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당시 중국 연안에 온 딕시 사절단의 데이비드 배럿 대령과 주더 그리고 마오쩌둥)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중립국의 위치를 고수하던 미국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을 받게 되면서 전쟁에 참전하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럽과 태평양 전선 양측에서 전투를 치렀던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승리가 있던 1942년 6월 새로운 조직 하나를 창설하는 데, 그게 바로 현재 CIA의 전신인 OSS 즉 전략사무국이었다. 전략 사무국은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서 반파시즘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차원에서의 활동을 전개했었다. 쉽게 말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활동했던 조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당시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던 중국은 미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었다. 특히나 랜드리스(Land Lease)라 하여 미국은 중국 국민당 정부에게 결코 적잖은 물자와 탄약을 지원했었다. 장제스 휘하의 중국 국민당군이 전통적인 전투를 많이 치렀던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인들에게는 무능하고 부패한 집단으로 보였다. 물론 장제스와 국민당 측의 부정부패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고, 전투에서의 무능함을 보였던 점이 미국인들 눈에 들어왔던 것도 있었다. 중국 내 미군 총사령관이었던 조지프 스틸웰 중장의 경우 “국민당 군대는 일본군과 싸우는 데 최소한의 물자만 쓰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분명 국민당군은 전통적인 군사작전에 있어서 결코 적잖은 전투를 치렀지만, 본인들이 기존에 부각시켰던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다시 한 번 미국에게 부각시켰다. 바로 1944년 일본이 전개한 대규모 군사작전인 이치고 작전에서였다. 총 60만 명의 병력과 800대 이상의 탱크가 동원되었던 이 작전에서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참패를 거듭했었다. 이것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장제스 정권을 권위적이며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으로 인식하고, 국민당에 등을 돌리게 된 이유였다. 여기서 미국은 중국에서 또 다른 세력과 접촉을 시도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마오쩌둥이 이끄는 연안지대의 중국 공산당이었다.
제2차 국공합작 이후 대장정에서의 명성과 민심을 토대로 세력을 확장했던 마오쩌둥은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과정속에서 군대와 당원의 숫자를 기하급수적으로 증강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장제스군은 1941년 이른바 신사군 사건을 일으켜 1만 명에 달하는 중국 공산당 정예부대인 신사군을 포위하여 궤멸시키기는 짓을 벌이기도 했었다. 그래도 마오쩌둥은 세력을 확장했다. 1942년부터 시작한 당내 권력투쟁 및 계급투쟁이었던 정풍운동은 1943년 마오쩌둥이 중국 공산당에서 세력을 공고히 하면서 마무리 되었으며, 연안에 근거지를 둔 중국 공산당 또한 국민당이나 일본에게 있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거기다 마오쩌둥은 좌파적 저널리스트인 에드가 스노의 저서 <중국의 붉은 별>을 통해 명성을 얻기까지 했었다. 따라서 미국은 이러한 중국 공산당과 접촉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무튼 루스벨트 정부는 장제스와 중국 국민당 정부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장제스는 “공산당과 싸움을 완전히 끝내기 전에는 일본과 전쟁하지 않는다”며 고집을 꺽지 않는 모습도 보였다. 또한 실제로 버마 전투 당시 장제스는 미국의 지원하는 장비의 상당량을 공산당과의 싸움을 대비하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1944년 미국 군부와 정보기관 일각에서는 중국공산당과의 협력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1944년 7월 22일 미국 C-47 항공기 한 대가 연안 상공아 나타났다. 창륙하는 과정에서 왼쪽 바퀴가 앞에 있는 무덤에 부딪혀 휘청거리며 프로펠러까지 떨어져 나가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활주로에 착륙했다. 이 비행기에는 OSS 출신 인사들이 있었다. 이들이 바로 딕시 사절단(Dixie Mission)이었다. 딕시 사절단은 중국 공산당의 저우언라이의 영접을 받았고, 이 사실을 알게된 마오저둥은 해방일보에 ‘우리의 친구들’이란 제목의 글을 게제 함으로써 환영 분위기를 조성했다. 딕시 사절단은 마오를 비롯한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헐리우드 영화들을 보여주었으며, 특히나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가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그해 8월 초 딕시 사절단의 두 번째 파견 인원이 도착했으며, 외교관인 레이먼드 러든이 사절단을 이끌었다. 당시 미국의 목적은 분명했다. 미국은 중국공산당과 합의를 이룸으로써 국민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쳐 일본을 물리치는 계기를 만들고 싶어 했다. 1944년 11월 7일 패트릭 헐리 소장이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연안을 출발했고, 마오쩌둥을 만나게 됐다. 당시 헐리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협정문 초안을 직접 작성하여 마오쩌둥에게 제시하기도 했다. 비록 조항 몇몇 부분에서 마오쩌둥의 입장과 부딪혔지만 서로 신뢰를 보이는 의미에서 양측이 최종안에 정식으로 서명까지 했었다.
실제로 그들은 많은 것을 약속했었다. 마오쩌둥은 미국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1944년 공산당의 명칭을 신민주주의당으로 바꾸는 것을 생각하기도 했었다는 이야기가 존재할 정도다. 또한 1945년 7월 말에는 이른바 미국 감시단(American Observer Group) 32명이 연안을 방문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미국 OSS가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과 협력관계를 늘려나가면서 중국 공산당에 대한 물자지원도 행해졌다. 또한 마오쩌둥은 OSS의 총책임자 윌리엄 도노반에게 정보와 자금 그리고 무기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겨냥한 중대 신호를 보내기도 했었다. 더 나아가 OSS와 중국 공산당 군대가 일본이 장악하고 있는 산둥반도에 대한 공동 상륙작전을 추진하기로 합의까지 했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공연합 정책 아래 마오쩌둥은 미국 루스벨트 정부와의 관계 개선에 심혈을 기울였다. 루스벨트 정부는 소련과의 협력 아래 중국 대륙을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분할하여 관리하는 방향으로 협력하고 있었지만, 1945년 4월 그가 서거하면서 강경한 반공주의자인 해리 트루먼이 권력을 승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당연히 미국과 중국 공산당의 관계는 멀어졌고, 냉전의 조짐이 보이면서 미국도 중국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갔다. 1946년 제2차 국공내전이 장제스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자, 미국은 제2차 국공내전에서 20억 달러의 원조를 장제스에게 제공하기에 이른다.
참고자료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심규호(역), 민음사, 2017
『마오쩌둥 2』, 필립 쇼트, 양현수(역), 교양인, 2019
『일본 제국 패망사』, 존 톨랜드, 박병화(역) 이두영(역) 권성욱(감수), 글항아리, 2019
『미중 패권전쟁은 없다 (G2 시대 한국의 생존 전력)』, 한광수, 한겨레출판사,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