이 도무지 발견되지 않는 이 소설들은 어떻게 이 도서관의 서가에 꽂히게 되었을까? 그 심정을 헤아려보려 최초로 책장을 넘기는 이가 되는것처럼 읽기 위해 세 권을 대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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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사토시 고민가 소바집
현지인 추천으로 갔더니 영업마감으로 돌아서야 했던 곳.
토요일, 일요일 두 시간 반 오픈으로 지난일요일, 도서관에 있다 오후 한시즈음 정신차리고 부랴부랴 달려간 곳. 전통가옥과 구조 그대로 손님을 맞고있었다. 아기띠로 어린 아이를 업은 젊은 여인이 메뉴를 받고 소바를 갖다주기에 전세계 어머니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후루룩 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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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바시 이온몰 츠테야
마침 종일 비내리는 수요일. 3월 21일
무지개를 바라보는 동물들의 마음처럼 팝업북을 들여다보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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