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흐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내게도 공정한 세월. 숱많고 굵은 모발탓을 하며 찰랑이는 가느다란 모발을 부러워하던 젊은 날을 지나 탈모가 심한 것보다 백발성성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며 가까운 노년을 애써 위로하는 나이.

어차피 늙으면 매일같이 탈모하느라 이불과 베개밑에 백발을 흐트러뜨리게 될 터니 더 늙기전에 긴 머리를 해보자며 몇 년째 긴 머리를 유지하지만 매년 여름, 어깨 위에서 부스대는 머리카락으로 폭염과 싸우느라 단발의 유혹과 대면하게 된다. 결국 질끈 묶어 보내는 여름, 머리 감을 때마다 배수구에 한움큼 걸려 드는 머리카락을 청소하는 일도 지겹게 견뎌낸다. 종일 바닥에 떨어진 내 머리카락부터 온 식구의 털털털. 급기야 잘리버리자 마음 먹고 미용실을 찾았다. 언어가 세밀하지 못하니 세련된 미용따위야 애저녁에 욕심 버리고 머리감기에 적당하고 한번에 묶을 수 있으면 그만이려니.

“어떻게 자르려고?”
“커트”(소이현의 단발사진 캡쳐를 보여준다.)
“괜찮겠어?”
“여보, 이 나이쯤이면 연예인들처럼 헤어한다고 연예인이 되어 미용실 나올 수 없다는 걸 알아. 바닥에 떨어지는 내 머리카락 청소 덜하고 싶어 자르려는 것뿐야.”
“역시 돈을 발라야 여자는 달라보인다”는 남자의 설쯤은 한귀로 듣고. 모든 욕구들이 거세된 채 오로지 남은 것이라곤 식욕밖에 없어 짜증이 욕구를 대체할 뿐이라는 바가지같은 변을 남기고 미용실에 들어섰다.
“커트 시타이데스.( 확 잘라 주슈)”
“료구지깡 데키마스.(여섯시에나 가능해요)”
손님은 한명뿐. 남성 미용사 한명. 코디 언니 한명.

“스와떼 마떼(앉아서 기다릴게)”
어차피 더워서 집에 있기도 힘드니 에어컨 빵빵한 여기서 죽치고 앉아 기다려도 되쥬?
하지만 코디언니는 자꾸 료쿠지깡만 외친다.
“좆또(?)마떼”
여보, 쟤 뭐라는겨? 걍 가버릴까? 하는데 문 박차고 나온 언니, 시간될 때 잘라줄게요!
그리하여 잘리는 내 머리카락. 미용실에 아무 계획없이 오기도 처음이지싶다. 바라는 게 없으니 그저 미용사에게 내맡긴다. 그리하여 싹뚝 잘린 내 머리카락들. 자세히 들여다본다.

난 그간 내 머리카락이 지푸라기처럼 느껴졌었다. 곧잘 내가 가진 내것들을 하찮게 여기거나 지겨워하고 불행해했다. 요즘, 난 내가 너무 싫었다. 잘려나간 머리카락들이 지저분할 줄 알았는데 아직, 단단한 머리카락들.
늙을 시간만 남은 이 생, 지금, 나는 내가 지겨워하던 내 자신의 것이었던 일부를 아련히 여기고있다. 고왔던 적이 있을까? 어였뻤던 것이 있을까? 아름다웠던 나는 있었던가? 그런 절정의 순간이나 의미는 없었다하여도 나, 그렇게 쓸모없거나 추하거나 악하지는 않았었지 않나? 그런데도 나는 나를, 왜 귀히 여기지 못했나?

보이는 것들에 자를 들이대서 그러했다. 내 것이라 존엄히 여기지 못해 그랬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했으니 이 세상에서 나를 제일 미워한 사람이 나요, 세상에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한 인간도 결국 나였다. 가장 곱게 여겨야 할 시기의 나를 흘려보내고 절절히 사랑해주었어야할 시절의 나를 지나치고 이제야 나는 거울 앞에 서서 푸석거리고 지푸라기 같다 여기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고서는,낯선 땅에서 나로 인해 그간 외롭고 고독해을 나를 위로하는 눈물을 흘렸다. 타인에게 보일 수 없는 눈물이니 두 눈을 감고 조용히 소리를 삼켰다. 앞으로 나는 나를 연민하리라. 젊고 최상의 상태여서가 아니라서, 그런 시기를 겪어본 적 없는 인간이 그 순간에만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예의와 적정수준의 가치를 순한 마음으로 대하도록.
더 늙어갈테니 그때마다 탄식으로 나를 더 추하게 할 것이 아니다. 앞으로 살 시간보다 지금의 나에게 순응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눈을 뜨니 바닥에 떨어진 나의 것들을 버려둘 수 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간 내가 버린 내 것의 일부였던 것들. 머리카락, 손톱, 큐티클...한 때 나였던 것들에게 고마움. 미안함. 그리고 안녕!
한번뿐이겠지만 내 생애 처음으로, 특별한 마음을 담아 잘린 머리카락들을 모아왔다. 그간 살아오느라 고생했을 나를 애정하는 의미로. 어느 나라인지 물어보던 코디언니, 한국인 참 별나단 생각 했을까? 다 그런게 아니라 마흔앓이일지 모를 내가 유난한거라우. 그 유난덕에 난 내가 좋은모습을, 그리 나쁘지 않은 것들을 가진 사람이라 여기게 됐다우. 앞으로 사는게 지겹단 말대신, 그래도 괜찮단 말을 해야겠단 다짐하게 됐다우. 왜, 당신네들이 잘 쓰는 말 있잖수? 앞으로 노화하는 내 삶도 다이죠부니 오늘 미용실에서 잘린 머리카락 줍는 한국 아줌마도 다이죠부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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