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을 느끼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해의 움직임이다. 휘청 이는 햇살이 길어지고 있다. 여름의 날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얘기겠지.

아직 수술 날짜가 잡히지 않아 대기 중인 나의 걱정의 그림자는 짧아지는 밤의 길이만큼 줄었다. 한 일주일은 걱정의 문 앞에 주저앉아서 지금부터 내가 뭘 해야 하는 거냐고 문고리를 잡고 울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깨우침을 얻었다. 다행이다, 이런 체념과 걱정을 타협할 수 있는 나름의 여유가 있다는 것.



 

어느 날은 시한부의 삶을 사는 환자처럼 남은 날을 정리하기 위해 집을 정리하며 물건을 버렸는데, 이틀 지나서 필요한 물건을 버렸다는 후회로 당분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의 시간을 의미 있게 남겨두자는 목표가 있었지만, 이것도 뭘 그렇게 기록하며 살아야 하나 싶고…….알 수 없는 마음이 바닥에 널려진 책들 위에 앉았다 일어난다. 책, 뭘 또 그렇게 쌓아 놓고 있는 것일까.


 

2년 전 출간한 김숨의 장편과 3년 전의 단편집을 같이 읽고 있다. 김숨의 <철>을 처음 읽고부터 그녀의 책이 좋았다. 차곡차곡 모아 놓은 그녀의 소설책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지만 좀처럼 읽히지 않는다. 재미의 여부와 흡인력의 문제가 아니라 아끼고 싶은 마음이었다. 문득 읽지 않으면 더 이상 읽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생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책들을 다시 읽기로 했다. 그녀가 앞으로도 더 좋은 책들을 많이 써주길. 그래서 앞으로의 날들이 계속 들떠 있기를.



토요일과 일요일 밤, 추앙 커플과 산포시의 3남매의 사랑에 들떠 있다. 대본도 좋지만 연출도 좋다. 그리고 화면 속에 녹아든 OST들이 모두 베스트들이다. 그중 요즘 나를 위로해주고 있는 곽진언의 일종의 고백을 하루에 수십 번을 듣고 있다. 들을 때마다 위로가 되고 있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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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가 웃었다.




나, 이렇게 멀쩡해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손톱 밑의 살 가시를 뜯어낼 때의 아픔이 눈가에 살짝 스쳐지나갔다.




3월 중순부터 몸이 많이 아팠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고 출근의 시작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날부터 퇴사를 생각했다. 직장인의 비애쯤으로 여기기에는 너무 지쳐있어서 여기서 한 발짝 물러 날 것인가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니 바로 4월 중순이 되었다. 그때부터 다시 고통이 시작되었다. 한쪽 가슴이 아파 오자 느꼈다. 내 몸에서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구나. 너무 늦게 찾아간 병원은 아니겠지. 왜 이렇게 나를 모르며 살았니. 너는 너 자신만 생각한다며, 이기적으로 살겠다고 해 놓고서는 너 자신을 왜 안 챙겼니. 홀로 병원 대기실에 앉아 조직 검사 결과를 듣기 전까지 자책하고 책망하고 반성하는 시간이 흐르고 들어도 잘 모르겠는 알파벳 진단명을 듣고 울다가 일어났다. 담당 교수는 나 같은 환자를 많이 봤겠지만 처음 대하는 것처럼 위로해주셨다. 우리나라 의료 훌륭하잖아요. 걱정 말아요. 빨리 발견해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그렇죠. 요즘 암이 뭔 대수라고요...라는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지만 충분히 눈물을 흘리며 인사를 하고 나왔다.




병원을 나와 햇살을 받으며 멍하니 서 있었다. 한 어르신이 자녀의 부축을 받으며 내 앞을 지나가셨다. 한참 울고 나온 잠시의 시간이 사라졌다. 왜, 나에게라는 생각에서 그래도 빨리 알아서 다행이네, 그리고 나는 혼자도 걸을 수도 있고, 자유로운 손도 있고 아직은 많이 생각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데 얼마나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라며 말하는데 앞은 아득하기만 하다.























집에 돌아와서 정혜신의 [죽음이라는 이별 앞에서]를 읽다가 눈앞에서 아른 거리는 희망에 기도를 해 본다. 우리, 멀어지지 말자. 괜찮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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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3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6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 08 치앙마이



대기 좌석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이내 눈물이 줄줄 흘렀다. 옆에서 지켜보시던 한 아주머니가 다가와 다독여 주셨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라는 말이 따뜻한 다독임이 되었다.



“나는 대장도 잘라내고 위도 잘라내고 이제는 가슴에 혹이 있다고 하는데, 안 죽고 잘 살고 있어요. 생각보다 사람 목숨이 질겨요. 안 죽어, 안 죽어. 다 살 수 있어. 괜찮아. 금방 또 고통도 지나갈 거예요.”

고맙습니다. 위로가 되었다고 말하며 앉아 있는데도 쉽게 눈물이 멈춰지지 않았다. 조직 검사를 앞두고 앉은 시간이 무겁게 다가왔다. 10년 전 해 본 조직 검사의 기억은 그동안 받아본 고통의 최고조였는데, 그걸 또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알고 있는 고통을 또 겪어야 하는 잠시의 시간.


그 시간이 지나가면 앞으로 나에게 또 어떤 시간이 다가 올 것일까.



그렇게 마주한 시간은 지난날의 나의 방만한 날들을 반성하며 빠르게 흘러갔다. 마음에 응어리가 많았나, 이런 응어리를 풀어 낼 것을. 어떤 이는 용서를 해줬어야 했는데, 그런 후회들. 나를 몰아치며 검사실에서 나왔다. 조직 검사후 앉아 있는 내 뒤에 계신 그 분을 나는 살짝 안아드렸다. 금방 끝났어요. 빨리 끝나실 거예요.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눈동자뿐이었다. 그 속에서 서로 울며 다독이고 응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힘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가겠지 그렇게. 혼잣말을 하면서 웃기도 하고 오랜만에 하늘도 보았다. 아, 오늘 괜찮은 날이구나...그렇게 생각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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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금요일은 아이들과 독서 수업을 한다. 어쩌다가 모이게 된 그룹이라 처음에는 큰 의미가 없었는데, 일 년 정도 모이니까 아이들끼리의 끈끈한 정도 생기고 서로 챙겨주고 안 오면 궁금해 하고 많이 친해져서 가끔은 내가 없어도 자기들끼리 얘기하고 토론도 한다. 어느 날은 나에게 그냥 뒤에 앉아 있으라고 할 때도 있고 그걸 지켜보는 것이 즐거울 때가 많다. 아이들을 보면서 또래 문화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낀다.



오늘은 지진에 관한 책이었다. 동일본 지진에 관한 얘기를 해주며 그때 많이 늘어난 미니멀 리스트들에 관한 얘기도 해줬다. 극한 미니멀을 실천하고 있는 어느 한 남자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욕실에 잘 접어 놓여 있는 수건이 그 남자에게는 없다. 소창으로 만들어진 수건 한 장이라는 얘기에 아이들이 믿을 수 없다며 소리 지르고 웃었는데, 그때 아이들에게 물건이 없는 삶은 어떤 것인가 생각해 보자고 했다. 지진으로 시작된 미니멀의 삶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어려운 이야기로 전개된 토론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일주일간 하루에 하나씩 물건을 버려야 한다면 어떤 것을 버릴 것인가 생각해보자고 했다. 그 버린다는 행위는 쓰레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기부나 누군가에게 주는 행위라고 얘기해줬더니 아이들의 고민은 더 커졌다. 쓰레기라고 생각하고 처음에 아이들은 음식물 쓰레기까지 써서 다시 버린 다는 행위에 대한 정리를 했다. 10분 동안 고민하는 아이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해 줬다.




나는 첫 번째 추억이 담겨 있었던 사진첩과 졸업 앨범, 상장, 여행지에서 사온 기념품을 버리겠다고 이야기 했더니 아이들이 난리가 났다. 추억을 다 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그러면 안 된다고 한다. 왜 안 되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소중한 시간을 버리는 것이라고 만류 했다. 웃으며 알았다고 얘기 했지만 사실 나는 2년 전 이사를 오면서 앞에 얘기 한 것들을 버리고 왔다. 가끔 초중고 친구들의 사진첩을 모두 버린 것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만 괜찮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나의 행동을 이해 못한다며 절대 버리지 말라고 말리겠다고 한다.



집에 돌아와 아이들을 생각하며 웃음이 난다. 현관 입구부터 들어차 있는 새로 산 운동화들에 한숨도 나온다. 오늘 아이들이 집에 왔다면 이 신발들부터 버렸겠지. 어제 도착한 신간 책들이 식탁에 쌓여져 있는걸 보며 정말로 내가 버려야 할 것들이 어떤 것들인지 적어봐야 겠다. 아이들과 다음 주에 정말로 뭘 버렸는지 다시 한 번 얘기 하자고 했는데, 고민이 된다. 소중한 것은 남겨 놓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고민의 한주가 시작되었다. 고민되는 봄 밤이 싫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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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유산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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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사라지지 않을 것들 [영원한 유산 - 심윤경]



간혹 작가의 몇몇의 작품을 읽다보면 작가의 심성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작가가 쏟아내는 작품들이 내 취향과 맞지 않더라도 출판을 기다리며 읽곤 하지만 몇 년간 쏟아낸 심윤경 작가의 작품들은 앞에 얘기한 것들과 거리가 있었다. 특히 사랑이 달리다 시리즈는 그녀의 작품이 맞는 건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이번 작품도 그랬다면 작가와의 이별을 고할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를 애정 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 기다려온 그녀의 작품 [영원한 유산]은 오래전 그녀의 향기가 났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찍은 사진 한 장의 궁금증으로 시작된 그녀의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 이후 20여년이 흐른 후 이해동이라는 청년은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UN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줄여서 언커크(UNCURK)라 불리는 곳에서 애커넌의 호주 대표의 통역을 맡으며 사기죄로 2년 2개월의 실형을 살고 나온 윤원섭을 만나게 된다. 이름 없는 독립 운동가의 자손인 이해동과 악덕하기로 유명했던 친일파의 자손인 윤원섭의 만남은 이 소설 [영원한 유산]의 내적, 외적 갈등을 모두 담아내고 있다.


 

친일을 하였지만 그것이 훈장 같은 윤원섭이 바라보는 적산가옥 벽수산장을 바라보는 느낌은 부끄러움이나 죄의식이 전혀 없다. 그녀에게 그런 것보다 큰 불만과 치욕은 지방 출신이라는 것에 격분을 더 하는 사람이었다. 그 어떤 독립투사보다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을 욕하는 것에는 그의 친일 행적보다 지방 출신인 주제에 중앙 귀족인 척 행세한 신분 세탁자인 것이 화가 나는 부분이라고 했다. 귀족이 아닌 것이 귀족 흉내를 내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눈에 밟히는 큰 죄가 되었다. 그의 다른 일부분의 행적들은 모두 그 밑으로 사라지는 연기 같은 것이었다.

 

이해동이 윤원섭 일가의 친일 행적을 애커넌에게 말해보았자 그저 지나버린 남의 나라 일뿐이었다. 문득 부질없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 대상이 호주 대표 애커넌이 아니라 독일의 대표였다면, 폴란드의 대표였다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모두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포장으로 끝날 일이었을까.

애커넌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윤원섭의 거만한 모습이 흉하기 그지없다. 2년의 실형을 살고 나온 자의 모습에서는 반성이라는 것은 없고 다시 자신의 것을 찾으러 온 듯 당당함은 벽수산장의 숨은 곳을 알려주는 모습에서 더 여실히 드러난다. 그녀에게는 이완용이 갖은 지방색이란 없다는 듯. 호수만 200여 평의 땅이라 아방궁이라 불렸던 그곳의 모습을 다시 찾은 자신의 영광인 듯 두 눈으로 담고 있을 윤원섭, 그 모습에 불같은 마음이 명치끝까지 타 올랐을 이해동의 얼굴은 또 어떠했을지.


 

“해동은 그 모든 울분과 통증을 넘어 마지막 한마디를 뱉었다. 아름답다.

저택은 아름다웠다. 그것을 소리 내어 말하기가 그렇게 고통스러웠다. 스스로 벼락이라도 때려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말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윤덕영의 썩은 정신과 나라를 팔아먹은 자금으로 만들었는데도, 저택은 아름다웠다.“ P252




저자가 말하는 벽수산장이 너무 궁금해졌다.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었을까. 저자의 소설의 시발점이 되었던 할머니와 찍은 사진 속의 멀찍이 찍혀 있는 그 유럽풍의 저택.




[송석원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47번지 일대를 말한다. 천수경(조선 후기의 위항 시인)이 송석원이라는 집을 짓고 살면서 그를 중심으로 열린 옥계시사 또는 송석원시사가 널리 알려졌다. 송석원시사의 부흥을 계기로 이 일대의 지명은 옥류동 계곡을 말하는 옥계(玉溪) 대신 송석원이라 불리게 되었다.

천수경 사후 송석원의 주인은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 장동 김씨라 불린 신 안동 김씨와 여흥 민씨를 거쳐 1910년경에 윤덕영 (순종의 계후 순정효황후의 숙부이자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형이다.)(이 송석원을 가지게 되었다. 윤덕영은 일제 강점기에 옥인동 땅의 절반 이상을 사들이고, 송석원 터에 프랑스풍 건물인 양관(洋館)이 중심이 된 벽수산장(碧樹山莊)이라는 저택을 지었다. 양관은 한국 전쟁 전후에 한국통일부흥위원단 청사로 쓰이다가 1966년에 불탔고, 1973년에 철거되었다. 해방 이후 옥류동 계곡 주변에는 많은 주택이 들어섰고, 주민들은 여전히 그 일대를 송석원이라 부른다.


벽수산장은 윤덕영이 프랑스에서 본 귀족 별장 설계도로 1931년 자신이 소유한 옥인동 대지에 저택 건설을 착수하여 1935년에 완공이 되었다. 윤덕영은 5년 후 1940년에 사망하였고, 이후 덕수 병원으로 쓰였고 한국 정쟁 중에는 미8군 장교 숙소로 이용되었으며, 1954년 6월부터는 한국통일부흥위원단 (UNCURK, 언커크) 본부가 입주하여 사용하다가 1966년 4월 5일 보수 공사 도중 화재로 전소되었다. 언커크는 화재 직후 외교 연구원 건물로 청사를 옮겼고, 양관은 총무처에서 관리되다가 1973년 6월에 철거되었다.- (부분 나무 위키 발췌)







화려한 양관은 모두 소실된 벽수산장은 서용택 가옥과 박노수 가옥이 부속 건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벽수 산장 정문 기둥 4개중 3개가 남아 있고 옥인동 62번지 소재 건물 동쪽에는 벽수산장의 벽돌담과 아치 흔적이 남아 있다. 역사의 기록이 담겨진 부분은 대부분 소실되어 그 시대를 살아갔던 이들의 기억에만 남아 있고 이제는 그 본래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해동은 저택의 아름다움을 말하기는 것이 괴롭다고 했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지 못하는 상처를 갖고 있는 유산. 그런 유산을 낳지 말았어야 했지만 이미 만들어진 시간의 흔적을 어떻게 지우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불 타 소실된 건물을 바라보았던 해동의 무거운 걸음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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