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베트남 전쟁(Vietnam War)에서 패배하게 된 이유는 많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들자면 남베트남의 독재정권에 맞서 봉기한 베트콩들과 이를 지원하는 북베트남군의 영웅적인 투쟁,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도 굴복하지 않는 베트남 인민들의 불굴의 정신, 이들을 정신적 그리고 정치적으로 이끄는 호치민을 포함한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지도부들의 탁월한 지휘능력, 그리고 추악한 미국의 전쟁범죄에 반대하던 미국과 서방세계에서 일어난 반전운동 등이 미국을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일어났던 반전운동은 1968년 구정공세(Tet Offensive)를 기점으로 그 규모가 확장되었고, 1973년 미국이 남베트남에서 완벽히 철수할 때까지 계속됐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과 서방세계에서 벌어진 반전운동을 더 격화시킨 사건이 있었다. 반전운동을 격화시킨 이 사건으로 인해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던 미국의 이미지는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본국으로 돌아온 미군들은 반전운동에 참가한 시민들로부터 베이비 킬러(Baby Killer)라고 욕먹게 됐다. 그 사건이 바로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이다.
(미라이 지역에 도착한 미군 헬기)
원숭이의 해인 1968년은 베트남 전쟁에 있어서 전환점이었다.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의 주요 도시, 성과 부의 중심지, 농촌 마을에서 감행했던 구정공세로 인해 미국은 잠시나마 혼란에 빠졌었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선 미대사관 1층이 잠시나마 베트콩에게 점령당했었고, 옛 황궁 도시인 후에(Hue)는 1달 동안 양측 군대가 교전을 벌이는 전쟁터로 변모했었다. 구정 공세 초기 미군과 남베트남 연합군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기습공격으로 밀렸지만, 우수한 화력으로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반격에 나선 미군들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베트콩들을 섬멸했으며, 베트콩들의 저항은 조금씩 미미해지는 것 같았다.
(M-16 소총을 들고 미라이 지역을 정찰하는 찰리 중대 병사들)
다낭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손미(Son My)지역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러던 2월 25일 인근 동네를 순찰하던 미군 찰리 중대원(Charlie Company)들이 지뢰를 밟아 6명이 죽고 12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2일 뒤 프랭크 베이커(Frank A. Barker) 중령은 찰리 중대의 중대장 어니스트 메디나(Ernest Medina) 대위를 불러 “정보에 의하면 250여 명의 베트콩 게릴라가 미라이에 진을 치고 작전을 하고 있다.”는 내용을 얘기했고, 이후 찰리 중대는 이 동네에 들어가 모든 것을 파괴하기로 결심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미라이 학살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1968년 3월 16일 새벽, 찰리 중대원을 태운 헬리콥터가 착륙지점에 병사들을 내려놓았다. 윌리엄 캘리(William Calley) 중위가 이끄는 찰리 중대 소대원 30명은 이른바 미라이-4(My Lai Four) 지역으로 진입했고, 광적인 학살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켈리 중위가 이끄는 소대원 30명이 미라이-4 지역에 진입했을 때 어떠한 반격도 없었지만, 이미 켈리 중위는 사격 명령과 함께 수류탄을 주민들이 살고 있는 지점에 투척했으며, 마을을 불태우고 밖으로 뛰어나오는 민간인들을 M-16 소총과 M-60 기관총으로 무차별 학살했다. 여기서 즉시 사살하지 못했던 민간인들은 손을 머리 위에 올리게 하고 큰 도랑으로 내려가도록 했으며,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대원들이 이들을 집단으로 학살했다. 또한 그날 같이 출동했던 다른 2개 소대는 미라이-4 마을의 외곽을 포위하고, 도망쳐 나오는 사람들을 사격으로 차단했다. 학살을 벌였던 미군들은 이런 천인공노할 만행도 모자라 부녀자들을 집단으로 강간한 뒤 사살하기도 했으며, 이 학살극으로 희생된 이들 대다수가 여자, 노인, 아이들이었다.
(미군의 총에 맞고 죽은 어린아이, 미라이 지역에 들어간 미군들은 애, 어른, 여자, 노인 할 거 없이 보이는 대로 총으로 쏴죽였다.)
(학살당한 마을사람들, 미라이 지역에 들어간 미군들은 마을사람들을 이렇게 집단으로 학살했다.)
물론 모든 미군이 이런 학살에 참여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헬리콥터를 통해 작전지역을 정찰중이었던 휴 톰슨(Hugh Thompson) 준위는 학살을 목격하자 곧바로 미라이-4 촌락으로 내려가 캘리 소대원들을 총으로 위협해서 주민 16명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당시 학살에 참여했던 한 흑인병사는 자신의 발에 총을 쏴서 학살을 회피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런 양심적인 행동을 했던 병사들 보다 현장에서 학살에 참가한 병사들이 더 많았다. 미라이 학살은 총 4시간에 걸쳐서 일어났다. 이 학살의 피해자의 대다수는 여자와 노인, 어린이 그리고 갓난아기였다. 이 학살에서 총 504명의 민간인이 30명의 미군에게 학살당했다. 학살당한 504명 중 17명이 임산부, 173명이 어린이 그리고 56명이 5개월 미만의 유아였으며, 미군은 총 274채의 모든 가옥에 불을 지르고 수천 마리의 가축을 죽였다. 쉽게 말해 살아 숨 쉬고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없애버렸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학살의 증거를 막기 위해 이 지역을 비행기로 폭격하기 까지 했다.
(마을을 불태우고 있는 미군, 미라이 지역에 들어간 미군은 마을을 불태웠다.)
(공포에 떨고있는 마을주민들)
이처럼 미군은 이 사건을 그냥 덮어버리려고 온 힘을 다했다. 당시 미군의 기록한 보고에 따르면 미라이 학살은 베트콩 사살이었다. 즉 미군은 미라이 지역에서 수백 명을 학살해 놓고, 바디 카운트(Body Count) 계산법을 적용해 학살의 존재를 숨겼다. 그러나 이 추악하고도 잔혹한 학살극은 미군이 원하는 바하고는 달리 은폐되지 못했다. 미라이 학살을 목격했던 육군 사진사 로널드 해벌리(Ronald Haeberle)는 이 학살의 현장을 사진으로 남겼고, 당시 급보통신(Dispatch New Service)이라는 동남아시아의 반전 통신사에서 일하고 있던 시모어 허시(Seymour Hersh)는 이를 기사화했다. 또한 미라이 학살에 관해들은 론 라이더나워(Ron Ridenhour)라는 사병 기자가 보낸 편지가 돌아다니기도 했다.
(휴 톰슨 준위, 인근지역에서 헬리콥터로 정찰을 하던 휴 톰슨은 학살의 현장을 목격하자 그 현장으로 달려가 마을주민 16명을 구출해냈다.)
미라이 학살이 미국내에서 큰 이슈가 되었던 것은 학살이 일어난 지 1년 뒤인 1969년이었다. 1969년 11월 12일 시모어 허시는 미라이 학살에 대해 특종 보도를 하였고, 이로 인해 미라이 학살은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이미지는 더욱 안 좋아졌다. 이렇게 되자 미국 정부는 미라이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에 나섰고, 이 학살에 가담했던 이들이 재판에 회부됐다. 재판에서 총 26명의 군인이 이 학살에 관여한 것으로 판명됐다. 그러나 법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이는 캘리 중위뿐이었다. 상급 명령권자인 영관급 장교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또한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캘리 중위도 두 차례의 감형을 받았으며, 3년 반 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지낸 이후 사면됐다. 더 놀랍고 기가 막힌 사실은 수천 명의 미국인들이 캘리 중위를 옹호했으며, 어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맞서기 위해 필요했던 그의 행동을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기도 했다.
(윌리엄 캘리 중위, 미라이 학살 현장에서 병사들을 지휘했던 장교인 그는 이후 학살이 공론화되면서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그도 나중에 닉슨정부에 의해 사면됐다.)
또한 미라이 학살이 미국 내에서 이슈가 되면서 당시 학살에 가담했던 이들이 텔레비전에 나와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기 까지 했으며, 이러한 활동을 통해 학살의 진상은 확실히 규명됐다. 미라이 학살에 참가하여 최소 25명을 죽였던 소총수 버나도 심슨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기도 했다.
“몇 시간 만에 500명을 죽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가? 그것은 꼭 가스실 같다. 히틀러가 했던 것 말이다. 여자,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50명씩 세워놓고, 그냥 쓸어 버리면 된다. 그렇게 했다. 25명, 50명, 100명씩 말이다. 그냥 죽였다. 그들을 모아놓고, 나와 동료 몇 명이 M-16 소총을 자동으로 한 다음 다 쏴 죽여 버렸다.”
당시 캘리 중위의 명령을 받고 미라이 학살에 가담했던 육군 병사 폴 메들로는 방송에 출연하여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방송 진행자: 어떤 사람들이었죠? 양민, 여자, 아이들이었나요?
폴 메들로: 양민, 여자, 아이들요.
방송 진행자: 아기도요?
폴 메들로: 아기도요.
폴 메들로: 캘리 소위가 와서 그랬어요. 저들을 어째야 하는지 알지? 그래서 전 '예' 라고 했죠. 당연히 전 감시하라는 말인 줄 알았어요. 갔다가 10분에서 15분 후에 다시 돌아오더니 켈리 소위가 여태 안 죽이고 뭐 했어? 라고 그랬어요.
방송 진행자: 당신은 그때 몇 명이나 죽였나요?
폴 메들로: 전 자동화기를 쐈는데, 그냥 마구 갈겼습니다. 너무나도 빨리 지나가서 몇 명이나 죽였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10명에서 15명 정도 죽였을 겁니다.
방송 진행자: 양민, 여자, 아이들을요?
폴 메들로: 양민, 여자, 아이들요.
방송 진행자: 아기도요?
폴 메들로: 아기도요.
폴 메들로: 내가 왜 그랬냐고요? 전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건 마치 그땐 정당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정말로요! 전우를 잃었거든요. 정말, 정말 친했던 친구 바비 윌슨요. 그게 마음에 걸렸어요. 그게 마음에 걸려서요. 그러고 나니 속이 후련했어요. 하지만 그날 이후로 그 사건이 나를 괴롭혔어요.
방송 진행자: 젊고 능력 있고 용감한 미군이 노인과 여자, 어린이, 아기들을 한 줄로 세우고, 냉혈한처럼 쏴 죽인다는 걸 많은 선량한 미국인은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은데, 어떻게 설명하시겠어요?
폴 메들로: 모르겠습니다.
미라이 학살이 아니더라도 사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일방적인 학살극에 가까웠다. 미군은 베트콩을 잡는다는 이유로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고, 남베트남과 호치민루트에 고엽제를 무차별적으로 살포했으며, 소위 자유사격지대(Free Fire Zone)를 설정해놓고, 수색과 섬멸 작전을 이어갔다. 미라이 학살이 베트남 전쟁에서 공론화 된 이유는 그 학살 자체가 우발적인 것이 아닌 계획적인 학살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확실한 사진자료가 남아있었고, 증언을 한 병사들이 있었기에 학살이 진상규명될 수 있었다.
(시모어 허시가 보도한 미라이 학살 기사, 1969년 11월 시모어 허시는 미라이 학살을 보도하면서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자 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미라이 학살이 미국에서 공론화 되던 시점인 1969년은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인 호치민이 사망한 해이기도 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군이 저지른 학살은 미라이 학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베트남 전쟁에서 비정규전을 치르던 미군은 전략 전술적으로 학살을 벌일 수 있는 가능성이 언제든지 열려있었고, 또 그러한 위험성이 높은 작전들을 수행했다. 따라서 미라이 학살은 진상규명이 된 학살일 뿐, 미군이 베트남 전쟁에서 저지른 유일한 전쟁범죄라고 말할 수는 없다.
미라이 학살이 정말 추악하고 잔인한 학살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는 학살의 희생자 대다수가 여자, 노인, 어린이 그리고 갓난아기와 같은 민간인들이었다는 점에 있다. 이것은 비정규전에서 이성을 잃은 미군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어떠한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보여준다.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남베트남을 구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던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저지른 짓은 미라이 학살과 같은 잔혹한 전쟁범죄였다. 따라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참고자료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을유문화사, 2002
『미국의 베트남 전쟁』, 조너선 닐, 책갈피, 2004
『미국민중사 2』, 하워드 진, 이후, 2008
『미안해요! 베트남』, 이규봉, 푸른역사, 2011
『베트남 전쟁,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한겨례출판,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