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서른, 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 - 신현림 시인의 흔들리는 청춘들을 위한 힐링 응원 에세이
신현림 지음 / 예담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등학교 때부터 쓴 일기를 아직 가지고 있다. 가끔 읽을 여유도 없지만 오래전 일기를 들춰보고 싶은 마음이 자주 들지 않는다. 이유는 오랜 일기를 읽고 나면 지금의 내 모습이 많이 우울하기 때문이다. 분명 일기에서는 지금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대단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쓴 부분을 너무 많이 읽어 봤기 때문이다. 어떤 나이가 되면 정말로 그런 직업을 하고 있을 것 같았던 유년시절의 일기는 더욱 서글픈 현실에 서글퍼지곤 한다. 하지만 그런 일기라도 들춰보고 나면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후끈 달아오르는 빈 공간이 생기기 때문에 가끔, 아주 가끔 보고 싶기도 하다.

 

 

<내 서른 살은 어디로 갔나>의 개정판인 <서른, 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인 이 책이 오랜 나의 일기장 같은 느낌이 든다. 요즘 나이에 관련된 책들이 참 많이 나온다. 마흔엔 어떤 삶을 살아라, 스무 살은 이것부터 해라, 특히 서른에 관련된 책이 참 많다. 그런 자기 계발서를 읽으면 그때만 고쳐지고 좀처럼 삶이 나아지지 않는 느낌이 참 많이 든다. 하지만 이런 나이 관련 에세이를 읽으면 저자도 나처럼 뭔가 부족한 인간이며 같은 위로를 해 줄 수 있는 경우들에 위안이 된다. 비록 지나버린 나의 스무 살이지만 그렇게 살지 못했어도 어쩔 수 없는 과거이니 안타까워하지 말고, 즐겁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읽을 때 뿐이긴 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내내 나의 일기장이나 혹은 내 친구의 얘기를 다시 듣는 것같아 얇은 이 파란 표지의 책이 너무 즐거웠다.

 

 

신현림 시인을 알게 됐던 <세기말 블루스>라는 시집을 통해 그녀가 대학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알고 나서 나는 그녀의 지루한 그 시간이 안쓰럽다가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이런 시들이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그녀처럼 문학이라는 공간에서 마음을 쉽게 놓이지 못하며 살았고 글을 쓰며 먹고 사는 일이 녹녹치 않은 일당직 아르바이트보다 훨씬 더 고단한 삶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그런 그녀에게 닥쳐오는 나이마다의 고비, 즉 스무살 때는 이렇게, 서른에는 이런 삶이 나의 모토가 되어 행복한 자아를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수학공식처럼 정확한 정답을 만들어내지 못할 때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그 당시 세상은 그토록 푸르고 아름다운데 나만 홀로 천천히 죽어가는 느낌이었다. 주체하기 힘든 인생을 어쩌지 못해 늘 불안했다. 서른 살이 오는 것이 무서웠다.” P26

 

 

 

생각해보니 나는 서른 살을 너무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며 시간을 보냈다. 스무 살 후반에 뭔가 이뤄져야 할 인생이 있어 보람찰 것 같지만 삼수를 해서 대학에 들어가 시와 머리끄덩이 싸움을 했을 작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도 내가 원하는 글쓰기가 어느 목표 지점에 닿아 돈을 많이 벌고 명예도 가진 대단한 작가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지 못한 나의 서른이 그냥 시시했던 것 같다. 시시한 서른을 맞이하고 한참 지나 저자의 글을 보니 나는 나의 나이에 너무 감각 없는 삶이었다는 것이 후회가 되었다. 그녀는 시를 쓰기위해 고민했고 고통스러웠다. 그것 때문에 수년 동안 불면증을 앓았고 그것 때문에 병원 치료를 받았었다. 그리고 원하는 시인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며 책을 읽고 자신을 다듬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적은 돈으로 행복해하며 추운 다락방 생활을 견뎌내었다. 그녀의 에세이를 읽지 않았어도 나는 그녀의 몇 편의 시를 통해 그녀가 지나온 질척한 땅의 습도를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그녀의 부단한 노력의 일기장을 훔쳐보며 나는 나의 지난 스무 살을 반성했다. 아마도 누군들 이 책을 읽으면 말랑하기 만한 지난날이 우울할 수 있을 것이다. 단단하게 그 시절을 보냈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생각해 본들 다 부질없는 짓이다. 나는 지금의 나도 아주 나쁜 삶은 아니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시절 노력하지 못한 시절을 자책하거나 후회하는 일로 지금의 현재의 시간을 쏟아버리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녀처럼 나는 왜 그때 그토록 고민이 없었을까 생각해 봤지만 역시, 나의 그 시절 일기에도 그때만큼의 무게로 고민이 실려 있기는 했다. 단지 내가 그녀처럼 불면증에 걸릴 만큼 자신을 더 가혹하게 다그치지 않았다는 것이 후회가 되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아무도 지금의 나를 탓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그 고민에 나의 고민을 더해 우리, 그 시절 참 삶에 애절했다고 느끼면 되는 것이다.

 

 

그녀의 첫 번째 시집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가 처음에 성공을 했다면 그녀는 단단한 껍질을 하나 가지고 있었을까. 물론 그런 껍질 따위 필요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인생을 견뎌줄 성공을 원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녀가 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이런 시련의 나이테를 하나 더 가졌기 때문이라고 나를 위해서 위로 삼고 싶다.

 

 

뭐든 순박하게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설득당하다 좌절당하느니 저지르고 용서받는 게 낫다는 그녀의 사고방식이 있었기 때문에 추운 다락방 시절을 견디며 살 수 있었고, 그녀가 시인이자 사진작가의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명은 그녀의 저지르는 성격이 부럽기만 하다. 가끔 정말 용감한 사람들에 대해 진정한 “용자”라고 하는데, 어쩌면 그녀가 시인에서 사진작가로 거듭나는 생활을 해 왔던 것, 그리고 그녀가 싱글맘으로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 그녀는 진정한 용자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것 또한 그녀가 많이 아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그녀라고 아픔이 많았으니 다음에 찾아오는 아픔이 아무것도 아닌 그런 사람일까.

 

 

“ 사람의 외로움은 사람만으로 채워지는 게 아니리라. 외로움의 한계를 넘어야 영혼의 눈이 뜨이고, 더 큰 사랑을 만날 수 있으리라.” P 54

 

 

 

에스프레소 같은 외로움의 엑기스를 만나봐야 나를 놓아주거나 던져줄, 혹은 가혹한 서러움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그녀의 이 말에 나는 한참을 멈춰 다음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그녀의 삶의 한 단면이 살짝 떠올랐다가 나의 오랜 고독을 함께 마주하며 앉은 느낌이다. 고독의 속살을 다 보고 다 알면서 누군가를 만나고 쓸쓸해하고, 그리워하는 행위를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단계까지 오르려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더 보내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였는지 그녀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과정에서는 웃음도 났다가 눈물이 맺혔다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녀의 마음을 읽는다. 그녀가 만든 질문들은 한번쯤 우리가 누군가에게 던졌던 질문들이고 들었던 대답들이다. 그때 그런 대답을 들었을 때 고작 그런 대답 밖에 할 수 없는 것인지 그때의 상황을 외로워했었지만 지금은 그 대답들이 적절하다고 느끼는 것은 나도 그런 경험을 했고, 나이가 그렇게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글쓰기는 정말 신나는 일이다. 폭우 끝에 떠오른 뽀송뽀송하고 보드라운 태양을 느끼는 일 같다. 모든 사건과 모든 감정을 의미 있게 만드는 글쓰기. 내 자신의 존재감이 커지는 치유의 글쓰기.” P149

 

 

시가 그녀에게 없었다면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용기 있는 그녀이니, 분명 다른 모습으로 살았겠지만 나는 지금의 신현림을 더 좋아했을 것 같다. 그녀에게 글쓰기가 없었다면 그녀는 그녀가 아닐 것이다. 그만큼 글쓰기는 그녀와 닮아 있다. 그런 그녀에게 글쓰기처럼 나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서 뭔가 이렇게 즐겁게 맞이하며 해 온 일들이 뭐가 있을까 많이 고민을 하게 됐다. 분명 그녀처럼 나에게도 글쓰기가 참 즐거웠던 때가 있었는데 그것이 사라져버린 그 시절에 나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사람이 변화하기 힘든 이유는 과거를 정리 못하고, 버리지 못하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매달리는 꿈들 때문이다.” P172

 

 

[섹스 앤더 시티]의 몇 시즌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그때 캐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과거의 닻을 빨리 거둬야 한다고 얘기했었다. 그래야 배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 인생의 닻을 거두어 나아가야 한다는 말에 그동안 보았던 회들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내레이션이었다. 과거를 버려야 하지만 저지른 실수는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기도로 모든 실수와 잘못을 삭제버튼 누르면 안 되는 것이다. 어쩜 우리는 너무 많은 변명으로 과거를 대신하며 지금을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 또한 오랜 시절을 꿈을 얘기만 할 뿐 그것을 다시 한 번 도전하기위해 애써 본적이 없다. 물론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 생각이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았던 적이 훨씬 많았었다. 내가 그토록 매달리고 있는 그 꿈이 나를 얼마큼 성장시키고 외로운 마음을 달래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스무 살의 불면증처럼 서른이 넘은 내가 고민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보니 생각만큼 내가 원하는 꿈은 아주 큰 것은 아니었나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꿈을 꿔본다. 신현림이 자신이 지나온 서른 살을 다시 돌이켜 보며 쓴 이 책을 통해 나는 처음 초반에 그녀가 쓴 이십대의 글이 풋풋하지만 서른을 넘기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 쓴 후반부의 글이 훨씬 좋다. 그녀가 꿈꿨던 자신의 그리운 시절로 돌아갔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나에게도 있었던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이렇게 성숙한 자아를 만날 수 있을까.

 

없더라도 나는 그때, 눈물을 흘리며 공모전에 떨어져 일기를 썼던 나를 만나고 싶다. 그때 못해줬던 얘기를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외로운 시간을 견디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는 것을 지금은 살짝 알겠으니 그때 나에게로 돌아간다면 다독이며 위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흘러가니 지금도 마음의 우물에 너무 많은 물을 담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궁극의 아이
장용민 지음 / 엘릭시르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십 년 전 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라마.]

 

 

 

 

발신자 칸이 비어 있는 편지. 그리고 소인은 10년 전에 미국 애틀랜타에서 온 편지라니. 이 편지를 시작으로 예언의 편지를 보낸 신가야라는 인물로 시작된 미스터리한 사건은 시작되었다.

 

 

 

[궁극의 아이]라는 소설을 두고 궁극의 소설이라는 별명까지 안겨준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작가에 대한 궁금증을 안가질 수 없다. 작가는 아주 오래전에 재미있게 읽은 [건축무한육면각제의 비밀]을 쓴 저자라니. 스토리텔링에 놀라운 감각을 지닌 사람을 만나면 살짝 그들의 재주가 너무 부러워 질투가 나는데, 그 사람 중에 하나가 장용민이였다. 그의 글을 쓰는 구성력과 방대한 자료 분석, 수집에 더욱 혀를 내두를 정도다. 궁극의 아이라는 하나의 모티브를 두고 사건을 전천후 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그가 시나리오를 쓰기위해 이 소설을 초본으로 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마도 전작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또한 영화에서 소설로 쓴 경우가 있어서인지 그런 부분이 농후하게 보여주는 면이 있다. 그렇다고 궁극의 아이가 시나리오스럽다 말 할 수는 없다.

 

 

 

 

작가의 문장력이 좋다. 문학을 많을 읽은 것 같은 작가의 문장구사력을 느끼고, 무엇보다 가끔 이런 문장 참 좋다며 밑줄을 긋게 만드는 구절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작가는 구성도 좋고, 인물도 잘 만들어 놓았고 글을 풀어가는 문장력까지 좋은것이다. 뭐, 이런 사람 여럿 있겠지만 흔치 않은 스릴러를 재미나게 풀어 놓는 작가들은 흔치 않다는 것을 보면 장용민이라는 작가의 이번 작품은 요 근래에 읽은 어떤 책보다 재미있었다.

 

 

 

신가야라는 신비한 눈을 가진 아이, 한쪽은 흑색의 눈동자, 한쪽은 에메랄드 눈빛을 가진 신비한 한국인이라는 인물을 세워 놓고 궁극의 아이가 세상을 보게 되는 것부터 자신이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지켜 나가는 과정이 치밀하고 매끈하다. 미래는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인물인 신가야와 과잉기억 증후군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엘리스의 만남도 상당히 조화롭다. 모든 기억을 잊히지 않고 다 기억해서 괴로운 한 여자와 미래를 볼 수 있어서 괴로운 한 남자의 로맨스 또한 극적이고 매력적이다. 이제는 퇴물 취급을 받는 FBI 요원 사이먼 또한 이들과 엮어주는 과정, 그리고 그의 사랑스러운 아내와 그 아내와 연결된 사람들 그리고 신가야가 전해주는 예언들과 맞물리는 추리와 현재가 미국 수사 물을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모든 것이 신가야를 매개로 긴밀히 이어져 있었다. 악마 개구리, 엘리스의 과거, 그리고 모니카의 죽음. 도대체 신가야는 어떤 존재이기에 십 년이란 시간을 뛰어넘어 인간들을 체스 판의 말처럼 자유자재로 갖고 노는 것인가. 대체 무엇을 위해 이 엄청난 계획을 세웠단 말인가. 모든 답은 사건 속에 있었다. 어쩌면 사랑하는 모니카의 죽음마저도.” P 250

 

 

 

 

신비로운 소년 신가야를 궁금해 했던 사이먼이 신가야의 주변 인물들과 이어지면서 풀어가는 과정의 스릴은 멋지다. 그런데 가끔 작가도 단서와 복선에 너무 힘을 준 나머지 간혹 실수 아닌 실수를 하는 것도 있는 것 같다. 마지막 사건을 풀러 가기위해 마지막 비밀번호를 맞추는 과정에서 글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헛소리가 나왔다. 아니, 딸내미 생일번호로 비밀 번호를 만들어 놓는 것은 참 좋은데, 요즘 세상에 무슨 비밀 번호가 카톡 비밀번호 만들듯이 네 자리일까. 더욱이 그 집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이냐고. 그런 집에 비번이 꼴랑 네 자리라는 것에 실소 한번 날려주셨다. 이런 부분 때문에 장용민이라는 작가가 나는 쫌 인간다워 졌다고 할까. 고마웠다. 너무 완벽하면 정말 재미없잖아.

 

 

 

 

가끔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지대하게 드는 피가 들끓는 청춘이 아니라 그렇게 궁금하지는 않지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은 일 퍼센트는 하고 있다. 나머지 구십구퍼 센트는 그냥 지금보다 조금 더 부지런히 살고 싶다는 생각 말고는 없다는 것이 나이를 들면서 세월을 받아들이는 무한 긍정의 자세라고 할까.

 

 

 

“운명은 바꿀 수 있어요. 벨몽이 이런 말을 했을 거예요. 운명이란 뽑을 수 없을 만큼 깊

이 박힌 거대한 뿌리라고. 그 뿌리가 바로 당신이에요. 당신이 바뀌면 뿌리가 바뀌는 거예요. 운명을 바꾸고 싶으면 당신이 바뀌면 돼요.”542

 

 

 

 

사랑하는 가족이 된 그들을 위해 희생했던 신비한 소년의 말에 살짝 울림이 있다. 나의 무지하고 게으른 구십구 퍼센트에게 조금 미안해지려고 한다. 그렇다고 이 말에 벌떡 일어나 나를 바꿔야한다며 발 빠르게 움직일 것 같지는 않지만 일정 부분 마음은 살짝 요동치듯 사라졌다. 나에게도 간혹 그 궁극의 아이가 왔다 갔으면 참 좋으련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06년판을 가지고 있는 그때 읽었던 책을 다시 읽은 이유는 이동진의 [빨간 책방]을 다시 듣기 위해서였다. 사실 읽었던 내용이 너무 빨리 기억에서 가물거리며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다시 읽은 조르바는 그때와 좀 다르게 다가온 느낌이 난다. 나는 [어린왕자]를 몇 년에 한 번씩 읽고 있는데 간혹 이렇게 긴 시간을 두고 다시 읽는 책을 만날 때의 여운은 남다른 것 같다.

 

오래전에 읽었던 [그리스인 조르바]는 상스러운 남자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참 몰염치에 아는 척 많이 하고 남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노인네라는 생각밖에 없었는데 다시 읽은 조르바는 안쓰럽고 불쌍하고 측은하기까지 했다. 젊은 내가 이해하지 못한 늙는 다는 것의 기분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역시 나는 조르바의 여성편력까지도 그저 이해가 되어 버렸다.

 

주인공 ‘나’는 크레타 섬으로 가기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조르바를 만나고 너무나 거침없는 조르바는 자신의 살아온 세월의 얘기를 해댄다. 그리고 나와 함께 폐광에서 다시 금맥을 찾아보기로 한다. 나는 크레타 섬으로 들어가 조르바와 함께 지내는 섬 생활이 계속 되면서 섬에서 그가 원했던 사업은 그 어떤 것도 이뤄내지 못하고 모든 돈도 잃고 조르바와 헤어지는 이야기다. 내용은 참 간단한데 초반부의 조르바를 얘기해주는 부분이 사실 좀 지루하리만치 길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 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P22

 

 

“조르바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그 머리는 자식의 세례를 받은 일이 없다. 하지만 그는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마음은 열려 있고 가슴은 원시적은 배짱으로 고스란히 잔뜩 부풀어 있다. 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오스의 매듭을 자르듯이 풀어낸다.” P 99

 

 

일자무식이지만 세상의 이치로 지혜를 배운 조르바는 책만 읽는 주인공을 참 답답하게 생각하지만 그와 나운 대화속의 우정은 후반부에 갈수록 애틋해졌다. 남자들의 우정은 이런 것일까 궁금했다.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의 만남이 초반부터 삐걱거렸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두 사람의 애증은 애틋하기까지 했다. 마지막 조르바가 나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을 때는 그 마음의 깊음이 더 가중되었다.

 

 

여성편력이 심했던 조르바의 나이가 그때 60대였음에도 지치지 않은 정력을 지닌 그가 여자는 늘 자기 운명을 슬퍼하는 동물이라는 대사에 그가 그동안 겪어온 여자들이 어떤 여자들이었는지 느낄 수 있다. 어쩌면 그가 만난 여자들은 그의 인생이 투영된 여자들일지 모른다. 그러니까 모든 여자들을 운명을 슬퍼하는 동물이라는 대사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열린책들에서 [그리스인 조르바]가 다시 개정되어 나오면서 번역도 다시 개정이 된것 같다. 사실 나는 이윤기님의 [그리스인 조르바]밖에 읽어보지 못해서 어떤 번역이 훨씬 좋은지 비교가 안 된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을 벗어나면서 다시 다듬어진 책이 반가운 것인가 생각을 해 봤다. 언어는 세월의 흐름을 타고 있는데 그런 부분들을 수정해 주는 부분이 나쁜 것일까.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조르바 때문에 더욱더 그리스에 대한 열망이 가해졌다. 그의 묘비명에 적혀있다는 그 문장을 보고 싶어졌다.

 

 

“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죽는 순간까지 자유였던 두 사람의 모습이 어른거릴 것 같다. 10년 후 다시 그리스인 조르바를 또 읽게 된다면 그때는 조르바가 어떤 사람으로 느껴질까. 10년 후가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팽이 식당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어느날 나에게 소중했던 것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내가 너무도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 했던 공간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아무것도 정말로 빈 쓰레기 하나 없게 된다면 그때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

 

[달팽이 식당]의 린코가 그렇다. 3년을 같이 살았던 인도에서 온 구릿빛 피부의 그 남자는 그녀와 함께 살았던 모든 가전제품, 냉장고의 식료품, 첫 월급을 타고 산 르쿠르제 냄비, 교토의 젓가락 전문점에서 산 젓가락, 삼베 앞치마, 가지 자갈 절임을 만들 때 빼놓을 수 없는 굵은 자갈, 프라이팬, 밥그릇, 토스터기, 크고 작은 가재도구까지 모든 부엌 살림모두와 꼬박 꼬박 모아 두었던 돈 다발까지 가지고 사라졌다. 다만 수년 전 할머니가 정성껏 만들어 놓았던 겨된장 야채 절임이 든 항아리만 구석진 곳에 있어 못 찾았는지 그것만 덩그러니 숨어 있을 뿐 모든 것이 처음 집에 들어 왔을 때처럼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마치 컴퓨터의 모든 기능이 마비되 초기화 시켜 바탕 화면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정말 아무것도 없는 인생이 되어버렸다. 린코는 텅 빈 집안에서 아무것도 모든 것을 다 들고 사라져버린 연인이 왜 이런 일을 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아파트를 나와 자신이 십여 년 전에 떠나왔던 고향집으로 향하기로 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달팽이 식당]의 처음 읽으면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너무 당황스럽고 무엇보다 부엌 집기들을 대하는 작가의 소소한 설명이 너무 아기자기하고 예뻐서 읽으면서도 즐거워지는 앞부분이었다. 이 소설은 마치 여성들을 위한 팬시 상품인격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십여 년전 어머니를 뒤로하고 떠나서 홀로 모진 세월을 견디며 있었던 도쿄를 떠나는 결정적은 이유를 만들어준것까진 참 좋았는데 이유가 없다.

 

그녀의 인도 연인은 왜 모든 것을 들고 혼자 이사를 했을까? 소설을 읽어도 그녀는 그에 대한 애틋함만 있을 뿐 도무지 그 이유를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 생각해보자. 나랑 같이 살고 있는 남자가 내 물건을 모두 들고 이사를 가버렸는데, 그것도 가게를 차리려고 모아 둔 그 눈물겨운 돈마저 다 가져 가버렸는데 왜 신고도 하지 않고, 그가 있었던 식당도 한번 들려 보지 않고 그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고 고향으로 향하냔 말이다. 그것도 10년 동안 한 번도 연락도 안한 엄마에게 말이다.

 

이 책에는 큰 것들에 대한 것은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인생이랑 이유 따윈 필요 없이 흘러갈 때도 있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는 것 같다.

 

그녀의 애인이 떠난 이유를 알 수 없듯, 그녀가 왜 10년 전에 혼자 있는 엄마를 뒤로하고 고향을 떠나왔는지 그런 이유는 필요가 없다. 애인과 자신의 온 재산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린 것처럼 잃어버렸는데도 그녀는 침착하게 눈물을 흘리며 고향으로 내려왔는데 그런 충격적인 일을 겪어서였는지 그녀는 목소리도 잃어버렸다. 보통은 이럴 때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병원도 가보고 치료도 해 볼 텐데 그녀는 그럴 돈이 없다. 너무나 애틋했던 애인님이 모두 다 가져가 버리지 않았던가

.

그녀는 목소리까지 나오지 않는 최악의 상황이지만 목소리 따윈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을 그대로 전수 받은 요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나는 뭐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요리라는 강력한 아군이 있다. 식욕이나 성욕, 수면욕과 마찬가지로 요리를 만드는 일이 내 생명을 지탱해 준다. 목소리는 요리에 필요 없는 기능이다.” P148

 

 

교향으로 돌아온 린코는 목소리도 전 재산도 잃고 (목소리는 언젠가 나올...뭐 그런 이유를 가지고 있을 테고) 그리고 그녀의 레시피 북들마저 모조리 사라졌지만 그녀의 손맛은 그대로 였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요리밖에 없었다.

 

그녀의 엄마가 하는 음식점 옆 작은 창고를 개조하여 마련한 그 식당의 이름이 [달팽이 식당]인 것이다. 그 식당에서 그녀는 흔한 요리가 아닌 오로지 한 사람만 받는 그런 식당을 차렸다. 참 멋진 아이템이다. 몇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아니라 미리 음식을 먹을 사람의 성격, 주변 환경도 포함한 프로필을 접수해서 그 사람에게 가장 어울릴 그런 음식을 만들어 준다니. 이런 멋진 식당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루에 한 사람 혹은 시간 오전, 오후를 나누어 많아야 두 사람을 받을 수 있는 식당을 운영한다면 미쳤다고 하지 않을까? 하지만 린코는 그런 식당을 열었다.

 

 

 

. 개다래나무주(酒)를 사용한 칵테일.

. 사과 겨된장절임

. 굴과 옥돔 카르파초

. 토종닭을 통째로 푹 고운 삼계탕

. 햅쌀을 이용한 가라스미 리조트

. 새끼 양고기 구이와 야생 버섯의 갈릭 소테

. 유자 셔벗

.마스카르포네 티라미수.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곁들여서

. 진하게 끓인 에스프레소 커피.

 

 

 

 

이것이 린코가 처음 대접했던 손님의 식사 리스트였다. 주문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을 전달 받고 그 사람을 위한 소울 푸드인 셈이다. 처음 식당을 찾은 그 사람도 이 음식을 먹고 마음을 치유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소설속의 내용이기 때문에 당연히 작가가 그렇게 써 놓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읽는 동안 정말로 진정으로 누군가에게 이렇게 나의 마음을 읽고 나를 위한 공간에 오로지 나만을 위한 음식을 하루 종일 만들며 차려준 식탁을 받는다면 마음이 요동칠 것 같다.

 

 

그녀의 식당이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마음을 치유할 그런 음식이 있기는 한 걸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분명, 언젠가는 그런 음식이 놓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고 혼자 살며 상복만 입고 있는 할머니, 사랑을 이뤄지고 싶어 하는 고등학생, 딸을 데리고 나간 아르헨티나 아내를 기다리는 구마씨, 그리고 거식증에 걸린 토끼까지 달팽이 식당을 찾아와 마음의 치유를 받아 돌아간다. 음식을 통한 린코의 마음이 힐링이 된 것이다.

 

가끔 우리는 마음의 위안을 삼거나 치유하고 싶을 때 힐링이 되는 것들을 찾는다. 여행이 될 수 있고 나만의 안식처를 찾아가는 것도 있고 등산을 하며 산을 오른 뒤 멀리 보이는 작아진 세상을 보며 힐링 할때도 있지만 이렇게 음식을 놓고 마음을 치유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소설의 엔딩은 사실 좀 실망스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얘기며 그녀의 어머니의 갑작스런 안녕도 너무 벼락같이 떨어지는 것도 없지 않아 있지만 사랑스러운 소설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부분이 이 소설을 크게 해될 것이 없는 것이 책을 읽고 나면 린코가 해준 나만의 요리를 먹은 기분이 든다.

 

 

작가의 [초초난난]을 읽기위해 초기작을 뒤져 읽었는데 그녀의 두 번째 작품이 너무 궁금해진다. 가끔은 참 고민 없이 넘어가는 일본 소설이 좋을 때가 있기는 한데, 요즘 일본 소설이나 일본 드라마도 왜 그토록 다들 고민이 없을까 좀 아쉽기는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의 제단 - 개정판
심윤경 지음 / 문이당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 달의 제단에 누가 오르고 있는 것일까.

 

심윤경의 두 번째 소설을 읽었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읽고 그녀의 두 번째 소설을 읽고 나서 나는 그녀가 너무 좋아졌다. 그녀의 책은 다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프로필을 살피는데 그동안 그녀는 단편보다 장편을 훨씬 많이 쓴 작가이고 그나마 장편도 5권에 불과하다. 단편은 읽어보지 못해 그녀의 단편속의 문장은 어떻다고 말하기 힘들겠지만 그녀의 책 두 권밖에 아직 못 읽어봤지만 그녀의 단단한 문장력에 반하였다. 왜 그동안 이런 작가를 못 알아 봤을까 후회스럽다.

 

[달의 제단]은 KBS에서 단막으로 한번 방송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동안 단막 드라마와는 인연을 끊었더니 못 보았다. 오히려 보지 못한 것이 다행인 책이다. 만약 내용은 어느 정도 알고 봤다면 상룡과 정실의 얘기에 가슴이 출렁거리지 않았을 것 같다.

 

상룡은 아버지와 어머니도 안 계신 어느 집안의 종손이다. 그는 이제 막 군대를 제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버지가 있었던 집으로 들어가 웃음 한 번 흘리지 않는 할아버지와 함께 종손으로서 집안을 일궈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도 없지만 상룡은 서자였다. 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의 아들이었지만 자신을 지켜줄 아버지도 없고 자신을 처음과 끝을 늘 같게 쳐다보았던 첫째부인의 관심 밖에 있으며 살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룡은 늘 기가 죽어 있다. 그런 자신이 종손이 되고 하기 싫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그 일들에 늘 가슴이 답답했었다. 그런 상룡에게 할아버지는 자신의 집안의 근간을 알 수 있는 언간을 해석 할것을 명받는다. 하지만 그 언간은 해석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집안을 그나마 상룡에게 이해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해석을 하면 할수록 집안의 소문과 허물만 밝혀질 뿐이었다. 이것을 고스란히 해석을 해서 상룡은 늘 할아버지의 화를 돋울 뿐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가. 쇠락 할대로 쇠락한 효계당을 오늘날처럼 융성하게 만든 사람이 아니던가. 할아버지의 자본력과 귀적적인 취향으로 인해 절대 할아버지를 따라올 사람이 없지 않던가. 그런 할아버지에게 기죽어 살다가 유일하게 기를 펼 때는 언간을 해석할 때뿐인 상룡은 숨통이 늘 비좁고 괴롭다.

이런 상룡에게 가슴의 시원한 봄바람을 불어주는 이가 그 집 몸종이나 다름없는 달시룻댁 딸 정실이었다. 그동안 육중한 몸매, 즉 80키로가 넘는 몸과 불편한 다리, 그리고 어딜 가도 저렇게 못생긴 애는 절대로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며 처다 보지 않았던 박색인 정실과 상룡은 처음으로 정사를 나눈다.

 

처음에는 상룡도 그저 정실의 몸이 자신이 생각했던 그런 뚱뚱하고 아무 쓸모도 없는 그런 몸인 줄만 알았지만 그녀의 몸은 그동안 서자의 슬픔으로 어머니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도 못한 세월의 서글픔을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알지도 못한 채 죽어버린 아버지의 자실로 괴로웠던 상룡의 온 마음과 정신을 품어주었다.

 

[달의 제단]의 내용은 사실 간단하다. 상룡의 얘기만 따라가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속에는 생각지도 못한 복병을 만나게 된다. 상룡이 풀이해야 할 언간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상룡이 풀어야 하는 언간을 같이 마주 앉아 읽는 것이 처음에는 굉장히 괴로웠다. 내가 한참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이 작가가 대체 왜 이 언간을 작품 중간 중간 놓으며 몰입을 방해를 하는 것일까 궁금했다. 무엇보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언간을 안 읽을 수가 없다. 중간쯤 가서야 그 어려운 언간의 내용이 들어왔다. 풀이하던 상룡도 어쩜 나와 같지 않았을까.

 

가문의 정통을 이어 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상룡은 정통의 자녀가 아닌 서자의 몸이라서 늘 할아버지에게 죄스러운 몸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런 상룡에게 이 언간 풀이는 어쩌면 할아버지가 올곧게 믿고 있는 조씨 집안의 정통을 모두 깨트리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 붉은 화염 속으로 떠나보낸 정실과 그간 자신이 믿어왔던 어떤 사랑에 대한 통곡이 마지막을 장식하는 모습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달의 제단]속에 있는 인물들은 차가운 냉기가 가득한 인물들만 보인다. 주인공 상룡도 그렇다. 그 주인공 밖에 있는 정실은 그렇지 않다. 정실만 부족한 정신을 챙기며 모든 인물들을 품으며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정실의 마지막 행방은 궁금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화염으로 사라졌지만 아마도 자신의 아이를 낳고 다시 돌아와 달의 제단에 자신의 아이를 올려놓고 새롭게 시작할 인물도 정실인 것이다.

 

정신이 부족한 정실 때문에 그동안 마을 남자들이 정실을 농간했던 장면들이 나올 때 마음이 아팠다. 어딜 가든 수컷들의 행동은 다르지 않다. 그것 때문에 상룡도 정실에게 화를 냈지만 그도 처음엔 동네 수컷들과 다르지 않았는데 어쩌겠는가.

 

심윤경의 [달의 제단]을 통해 그녀의 탄탄한 문장과 구성에 또 한 번 감동한다. 그녀의 작품이 좀 더 많았으면 좋겠는데 장편만 쓰고 계시는 것 같아 좀 섭섭한 기분마저 든다. 그녀의 최근작이 나온 것을 보니 그래도 글은 계속 쓰고 계시는 것 같다. 글을 쓰는 작가는 어쩌면 쓰지 않고 못살 것 같은 천형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