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50년
김수지 지음, 윤철기.안중철 옮김 / 후마니타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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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 책이 번역됐다고? 정말 놀랍네. 또 읽어야할 책이 이리 늡니다. 명저에겐 별이 아깝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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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초토화 폭격
전갑생 외 지음 / 뉴스타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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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가 정말 훌륭한 일을 했습니다. 이런 책은 꼭 사서 소장해야합니다. 다시한번 뉴스타파에게 큰 감사함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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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에 반대한다 - 워싱턴이 벌이는 신냉전과 절멸주의에 관한 노트
데보라 베네치알레.존 로스.존 벨라미 포스터 지음, 비자이 프라샤드 엮음, 심태은.이재오. / 두번째테제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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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월이었다. 나는 국제전략센터에서 개최한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비자이 프라샤드의 북콘서트에 참가했다. 거기서 난생 처음 비자이 프라샤드를 만났고, 감명 깊은 강연을 들은 이후, 의미있는 질문을 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사실 그 북콘서트는 2022년 초에 번역한 워싱턴 불렛과 그해 말에 번역한 신냉전에 반대한다관련한 북콘서트였다. 아는 페친 동지 덕분에 참가하게 된 이 북콘서트는 표지부터가 끌렸다. 신냉전에 반대한다라는 제목이 너무나도 와 닿았었다. 그 이유는 현실을 살아가는 진보좌파가 고민하고 생각해야할 주제이기 때문이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됐다. 사실 나 또한 푸틴이 정말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리라 예상하지는 못했다. 물론 나는 이 전쟁에서 가장 나쁜 놈이 전쟁범죄를 운운하는 모습에 참으로 역겨움을 느꼈다. 왜냐하면, 미국이 어떠한 짓거리를 했는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20세기와 21세기를 통틀어 미국이 자행한 악행은 이루 헤아릴 수 가 없이 많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반공주의 망령이 아직도 살아있는 한국에서야 미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준 고마운 존재로 여전히 인식되지만, 미국은 자본주의와 자본가를 위해선 그 어떤 범죄도 저지를 수 있는 나라다. 물론 이러한 사실들은 한국인들 스스로가 쉽게 망각하지만, 2003년 이라크 침공만 보더라도 미국의 제국주의적 폭력성을 보여주는 사료적 근거는 밤하늘의 별만큼 많다.

 

2022년 말 국제전략센터에서 번역한 신냉전에 반대한다는 바로 이러한 미국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또 다른 소책자다. 나는 지금까지 국내에 번역된 프라샤드의 책은 갈색의 세계사를 빼놓곤 다 읽었다. 3세계의 붉은 별, 워싱턴 불렛, 물러나다는 내 서재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책들이다. 마찬가지로 신냉전에 반대한다도 내 서재에 꼭 있어야만 하는 책이다. 다만 이 책의 내용은 비자이 프라샤드가 쓰지 않았다. 프라샤드와 비슷한 역사관과 문제의식을 공유한 세 명의 전문가들이 집필했다.

 

책의 구성은 비자이 프라샤드가 쓴 서문으로 시작하여 중국 인민대학교 금융연구소 선임연구원이자 영국인 출신인 존 로스의 미국이 세계에서 더 많은 군사 침략 행위를 벌이는 이유라는 글로 주 내용의 첫 번째 장을 시작한다. 이탈리아 언론인이자 트리컨티넨탈 연구소 연구원인 데보라 베네치알레의 미국을 전쟁으로 이끄는 것은 과연 누구인가?”, 미국 오리건대학교의 사회학과 명예교수이자 먼슬리 리뷰 편집장인 존 벨라미 포스터의 “21세기 생태와 평화 운동을 위한 절멸주의에 관한 노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이 책이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에게 주는 것들이라는 국제전략센터의 감수글이 실려 있다.

 

책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2013년 유로마이단 당시 미국의 개입과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즘의 성장을 적나라하게 비판했고, 냉전 이후 21세기에 급부상한 미국의 경쟁국 중국에 대한 미국의 냉전주의적 태도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다룬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과거 냉전 시기 미국의 적대국이던 소련은 미국에게 경제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그리 크지 않았다. 반면에 현재의 중국은 미국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며, 조만간 중국이 미국의 경제력을 초월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이 나올 정도다.

 

현재 한국에 만연한 혐중정서와 마찬가지로 미국과 서유럽은 혐중정서에 빠져 있다. 미국은 항상 자유민주주의를 외치지만, 정작 중국에 대해 다른 의견을 표출하는 학자들에 대해선 상당히 견제를 하고 있고, 소위 진보운동 단체들 또한 중국의 티베트나 위구르 문제를 통해 인권 문제를 운운하고 있는 실정이며, 중국에 대해 비호하는 발언을 한 학자나 정치인은 사회에서 철저히 매장당하는 수준이라는 것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은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자본력과 기업을 동원한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이번에 신냉전에 반대한다를 읽으면서, 서구가 가진 자본력과 인터넷 장악력에 대해 생각해봤다. 생각해보니, 서구는 자신들의 경쟁상대인 중국이나 러시아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의 인터넷 파급력과 전파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지적하듯이, 신냉전의 시대에서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의 단결을 강화시키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유지함으로써, 세계적 경제 문제나 위기에 대한 큰 대안을 내놓지도 못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서 생긴다. 미국은 궁극적으로 소련과 동유럽을 자본주의화 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냉전에서 승리했다. 냉전이 끝난 이후 미국은 소위 만만치 않은 도전자가 없던 시기를 대략 10~15년간 보냈다. 그러던 도중 다시 러시아와 중국의 견제를 받게 됐고, 2010년대 들어서면서 이러한 모습이 더욱 심화됐다. 거기다 2000년대 미국의 침략으로 시작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은 미국의 사실상 패전이나 완전한 패전으로 종결됐다.

 

책의 표현을 빌려 얘기하자면, 미국은 100여 개국을 상대로 침략하거나 군사작전을 벌였지만, 외국 정부의 침략을 받거나 대규모 민간인 사상자가 나온 적이 없다는 점에서 전쟁 도발에 더욱 대담해졌다.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엄밀히 따져 보자면, 미국의 대담한 전쟁 도발로 인해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냉전이 끝나거나 끝나갈 무렵에 태어난 세대들은 경쟁자가 없는 초강대국 미국의 모습을 봤다. 이에 따라, 미국의 정치와 엘리트 계층은 몰역사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으며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책은 강조한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현재 미국식 애국주의에 빠진 극성 네오콘들과 민주당 매파들이 딱 그러한 관점에서 국제정치를 바라본다. 그러다 보니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범죄와 학살을 망각한 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아주 어이없는 짓거리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들에게 있어 이러한 행위는 미국의 전쟁범죄 옹호 및 합리화라는 아주 편리하고 간단한 방어도 된다. 네오콘들은 러시아가 국제법적으로 금지된 무기들을 사용한다고 비난하지만, 정작 미국은 유로마이단 이후 돈바스 내전에서 우크라이나 네오나치 군대를 키우면서, 집속탄과 같은 국제법적으로 금지된 무기들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했다. 따라서 미국이 러시아의 전쟁범죄를 규탄한다는 말 자체가 속된 말로 내로남불인 셈이다.

 

또한 신냉전을 반대한다는 미국의 핵무장과 기후변화의 문제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기후문제 및 핵문제에 대한 지적은 아마 이 책이 가진 또 다른 장점일 것이다. 미국이 보유한 핵폭탄의 숫자와 미국 자본이 유도하는 환경 파괴 및 기후 변화 그리고 전쟁 도발을 통한 지속적인 자연에 대한 훼손 등을 읽는 이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따라서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은 진보주의자라면, 존 벨라미 포스터의 글 “21세기 생태와 평화 운동을 위한 절멸주의에 관한 노트’”를 꼭 읽어야 할 것이다.

 

지난 학기 대학원 생활 도중에도 촘스키와 프라샤드의 대화를 다룬 물러나다를 읽었지만, 이번에도 정말 좋은 책을 읽었다. 미국과 제국주의 전쟁,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중국과 중국의 경제 및 경쟁 등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으며, 주제에 비해 내용도 그리 어렵지 않은 편이다. 거기다 소책자여서 읽는데 크게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 완독할 수 있는 책이다. 그에 반해, 책에서 얻어가는 지식은 많고 값지다. 따라서 현재 통일과 평화 그리고 반전을 생각하는 진보주의자라면 이 책을 필수적으로 읽어야 한다 생각한다.

 

많은 이에게 이 책의 일독을 적극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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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8-02 15: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엇보다 미국에 진정한 진보정당/진보언론이 없고 우익-친기업-군사력강화주의자들이 미국 정계와 언론을 지배하기 때문에 미국의 중동 침략사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극소수라죠(!)
 

유신독재자 박정희가 부하 김재규에게 총에 맞고 사망한 해는 1979년이다.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박정희가 총맞아 죽어버리기 몇 달 전 지구 반대편에서는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미국의 식민지 지배를 사실상 받았던 나라 니카라과에서 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놀랍게도 이 니라카과 혁명은 과거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와 체게바라(Che Guevara)가 쿠바에서 성공시킨 민족해방 혁명이자 사회주의 혁명의 성격의 투쟁이었다. 이 산디니스타 혁명을 성공시킨 지도자의 이름은 다니엘 오르테가(Daniel Ortega)였고, 오르테가는 현재까지도 적잖은 니카라과인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는 중이다.

 

니카라과의 혁명사를 알기 위해선 혁명이 성공하기 이전의 니카라과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20세기 초, 그러니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2년 전 미국은 니카라과를 식민지배했었다. 당시 미국은 미 해병대 병력을 주둔시켰고, 미국의 식민지 지배는 니카라과인들의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했다. 미국의 식민지 지배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인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아우구스토 산디노(Augusto Sandino)였다. 그가 반미 구국 항전의 첫 깃발을 든 것은 1926년의 일이었다. 당시 미국은 친미주의 군부 정권을 후원하고 있었고, 산디노는 농업 노동자, 빈농, 광산 노동자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벌였다.


산디노의 독립군이 무장투쟁을 벌이자, 미국의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 대통령은 혁명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니카라과에 미군 병력을 더 파병했다. 당시 미 해병대가 동원한 전투기들은 게릴라의 해방구로 의심되는 마을을 무자비하게 폭격했다. 미군의 이러한 폭격으로 최소 수백 명 이상의 니카라과 민간인이 학살당했는데, 19271127일 미 해병대가 폭격한 한 마을에서는 32명의 여성과 11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도합 43명이 폭격으로 학살당했다. 리우스라는 멕시코 만화 작가가 쓴 만화 산디니스타 니카라구아에 따르면, 최소 300명 이상의 니카라과 민간인이 미군 폭격으로 사망했다. 미군의 이러한 학살은 혁명의 열기를 꺾지 못했고, 초기 2,000명 정도의 게릴라는 1931년에 그 규모가 6,000명으로 증가했다. 이처럼, 산디노의 정의로운 투쟁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미국의 식민 지배에 큰 타격을 주었다.

 

미군은 1933년까지 니카라과에 해병대 병력을 주둔시켰는데, 이들은 새로운 대통령인 사까사(Sacasa)가 대통령이 되자 철군했다. 당시 산디노는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사까사에게 안전보장을 비롯한 몇 가지 조건을 요구했고, 사까사는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이는 속임수였고, 산디노는 참모들과 함께, 1934221일 밤 모두 사살됐다. 1933년 미국은 자신들의 이익을 방어해줄 인물로 아나스타시오 소모사(Anastasio Somoza)를 국가방위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소모사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시켰으며 궁극적으로 산디노와 그 참모들을 살해했다. 더 나아가 독립군 전사였던 사람들을 색출하여 투옥 및 살해했고, 산디노에 협력한 농민들을 체포·탄압했다.

 

이렇게 되면서, 니카라과에는 친미 독재자 일당인 소모사가 3대에 걸친 세습을 하는 시대가 열렸다. 물론 형식적으로 소모사는 대통령 직을 차지했다. 그러나 대통령제는 말이 대통령제지 군부권력에 기반한 철권 통치였다. 사람들은 북한에서 3대가 세습한다고 욕을 하지만, 정작 미국이 이러한 세습 독재자를 후원했다는 사실과 부패하기 짝이 없는 왕조 세력(사우디아라비아)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후원한다는 사실은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 소모사 일가의 재산은 어마어마 했다. 1974년 기준으로 이 일가의 재산은 9억 달러였고, 소모사 일가의 엄청난 부의 축적과 니카라과에 진출한 미국 기업들의 엄청난 외국 투자액에도 불구하고, 당시 니카라과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당시 니카라과의 실업률은 36%였고, 문맹율은 74%였으며, 60%가 영양실조였다. 전국민의 50.2%가 문맹이었고, 전국민의 70%가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으며, 4살이 되기 전에 사망하는 유아사망률은 최소 20% 이상이었다.

 

따라서 이런 소모사의 독재 세습 정치는 민중의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나 1959년 쿠바 혁명의 승리는 혁명 세력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니카라과 민중들은 이 승리에 고무되어 60여 차례나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무장봉기 조직들은 소모사의 국가방위군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학생운동 출신의 아마도르와 마르티네즈가 주축이 된 청년 애국단은 쿠바 혁명의 포코 이론과 체게바라의 무장투쟁론을 받아들였고, 몇몇 소규모 무장조직을 통합하여 1961년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그게 바로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The National Liberation Front of Sandinista)였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산디니스타는 과거 미국의 식민지배에 맞서 싸웠던 아우구스토 산디노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 산디노주의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산디니스타는 쿠바와 코스타리카 정부의 지원을 받아 농촌과 해방구 그리고 도시에 비밀리에 조직을 확대해나가면서 게릴라전을 벌였다. 정치투쟁과 무장투쟁을 동시에 벌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초기 포코 이론을 받아들여 무장투쟁을 벌였던 산디니스타들은 니카라과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적잖은 인명손실이 발생하기도 했다. 1967년 수도 마나과 중심가에서 소모사의 선거결과 조작에 항위하는 시위대는 니카라과 정부군의 무차별 총격으로 400명이나 학살당하기도 했다. 당시 니카라과의 정부군은 미 군사고문단에게 훈련을 받았고, 무장력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또한 미국은 고문단과 더불어 니카라과 정부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맞서 산디니스타 또한 초기 포코 이론에 따른 노선을 수정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이들은 군대를 모으는 전략을 도시 조직의 대학생을 끌어들이고, 은행 강도를 통해 돈을 모았으며, 니카라과 북중부 산악지대에 은거하여 농촌 지역을 지원기지로 만들어 대비했다. 이것이 바로 당시 산디니스타가 채택한 10여 년에 걸친 장기인민전쟁 노선이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여 베트남이라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렸는데, 산디니스타가 채택한 장기인민전쟁 노선은 미국의 침략에 맞선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The National Liberation Front in South Vietnam)의 혁명 승리 전진 과정에서 이루어진 인민 전쟁 전략을 경합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산디니스타에게 있어 이 혁명 승리의 전략 최종 목표는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진 하는 데에 가장 큰 장애물은 소모사 3대 세습 독재였으며, 최종적으로는 미제국주의와의 투쟁이 과제였다. 물론 1970년대 들어서 산디니스타들은 미군 고문단의 지원을 받는 니카라과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대원을 잃었고, 적잖은 지역에서 조직이 와해되기도 했지만, 민중속으로 들어가 조직활동과 방어적 전투를 계속한 결과 혁명 무장세력은 급격히 그 역략을 성숙시킬 수 있었다. 1970년대 초반의 경우 당시 소모사 일당들은 산디니스타들이 사실상 전멸했다고 믿었다.

 

1974년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74년 이후 산디니스타는 두 차례의 게릴라식 기습공격으로 소모사 정권에 큰 타격을 입혔고, 19741227일에는 미국 대사의 부임을 축하하는 연회장을 기습하여 미국 대사와 정부 고위관리들을 인질로 삼아, 정치범 석방과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등을 비롯해 산디니스타의 존재와 강령 그리고 대의를 만 천하에 알렸다. 물론 1975년의 경우 정부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산디니스타의 창설자이자 장기인민전쟁 노선을 수립한 지도자 폰세카 아마도르가 전투에서 전사하는 등 피해도 막심했다. 이에 따라 산디니스타는 1977년에 이르러 파벌이 3개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장기인민전쟁 노선을 따라 농민들과 연대하는 마오주의 파벌, 두 번째는 주로 공장의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파벌,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모든 반정부 세력들과 연대하는 제3의길 파벌이었다. 이 제3의 길 파벌이 바로 다니엘 오르테가와 그의 동생 움베르토 오르테가가 이끈 세력이었다.


오르테가 세력의 전략은 1978110월 발생한 라프렌사 편집장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 암살사건을 계기로 결실을 맺었다. 오르테가 세력은 2월 초 도시들을 공격하고 8월에는 마나과의 국회의사당에서 2천명에 달하는 인질을 붙잡아 산디니스타의 존재를 니카라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알렸다. 소모사는 몸값 50만 달러를 지불하고 정치범 59명을 석방하며 전국민적 봉기를 선동하는 산디니스타의 선언문을 방송하고, 파나마로 이어지는 안전통로를 보장하는 등 엄청난 굴욕을 당했다. 며칠 뒤인 9월 마테갈파, 마나과, 마사야, 레온, 치난데가, 에스텔리에서 반 소모사 봉기가 발생했으며, 오르테가 세력은 마테갈파를 제외한 나머지 도시의 헌병군 초소를 공격했고, 경무장한 다수의 민간인들이 봉기에 참여하여 마테갈파와 마나과를 제외한 나머지 도시의 헌병군 요새를 포위했다. 9월 봉기는 수천 명의 사망자를 내고 처참히 진압되었지만, 혁명운동의 고양 속에서 내부적인 통일을 이룩했다.

 

1978128월 산디니스타는 공동성명을 발표했고, 세 노선이 각 3인 위원으로 구성되는 9인 중앙상임위원회를 구성함으로써 혁명의 승리를 향한 거보를 내디딜 수 있었다. 더 나아가 통일전선 구축이라는 과제를 이룩하기 위해 나섰다. 197921일 산디니스타는 진보적인 소부르주아 정당인 독립자유당과 기독교 인민사회당이 연합하여 결성한 민족애국전선을 통해 최종적인 승리를 향해 전진했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전투원은 19795월에 5,000명을 넘겼고, 대중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19796월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승리를 향한 총 공세를 개시했다. 공세는 단순한 군사 공격 뿐만 아니라 전술적인 민중 봉기와 총파업으로 국가 방위군 병력을 최대한 분산시키고 자본제 사회의 재생산 과정을 일시에 정지시킴으로써 소모사 독재권력의 물질적 토대를 일격에 붕괴시키고자 했다. 총공세 게시 1개월 19일 만인 1979719, 산디니스타는 수도 마나과에 입성하여 임시 혁명정부를 구성했다. 소모사 3대 세습 독재정권은 물러갔고, 인민을 대표하는 새로운 혁명정부가 니카라과에 탄생했다.

 

18년간 지속된 내전은 참혹했다. 유엔의 보고서에 의하면, 내전을 통틀어 최소 4만 명 이상의 사망자, 20만 채의 가옥 파괴, 4만 명 이상의 고아, 75만 명의 기아상태, 100만 명의 난민, 16억 달러의 외채 그리고 국내 전산업의 1/3의 파괴됐다. 그리고 이것은 소모사 3대 세습 정권이 벌인 만행이었다. 놀랍게도 1979년 기준으로 니카라과의 인구는 371만 명이었는데, 미국에게 지원을 받던 소모사 정부는 이렇게 모든 것은 파괴 및 무너뜨려 놓고 자신의 이익만 챙겼던 것이다. 이에 대한 리우스의 평가를 들어보자.

 

이러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은 비로소 행복을 맛보았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을 해방시킨 것이다. 소모사의 40년 독재로부터, 또한 북쪽의 괴물 미제국주의자들로부터....”

 

이렇게 해서 산디니스타 혁명을 최종적인 성공으로 이끈 다니엘 오르테가와 혁명가들은 국가경제의 재건을 위해 소모사 일가와 국가방위대의 고위 지휘관, 정부 고위 관리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은행, 보험회사, 광물, 임업 자원을 국유화했다. 또한 1979년부터 1983년까지 토지개혁을 시행하여 약 7만 명의 농부들과 약 4,000개의 협동농장에 토지를 분배했다. 그리고 1980년에는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서 문맹퇴치 십자군을 조직했고, 많은 의료시설을 설립했다. 이와 함께 산디니스타 혁명정부는 소모사 정권하에서 저질러진 고문과 무고한 죽음을 확인하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혁명정부의 내무상 토마스 보르헤의 나는 산디니스타의 모토를 기억한다. 싸울 때는 가차없이, 그러나 일단 승리하면 관대하라는 내용의 연설을 통해서 국가방위대의 병사들에 대한 어떠한 보복행위도 금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사회 건설은 1980년대 난항을 겪게 되는데, 바로 미국이 니카라과에게 끔찍한 범죄를 자행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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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7-17 0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국이 니카라과에게 자행한) 그 범죄는 다름아닌 ‘이란 콘트라 사건‘이죠(!). 1986년에 터진 이란 콘트라 사건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날드 레이건이 (미국 기준으로) ‘적성국‘ 이란에 무기를 판 대금을 니카라과의 극우반군 ‘콘트라‘에게 갖다주고 그들(콘트라)을 지원한 사건입니다.

NamGiKim 2023-07-17 09:43   좋아요 1 | URL
네 유명하죠. 심지어 백무현 작가의 ‘만화 전두환‘에도 묘사됩니다.

2023-07-17 0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GiKim 2023-07-17 09:4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역사죠. 저도 공부하며 많이 놀랐습니다.

2023-10-10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GiKim 2023-10-10 18: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ㅎㅎㅎ
 

다큐멘터리 PBS 베트남 전쟁 관련한 리뷰를 거의 7개월간 안했네요. 사는 것이 바쁘다 보니 여러 차례 연기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렇게 가끔씩이라도 시간이 나면 긴 리뷰를 남기겠습니다.

(The Veneer of Civilization 인트로 영상 장면)


1946년 미국 미네소타주의 어스틴에서 태어난 팀 오브라이언(Tim O'Brien)은 22살이 되던 해인 1968년 징집장을 받고, 미군에 입대하게 됐다. 징집장을 받은 오브라이언은 부모님과 점심 식사를 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으로 복무한 그의 부모님은 아들인 오브라이언을 베트남에 보내게 됐다.

(팀 오브라이언, 그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인 미라이 학살에 대해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는 오브라이언의 이야기를 들려준 다음 화면을 베트남으로 바꿔 방송의 한 구절을 보여준다.


“모든 민간인을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해라!”


(베트남 전쟁 당시 매주 발생하는 미군 전사자 수치, 미국의 언론들은 이를 통해 술 마시고 죽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과 베트콩의 사망자가 더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영국 런던에서 열린 베트남 전쟁 반전 시위, 영국의 기마 경찰들도 보인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베트남 전쟁 반전 시위, 68혁명 당시 파리는 혁명의 열기로 넘쳤다. 파리의 젊은이들은 호치민과 체게바라 그리고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들고 거리로 뛰쳐 나왔다.)


(스웨덴 스톡홀롬에서 열린 베트남 전쟁 반전 시위, 스웨덴 또한 반전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팀 오브라이언이 미군에 입대한 1968년은 격동의 한 해였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기습으로 시작된 구정 대공세는 미국뿐만 아니라, 서구 유럽에서 베트남 전쟁 반전시위를 촉발시켰으며, 이른바 68혁명의 시작을 알렸다. 스웨덴·덴마크·핀란드·노르웨이·영국·서독·프랑스·이탈리아·네덜란드 그리고 일본까지 격렬한 베트남 전쟁 반전시위에 휩싸였다. 심지어 독일에서는 68혁명을 계기로 체게바라식 무장투쟁을 도시에 적용한 무장활동을 벌이는 단체 바더 마인호프(Baader Meinhof)가 등장했고, 일본에서는 이와 비슷한 적군파(赤軍派)가 등장했다.

(미군 본토에서 벌어진 건물 파괴,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방화가 일어났고 건물이 불타는 일도 종종 있었다.)


(베트남 전쟁의 잔혹성을 알리는 반전 시위대)


(흑인을 무자비하게 체포 및 조사하는 미국 경찰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깃발을 들고 반전시위를 하는 미국의 젊은이들)


구정 대공세로 확장된 반전 운동은 미국에서 많은 의제를 사회이슈로 불러왔다. 미국 사회는 흑인 문제, 여성 문제, 전쟁 문제, 사회 문제, 장애인 문제 등 온갖 모순점들이 이 베트남 전쟁을 통해 드러났다. 물론 여전히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북베트남을 향한 미군의 폭격은 계속 됐다. 한편 미국의 언론은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군 전사자 수치를 일일이 보도를 했는데, 이는 미군 전사자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리려는 목적에서였다. 결국 이런 점이 심화되며,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대선에 출마하지 않게 됐고, 미국 민주당은 다른 후보를 내세워 대선을 치러야 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됐다. 다큐멘터리의 한 내용을 보자.


“그 후 몇 달간, 남베트남의 전쟁터와 시골에서 진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척이 너무 더디고 인명 피해가 컸기에, 전쟁을 반대하는 또 다른 전쟁이 미국 본토에서 심화됐고, 계층과 세대가 서로 등을 돌렸으며, 정치 지도자들을 향한 불신이 퍼졌습니다.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은 전쟁을 끝낼 능력도 의지도 없어 보였습니다. 전국 각지의 젊은이들이 계속해서, 그들의 아버지들과 할아버지들이 다른 전쟁에서 싸워야 했을 때, 직면하지 않아도 됐던  문제와 선택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국민이 국가를 위해 어떤 의무를 져야 하는가? 자신이 믿지 않는 전쟁에서 싸우라고 한다면 어떡해야 하나? 군인은 은밀한 적과 그들이 지켜야 하는 베트남 민간인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케산의 북베트남군 포위망을 뚫기 위해 투하된 네이팜 폭탄이 터지는 장면)


사실 구정 대공세는 미군과 남베트남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구정 대공세 10일 전 시작된 케산 포위전은 77일이 지나서야 끝났다. 미국은 북베트남군이 만들어 놓은 케산 포위망을 뚫기 위해, 막강한 화력을 쏟아부었고,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수천 명에서 1만 5,000명의 전사자를 낸 채, 물러나게 됐다. 케산 포위전 당시 존슨이 했던 말은 다음과 같다.


“케산이 또 다른 망할 디엔비엔푸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돼!”

(크레이튼 에이브람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지 패튼 휘하에서 싸운 에이브람스는 이탈리아 전선과 벌지 전투에서 탱크 부대를 지휘하면서 활약한 미국의 전쟁영웅이었다. 이후 그는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를 이어 베트남 전쟁 당시 주월미군 총 사령관이 됐다. 그의 이름은 미군 주력 전차인 M1 탱크의 이름이기도 하다.)


구정 대공세가 끝난 이후 남베트남 주둔 미군은 새로운 미군 사령관을 맞이하게 됐다. 그의 이름은 크레이튼 에이브람스(Creighton Abrams)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 유명한 조지 패튼 중장의 직속 부하였으며,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은 이후 걸프전쟁에서 활약하게 되는 미군 탱크 이름에도 붙게 됐고, 그 탱크가 바로 M1 에이브람스다. 무튼 에이브람스는 전임자인 웨스트모어랜드 보다 미국인 기자들에게 솔직하고 열린 사람으로 인식됐다고 한다.

(전사 10;1 비율을 보여주는 장면)


(빈센트 오카모토, 일본계 미국인 출신의 참전용사로 베트남 전쟁 당시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동양계 미군이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군의 전과 보고 및 달성은 여전히 시체의 숫자를 세는 바디 카운드였다. 즉, 미군 2명이 전사하고 베트콩 20명이 전사하여 비율이 1/10이면 엄청난 전과로서 보도됐다. 이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으로 참전했던 빈센트 오카모토(Vincent Okamoto)가 한 얘기로 이를 통해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군들의 행위가 여전히 잔혹했음을 일면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빈센트 오카모토의 가족 사진, 그의 가족은 일본 이민자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인 강제수용소에서 생활했으며, 그의 형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따라서 오카모토 또한 그들을 본받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미군에 입대한 빈센트 오카모토)


빈센트 오카모토는 일본계 미국인 출신의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러니까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행정명령 제9066호에 의해 강제 이주당한 일본인 수용소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많은 형 둘은 일본계 미국인 부대로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싸운 442연대 전투부대 출신이었고, 이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김영옥(한국계 미국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인 부대에서 활약함.)이 이끌었던 부대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카모토는 이러한 자부심을 가지고,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자 미군에 입대하여 베트남으로 갔으며, 소대장자리까지 진급했다.

(구찌터널의 구조를 보여주는 지도, 글쓴이 또한 베트남 호치민시 근처에 있는 구찌 터널을 가본적이 있다. 이때 구찌터널을 구경하며 베트남 인들의 투쟁정신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구찌 터널에서의 싸움은 미군들에게도 지옥과도 같은 일이었다.)


오카모토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베트남 여행 코스로 많이 가는 구찌 터널 쪽에 배치되어 베트콩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는데, 운 좋게 한 마을에서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일본계 미국인 출신인 오카모토에게 있어 이는 베트남에 와서 몇 개월 만에 먹는 쌀밥이었다. 마을의 한 할머니가 해준 쌀밥을 먹은 그는 집안에 쌀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고, 순간적으로 베트콩이 있는지 의심을 했다. 그렇게 해서 땅굴로 의심되는 곳을 발견하여 그곳에 수류탄을 던졌고 그렇게 해서 7~8명을 사살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거기에 있던 베트콩은 자신에게 밥을 해준 할머니의 아들이었고,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살인했다는 걸 인지하게 됐다고 한다.

(훈장을 수여받는 빈센트 오카모토)


이후 그는 22번의 헬기 공격 작전을 수행했고, 캄보디아 국경지대로 도망치는 베트콩을 추격하는 임무를 맡다가 부상당했고, 생존하여 미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당시 작전에서 새운 공로로 오카모토는 수훈 십자 훈장을 받았고, 오카모토는 베트남 전쟁에서 살아남아 훈장을 가장 많이 받은 일본계 미국인이 됐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의 선전물, 북베트남을 침범한 미군 항공기 2,500대 가까이를 격추시켰다고 써 있다.)


(구정 대공세를 보도하는 북베트남의 선전)


(승리만 얘기했다고 말하는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신문을 읽고 있는 베트남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구정 대공세는 분명히 미국과 남베트남의 승리로 끝났지만, 당시 북베트남 신문에 보도되던 것은 자신들의 승리뿐이었다. 당시 북베트남에서는 피해 얘기를 상세히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북베트남의 승리만 강조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북베트남은 수천 대의 미군 항공기를 격추시켰는데, 북베트남의 언론에는 이러한 사실만 있었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후이둑(Huy Duc)이란 베트남인은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현재도 베트남 사람들이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아이들과 동포가 죽었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다음은 북베트남군 참전용사 출신인 팜룩(Pham Luc)의 증언이다.


“신문과 라디오는 단 한 번의 패배도 언급하지 않았어요. 그 신문을 즐겨 읽었지만, 패배 얘기는 전혀 없었습니다. 좀 이상함을 느꼈죠. 승리만 있다면 사람들이 묻겠죠. 내 아들은 어디 있고, 어디서 죽었는지요. 참 복잡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그 땐 조용히 있는 게 제일 안전했습니다.”

(자유와 독립보다는 소중한 것이 없다는 호치민의 명언이 세겨진 한 오두막)


북베트남의 언론은 승리했음을 강조했지만, 전략적으로 승리한 사실과는 별개로 여전히 남베트남 친미 꼭두각시 정부는 유지됐고, 미 공군은 무자비한 공습을 북베트남에 이어나갔다. 이 부분과 더불어 다큐멘터리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바로 북베트남에서 징집된 이들 대다수가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의 자식들로 혁명의 승리를 믿었던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소련으로 유학을 간 베트남의 학생들)


다른 한편, 북베트남 정치 지도부의 자식들 중 일부는 혁명전쟁에 참전했지만, 레주언(Le Duan)의 아들처럼 징집을 피해 유학길에 오른 이들도 많았음을 다큐멘터리는 강조한다. 그러나, 과연 남베트남은 그런 징병기피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생각해보면, 미국의 지도부의 부패를 생각해보면, 가진 것 없던 북베트남 지도부를 이에 비견되는 듯이 비교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유학을 떠나는 이들 중에 꼭 지도부의 자식들만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도 아니며, 노동자 출신의 비율도 높았지만 다큐멘터리는 이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도 맥락생략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리처드 닉슨, 1968년 대선에서 당선됐다. 이후 그는 베트남에서의 철군을 주장했으나, 궁극적으로 전쟁을 확장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미국 본토에서는 존슨이 대선 출마를 하지 않게 되면서, 공화당의 새로운 인물이 인기를 얻고 있었다. 바로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이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부통령을 맡았고 케네디와의 대선에서 간당하게 졌으며,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맡았던 닉슨은 베트남 전쟁의 혼란 덕분에 미국 역사상 가장 멋지게 정치계에 돌아오게 됐다. 따라서 미국의 공화당 대선 후보는 리처드 닉슨이 확정됐다.

(반전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미국 경찰들)


반전 운동은 대선에도 영향을 미쳐서, 2020년 개봉한 영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Trial of the Chicago)’의 배경이 된, 사건이 68년에 발생했다. 당시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거리에서 대규모의 반전시위가 벌어졌는데, 이를 진압하는 경찰의 모습은 참으로 폭력적이었다. 곤봉으로 시위하는 사람을 닥치는 대로 때리며, 이들을 체포했고, 최루탄을 발사했으며, 그로 인한 부상자들도 속출했다. 오죽하면, 이런 강경진압에 대해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에 비유되기까지 했을 정도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미국의 유명한 방송인인 월터 크론카이트는 다음과 같이 방송을 했다.

(반전 시위대를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미국 경찰들, 한국의 전경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전경들도 이렇게 사람을 마구잡이로 패고 폭행했다.)


(저녁에 있을 집회를 위해 모여드는 시민들)


“안전과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시위자들에게는 표현의 자유조차 상당히 제한적입니다. 민주당 전당대회가 경찰국가에서 곧 개최될 겁니다.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론 페리지가 호주에서 본 텔레비전의 한 장면)


헬리콥터 승무원장이던 론 페리지(Ron Ferrizzi)는 이런 일이 발생하던 시기인 1968년 8월 마지막 주에 호주에 갔는데, 숙소에서 TV를 키니 첫 장면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쯤 되 보이는 경찰들이 자신 또래의 아들들을 무자비하게 곤봉으로 패고 있는 모습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그는 “미국을 아끼는 사람이면 누구나 정글에서 허깨비 잡으러 지구 반대편에 보내져 아무 이유없이 누군가의 할머니를 죽인다는 걸 깨달았다.”고도 증언했다. 그와 동시에 미국이 상당히 분열되어 있음을 론 페리지는 깨달았다.

(당시 롱안의 모습)


(롱안 지역에 살던 일반적인 베트남인들)


(롱안의 선무공작에 대해 보도하고 있는 한 미국인 여기자)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 최남단에 있는 롱안(Long An) 지역은 1960년대 초 응오딘지엠 정권 시점부터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의 선무공작의 중요한 시험장이었다. 1968년 구정 대공세 이후 에이브람스 장군은 수십만이나 되는 남베트남군이 시골을 확보할 여유가 생겼고, 사이공 정부가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피닉스 프로그램에 동원된 남베트남 인사)


(베트콩을 도운 것으로 의심되는 한 노인을 누워놓고 물고문하는 남베트남군, 이렇게 피닉스 프로그램에 동원된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애나 어른 노인 여성을 가리지 않고 고문과 학살 그리고 전쟁범죄를 자행했다.)


(얼굴에 수건이 덮혀 물고문 당하는 노인)


(고문에 꿈쩍하지 못하는 노인)


(남베트남군의 포로로 잡힌 10대로 보이는 베트남인)


이에 따라, 베트콩 용의자를 색출하고 또 그들의 정치적 사회 기반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작전을 세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피닉스 프로그램(Phoenix Program)이었다. 피닉스 프로그램은 대략 2년간 진행됐고, 특히 롱안 지역에서 많은 작전 및 검거를 벌였다. 당시 미군 고문단 장교와 남베트남군 특수부대는 베트콩 용의자로 보이는 이들을 색출했는데, 이 과정에서 잔혹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다큐멘터리가 전달하는 내용을 들어보자.


“나중에 가서야 피닉스 프로그램을 지휘했던 부장은 미국 의회에 고백했습니다. 살해된 사람 2만 명 이상이 무고한 사람이 몇 명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요.”

(베트콩 용의자로 의심받아 총살당한 사람의 시신)


(이를 상세하게 사진으로 남긴 미국측 자료-1)


(이를 상세하게 사진으로 남긴 미국측 자료-2)


(남베트남의 응우옌반티우 대통령, 그는 미국과 협력하여 이런 학살과 전쟁범죄를 자행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의 책 저자이자 동명 다큐멘터리의 제작자인 마이클 매클리어(Michael Maclear) 또한, 살해된 사람 2만 명 중 이들이 베트콩이라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책에 썼다. 보통의 경우 피닉스 프로그램으로 학살당한 민간인의 숫자를 2만 명에서 4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러한 전쟁범죄와 학살 때문에, 역으로 베트남인들은 티우 정부를 원망하게 됐다. 롱안 지역의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35%의 사람들이 티우 정권에 투표할 것임을 밝혔고, 20%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지지했으며, 45%는 베트콩과 미군이 지원하는 사이공 정부를 반대하는 누구든 지지한다.”고 결과가 나왔다.

(1960년대 프랑스 파리의 모습, 파리의 상징 중 하나인 개선문이 보인다.)


(1968년 프랑스 파리에 모인 각국 대표단들)


1968년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베트남 전쟁 당사자들끼리의 회담이 열렸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회담은 자리 배치 문제 때문에 모든 것이 지연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북베트남 대표단은 사각 테이블에서 테이블 각 면에 각 대표가 않아 4자회담을 하자고 주장했다. 즉, 하노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사이공 정부(남베트남), 미국 모두가 말이다. 하지만, 남베트남측 대표단은 하노이와 베트콩이 테이블의 같은 쪽에 앉지 않으면,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교착 상태는 10주간 이어졌으며, 궁극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한건 소련이었다. 소련은 바로 원형탁자에 앉아 마주보고 회담을 하자고 제안했고, 4국 모두 이를 수용했다.

(부상당한 한 미군)


(참전용사 칼 말렌테스, 그는 높은 학위를 바탕으로 징집을 면할 수 있었음에도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후회가 되는 점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팀 오브라이언)


다큐멘터리는 미국의 참전용사들의 경험을 통해, 전쟁의 아픔을 지속적으로 드러내려고 한다. 오리건주 애스토리아에서 태어난 칼 말렌테스의 경우 벌지 전투 참전 용사의 아들이었다. 그는 예일 대학를 다녔고 옥스퍼드 대학에도 다녔지만,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드문 인물이었다. 말렌테스는 베트남에서 가서 부도덕한 짓을 할 것이라 알고 있었지만, 베트남에 참전했다. 또한 앞서 언급한 오브라이언의 “제가 정말 후회하는 건 용기가 부족했던 것이에요.”라는 인터뷰 증언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는 베트콩에게 포로로 붙잡혀 남베트남 밀림 한 가운데 있던 참전용사의 증언도 들려준다. 그러면서, 전쟁의 잔혹함과 비극성을 강조한다.


켄 번즈의 베트남 전쟁 시리즈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명작이지만, 다른 한편 미국식 애국주의적 서사와 참전용사들에 대한 헌신과 그들의 고통을 보여주려는 노력도 절대 게을리 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고도 생각한다. 즉, 그런 점이 미국 위주의 관점이라는 비판을 피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다큐멘터리가 1시간 50분의 러닝타임을 자랑하다보니, 7화 리뷰 나머지는 후반부에서 다룰 생각이다. 


그럼 긴 글 읽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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