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3년 니제르와 부르키나파소 등 사헬 지역이라 불리는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반제국주의 쿠데타 및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이들 국가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기에, 한국의 언론과 서구 언론에도 제법 보도가 됐다. 니제르의 쿠데타 지지 시위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단순히 러시아 깃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북한 국기인 인공기가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제법 놀랄 것이다. 저 아프리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에서 인공기가 보였으니 말이다. 

(북한의 인공기와 이집트 국기)


사실 북한은 현재 김정은 위원장의 할아버지인 김일성 때부터 여러 국가들과의 교류를 쌓은 경험이 있으며, 이른바 제3세계라 불리던 국가에 지원을 한 역사가 있다. 대표적으로 쿠바와 베트남 그리고 이집트를 포함한 중동 지역이 그러한 무대였으며, 북한의 제3세계 연대 및 지원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라틴아메리카를 초월했었다. 이것은 단순히 외교적인지지 표명을 넘어서 물적 인적 지원을 포괄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북한은 쿠바에서 혁명이 성공하자 1960년 쿠바와 수교를 맺었으며,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민족해방운동 국제연대회의가 창설되자 이에 참가하여 미국 케네디 정부의 쿠바 해상봉쇄 해제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줬다.

(북한의 김일성과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나세르는 이집트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며 국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베트남의 경우는 물적 인적 지원이 더욱 명확했다. 북한과 북베트남은 1950년에 이미 수교를 맺었으며, 1957년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이 평양을 방문하면서부터 양국의 관계가 강화됐다. 베트남 전쟁 당시 김일성은 “만약 미 제국주의자들이 베트남에서 무너진다면, 그들은 아시아에서 완전히 실패할 것입니다. 우리는 베트남을 지지합니다. 이 전쟁은 우리가 치르는 전쟁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에서 요청이 오면, 설사 우리 계획에 지장을 받더라도 요구에 응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전직 북베트남 공군 소장이 밝힌 2007년 기록에 따르면, 1967년에서 1969년 사이 북한 항공기 조종사 87명이 베트남에서 복무했으며, 그중 14명이 전사했고 미군 항공기 26대를 격추했다. 더 나아가 베트남의 군 소식통은 그 숫자를 96명의 항공기 조종사를 포함한 384명의 조선인민군 공군 요원이 복무했다고 밝혔었다.

(1970년대 당시 북한의 MIG-21기와 전투기 조종사들)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이집트에 파견된 북한의 조종사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와 같은 북한의 지원은 이집트에서도 있었다. 2021년 4.27에서 출간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1945~1979』에 따르면, 북한과 이집트의 외교수립과 제4차 중동전쟁에서 군사고문단 및 공군 파견도 주목할만하다고 한다. 조선인민군은 1970년대 초에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 처음으로 개입했으며, 그 후로 큰 폭으로 개입이 늘어났다. 특히 이집트가 그 지역에서 첫 번째로 북한의 주요한 전략적 동반자였다. 사실 이집트는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반서방 정권이 들어섰고, 정권을 잡은 나세르는 1953년 6월 왕정제 자체를 폐지했으며, 1956년에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소유하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다.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작전회의를 진행하는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이집트군에 배치한 3연장 SA-6, 게인플(2K-12)과 1발짜리 SA-2, 가이드라인(뒤쪽) 지대공 미사일, 모두 당시엔 매우 위력적이었으며 지금도 이용되는 무기라고 한다.)


북한은 반서방 노선을 걷던 이집트와의 관계를 1960년대부터 개선하기 시작했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른바 6일전쟁에서 이집트가 서방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이스라엘군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했다. 이 전쟁에서 이집트는 개전 초기에 최소 300대 이상의 항공기를 잃었으며, 이스라엘은 신속한 군사적 승리를 거뒀다.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가 어렵자 북한은 이집트에게 5,000톤의 식량 원조를 제공했다. 나세르가 사망한 이후 이집트는 안와르 사다트가 집권했다. 사다트 또한, 정권 초기 나세르처럼 소련과 제3세계의 지원을 받았으며, 북한의 지원도 받았다. 사다트는 집권 초기 이집트 영토에서 소련군을 내보낸다는 뜻밖의 칙령을 공표했는데, 놀랍게도 북한의 지원은 받았다. 이집트의 방위가 위태로워지고 훈련된 항공기 조종사가 부족해 곤란을 겪는 가운데, 북한 지도부가 조선인민군 분견대 파견을 포함한 지원을 제안했다. 이집트는 이 요구를 수락했고, 북한은 전투기 조종사를 포함하여 군사고문단을 파견했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이라 불리는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는데, 북한의 지원은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의 참모총장 사드 알 샤즐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조선인민군의 원조가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는 보고서를 남겼는데, 이후 회상록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북한의 MIG-21기, 1970년대부터 북한은 이 전투기를 이용했으며 지금도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73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이 이집트를 방문 중이었고, 나는 해결책을 번뜩 떠올렸다. 3월 6일, 수에즈 전선 순시 차 북한 인민무력부 부상 장송 장군을 호위하는 동안, 혹시 그들이 비행 중대를 파견해 우리를 지원할 수 있는지, 그들의 조종사들이 실질적인 전투 훈련을 시킬 수 있는지 물어본 것이다. 당시 북한이 MIG-21기를 운항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당한 논의를 거쳐 4월에, 나는 그 계획을 완결짓기 위해 김일성 주석을 향한 공식 방문길에 올랐다. 그 비범한 공화국에서 매혹적인 열흘 간의 일정을 보내면서, 흔히 제3세계로 불리는 작은 나라가 자체 자원으로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 보여준 모범 사례가 내게 얼마나 고무적이었는지 모른다. 더 정확히 말하면 베이징에 잠시 들른 일이 그러했듯 그것은 이 회상록의 범위를 넘어선다. 대다수 비행시간 2,000시간 이상으로 경험이 풍부한 북한 조종사들이 6월에 이집트에 도착했고, 7월부터는 실전에 참여했다. 당연히 이스라엘과 그 동맹국은 머지않아 통신을 감청했고, 8월 15일 북한인들의 주둔을 단언했다. 안타깝게도, 우리 지도부는 그 사실을 공식화하지 않았다. 아마도 외국인 전력 보강이라는 측면에서, 북한인들은 역사상 가장 소규모 병력이었을 것이다. 조종사 20명, 조종 장치 8대, 통역사 5인, 관리자 3인, 정치고문 1인, 각 1인의 의사와 요리사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 효과는 훨씬 더 컸다. 그들은 8월과 9월에 이스라엘군과 2~3차례 조우했고, 비슷한 횟수로 전쟁에서도 접전을 벌였다. 그들이 와준 것은 감동이었다. 내가 여기서 이 이야기를 언급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함이고, 또한 그렇게 하지 못했던 우리 지도부의 인색함에 대해 사과하고자 함이다.”


인용문에 나온 바와 같이, 북한이 보낸 인력은 조종사 20명과 통역사 5명, 관리자 3명, 정치고문 1명 그리고 각각 1명의 의사와 요리사였다. 또한, 앞서 인용한 인용문만이 북한에서 파견한 인력에 대해 고평가 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서방과 이스라엘의 보고서에도 “참전한 조선인민군 조종사들이 그들의 상대인 이집트인들보다 공중에서 훨씬 유능했다.”고 나온다. 이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MIG-21기 1대가 이스라엘 F-4E 팬텀기 2대를 대적해 여러 발의 미사일을 요령 있게 잘 피했고, 이스라엘 전투기가 결국 기지로 귀환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북한 요원들이 조종하는 미그기가 손상을 입기는 했지만, 당시 사정상 성급한 훈련과 열악한 지휘 구조 탓에 이집트 지대공 미사일 담당 사병들이 걸핏하면 아군 비행기를 요격한 데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전선 및 전황을 표시한 지도)


(한 유튜버가 만든 제4차 중동전쟁 관련 영상, 심지어 이스라엘이 사라질뻔했다고 표현했다.)


정리하자면, 제4차 중동전쟁에서 조선인민군은 전투에 참여했으며, 이집트의 MIG-21기를 운항한 것이 조선인민군이었다. 반면에 제4차 중동전쟁 발발 직후 이스라엘군 내 조종사 부족 사태로 인해 이스라엘 공군 전투기를 운항한 것은 미군 항공병들이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미군의 최신 기종인 SR-71 전략 정찰 항공기들도 이스라엘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기 위해 비행에 나섰으며, 전쟁의 형세를 일변시키는 데 필수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북한의 파견한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에 맞서는 공중전에서 유일한 비아랍인 전투원들이었고, 미국인들은 이스라엘의 공중전에서 유일한 외국인 조종사들이었다. 즉, 평양과 워싱턴이 각자 상대편에 맞서 중동의 한쪽 당사자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셈이다.

(김일성과 무바라크 대통령, 북한과 이집트의 관계는 1980년대에도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의 전투병력이 미국 항공병들과 직접 격돌하지는 않았으나, 당시 북한의 이집트 지원은 제4차 중동전쟁 승리에 기여한 것은 분명했다. 북한의 지원을 받은 이집트 공군은 6일전쟁 때와는 달리, 이스라엘군과의 공중전에서 승리하고 이스라엘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의 혁혁한 전과를 달성했다. 그리고 이 전쟁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게 시나이 반도를 완전히 반환했기에 이집트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이후에도 이집트 정부는 북한의 지원을 받았으며, 북한은 이집트가 군사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지원했다. 특히 핵을 가진 이스라엘에 맞서 이집트 측 탄도 미사일의 성능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지원했다. 1980년대 이집트에는 친미 성향이 있는 호스니 무바라크가 집권했는데, 무바라크는 수차에 걸친 평양 방문을 통해 양국 사이에 미사일 개발에 관한 협력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 결과 이집트의 탄도 미사일 전력은 거의 전부가 북한 측 장비로 이루어지게 됐다.


참고문헌


김동원·안광획·이정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1945~1979』, 4.27시대, 2021.

AB 에이브람스, 박현주 옮김 『끝나지 않은 전쟁 I – 북미 대결 70년사』, 민플러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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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이야기 6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6
김명호 지음 / 한길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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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이야기 6을 읽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발생한 대규모 공습 중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독일의 런던 대공습과 스탈린그라드 대공습, 영미 연합군의 함부르크 폭격과 드레스덴 폭격 그리고 미국의 도쿄 대공습까지 여러종류의 폭격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충칭 대공습을 기억하는 이는 몇이나 있을까?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김명호가 쓴 중국인 이야기 6권은 일본군이 충칭을 폭격하던 것부터 시작된다.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한 이라면 충칭이라는 지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곳임을 알 것이다. 당시 백범 김구가 이끌던 임시정부가 충칭에 있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가 난징에서 충칭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일본은 1938년부터 1943년 8월까지 5년 동안 218차례의 항공 출격을 감행했고, 총 9,513대의 일본군 항공기가 출격해 폭탄 2만 1,593발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1만 명의 중국인이 학살당했다. 즉, 국민당 정부의 수도 충칭은 이와 같은 공습을 경험했다.

중국과 대만의 대립. 사실은 국공내전이 끝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역사다. 대만으로 옮겨간 장제스는 병사들 중 특공대를 조직하여 중국 본토에 침투시키기도 했는데, 양측이 벌인 교전은 만만치 않았다. 한반도에서 남북한이 냉전의 흐름 속에서 충돌했다면, 대만과 중국도 그런 충돌이 일어났다.

2009년 10월 31일 한 과학자가 숨을 거뒀다. 그는 ˝중국 우주과학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첸쉐썬이다. 중국은 마오쩌둥 집권 시절인 1970년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다. 흥미롭게도 중국의 인공위성 로케트 기술은 미국에서 왔다. 천쉐썬은 미국에서 공부한 인물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게 투항한 나치 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을 심문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 매카시즘의 희생자이기도 했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 되고 난 이후 FBI는 첸쉐썬을 감시했는데, 그게 결국 첸쉐썬을 중국으로 귀국하게 만들었다. 첸쉐썬에게 미국으로 가서 공부할 수 있게 한 것은 중국 국민당이었지만, 첸쉐썬은 국민당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1964년에 핵폭탄을 자체적으로 개발했다. 미국ㆍ소련ㆍ영국ㆍ프랑스 다음으로 핵무장에 성공한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놀랍게도 마오쩌둥은 옌안에 있을 당시 히로시마 원자탄 보도에 대해 믿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이 점이 흥미롭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주중미군의 중국 여대생 강간 사건이다. 이 사건은 중국 전역을 휩쓸 정도로 커진 문제였고, 적잖은 중국인들이 반미감정을 가지게 된 계기를 제공했다. 사건이 커진 이유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강간사건을 의도적으로 은폐하려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도 주한미군에 의한 범죄가 많이 일어났지만, 안타깝게도 사건이 묻혀버린 경우가 많다.

1992년 주한미군 병사 케네스 마클은 이른바 N번방을 능가하는 수준의 범죄를 윤금이에게 저질렀다. 그러나 당시 조선일보를 포함한 언론들의 반응은 ˝윤락녀다˝ 라는 식으로 미군의 책임을 물으려 하지 않았다. 미국에게 제대로된 목소리 조차 못내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니, 이번에 책에서 읽은 국민당의 행태는 조선일보를 생각하게 만든다.

오랜만에 중국인 이야기를 다시 읽게 됐다. 내용도 어렵지 않고 술술 읽힌다. 중국 근현대사를 하나의 이야기로써 접근하기 가장 좋은 책이다. 사진 자료도 많이 첨부해서 글씨만 보는 것보다 훨씬 낫다. 중국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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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賢. 2024-02-10 2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엔 복 꼭 많이 받으시길.

NamGiKim 2024-02-10 23:28   좋아요 1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 글은 시바타 마사요시 지음, 사상과 정치 경제 연구소 옮김,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혁명사』 2권, 소나무, 1991.을 참고하여 작성됐습니다.)


루마니아(Romania)하면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아마 우리말로 흡혈귀를 뜻하는 벰파이어(Vampire)일 것이다. 아니면 역사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루미니아의 정치인 니콜라 차우셰스쿠(Nicolae Ceausescu)를 들어봤을 것이다. 루마니아는 나라 이름답게, 고대역사에서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중세 시기에는 투르크계 유목민과 불가리아인들의 지배를 받았고 몽골 제국의 침공도 받았었다. 14기에는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 트란실바니아 공국 등이 나타났으며,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루마니아가 자본주의 발전의 길에 들어선 것은 1848년 이후이며, 1877~1878년 발발한 러시아-터키 전쟁에 러시아 측에 참전하여 승리함으로써 국가의 독립을 이룩했다.


루마니아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16년 8월에 협상국 측에 참전하여 독일에 맞서 싸웠지만, 경제적으로 커다란 손실을 받았다. 1918년 12월 루마니아와 트란실바니아가 통일됨으로써 루마니아는 통일 민족국가가 됐다. 루마니아는 자본주의적 공업 수준이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낙후되었고, 정치체제는 입헌 군주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루마니아에서 파시스트 정당의 중심세력은 1930년대 초에 힘을 발휘했다. 이들은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1938년 1월 루마니아 국왕이던 카를 2세에 의한 친파시즘적인 국가가 형성됐다. 1921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은 좌익들이 루마니아 공산당을 창당했지만, 당연히 이들은 자국 내에서 탄압받았다.


1938년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은 이온 안토네스쿠(Ion Antonescu)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헌법을 폐지하고 입법권과 행정권을 자신의 손에 넣었으며, 히틀러를 따라 자신을 총통이라고 칭했다. 즉, 루마니아에는 왕이 있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안토네스쿠가 장악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시점이던 1940년 9월에서 10월 안토네스쿠는 독일군의 루마니아 주둔을 승인했으며, 다음해인 1941년 2월에는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중심이 된 추축국에 가담했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자, 안토네스쿠 또한 다음 날인 23일 소련에 대한 침략전쟁을 게시하기에 이르렀다.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반파시즘 운동에 가담했으며,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 초대 서기장이다. 이후 그를 이은 것이 그 유명한 니콜라 차우셰스쿠다.)


루마니아의 반파시즘 해방운동은 일본학자 시바타 마사요시에 따르면, 총 4기로 구분된다. 제1기는 1941년 6월부터 1943년 6월에 걸친 시기로 지하 공산당의 지도 아래 노동자의 사보타지를 주요한 투쟁수단으로 하는 투쟁을 중심으로 인민 각층의 투쟁이 점차 발전하여 반파시즘 민족해방 통일전선의 결성이 준비되던 시기다. 제2기는 1943년 6월부터 1944년 봄에 걸친 시기이며,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간의 통일 행동의 합의가 이루어지고, 안토네스쿠 세력이 고립되는 시기이다. 제3기는 1944년 봄부터 8월까지로 소련군에 의한 루마니아 해방 과정의 개시와 루마니아 인민의 저항운동이 발전하며 무장투쟁도 전개되기 시작하는 시기다. 이를 통해 안토네스쿠 파시스트 세력의 고립화가 정점이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제4기는 1944년 8월 23일 봉기이며 소련군에 의한 국토 해방의 진전과 결합하여 인민의 반파시즘 민족해방운동이 인민민주주의 혁명으로 성장 전화하여 안토네스쿠 군사 파시스트 독재를 타도하는 데 성공하는 시기다.


1941년 9월 루마니아의 지하 공산당은 “파시스트 점령자와 배신자 안토네스쿠를 비롯환 파시스트 집단에 대한 루마니아 인민의 통일 민족 전선 강령”을 발표했으며, 이 시기 인민의 저항 운동은 인민의 모든 계급과 계층에 걸쳐서 전개됐다. 특히 독일의 전쟁기계를 생산하는 군수공장에서는 공산당원의 주도 아래 특별 사보타지 그룹이 조직됐고, 그들은 항공기 생산을 축소하거나 불량품을 생산했다. 철노 노동자들은 군용 열차를 연착시키거나 정지시키기도 했다. 노동자 파업도 벌어졌는데, 1941년부터 1944년에 걸쳐 183건의 노동쟁의가 일어났고 5만 4,000명 이상이 이 투쟁에 참가했다. 이 중 파업은 39건 정도다.


1943년 2월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계기로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변하자 1943년 6월 루마니아에서는 공산당, 농민 전선, 애국자 동맹, 사회민주당 등이 같이 반히틀러 애국전선을 결성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황이 독일에게 불리해지자, 루마니아 내부에선 안토네스쿠의 친나치 친히틀러적 노선에 의문을 품는 이들이 생겼는데, 이는 한편 좌파세력에 대한 탄압에 대한 그들의 자신감을 흔들리게 했다. 거기다 1943년 독일과 루마니아 사이에 맺어진 경제협정은 독일에 의한 루마니아 경제의 수탈 강화를 불러왔고, 이것은 역으로 반파시즘 진영의 세력 확장에 도움을 줬다.

(게오르기우데지 집권기 나온 노동절 관련 포스터)


1944년 3월 26일 소련 붉은군대 중 하나인 제2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소련-루마니아 국경을 넘어 루마니아로 진입했고, 5월 4일 소련군은 40만 명의 인구와 9,997㎢의 루마니아 영토를 해방했다. 참고로 루마니아는 소련군에 의해 해방된 파시스트 진영 국가들 가운데서 최초였다. 따라서 루마니아에는 강력한 독일 파시스트 군단이 포진해 있었고, 루마니아의 최종적인 전면적 해방은 10월 25일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1944년을 거치며 루마니아 공산당이 강화됐는데, 그해 8월에 옥중에서 운동을 지도하고 있던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Gheorghe Gheorghiu-Dej)와 기타 당 활동가들이 탈주에 성공했다.


이들은 테러로부터 당 조직을 방위하는 데 주의함과 동시에 단기간 내에 모든 당 조직을 재건하고 선전 활동을 강화시키는 한편, 노동자 대중과의 결합을 굳건히 했다. 그와 아울러 군사부를 재편성하고 군대 내에서의 활동을 강화했다. 여러 애국 단체들의 활동을 강화하고 개선시키는 조처들이 취해졌다. 이리하여, 공산당은 당의 통일이 급속히 진전되었으며, 활동이 개선되고 당의 지도적 역할이 고양됐다. 이들은 노동자의 긴급한 요구로써, “8시간 노동제 실현, 급등한 물가 수준에 상응하는 임금의 즉시 인상, 노동조합과 정치단체를 결성할 권리 보장, 언론의 자유, 정치적 신조와 애국 및 반히틀러 투쟁으로 인한 체포자의 즉각적 석방, 노동자 통제하의 사회보장 확립,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실현, 노동자용 저렴한 주택의 실현”등을 내세웠다.


1944년 공산당의 전면적인 활동은 4월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들은 전단 살포, 나치에 복무하는 노동현장 결근, 파업, 사보타지 등을 이용하면서, 무장투쟁도 시작했다. 그 투쟁은 단순히 경제적인 투쟁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요구와 결합됐다. 이와 같은 노동자 계급의 투쟁과 더불어 농민들의 투쟁도 발전했다. 루마니아 농민들은 농산물의 공출거부, 납세거부, 작물의 수확 사보타주, 자신들의 지역에 독일군을 배치하는 조치에 대한 항의 등을 수행했다. 지역에 따라선 독일군에 맞선 농민들의 무장투쟁도 전개됐다. 대학 교수, 기술자, 의사, 작가, 예술가 등 인텔리겐치아도 공산당의 호소에 호응하여 투쟁에 나섰고, 군대 내부에서도 병사와 장교 사이에 동요가 커지면서 탈영이 속출했다. 

(1944년 8월 수도 부쿠레슈티에 입성한 소련군 탱크)


1944년 초 소련의 원조를 받아 루마니아 국내 공산당 지도하에 빨치산이 조직되고, 이들은 나치 독일과 루마니아 파시즘 세력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참고로 1943년 10월 소련군의 원조를 받아 루마니아 인민군이 편성됐는데, 이는 루마니아 망명자와 포로 중의 지원자들에 의해 편성되었으며, 총 병력은 9,589명에 달했다. 이 병력은 제1 루마니아 의용 사단으로 불렸다. 이들은 소련군과 공동으로 전선에서 전투에 참가했다. 1945년 3월에는 제2 루마니아 의용 사단이 편성됐는데, 이들의 경우 실전에 참가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1944년 6월 15일 기준으로 보자면, 루마니아에는 대략 6만 명의 독일군 병력이 주둔했다. 루마니아 공산당은 1943년 봄에 무장 봉기 준비를 결정했는데, 실행은 1944년 8월에 이르러서였다. 


1944년 8월 5일 루마니아 파시스트인 안토네스쿠는 히틀러와 회담하여 독일군과 운명을 같이 할 것을 맹세했다. 그로부터 15일 후인 8월 20일 소련군의 진격이 다시 강화됐으며, 대규모 봉기를 결정한 공산당은 23일 국왕에게 안토네스쿠를 포함한 파시스트 각료를 체포할 것을 결의했고, 이에 따라 안토네스쿠를 포함한 파시스트들이 체포됐다. 파시스트 정부 각료가 체포되었다는 정보에 따라 봉기 세력들은 독일군 기관과 부대를 점거하고 있는 건물을 탈취했으며, 파시스트 군대에게 항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독일군은 다음 날인 24일 수도 부쿠레슈티를 폭격하면서 역습을 시도했다. 그러나 4일 뒤인 28일 부쿠레슈티의 독일군은 섬멸됐다.

(사회주의 시절 루마니아에서 나온 해방기념일 포스터)


1944년 8월 24일부터 28일까지 부쿠레슈티에서 발생한 시가전을 포함하여 여러 전투에서 루마니아군과 공산당이 주도한 무장 애국대는 독일군 장군 14명, 장교 1,200명 이상을 포함한 53,159명을 포로로 붙잡은 것으로 추정되며, 8월 31일 소련군과 루마니아 제1의용사단은 인민의 손으로 해방된 수도 부쿠레슈티에 입성했다. 이후 루마니아군과 소련군은 공동작전을 벌여 10월 25일 특히 전투가 격렬했던 북부 트란실바니아를 포함한 전전의 루마니아 전영토를 해방했다. 이후 루마니아군은 반파시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특히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의 해방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1944년 국토가 해방된 이후 루마니아에서는 전후재건과 인민민주주의 정권 수립의 길로 들어섰다. 1946년 11월 19일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공산당, 사회 민주당, 자유당 분파, 농민 전선, 민족 인민당(애국자 동맹)은 통일 블록을 조직하고 격심한 선거전을 전개했다. 선거 결과에서 통일 블록은 유효 투표의 71.8%, 총 의석 414석 가운데 347석을 획득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 민족 농민당은 33석, 자유당은 3석의 의석밖에 획득하지 못했다. 이후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가 집권했으며, 공산당은 1947년 말 당원 수 80만 명에 달하는 국내 최대의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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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역사상 최초로 가장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한 대규모 전쟁이었다. 4년간 치러진 이 전쟁으로 1,000만 명이 죽고, 2,000만 명이 부상당했다. 총 3,000만 명의 사상자가 이 전쟁에서 나왔다. 흥미롭게도 러시아는 이 전쟁에서 빠지게 됐는데, 이는 1917년에 발생한 러시아 혁명의 여파 때문이었다. 19세기부터 낙후된 농업 국가였던 러시아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 전쟁 초기 독일은 슐리펜계획에 따라 대부분 병력을 서부전선에 투입했으나, 예상외로 잘 버틴 프랑스와 영국에 의해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짐으로써, 전쟁은 4년간이나 지속됐다. 


러시아군은 수적으로는 우세했으나,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적잖은 패전을 거듭했다. 1915년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은 수적으로 불리했음에도 동부전선에서 유리한 전세를 잡았으며, 1914년에서 1917년까지 러시아군은 총 200만 명이 전사하고 또 다른 200~300만 명이 부상당했다. 총 500만 명의 사상자가 속출한 것이다. 그러나 1917년에 시작된 2월 혁명은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렸고, 러시아는 점차 전쟁을 수행하지 않는 쪽으로 가게 됐다. 특히나 1917년 레닌과 볼셰비키가 주도한 10월 혁명은 인류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를 등장시켰고, 소비에트 러시아를 건설한 레닌은 “즉각적인 전쟁 중단!”을 외쳤다.

(아르헨겔스크에 상륙했던 미군 사진, 성조기를 들고서 이렇게 기념 사진도 찍었었다.)


1918년 3월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으려 했던 소비에트 정권은 단독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독일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체결은 러시아가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해서 제1차 세계대전을 진행중이던 영국·프랑스·미국·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들이 소비에트 러시아를 침공하며 백군을 지원했는데, 이렇게 해서 발발한 것이 바로 적백내전(Russian Civil War)이었다. 적백내전은 사회주의 혁명을 수호하려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이에 맞서는 차리즘 복권 세력 간의 전쟁이었다. 볼셰비키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근본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었고, 제국주의 열강들의 불법 침공이었다.


1918년에 시작된 내전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백군 세력·체코 군단·영국·미국·프랑스·일본·폴란드·그리스·에스토니아·이탈리아로 구성된 반란군 및 침략군대를 무찔렀고, 1920년에서 1921년 사이에 승기를 잡았으며, 궁극적으로 내전에서 승리를 쟁취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미국은 적백내전에 병력을 보냈다. 그 이유는 바로 미국이 적색공포에 빠졌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미국 내에서 이른바 좌파 색출작업을 단행했는데, 그 결과 적잖은 좌파 운동가들이 감옥에 갔으며, 미국 내에서의 반공주의 정서가 극심해졌다. 우드로 윌슨 정부는 1918년 러시아에 미군을 보냈다. 말 그대로 혁명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침략군을 보낸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된 간섭군들, 열병식을 하는 이들 중에는 미군들도 있었다.)


윌슨 정부는 총 13,000명 정도의 미군을 러시아에 보냈다. 1918년 9월 러시아 북부에 있는 아르헨겔스크와 극동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미군 병력이 상륙했으며, 이들의 임무는 러시아 백군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13,000명의 미군 병력 중 5,000명은 아르헨겔스크에 주둔했고, 나머지 8,000명은 극동지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러시아로 파견된 미군들 또한 전투를 치렀다. 1918년 10월 붉은 군대는 미군을 공격하여 적잖은 사상자를 안겨주기도 했는데, 미군들은 아르헨겔스크에서 전투에 투입됐던 병력의 10% 정도를 잃었다. 총 110명의 미군이 전사했고, 30명이 실종되었으며, 또 다른 70명은 당시 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2021년 프랑스에서 나온 르몽드 기사에 따르면, 부상당한 미군은 눈보라치는 숲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다 얼어 죽었고, “그해 가을과 겨울 미군은 이미 끝난 전쟁에서 미국 정부에 의해 잘못된 길로 들어섰고 장교들에게 속고 동맹국에 혹사당했으며, 적과 싸우기에는 태부족이었다.”

(아르헨겔스크에 배치된 미군 사진)


아르헨겔스크에 배치된 미군 대다수는 흥미롭게도 겨울 날씨에 잘 버티는 미시간 출신의 병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미군 지휘관들은 이들이 아르헨겔스크의 추운 겨울을 잘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들은 배치되기 전 영국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당시 이들이 받았던 훈련 중에는 영하 기온에서 버티는 방법도 있었으며, 이걸 교육한 사람은 남극을 탐험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 탐험가 에르네스트 섀클턴(Ernest Shackleton)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또한, 아르헨겔스크에서의 군생활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들 중 하나였던 헨켈맨과 3명의 병사는 연대장에게 최후통첩을 썼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919년 3월 15일까지 전선에서 철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러시아 적군들과 싸우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둔다.”

(미국에서 만든 시베리아 파병 미군 병사 관련 프로파간다, 이 프로파간다는 시베리아에 있는 미군들 지원하기 위해 전쟁우표를 살 것을 요청하고 있다.)


소비에트의 붉은 군대는 1919년 1월에 아르헨겔스크에 있는 미군을 몰아내기 위한 공세를 게시했다. 7일간의 공세 기간 동안 미군 병력은 8 대 1이라는 수적 열세에 처해 있었고, 이 미군들은 바가 강을 포함하여 지키고 있던 여러 곳에서 북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볼셰비키의 점진적인 공세는 5월에도 지속됐고, 미군은 1919년 6월 15일 아르헨겔스크에서 철수를 마쳤다. 아르헨겔스크에서 9개월간 주둔했던 미군은 총 235명이 전사했다. 그러나 윌슨은 시베리아 지역에서 미군을 주둔하며 백군을 지원하고자 했다. 


2019년 스미소니언 매거진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당시 시베리아에 주둔 중이던 콜차크 제독의 백군들은 점령한 지역에서 백색테러를 했다고 한다. 대량 처형이나 고문 등이 대표적이었으며, 기사에 따르면 “코사크 장군 출신인 그리고리 세메뇨프(Grigori Semenov)나 이반 칼미노프(Ivan Kalmikov)가 지휘하는 백군 병사들은 일본군의 비호하에 점령한 지역과 마을을 배회하며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일각에서는 당시 미군들이 백군 세력을 도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주민들을 학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1920년 1월 우드로 윌슨 정부가 시베리아에서의 철군을 결정하면서, 미군은 4월 1일에 철수를 완료했다. 시베리아에 있던 미군 병력은 전사자 189명을 남긴 채 철수했다.

(현재 러시아 아르헨겔스크에 있는 간섭군대 관련 묘비)


적백내전기 미군 전사자 숫자는 344명에서 424명 정도로 추정되며, 부상자도 최소 300명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적백내전기 미군의 파병은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적백내전은 볼셰비키 세력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이다. 1921년 내전에서 승리한 볼셰비키는 1922년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USSR) 즉, 소련(Soviet Union)이라는 나라를 탄생시켰다. 적백내전 또한 제1차 세계대전 만큼이나 참혹했다. 대략 1,000~1,200만 명이나 되는 인명이 사망했는데, 1921년에서 1922년에 강타한 기근으로 최소 500만 명이 아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군인 전사자도 100만 명을 넘었다. 이러한 숫자를 보더라도 제1차 세계대전 못지 않게 참혹한 전쟁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놀랍게도 이 내전의 존재를 아는 유럽인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서양 현대사마저도 루소포비아적 시각에서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문헌


단행본

쉴라피츠패트릭, 고광열 옮김, 『러시아 혁명 1917-1938』, 사계절, 2017.

R.B 에스프레이, 편집부 옮김, 『세계게릴라전사 1』, 일월서각, 1993.


기사

마이클 M.필립, “볼셰비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미군들”, 르몽드, 2021.07.30.,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4830>.

Blake Stilwell, “The United States' Invasion of Russia Was a Yearlong Freezing Hell for the Troops”, Military.com, 2022.06.28.,

<https://www.military.com/history/united-states-invasion-of-russia-was-yearlong-freezing-hell-troops.html>.

Erick Trickey, “The Forgotten Story of the American Troops Who Got Caught Up in the Russian Civil War - Even after the armistice was signed ending World War I, the doughboys clashed with Russian forces 100 years ago”, Smithsonian Magazine, 2019.02.12., <https://www.smithsonianmag.com/history/forgotten-doughboys-who-died-fighting-russian-civil-war-180971470/>.


인터넷 사이트

https://en.wikipedia.org/wiki/Allied_intervention_in_the_Russian_Civil_War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1650&code=kc_age_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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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2018년 12월이나 2019년 1월이었던 것 같다. 당시 페북으로 연락하던 한 페친과 처음 오프라인에서 만났다. 페친과 만난 나는 같이 집회에 참여했으며, 같은 역사 전공자로서 한국 현대사 관련 얘기를 나눴다. 이때, 나무위키의 친미 극우 반공주의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는데, 페친이 소위 한국 건군의 아버지로 알려진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usman)이 “한국인은 일본인보다 더한 야비한 새X들이다!”라고 말한 것을 나무위키는 절대 언급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제임스 하우스만의 존재를 알게 됐다.

(제임스 하우스만의 사진, 하우스만은 이후 1990년대 KBS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내가 제임스 하우스만의 존재에 보다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김득중의 박사학위논문인 저서 『빨갱이의 탄생』을 읽게 되면서였다. 김득중의 논문에는 “미군고문단이 여순항쟁에 군사작전상으로 개입한 사실”이 상세히 나와 있었고, 거기서 다시 한번 제임스 하우스만에 대해 제법 상세히 알게 됐다. 글쓴이는 지난번 허호준의 저서 『4.3, 미국에 묻다』를 완독하면서, 미군사고문단이 4.3에 어떻게 개입하여 학살에 관여했는지를 얘기한 적이 있다. 오늘은 한국 현대사에서 제임스 하우스만의 역할이 어떤 것이었는지 얘기해보고자 한다.


제임스 하우스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장교로 참전했고, 1944년 히틀러의 마지막 공세로 알려진 벌지 전투(Battle of Bulge)에도 참전했던 인물이었다. 하우스만은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지 1년 후인 1946년에 한국으로 파견된 인물이다. 하우스만은 조선경비대를 창설하는 것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춘천8연대에 배치되어 연대를 훈련 및 조직하고,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베로스(Russel D.Barros) 대령의 보좌관역할을 수행했다. 해방 이후 당시 이남의 군병력과 경찰의 지휘체계는 일본 육사출신이나 만주군 출신 그리고 친일경찰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하우스만은 광복군 출신들을 상당히 무시했으며, 그 이유에는 “광복군 출신들이 일본군 출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산주의자를 덜 적대했다.”는 데에 있었다. 하우스만에게 있어서 마음에 차고 안차고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반공 이데올로기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통령,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미고문단장 등이 참여하는 군사안전위원회에 참가했다. 하우스만은 군사고문단장과 국군 참모총장 사이의 연락 임무를 맡았으며, 이승만은 “군대에서 당신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나에게 알려 달라, 그를 교체하겠다”라고 할 만큼 제임스 하우스만을 신뢰했다. 제임스 하우스만의 개입이 가장 두드러진 역사적인 사건은 바로 여순항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 4.3과 더불어 여순에서 토벌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한 주체가 미국이었음을 지금까지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하우스만 사망을 보도한 국내 기사, 마치 한국의 군사전문가로만 소개가 됐다.)


여순항쟁은 1948년 10월 19일 한국군 제14연대와 제6연대의 일부가 진압을 거부하면서 일으킨 봉기였다. 이승만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토벌대를 동원했으며, 그 과정에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다. 당시 이승만이 보낸 토벌대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이 현재까지 발견된 시신만 3,384명이지만, 실제 사망자는 12,000명이라는 추산치가 있을 정도다. 김득중에 따르면, 여순항쟁 당시 미국은 정규부대를 투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신 고문단이 들어갔고, 이들은 사실상 진압군의 지휘관이자, 한국군 장교들과 장성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었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모든 한국군 부대에 미국인 고문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인사는 진압작전의 주요 고문으로 임명된 할리 풀러 대령과 군사고문단 G-3의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 미군 정보부 G-2의 존 리드 대위였다. 여순항쟁 당시 미군은 C-47 수송기를 동원해 한국군 병력과 무기 및 기타 장비를 실어 날랐고, 군사고문단의 정찰기들은 반란이 이어지는 기간 내내 그 지역을 감시했으며, 미국 정보기관들은 미군과 경무부의 정보과에 긴밀히 협력했다. 김득중에 따르면, 당시 하우스만은 토벌대 총사령관인 송호성을 보좌하는 군사고문으로 여순에 파견됐다. 하우스만은 이후 KBS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송호성의 명령에 반하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고문관의 역할을 했다”고 했으며, 하우스만은 여순항쟁 진압을 위한 작전계획을 백선엽과 협의하여 수립했다. 즉, 여순항쟁에서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나온 것은 제임스 하우스만이 세운 군사작전 때문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우스만에 대해 강연을 했던 역사강사 배기성)


실제로 제임스 하우스만은 1949년 1월 10일 미 국방부로부터 미 공로훈장을 수여 받았다. 이 훈장은 은성무공훈장 바로 아래의 4번째 서열에 해당하는 훈장이었는데, 전시가 아닌 평시에 보충역 대위에게 이런 훈장이 주어진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에 따라 김득중의 경우 여순항쟁 당시 미군이 남한 상황을 전시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봤다. 1948년 11월 20일, 총 99명의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미군 주둔에 관한 결의안’을 발의했는데, 이 결의안을 주도한 최윤동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미군은 여수순천 반란과 대구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만약 미군이 없었더라면 국군은 전멸당했을 것이다.”

(여순항쟁 당시 작전을 지휘하는 미군고문단과 한국군)


이런 점에 근거하여 보자면, 여순항쟁에 개입하여 총사령관 이상의 역할을 맡은 제임스 하우스만은 학살의 방조자이자 진정한 수행자였다. 또한, 이 사건에서 남로당이었던 박정희를 살려준 인물이기도 했다. 참고로 하우스만은 일제 간도특설대 출신인 김창룡을 신임한 인물이기도 했다. 김창룡은 한국전쟁 당시 서울 수복 이후 부역자 색출이라는 미명하에 대량의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김창룡은 하우스만에게도 직접 보고하며, 전쟁 이전 군 내부에 침투한 빨갱이 사냥을 자행했다. 2014년에 작성된 제주 언론사 『제주의 소리』 기사에 따르면, 제임스 하우스만은 한국전쟁 당시 한강 다리 폭파에도 책임이 있었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한강교 폭파의 진짜 명령자는 누구인가? 당시 참모부장이었던 김백일은 하우스만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사실상 하우스만이 미군 최고 책임자였다. 하우스만이 한강교를 건너자마자 다리는 폭파되었는데, 하우스만이 단지 행운아였기 때문일까? 지금까지 한강다리 폭파는 육참총장 채병덕- 참모부장 김백일-공병감 최창식-공병학교장 엄홍섭 선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윤영 당시 사회부장관은 회고록에서 "26일 심야 국무회의에서 이범석 국무총리가 처음으로 제안, 이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말씀드렸다"고 밝혀 한강교 폭파가 참모총장보다 윗선에서 결정됐음을 시사했다.”


이 기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임스 하우스만은 한강다리를 폭파한 실질적인 주동자였다고 할 수 있다. 하우스만은 이후에도 46년간이나 한국에 있으면서 한국 현대사의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하우스만은 제주 4.3 항쟁 당시 진압군 지휘관이던 송요찬의 고문이었다. 하우스만은 3.15 부정선거 이후 반이승만 시위가 일어나자, 계엄사령관으로서 송요찬을 통해 미국의지지 철회를 통고했다. 그렇다고 해서 하우스만이 민주주의적 신념이 있는 사람으로 절대 볼 수 없다. 그 증거는 아래 하우스만의 발언을 통해 확인된다.


“우리에게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룬다는 환상이란 없었다. 초보자들에게는 너그러운 독재자가 필요할 것이다.”


참고로 하우스만은 제주 4.3의 현장에도 있었다. 당시,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좌익 문상길이 처형당하자, 처형대에 다가가 그 시체의 머리에 권총을 한 번 더 발사한 인물이 제임스 하우스만이었다. 이후 제주도 시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총살하고 그것을 녹화해 훈련용 교재로 활용한 인물이 하우스만이었으며, 제주도 시민 20여명의 총살을 지시한 일에 대해 문책하던 미국 대사에게 하우스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몇 개 월 전에는 민간인 200명 죽이는 것도 보통이었는데 20명 죽인 것이 무슨 문제냐!”

(김득중의 박사학위논문인 저서 『빨갱이의 탄생』, 이 책은 여순항쟁을 분석한 책으로 당시 미군의 개입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여순에서의 민간인 학살 또한 사실은 미국이 자행한 학살임을 알 수 있는 책이다.)


앞서 언급한 인용문을 보면 하우스만은 ‘너그러운 독재자’라 표현했다. 그러나 하우스만이 지원한 한국의 독재자들은 너그러운 독재자가 전혀 아니었으며, 가난한 빈민들을 챙기는 독재자 또한 전혀 아니었다. 이들은 분배와 빈민 해결보단 성장과 재벌 계급의 부의 축적을 우선시했다. 따라서 하우스만이 얘기한 너그러운 독재자들은 실제로 보자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치인이었을 뿐이다. 박정희 또한 5.16을 하기 전 군부 내 쿠데타 기도를 파악한 하우스만의 집에 찾아가 상황을 전했고, 하우스만은 자진에서 미국으로 날아가, 미 육군 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무성, CIA에 박정희와 한국 상황에 대해 브리핑했다. 그 결과 하우스만은 박정희에 대한 훌륭한 정보를 제공한 보답으로 미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공로표창을 받았다.


제임스 하우스만이 한국을 떠난 것은 1981년이다. 지난 2023년 말 국내에서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하면서, 젊은이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한가지 품은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의 개입이다. ‘서울의 봄’은 훌륭한 영화였지만, 아쉽게도 미국의 개입은 전혀 조명하지 못했다. 글쓴이는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굴곡에 있던 하우스만의 입김이 12.12에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제임스 하우스만은 앞으로도 연구가 많이 되어야할 한국 현대사 주제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 선인, 2009.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옮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현실문화, 2017.


A.B. 에이브람스, 박현주 옮김, 『끝나지 않은 전쟁 I – 북미 대결 70년사』, 민플러스, 2022.


김관후, ‘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미국인’, 제주의 소리, 2014.12.26.,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56322>.


https://ko.wikipedia.org/wiki/제임스_하우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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