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당시 중국 연안에 온 딕시 사절단의 데이비드 배럿 대령과 주더 그리고 마오쩌둥)


2차 세계대전 초기 중립국의 위치를 고수하던 미국은 194112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을 받게 되면서 전쟁에 참전하게 됐다. 2차 세계대전에서 유럽과 태평양 전선 양측에서 전투를 치렀던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승리가 있던 19426월 새로운 조직 하나를 창설하는 데, 그게 바로 현재 CIA의 전신인 OSS 즉 전략사무국이었다. 전략 사무국은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서 반파시즘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차원에서의 활동을 전개했었다. 쉽게 말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활동했던 조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당시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던 중국은 미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었다. 특히나 랜드리스(Land Lease)라 하여 미국은 중국 국민당 정부에게 결코 적잖은 물자와 탄약을 지원했었다. 장제스 휘하의 중국 국민당군이 전통적인 전투를 많이 치렀던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인들에게는 무능하고 부패한 집단으로 보였다. 물론 장제스와 국민당 측의 부정부패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고, 전투에서의 무능함을 보였던 점이 미국인들 눈에 들어왔던 것도 있었다. 중국 내 미군 총사령관이었던 조지프 스틸웰 중장의 경우 국민당 군대는 일본군과 싸우는 데 최소한의 물자만 쓰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분명 국민당군은 전통적인 군사작전에 있어서 결코 적잖은 전투를 치렀지만, 본인들이 기존에 부각시켰던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다시 한 번 미국에게 부각시켰다. 바로 1944년 일본이 전개한 대규모 군사작전인 이치고 작전에서였다. 60만 명의 병력과 800대 이상의 탱크가 동원되었던 이 작전에서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참패를 거듭했었다. 이것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장제스 정권을 권위적이며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으로 인식하고, 국민당에 등을 돌리게 된 이유였다. 여기서 미국은 중국에서 또 다른 세력과 접촉을 시도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마오쩌둥이 이끄는 연안지대의 중국 공산당이었다.

 

2차 국공합작 이후 대장정에서의 명성과 민심을 토대로 세력을 확장했던 마오쩌둥은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과정속에서 군대와 당원의 숫자를 기하급수적으로 증강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장제스군은 1941년 이른바 신사군 사건을 일으켜 1만 명에 달하는 중국 공산당 정예부대인 신사군을 포위하여 궤멸시키기는 짓을 벌이기도 했었다. 그래도 마오쩌둥은 세력을 확장했다. 1942년부터 시작한 당내 권력투쟁 및 계급투쟁이었던 정풍운동은 1943년 마오쩌둥이 중국 공산당에서 세력을 공고히 하면서 마무리 되었으며, 연안에 근거지를 둔 중국 공산당 또한 국민당이나 일본에게 있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거기다 마오쩌둥은 좌파적 저널리스트인 에드가 스노의 저서 <중국의 붉은 별>을 통해 명성을 얻기까지 했었다. 따라서 미국은 이러한 중국 공산당과 접촉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무튼 루스벨트 정부는 장제스와 중국 국민당 정부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장제스는 공산당과 싸움을 완전히 끝내기 전에는 일본과 전쟁하지 않는다며 고집을 꺽지 않는 모습도 보였다. 또한 실제로 버마 전투 당시 장제스는 미국의 지원하는 장비의 상당량을 공산당과의 싸움을 대비하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1944년 미국 군부와 정보기관 일각에서는 중국공산당과의 협력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1944722일 미국 C-47 항공기 한 대가 연안 상공아 나타났다. 창륙하는 과정에서 왼쪽 바퀴가 앞에 있는 무덤에 부딪혀 휘청거리며 프로펠러까지 떨어져 나가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활주로에 착륙했다. 이 비행기에는 OSS 출신 인사들이 있었다. 이들이 바로 딕시 사절단(Dixie Mission)이었다. 딕시 사절단은 중국 공산당의 저우언라이의 영접을 받았고, 이 사실을 알게된 마오저둥은 해방일보에 우리의 친구들이란 제목의 글을 게제 함으로써 환영 분위기를 조성했다. 딕시 사절단은 마오를 비롯한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헐리우드 영화들을 보여주었으며, 특히나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가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그해 8월 초 딕시 사절단의 두 번째 파견 인원이 도착했으며, 외교관인 레이먼드 러든이 사절단을 이끌었다. 당시 미국의 목적은 분명했다. 미국은 중국공산당과 합의를 이룸으로써 국민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쳐 일본을 물리치는 계기를 만들고 싶어 했다. 1944117일 패트릭 헐리 소장이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연안을 출발했고, 마오쩌둥을 만나게 됐다. 당시 헐리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협정문 초안을 직접 작성하여 마오쩌둥에게 제시하기도 했다. 비록 조항 몇몇 부분에서 마오쩌둥의 입장과 부딪혔지만 서로 신뢰를 보이는 의미에서 양측이 최종안에 정식으로 서명까지 했었다.

 

실제로 그들은 많은 것을 약속했었다. 마오쩌둥은 미국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1944년 공산당의 명칭을 신민주주의당으로 바꾸는 것을 생각하기도 했었다는 이야기가 존재할 정도다. 또한 19457월 말에는 이른바 미국 감시단(American Observer Group) 32명이 연안을 방문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미국 OSS가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과 협력관계를 늘려나가면서 중국 공산당에 대한 물자지원도 행해졌다. 또한 마오쩌둥은 OSS의 총책임자 윌리엄 도노반에게 정보와 자금 그리고 무기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겨냥한 중대 신호를 보내기도 했었다. 더 나아가 OSS와 중국 공산당 군대가 일본이 장악하고 있는 산둥반도에 대한 공동 상륙작전을 추진하기로 합의까지 했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공연합 정책 아래 마오쩌둥은 미국 루스벨트 정부와의 관계 개선에 심혈을 기울였다. 루스벨트 정부는 소련과의 협력 아래 중국 대륙을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분할하여 관리하는 방향으로 협력하고 있었지만, 19454월 그가 서거하면서 강경한 반공주의자인 해리 트루먼이 권력을 승계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당연히 미국과 중국 공산당의 관계는 멀어졌고, 냉전의 조짐이 보이면서 미국도 중국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갔다. 1946년 제2차 국공내전이 장제스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자, 미국은 제2차 국공내전에서 20억 달러의 원조를 장제스에게 제공하기에 이른다.

 

참고자료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심규호(), 민음사, 2017

 

마오쩌둥 2, 필립 쇼트, 양현수(), 교양인, 2019

 

일본 제국 패망사, 존 톨랜드, 박병화() 이두영() 권성욱(감수), 글항아리, 2019

 

미중 패권전쟁은 없다 (G2 시대 한국의 생존 전력), 한광수, 한겨레출판사, 20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스탈린이 대학살이라는 우크라이나 친나치 반동들의 새빨간 거짓말을 듣다보면 진심으로 빡이 돈다. 스탈린 동지의 집산화가 오히려 미래의 기근을 막았다. 우크라이나 반동들은 날조의 신화를 만들어 내면서 사악한 거짓말들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스탈린 동지에 대한 중상모략을 중지하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북한의 헛소리.

제발 북한은 이런것좀 만들지좀 말았으면 좋겠다. 본인들이 체제를 유지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런거 만들면 그냥 웃음거리로 밖에 안된다는 거를 왜 생각 못하는 걸까? 나도 평소에 북한을 이해하려 하지만 이건 진짜 뻥이 너무 심한건 둘째치고, 남한 민중에게 1도 안먹히고 조롱만 당하잖아. 솔직히 이 영상에 달린 댓글들만 봐도 조롱밖에 없는데...... 거기다 과거에는 이라크 전쟁때 이런 얘기를 했으면서.

(아래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에 나오는 내용)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라크의 최대 실수는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라크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미국은 절대 이라크를 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핵 관련 사찰도 무장해제도 절대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그런 타협을 해서 제국주의자들과 그 추종 세력이 제기한, 핵 사찰 및 무장해제 요구를 수용했더라면, 우리는 벌써 이라크와 같은 비참한 운명을 맞았을 것이다. 우리에게 조금만큼의 양보나 타협도 기대하지 말라”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322~3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레닌주의로 이끈 길(The Path Which Led Me To Leninism)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저는 파리에서 생활했습니다. 사진관에서 일하기도 했고, ‘중국고미술’ 화가로도 일했습니다. 가끔은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이 베트남에서 자행한 범죄를 비난하는 내용의 간단한 인쇄물을 배포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저는 자연스럽게 10월 혁명을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10월 혁명의 역사적 중요성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레닌은 자신의 동포들을 해방시킨 위대한 애국자였기에 저는 그에게 반했으며 그를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의 저서를 읽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프랑스사회당에 가입한 이유는 사회당의 ‘신사 숙녀, 여러분’께서 저를 포함해서 억압받는 인민들의 투쟁에 공감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까지 당이 무엇인지, 노동조합이 무엇인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 사회당 세포조직 사이에서는 제2인터내셔널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 ‘2.5인터내셔널’을 건설해야 하는지, 아니면 레닌이 만든 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해야 하는지를 두고 열띤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정기적으로 모임에 참가했고 발표자들의 말을 경청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이처럼 토론이 심각해지지? 제2인터내셔널이든, 2.5인터내셔널이든, 제3인터내셔널이든, 혁명을 수행할 수 있지 않은가? 왜 이처럼 언쟁해야 하나? 그럼 제1인터내셔널은 어떤가? 그것은 어찌되었을까?

어떤 인터내셔널이 식민지 국가 인민들의 편에 서 있는 가야말로 가장 궁금해 했던 문제이지만 모임에서는 논의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이 질문을 한 모임에서 제기했습니다. 일부 동료들은 제2인터내셔널이 아니라 제3인터내셔널이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누군가 저한테 《뤼마니테》에 실린 레닌의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를 읽어보라며 건네주었습니다.

이 논문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정치적 개념들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반복하여 읽고 또 읽었고, 마침내 핵심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 논문을 통해 위대한 감성과 열정, 계몽, 그리고 자신감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방에 혼자 앉아서 군중들에게 연설하듯이 외쳤습니다. “순교한 애국자들이여,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해방을 위해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을 완벽하게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세포조직 토론에서 주로 이야기를 듣기만 했습니다. 저는 발표자들의 논리를 분명히 이해할 수 없었고, 누가 옮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논문을 읽고 난 후부터, 저는 논쟁에 뛰어들었고 열정적으로 토론에 참여했습니다. 비록 제 프랑스어 실력이 부족하여 모든 생각을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저는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을 공격하는 주장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저의 유일한 논증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만일 당신이 식민주의를 규탄하지 않는다면, 만일 당신이 식민지 인민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면, 도대체 당신이 하고자 하는 혁명이란 어떤 것입니까?’

제가 소속되어 있는 세포조직 모임에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다른 당 세포조직 모임에도 참여하여 저의 입장을 변호했습니다. 여기서 마르셀 카섕, 베이앙 쿠튀리에, 몽무소를 비롯한 여러 동지들 덕분에 저의 지식이 확장되었다는 점을 꼭 언급해야겠습니다. 결국 저는 투르 회의에서 그들과 함께 제3인터내셔널 가입 안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제가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을 신뢰하게 되었던 까닭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애국심 때문이었습니다. 투쟁 중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학습하고 실질적인 활동에도 참여하면서, 저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만이 전 세계의 억압받는 민족들과 인민들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중국과 우리나라에는 마법의 ‘브로케이트 가방’에 관한 전설이 있습니다. 큰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이 가방을 열면 해결책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레닌주의는 우리 베트남혁명가들과 인민들에게 신비한 ‘브로케이드 가방’이자 나침반이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궁극적인 승리를 향한 길을 밝히는 태양과 같습니다.

1960년 4월
호치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짜오! 베트남] 위안부ㆍ세월호 비하… 극소수 댓글을 ‘베트남 여론’으로 둔갑

<예전에 한국과 베트남 사이가 악화될 때, 이런식의 유언비어 내지는 과장 및 왜곡보도가 유튜브나 인터넷 그리고 나무위키 같은 사이트들을 통해 이어졌습니다. 알고보니 이것도 왜곡이었습니다.>
베트남 가짜뉴스를 생산하는 유튜버들은 최근 “베트남인들이 일본군 위안부를 조롱하고 세월호 참사를 계속 비하하고 있다”는 주장을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의 기원을 추적해 보면 출처가 모호하거나 극소수 네티즌의 의견을 마치 전체 베트남인들이 동조하고 있는 것처럼 확대 해석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베트남인들이 위안부를 조롱했다는 근거는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한 베트남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진행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대화 캡처 화면이다. 대화의 맥락이 잘려 있어 발언 취지는 추론하기 어려우며 해당 장면 만으론 베트남 사회에 한국인 위안부를 얕잡아 보는 현상이 실재한다고 확신할 수 없다.

그나마 출처가 제시된 세월호 참사 비하 주장도 마찬가지다. 한국 유튜버의 영상에 어떤 베트남인이 “나는 세월호 때 많은 한국인이 죽어서 행복하다”는 댓글을 달았다는 것인데, 이 역시 베트남 전체 여론이라 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해당 댓글 외 다른 베트남인이 세월호 참사를 폄하했다는 추가 사례도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한국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자체 조사 결과, 베트남 여론이 형성되는 웨이보와 페이스북, 주요 인터넷 커뮤니티 어디에도 위안부와 세월호에 대한 언급이나 논란은 없었다”며 “베트남 정부도 ‘위안부와 세월호가 뭔데 그러느냐’고 되물을 정도로 황당하다는 반응”이라고 말했다.

한국어를 전공한 하노이의 대학생 H씨 역시 “3월 반미 논란 때는 일부 과격한 네티즌이 ‘한국인은 너무 거만하다’는 취지의 글을 SNS에 자주 올리긴 했다”면서도 “웬만한 한국 관련 이슈를 다 아는 나조차 위안부와 세월호 비하 이슈는 처음 듣는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사례와 달리 유튜버들이 언급하는 태극기 모욕은 실제 발생한 ‘외교적 논란’이다. 올 2월말 한 베트남 네티즌이 ‘사우스 코로나’라는 제목으로 태극 문양을 코로나19 바이러스 형태로 변형시킨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고, 이후 각종 SNS로 확산됐다. 현재 해당 게시물은 삭제된 상태다. 베트남 당국은 계정 강제 폐쇄 여부에 대해선 즉답을 피했지만, “베트남이 똑같은 상황을 당했어도 매우 화가 났을 것”이라며 “일부 국민의 행동이었지만 상당히 부적절했다”고 밝혔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next88@hankookilbo.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