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 격전의 길을 걷다 - 7년의 전쟁, 다시 돌아보는 임진왜란사
안광획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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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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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응오딘지엠(Ngô Đình Diệm)에 대한 재평가 주장을 알게 된 것은 아마 2018년에서 2019년 사이였던 것 같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던(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여러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나무위키’에 있는 응오딘지엠 문서를 읽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응오딘지엠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담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그저 나무위키만의 헛소리인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는 인사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응오딘지엠에 대해 재평가하는 주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


1. 응오딘지엠은 나름 민족주의 독립운동을 진행한 인물이다.

2. 응오딘지엠이 남베트남의 대통령일 당시 제법 탁월한 지도력을 보였으며, 따라서 응오딘지엠이야말로 공산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3. 미국의 잘못된 판단으로 응오딘지엠을 죽었으며, 그 이후로 응오딘지엠 만한 인물은 남베트남에 더 이상 등장하지 못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이 미국에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이 다큐멘터리를 만들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놀랍게도 미국에 사는 보트피플들은 2022년에 60분 짜리 다큐멘터리 하나를 만들었다. 바로 ‘Liberator of Asia: The True Story of Ngo Dinh Diem’이다. 다큐멘터리의 제목을 번역하자면, ‘아시아의 해방자, 응오딘지엠의 진짜 이야기’다. 말 그대로 응오딘지엠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이 다큐멘터리는 응오딘지엠의 전반적인 생애와 그에 대한 재평가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응오딘지엠을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출현하여 인터뷰를 진행한다. 응오딘지엠의 조카와 응오딘지엠 정권 당시 그에게 충성한 일부 남베트남 고위층 인사·군인·경찰 등이 등장한다. 또한 프랑스나 미국 내에서 응오딘지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일부 서구의 학자들도 나온다.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보고 있으면 응오딘지엠이 억울한 사람인가 하는 정신 나간 착각까지 들 정도다. 


당연한 얘기지만, 다큐멘터리는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측면을 다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Hồ Chí Minh)을 포함하여, 북베트남과 베트민 그리고 베트콩에 대한 비난도 빠지지 않고 한다. 물론 이런 비난의 내러티브는 너무나도 전형적이다. 베트민이나 베트콩이 무고한 남베트남에게 테러와 폭력을 휘둘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큐멘터리는 응오딘지엠 정부가 바오다이 정권을 축출한 이후 새 국가 건설에 나섰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응오딘지엠 정부가 민족주의 교육을 했고, 군대를 재건했으며 사회도 재건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이런 민족주의적이고 자유베트남을 위한 과정이 망하게 된 이유에 대해 다큐멘터리는 북베트남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베트민과 그 지지자들이 남베트남의 정부 관료들을 암살 및 테러했고, 그들을 잔혹하게 처형 및 학살했으며, 심지어 일반적인 남베트남 민간인들도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다큐멘터리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부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생략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회담에 따라 분단된 베트남은 2년 이내에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해야 했다. 그러나 베트남 민중 최소 80% 이상이 호치민과 공산당을 지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안 미국의 아이젠하워와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이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그걸 생략한 채 다큐멘터리는 응오딘지엠 정부가 억울하다고 말한 것이다.


심지어 다큐멘터리는 응오딘지엠이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주장도 한다. 말 그대로 말이 안되는 소리다. 다큐멘터리에 출현한 지엠 정부 시절 장관 출신인 레쩡꽛(Lê Trọng Quát)은 다음과 같음 말을 한다.


“저는 미국이 남베트남에 미군 정규병력을 불러와 배치하고 싶어 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지엠 대통령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엠 대통령은 내가 국방장관직을 맡고 있을 당시 직접 전화를 걸은 뒤 통화 중에 그런 식으로 나에게 직접 말했었죠. 지엠 대통령은 남베트남에 미군 전투부대가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지엠 대통령은 그런 행위가 베트남 민족주의자의 정당한 대의를 훼손시킬 수 있다는 점을 걱정했습니다. 지엠 대통령은 베트남을 보호하기를 원한다면 베트남인들에 의해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남베트남에 외세의 군대를 주둔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이에 대한 악의적인 선전을 할 것이고, 남베트남이 미국에 종속적인 괴뢰라 선동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지엠 대통령은 이를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응오딘지엠 대통령의 진정한 애국자였다고 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당시 남베트남은 명명백백히 미국의 지원과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국가였다.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은 미국의 허가 없이는 국가 정책 하나도 제대로 채택하지 못했다. 그리고 응오딘지엠이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베트민은 프랑스에 맞서 싸우며 남베트남에서도 수많은 해방구를 건설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방구는 미국이 지원한 응오딘지엠 정권에 의해 탄압과 학살에 직면했다. 거기다, 남베트남은 정상적인 국가 건설 과정을 거친 것도 아니었다. 응오딘지엠이 1954년 베트남을 돌아왔을 당시, 그는 명백히 바오다이 꼭두각시 정부 밑에 있었다. 물론 그가 바오다이(Bảo Đại)를 축출했지만, 그가 건설한 국가는 과거 프랑스에 부역하던 민족반역자들이 정치인과 고위관료 그리고 군 장성을 하는 나라였다.


따라서 남베트남은 애초부터 정통성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 미국이 반공을 내세워 대통령으로 만든 인물이 응오딘지엠이다. 심지어 1971년 미국의 1급 기밀문서인 펜타곤 페이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지막으로, 베트남에 대한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칠 요소들을 검토하는 차원에서 보자면, “남베트남은 본질적으로 미국의 창조물(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이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우린 명심해야 한다.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응오딘지엠은 1955년과 1956년에 남베트남에서 자신의 권력을 절대 공고히 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의 개입이라는 위협이 없었다면, 베트민 군대의 즉각적인 공격을 전혀 받지 않은 채 1956년 제네바 합의에 따라 요구된 선거에 대해 논의하는 것조차 전혀 거부하지 못했을 것이다. 매해 마다 지속적인 미국의 원조가 없었다면, 응오딘지엠 정권과 독립국가 남베트남 둘 다 확실히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베트남 전쟁을 계획했던 미국의 지도부가 내린 평가가 이러하다. 따라서 남베트남과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창조물이며, 미국의 꼭두각시였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는 그러한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베트민이나 베트콩의 테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의 태도도 문제가 있다. 이들은 베트민이나 베트콩의 테러를 종종 언급하지만, 정작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부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는 또 철저하게 외면한다. 


미국의 역사학자 가브리엘 콜코(Gabriel Kolko)에 따르면, 1955년부터 1957년까지 응오딘지엠 정권은 반대파 12,000명을 처형했다. 그리고 베트남 공산당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에서 나온 『베트남 공산당사』를 보면,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응오딘지엠 정권은 68,000명을 학살하고, 40만 명 이상을 체포 및 감옥에 구금했다. 노엄 촘스키(Noam Chomsky)나 에드워드 허만(Edward Herman) 또한 여러 저작에서 응오딘지엠 정권이 집권 기간 동안 16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언급했으며, 역사학자 버나드 폴(Bernard B. Fall)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응오딘지엠 정권은 집권 기간 내내 자국 민간인에 대한 테러와 학살을 자행했다. 당연히 응오딘지엠 정권의 테러리즘은 베트민이나 베트콩 보다 훨씬 더 광범위 했다. 아래 제프리 레이스(Jeffrey Race)가 저서 『War Comes to Long An』에서 쓴 내용을 보자.


“정부의 테러 행위는 혁명운동 측 보다 훨씬 심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베트민 출신에 대한 소탕작전, ‘공산주의 마을’에 대한 포격 및 지상공격, 그리고 ‘공산주의 동조자들’에 대한 검거 등이 그것이다. 1960년에서 1965년까지 롱안(Long An)에서의 혁명운동이 계속 강화되었던 것은 바로 정부측의 이러한 테러전략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는 이런 사실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그러면서 공산주의자만 남베트남 민간인들에게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한 것처럼 역사를 왜곡한다. 또한 다큐멘터리는 1963년 남베트남 내부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에 대해서도 왜곡된 태도를 보인다. 1963년 6월 11일 분신자살을 한 틱광둑에 대해 폄하한다. 마치 틱광둑(Thích Quảng Đức)이 배후에서 조종 받은 것처럼 말이다. 더 나아가 다큐멘터리는 불교도 시위대에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 있었다는 주장까지 한다. 즉, 공산주의 세력에 선동당한 불교도들이 응오딘지엠 정권을 몰락시켰다는 얘기다. 


여기서 생각해볼 점이 있다. 왜 불교도들이 반정부 시위를 벌였는지 말이다. 당연히 이 책임은 응오딘지엠의 가톨릭 우대정책에 있다. 응오딘지엠 정부는 불교를 심각하게 탄압했다. 불교도들이 석가탄신일을 기념하지 못하게 막았다. 틱광둑과 같은 고승이 분신자살을 한 것도 전적으로 응오딘지엠 정권에게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응오딘지엠의 재수인 마담 누(본명 쩐레쑤언, Trần Lệ Xuân)는 다큐멘터리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고승의 분신자살을 “중놈이 바비큐가 된 것이다.”라고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폄하했다. 이런 나라가 정상적인 나라인지 한번 생각해보자. 불교도들이 베트콩에 동조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다큐멘터리는 응오딘지엠 정부의 가장 큰 모순 중 하나인 토지 문제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당시 응오딘지엠 정권은 과거 프랑스에 부역한 민족반역자들에게 토지를 분배했다. 예를 들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베트민들은 악질 지주로부터 토지를 빼앗아 빈농들에게 분배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 정권은 그 토지를 다시 빈농들로부터 빼앗아, 프랑스 시절 부역한 민족반역자들에게 되돌려줬다. 그리고 남베트남 정권에서 진행한 토지개혁도 오로지 가톨릭 신자들만 우대했다. 베트남 연구자이자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William J. Duiker)는 남베트남이 가지고 있던 식민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책에 집필했다.


“이전에 베트민이 장악했던 지역에 사는 농민은 프랑스-베트민 전쟁(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동안 받았던 토지를 전 주인에게 돌려주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런 농민이나 전국의 다른 많은 농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엠 정권은 식민지 시대의 프랑스 정권보다 나을 것이 거의 없었다.”


이게 바로 응오딘지엠 정권이 가진 모순이었다. 계속해서 미국의 역사학자 마릴린 B. 영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0/59법과 같은 정부의 테러행위는 남베트남 농촌지역에서 또 다른 문제들을 악화시켰다. 지주들에게 이미 분배가 끝난 땅을 다시 되돌려줌으로써, 농민들은 프랑스 식민지 통치시절 처럼 다시 한 번 무토지 소유자나 빈농이 됐다. 강제노동을 포함한 과거 베트민 시절 폐지된 세금이 다시 부활했고, 각급 관료조직들의 공공연한 부정부패가 눈에 띄게 나타났으며, 지방 민병대를 징집하여 강탈과 자의적인 체포를 일삼았다.”


이와 같은 내용들은 응오딘지엠의 진실 된 이야기를 추구하는 이 다큐멘터리에선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응오딘지엠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얘기해보고자 한다. 다큐멘터리는 응오딘지엠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반공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였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변절하지 않고 반프랑스·반공노선을 추구했다는 점 또한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응오딘지엠 개인이 프랑스와 사이가 안 좋았고, 프랑스에게 전면적으로 부역한 것 또한 아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의 일가족들은 당시 프랑스 식민당국의 협력자들이었다. 즉, 응오딘지엠이 비교적 프랑스 부역 문제에서 자유롭더라도, 그의 일가족은 프랑스 식민당국의 협력자들이다. 


다큐에서 언급한 것처럼, 응오딘지엠의 형인 응오딘코이는 1945년 베트민에 의해 처형당했다. 이 사실을 다큐멘터리는 베트민의 무자비함 혹은 공산주의적 전체주의의 폭력성으로 설명한다. 물론 이런 단어 이용부터가 다큐멘터리의 성격이 얼마나 반공주의적 편향에 빠졌는지를 보여주는 예시다. 베트민이 응오딘지엠 형 응오딘코이를 산 채로 생매장 한 것은 당연히 응오딘지엠 입장에선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베트민이 응오딘코이를 처형한 것은 그가 프랑스 식민당국에 부역한 반역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응오딘지엠의 독립운동 이력도 솔직히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과 비교하자면 너무 초라하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 호치민과 베트남 공산당 지도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냈고, 1946년에 시작된 전쟁에서 민중들을 규합했으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베트민은 프랑스 최정예 부대를 섬멸했다. 프랑스군 2,293명이 전사하고, 6,650명이 부상당했으며 11,721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베트민이 프랑스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있을 당시, 응오딘지엠이 한 일은 베트남을 떠나 미국의 뉴저지와 벨기에 브뤼셀에 머물면서 반공주의 인맥을 만든 것 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응오딘지엠의 쿠데타에 대해 언급하겠다. 응오딘지엠이 미국이 일으킨 쿠데타로 제거 된 이후 남베트남은 응우옌반티우와 응우옌 까오 끼가 집권할 때까지 혼란의 연속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응오딘지엠 정권이 안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1960년대 초 시작된 베트콩의 무장투쟁에서 응오딘지엠 정권은 무능력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나 1963년 1월 2일에 벌어진 압박 전투에선 남베트남군이 심각할 정도로 참패했다. 


2,000명에서 2,500명 이상의 남베트남군은 미군 고문단의 지원을 받았고, 장갑차와 항공기 그리고 헬리콥터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200~300명도 채 안 되는 베트콩들에게 패배했다. 남베트남군 80~90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으며, 투입된 헬리콥터 15대 중 14대가 손실됐고, 이 중 5대가 완전히 격추됐다. 반면에 베트콩 측의 사상자는 전사자 18명 부상자 39명이었다. 심지어 베트콩은 남베트남군의 장갑차 진격도 저지했다. 미국의 지원에도 이런 허접한 군대를 유지했던 정권이 바로 응오딘지엠 정권이다.


60분 짜리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소름끼쳤던 사실이 있다. 바로 2022년 남베트남 보트피플들이 만든 이 반공주의 다큐멘터리가 현재 한국의 극우주의자들이 만드는 이승만 미화물과 논리적으로 너무나도 일치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맥락을 과감하게 생략하는 비약을 저지르며 반공주의 국가의 국가 폭력을 너무 쉽게 옹호하는 것도 똑같다. 한국의 극우주의자들이 무능하고 고집불통인 학살자 이승만을 미화한다면, 미국에 사는 보트피플들은 똑같은 논리로 학살자 응오딘지엠을 미화한다. 그런 점에서 다큐멘터리는 말 그대로 반공주의로 점철된 응오딘지엠 미화물이다. 다큐멘터리를 보면, 보트피플 중에 응오딘지엠 전기를 쓴 사람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나중에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비판적인 서평을 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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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The Battle of Algiers (알제리 전투) (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1966)
Criterion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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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이 영화 리뷰는 영화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세계의 이목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으로 옮겨가고 있다. 팔레스타인에서의 투쟁이 강화되자, 이스라엘을 포함한 서구와 국내 언론들은 팔레스타인의 잔혹성만 부각시키기 바쁜 상황이다. 하마스의 잔혹성을 얘기하며, 닭장 속에 아이를 가뒀다는 뉴스나 영유아를 집단 살해했다.”는 이른바 가짜뉴스들이 끊임없이 생산 및 보도됐다. 물론 이런 뉴스가 가짜임이 밝혀져도 정정보도는 신문에 제대로 실리지 않는다. , 팔레스타인을 비난하는 가짜뉴스는 신문지 정면에 실려도, 정정보도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안보는 곳에 개재하는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무자비한 학살을 벌이고 있는 명분 중 하나가 하마스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의 무장단체를 소탕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논리에 따르면, 하마스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의 무장단체들은 테러리스트이며,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협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삼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고 있고, 민간인이 사는 지역과 마을·병원·학교 등에 무차별 폭격을 가한다. 심지어 백린탄과 같이 국제법적으로 사용이 금지된 무기도 서슴없이 사용한다.

 

팔레스타인이 이들에게 저항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스라엘이 자국의 독립과 주권 그리고 영토를 침범하여 식민 지배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스라엘인 정착을 빌미로 인종청소를 자행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의 투쟁은 수십 년에 걸친 투쟁이며 자국의 독립과 주권을 되찾기 위한 투쟁이다. 현재는 비교적 잊혔지만, 팔레스타인과 비슷한 사례가 북아프리카에서도 있었다. 바로 알제리다. 알제리는 무려 132년 동안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나라로 1962년에 독립을 쟁취했다. 여기서 알제리의 근현대사를 얘기해보고자 한다.

 

알제리는 1830년 프랑스 군대가 상륙하면서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됐다.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 초기 알제리에서도 무장 독립투쟁이 일어났으며, 프랑스는 이들을 진압하는데 2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1870년대 들어 프랑스는 알제리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으나, 프랑스의 지배 하에서 알제리인들의 반불봉기는 끊임없이 일어났으며, 일부 산악지대와 지방에선 1910년대까지 항쟁이 지속됐다. 알제리는 20세기에 발생한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프랑스에 의해 동원됐고,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했을 당시에도 수많은 알제리인들이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파시즘에 맞서 싸웠다.

 

알제리인들이 프랑스군에 들어가 나치에 맞서 싸웠던 이유는 프랑스가 알제리의 독립을 약속했기 때문이었지만, 프랑스는 이를 지키지 않았다. 194558일 나치 독일이 항복하던 날 알제리인들은 세티프와 구엘마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는데, 프랑스는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으며, 1달간의 진압 기간 동안 최소 6,000명에서 최대 45,000명에 달하는 알제리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게 바로 세티프 구엘마 학살이다. 프랑스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알제리의 독립운동은 잠시 지하로 숨었지만, 1947년부터 알제리의 비밀 군사조직이 창설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1946년에서 1954년까지 인도차이나에서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는데, 놀랍게도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독립동맹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인도차이나에서 물러나게 됐다.

 

디엔비엔푸 전투의 영향으로 알제리에선 1954년부터 프랑스에 맞선 독립전쟁이 발발했으며, 이 독립투쟁을 주도한 단체가 바로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이었다.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은 마을 단위의 게릴라전과 도심에서의 지하조직을 통한 프랑스인 거주지 및 경찰소 그리고 군 기지에 대한 테러 전술을 구사했다. 사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이 이러한 전술로 맞선 것은 100년 이상 지속된 프랑스 제국주의의 폭력성 때문이었다. 프랑스 제국주의는 알제리에서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최신식 전투기와 탱크 그리고 장갑차와 헬리콥터를 투입했으며, 최졍예 부대인 공수부대도 투입했다. 1956년 말까지 대략 40만 명 이상의 프랑스군이 알제리에 주둔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알제리 독립 전쟁은 인도차이나 전쟁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패전으로 종결됐다. 전쟁은 1962년 에비앙 협정을 통해 전쟁이 종결되면서 알제리의 승리로 끝났고, 알제리는 132년 만에 독립을 쟁취했다.

 

영화 알제리 전투(La Bataille d'Alger)’1954년에서 1962년 사이 8년간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맞선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무장 독립투쟁과 프랑스군의 정치적 폭력 행위 등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재구성한 영화다. 영화는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지도자 알리를 포함하여, 이들의 입장에서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을 묘사했으며, 이들이 어떠한 감정 및 생각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프랑스의 공수부대가 알제리의 수도 알제의 어느 거주지에서 소탕작전을 벌이는 것에서 시작되며, 포위당한 은신처에서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지도자 알리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상념에 잠긴 채 치열했던 지난 3년간의 투쟁을 회상하는 장면을 통해 독립전쟁의 서막을 다룬다.

 

영화를 보다보면,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이 프랑스 지배에 맞서 테러를 제법 많이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은 민간인들 사이에서 프랑스 경찰들을 살해하고, 이들로부터 무기를 노획하기도 하며, 불심검문에 협조하는 척 하며 프랑스 경찰관들을 살해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프랑스인에 의해 알제리 민가가 폭탄 테러를 당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인 지역에 가서 폭탄 테러를 감행하는 것도 여러모로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이다.

 

물론 폭탄 테러로 인해 민간인들의 희생당하는 장면 또한 영화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만,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이 왜 그러한 전술을 사용했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그들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도 제법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프랑스 측이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알제리민족해방전선 대원들과 지도부들을 체포 및 소탕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공수부대원들은 알제리민족해방전선 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습격하여 민간인들을 강제로 소개시키며, 의심되는 이들에게 물고문·전기고문과 같은 잔혹한 고문도 서슴지 않는다. 이는 마치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이 자행한 행위가 연상되기까지 한다.

 

심지어 이러한 잔혹행위를 합리화하는 프랑스 공수부대 대령의 논리는 현재 이스라엘의 논리와 전혀 차이가 없다. 영화상에서 등장하는 프랑스 공수부대 대령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로 참전하여, 이탈리아와 프랑스 서부전선에서 싸운 군인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마다가스카르와 인도차이나에서도 복무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자신이 지휘하는 군대의 고문행위를 다음과 같이 합리화한다.

 

우린 미치광이도 가학을 즐기는 자도 아닙니다. 우리를 파시스트라고 부르는 자들은 레지스탕스 운동 당시 우리의 활약을 잊었습니다. 우리를 나치라고 부르는 자들은 우리 중에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는 군인이고 군인의 임무는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제 기자 여러분들에게 한번 묻겠어요. 프랑스가 알제리에 남아야 하나요? 그래도 남아야 한다고 대답한다면, 그로 인한 결과도 감수해야만 합니다.”

 

이와 같은 프랑스 공수부대 대령의 태도는 현재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 건국을 운운하며, 자신들의 학살과 광범위한 테러리즘을 합리화하는 논리와 완벽히 일치한다. 그 점에서 상당히 소름끼치는 영화 대사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영화 알제리 전투1966년 이탈리아에서 개봉한 영화로 이탈리아의 좌파 영화인들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 제국주의뿐만 아니라 당시 베트남을 침략하던 미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1960년에 발생한 알제리에서의 대규모 반정부 민중시위를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는 데, 나로 하여금 정말 진한 여운을 남겼다. 그러나 더더욱 화가 났던 점은 프랑스에 맞서 정당한 독립을 요구하는 알제리인들에게 프랑스 당국은 경찰과 군대 심지어 탱크까지 투입하여 이를 진압하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영화상에서도 프랑스 공수부대가 시위대를 이탈하여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넘어오는 알제리인들에게 기관단총을 발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가 얼마나 비인간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팔레스타인 민중의 독립 염원이 강해지고 있는 적절한 시점에 훌륭한 영화 한 편을 감상했다. 무려 제작된 지 57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는 명작이다. 영화를 보면서 현재 팔레스타인 민중의 투쟁이 상당히 많이 오버랩 됐다. 이들이 간혹 테러라는 전술을 이용하는 것 또한 당시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심정과 일치한다는 생각도 든다. 이스라엘이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하는 짓은 과거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했던 것과 전혀 차이가 없다. 영화에서는 다음과 같은 명대사가 나오는데, 이 대사야말로 과거의 알제리 독립 전쟁 그리고 현재의 팔레스타인 독립 전쟁의 본질을 보여주는 대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영화에 나온 그 명대사를 인용하면서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마치도록 하겠다.

 

기자: 벤 미디 씨. 여자에게 바구니에 폭탄을 실어 운반해서 무고한 생명을 수없이 죽인 것은 너무 비겁한 행위가 아닌가요?

 

벤 미디네이팜탄으로 민간인이 거주하는 마을을 공격해서 수천 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죽인 것이야 말로 훨씬 더 비겁한 짓이 아닌가요? 만약 우리에게 비행기가 있었다면 우리도 수월할 겁니다. 당신들이 폭격기를 주면 우리는 그 폭탄 바구니를 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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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25 2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따지고 보면: 알제리에서의 反프랑스 독립항쟁, 팔레스타인의 反이스라엘 독립항쟁, 그리고 우리 민족의 항일독립투쟁은 ‘외세에 맞서 자주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사료로 읽는 서양사 5 : 현대편 - 제국주의에서 세계화까지 사료로 읽는 서양사 5
노경덕 지음 / 책과함께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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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읽는 서양사 5 현대편 서평: 기존의 서양사 책과는 비교적 다른 접근을 한 흥미진진한 서양사 책

2022년 중반이었던 것 같다. 소련사 전공자이자 내 페친이기도 한 노경덕 선생이 서양사 책을 집필했다는 걸 알게 된 것이 아마 작년 6~7월이었을 것이다. 몇 년 전 우연히 아는 사람을 통해 받게 된 노경덕 선생의 강연 글인 ‘스탈린과 스탈린주의: 그 진실과 왜곡‘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 글을 읽으며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소련에 대한 편견을 많이 깰 수 있었다.

작년에 신간을 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신간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진진한 구성과 내용이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은 작년 생일 때 지인이 생일선물로 받았지만, 읽게 된 것은 10개월이 지나서였다. 무튼 책을 읽게 됐고,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다.

책의 내용은 과거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부터 냉전의 종식까지를 다루고 있다. 각 시대 및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관련 사료들을 ‘자료‘ 형식으로 모아놓았으며, 참고문헌을 각 주제마다 표기해놨다. 그래서 관련 파트가 어떠한 참고문헌을 인용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흥미로운 내용들도 많았다. 예를 들어 냉전을 다룬 파트에서 반식민주의 운동에 관한 내용은 시중에 나와있는 서양사 통사에서는 많이 다루지 않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책은 분명히 다루고 있으며, 당시 탈식민주의 운동에서 소위 제3세계로 불리는 국가들이 미국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도 제법 솔직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나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의 독립운동가 루뭄바와 친미 독재자 모부투에 대한 얘기는 이 책을 통해 좀 더 상세하게 알게 됐다. 사실 그 전까지는 이름만 들어본 정도였는데, 이 책을 통해 알게되니 상당히 슬펐다. 그 외에도 베트남 전쟁에 대해 미국이 탈식민주의에 반하는 행위로서 언급 및 다뤄진 것도 솔직히 많이 공감했다.

소련관련 부분이야 저자의 본 전공이니 당연히 읽어볼만한 내용들이 많다. 이 책 또한 1930년대 이오시프 스탈린이 파시즘의 위협속에서 단행한 대숙청이 분명한 한계 및 과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냉전기 서방세계가 선전하던 대규모의 묻지마 집단 살인은 아니었음을 역설한다. 소련 시대 산업화나 이후 나타난 한계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에서 소련이 공세가 아닌 방어적 입장인 사실도 분명히 언급한다. 매우 흥미롭게도 흐루쇼프 시대에 대해서도 소위 관료주의가 더 대두한 배경을 언급했는데, 솔직히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대부분의 서양사 책들에서 찾기 힘들기에 정말 좋았다.

그리고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부분에서도 승리의 주역은 영미 연합군이 아닌 소련군이었던 것도 강조한다.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서구사회에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이 세운 업적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도 보인다. 대표적으로 반러감정이 강한 폴란드나 발트3국 그리고 서유럽 국가들이 그런 흐름에 편승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부전선에 투입된 독일군 사단이 200~300개가 넘는 반면, 북아프리카에 영국군에 맞서 투입된 독일군 사단이 4~5개 정도라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스탈린이 강력히 요구했던 이른바 제2전선도 1944년 6월 5일이 되서야 열렸다. 그러니까 정리해보자면, 소련은 규모면에서 3년 동안 사실상 혼자서 독일군을 상대했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체는 이와 같은 사실에 근거해보자면, 영국과 미국이 아닌 소련과 스탈린 그리고 소련 민중과 소련군이다.

책 마지막 파트인 냉전 종식도 상당히 읽어볼만 했다. 소위 소련의 군사적 침공 사례로 알려진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사실은 소련 지도부가 가급적으로 피하려 했고, 명분이 아프가니스탄 좌파정권을 지원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냉전 말기 동유럽에서 발생한 반정부 시위에 대해서도 단순히 서구가 선전하는 자유를 위한 시위로만 해석하지 않은 점과 이후 나타난 한계 때문에 공산당이 다시 지지받게 된 것을 언급한 것도 다른 책들에선 발견하기 힘든 부분이다.

전반적으로 많은 공부가 된 책이다. 책에 인용된 자료들 또한 빠짐없이 읽었는데, 지금까지 내가 읽지 않았던 자료들을 통해 또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냉전 파트에서 매카시즘 관련 자료나 반공목사 빌리 그레이엄의 발언등을 읽으면서, 한국의 극우 태극기들과 비슷한 맥락과 주장이 담겨 있는 사실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즉, 한국 극우들이 주장하는 맥락을 책에 자료를 통해 파악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도 책이 제공해줬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언급하자면, 제국주의와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룬 파트에서 서구의 아프리카 침탈을 다룬 내용과 지도를 보면서 진지하게 느낀 것이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그 수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우크라이나를 절대 지지및 지원하지 않는 이유 말이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정부는 미국을 위시한 서구사회에게 ˝대포 주세요! 미사일 주세요! 전투기 주세요! 장갑차 주세요! 탱크 주세요!˝라고 일방적으로 요구하며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자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담론을 아프리카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황당할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소위 자유민주주의 국가 서방은 자신들을 잔혹하게 지배한 압재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프리카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하지도 않은 것이며 아무런 효과없는 대러제재에도 동참하지 않은 것이다. 젤렌스키가 말하는 자유세계 같은 용어가 아프리카에겐 위선 그 자체일 수 있다. 즉 이런 맥락을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볼 수 있었다.

오랜만에 흥미진진한 서양사 책을 읽었다. 자료로 인용된 내용들도 대체로 좋았고, 나와 반대되는 사상을 가진 이들의 생각 또한 자료를 통해 알 수 있어서 좋았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극체제와 다극체제의 대립,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팔레스타인 분쟁 속에서 서양사를 생각해볼 기회를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책이 나름 제공해줬다. 그것 또한 좋았다. 국내에 나온 서양사 책들 중에 제법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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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25 2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프리카뿐 아니라 중남미 국가들도 우크라이나 지원에 회의적인 편입니다. 왜냐하면, 중남미 국가들에게도 서방(특히 스페인, 포르투갈, 미국)은 자신들을 악랄하게 탄압하고 지배한 압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전자의 두 국가는 과거 영토 지배 및 원주민 대량학살, 후자의 한 국가는 반민주적 독재정권 후원)
 

1935년 8월 2일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이른바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표명한 테제가 채택됐다. 당시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뜻하는 테제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디미트로프 테제(Dimitrov Thesis)다. 게오르기 디미트로프(Georgi Dimitrov)는 누구일까? 오늘은 디미트로프의 생애를 통해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사진)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1882년 6월 18일 불가리아의 서부에 위치한 코바체프시(Kovachevtsi)에서 태어났다. 디미트로프는 8남매 중 첫째였으며, 그의 부모는 오스만 제국의 마케도니아 출신의 이주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시골의 장인이었으며, 공장 노동자 출신이기도 했다. 디미트로프가 첫 정치활동에 참여한 것은 19세가 되던 1902년이었다. 불가리아의 수도이던 소피아에서 노동조합 운동에 참여했으며, 당시 디미트로프는 인쇄식자공이었다. 그리고 그는 불가리아 사회민주당에 참여했으며, 1904년부터 1923년까지 불가리아 노동조합연맹의 서기장을 지냈다.


전반적인 유럽 국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불가리아의 사회주의 운동도 불가리아 당국의 탄압을 받았는데, 디미트로프 또한 1911년에 체포되어 감옥 생활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 시기 유럽의 전황은 모로코 위기와 발칸 위기를 통해 점차 고조되고 있었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흥미롭게도 디미트로프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에 불가리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18년 체포될 때까지 불가리아의 제1차 세계대전 및 새로운 전쟁 공채 발행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이후 디미트로프는 1919년에 석방되었으며, 1917년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를 방문하고자 했다. 그가 처음으로 소비에트 러시아를 방문한 것은 1921년이 되어서였다. 1922년 12월 디미트로프는 공산주의자 국제무역연맹인 프로핀테른의 관리직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1917년 볼셰비키가 주도한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이후 1919년에 코민테른이 창설되었으며, 불가리아 사회노동당 또한 코민테른에 가입했다. 불가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불가리아 공산당으로 당명이 교체되었으며, 이들은 불가리아 군부에 맞선 투쟁을 지속했다. 1923년 6월 불가리아의 알렉산드르 스탐볼리스키 총리가 쿠데타로 암살당하자 불가리아의 공산주의자들은 쿠데타의 주역 알렉산드르 찬코프 총리에 반대하는 봉기를 조직했다. 디미트로프 또한 혁명 활동가로서 탄압에 맞선 저항을 지도했으며, 저항이 궁극적으로 실패로 끝나자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했다. 디미트로프를 포함한 불가리아 공산당 지도부는 군부 당국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궁극적으로 소련으로 망명했다.


이후 디미트로프는 여러 개의 가명을 사용하며, 1929년까지 소련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소련에서 망명생활을 한 디미트로프는 활동 지역을 독일로 옮겼으며, 거기서 히틀러의 나치당에 맞서 독일 공산당을 이끄는 반파시즘 활동을 했다. 그러나 독일은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 경제 대공황으로 큰 타격을 받았고, 이는 역으로 히틀러와 같은 나치 극우들이 정권을 잡게 되는 계기가 됐다. 1933년 1월 독일의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으며, 나치는 보다 노골적으로 테러와 폭력을 반대파들에게 사용하게 됐다.


1933년 2월 27일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국회의사당(Reichstag)이 네덜란드 출신의 공산주의자 마리뉘스 판데르뤼버(Marinus van der Lubbe)에 의해 불에 탄 사건이 발생했다. 국회의사당이 불타자 나치는 광분했고, 방화범인 판데르뤼버가 단독범행을 재판에서 주장했음에도 이를 빌미로 독일 공산당을 포함한 나치 반대파를 탄압하는 명분으로 사건을 이용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 공산당에서 활동하던 디미트로프 또한 체포되었으며, 라이프치히 재판에서 디미트로프는 당시 법원과 검찰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관련 재판은 3개월 가까이 지속되었으며, 1933년 12월 13일 변론단계에 들어가 검사총장의 논고, 변호인의 변론에 뒤이어 12월 16일에 디미트로프가 최종 진술했다. 당시 나치가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독일 사법부는 주범 마리뉘스 판데르뤼버를 제외한 모든 ‘공범’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으며, 이에 따라 석방되었다.


이후 디미트로프는 1934년 2월 27일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갔으며, 이오시프 스탈린 또한 그를 격려 및 환영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를 통해, 디미트로프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는데, 여기서 디미트로프는 “파시즘의 공세와, 파시즘에 반대하여 노동자계급의 통일을 지향하는 투쟁에 있어 코민테른의 임무”라는 이름으로 사건에 대한 보고를 했다. 또한 디미트로프는 파시즘에 맞서, 부르주아 및 애국적인 민족주의자들과도 연합할 수 있는 인민전선을 조직해야 함을 역설했다. 궁극적으로 디미트로프의 주장이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채택되었으며, 이후 인민전선 혹은 통일전선은 디미트로프 테제로 불리게 됐다. 당시 디미트로프는 파시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하기도 했다.


“파시즘, 그것은 근로대중에 대한 자본의 잔인무도한 공세다.

파시즘, 그것은 방자한 배외주의와 침략전쟁이다.

파시즘, 그것은 광란하는 반동과 반혁명이다!

파시즘, 그것은 노동자계급과 전 근로자의 가장 흉악한 적이다!”


상당히 뛰어난 분석이다. 파시즘에 대한 디미트로프의 분석은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 그리고 군국주의 일본의 사례를 보자면, 그가 내린 정의에 부합하기까지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을 구성하는 세 나라는 자본에 충실했고, 침략전쟁을 추구했으며, 반혁명적이었고, 진보적인 노동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따라서 탁월한 분석이라 할 수 있겠다. 디미트로프의 노선이 공식적으로 활용된 첫 무대는 바로 1936년에 발생한 스페인 내전이었으며, 당시 스페인에선 파시스트 프랑코 세력에 맞서 미국, 영국, 소련 등이 민주 진영을 지원했다. 비록 스페인에서는 파시즘의 승리로 끝났기에 결과가 좋지 않았지만, 중일전쟁 당시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국공합작에 따른 반일항쟁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영국·소련의 연합은 디미트로프 테제가 파시즘에 맞선 투쟁에서 유효했음을 역사적으로 입증했다.


디미트로프의 조국인 불가리아는 1930년대부터 친파시즘적 경향을 보이다가, 1941년 독소전 발발 이후엔 나치에 협력하는 국가가 되었다. 당시 불가리아는 나치와 함께 반소·반공투쟁을 전개했으며, 함께 군사적인 방어선도 구축했다. 그러나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1943년 쿠르스크 전투를 기점으로 나치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소련에게 밀리기 시작했고, 불가리아는 1944년 소련군에 의해 해방됐다. 당연히 디미트로프는 전쟁이 끝난 이후 해방된 불가리아로 돌아왔다. 추방당한지 22년 만에 돌아온 것이었다. 1942년 7월 디미트로프는 조국전선 강령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보자.


“보리스 국왕정부의 반인민적인 정책은 절체절명의 민족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오늘날 불가리아는 사실상 히틀러의 속국이 되고 불가리아 인민은 독일 제국주의자의 노예가 되었다. 히틀러의 광기어린 세계지배 계획이 반드시 실패할 운명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배신적 정책을 수행하는 것은 곧 불가리아 인민을 의식적으로 파멸로 내몰아 민족적 독립을 잃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중략.....) 우리 국민에게 긴요한 위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조국전 선의 구국정책을 단호하고 일관되게 실행할 힘을 갖춘 진정한 국민적 정부를 한시바삐 수립해야 한다. 그러므로 조국전선은 현재의 배신적 · 반인민적 친히틀러 정권을 타도하고 불가리아 국민의 진정한 정부를 세우는 일을 당면 투쟁목표로 한다. 또한 이 정부는 전 불가리아 인민의 의지와 지지를 바탕으로 대(大)국민의회의 소집을 위한 조건을 마련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의회가 앞으로의 불가리아의 통치형태를 정하고, 우리 조국의 자유, 독립, 번영에 필요한 헌법상, 물질상의 보장을 확립해 낼 것이다.”


1946년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불가리아 공산당의 지도자가 되었고, 인민민주주의 개혁을 단행했다. 그와 동시에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정권과 루마니아의 사회주의 정권과도 협상을 시도했다. 다만 디미트로프와 티토가 협상하기도 했던 남슬라브 연맹 창설은 스탈린이 반대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또한 인근 국가인 엔베르 호자의 알바니아하고도 협상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일설에 따르면 디미트로프는 호자에게 “엔버 호자 동무 이 곳을 보십시오! 당을 깨끗하게 유지하도록 합시다! 혁명적이고 프롤레타리아트 적이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지도자가 된 이후부터 그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었는데, 소련 모스크바에서 병을 치료받던 중인 1949년 7월 2일에 사망했다. 이후 그의 시신은 엠버밍 처리되어 레닌처럼 소피아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박물관에 조성된 영묘에 안장되었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 디미트로프의 시신은 화장됐고, 영묘 또한 1999년에 철거되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여론조사 결과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시민의 2/3이 철거를 반대했다고 한다.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이른바 인민전선 노선을 만든 사람이라는 점에서 사회주의 혁명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민민주주의 국가가 탄생했고, 대체로 인민전선 노선에 입각한 진보적 개혁을 단행했다. 그리고 이는 사회주의 진영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디미트로프가 발표한 반파시즘 인민전선 노선은 분명히 고찰할 가치가 있으며, 현재 윤석열에 맞선 투쟁이 격해지는 시점에서 우리가 어떠한 노선을 추구해야하는지, 그 광명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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