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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스 - 2010년 퓰리처상 수상작
폴 하딩 지음, 정영목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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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나면 커다란 퀼트 이불을 한 채 지은 기분이 든다. 빠르게 만들어진 이불이 아니다. 한 땀 한 땀이 매우 신중하게 천을 지나가야 삐뚤어지지 않는다. 어울리는 색과 무늬를 골라 천을 잇는 것 또한 신중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조각 천을 이어 이불을 만들 듯 조지라는 한 사람의 기억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인 할아버지까지의 환상을 경험하면서 삼부자의 얘기를 들을 수 있다. 얘기를 다 듣고 나면 아름답게 조각을 이어 놓은 퀼트 이불 한 채가 완성이 되듯 한 가족사의 얘기에 가슴에도 조각이 모아져 아름답게 펼쳐진다.

 

책 띠지에 <팅커스>를 번역한 정영목 번역가가 이런 말을 써 놓았다.

<이왕 책을 펼쳐 “조지 워싱턴 크로스비는 죽기 여드레 전부터 환각에 빠지기 시작했다.”라는 구절과 마주쳤다면, 이제부터는 아예 딴 세상이라 생각하고 신발 끈을 조여맬 것, 아니 신발을 벗어버릴 것>

뭔가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책이구나 싶어 펼치면 당혹스러워 진다. 첫 페이지부터 시작인 것이다. 첫 문장이 조지가 환상에 빠지는 것으로 시작이라니. 당황스럽게 책을 읽어나간다.

 

제목이 <팅커스> 즉 땜장이들에 대한 이야기. 조지 워싱턴 크로스비가 삼십년 동안 시계수리를 했고 그의 아버지도 땜장이였듯 그 역시 시계를 수리하며 살았다. 파킨슨병과 당뇨병, 그리고 암에 걸려 이제 앞으로 살 시간을 손가락으로 세어도 될 만큼의 아주 작은 시간이 있을 뿐인 조지는 신장 기능 부전으로 요산 중독으로 죽기 진전 아버지를 떠올린다.

 

조지는 강인한 어머니가 있었다. 그런 어머니가 지켜야 할 자식이 아닌 아버지가 있었다. 목사였던 아버지가 간질이라는 것을 알려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아버지 옆을 지키는 어머니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와 같다. 자식을, 남편을, 가정을 지켜내는 강인한 여성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조지의 기억을 통해 가장 큰 사건은 아버지의 간질 발작을 보는 것이었고 그것 때문에 조지는 손을 물려 상처를 입었지만 정작 그 상처를 받은 사람은 아버지 자신이었을 것이다. 아들의 손에 상처를 입혔기 보다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치부를 보였다는 것이 가슴 아팠을 것이고 살이 돋아나는 것이 가슴에 구멍이 채워지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결국 조지의 어머니는 하워드를 정신병원에 넣을 생각을 하고 그는 상처 입은 아들을 위해 그리고 그의 가족의 삶을 위해 떠나고 만다. 가족을 위한 자신의 희생을 보여주는 아버지 하워드 때문에 눈물이 났다.

하워드에 대한 조지의 기억을 함께 찾아가는 일이 참 더디다. 얇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랫동안 읽었다. 한 문장을 읽어나가고 다음 문장을 읽고 난 후 다음 문장을 위해 앞 문장을 또 한 번 읽어가는 것은 촘촘한 바느질과 같다. 그 바느질을 하는 조지와 함께 조지가 죽어가는 모습을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 슬퍼야 하는데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작가의 묘사력에 있는 것 같다. 하워드의 간질 발작 부분의 세밀 묘사는 영화의 스틸컷을 옮겨 놓은 듯하다.

조지가 죽기 전 누워 있는 침대며 그가 다른 시간으로 넘어가는 부분에도 치밀한 묘사력에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빨리 읽을 수 가 없었다. 그려내야 했다. 작가 폴 하딩이 표현하는 문장이 머릿속으로 그려지고 조지가 말하는 장면들을 떠 올려야 하고 하워드의 행동을 다음 컷으로 이어지게 그려내야 하는 장인의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에 늦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지와 함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다 보면 문득 나의 삶의 끝에는 어떤 기억들로 가득할까 궁금해졌다. 역시 자신을 둘러 싼 사람들의 추억과 기억들이 무수하게 자라고 있는 저 멀리의 숲을 거닐고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때 또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역시 어떤 작가의 말처럼 삶의 끝에는 혼자만 감당해야 하는 몫이라는 것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조지를 사랑하는 손자들도 조지와 함께 죽음의 건너편을 같이 갈 수 없을 테니까.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들중 단 한권으로 유명해지는 작가가 몇 있었다. 정말 재미있게 읽은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도 작가의 유일무이한 책이다. 폴 하딩 또한 단 한권의 소설로 퓰리처상을 받았으니 이것이 신데렐라 아니겠는가 싶었는데 작가는 자신의 책을 알리기 위해 많은 애를 썼더라. 우리나라는 사인회를 주를 이루고 강연회라고 해도 몇 번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자신의 책을 알리기 위해 소규모 서점이라던지 심지어 가정집에서 부탁을 하면 가서 독서토론을 하는 열의를 보였다는 얘기에 뭐든 쉽게 손에 들어오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열심히 했던 그였기 때문에 그의 수상소식에 자신의 일처럼 기뻐 해 줄 수 있는 것 아닐까.

조지의 삼부자의 얘기보다 사실 작가 폴 하딩의 얘기가 더 극적이다. 두 장의 앨범을 낸 드러머였던 그가 미국과 유럽 각지를 방문하던 중에 책을 읽고 음악의 뜻을 접는 것조차 얼마나 드라마틱한가. 그리고 집필을 하고 소설을 쓰고 책을 내려고 했지만 모든 출판사에게 거절을 당하고, 출판된 책을 홍보하기 위해 가정방문까지 하는 그의 인생은 어쩜 조지보다 더 뜨겁게 움직이는 것 같다.

 

마지막 조지가 떠 올렸던 것. 어머니와 자신을 떠났던 아버지가 찾아왔던 크리스마스의 저녁식사 시간. 그리고 그와 나눴던 얘기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마치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아버지가 먼저 해주고 간 것처럼 다시 떠 올리는 그 말들이 잔잔하게 남는다.

“조지, 그래, 그래, 그러마, 잘 있어라”

참 오랫동안 손에 들고 있었던 책을 놓고도 여전히 조지의 아버지의 말이 조지의 말처럼 들리며 애잔하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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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노니는 집 - 제9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30
이영서 지음, 김동성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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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다보면 간혹 참담함을 느낄 때가 많다.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요즘말로 레알로 반영되기에 자극적이고 현실이라는 땅에 닿은 무게가 버겁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럴때마다 간혹 찾아 읽는 책은 따뜻한 영혼을 간직하고 있는 아동문학들이다. 어린 아이의 눈동자에는 세상의 순수가 다 들어 있다고 하듯 그런 순수를 좀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찾아들어 읽는 책들은 선별되어 읽어보지만 실패한 적이 거의 없다.

 

<책과 노니는 집> 2009년 문학동네 어린이 문학상의 대상에 빛나는 작품이어서 좋았다기보다는 청소년 소설에서 많이 다루는 집단 따돌림, 입양, 자살에 관한 내용이 아닌 역사 소설이라는 집이 특이했고 소재 또한 그 당시에 금기시 되었던 서학, 천주교를 배척할 당시의 상황이었다는 것이 이 책이 여타 소설의 차별이라고 해야겠다.

 

장이 이름이고 성이 문인, 문장이라는 아이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아버지가 책을 필사하여 먹고 살았다는 설명에 딱 맞는 아이의 이름이다. 무엇보다 책 제목이 <책과 노니는 집>아닌가. 그 책속에 얼마나 많은 문장들이 있겠는가. 그래서 주인공의 이름을 듣고 처음에는 작가의 작위적인 설정에서 오는 이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미쳤지만 주인공의 성격과 상황에 딱 맞는 맞춤옷과 같은 이름이다.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은 가진 장이는 당시 금기시 된 천주교와 관련된 천주학쟁이로 오해를 받아 관아에 끌려가 곤장을 맞아 목숨이 끊어질 듯 넘어가는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는 천주학쟁이가 아니었다. 단지 돈벌이로 하고 있는 책방에서 서학책을 필사를 해준 죄 밖에 없지만 그 책을 사간 사람들의 이름을 대라며 밤낮없이 고문을 받았다. 모진 고문과 매질로 산송장이 되어 돌아온 아버지를 끌어안고 우는 장이는 결국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만다.

 

그리고 아버지가 했던 일을 장이가 자신을 반양자로 맞아준 책방의 주인의 은혜로 필사를 하거나 심부름을 하며 살아간다. 처음부터 주인공은 아픈 과거를 안고 시작한다. 이런 시련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앞으로도 백과사전만큼 종류별루 찾아 올 시련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역시 순탄치 않은 장이의 하루하루였다.

 

최 서쾌의 심부름을 가는 장이는 귀중한 상아 책갈피와 함께 책을 가져가는 도중 허궁제비를 만난다. 동네에서 밉상으로 찍히고 아무도 건들지 않을 성질을 가지고 있는 왈패 허궁제비는 장이가 가지고 있던 상아 책갈피를 가져가면서 돈을 가지고 오면 돌려주겠다며 사라졌다. 이 부분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장이가 어떻게 돈을 마련을 할까. 어린 나이에 그것도 부모도 없는 고아인 장이가 무슨 수로 쌀 한가마나 살 수 있는 돈을 마련을 할까. 아이 답게 찾아내는 해결책은 어떤 것일까. 내가 인물을 설정했다면 어떤 방법으로 작위적이지 않는 설정으로 첫 번째 시련을 해결할까.

 

앞 부분에서 장이의 이력에 대한 것이 전혀 없어서 어떤 환경에 있는지 주변 인물은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 알수 없어서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이 부분에서 작가는 감춰 놓은 인물들을 하나씩 풀어 놓는다.

장이가 심부름을 가는 기방에서 장이를 도와줄 인물 하나를 설정해 놓는다. 장이보다 어린 여자 아이 <낙심>이가 첫 번째이고 기방의 문지기 아저씨, 그리고 기방에서 가장 마음씨 좋은 <미적>. 그들의 도움으로 장이는 상아 책갈피를 찾을 수 있었고 그것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된다.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고 생각했던 장이에게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오빠라고 부르지도 않고 반말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드는 낙심이가 장이를 구해 준것이니 얼마나 더 감동적이겠는지.

 

드라마만 보더라도 신물 나게 나오는 재벌 2세와의 사랑,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성공하는 석세스 스토리보다 작고 평범한 아이가 살아가는 역사동화가 좋은 이유는 우리 모두가 장이처럼 딱 이만큼의 우울과 서러움 행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 같다. 어느 정도 시대를 가지고 있지만 깊게 파고들지 않고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의 얘기라는 것에 더욱 마음이 간다.

장이가 드나들었던 홍 교리의 집에 있었던 그 책방에 쓰여 있던 <서유당>이라는 책과 노니는 집에서 한참을 책을 읽다가 나온 기분이다.

문득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이 많은 계절을 지내면서 이름 하나 없는 방에 있었다고 생각하니 이름 하나를 지어주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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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도노휴 지음, 유소영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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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 난 소년이라고 하기에 너무나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시작되는 소설의 소재들은 너무나 가혹하다. 자신을 낳은 어머니는 7년전 납치를 당해 감금되었다. 하늘로 아주 작게 난 방안에서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하루하루를 보내야 한다. 코르크 냄새가 가득한 아주 작은 방, 룸 안에서 소년에게는 매해 생일을 맞이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감금한 남자가 올 시간이 되면 침대 밑 서랍으로 돌돌 말려 숨어 있고 어머니를 범하는 소리까지 다 들으며 살아야 한다. 어머니를 감금하고, 무수한 성폭력을 휘두르고 그곳에서 원치 않는 출산을 혼자 하는 스무 살 청춘을 다 보내고 벌써 7년이라는 세월을 흘려보냈다.

 

2008년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났던 밀실 감금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어 쓰게 되었다는 소설의 소재들은 잔혹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 잔혹한 소재들의 반전에 있는 어린 아이의 시선이라는 것으로 읽을수록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것이다. 만약 이 소설이 납치를 당한 여성의 시각이었다면 이만큼 더 안쓰러울 수는 없었을 것 같다.

 

그 작은 방 안에서 세상과 소통 할 수 있는 것은 몇 개 나오지 않는 채널을 가진 구식 텔레비전과 천장으로 난 작은 투명창밖에 없다. 그리고 일요일에 한번 여자와 어린아이 잭을 위해 선심 쓰듯 원하는 것 한가지씩 가져다주는 그들을 가둔 올드 닉의 선물, 즉 동화책이거나 리모컨이 있는 장난감들 밖에 없다. 여자는 치통을 계속해서 앓아가고 있지만 절대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치료를 받을 수 없다. 결국 그녀의 청춘을 갈아먹는 감금된 방처럼 곪아 빠져버린다.

그녀는 잭이 첫 아이가 아니었다. 첫 번째 딸을 낳았지만 경험도 없는 그것도 어린 나이에 혼자 출산을 해 탯줄에 목이 감겨 나오자마자 사산을 했다. 그리고 잭이 두 번째 출산이었다. 문득 그녀를 가둔 닉의 마음이 참 궁금했다.

첫 아이가 죽는 것을 보고나서 왜 피임을 하지 않았을까. 그녀의 말처럼 감금된 그녀를 범하면서 만약 아이를 원했다면 구글을 통해서라도 출산하는 방법이라도 알아야 했을 텐데 전혀 사전 자식도 없이 들어와 그녀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단 말인가.

그 부분을 읽을 때 너무 속이 부글거리고 화가 치밀어 올라 책을 여러번 던지고 싶었다. 그리고 잭이 태어나고 여자가 한번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얼굴 한번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이해하기 힘들었다. 물론 닉은 여자를 사랑하기보다는 오로지 성적 욕구를 해결하기위해 감금해 놓은 상황이니까 어떤 부성애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자신의 핏줄인데 어쩜 그렇게 모질고 사나울까.

 

아이가 커갈수록 점점 방이 좁아지고 있다. 여자 혼자 있을 그 방에 작은 아이가 점점 커지면서 그녀는 일생일대의 큰 결심을 한다. 그곳을 탈출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내는 것 또한 아이의 눈에 맞춰 이뤄지고 역시 아이의 시선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한다.

 

그녀는 점점 작아져가는 방에서 탈출해 자신의 청춘을 찾기보다 아이를 위한 모성으로 세상으로 나가려고 했다. 결국 그녀가 원하는 것처럼 탈출을 했고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모성으로 죽을힘을 다해 탈출을 했지만 여자라는 이름으로 세상 앞에 좌절하고 만다. 그녀를 마치 밀림에서 몇 십 년씩 살다가 살아나온 사람 취급하는 매스컴의 낚시들에 여러번 낚이며 낚싯대에 걸려 구경거리가 되었다.

7년 동안 감금된 방에서 매일 눈을 감으면서 꿈꿔왔던 탈출이었지만 세상을 등지게끔 많은 약을 먹어야 했던 세상의 호기심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눈밭에 서 있는 것보다 더 춥고 눈보라에 살들은 더 아프게 깎여간다. 잃어버린 7년이라는 시간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좁은 공간에서 살아온 잭이 공간 개념이 없어 세상 밖으로 나와서는 매번 벽에 부딪치고 넘어지는 것처럼 그녀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동안 계속 넘어지고 다치며 일어서야 할 것이다.

 

아마도 마지막 장에서 잭의 안녕을 소리 내어 읽었다면 다들 코끝이 찡해 왔을 것 같다. 잠을 자기 전 좁은 방안에 있는 작은 세상에 안녕을 고하며 잠들었던 잭은 자신이 있었던, 엄마인 그녀는 절대로 가고 싶지 않았던 그 작은 룸을 찾아 안녕을 고한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그 지옥 같은 룸이었지만 잭이 세상에 나왔던 우주를 떠나보내는 안녕이라는 말에는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꼭 품을 수밖에 없다. 그들의 새로운 출발을 하는 이 세상이라는 룸 안에서 좀더 자유로워지기를 잭처럼, 안녕을 얘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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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막는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막는가
데이비드 뱃스톤 지음, 나현영 옮김 / 알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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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그런 책들이 있다. 책을 읽는 것이 즐거워 다 읽기가 아쉬워지는 책들. 혹은 너무나 지루해서 다 읽지 못하는 책들. 어렵고 무거운 주제 때문에 절반을 읽지도 못하는 책들. 그리고 점점 현실을 알아가는 것이 두렵고 힘들어서 더 이상 읽지 못하는 책들. <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막는가>는 후자에 속한다. 책을 한 장씩 읽어내는 일이 너무나 힘겨웠다. 아직까지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은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스러워서 끝까지 읽어내는 일이 너무나 두러웠던 책이었다.

 

80년대에 가장 큰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늦은 밤, 아니 더 일찍 귀가를 하는 여성들을 봉고차에 납치하여 100여만 원에 팔아넘기는 인신매매 단들의 뉴스였다. 돈에 팔려간 여성들은 모두 사창가나 시골 유흥주점에 넘겨지고 심지어는 서울 하늘에서 납치되어 서울 미아리 사창가로 넘겨지는 젊은 여자들의 얘기에도 놀라서 집에서는 절대 밤에 나가지 말 것을 당부했었던 엄마의 말들이 기억이 난다. 그리고 잠잠해진 얘기들이어서 그저 그런 일들이 없겠거니 했었다.

몇 년 전 <테이큰>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내 주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니 당연히 없는 것이구나 했지만 그 영화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때 딸들만 키우고 있던 선배가 늦은 밤 두 부부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한숨만 쉬면서 나왔다고 한 얘기가 떠올라 오싹해졌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의 가학적인 장면들에 대해 그런 말을 했었다. 영화 속보다 현실이 훨씬 더 가학적이고 잔인하지 않은가. 그렇다, 현실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이면은 훨씬 더 잔혹하고 가학적이고 놀라울 뿐이다.

 

원래의 제목 <NOT FOR SALE>인 제목은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막아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사람을 팔아 돈을 챙기고 부유해지는 이 세상은 영화 속 그 어떤 장면보다 잔인하고 피비린내가 난다.

19세기를 통해 이미 노예제도는 폐지되었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듣게 되는 노예라는 단어자체는 아주 먼 얘기를 꺼내는 일과 같다고 생각되어졌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도 ‘노예’라는 단어만 숨겨졌을 뿐 그와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얼마 전에도 뉴스에 나온 베트남 여성이 50대의 남성에게 시집을 왔지만 집안에 매일 갇혀 매를 맞고 모진 학대를 당하다 죽은 얘기들도 성노예로 팔려 온 것과 다름없다.

 

이 책은 사실적인 사실과 약간은 가미된 얘기들로 또 다른 문학의 탄생을 보여주었다.

과거에 있었던 인신매매로 인한 노예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신매매와 성노예로 팔려나가고 있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가장 많은 어린 여자아이들이 성노예로 팔려나간다는 캄보디아의 스레이 네앙의 얘기를 시작으로 책의 서문을 연다. 스레이 네앙은 열두 살 때부터 늙은 여자의 노예로 팔려서 살다가 나중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모르는 남자와 마주하게 되는 성노예로 팔려나가는 얘기를 들려준다. 처음부터 읽는 동안 내가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아내들이 사원에서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다가 탈출을 하자고 조르는 그 아내들이 너무나 세상물정 모른다고 생각했던 남편들이 아내들이 욕정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모두 아내들을 탈출 시키는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려진다.

 

왜 사람들은 이토록 사람들에게 가혹한 것인가.

내가 살고자 다른 사람들을 수렁으로 넣으며 살아가는 이들은 또 어떤가.

처녀성을 잃었으니 이제 걸레가 되었다며 이제 그런 일을 하며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그 여자 또한 피해자이었지만 어느새 가해자로 탈바꿈하게 만들어 놓는 더러운 그물속 물고기와 같다. 하지만 그녀의 그 삶도 평탄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연민이 스며들 수 밖에 없다. 
 

인신매매는 중국, 태국, 캄보디아등 저소득층의 나라에서 이뤄지는 줄 알고 있었지만 유럽과 미국에서도 이뤄지고 있다니 참 세상은 모두 자신의 것만 가져가려는 세상인가 싶어 먹었던 모든 음식들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문득 식당에서 음식을 날라주었던 중국인 여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가 어디서부터 이곳으로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임금은 받으면서 일을 하는 것일까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며 주인을 살펴보게 될 것 같다.

타인을 위한 배려가 어떤 것일까. 정말 많은 생각들이 왔다가 사라졌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데 누가 더 우월하며 월등하더라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누구든 서로를 사고 팔 수 없다는 것. 너무나 당연한 진리가 살아있는데도 우리는 왜 이렇게 많은 꽃들을 죽이며 살아간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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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삼십 년 뒤에 쓰는 반성문 문지 푸른 문학
김도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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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 모두 미니홈피에 열광을 보이고 있을 때 나는 미니홈피는 처다 보지 않았다. 좀더 활발한 이웃을 만들 수 있고, 화면 가득 사진을 올릴 수 있으며 음악 또한 내가 선곡한 것들을 올릴 수 있는 블로그의 맛에 흠뻑 취해 있었다.

2003년 배타 시절부터 시작한 블로그를 1년 정도 하고나니 어느덧 메인에 올라와 있을 때가 몇 번 생기더니 수십 명이었던 이웃이 하루에 몇 백 명씩 늘어났던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매스컴이란 참 대단한 것이구나! 놀랐었을 때였는데 하루에 수백 명씩 늘어났던 이웃보다 내게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정성들여 만들어 놓은 나의 포스트를 홀랑 마우스 그래그 하나로 자신의 블로그에 붙여놓기 한 사람들의 행태였다.

결국 그들을 발견하고는 지워달라고 부탁하고 그런 행위를 하는 그들의 행동에 분개하며 결국에는 아이디 삭제까지 감행하며 블로그를 없앴던 적이 있었다.

 

남의 것을 자신의 것인 양 가져가는 그들의 행위에 분개했지만 그때는 그들 또한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그 어떤 양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없는 공간이었다. 너무나 급속도로 변하는 인터넷 환경 속에 여전히 존재하는 익명의 존재들은 무섭고 양심 없고 무감각하다.

 

이런 경험은 나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을 것이었다. 포털 사이트의 블로그의 가장 큰 취약점은 스크랩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정보를 공유하는 곳에서의 스크랩은 가장 큰 장점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점을 개선하고자 느끼는 오른쪽 마우스를 막아놓아 복사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것에 나는 가장먼저 박수를 보냈고 좋아했었다.

 

친구는 몇 년 동안 드라마 보조 작가 일을 했었다. 친구는 하루에 열 개씩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그것에 따른 에피소드들을 써내야 했지만 오년 동안 한 번도 친구의 이름으로 방송된 적이 없이 보조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친구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은 모두 메인 작가 이름으로 방송되었다. 이런 일들이 어디 방송국뿐이겠는가. 나의 아이디어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올라가져 있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어글리 베티>에서 베티는 수도 없이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올려놓지만 그녀의 이름으로 올라가기보다는 그의 사장이름으로 혹은 대표의 이름으로 올라가는 것이 회사 구조의 익숙한 방법일 수 있겠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쳐가는 것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생각을 훔치는 것에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 많고 물건보다 덜 양심의 거리낌을 가지는 것만 같다.

 

<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속의 작가는 중학교시절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었다. 집 식구들을 두고 혼자서 전학의 꿈을 꾸거나 고아가 되고 싶다고 느끼는 엉뚱한 아이였다. 소리지른 것이 싫고 목만 아프다는 웅변을 때려치우고 시나 소설을 쓰는 백일장에 나가겠다는 작가는 결국 백일장에 나가게 되고 그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만다.

 

정류장에서 느껴지는 그 아릿한 향수와 함께 작가는 남의 글의 일부를 자신의 백일장에 인용하고 그것을 하필 자신의 백일장을 지도했던 국어선생님, 즉 작가의 담인 선생님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에 따른 별이 내려졌다.

그것은 오백 매에 달하는 반성문을 쓰는 일이었다.

학교 다니면서 딱 한번 반성문을 써 봤던 적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열줄 이상 쓰지 못한 반성문을 다는 선생님에게 종이를 더 달라고 하면서 장작 10장의 반성문을 써내려갔다. 그 반성문을 읽으셨던 선생님은 내게 딱 한 가지만 말씀하셨다. 종이 한 장을 다시 주시면서.

“10장을 1장으로 요약해 놓고 집으로 가거라. 넘쳐서도 부족해도 안 된다.”

모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10장을 다시 1장으로 줄이기 위해 학교에 남았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열장을 한 장으로 줄이면 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쓰면 쓸수록 말이 더 꼬였고 힘들었다.

열장을 썼던 반성문의 시간보다 훨씬 더 힘든 시간을 보내고 나서여 한 장으로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다음날 나를 불러 다시 한 장을 열장으로 만들어 놓으라고 하셨다.

그때의 선생님의 생각을 지금에서야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느끼게 되었지만 그때는 전혀 선생님의 행동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잘못은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했건만, 남들보다 말이 많은 내가 좀 많이 반성문을 썼다고 한들 너무 한일 아니었나 싶었지만 지금은 왜 그러셨는지 알 수 있었다.

 

작가의 담인 선생님이 왜 작가에게 오백 매에 달하는 반성문을 쓰라고 하셨는지 작가 또한 삼십년이 지나서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나 또한 그랬다. 시간이 지나고 경험하고 나서야 알 수 있는 일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몇 달 남지 않았다는 작가의 담임선생님이 작가의 한 번에 다 쓰지 못한 작가의 반성문을 연재하듯 가지고 오는 그 날들의 기쁨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온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 그것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들 알고 있으니 얼마나 벅차고 어련하고 애틋할까.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지만 아이가 없는 작가의 가장 큰 고민은 아이를 가지려고 하지 않는 아내가 아이를 가졌으면 하는 것이었는데 목련이 지고 선생님이 떠나시고 하얀 목련 봉우리가 작가의 아내에게 심어졌다.

 

애틋하게 끝내는 작품 속에서 가장 마음을 울렸던 구절은 시인 신달자 선생님의 “성실성을 이기는 운명은 없다.”라는 말이었다.

모두가 평범하게만 살지만 성실하게 움직이는 자만이 원하는 것에 혹은 가혹한 운명 앞에 당당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걸을 알게 해 주신 작가의 담인 선생님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까. 문득 내게도 그런 깨우침을 주셨던 나의 선생님이 보고 싶어진다.

 

이런 아련함을 선사해주신 작가에게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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